STEP 10: TTS 대본
Writer · 버전 1 · 초안
산출물 (v1)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립니다.
스윽, 스윽. 질질 끌리는 발소리가 엄숙한 장례식장에 기괴하게 울려 퍼집니다.
피 묻은 발자국이 왕의 관을 향해 다가갑니다.
챙. 근위병들이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멈춰라. 미친 여자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하지만 여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머리는 산발이고, 발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약병 하나가 들려 있었지요.
멈추시오. 이 관은 나갈 수 없습니다.
내가 살릴 것이오.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습니다.
관 속에 누운 왕이 십오 년 전 강물에 버린 핏덩이가, 바로 저 여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간을 십오 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왕비의 산실청 앞.
타닥, 타닥.
왕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습니다.
벌써 여섯 번이나 딸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르겠지. 이번에는 반드시 세자여야 한다.
으앙. 아기 울음소리가 터졌습니다.
왕이 벌컥 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산파는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또 딸이었습니다. 일곱 번째 딸.
쾅. 왕이 찻잔을 집어 던졌습니다.
내 귀가 잘못된 것이냐.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이냐.
갓 태어난 아기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왕의 눈에는 핏발만 서 있었습니다.
꼴도 보기 싫다. 당장 내다 버려라.
왕비가 왕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습니다.
전하, 천륜입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왕비의 눈물이 바닥을 적셨지만 왕은 매정했지요.
옥으로 만든 상자, 옥함.
그 안에 핏덩이를 넣었습니다.
왕이 차갑게 덧붙였습니다.
물이 새지 않게 하여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멀리 띄워라.
그렇게 아기는 이름도 없었습니다.
버리데기라는 글자만 새겨진 채, 차가운 강물에 던져졌습니다.
철썩. 그 물소리가 아기의 유일한 자장가였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아이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출렁, 출렁.
옥함은 거친 물살을 타고 흘러 산기슭에 닿았습니다.
그곳에는 자식 없는 노부부가 살고 있었지요.
이게 웬 옥함인고.
뚜껑을 열자 방긋 웃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노부부는 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하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가 키우자.
그렇게 바리는 산골 소녀로 자랐습니다.
비단옷 대신 무명옷을 입고 궁궐 반찬 대신 나물을 먹었지만,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바리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할아범이 짚을 한 움큼 가져왔습니다.
사각사각.
거친 손으로 밤새 짚신 한 켤레를 엮어주었지요.
아가, 생일 선물이다. 발 시리지 않게 신고 다녀라.
투박하고 거친 신발이었지만, 바리는 그 신발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훗날 이 짚신이 그녀의 목숨줄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죠.
하지만 바리의 눈은 가끔 먼 곳을 향했습니다.
휘이잉. 바람이 부는 강 건너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지요.
노부부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래서 옥함을 깊이 숨기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왔단다.
첫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상처 주지 않으려는 착한 거짓말이었지요.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산골과 달리 궁궐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덮쳤습니다.
쿵. 오구대왕이 쓰러졌습니다. 왕비도 함께 쓰러졌지요.
원인 모를 괴질이었습니다.
온몸이 불덩이 같고 헛것이 보였습니다.
콜록, 콜록. 기침할 때마다 핏덩이가 튀었습니다.
무당이 신탁을 내렸습니다.
서천서역국, 저승의 약수만이 살길입니다.
하지만 저승이 어디입니까.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 죽어야만 가는 곳이 아닙니까.
왕은 여섯 딸을 불렀습니다.
금지옥엽이라며 비단옷 입히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키운 공주들이었지요.
누가 아비를 위해 약수를 구해오겠느냐.
침묵이 흘렀습니다.
사락사락. 비단옷 스치는 소리만 요란했습니다.
첫째가 입을 열었습니다.
전하, 저는 곧 혼례를 치러야 합니다.
둘째는 아이가 젖을 떼지 못했다며 말을 잘랐습니다.
셋째는 무섭다며 울음을 터뜨리고, 넷째와 다섯째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지요.
여섯째마저 고개를 홱 돌려버렸습니다.
언니들도 안 가는데 왜 저만 가야 합니까.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왕이 내린 비단옷은 화려했지만 그 속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왕은 가슴을 쳤습니다.
자식 농사 헛지었구나.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그때 늙은 신하가 엎드려 말했습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였습니다.
전하. 십오 년 전 버리신 아이를 찾아보심이 어떠할지요.
왕의 눈이 커졌습니다.
강물에 버린 그 핏덩이. 죽은 줄만 알았던 일곱째.
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신하들이 산골을 뒤져 바리를 찾아냈습니다.
네가 공주다. 부모님이 위독하시다.
바리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있다니. 그런데 그 부모가 죽어간다니.
바리는 멍하니 할아범이 준 짚신만 내려다보았습니다.
바리는 궁으로 향했습니다.
십오 년 만의 재회였습니다.
병든 왕은 바리의 남루한 행색을 보고 혀를 찼습니다.
미안함보다는 체면이 먼저였던 겁니다.
툭. 왕이 화려한 비단신을 던져주었습니다.
그 더러운 것은 벗고 이걸 신거라. 공주가 신을 신발이 아니다.
바리는 비단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발에 신겨진 낡은 짚신을 보았습니다.
바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이 짚신이 편합니다.
왕이 당황하여 눈을 껌벅였습니다.
바리는 짚신 끈을 질끈 동여매었습니다.
할아범이 엮어준 신입니다. 저를 키워준 분들의 마음이 담긴 신입니다.
바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버님이 저를 버린 건 아버님의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버님을 살리러 가는 건 제 선택입니다.
그렇게 작은 소녀는 죽음의 길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저승 가는 길.
첫 번째 관문은 칼날산이었습니다.
뾰족한 칼들이 산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비릿한 쇠 냄새와 피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바리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습니다.
서걱. 짚신 밑창이 단번에 잘려 나갔습니다.
한 발. 또 한 발.
살이 찢어지고 피가 배어 나왔습니다.
뚝, 뚝. 붉은 핏방울이 칼날 위에 떨어졌습니다.
발바닥이 불타는 것 같았지만 바리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습니다.
부모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산을 넘자 이번에는 강이 앞을 막았습니다.
물이 아니었습니다.
화르륵, 화르륵.
시뻘건 불길이 흐르는 불의 강이었습니다.
열기가 눈썹을 태울 듯 뜨거웠습니다.
강물 속에서는 원귀들이 손을 뻗으며 속삭였습니다.
웅웅. 돌아가라. 너를 버린 부모다. 왜 네가 고통받느냐.
바리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원망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때 발에 닿는 짚신의 까칠한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다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진 신발.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노부부의 따뜻한 손길이 기억났습니다.
사랑받은 기억이 있다. 나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다.
바리는 눈을 질끈 감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불의 강을 건너자 거대한 그림자가 앞을 막아섰습니다.
쿵, 쿵. 땅이 울렸습니다.
저승의 문지기, 무장승이었습니다.
그는 바위 같은 몸으로 바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산 자는 지나갈 수 없다. 약수를 원한다면 대가를 치러라.
바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이었으니까요.
무장승이 말했습니다.
나무 삼 년, 불 삼 년, 물 삼 년.
도합 구 년을 일해라. 그게 약수 값이다.
구 년. 부모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구 년이라니.
하지만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바리의 손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쩍, 쩍.
첫해에는 나무를 하다 손톱이 빠졌습니다.
이듬해에는 불을 때다 눈썹이 다 탔지요.
물을 길을 때마다 어깨가 내려앉고 고운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거칠어졌습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나고 또 삼 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무장승이 물었습니다.
힘들지 않느냐. 원망스럽지 않느냐.
바리는 치마폭으로 자신의 발을 가렸습니다.
피가 멈추지 않는 발, 뼈가 하얗게 드러난 발뒤꿈치를 숨겼습니다.
견딜 만합니다. 기다려주실 겁니다.
두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자신을 버티게 하는 아픈 거짓말이었습니다.
드디어 구 년이 지났습니다.
무장승은 약속대로 약수병을 내주었습니다.
바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습니다.
타다닥, 타다닥.
숨이 턱 끝까지 찼습니다.
십오 년의 세월, 그리고 저승에서의 구 년.
무려 이십사 년 만의 귀환이었습니다.
살릴 수 있다. 이제 다 왔다.
저 멀리 궁궐의 지붕이 보였습니다.
바리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습니다.
할아범이 준 짚신은 이미 다 닳아 없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맨발로 바리는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뎅, 뎅.
궁궐 쪽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곡소리가 담장을 넘어왔습니다.
바리의 발걸음이 뚝, 멈췄습니다.
약수병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늦었구나. 내 구 년이, 내 피땀이 헛되었구나.
바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철퍼덕. 희망이 가장 큰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니, 아직 아닙니다.
바리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관 뚜껑이 닫히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바리는 장례 행렬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들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보았던 그 장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병사들이 칼을 겨누던 바로 그 순간입니다.
끼이익.
바리는 기어이 관 뚜껑을 열었습니다.
왕의 얼굴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지요.
제발, 제발.
바리는 떨리는 손으로 약수를 왕의 입술에 흘려넣었습니다.
한 방울. 두 방울.
꿀꺽. 목울대가 움직였습니다.
허억.
왕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죽었던 왕이 핏기가 돌며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이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왕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눈앞에 있는 거지꼴을 한 여인뿐이었습니다.
왕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습니다.
여인의 발.
짚신조차 없이 상처와 굳은살로 뒤덮인 맨발.
발톱은 빠져 있고 발바닥은 숯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그 발.
왕은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이 아이가 누구인지. 이 발이 무엇을 말하는지.
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락.
자신이 입고 있던 붉은 곤룡포를 벗었습니다.
왕의 상징, 권력의 상징인 그 옷을 벗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바리의 더러운 맨발을 감싸 안았습니다.
신하들이 말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왕은 바리의 발을 끌어안고 오열했습니다.
으흐흑. 내가, 내가 널 버렸는데.
왕의 눈물이 바리의 발등에 떨어졌습니다.
어찌 이 발이 되도록, 어찌 나 같은 것을 살리러 왔느냐.
바리가 숨겨왔던 고통, 그 마지막 거짓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왕의 권위는 무너졌고 아버지의 참회만 남았습니다.
바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아버님.
처음 불러보는 이름이었습니다.
아버님이 저를 버린 건 아버님의 뜻이었으나, 제가 아버님을 살린 건 제 선택이었습니다.
이것이 제 복수이자 제 효입니다.
왕과 왕비는 살아났습니다.
왕은 바리에게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는 이승의 부귀영화가 필요 없습니다.
바리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 저승과 이승의 경계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무당, 만신이 되겠다는 것이었지요.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리가 떠난 길 위로 붉은 꽃이 피어났습니다.
피 묻은 발자국마다 피어난 상사화였습니다.
바리공주.
버림받았으나 원망을 버리고 스스로를 구원한 이름.
용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오늘 바리공주의 이야기, 어떠셨나요.
가슴 한구석에 묻어둔 미움이 있다면 오늘 바리의 꽃처럼 놓아주는 건 어떨까요.
이 이야기가 마음에 남으셨다면 화면 아래 빨간 버튼 한 번만 꾹 눌러주세요.
다음 이야기를 바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며느리의 밥상을 걷어찬 시어머니의 충격적인 최후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오늘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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