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6: 파일럿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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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출물 (v1)

보통
kie · gemini-3-pro

1화: 달콤한 독

독의 맛은 생각보다 달았다.

혀끝이 마비되고 목구멍이 타오르는 감각보다 더 선명한 것은, 내 손에 찻잔을 들려준 남편의 무심한 눈빛이었다.

에드하르트 발렌티노 공작.
제국의 실세, 나의 정적(政敵), 그리고 서류상의 반려.

그가 나를 죽였다.

"안녕."

그것이 내 유언이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평생을 서로 으르렁거리며 물어뜯던 사이의 마지막치고는 지나치게 싱거웠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심장이 멈추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내 시선 끝에, 그의 구두코가 보였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당신답네.
빌어먹게 냉정한 남자.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아니, 감았다고 생각했다.

"……일어났나?"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
지겹도록 들어온, 그러나 다시는 들을 수 없어야 할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천장이 보였다.
지옥의 천장이 이렇게 고급스러운 실크 벽지로 마감되어 있을 리는 없었다.

숨을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공기가 들어찼다.
타들어 가는 고통이 없었다. 피비린내 대신 은은한 라벤더 향이 났다.

"리리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렸다. 침대 맡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그리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회색 눈동자.
에드하르트였다.

본능적으로 몸이 튀어 올랐다.
공포라기보다는 혐오에 가까운 반사작용이었다.

"오지 마!"

내 입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을 휘둘렀다. 그가 내 이마를 짚으려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짝!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적막한 침실을 갈랐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내 목을 조르거나, 다시 독을 먹일 거라 생각했다. 품에 숨겨둔 단검이라도 찾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

그가 쳐내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를 내지도, 비웃지도 않았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잘못 봤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제국의 냉혈한, 피도 눈물도 없는 에드하르트 공작의 손이, 마치 벼랑 끝을 잡고 있는 사람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
죽기 직전에 보았던 무심한 눈빛이 아니었다.
무언가 무너져 내린 듯한, 혹은 무너지는 것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 듯한 눈.

"……열은."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렸다. 다행히."

"뭐?"

"악몽을 꾼 모양이군. 비명을 지르더군."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쳐내진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그 떨림을 들키기 싫다는 듯이.

"의사를 부르지. 쉬고 있어."

그는 도망치듯 침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멍하니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손을 들어 내 목을 만져보았다. 매끄러웠다.
침대 옆 협탁에는 날짜를 알리는 달력이 놓여 있었다.

[제국력 482년 4월 15일]

손끝이 차가워졌다.
기억한다. 이 날짜를 잊을 리가 없다.

내가 죽은 날은 485년이었다.
정확히 3년 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4월 15일은.

"미친……."

입에서 욕설이 새어 나왔다.
단순히 3년 전으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오늘은 황태자가 주최하는 '봄의 연회'가 열리는 날이다.
그리고 내가 독을 마시고 처음으로 피를 토했던, 바로 그 사건의 시작점이었다.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날로 회귀했다?
신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왕 돌려보낼 거면 좀 평화로운 시기로 보내줄 것이지, 하필이면 지뢰밭 한복판이라니.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직 독의 기억이, 그 끔찍한 감각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거울 앞에 섰다.
창백하지만 살아있는 얼굴. 붉은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선명한 입술.
살아있다.
나는 분명히 살아있다.

"하."

헛웃음이 났다.
살아났으니 기뻐해야 하나?
아니, 그럴 시간이 없다.

오늘 연회에 참석하면 나는 또다시 독에 노출된다.
그때는 만성 중독의 시작이었지만, 3년 뒤의 죽음은 확실한 치사량이었다.

범인은 명확했다.
에드하르트 발렌티노. 내 남편.

그는 황태자의 최측근이었고, 나는 황태자를 견제하는 귀족파의 수장이었다.
우리의 결혼은 정전(停戰) 협정이었지, 사랑의 결실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나를 제거하려 한 건 정치적으로 타당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 반응은 뭐지?

『다행히.』

열이 내려서 다행이라고?
그 인간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단어였다.
차라리 "죽지 않아서 유감이군"이라고 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손을 뻗으려다


2화: 변수 (The Variable)

"공작님, 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하녀의 목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은쟁반 위,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찻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향긋한 베르가못 향.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아주 미세한 아몬드 냄새.

'비소.'

내 기억이 맞다면 저건 비소였다.
한 번에 죽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내장을 녹여가며 사람을 말려 죽이는 독.
전생의 나는 저걸 3년이나 마셨다. 남편이 주는 사랑이라 착각하면서.

"리리스."

에드하르트가 불렀다.
그가 턱짓으로 찻잔을 가리켰다.

"마셔.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좋아했지. 당신이 줬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여기서 거부하면?
그는 의심할 것이다. 내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그렇다고 마시면?
오늘 밤부터 피를 토하며 앓아눕게 될 것이다. 그리고 3년 뒤,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다시 죽겠지.

선택해야 했다.
지금 당장 의심을 사더라도 살 것인가, 아니면 멍청하게 다시 죽어줄 것인가.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찻잔의 손잡이가 차갑게 느껴졌다.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김이 얼굴에 닿았다.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깨트리자.'

실수 인척, 손이 미끄러진 척 바닥에 던져버리자.
그리고 앓아눕는 연기를 하자.
그게 최선이다.

손가락에 힘을 풀려는 찰나였다.

"잠깐."

쑥, 하고 찻잔이 내 손에서 사라졌다.
눈을 깜빡였다.
에드하르트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찻잔을 낚아채 갔다.

"……에드하르트?"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눈높이로 들어 올리더니, 가만히 내용물을 응시했다.
마치 그 안에 든 것이 차가 아니라 늪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꿀꺽.

그가 마셨다.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

내 입이 벌어졌다.
무슨 짓이야?
그거 독이잖아.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당신이 시킨 거잖아!

그는 빈 잔을 쟁반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달그락.
위태로운 소리가 났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입가를 손등으로 훔쳐냈다.

"식었군."

그가 뱉은 말은 그게 다였다.

"다시 가져와. 뜨거운 걸로."

하녀가 당황하며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금방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하녀가 쟁반을 들고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침실에는 다시 정적만이 남았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남자의 행동 알고리즘이 내 기억과 다르다.
전생의 에드하르트라면, 내가 마시는 걸 끝까지 지켜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어야 했다.

"왜…… 마셨어?"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특유의 무심한 가면을 썼다.

"네 안색이 창백해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식은 차는 몸에 안 좋아."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이 제국에서 가장 냉철한 정치가가 고작 '식은 차' 때문에 남의 잔을 뺏어 마신다고?
그것도 독이 든 걸 알면서?

잠깐.
혹시 모르는 건가?
하녀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인가? 아니면 제3의 세력이 개입했나?
그래서 그가 독인 줄 모르고 마신 거라면?

"당신, 괜찮아?"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비소라기보다는 자조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걱정해 주는 건가? 내 부인께서?"

"비꼬지 말고."

"멀쩡해. 보시다시피."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등 뒤로 감춘 그의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져 있다는 것을.

"쉬어. 저녁 연회 준비는 사람을 보낼 테니."

그는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간 문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무언가 잘못됐다.
내가 아는 미래와 다르다.
변수(Variable).
이 회귀에는 내가 모르는 치명적인 변수가 존재한다.


밤이 깊었다.
저택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숄을 걸쳤다.

확인해야 했다.
그가 정말 독인 줄 모르고 마신 건지, 아니면 알고도 마신 건지.
그리고 만약 알았다면, 대체 왜 그랬는지.

맨발로 복도를 걸었다.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에드하르트의 집무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깨어 있군.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종이 넘기는 소리, 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릴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전혀 다른 소리였다.

"쿨럭! 컥, 허억……."

기침 소리.
단순한 기침이 아니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참아내며 토해내는, 젖은 소리였다.

"후우, 욱……."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무언가 바닥에 쓰러지거나 부딪친 것 같았다.
그리고 물소리. 아마도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는 소리겠지.

독이다.
확실하다.
그는 독을 마셨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알고 있었어.'

그는 그 차에 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를 죽이려던 게 아니었나?
그럼 왜 전생의 나를 죽게 내버려 뒀지? 아니, 왜 이번 생엔 대신 마신 거지?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서 '냉혈한 에드하르트'와 '방금 독을 마신 에드하르트'가 충돌하며 파열음을 냈다.

진실을 알아야 했다.
그가 방을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진 얼굴이었다. 입가에는 닦아내지 못한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침실 쪽으로 사라졌다.

기회다.

나는 숨죽여 집무실로 들어갔다.
책상 위는 어지러웠다. 서류 더미와 잉크병, 깃펜들이 널려 있었다.
전생의 그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정리를 잘했다. 이런 무질서는 그답지 않았다.

책상 위를 훑었다.
황태자가 보낸 서신, 영지 관리 문서, 세금 보고서……
별다른 건 없었다.

서랍을 열었다. 잠겨 있지 않았다.
맨 위칸에는 인장과 열쇠들.
두 번째 칸에는 권총 한 자루.

그리고 가장 깊은 곳, 세 번째 서랍.
거기에 낡은 가죽 노트 하나가 들어 있었다.

[제국력 480년 ~ ]

그의 일기장인가? 아니면 비밀 장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는 평범한 업무 일지였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내용이 이상해졌다.

[481. 12. 05. 실패. 너무 늦었다.]
[482. 01. 15. 황태자의 감시가 심해졌다. 접근 불가.]
[482. 03. 20. 독살 시도 감지. 하녀장 매수 필요.]

내용이 끊겨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 페이지. 날짜는 오늘이었다.

[482. 04. 15. 암살 계획서 - 대상: 리리스 발렌티노]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역시나. 암살 계획서가 존재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4월 15일 연회 전, 차에 비소를 타서 1차 중독 유도. 3개월 내 자연사 위장.'

내가 전생에 겪었던 바로 그 시나리오였다.
범인은 에드하르트가 맞았다. 이 계획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증거니까.

배신감보다 먼저 공포가 밀려왔다.
역시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아까 대신 마셔준 건 무슨 쇼였던 거야? 죄책감 덜기? 아니면 더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나는 입술을 깨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다음 장에 붉은 잉크로 거칠게 덧쓴 글씨가 보였다.


3화: 오류 (System Error)

[기각. 건드리는 새끼는

파트별 산출물

ep1 (1,405 tokens)

1화: 달콤한 독

독의 맛은 생각보다 달았다.

혀끝이 마비되고 목구멍이 타오르는 감각보다 더 선명한 것은, 내 손에 찻잔을 들려준 남편의 무심한 눈빛이었다.

에드하르트 발렌티노 공작.
제국의 실세, 나의 정적(政敵), 그리고 서류상의 반려.

그가 나를 죽였다.

"안녕."

그것이 내 유언이었다. 웃기지도 않는군. 평생을 서로 으르렁거리며 물어뜯던 사이의 마지막치고는 지나치게 싱거웠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심장이 멈추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내 시선 끝에, 그의 구두코가 보였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당신답네.
빌어먹게 냉정한 남자.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아니, 감았다고 생각했다.

"……일어났나?"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
지겹도록 들어온, 그러나 다시는 들을 수 없어야 할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천장이 보였다.
지옥의 천장이 이렇게 고급스러운 실크 벽지로 마감되어 있을 리는 없었다.

숨을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공기가 들어찼다.
타들어 가는 고통이 없었다. 피비린내 대신 은은한 라벤더 향이 났다.

"리리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렸다. 침대 맡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그리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회색 눈동자.
에드하르트였다.

본능적으로 몸이 튀어 올랐다.
공포라기보다는 혐오에 가까운 반사작용이었다.

"오지 마!"

내 입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을 휘둘렀다. 그가 내 이마를 짚으려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짝!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적막한 침실을 갈랐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내 목을 조르거나, 다시 독을 먹일 거라 생각했다. 품에 숨겨둔 단검이라도 찾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

그가 쳐내진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를 내지도, 비웃지도 않았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잘못 봤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제국의 냉혈한, 피도 눈물도 없는 에드하르트 공작의 손이, 마치 벼랑 끝을 잡고 있는 사람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
죽기 직전에 보았던 무심한 눈빛이 아니었다.
무언가 무너져 내린 듯한, 혹은 무너지는 것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 듯한 눈.

"……열은."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렸다. 다행히."

"뭐?"

"악몽을 꾼 모양이군. 비명을 지르더군."

그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쳐내진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그 떨림을 들키기 싫다는 듯이.

"의사를 부르지. 쉬고 있어."

그는 도망치듯 침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멍하니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손을 들어 내 목을 만져보았다. 매끄러웠다.
침대 옆 협탁에는 날짜를 알리는 달력이 놓여 있었다.

[제국력 482년 4월 15일]

손끝이 차가워졌다.
기억한다. 이 날짜를 잊을 리가 없다.

내가 죽은 날은 485년이었다.
정확히 3년 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4월 15일은.

"미친……."

입에서 욕설이 새어 나왔다.
단순히 3년 전으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오늘은 황태자가 주최하는 '봄의 연회'가 열리는 날이다.
그리고 내가 독을 마시고 처음으로 피를 토했던, 바로 그 사건의 시작점이었다.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날로 회귀했다?
신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왕 돌려보낼 거면 좀 평화로운 시기로 보내줄 것이지, 하필이면 지뢰밭 한복판이라니.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직 독의 기억이, 그 끔찍한 감각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거울 앞에 섰다.
창백하지만 살아있는 얼굴. 붉은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선명한 입술.
살아있다.
나는 분명히 살아있다.

"하."

헛웃음이 났다.
살아났으니 기뻐해야 하나?
아니, 그럴 시간이 없다.

오늘 연회에 참석하면 나는 또다시 독에 노출된다.
그때는 만성 중독의 시작이었지만, 3년 뒤의 죽음은 확실한 치사량이었다.

범인은 명확했다.
에드하르트 발렌티노. 내 남편.

그는 황태자의 최측근이었고, 나는 황태자를 견제하는 귀족파의 수장이었다.
우리의 결혼은 정전(停戰) 협정이었지, 사랑의 결실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나를 제거하려 한 건 정치적으로 타당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 반응은 뭐지?

『다행히.』

열이 내려서 다행이라고?
그 인간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단어였다.
차라리 "죽지 않아서 유감이군"이라고 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손을 뻗으려다

ep2 (2,125 tokens)

2화: 변수 (The Variable)

"공작님, 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하녀의 목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은쟁반 위,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찻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향긋한 베르가못 향.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아주 미세한 아몬드 냄새.

'비소.'

내 기억이 맞다면 저건 비소였다.
한 번에 죽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내장을 녹여가며 사람을 말려 죽이는 독.
전생의 나는 저걸 3년이나 마셨다. 남편이 주는 사랑이라 착각하면서.

"리리스."

에드하르트가 불렀다.
그가 턱짓으로 찻잔을 가리켰다.

"마셔.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좋아했지. 당신이 줬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여기서 거부하면?
그는 의심할 것이다. 내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그렇다고 마시면?
오늘 밤부터 피를 토하며 앓아눕게 될 것이다. 그리고 3년 뒤,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다시 죽겠지.

선택해야 했다.
지금 당장 의심을 사더라도 살 것인가, 아니면 멍청하게 다시 죽어줄 것인가.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찻잔의 손잡이가 차갑게 느껴졌다.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김이 얼굴에 닿았다.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깨트리자.'

실수 인척, 손이 미끄러진 척 바닥에 던져버리자.
그리고 앓아눕는 연기를 하자.
그게 최선이다.

손가락에 힘을 풀려는 찰나였다.

"잠깐."

쑥, 하고 찻잔이 내 손에서 사라졌다.
눈을 깜빡였다.
에드하르트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찻잔을 낚아채 갔다.

"……에드하르트?"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눈높이로 들어 올리더니, 가만히 내용물을 응시했다.
마치 그 안에 든 것이 차가 아니라 늪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고.

꿀꺽.

그가 마셨다.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

내 입이 벌어졌다.
무슨 짓이야?
그거 독이잖아.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당신이 시킨 거잖아!

그는 빈 잔을 쟁반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달그락.
위태로운 소리가 났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입가를 손등으로 훔쳐냈다.

"식었군."

그가 뱉은 말은 그게 다였다.

"다시 가져와. 뜨거운 걸로."

하녀가 당황하며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금방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하녀가 쟁반을 들고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침실에는 다시 정적만이 남았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남자의 행동 알고리즘이 내 기억과 다르다.
전생의 에드하르트라면, 내가 마시는 걸 끝까지 지켜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어야 했다.

"왜…… 마셨어?"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특유의 무심한 가면을 썼다.

"네 안색이 창백해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식은 차는 몸에 안 좋아."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이 제국에서 가장 냉철한 정치가가 고작 '식은 차' 때문에 남의 잔을 뺏어 마신다고?
그것도 독이 든 걸 알면서?

잠깐.
혹시 모르는 건가?
하녀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인가? 아니면 제3의 세력이 개입했나?
그래서 그가 독인 줄 모르고 마신 거라면?

"당신, 괜찮아?"

나도 모르게 물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비소라기보다는 자조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걱정해 주는 건가? 내 부인께서?"

"비꼬지 말고."

"멀쩡해. 보시다시피."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등 뒤로 감춘 그의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어져 있다는 것을.

"쉬어. 저녁 연회 준비는 사람을 보낼 테니."

그는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나는 그가 나간 문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무언가 잘못됐다.
내가 아는 미래와 다르다.
변수(Variable).
이 회귀에는 내가 모르는 치명적인 변수가 존재한다.


밤이 깊었다.
저택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숄을 걸쳤다.

확인해야 했다.
그가 정말 독인 줄 모르고 마신 건지, 아니면 알고도 마신 건지.
그리고 만약 알았다면, 대체 왜 그랬는지.

맨발로 복도를 걸었다.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에드하르트의 집무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깨어 있군.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종이 넘기는 소리, 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릴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전혀 다른 소리였다.

"쿨럭! 컥, 허억……."

기침 소리.
단순한 기침이 아니었다.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참아내며 토해내는, 젖은 소리였다.

"후우, 욱……."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무언가 바닥에 쓰러지거나 부딪친 것 같았다.
그리고 물소리. 아마도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는 소리겠지.

독이다.
확실하다.
그는 독을 마셨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알고 있었어.'

그는 그 차에 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를 죽이려던 게 아니었나?
그럼 왜 전생의 나를 죽게 내버려 뒀지? 아니, 왜 이번 생엔 대신 마신 거지?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서 '냉혈한 에드하르트'와 '방금 독을 마신 에드하르트'가 충돌하며 파열음을 냈다.

진실을 알아야 했다.
그가 방을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진 얼굴이었다. 입가에는 닦아내지 못한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침실 쪽으로 사라졌다.

기회다.

나는 숨죽여 집무실로 들어갔다.
책상 위는 어지러웠다. 서류 더미와 잉크병, 깃펜들이 널려 있었다.
전생의 그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정리를 잘했다. 이런 무질서는 그답지 않았다.

책상 위를 훑었다.
황태자가 보낸 서신, 영지 관리 문서, 세금 보고서……
별다른 건 없었다.

서랍을 열었다. 잠겨 있지 않았다.
맨 위칸에는 인장과 열쇠들.
두 번째 칸에는 권총 한 자루.

그리고 가장 깊은 곳, 세 번째 서랍.
거기에 낡은 가죽 노트 하나가 들어 있었다.

[제국력 480년 ~ ]

그의 일기장인가? 아니면 비밀 장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는 평범한 업무 일지였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내용이 이상해졌다.

[481. 12. 05. 실패. 너무 늦었다.]
[482. 01. 15. 황태자의 감시가 심해졌다. 접근 불가.]
[482. 03. 20. 독살 시도 감지. 하녀장 매수 필요.]

내용이 끊겨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 페이지. 날짜는 오늘이었다.

[482. 04. 15. 암살 계획서 - 대상: 리리스 발렌티노]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역시나. 암살 계획서가 존재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4월 15일 연회 전, 차에 비소를 타서 1차 중독 유도. 3개월 내 자연사 위장.'

내가 전생에 겪었던 바로 그 시나리오였다.
범인은 에드하르트가 맞았다. 이 계획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증거니까.

배신감보다 먼저 공포가 밀려왔다.
역시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아까 대신 마셔준 건 무슨 쇼였던 거야? 죄책감 덜기? 아니면 더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나는 입술을 깨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다음 장에 붉은 잉크로 거칠게 덧쓴 글씨가 보였다.

ep3 (22 tokens)

3화: 오류 (System Error)

[기각. 건드리는 새끼는

스텝 재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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