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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버전 1 · 초안
산출물 (v1)
내 나이 올해로 일흔. 세월의 무자비한 무게가 고스란히 어깨 위로 내려앉은, 참으로 덧없고도 쓸쓸한 나이입니다.
하지만 바람에 낡고 해진 저 문살 너머로 나를 부르는 내 지아비의 목소리는 다릅니다. 참으로 단단하고 고운, 스물다섯 청년의 음성이지요.
낡은 방문이 기분 좋은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고, 이내 남편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그의 눈가엔 세월이 남긴 잔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고, 나를 향해 뻗은 어깨는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낸 바위처럼 단단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방 한구석, 얼룩진 거울 앞에 앉아 그를 맞이하는 아내의 얼굴은 너무도 다릅니다.
칼로 깊게 그어낸 듯 짙은 주름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은 한겨울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세어버린 일흔의 노파입니다.
도대체 어찌하여 이 외딴 초가집의 낡은 문지방만 세월이 넘어오지 못한 것일까요.
마을 사람들은 우물가에 모일 때마다 소곤소곤 입을 모았습니다.
홀로 산속에 박혀 사는 저 늙은 과부가, 사실은 천 년을 묵은 요물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어, 제 서방만은 영원한 젊음의 덫에 가둬버린 것이라 수군댔지요.
노파는 거울 속 자신의 메마른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습니다.
지문이 다 닳아버려 거칠어진 손끝이 피부를 긁고 지나갑니다.
요물이라 불리는 자신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만 가는데, 어찌하여 사람인 지아비만 세월의 강물을 비껴간 것일까요.
그 잔혹하고도 슬픈 비밀은, 아주 오래전 피비린내 나던 어느 밤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늘한 방 안, 노파의 굽은 손등이 조용히 허공을 가릅니다.
그녀의 무릎 앞에는 수십 년째 주인이 입지 않은 사내의 낡은 무명 바지춤이 놓여 있습니다.
빳빳하게 풀을 먹인 바지를 반듯하게 다림질하는 고요한 밤.
놋쇠 다듬잇방망이가 거친 옷감을 스칠 때마다, 묵은 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힙니다.
멈춰 있던 시간의 태엽이 그 규칙적인 소리를 타고 아득한 과거로 거꾸로 감겨 올라갑니다.
시린 달빛이 먹구름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
오래전, 짐승의 썩은 내가 진동하던 그날 밤. 모든 비극이 시작된 거대한 기와집 앞마당으로 말입니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육중한 사립문이 닫혔습니다.
무거운 쇳대가 맞물리며 차가운 마찰음을 냈지요.
스무 살의 앳된 선녀가 며느리라는 거짓 탈을 쓰고, 원수의 집안에 첫발을 들인 날 밤입니다.
자신의 가문을 멸문지화로 몰아넣은 원수.
그 탐욕스러운 시아버지의 으리으리한 기와집, 그 넓은 마당에는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휘몰아쳤습니다.
처마 끝에 매달린 놋쇠 풍경이 매서운 바람을 타고 날카롭게 울었거든요.
발밑으로 밟히는 굵은 자갈들은 마치 얼음장처럼 서늘한 촉감을 전해왔습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짐승의 피 냄새를 머금은 매캐한 흙먼지가 폐부를 깊숙이 찔렀습니다.
어딜 천한 것이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게야.
높다란 댓돌 위에서 곰방대를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움푹 팬 뺨에 핏발 선 눈동자를 번득이는 노인, 바로 시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며느리로 들어온 선녀를 마치 길가의 벌레 보듯 내리깔아보았습니다.
그의 허리춤에 단단히 묶어둔 곳간 열쇠 꾸러미가 부딪히며 차가운 쇳소리를 냈지요.
콧소리 섞인 그의 목소리에는, 남의 피눈물을 짜내어 부를 축적한 자 특유의 오만함이 덕지덕지 묻어있었습니다.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아오르는 불길한 기운이 전신을 차갑게 감쌌습니다.
선녀는 묵묵히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하지만 풍성한 치맛자락 아래로 감춘 두 손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지요.
그녀는 품속 깊은 곳에 숨겨둔 작고 차가운 유리병을 만지작거렸습니다.
병 안에서 찰랑이는 투명한 액체.
단 세 방울이면 아무리 건장한 사내라도 일곱 구멍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는 지독한 맹독이었습니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요.
입안 가득 비릿한 쇠맛이 번졌거든요.
반드시 이 집안의 씨를 말려버리겠노라.
맑았던 눈동자엔 어느새 시퍼런 살의가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그녀의 심장은 오직 복수라는 서늘한 박동만으로 뛰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안채와 멀리 떨어진 크고 서늘한 부엌입니다.
무거운 가마솥 뚜껑이 열리자, 매운 장작불 연기가 확 끼쳐왔습니다.
선녀의 손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식칼이 들려 있었지요.
도마 위로 야채를 써는 규칙적이고 서늘한 칼질 소리가 빈 부엌을 채웠습니다.
가마솥 안에서는 시아버지를 독살하기 위해 끓여내는 첫 국밥이 끓고 있었습니다.
아궁이의 붉은 불빛이 선녀의 창백한 뺨 위로 위태롭게 일렁였습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속의 독약 병을 꺼내 들었습니다.
유리병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습니다.
떨리는 손끝으로 마개를 쥐어 비틀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거친 마찰음과 함께 굳게 닫혔던 부엌문이 열렸습니다.
선녀는 황급히 맹독 병을 치맛자락 뒤로 욱여넣었습니다.
문지방을 넘어선 이는, 이 집안의 장손이자 어젯밤 혼례를 올린 낯선 남편이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글월이나 읽어야 할 양반가 장손의 몰골이 아니었지요.
무릎까지 무심하게 걷어 올린 흙투성이 무명 바지.
어깨에는 거친 짚단이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부엌으로 들어서자마자 축축한 땀 냄새와 짙은 흙내가 훅 끼쳐왔습니다.
부뚜막 불빛에 비친 그의 손은 솥뚜껑만큼 컸고, 돌덩이 같은 굳은살이 흉하게 박여 있었거든요.
남편은 말없이 다가왔습니다.
선녀는 정체를 들킬까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치마 뒤로 숨긴 독약 병이 아니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부엌칼에 살짝 베인 선녀의 검지 손가락.
도마 위로 붉은 피가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지요.
남편은 주저 없이 자신의 무명 옷소매를 이빨로 거칠게 물어뜯어 길게 찢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선녀의 다친 손가락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습니다.
내 손이 거칠어 아플 것이오. 조금만 참으시오.
바닥에 묵직하게 깔리는, 아주 낮고 울림이 깊은 바리톤의 음성이었습니다.
상처 위로 둘러지는 삐뚤빼뚤한 무명천.
그 커다란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체온.
선녀의 숨이 턱 막혔습니다.
독살의 기회를 노리며 바짝 날을 세웠던 신경이, 그 투박한 다정함 앞에 맥없이 허물어졌거든요.
손끝에서 시작된 알 수 없는 온기가 얼어붙은 심장을 마구 흔들어 댔습니다.
선녀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크게 휘둘렀습니다.
맹독을 타려 했던 국그릇이 부뚜막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바닥으로 쏟아진 뜨거운 국물 위로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습니다.
서늘한 독약을 품은 그 밥상머리에서, 그녀는 차라리 자신이 죽기를 바랐습니다.
놀란 남편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습니다.
선녀는 황급히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소인, 평생 서방님 곁에서 따뜻한 진지를 지어 올리리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내뱉은 다짐.
내일 밤 당장 이 집안을 멸문시키려 했던 본심을 숨긴, 슬픈 거짓말의 시작이었습니다.
남편은 엎어진 국그릇을 보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선녀의 떨리는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지요.
독을 거둔 밤, 그가 내어준 무명천의 온기.
그 얄팍한 연민이 훗날 자신을 얼마나 끔찍한 덫으로 옭아맬지, 선녀는 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조용하던 집안의 균열은 예상치 못한 밖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뒤 해 질 녘, 굳게 닫힌 사립문 밖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시아버지가 고리대금으로 남의 논밭을 빼앗고, 빚진 자들을 매질해 죽음으로 내몬 업보가 마침내 터진 겁니다.
담장 너머로 번쩍이는 붉은 횃불들.
낫과 몽둥이를 든 촌부들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마당으로 들이닥칠 기세였지요.
부엌 창틈으로 그 광경을 내다보는 선녀의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갔습니다.
손 안 대고 원수를 갚을 완벽한 기회였습니다.
안채의 문만 열어주면, 성난 그들이 알아서 시아버지의 목줄을 끊어놓을 테니까요.
그때였습니다.
아버님, 방으로 들어가 빗장을 거십시오.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남편이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습니다.
그는 벌벌 떠는 시아버지를 안방으로 거칠게 밀어 넣고 굳게 문을 닫았습니다.
자신의 등 뒤로 가문의 원흉을 감춘 채, 수십 명의 성난 군중 앞에 맨몸으로 막아선 사내.
선녀는 숨을 깊게 들이켰습니다.
바람결에 펄럭이는 남편의 낡은 무명 옷자락이,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롭게 흔들렸습니다.
그의 손에 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빈주먹뿐이었지요.
둔탁한 파열음이 마당을 울렸습니다.
누군가 던진 돌덩이에 남편의 이마가 깊게 찢어졌지요.
하지만 남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친 흙바닥에 두 무릎을 꿇어버렸습니다.
내 아비의 죄요. 내가 대신 피 흘려 갚으리다.
찢어진 상처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그의 단단한 턱선을 타고 흙바닥을 적셨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땅바닥에 이마를 세게 찧었습니다.
아비의 추악한 죄악을 온몸으로 짊어진 사내.
장손이라는 이유 하나로 묵묵히 죗값을 치러내는 미련한 육신이었습니다.
문살을 움켜쥔 선녀의 손등에 하얗게 뼈마디가 도드라졌습니다.
가슴통이 터질 듯한 지독한 갈등.
저 사내를 내버려 두면 복수는 오늘 밤 자연스레 완성됩니다.
하지만 왜, 흙바닥에 처박힌 그의 피 묻은 얼굴을 볼 때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일까요.
여러분이라면 그 자리에 서서 어찌하셨겠습니까.
원수를 갚기 위해 저 미련한 사내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이 옳았을까요.
아니면 이 알량한 연민에 굴복해 핏발 선 원한을 잘라냈어야 했을까요.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아귀에 축축한 땀이 배어났습니다.
그날 밤. 피비린내 나는 소란이 간신히 휩쓸고 간 별채 마루입니다.
선녀는 어두운 호롱불 아래서 피투성이가 된 남편의 상처를 닦아내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이 거친 피부 위를 지나갈 때마다, 남편의 떡 벌어진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거렸습니다.
쓰라리십니까.
선녀의 물음에 남편은 그저 뒷목을 긁적이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지요.
괜찮소. 내가 다 알아서 하리다.
바보같이 우직한 그 한마디.
선녀는 결국 품속 깊이 숨겨두었던 맹독 병을 꺼내, 방바닥 틈새로 부어버렸습니다.
독한 약물이 흙 속으로 스며들며, 지독했던 복수심도 함께 녹아내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궁이에 장작 타는 소리가 어제보다 한결 경쾌하게 울립니다.
선녀는 밤새 불을 지펴 따뜻한 굴비국을 끓여냈습니다.
가마솥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김.
독을 타려 했던 첫 밥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굴비 한 마리를 정성껏 구워 올린, 진심이 담긴 아내의 밥상이었습니다.
도마 소리엔 리듬이 섞여 있었고, 찌개가 끓는 냄새는 코끝을 따뜻하게 간질였습니다.
그녀는 원수의 집안에서, 역설적이게도 처음으로 평온한 일상의 온기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모인 밥상머리.
시아버지는 여전히 매서운 눈으로 며느리를 흘겨보았습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수저 부딪히는 소리만 건조하게 울렸지요.
그때였습니다.
남편의 투박한 젓가락이 선녀의 밥그릇 위로 넘어왔습니다.
가장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 굴비 토막 하나.
남편은 아비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더니, 생선 살을 선녀의 밥그릇 깊숙이 밀어 넣고 흰쌀밥으로 푹 덮어버렸습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맨밥만 씹어 삼키던 사내의 작고 투박한 애정.
선녀의 코끝이 시큰해졌습니다.
숨겨진 생선 살을 입술로 오물거릴 때, 짭조름한 바다 맛 사이로 뭉클한 단맛이 번졌거든요.
하지만 그 평온은 단 하루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시아버지의 의심병이 극에 달했거든요.
그의 뱀 같은 눈은 이미 며느리의 서늘한 기운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저 요물년이 내 아들을 홀리고, 내 재산을 노리려 들어온 게 분명하다.
깊은 밤. 안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음산한 목소리.
시아버지는 귓속말로 사내 종들을 조용히 불러 모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코를 찌르는 역겨운 들기름 냄새.
하인들이 부부가 잠든 별채로 다가갔습니다.
이내 기둥 주변에 시커먼 기름을 들이부었지요.
며느리를 산 채로 태워 죽이려는, 미치광이 같은 살육의 준비.
가장 따뜻했던 밥상의 온기는 한순간에 소름 끼치는 공포로 얼어붙었습니다.
그 순간. 바깥 사립문이 부서질 듯 흔들렸습니다.
불을 질러라. 저 악귀 같은 놈의 씨를 말려버리자.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쳐내려던 찰나, 며칠 전 물러갔던 원수들이 기어코 선수를 친 겁니다.
수십 개의 횃불이 담장을 넘어 마당으로 쏟아졌습니다.
칼과 낫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쇳소리.
시아버지가 쌓아 올린 잔혹한 업보가 폭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별채에 부어두었던 들기름 위로 횃불의 불똥이 튀어 올랐습니다.
기름을 머금은 마룻바닥이 시뻘건 불기둥을 뿜어냈습니다.
바람을 탄 불길은 순식간에 본채와 별채를 무섭게 집어삼켰습니다.
으리으리하던 기와지붕이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주저앉았습니다.
숨통을 조여오는 매캐한 연기.
뜨거운 열기가 살갗을 바싹바싹 태우는 듯했습니다.
선녀는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하며 마당으로 뛰쳐나왔습니다.
하지만, 곁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있어야 할 남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매운 연기에 눈물범벅이 된 선녀가 주위를 미친 듯이 둘러보았습니다.
서방님, 서방님.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불기둥이 가장 높이 치솟는 헛간 쪽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편이 호미를 챙기러 들어갔던 곳.
선녀는 맨발로 불타는 기와 파편들을 밟으며 헛간으로 내달렸습니다.
발바닥이 찢어지고 붉은 피가 고였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타오르는 장작더미 속에서 남편이 갇혀버렸다는 절망감.
심장이 숯덩이처럼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듯했습니다.
안 돼, 제발.
무너져 내리는 헛간 지붕을 보며 선녀가 비명을 내지른 그 순간.
시뻘건 연기 장막을 뚫고 누군가 걸어 나왔습니다.
넓은 어깨, 크고 단단한 체구. 남편이었습니다.
그가 한쪽 어깨를 위태롭게 기울인 채, 멍한 표정으로 마당 중앙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지요.
아, 살아주었구나.
선녀의 입술이 벌어지고, 가슴을 짓누르던 거대한 바위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습니다.
지옥 같은 안도의 한숨이 뜨거운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렀습니다.
서방님.
선녀는 두 팔을 뻗으며 남편의 너른 가슴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그런데, 달려가던 선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습니다.
뭔가 이상했습니다.
거세게 타오르는 헛간 불길을 뚫고 걸어 나온 사내.
하지만 남편의 낡은 무명 옷자락에는, 그 흔한 그을음 한 점 묻어있지 않았습니다.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너무도 창백하고 깨끗한 얼굴.
주변을 집어삼킬 듯 포효하던 화마의 소음이, 남편의 발걸음 주변에서만 기이할 정도로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그 지옥불 속에서 남편은, 대체 어떻게 살아서 걸어 나온 것일까요.
하지만 당장은 눈앞에 살아있다는 사실이 더 간절했습니다.
발밑에서 타오르는 불티가 종아리를 파고들었지만, 선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뛰어갔습니다.
서방님.
거센 열기를 가르고 그녀는 두 팔을 활짝 벌렸습니다.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 살아 돌아온 남편의 너른 가슴.
그 단단한 품에 안겨 바스러진 심장을 기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마주 닿으려던 찰나, 선녀의 두 팔이 허공을 갈랐습니다.
그녀의 뻗은 팔이 남편의 가슴팍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거든요.
사람의 체온, 땀 냄새, 거친 숨소리. 그 어떤 것도 만져지지 않았습니다.
손끝에 남은 것은 서늘하고 퀴퀴한, 허연 잿빛 연기뿐이었지요.
선녀의 입에서 짐승의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선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습니다.
불탄 헛간 옆. 시커멓게 무너져 내린 육중한 서까래 더미.
그 밑에 깔려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져 있는, 싸늘한 주검 하나.
그것이 그녀가 방금 전 안으려 했던 남편의 진짜 모습이었습니다.
아내를 이 불지옥 속에 두고 갈 수 없었던 사내.
그의 지독한 미련과 애통함이 빚어낸 허깨비.
불길 속에서 걸어 나온 것은 살아있는 육신이 아니라, 껍데기만 남은 남편의 환영에 불과했지요.
검은 재가 달라붙은 선녀의 뺨 위로 굵은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짐승처럼 절규했거든요.
복수심을 거두고 연민을 택한 대가.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제 손으로 사지에 밀어 넣었다는, 바닥 없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날 밤, 날이 밝을 때까지 잿더미를 맨손으로 파헤쳤습니다.
손톱이 다 빠져나가고 피가 고였지만 아픈 줄도 몰랐지요.
피투성이가 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한 선녀는, 모든 것이 타버린 원수의 집터를 뒤로했습니다.
시아버지가 불타 죽었는지, 마을 사람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거든요.
텅 빈 눈동자로 산길을 오르는 선녀의 등 뒤로, 스물다섯의 환영만이 말없이 따라걷고 있었습니다.
시간의 수레바퀴가 무심히 굴러갔습니다.
깊은 산속, 외딴 초가집의 아침이 밝았지요.
햇살이 비치는 툇마루에서 선녀는 무명천을 마름질합니다.
서방님, 찬 바람이 붑니다. 아랫목으로 들어와 앉으셔요.
문이 열리는 흉내조차 없는데, 그녀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거든요.
잔혹한 현실 앞에서 이성이 끊어져 버린 여인.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지독하게 부정하며,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영을 모시고 기나긴 세월을 버텨냈습니다.
가끔 산나물을 캐러 온 아랫마을 이웃들이 마당을 기웃거릴 때면, 그녀의 두 눈엔 날 선 핏발이 섰습니다.
부러 헛기침을 크게 내며 댓돌을 거칠게 밟았지요.
우리 영감이 고뿔에 단단히 걸려 누워 있소. 이만 돌아가시오.
사립문을 쾅, 매몰차게 닫아걸었습니다.
남들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허깨비를 지키기 위해, 이웃의 눈마저 철저히 가려버린 겁니다.
하지만 억지로 꿰매어 놓은 일상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서늘한 파열음을 냈습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비가 이리 오는데 어찌 다녀오셨습니까, 수건을 들고 돌아서던 그녀의 두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렸지요.
폭우를 뚫고 밭일에서 돌아왔다면서, 사내의 발밑 장판엔 진흙 한 점, 빗물 한 방울 떨어져 있지 않았거든요.
마당에 서서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와도, 댓돌 위엔 짚신이 부딪히는 둔탁한 마찰음 하나 없었습니다.
오직 코끝을 찌르는 서늘한 침묵만이 그 좁은 초가집을 유령처럼 맴돌 뿐이었지요.
거울 앞을 지날 때마다 선녀의 숨이 턱 막혔습니다.
거울 속에는 허리가 굽고 머리가 새하얗게 센 늙은 노파가 서 있었거든요.
하지만 문지방을 넘어 자신을 바라보는 지아비의 어깨는, 수십 년 전 처음 만났던 스물다섯 청년의 단단함 그대로였지요.
시간의 강물이 자신만 집어삼키고 남편을 비껴간 기괴한 풍경.
자신이 평생을 대답 없는 헛것과 대화하고 있었다는 끔찍한 진실이, 목끝까지 차올라 그녀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마침내, 환상의 성벽이 산산이 부서지는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매일 아침 어김없이 차려내는 두 사람 몫의 밥상.
오늘도 진지를 남기셨군요. 요즘 영 입맛이 없으신가 봅니다.
선녀는 애써 굽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맞은편 밥그릇을 바라보았지요.
떨리는 손으로 빈 그릇을 치우려던 찰나.
그녀의 시선이 밥그릇 안쪽에 꽂혔습니다.
하얗고 고슬고슬해야 할 밥알들.
하지만 그곳엔 수십 년 전 차려두어 새카만 돌덩이처럼 말라비틀어진 밥알들만이 가득했습니다.
그 위로 뽀얗게, 아주 뽀얗게 쌓여 있는 수십 년 치의 먼지.
그제야 선녀는 깨달았지요.
그녀가 지어 올린 밥을, 남편은 그 해 겨울부터 단 한 숟갈도 뜨지 못했다는 것을.
밥상을 밀쳐내고 바닥에 엎드린 노파의 입에서, 마침내 짐승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무려 사십 년이었습니다.
피가 식어버린 주검을 향해 매일 밥을 짓고, 닳아버린 지문으로 허공을 꿰매왔던 애통한 세월이었거든요.
광기 어린 오열이 휩쓸고 간 방 안.
선녀는 거칠고 앙상한 손마디로, 먼지 쌓인 방바닥을 천천히 쓰다듬었습니다.
파르르 떨리던 숨결이 이내 고요하게 가라앉았지요.
당신은 처음부터 내 곁에 없었지요.
텅 빈 방 안을 향해 노파가 속삭였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 알량한 거짓말에 속아준 건, 미쳐버린 내 마음속 헛것뿐이었지요.
잔혹한 진실을 수용하는 순간.
무겁게 짓누르던 가슴의 멍울이 부드럽게 녹아내렸습니다.
비록 살아 숨 쉬는 체온은 없었지만, 그 애달픈 미련의 그림자라도 곁에 있었기에.
그 환상이, 피투성이 지옥에서 자신을 버티게 한 유일한 구원이었음을 그녀는 비로소 인정했지요.
말라붙은 눈가에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고였다 떨어졌습니다.
입가에는 일흔 평생 처음으로, 가장 평온하고 온전한 미소가 번졌지요.
구름이 걷히고, 창창한 달빛이 문풍지를 뚫고 방 안으로 쏟아졌습니다.
은빛으로 물든 텅 빈 허공.
선녀는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스물다섯의 고운 지아비를 향해 아주 깊게 절을 올렸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당신을 보내줍니다. 나의 서방님. 참으로 길고도 애달픈 꿈이었습니다.
달빛이 참으로 고운 밤입니다.
어떠셨습니까. 누군가를 미치도록 그리워하다, 그 기억의 파편마저 생생한 현실처럼 끌어안아 본 적이 있으신지요.
모두가 세월을 따라 주름지고 허리가 굽어가도.
우리들 마음속 아주 깊은 방 안에는, 절대로 늙지 않고 빛나는 스물다섯의 얼굴 하나쯤 숨쉬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가장 지독한 미련이, 남은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밤, 여러분의 가슴속에 멈춰 있는 그 곱고 애달픈 이름을 조용히 꺼내어 보시지요.
그리고 그 그리운 이의 이야기를 아래 댓글에 한 줄 남겨주신다면, 저도 함께 읽으며 밤을 지새울 테니까요.
이 늙은 선녀의 긴 회고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화면 아래 빨간 구독 버튼 한 번만 눌러주십시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다음 이야기로 곧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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