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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출물 (v1)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만 들립니다. 헉. 헉.
박경수가 다급하게 속삭입니다.
이건 병이 아니야. 독이다.
쨍그랑.
사기그릇이 바닥에 박살 나는 소리가 울립니다.
보글보글.
약탕기는 끓고 있는데 사람은 없습니다.
영조 십이 년 한양 최고의 명의 박경수가 증발했습니다.
남겨진 건 깨진 약사발과 독이 묻은 금비녀 하나뿐.
그날 밤 이 좁은 약방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각사각.
붓으로 종이를 긋는 소리가 어둠을 가릅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요.
하지만 진짜 진실은 패자의 핏자국 속에 숨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에서조차 찢겨나간 그날 밤.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잔혹한 진실의 첫 장입니다.
싹둑싹둑.
마른 약재를 작두로 써는 소리가 경쾌합니다.
시간을 이틀 전으로 돌려봅니다.
여기는 종로 뒷골목 수인당입니다.
주인장 박경수는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신의였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습니다.
정작 본인은 딸아이 혼수 비용 걱정에 비싼 녹용 가루 하나도 버리지 못했지요.
그저 평범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날도 박경수는 아내에게 호언장담했습니다.
부인. 이번 달 약값만 수금되면 비단옷 한 벌 해드리오리다. 내 약속하지요.
거짓말이었습니다.
사실 그 돈은 딸아이 시집갈 때 쓸 비상금이었거든요.
하지만 박경수는 몰랐습니다.
이 사소한 거짓말을 지킬 기회조차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요.
쏴아아.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밤이었습니다.
쾅. 쾅. 쾅.
문이 부서져라 두들기는 소리.
박경수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물에 흠뻑 젖은 여인이 아이를 업고 서 있었습니다.
얼굴은 창백하고 치맛자락은 진흙투성이였지요.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분명 양반가의 규수 차림인데 업혀 있는 아이가 여인을 하대하고 있었거든요.
아이가 힘없지만 또렷하게 말합니다.
이모. 나 추워.
여인이 쩔쩔매며 대답합니다.
예. 예 도련님. 곧 따뜻해질 것입니다.
이모라고 부르는데 말투는 상전입니다.
박경수는 본능적으로 방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빗소리가 멀어지고 쿵. 쿵. 희미한 심장박동 소리만 남습니다.
아이는 불덩이 같았습니다.
단순한 열병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맥을 짚던 박경수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합니다.
아이의 손톱.
그 작은 손톱 밑에 희미한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숨을 뱉을 때마다 묘하게 톡 쏘는 마늘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이건 병이 아닙니다.
중독입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조금씩 몸에 쌓인 비상 중독이었지요.
박경수가 손을 뗐습니다.
나가시오. 내가 고칠 병이 아니오.
살리면 죽는다.
박경수의 동물적인 감각이 경고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습니다.
텅.
묵직한 금속음이 울렸습니다.
도입부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금비녀였습니다.
비녀 머리에 새겨진 발톱 다섯 개 달린 용.
오조룡.
왕실의 직계 혈통만이 지닐 수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박경수의 목젖이 크게 울렁거렸습니다.
이걸 받으면 역모에 휘말립니다.
거절하면 비밀을 안 죄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지요.
진퇴양난.
그때 아이가 박경수의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고사리 같은 손이 살려달라는 듯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요.
결국 박경수는 선택했습니다.
약방 뒷문을 열었습니다.
박경수가 다급하게 말합니다.
이곳은 위험하오. 냄새를 맡고 곧 들이닥칠 게요. 성 밖으로 가야겠소.
가장 안전한 곳은 가장 위험한 곳.
박경수는 아이와 여인을 데리고 성 밖 십 리 떨어진 폐사찰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박경수는 몰랐습니다.
그곳이 구원의 장소가 아니라 더 깊은 지옥의 입구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삐걱.
낡은 문이 열리고 윙윙 바람 소리가 스며듭니다.
버려진 절간은 춥고 습했습니다.
깨진 기와 사이로 빗물이 뚝. 뚝 떨어졌지요.
박경수는 서둘러 약을 달였습니다.
해독에 좋다는 감두탕을 끓이고 아이에게 먹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했습니다.
쿨럭.
아이가 검은 물을 토해냈습니다.
약을 먹일수록 아이는 더 괴로워했습니다.
맥박은 미친 듯이 뛰다가 툭 끊어지기를 반복했지요.
박경수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해독제가 듣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독이 아이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박경수는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뒤졌습니다.
물도, 음식도 직접 검수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소름이 쫙 번졌습니다.
그 순간 박경수의 시선이 아이의 짐보따리에 꽂혔습니다.
궁중에서만 쓰는 귀한 약재 자하거.
떨리는 손으로 냄새를 맡았지만 독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다시 맥을 짚었습니다.
쿵. 쿵. 쿵.
심장박동 소리가 귓가를 강하게 때립니다.
아이의 심장은 꺼져가는 등불처럼 위태로웠습니다.
박경수의 시선이 아이의 몸 구석구석을 훑었습니다.
창백한 얼굴.
말라버린 입술.
그리고 아이가 가슴팍에 꼭 쥐고 있는 낡은 주머니 하나.
박경수가 혼잣말처럼 묻습니다.
부인. 저 주머니는 뭡니까.
여인이 울먹이며 답합니다.
어미가 아이를 지켜달라고 준 호신 부적입니다. 잠시도 손에서 놓질 않습니다.
어미가 준 부적.
아이는 어미가 그리워 냄새를 맡을 때마다 죽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조금씩 천천히요.
박경수는 거칠게 주머니를 낚아챘습니다.
끈을 풀자 말린 꽃잎 가루가 후두둑 쏟아졌습니다.
투구꽃이었습니다.
사약의 재료로 쓰이는 맹독성 초오.
그 가루가 부적 속에 교묘하게 섞여 있었던 겁니다.
범인은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척하며 부적을 만들어 손에 쥐여준 사람.
바로 궁궐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아이의 혈육이었습니다.
이걸 당장 태워야 하오.
박경수가 소리치던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립니다.
사찰 밖 어둠 속에서 누군가 칼을 뽑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말발굽 소리.
추격자가 당도했습니다.
박경수는 연화의 손을 잡고 뒷문으로 뛰었습니다.
진흙탕에 발이 푹푹 빠졌지만 뒤를 돌아볼 새도 없었지요.
아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집니다.
독이 다시 퍼지고 있습니다.
뚝. 뚝.
동굴 안 물방울 소리가 울립니다.
겨우 몸을 피한 곳은 산 중턱의 작은 바위 굴.
박경수는 젖은 옷을 찢어 아이의 체온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손발은 이미 얼음장이었습니다.
연화가 흐느끼며 말합니다.
의원님. 살려야 합니다. 이 아이는 죽으면 안 됩니다.
박경수가 화를 참으며 소리칩니다.
누구 집 자식이길래. 도대체 누구길래 이 난리란 말이오.
번쩍.
번개가 동굴 안을 비췄습니다.
연화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습니다.
주상 전하의 핏줄입니다.
무수리의 소생인 영조 임금이 몰래 숨겨둔 핏줄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살아있는 한 피바람은 멈추지 않겠지요.
박경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평범한 의원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잔혹한 조선의 민낯이었습니다.
환청처럼 아내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빗소리가 오버랩됩니다.
빗소리를 뚫고 조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박 의원. 자네 집 대문 앞에 내가 뭘 두고 왔는지 아나.
박경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조영이 말한 물건.
그것은 박경수의 집에 두었던 가짜 금비녀였습니다.
박경수가 다급하게 생각합니다.
설마. 우리 수진이. 여보.
비단옷 한 벌.
아내에게 했던 그 거짓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습니다.
지금 죽으면 그 약속은 영영 지키지 못합니다.
비단옷은커녕 수의조차 입혀주지 못하게 생겼으니까요.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지요.
만약 여러분이라면 저 문을 여시겠습니까.
아니면 가족을 위해 뒷문으로 도망치시겠습니까.
선택해야 합니다.
아이를 내주면 가족은 삽니다.
아이를 지키면 가족이 죽습니다.
의원의 양심. 충심.
당장 내 새끼가 죽게 생겼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박경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그는 쥐고 있던 침 통을 바닥에 내던졌습니다.
쨍그랑.
빗소리가 잦아들고 스릉 하고 칼 뽑는 소리가 들립니다.
헉. 헉. 거친 숨소리만 남습니다.
박경수가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어둠 속에 조영이 서 있었습니다.
칼끝은 비에 젖어 번들거렸지요.
박경수의 거친 숨소리가 허공에 흩어졌습니다.
박경수가 목소리를 깔며 말합니다.
아이를 넘기겠소.
동굴 안에서 연화의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박경수는 고개를 돌렸습니다.
박경수가 이를 악물고 말합니다.
대신 약속하시오. 내 처자식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고.
조영이 칼끝으로 빗물을 털어내며 비릿하게 웃었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야. 데려와.
박경수는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얼굴이나 보겠다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쿵. 쿵.
심장박동 소리가 다시 등장합니다.
박경수는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습니다.
독약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 죽음 약 가사산.
복어의 독을 정제해 만든 사람을 일시적으로 죽은 상태로 만드는 극약이었습니다.
반 각.
딱 반 각이다. 그 이상 심장이 멈추면 진짜 죽는다.
이것은 도박이었습니다.
조영을 속이려면 아이의 심장을 멈춰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양 조절에 실패하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합니다.
박경수의 손에 땀이 찼습니다.
수만 번 침을 놓았던 그 손이 오늘따라 야속하게 떨려옵니다.
박경수가 아이에게 속삭입니다.
도련님. 아주 깊은 잠을 주무실 겁니다. 무서워 마세요.
꿀꺽.
아이가 약을 삼켰습니다.
하나. 둘. 셋.
아이의 고개가 툭 떨어졌습니다.
삐.
심장박동 소리가 멈춥니다.
탁. 타닥.
나무가 터지는 소리. 화르륵.
박경수는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나갔습니다.
조영이 아이의 목에 손을 댔습니다.
맥이 없습니다.
숨도 쉬지 않습니다.
죽었습니다.
조영이 말합니다.
깔끔하군.
조영이 아이의 시신을 챙기려던 찰나 박경수가 들고 있던 등불을 조영의 옷자락에 던졌습니다.
화르륵.
기름을 먹인 옷에 불이 붙었습니다.
조영이 당황한 사이 박경수는 소리쳤습니다.
지금이오. 뛰시오 부인.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연화가 아이를 낚아채 숲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속았습니다.
조영의 눈이 뒤집혔습니다.
도망칠 길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경수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찰의 기둥을 부여잡고 입구를 막아섰습니다.
자신이 미끼가 되어야 아이가 살 수 있으니까요.
쿠르릉.
건물 무너지는 소리와 거세지는 불길 소리가 들립니다.
불길이 사찰을 집어삼켰습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박경수는 평생 맡아온 약재 냄새가 아닌 자신의 살 타는 냄새를 맡아야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표정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댕. 댕.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습니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영조의 태평성대가 열렸습니다.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를 찬양하며 웃었지요.
하지만 그 화려한 궁궐의 평화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름 없는 한 의원이 잿더미 속에서 피워낸 붉은 꽃이었습니다.
사락.
낡은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다시 텅 빈 수인당 약방입니다.
홀로 남은 아내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합니다.
낡은 장부 하나가 툭 떨어집니다.
돈을 모으겠다던 딸의 혼수 장부였습니다.
아내는 떨리는 손으로 장부를 펼칩니다.
거기엔 금액 대신 빼곡하게 적힌 날짜와 글귀뿐이었습니다.
박경수의 목소리가 따뜻한 메아리처럼 울립니다.
삼월 사일 아이의 열이 내림. 살려야 한다.
삼월 오일 맥이 돌아옴. 반드시 살려야 한다.
돈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저 생명을 살리려는 바보 같은 다짐들만 가득했습니다.
아내는 장부를 가슴에 품고 오열했습니다.
그리고 장부 맨 뒷장 검게 그을린 금비녀 하나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것이 왕실의 보물이 아니라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왕의 이름을 기록하지만 그 역사를 지탱한 것은 박경수 같은 수많은 아버지들이었을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었다면 내 가족을 위해 아이를 포기했을까요.
아니면 박경수처럼 끝까지 의원으로서 남았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의 무게는 오늘 밤 우리가 깊이 생각해볼 만한 질문입니다.
오늘 이 이름 없는 영웅의 선택이 여러분의 마음을 울렸다면 구독으로 그를 기억해 주십시오.
다음 시간에는 조선 최고의 관상가가 남긴 기막힌 핏빛 미스터리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역사 야담이었습니다.
스텝 재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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