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10: TTS 대본

Writer · 버전 1 · 초안

산출물 (v1)

보통
kie · gemini-3-pro · 75,299 in / 7,686 out · 175.6초
11,588자 · 예상 30.9분 / 목표 60분 분량 부족 (52%)

어명이다. 가마를 멈추어라.

빗소리를 뚫고 나온 묵직한 호령에 거대한 행렬이 일제히 멈춰 섭니다. 질퍽. 굵은 빗방울이 쉴 새 없이 쏟아지던 깊은 밤. 조선의 왕이 진흙탕 속에 털썩 무릎을 꿇었습니다. 왕의 붉은 곤룡포가 더러운 흙물에 검게 젖어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지요. 그의 젖은 시선이 한참 동안 머문 곳은, 어느 시골 마을 어귀에 버려지듯 놓인 낡은 돌덩이 하나였습니다.

휘이잉. 매서운 비바람이 돌무덤의 푸른 이끼를 거칠게 쓸고 지나갑니다. 오랜 세월 모진 비바람에 깎여나가서, 이제는 이름 석 자조차 읽을 수 없는 초라한 무덤이거든요. 지존의 자리에 있는 왕조차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리게 만든 이 비석의 주인이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해지실 겁니다.

대단한 공을 세운 위대한 장군이 아니었습니다. 깊은 학문에 통달한 고고한 선비도 아니었죠. 이 차가운 돌덩이 아래 잠든 이는, 평생 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던 사람. 바보 같을 정도로 미련하게,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해 살다 간, 어느 늙은 노비입니다.

타닥타닥. 붉은 불길이 먹물 같은 밤하늘을 무섭게 집어삼키고 있었습니다. 역모의 누명을 쓴 주군의 저택. 사방에서 관군의 횃불이 뱀처럼 타오르고, 사람의 살을 찢는 서늘한 쇳소리가 진동했습니다. 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찌르는 끔찍한 아수라장이었지요.

주군은 다급하게 떨리는 손길로, 갓 태어난 핏덩이를 충복 만복의 품에 안겼습니다. 살을 에는 서늘한 칼바람 속에서, 낡은 강보에 싸인 아기의 파랗게 질린 입술만 가늘게 달싹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주군이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이로 꽉 깨물었습니다. 뚝, 뚝. 검붉은 피가 손마디를 타고 뚝뚝 흘러내렸습니다. 주군은 그 따뜻한 피가 묻은 손으로 품속에서 비단 노리개 하나를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아기를 싼 낡은 헝겊 깊숙한 곳에 억지로 찔러 넣었죠.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군이 스스로 등 뒤의 방문을 굳게 걸어 잠갔습니다. 곧이어 거대한 불길이 그 방을 완전히 덮쳐버렸습니다. 뜨거운 열기가 만복의 얼굴을 때렸지만, 그는 뒤돌아볼 새도 없이 불타는 뼈대들을 뒤로한 채 짐승처럼 어둠 속으로 내달렸습니다. 주군이 아기의 품에 찔러 넣은 이 핏덩이 같은 비단이, 훗날 자신의 가슴에 가장 날카로운 비수를 꽂을 줄은. 거친 숨을 몰아쉬던 이때의 그는 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각사각. 뽀드득.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차가운 눈밭 위로, 붉게 얼어붙은 발자국이 길게 찍혔습니다. 짚신도 신지 못한 맨발이었거든요. 동상으로 끝이 검게 죽은 발가락에서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쉴 새 없이 핏물이 배어 나왔습니다. 헉, 헉. 턱밑까지 차오른 쇳소리 섞인 숨결만이 칠흑 같은 산길의 적막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거기 섰거라. 짐승을 쫓는 사냥꾼의 독기 어린 외침. 등 뒤로 추격대의 사나운 개 짖는 소리가 바짝 따라붙었습니다. 포위망이 좁혀오며 횃불의 붉은빛이 눈밭에 어른거리던 절체절명의 찰나. 품속의 핏덩이가 작은 입을 벌렸습니다. 응애, 하는 울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죠.

만복은 왈칵 쏟아지는 식은땀을 흘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그리고 꽁꽁 언 굵고 투박한 손가락으로 아기의 여린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습니다. 아기의 숨통을 조이듯 꽉 누른 채, 벼랑 끝 바위 틈새로 자신의 큰 몸을 구겨 넣었습니다. 읍, 읍. 아기의 칭얼거림이 투박한 손바닥 안에서 먹먹하게 뭉개졌습니다.

눈앞으로 횃불이 벼랑 끝을 훑고 지나갑니다. 일 초가 억겁처럼 느껴지는 끔찍한 시간. 만복은 자신의 입술을 이가 시리도록 깨물어 피를 내며, 그 지옥 같은 밤의 공포를 버텨냈습니다.

덜컹. 칼바람에 낡은 문풍지가 짐승의 비명처럼 길게 우는 곳. 며칠을 맨발로 헤맨 끝에 두 사람이 닿은 곳은, 세상의 끝자락이었습니다. 관군의 말발굽조차 닿지 않는 첩첩산중 깊은 골짜기의 화전민 촌이었죠. 흙이 부서져 내려 수수깡 뼈대가 흉하게 드러난 낡은 귀틀집 하나. 삐걱, 문을 열자 퀴퀴한 곰팡내와 차가운 흙냄새가 훅 코를 찔렀습니다.

콜록콜록. 덜 마른 소나무 가지를 아궁이에 쑤셔 넣었습니다. 눈물이 쏙 빠질 만큼 매캐한 연기가 좁은 방안을 가득 채웠지요. 다행히 추격대의 서늘한 칼날은 겨우 피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신분을 완벽히 지운 채 버텨내야 할 지독한 가난. 그 진짜 지옥이 이제 막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달빛만 시퍼렇게 들어오는 차가운 윗목. 만복은 꽁꽁 얼어붙은 아기의 몸을 제 체온으로 쉴 새 없이 주물렀습니다. 이 여린 핏덩이를 살려내려면, 주군의 흔적을 세상에서 완벽히 지워야만 했습니다. 양반의 귀한 씨앗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그 즉시 두 사람 모두의 목이 달아날 테니까요.

만복은 쩍쩍 갈라진 입술을 손등으로 스윽 닦아냈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허공을 향해, 스스로 이 아이의 가짜 아비가 되겠노라 독하게 맹세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품속의 아기를 향해, 그의 첫 번째 거짓말이 무겁게 떨어집니다.

아그야. 너는 내 핏줄이 맞다. 네 어미는 널 낳다 피를 쏟고 죽은 천비일 뿐이여.

아무도 듣지 않는, 오직 바람만이 엿들은 어둠 속의 맹세. 하지만 생존을 위해 내뱉은 이 서글픈 한마디가, 훗날 두 사람의 운명을 목이 메도록 옭아매는 무서운 족쇄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가혹하고 모진 세월이 냇물처럼 흘렀습니다. 아기의 여린 배냇머리가 굵고 단단해지는 동안, 아비의 손등엔 굳은살이 겹겹이 쌓여 딱딱한 옹이가 박여갔습니다. 윤이라는 투박한 이름을 얻은 아이는 제법 단단한 소년의 티가 났습니다.

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참혹한 보릿고개였거든요. 끼니때마다 좁고 어두운 방안에선 처절한 생존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달그락. 만복은 하얀 쌀알이 겨우 몇 개 섞인 온전한 밥그릇을 늘 윤의 앞으로 슬쩍 밀어주었습니다. 자신은 어두운 부뚜막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죠. 득득. 득득. 누런 솥바닥에 눌어붙은 딱딱한 누룽지를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냈습니다. 거기에 시린 찬물을 부어, 제대로 씹지도 않고 목구멍으로 꿀꺽 삼켰습니다. 거칠고 목이 메는 식사였죠.

가끔 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비를 쳐다보면, 만복은 애써 너스레를 떨며 시선을 피했습니다.

아비는 속이 타서 시원한 숭늉이 최고여. 잔말 말고 퍼뜩 묵어.

창자가 끊어질 듯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서도, 제 입에 들어갈 밥 한 숟갈을 아껴 기어이 자식의 입에 밀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뜨고 낮이 되면, 만복의 태도는 무섭게 돌변했습니다. 행여나 윤의 곧게 뻗은 골격과 맑은 눈망울에서 양반의 티가 날까 뼛속 깊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털썩. 제 몸집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나무 지게를 윤의 좁은 어깨에 강제로 얹었습니다. 윤이 그 엄청난 무게를 이기지 못해 휘청거리며 입술을 깨물면, 만복은 눈을 부릅뜨고 더 모질게 윽박질렀습니다.

눈깔 안 깔어. 천것으로 태어났으면 평생 흙이나 파먹고 사는 거여. 어여 걷지 못할까.

휙. 찰싹. 매서운 싸리나무 회초리가 허공을 가르며 윤의 얇은 종아리를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살갗이 터지고 붉은 줄이 그어졌지요. 동네 사람들은 그런 만복을 보며 혀를 찼습니다. 제 자식을 밭 가는 소보다 못하게 부리는 독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윤의 가슴속에도, 무정한 아비를 향한 원인 모를 서운함이 독버섯처럼 시퍼렇게 자라나고 있었지요.

그러나 사위가 어두워지고 밤이 깊어지면, 방안의 공기는 일백팔십도 달라졌습니다. 스르륵. 낡은 사립문이 닫히고, 산골 마을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은 시간. 고단한 하루를 보낸 윤이 새우잠에 빠져 고른 숨을 내쉬었습니다. 낮 내내 소리치며 회초리를 들던 독한 아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만복은 바닥에 조용히 무릎을 꿇은 채, 소리 없이 기어서 윤의 발치로 다가갔습니다. 무거운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르내리느라 피가 나고 쩍쩍 갈라진 아이의 발뒤꿈치. 만복은 그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발에 자신의 깊게 패인 주름진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뚝, 뚝. 짙은 어둠 속에서 굵고 뜨거운 눈물방울이 아이의 낡은 버선을 속절없이 적셨습니다. 잠시, 억눌린 흐느낌이 어깨를 들썩이게 했습니다. 낮에는 흙이나 파먹으라며 매질을 하던 억센 사내가. 밤만 되면 차가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극존칭을 쓰며 소리 죽여 오열했습니다.

도련님. 옥체 강녕하시옵니까. 이 미련한 종놈을 부디 용서하옵소서.

도대체 이 늙은 아비는. 칠흑 같은 밤의 어둠 속에 어떤 거대한 비밀의 무게를 숨겨두고 있는 걸까요.

세상의 이치와 신분의 거대한 벽을 깨닫기 시작한 윤은, 갈수록 거칠게 엇나갔습니다. 낡고 가난한 행색에 어울리지 않게, 윤의 눈빛만큼은 유독 굶주린 짐승처럼 형형하게 빛났거든요. 어느 늦은 오후였습니다. 화전민 촌 아래, 마을에서 유일하게 번듯한 기와를 얹은 서당 담장 밖.

꼬물꼬물. 윤은 흙바닥에 쭈그려 앉아, 꺾은 나뭇가지로 무언가를 미친 듯이 적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높은 담장 너머로 고운 비단옷을 입은 양반댁 자제들의 낭랑한 천자문 읽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사각사각. 그 맑은 소리를 입술로 조용히 따라 읊으며, 굳은살이 박여 짓무른 손끝으로 글자를 흙에 꾹꾹 새겼습니다. 뚝. 순간 손에 들어간 억눌린 힘을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가 허망하게 부러졌습니다. 머릿속이 아무리 맑고 글을 잘 깨우쳐도, 평생 소똥을 치우고 흙이나 파먹어야 하는 천민이라는 변하지 않는 사실. 그 지독한 열등감과 절망이 어린 소년의 목을 강하게 조이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게에 땔감을 가득 싣고 산에서 내려오던 만복이 그 쓸쓸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윤은 흙바닥에 쓴 한자 두 개를 번갈아 쳐다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죠. 충성과 충, 그리고 효도 효. 서당 너머로 도둑글을 훔쳐 듣다 보니 두 글자의 깊은 뜻을 헷갈린 겁니다. 윤이 홧김에 발로 흙을 거칠게 덮으려던 찰나였습니다.

삐걱. 만복이 무거운 짐을 멘 지게를 땅에 내려놓으며, 자신도 모르게 툭 내뱉고 말았습니다.

위엣 것은 임금을 향한 변치 않는 마음이고, 아랫것은 부모를 모시는 사람의 도리 아니더냐.

흠칫. 말을 뱉은 만복 스스로도 너무 놀라 황급히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윤의 고개가 휙 돌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시선이 아비의 떨리는 눈동자에 꽂혔습니다. 평생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며 껄껄 웃던 까막눈 아비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글깨나 읽는 양반들도 어려워하는 한자의 깊은 뜻을, 그토록 단번에 정확히 짚어낸 걸까요.

그날 밤, 귀틀집 방안의 공기는 살얼음판을 걷듯 차가웠습니다. 숨기는 것이 있는 아비에 대한 깊은 의구심, 그리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에 대한 분노. 결국 위태롭게 흔들리던 윤의 감정이 둑이 터지듯 폭발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쾅. 윤이 누룽지가 담긴 낡은 밥상을 두 손으로 거칠게 밀어버렸습니다. 찌그러진 밥그릇이 방바닥을 나뒹굴며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를 냈습니다.

아버지는 대체 왜 나를 낳았소. 평생 똥지게나 지고 짐승처럼 살라 그리 낳았소. 이럴 거면 차라리 태어나지나 말 것을.

자신의 출생 자체를 끔찍하게 저주하는 패륜적인 원망. 그 말을 듣는 순간, 만복의 가슴이 시퍼런 비수에 난도질당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만복은 피가 나도록 턱을 앙다물었습니다. 두 주먹을 부서져라 꽉 쥔 채, 윤을 지키기 위한 두 번째 거짓말을 아이의 가슴팍에 사정없이 던졌습니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짓이기며 벼락같이 윽박질렀죠.

시끄럽다. 천것으로 태어난 네 못난 팔자를 탓혀라.

잠시, 방안에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살면서 한 번쯤 늙고 초라해진 부모의 뒷모습에 내 못난 현실을 탓하며 서툰 화를 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윤은 씩씩거리며 그 길로 사립문을 박차고 어둠 속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아이가 쾅 문을 닫고 나간 텅 빈 방안. 홀로 남은 늙은 아비는, 그제야 무릎을 꺾으며 방바닥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끅, 끅. 피를 토하는 듯한 오열이 문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만복은 스스로 자신의 입을 거칠고 굳은 손으로 틀어막았습니다. 마치 관군의 추격대를 피하던 십오 년 전의 그 차가운 눈밭에서처럼요.

그는 벌벌 떨리는 두 손으로 방구석 깊은 곳의 해진 장판을 들춰냈습니다. 바스락. 흙먼지가 뽀얗게 쌓인 낡은 헝겊 뭉치를 덜덜 떨며 조심스레 풀었습니다. 겹겹이 싸인 천 속에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제는 핏자국이 검붉게 변해버린 비단 노리개였습니다.

참극이 벌어졌던 그 밤, 불길 속에서 주군이 강보에 찔러 넣었던 바로 그 저주의 물건. 만복은 그 비단을 자신의 가슴에 터질 듯이 움켜쥐고, 죽은 주군이 잠들어 있을 한양 쪽을 향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소리 죽여 짐승처럼 앓으며 울부짖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남의 눈에 띄면, 즉시 목숨을 잃고 능지처참을 당할 끔찍한 증거. 하지만 이 늙은 아비는 왜 십오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도록, 저 위험한 핏빛 비단을 불에 태워버리지 못했던 걸까요.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습니다. 화가 가라앉고 잔뜩 주눅이 든 표정의 윤이, 슬그머니 사립문을 밀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달그랑. 윤의 굳은 손에는 엽전 두 닢이 꼭 쥐어져 있었지요. 집을 나간 며칠 동안 서당 어르신 댁 마당을 쓸어주고, 장작을 패며 난생처음 제 땀을 흘려 벌어온 귀한 돈이었습니다.

윤은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며 뒷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그리고 품속에서 조심스레 무언가를 꺼내 아비에게 불쑥 내밀었습니다. 스윽. 시장통에서 산, 반질반질하게 깎인 낡은 나무 곰방대 하나였습니다.

오다 주웠소. 불이나 한 번 붙여 보시든가.

무심한 듯 툭 던진 말이었지만, 만복의 굽은 등이 크게 흠칫 떨렸습니다. 거칠게 갈라진 만복의 입가에, 십오 년 만에 처음으로 눈부시게 환한 웃음꽃이 번졌습니다. 눈가엔 고생의 흔적인 주름이 깊게 파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편안한 미소였거든요. 모진 말로 서로의 가슴을 후벼 팠던 두 사람에게, 마침내 평범하고 고요한 진짜 봄날이 찾아오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서툰 화해의 온기가 채 방안을 데우기도 전이었습니다. 철컥, 철컥. 평화롭던 화전민 촌의 고요한 정적을 무참히 찢어발기는, 뼈가 시리도록 서늘한 쇳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역적의 잔당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한양에서 직접 파견된 잔혹한 토포사 무리였습니다.

히힝. 거대한 말발굽이 마을 어귀의 마른 흙먼지를 거칠게 일으켰습니다. 방금 전까지 윤이 내민 나무 곰방대를 애지중지 어루만지던 만복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버렸습니다.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주름진 입가에 굵은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죠. 숨 막히는 긴장감과 함께,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지옥의 문이 다시 열리고 있었습니다.

칼을 빼 든 관군들은 무자비하게 촌장을 위협하며 온 마을 사람들을 넓은 공터로 질질 끌어냈습니다. 저벅, 저벅. 무장한 가죽신의 무거운 발소리가 차가운 흙바닥에 납작 엎드린 백성들 사이를 뱀처럼 헤집고 다녔습니다. 피 냄새를 맡는 짐승처럼 마을 사람들을 노려보던 토포사의 매서운 눈빛. 그 시선이 멈춘 곳은 바로, 뼈대가 굵고 눈빛이 남다른 청년 윤의 앞이었습니다.

휙. 토포사의 거칠고 억센 손이 낡은 저고리를 입은 윤의 멱살을 단숨에 낚아챘습니다. 윤의 몸이 허공으로 반쯤 끌려 올라갔습니다.

이놈의 타고난 골격은 절대 천것이 아니로구나. 바른대로 고하거라. 네놈의 진짜 아비가 누구냐.

숨 막히는 죽음의 공포가 윤의 목을 단단한 밧줄처럼 조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펄럭. 윤을 거칠게 흔들던 토포사의 품에서, 숨어있는 역적을 찾는 붉은 수배지 한 장이 땅으로 툭 떨어졌습니다. 종이 한가운데에는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그려진, 기이한 가문의 문양이 있었습니다.

땅바닥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던 윤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 문양에 꽂혔습니다. 쿵. 윤의 심장이 발밑 까마득한 곳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습니다.

집을 뛰쳐나갔다 몰래 돌아왔던 그 밤. 오열하던 늙은 아비의 품에서 우연히 삐져나왔던 그 낡은 비단의 문양. 바로 그것과 소름이 끼치도록 똑같았거든요. 자신이, 평생을 끔찍하게 저주하고 부끄러워했던 천비의 핏줄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사실. 그 거대한 진실이 머리를 강타하기도 전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윤의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와장창. 공터 구석에서 고막을 찢는 엄청난 파열음이 터졌지요. 돌아보니 만복이 시퍼런 낫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관군의 임시 식량 창고를 완전히 박살 내고 있었던 겁니다. 만복은 실성한 사람처럼 곡식 포대를 찢어발기며 악에 받쳐 소리쳤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랬슈. 관아의 쌀, 내가 싹 다 훔쳐 먹었슈.

그 엄청난 소란에, 모든 관군의 매서운 시선이 멱살 잡힌 윤에게서 낫을 든 만복으로 단번에 옮겨갔습니다. 질질. 순식간에 제압당한 만복은 굵은 포승줄에 온몸이 묶인 채, 거친 흙바닥을 끌리며 관아로 압송되었습니다.

윤을 향해 좁혀오던 토포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돌리기 위한 처절한 발악. 만복은 아이의 정체가 들켜 목이 달아날 찰나, 스스로 도둑 누명을 뒤집어쓰고 끔찍한 죽음의 사지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겁니다.

며칠이라는 피 말리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검게 변해버린 멍석 하나가 귀틀집 마당에 짐짝처럼 버려졌습니다. 풀썩. 멍석 안에는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망가진 만복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심장이 멎을 듯 놀란 윤이 맨발로 마당을 뛰어나와, 뼈가 부서진 아비의 몸을 부둥켜안았습니다. 콜록, 컥. 만복은 목구멍으로 끓어오르는 검붉은 핏덩이를 바닥에 토해내면서도, 쩍쩍 갈라진 입술을 올려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하다, 미련한 산짐승에게 깊게 할퀴었을 뿐이여. 너무 놀라지 말어라.

그저 재수가 없어 운이 나빴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그의 인생 마지막이 될 세 번째 거짓말을 뱉었죠. 하지만 윤의 떨리는 손끝은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등 뒤로 만져지는 이 처참한 상처가, 산짐승의 발톱 따위가 낸 자국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요.

밤이 칠흑같이 깊어지자, 방안을 채우던 만복의 거친 숨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듯, 투박한 손끝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지요. 헉, 헉. 윤은 소리 없는 뜨거운 눈물을 비 오듯 쏟으며, 등에 엉겨 붙은 피떡을 젖은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냈습니다.

찌익. 피와 살점에 딱딱하게 들러붙은 저고리를 조심스레, 그러나 거칠게 뜯어내는 순간. 윤의 밭은 숨이 턱 막히고 말았습니다. 좁은 방안의 공기가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시리게 얼어붙었습니다.

미련한 산짐승이 낸 가벼운 상처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치이익. 붉게 달군 쇠 인두가 사람의 연한 살갗을 무자비하게 지지고 지나간 끔찍한 화상 자국. 모진 곤장에 수없이 맞아 살점이 다 파여 나가고 뼈가 드러난 처참한 고문의 흔적뿐이었습니다. 동네 관상배들에게 시비가 붙어 맞은 가벼운 매질 따위가 아니었죠. 이것은 분명, 나라의 역적을 가혹하게 추궁하는 지옥의 형벌이었습니다.

만복은 윤을 향한 토포사의 의심의 불씨를 완벽히 꺼트리기 위해. 곡식을 훔쳤다는 누명 대신, 스스로 역적 잔당으로 몰리며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입을 다문 채 묵묵히 홀로 견뎌낸 것입니다.

뚝, 뚝. 윤의 뜨거운 눈물이 깊게 찢겨진 아비의 등에 쉴 새 없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스윽.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는 늙은 아비의 굳어가는 손이, 자신의 피 묻은 품속을 필사적으로 뒤적였습니다. 십오 년의 긴 세월 동안 깊은 어둠 속에 꽁꽁 묻어둔 붉은 비단. 그 피 묻은 헝겊 뭉치를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꺼내어, 윤의 넓은 가슴 품에 꼭 쥐여주었습니다.

도련님. 이 놈의 못난 혓바닥이 주둥이로 지은 죄를, 부디 용서하옵소서.

숨을 헐떡이며 끊어질 듯 뱉어낸 고백. 네 어미가 천비라며 여린 가슴을 무참히 후벼 팠던 그 날의 거짓말. 타고난 팔자를 탓하라며 눈물을 머금고 내리쳤던 모진 회초리. 그리고 산짐승에게 다쳤다며 피를 토하면서도 애써 웃어 보였던 방금 전의 핑계까지.

그 순간, 윤의 머릿속을 폭풍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십오 년간 자신의 가슴에 꽂혔던 그 모든 비수 같던 말들이. 사실은 어린 자신의 숨통을 지키고 살려내기 위해, 무식한 아비가 홀로 온몸으로 짊어진 가장 눈물겹고도 튼튼한 방패였음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계신 여러분이라면 어떠셨을까요. 내 살붙이도 아닌 원수의 핏덩이를 온전히 살려내기 위해, 기꺼이 내 등가죽을 끔찍한 불덩이에 내어줄 수 있었을까요.

내가 천비의 자식이라 그리 모질게 하셨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어찌하여 이리 끔찍하게 되셨소.

꺼이꺼이. 짐승처럼 통곡하며 가슴을 치는 윤의 울음소리가 좁고 어두운 방안을 처절하게 뒤흔들었습니다. 만복은 남은 힘을 쥐어짜 형체도 남지 않은 피투성이 손을 느릿느릿 들어 올렸습니다. 툭. 자신을 원망하며 미친 듯이 오열하는 윤의 뜨거운 입술을 투박한 손으로 지그시 막았습니다. 십오 년 전, 눈보라가 치던 추운 산길에서 아기의 울음을 막아 목숨을 살렸던 바로 그 거친 손이었습니다.

부디 살아서, 살아남으셔야 하옵니다.

그 한마디가, 평생을 바쳐 헌신한 미련하고도 위대한 충복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마침내, 제발 숨을 멈추라 당부하던 늙은 종의 거친 호흡이 영원히 멎었습니다. 허공을 맴돌며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던 굳은 손이 방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습니다. 휘이잉. 찢어진 문풍지를 때리며 들어오는 매서운 칼바람 소리. 스으으. 그리고 죽은 가짜 아비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청년의 억눌린, 짐승 같은 울음소리만이 남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하얗게 지워진 듯, 지독하게 길고 서글픈 밤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오랜 세월이 강물처럼 흘렀습니다. 사락사락. 뒷산 양지바른 곳, 마른 낙엽이 흙 위로 구르는 평화로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장성한 윤은 자신을 멸문지화에 빠뜨린 원수를 향해 피 묻은 칼을 드는 복수 대신, 늙은 종이 피 토하며 남긴 유언을 묵묵히 지켰습니다. 살아남아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

이름조차 없는 둥근 흙무덤 앞에 단정히 꿇어앉은 윤. 쪼르륵. 세월의 풍파로 거칠어진 손으로, 묵묵히 맑고 투명한 술잔을 채워 무덤 앞에 올렸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원망하며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던 어리석은 소년은 이제 그곳에 없었죠. 모든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세상을 넉넉히 품어낸 성숙한 어른의 단단한 뒷모습만이,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묘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던 긴 시간을 건너, 맨 처음 보았던 그 초라한 비석 앞으로 돌아옵니다. 스아아. 비를 머금은 부드러운 바람이 낡은 비석을 조용히 쓰다듬고 지나갑니다. 대의를 위해 자식을 버려 주군을 지킨 부모의 마음. 그리고 그 원수의 핏덩이를 온전히 살려내기 위해 평생 자신의 피와 살을 바친 종의 숭고한 헌신.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조차 비 오는 진흙탕에 가마를 멈추고 내리게 만든 건, 역사에 남을 대단한 권력이나 번뜩이는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굶더라도 내 입에 들어갈 밥 한 숟갈을 기꺼이 밀어주던, 그 미련하고 바보 같은 헌신과 사랑이었습니다.

당신의 길고 긴 인생에서, 가장 맹목적으로, 아무 조건 없이 가장 미련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오늘 밤,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평생을 바친 이 노비의 거칠고도 따뜻한 사랑이 여러분의 지친 삶에 작은 위로가 되셨다면. 화면 아래 보이는 빨간 구독 버튼을 한 번만 꾹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남편이 남긴 빚을 갚기 위해 제 발로 어두운 무덤을 파고 들어간 한 여인의 기막힌 사연입니다. 긴 이야기, 끝까지 함께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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