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10: TTS 대본
Writer · 버전 1 · 초안
산출물 (v1)
"먹고 싶은가."
마일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아흔아홉 칸 기와집의 주인, 최 부자.
그가 지금, 비 내리는 처마 밑 진흙탕에 개처럼 엎드려 있습니다.
빗물이 다 해진 누더기를 때릴 때마다, 짐승의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덜덜 떨리는 앙상한 손은, 눈앞에 놓인 쉰내 나는 밥그릇을 향해 미친 듯이 기어가고 있습니다.
"그럼 붓을 드시게."
잠시, 숨 막히는 정적이 흐릅니다.
머리 위로 먹물이 툭 떨어지는 붓자루가 던져집니다.
평생 글 읽는 선비들을 벌레 보듯 짓밟고 조롱했던 천석꾼 양반.
그는 왜 다 해진 누더기를 입고, 세상에서 가장 마주치기 싫었던 원수 앞에서 밥을 구걸하고 있는 걸까요.
빗소리가 서서히 멎고, 눈부신 햇살이 쏟아집니다.
사각사각. 질 좋은 비단옷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돕니다.
수십 년 전, 최 부자는 원래부터 이런 비참한 꼴이 아니었습니다.
아흔아홉 칸짜리 고대광실.
처마 끝에서는 항상 기름진 고기 굽는 누린내가 진동했거든요.
밥상에 반찬이 열두 가지가 안 되면, 우당탕 상을 엎어버리던 마을 제일의 천석꾼이었습니다.
두툼하게 늘어진 이중턱을 쓰다듬으며, 그는 마루에 비스듬히 누워 배를 두드립니다.
그런데 이 교만한 부자에게는 은밀한 응어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곳간에 쌀가마니는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정작 머릿속에는 든 것이 하나도 없는 까막눈이었지요.
돈으로 양반 신분은 샀습니다.
하지만 글자 하나 읽지 못하는 뼛속 깊은 열등감은 매일 밤 그를 괴롭혔습니다.
어느 날, 이웃 마을에서 한자가 잔뜩 적힌 서찰이 날아왔습니다.
노비가 머리를 조아리며 편지를 내밀었지요.
최 부자는 편지를 덥석 받아 들고는 눈을 가늘게 뜹니다.
스윽. 편지가 위아래로 거꾸로 들려 있습니다.
그는 얼른 종이를 바로잡으며 굵은 가래를 끌어올립니다.
"에헴. 에헤엠. 어디 감히 이런 조잡한 글씨로 내 눈을 어지럽히느냐."
내용은 읽지도 않은 채 편지를 마당으로 휙 던져버립니다.
자신의 빈약한 속을 감추기 위해 겉을 더 사납게 부풀렸거든요.
이 숨기고 싶은 지독한 부끄러움은, 곧 선비들을 향한 비뚤어진 폭력으로 터져 나옵니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담장 너머 김 진사의 낡은 서당에서 아이들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최 부자는 인상을 팍 구깁니다.
"에잉, 시끄러워. 저 가난한 선비 놈들 배곯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
바닥에 탁, 굵은 침을 뱉습니다.
그러던 어느 오후.
마을 길을 걷던 최 부자의 발걸음이 우뚝 멈춥니다.
품에 낡은 책을 꼭 안고 종종걸음 치는 서당 아이와 마주친 겁니다.
"네 이놈. 그 더러운 책이 무엇이냐."
그는 다짜고짜 아이의 품에서 책을 낚아챕니다.
아이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하지만 최 부자는 아랑곳하지 않지요.
"이깟 먹물 묻은 종이 쪼가리가 밥을 먹여주더냐."
그는 책을 진흙탕 바닥에 냅다 패대기칩니다.
철푸덕. 맑은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책이 처박힙니다.
그리고는 두툼한 짚신 바닥으로 그 책을 질겅질겅 짓밟아버립니다.
표지에 시커먼 진흙 자국이 흉측하게 들러붙습니다.
아이는 으앙 울음을 터뜨리지만, 최 부자는 껄껄 웃으며 뒷짐을 지고 멀어집니다.
최 부자의 폭주는 멈추지 않습니다.
며칠 뒤, 아침 일찍부터 서당 앞이 요란합니다.
쿵쾅쿵쾅. 수십 명의 일꾼이 커다란 돌덩이를 나릅니다.
최 부자가 자신의 집과 서당 사이에 흉물스러운 거대 돌담을 쌓아 올린 겁니다.
"더 높이. 저 서당 놈들 정수리도 안 보이게 아주 꽉 막아버려라."
돌담이 하늘을 가리자, 낡은 서당 마루에는 햇빛조차 들지 않습니다.
서늘한 칡차 냄새만 맴도는 그 어두운 방.
김 진사는 그저 말없이 눈을 감고 먹을 갈 뿐입니다.
최 부자는 새로 쌓은 담장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섭니다.
자신의 무식이 들통날까 봐, 글을 읽는 자들을 아예 시야에서 지워버린 것이지요.
남이 글씨가 적힌 종이를 가져오면, 무조건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세 번 내뱉습니다.
"에헴. 에헴. 천것들이 어디 감히."
이 가짜 헛기침 소리는, 훗날 자신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른 어느 늦은 오후.
조용하던 마을 어귀가 웅성거립니다.
짤랑, 짤랑.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머니에서 요란한 엽전 부딪히는 소리가 납니다.
은장식이 번쩍이는 화려한 가마 한 대가 삐걱거리며 최 부자의 대문 앞에 멈춰 섭니다.
가마 문이 열리고, 기름을 발라 넘긴 상투의 사내가 내립니다.
향나무 부채를 든 한양 사기꾼, 조 생원이었지요.
뱀 허물처럼 자글자글하게 접히는 눈가.
그는 부잣집의 기와지붕을 훑어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립니다.
가장 돈이 많고, 가장 무식한 사냥감을 드디어 찾아낸 것입니다.
"아이고, 대감마님. 이 조선 팔도에서 어르신 안목을 따라올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요."
조 생원의 혀는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습니다.
최 부자는 사랑채 상석에 앉아 거드름을 피웁니다.
찰칵. 조 생원이 향나무 부채를 접으며 다가앉습니다.
그의 소맷자락에서 누런 장지 한 장이 스르륵 나옵니다.
"산 너머에 노다지 금맥이 터졌습지요. 어르신만 특별히 모시는 겝니다."
빼곡하고 복잡한 한자가 가득 적힌 문서였습니다.
금맥이라는 단어에 최 부자의 이중턱이 부르르 떨립니다.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손끝에 땀이 배어 나오지요.
하지만 종이에 적힌 검은 글씨들은 그저 개미 떼처럼 보일 뿐입니다.
어지러운 한자들 앞에서, 최 부자의 고질적인 열등감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그때였습니다. 마루 끝에 앉아 있던 이웃집 노인이 서류를 슬쩍 들여다봅니다.
노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립니다.
"어, 어르신. 내용이 이상합니다. 이건 금광 문서가 아니라."
순간, 최 부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릅니다.
자신이 글을 못 읽는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발작적으로 화를 낸 겁니다.
"네 이놈. 내가 못 읽어서 가만히 있는 줄 아느냐."
우당탕탕.
최 부자는 마당에 있던 굵은 몽둥이를 집어 듭니다.
쉭쉭 허공을 가르는 매서운 소리.
노인은 기겁을 하며 대문 밖으로 내쫓기고 맙니다.
진실을 알려주려던 유일한 밧줄을, 얄팍한 허영심 때문에 제 손으로 끊어버린 겁니다.
씩씩거리며 자리에 돌아온 최 부자.
그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며 조 생원은 부채 뒤로 입을 가린 채 숨죽여 웃습니다.
최 부자는 문서를 낚아채듯 집어 듭니다.
문서의 맨 마지막 줄.
거기에는 작고 흐릿한 글씨로 끔찍한 조항이 숨어 있었습니다.
금광 개발이 실패할 시, 최 부자의 전 재산을 조 생원에게 양도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전 재산을 거는 문서에 도장을 찍을 때 열 번은 확인하겠지요.
하지만 평생 글을 깔보던 이 까막눈 양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문서를 뚫어져라 보는 척하며 침을 꼴깍 삼킵니다.
그리고는 특유의 그 가짜 헛기침을 내뱉지요.
"허허. 에헴. 과연 한양 선비라 글씨가 명필이로구나."
읽어보지도 않은 문서를 향해 호탕하게 웃어 젖힙니다.
그 순간, 사기꾼 조 생원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립니다.
먹잇감이 제 발로 덫에 들어온 것을 확신한 겁니다.
그가 소맷자락 안에 감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인주를 내밉니다.
"그럼, 여기 수결을 해주시면 되겠습지요."
은으로 장식된 묵직한 도장.
최 부자는 붉은 인주를 듬뿍 묻힙니다.
도장이 종이 위로 천천히 내려갑니다.
꾹.
무거운 마찰음과 함께 붉은 낙인이 찍힙니다.
"하하하. 이제 저 산 너머 금덩이는 다 내 것이렸다."
최 부자는 뱃살을 출렁이며 파대소합니다.
그 순간, 조 생원의 향나무 부채가 스윽 내려갑니다.
서늘하게 올라간 입꼬리.
뱀 허물처럼 접힌 눈가에 번뜩이는 조소.
도장이 종이에 닿는 그 경쾌한 소리는, 최 부자의 목을 치는 망나니의 칼소리와 같았습니다.
도장을 찍은 그날 밤.
최 부자의 기와집은 터질 듯이 왁자지껄합니다.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라. 내일이면 곳간에 금이 꽉 찰 것이니, 오늘 돼지를 잡자꾸나."
지글지글, 마당 한가운데서 기름진 고기가 익어갑니다.
둥둥 덩덕쿵. 기생들의 노랫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하늘을 찌르지요.
이웃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고기 냄새에 이끌려 마당으로 모여듭니다.
최 부자는 비단 병풍을 등지고 앉아 쉴 새 없이 술잔을 들이킵니다.
자신이 대단한 거래를 성사시켰다는 도취감에 빠진 겁니다.
돈으로 양반을 샀다며 무시하던 사람들.
그들의 콧대를 금덩이로 꺾어버리겠다는 우쭐함에 흠뻑 취했습니다.
그는 밤이 깊도록 크게 웃고 떠듭니다.
하지만 그 술잔을 비울 때마다, 한양으로 향하는 조 생원의 가마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푸드덕, 까치 한 마리가 기와지붕을 차고 날아오른 순간이었습니다.
와장창.
두꺼운 솟을대문이 박살 나며 마당으로 쓰러집니다.
"어명을 받들라."
간밤의 숙취로 눈을 비비며 나오던 최 부자의 입이 쩍 벌어집니다.
대문을 뚫고 들어온 건, 눈부신 금수레가 아니었습니다.
서슬 퍼런 포졸들이 마당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었지요.
"이, 이게 무슨 짓들이냐."
포졸들이 달려들어 최 부자의 팔을 뒤로 꺾어버립니다.
칭칭. 거칠고 굵은 포승줄이 비단옷 위를 파고듭니다.
기둥마다 붉은 압류 딱지가 무자비하게 들러붙습니다.
"위조 문서로 막대한 빚을 진 죄인이다. 집과 재산을 모두 몰수하라."
간밤의 화려한 잔치상은 군화 발에 채여 나뒹굴고 맙니다.
기름진 고깃덩어리들이 진흙탕에 처박힙니다.
평생 쌓아 올렸던 거대한 부와 허영이, 단 하루 아침에 허공의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겁니다.
비단옷이 강제로 벗겨진 채, 포승줄에 끌려가는 늙은 양반.
하지만 그에게 닥친 진짜 지옥은, 재물을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관아로 끌려간 그를 기다리는 최악의 수치가 입을 벌리고 있었지요.
쌩쌩. 살을 에는 삭풍이 관아 동헌 앞마당을 매섭게 휩씁니다.
눈이 섞인 칼바람에 뺨이 찢어질 듯 쓰라립니다.
얼어붙은 진흙탕 위로, 비단옷이 찢긴 최 부자가 꿇어앉아 있습니다.
무릎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하얀 눈을 적십니다.
"사, 사또 나으리. 억울해유. 소인은 정녕 그 한양 사기꾼 조 생원 놈에게 속았을 뿐이에유."
덜덜. 그의 늘어진 이중턱이 흉하게 떨립니다.
땅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살려달라 울부짖지만, 동헌 마루에 앉은 사또의 매서운 눈빛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널 속인 조 생원 놈은 이미 국문장에 압송되어 주리를 틀고 있다."
사또의 차가운 목소리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옵니다.
철푸덕.
사또가 두루마리 문서 하나를 진흙탕 위로 내던집니다.
사기꾼 조 생원이 들이밀었던, 바로 그 가짜 금광 문서였습니다.
붉은 인주가 선명하게 찍힌 수결. 최 부자의 도장이었지요.
"네놈이 직접 찍은 도장이다."
사또의 호통이 벼락처럼 마당을 울립니다.
잠시,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네놈이 사기꾼과 한패가 아니라면, 네 입으로 이 문서의 내용을 당장 읽어보아라."
관아 마당을 겹겹이 에워싼 수백 명의 백성들이 일제히 숨을 죽입니다.
바람 소리조차 멈춘 듯한 적막.
덜덜덜. 최 부자의 손끝이 진흙에 젖은 문서를 향해 뻗어갑니다.
하지만 허공에서 허우적거릴 뿐, 차마 종이를 집어 들지 못합니다.
검은 먹물로 쓰인 한자들이, 마치 그를 옭아매는 거미줄처럼 뒤엉켜 보였지요.
과거 서당에서 날아온 편지를 거꾸로 들고, 헛기침을 내뱉으며 거드름을 피우던 그 오만한 허세는 온데간데없습니다.
"그게. 저. 사또 나으리. 소인이, 글을."
목구멍에 뜨거운 쇳덩이가 걸린 듯 꽉 막힙니다.
말라붙은 입술만 뻐끔뻐끔 달싹거리지요.
수백 개의 눈동자가 그를 찔러댑니다.
침을 꼴깍 삼킨 그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립니다.
"글을. 모릅니다."
"와하하하."
순간, 동헌 마당이 터질 듯한 폭소로 뒤집힙니다.
평생 비단옷을 휘감고, 붓 쥔 자들을 벌레 보듯 깔보던 천석꾼 양반.
그자가 제 이름 석 자도 못 읽는 까막눈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까발려진 겁니다.
가장 숨기고 싶었던 끔찍한 치부가,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폭로되었잖아요.
"저 꼴 좀 보게.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놈이 양반 행세를 했어."
군중의 조롱 섞인 웅성거림이 눈보라와 함께 그의 귓불을 사정없이 때립니다.
짝. 짝.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매질이 이어집니다.
매를 맞을 때마다 짐승의 단말마 같은 신음이 터져 나옵니다.
부들부들. 형틀에 묶인 채 바닥에 엎어진 그의 입안에, 비릿한 쇠맛이 훅 감돕니다.
평생 남을 짓밟고 군림해 온 대가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순간이었습니다.
곤장을 맞고 관아에서 쫓겨난 그 날 밤.
짚신조차 구하지 못한 핏빛 맨발이, 살얼음이 낀 거리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습니다.
발바닥을 찌르는 날카로운 얼음 조각에 붉은 핏방울이 뚝, 뚝 떨어집니다.
평생 흙 한 번 묻히지 않았던 새하얀 손톱 밑은 이미 동상에 걸려 새까맣게 썩어 들어갔지요.
꼬르륵.
사흘 밤낮을 굶은 뱃가죽이 등뼈에 들러붙어 끊어질 듯 아파옵니다.
버려진 시궁창 쓰레기 더미를 미친 듯이 뒤지던 그때였습니다.
크르릉.
어둠 속에서 노란 눈동자 두 개가 번뜩입니다.
굶주린 떠돌이 들개 떼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듭니다.
"아악."
눈밭을 뒹굴며 발버둥 치지만, 앙상한 팔다리에는 개를 쫓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날카로운 발톱에 남은 비단옷 자락마저 처참하게 찢겨나가고, 비명과 함께 그는 눈밭에 고꾸라집니다.
공포에 질린 그의 시야가 서서히 까맣게 꺼져갑니다.
끝이었습니다.
잠시, 고요한 시간이 흐릅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차가운 눈밭.
며칠 밤낮을 불어닥친 눈보라만이, 쓰러진 그의 위로 적막하게 쌓여갑니다.
이 차가운 골목길에서, 숨이 멎어가던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이 짓밟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요.
의식을 잃고 얼어붙은 눈밭에 쓰러져 있던 새벽.
딱딱하게 굳어가던 그의 이마 위로, 거칠지만 따스한 온기가 닿습니다.
스윽, 스윽. 누군가 언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습니다.
살포시 눈을 뜬 최 부자.
뿌연 시야 속으로 한 노인의 얼굴이 들어옵니다.
오른쪽 검지 손가락 두 번째 마디에 툭 불거진 굳은살.
평생 자신이 멸시하고, 담장을 높여 햇빛조차 가려버렸던 원수.
바로 서당 훈장, 김 진사였습니다.
덥석.
놀라 몸을 움츠리려는 그에게, 훈장의 옹이 같은 손가락이 낡은 사기그릇을 내밉니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이었습니다.
"이 밥이 쉰내가 나서 버리려던 참이네. 자네가 치워주면 고맙겠군."
건조하고 덤덤한 목소리.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양반이 적선이라 여겨 밥을 밀어낼까 봐, 무심하게 툭 던진 첫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체면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최 부자는 맨손으로 밥알을 움켜쥐고 입안으로 미친 듯이 우겨 넣습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텅 빈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은 순간.
"내 눈이 침침하여 글을 읽기 힘드니, 밥값을 하려거든 이 책을 대신 베껴주게."
훈장이 까만 먹물이 묻은 붓자루와 낡은 서책 한 권을 무릎 앞으로 스윽 밀어 넣습니다.
자네에게 거저 주는 밥이 아니라, 당당한 노동의 대가이니 부끄러워 말라는 속 깊은 두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최 부자의 퀭한 시선이 그 낡은 책 표지에 닿습니다.
덜덜. 붓을 쥐려 뻗었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딱 굳어버립니다.
책 표지에는, 아주 오래전 자신이 두툼한 짚신으로 짓밟았던 그 진흙 자국이 화석처럼 말라붙어 있었거든요.
글 읽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서당 아이의 손에서 빼앗아 내동댕이쳤던, 바로 그 천자문.
시궁창에 처박혔던 그 책을, 훈장은 몰래 주워다 닦고 말려 평생을 품고 있었던 겁니다.
잠시, 그의 숨이 멈춥니다.
최 부자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오릅니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학문이, 자신이 그토록 짓밟았던 스승이, 죽어가는 자신을 살려낸 유일한 구명줄이 된 겁니다.
툭, 툭.
태어나 처음으로 떨리는 손에 붓을 쥡니다.
시커먼 먹물이 번져가는 화선지 위로, 뜨거운 물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집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른 진흙 자국을 매만지던 그.
목젖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어깨가 미친 듯이 들썩입니다.
"엉엉."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우는 늙은 거지의 오열이, 서늘한 서당 마루를 가득 채웁니다.
그날부터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최 부자는 매일 밤 서당을 찾습니다.
훈장은 그가 삐뚤빼뚤 써 온 종이를 들여다보고는 혀를 쯧쯧 찹니다.
"네 글씨가 영 형편없어 도저히 못 읽겠구나. 내일 다시 와서 써야겠다."
매일매일 그를 서당으로 불러들여 따뜻한 밥을 먹이기 위한 세 번째 핑계였거든요.
그러던 어느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습니다.
밥을 얻어먹고 길을 나서던 최 부자는, 마당에 두고 온 지팡이를 찾으러 다시 서당 쪽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삐걱.
바람에 반쯤 열린 문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옵니다.
문틈으로 방 안을 엿보던 최 부자는 그만 숨을 멎고 맙니다.
눈이 침침하여 글을 못 읽겠다던 훈장.
그는 돋보기 하나 없이, 창으로 스며드는 달빛만으로 낡은 서책을 술술 읽어 내려가고 있었거든요.
스르륵, 사각. 책장 넘기는 소리가 고요한 방을 울립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방 한구석, 훈장의 무릎 앞에는 작은 소쿠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쉰내가 나서 버린다던 그 밥.
훈장은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내일 지어줄 쌀에 섞인 돌멩이와 뉘를 하나하나 정성껏 골라내고 있었던 겁니다.
쿵. 최 부자의 심장이 내려앉습니다.
훈장의 진짜 목적은 밥값을 받아내는 게 아니었습니다.
글을 몰라 평생 뼛속 깊은 열등감에 갇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사내.
그 비뚤어진 마음을 구제하기 위해, 자존심을 지켜주며 기꺼이 참스승이 되어주려 했던 완벽하고도 눈물겨운 배려.
훌쩍.
달빛이 내려앉은 토방 위에서, 늙은 거지의 어깨가 속절없이 들썩입니다.
계절이 두 번 바뀌었습니다.
매서운 겨울이 가고, 마당에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던 날.
마침내 천자문의 마지막 장을 모두 떼는 책거리가 열립니다.
최 부자는 그 흙 묻은 낡은 책을 조용히 덮습니다.
탁.
거칠어진 손등 위로 또 한 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는 훈장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가 마루에 닿도록 아주 깊은 큰절을 올립니다.
돈으로 껍데기만 샀던 오만한 양반이, 진정한 선비의 혼을 품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절을 마친 그는 말없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당 한구석에 놓여 있던 육중한 쇠망치를 집어 들지요.
쿵쾅. 쿵쾅. 심장 뛰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는 서당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돌담으로 걸어갑니다.
과거 자신이, 글 읽는 소리가 듣기 싫다며 하늘을 가려버렸던 그 흉물스러운 담장.
쾅. 쾅.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온 힘을 다해 그 벽을 사정없이 때려 부숩니다.
팔 근육이 찢어질 듯 아파오지만, 쇠망치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와르르.
마침내 거대한 돌무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립니다.
서당을 옥죄고 있던 짙은 그림자가 걷히고, 눈부시게 맑은 봄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옵니다.
두 집을 가로막던 단절의 벽이 사라지고, 마당은 비로소 하나로 연결됩니다.
자신을 평생 가두고 있던 무지와 교만의 껍질이 완벽하게 깨부숴지는 통쾌한 소리였습니다.
"껄껄껄."
하얀 먼지를 뒤집어쓴 최 부자와, 마루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진사.
두 노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온 마을로 따뜻하게 퍼져나갑니다.
돌무더기만 남은 마당 한가운데 낡은 평상.
이제는 허물없이 마주 앉은 두 노인이 호로록 따뜻한 칡차를 나누어 마십니다.
재물은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흩어지나, 머리에 든 글과 가슴에 품은 정은 평생을 간다는 참된 이치.
오만이라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와, 비로소 사람의 온기를 배운 한 남자의 긴 여정이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조용한 여운이 감돕니다.
우리네 인생에도 꼴도 보기 싫다며 높게 쌓아둔 마음의 돌담이 하나씩은 있지요.
오늘, 그 담장의 돌 하나를 살며시 내려놓아 보는 건 어떨까요.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이런 따뜻한 옛이야기가 마음에 남으셨다면, 화면 아래 붉은색 구독 글자를 꾹 한 번 눌러주세요.
앞으로도 가슴을 울리는 깊은 인생 이야기를 가장 먼저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다 쫓겨난 한 늙은 어머니입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적막한 순간.
그때 그 붉은 주머니를 열어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가장 믿었던 며느리가 싸늘하게 식은 화로 밑에 감춰둔 핏빛 사연.
주름진 가슴을 치며 오열하는 다음 이야기도 꼭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늘 평안한 하루 보내십시오.
고맙습니다.
살을 에는 삭풍이 몰아치던 한겨울의 관아 동헌 앞.
쌩쌩. 매서운 바람 소리 사이로 처절한 곡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최 부자는 진흙탕 바닥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철푸덕. 살얼음이 낀 흙탕물이 벌벌 떨리는 그의 뺨을 적십니다.
"억울하구먼유. 소인은 그저 금광 문서인 줄로만 알았습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기를 뜯으며 에헴 거리던 목소리.
이제는 쥐어짜는 듯한 비명으로 변해 있었거든요.
사또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봅니다.
"억울하다. 네놈이 직접 수결을 한 문서가 아니더냐. 널 속인 조 생원 놈은 이미 국문장에 압송되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촤락. 사또가 던진 종이뭉치가 최 부자의 눈앞에 떨어집니다.
선명하게 찍힌 그의 붉은 도장.
바로 전 재산을 넘긴다는 그 악마 같은 계약서였습니다.
사또의 불호령이 동헌 마당을 쩌렁쩌렁 울립니다.
"사기꾼 조 생원과 한패가 아니라면, 네 입으로 이 문서의 내용을 당장 읽어보아라."
바람 소리조차 멎은 듯한 적막이 흐릅니다.
수백 명의 백성들이 숨을 죽이고 최 부자의 입술만 바라봅니다.
덜덜덜. 그의 늘어진 이중턱이 미친 듯이 떨립니다.
문서 위로 뻗은 손가락은 사시나무처럼 요동칩니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만 크게 들려옵니다.
까만 글자가 시커먼 벌레처럼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을 겁니다.
"읽어보라 하지 않느냐."
"그, 그것이. 소, 소인은."
기어들어 가는 쇳소리. 그는 단 한 글자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습니다.
평생 글 읽는 선비들을 조롱하고, 가난한 훈장을 핍박하며 감춰왔던 진실.
그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완벽한 까막눈이었습니다.
가장 감추고 싶던 밑바닥이 수백 명 앞에 발가벗겨진 순간.
그 지독한 수치심의 무게를, 감히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요.
"뭐야. 천석꾼 최 부자가 까막눈이었다고."
"아이고, 문서도 못 읽으면서 그동안 그 거드름을 피운 게여."
와하하하. 군중 사이에서 터져 나온 웅성거림.
날카로운 비웃음이 눈보라에 섞여 그의 귓가를 사정없이 때립니다.
그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흙빛으로 죽어갑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버린 것만 같았지요.
사또가 형틀을 가리킵니다.
"저 무지몽매한 놈에게 곤장 스무 대를 쳐라."
짝. 짝.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
그 끔찍한 파찰음이 진흙탕 위로 퍼집니다.
매를 맞을 때마다 짐승의 단말마 같은 신음이 터져 나옵니다.
아흔아홉 칸 대궐 같은 기와집의 주인이었던 남자.
돈으로 양반 흉내를 내며 세상을 제 발밑에 두었다고 믿었던 남자.
그의 알량한 허영심은, 형틀 위에서 핏물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매를 맞고 관아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최 부자.
화려했던 비단옷은 갈기갈기 찢겨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발에는 그 흔한 짚신 한 짝 없었거든요.
뚝뚝. 터진 발바닥에서 흐른 피가 하얀 눈길 위로 붉은 점을 남깁니다.
쌩쌩 부는 칼바람이 얼어붙은 핏자국을 후벼 파지요.
그는 텅 빈 골목을 유령처럼 기어 다닙니다.
누구 하나 그에게 따뜻한 아랫목을 내어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과거에 그가 쌓아 올렸던 거대한 담장만큼, 인심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으니까요.
그때였습니다. 크르릉.
어둠 속에서 시퍼런 눈을 번뜩이며 들개 세 마리가 다가옵니다.
평소라면 발길질 한 번으로 쫓아냈을 짐승들.
하지만 굶주리고 만신창이가 된 그는, 날카로운 이빨을 피할 힘조차 없었습니다.
들개의 날카로운 발톱에 남은 비단옷마저 갈기갈기 찢겨나갑니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그는 비참한 신음과 함께 눈밭에 고꾸라집니다.
점점 시야가 까맣게 꺼져갑니다.
끝이었습니다.
잠시 적막이 맴돕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차가운 눈밭.
며칠 밤낮을 불어닥친 눈보라만이, 쓰러진 그의 위로 적막하게 쌓여갑니다.
이 차가운 골목길에서, 숨이 멎어가던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눈이 하얗게 쌓인 낡은 처마 밑.
숨이 멎어가던 그의 이마 위로 무언가 닿습니다.
스윽. 거칠지만 따뜻한 손바닥이었습니다.
살포시 눈을 뜬 그는 흠칫 몸을 떱니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마주치기 싫었던 바로 그 얼굴이었거든요.
평생 멸시하고 짓밟았던 서당 훈장, 김 진사였습니다.
최 부자의 입술이 파르르 떨립니다.
자신을 비웃으러 왔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김 진사의 옹이 같은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고봉밥이 들려 있었습니다.
덥석. 최 부자의 움푹 팬 눈동자가 밥그릇에 꽂힙니다.
마른침을 삼키며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던 찰나.
김 진사가 밥그릇을 내밀며 툭 던지듯 말합니다.
"이 밥이 쉰내가 나서 버리려던 참이네. 자네가 치워주면 고맙겠군."
적선이라 여기면 자존심에 먹지 않을까 봐 던진, 서툰 거짓말이었습니다.
게 눈 감추듯 밥을 비워낸 최 부자.
그의 턱밑으로 밥풀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김 진사가 낡은 책 한 권과 붓을 쓰윽 내밉니다.
"먹고 싶은가. 그럼 붓을 드시게. 글 한 자를 쓰면, 밥 한 술을 내어 주마."
최 부자는 몸을 움찔합니다.
김 진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건조하게 덧붙이지요.
"내 눈이 침침하여 글을 읽기 힘드니, 밥값을 하려거든 이 책을 대신 좀 베껴주게."
자존심 강한 양반에게 노동의 대가라는 명분을 쥐여주기 위한 두 번째 거짓말이었습니다.
바스락. 최 부자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넘깁니다.
태어나서 처음 쥐어보는 붓.
먹물이 뚝뚝 떨어지는 붓대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립니다.
그런데 책을 펼치려던 최 부자의 시선이 표지에 머뭅니다.
순간, 그의 호흡이 헉 하고 멎어버립니다.
기나긴 침묵이 흐릅니다.
낡은 표지 위로, 흉측한 진흙 자국이 화석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그건 수십 년 전, 자신이 아이의 손에서 빼앗아 두툼한 짚신으로 무참히 짓밟았던 바로 그 천자문이었습니다.
김 진사는 시궁창에 버려진 그 처참한 책을 주워다, 곱게 말려 평생 품고 있었던 겁니다.
언젠가 이 오만한 사내가 배움을 청할 날을 기다리면서요.
툭. 툭툭.
검은 먹물이 번진 화선지 위로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집니다.
목젖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엉엉."
거칠어진 어깨가 미친 듯이 들썩입니다.
화선지를 쥔 두 손가락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요.
그는 흙 묻은 책을 부여잡고, 아이처럼 소리 내어 오열합니다.
그날 이후, 최 부자는 밥 한 그릇을 얻어먹기 위해 매일 서당을 찾았습니다.
김 진사는 그가 써온 글씨를 볼 때마다 혀를 차지요.
"네 글씨가 영 형편없어 도저히 못 읽겠구나. 내일 다시 와서 써야겠다."
매일같이 그를 불러내기 위한 세 번째 핑계였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어느 달이 유난히 밝던 밤.
글을 쓰다 모르는 글자가 생겨 늦은 시간 서당을 찾은 최 부자.
그는 닫힌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걸음을 멈춥니다.
삐걱. 조심스레 문틈을 엿보던 그의 두 눈이 커다랗게 벌어집니다.
방 안의 풍경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눈이 침침하다던 김 진사는 돋보기 하나 없이, 달빛만으로 책을 술술 읽어 내려가고 있었거든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스르륵, 사각. 부엌 쪽에서 들리는 소리.
쉰내가 나서 버린다던 그 밥은, 김 진사가 직접 쌀의 뉘를 하나하나 정성껏 골라내어 지어준 귀한 햅쌀이었습니다.
최 부자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훈장의 목적은 적선도, 밥값도 아니었습니다.
글을 몰라 평생을 열등감 속에 살다 망가진 자신을 위해, 기꺼이 진정한 스승이 되어주려 했던 겁니다.
훌쩍. 달빛 아래, 늙은 거지의 어깨가 조용히 들썩입니다.
마침내 천자문의 마지막 장을 모두 뗀 날.
최 부자는 붓을 내려놓고 책을 조용히 덮습니다.
그의 굽은 등이 깊숙이 숙여집니다.
흙 묻은 책 위로, 맑은 눈물이 툭 떨어집니다.
김 진사를 향해 생애 처음으로 올리는 진심 어린 큰절이었지요.
인사를 마친 그는, 말없이 마당 한구석으로 걸어갑니다.
그의 손에는 육중한 쇠망치가 들려 있었습니다.
탁. 손바닥에 침을 뱉고는 망치 자루를 단단히 고쳐 쥡니다.
그리고 쾅. 쾅.
온몸의 체중을 실어 돌담을 내리칩니다.
거대한 돌덩이들을 사정없이 때려 부숩니다.
과거에 자신이 훈장 꼴이 보기 싫다며, 하늘을 가리려 쌓아 올렸던 그 흉물스러운 담장이었습니다.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집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지요.
와르르. 마침내 거대한 돌무더기가 무너져 내리며 육중한 소리를 냅니다.
자신을 가두고 있던 오만과 편견의 벽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습니다.
그 틈새로 쏟아져 들어온 따스한 햇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춥니다.
두 집을 가르던 차가운 벽이 사라지고, 비로소 마당이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망치를 든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최 부자.
그리고 툇마루에 앉아 그 모습을 넉넉하게 바라보는 김 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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