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9: 에피소드 리비전

Critic+Writer · 버전 2 · 초안

산출물 (v2)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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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약효가 떨어질 때

입안에서 비릿한 쇳물이 맴돌았다.
혀끝으로 입천장을 훑었다. 피 맛은 아니었다. 그저 망할 환각일 뿐이다. 마족 왕의 피를 삼켰던 그날 밤 이후로, 내 미각은 종종 이런 식의 좆같은 오작동을 일으켰다.

"대장님. 폐하의 밀명입니다."

부관 루카스가 집무실 문을 소리 없이 닫으며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내 눈치를 살피듯 바닥으로 향해 있었다. 손에 들린 검은색 봉투에는 황실의 붉은 밀랍이 찍혀 있었다.
나는 창밖을 때리는 빗소리에서 시선을 거두고 봉투를 낚아챘다.

"내용은."
"제8구역 빈민가입니다. 반마족 테러 단체인 '검은 달'의 임시 아지트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루카스의 목젖이 크게 한 번 출렁였다. 어제 연회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그놈들이다.

"명령은 간단합니다. 수괴는 생포, 나머지는 전원 사살."

나는 서류를 책상 위에 툭 던졌다.
황제 카이리스. 이 미친 인간은 정말이지 나를 쉴 틈 없이 굴릴 작정인가 보다.
아니, 이건 단순한 임무가 아니다. '테스트'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한 자신의 장난감이, 아직 칼로서 쓸모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수작.

"혼자 간다."
"예? 대장님, 그래도 명색이 테러 단체인데 지원 병력을……."
"비 오는 날엔 발소리가 섞여서 귀찮아. 진흙 튀는 것도 질색이고. 혼자 가는 게 깔끔해."

핑계였다.
진짜 이유는 내 몸 상태 때문이었다.
아샤드의 마력 덕분에 이벨린의 영혼은 며칠째 잠잠했지만, 오늘 아침부터 검지를 까닥일 때마다 근육이 제멋대로 튀었다. 약효가 떨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다.
부하들 앞에서 미친년처럼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지껄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대기해. 자정 전에는 돌아올 테니까."

나는 의자에 걸쳐둔 검은 가죽 코트를 꿰어 입었다.
허리춤의 단검 두 자루가 묵직하게 골반을 때렸다. 서늘하고 단단한 쇳덩이의 촉감.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제8구역은 제국의 화려함이 닿지 않는 하수구 같은 곳이었다.
썩은 쓰레기 냄새와 녹슨 철 냄새가 비에 젖어 진동했다. 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진흙탕을 밟았다.

목표물은 버려진 방직 공장.
입구에 서 있는 보초 두 명의 목을 꺾는 데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빗소리 덕분에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완벽하게 묻혔다.

'오른쪽 세 명, 2층에 두 명. 안쪽에 수괴.'

공장 내부로 스며들며 빠르게 인원을 파악했다.
나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어둠 속으로 미끄러졌다.
기사들의 싸움이 합을 겨루는 스포츠라면, 나의 싸움은 벌레를 밟아 죽이는 청소에 가깝다.

서걱.

어둠 속에서 칼날이 번쩍일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지는 소리만이 공장을 채웠다.
네 명. 다섯 명. 여섯 명.

"누, 누구냐!"

2층 난간에서 망을 보던 놈이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석궁을 겨누었다.
나는 피 묻은 단검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쇳소리와 함께 단검이 정확히 놈의 미간에 처박혔다.

완벽한 궤적. 완벽한 살상.
하지만 단검을 던지고 팔을 거두려는 찰나였다.

빠직.

왼쪽 어깨부터 손목까지, 뼛속을 긁어내는 듯한 이질적인 통증이 번졌다.

"윽……."

호흡이 엉켰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짓눌렀다. 피부 아래로 푸른 핏줄이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샤드가 주입했던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며 신경계를 갉아먹는 현상이었다.

[아우, 찌뿌둥해. 며칠이나 잔 거야?]

고막 안쪽에서 끈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벨린이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딴 타이밍에.

"침입자다! 죽여라!"

소란을 듣고 안쪽 방에서 거구의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괴로 보이는, 얼굴 절반이 흉터로 덮인 반마족 사내가 거대한 도끼를 치켜들고 달려왔다.

피해야 한다.
뇌는 명확하게 명령을 내렸는데.
발끝이 시멘트에 박힌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감각 자체가 끊어졌다.

[어머, 여긴 또 어디야? 냄새 역겨워. 당장 안 나가?]

'닥쳐, 제발 좀!'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억지로 상체를 비틀었다. 서늘한 쇳덩이가 어깨를 스치고 바닥에 처박혔다.

콰앙!

콘크리트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파편이 튀어 뺨을 길게 그었다. 피가 턱선을 타고 흘렀다.

"황제의 개새끼가 겁도 없이 혼자 기어들어 와?"

수괴가 도끼를 거칠게 뽑아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나는 남은 단검 하나를 빼 들었지만, 시야가 붉게 점멸하며 두 개로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생존 본능과 이벨린의 불쾌함이 한 몸 안에서 충돌하며 뇌관을 때리고 있었다.

'움직여. 제발, 좀.'

[싫어. 드레스에 피 튀는 거 질색이란 말이야. 네가 나가.]

뻗으려던 오른팔이 허공에서 덜컥, 멈췄다. 관절에 녹이 슨 것처럼.
그 짧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수괴의 군화발이 내 복부를 걷어찼다.

"컥!"

몸이 붕 떴다가 썩은 나무 궤짝 위로 처박혔다.

우드득.

갈비뼈가 나가는 둔탁한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폐부가 쪼그라들었다. 입안으로 다시 그 지긋지긋한 진짜 쇳물이 넘어왔다.

"대가리만 챙겨서 뜬다."

수괴가 성큼성큼 다가와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대로 죽나? 이딴 삼류 악당한테?
황제의 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분노보다, 내 몸 하나 통제하지 못해 뒈진다는 수치심이 뇌수를 긁었다.

나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눈을 부릅떴다.
적어도 내 목을 치는 새끼의 얼굴은 똑똑히 기억해 두기 위해서.

콰아앙-!

그 순간, 두꺼운 공장 철문이 폭탄을 맞은 것처럼 뜯겨 나갔다.
거친 빗바람이 몰아치며 어둠 속으로 은빛 섬광이 쏘아졌다.

카앙!

수괴의 도끼가 무언가에 부딪혀 허공에서 산산조각 났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도끼를 쥐고 있던 수괴의 두꺼운 팔마저 기괴한 각도로 꺾여버렸다.

"크아아악!"

짐승의 비명소리.
그리고 그 소음을 단숨에 베어내는, 지독하게 여유롭고 서늘한 목소리.

"제국 근위대는 야근 수당도 안 주나 보지?"

빗물에 젖은 은발. 어둠 속에서도 포식자처럼 빛나는 금안.
아샤드 르페르였다.

그가 젖은 검은 코트를 펄럭이며 내 앞을 막아섰다. 맨손으로 무식한 쇳덩이를 박살 낸 그의 손등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당신이…… 여긴 왜."
"산책."

그가 구두 굽으로 바닥에 처박힌 수괴의 머리통을 짓밟으며 대꾸했다. 뼈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길을 잃었는데, 익숙한 피 냄새가 나더라고."

지랄. 제8구역은 사절단 숙소에서 마차로 한 시간 거리다. 애초에 나를 미행했다는 소리다.

"여긴 제국 영토입니다. 사절단 대표가 끼어들 문제가……."
"내 백성(반마족)이 얽힌 일이잖아."

아샤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부러진 갈비뼈를 부여잡고 피를 뱉어내는 내 꼴이 꽤 비참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다치는 건 싫거든."

그가 몸을 숙여 손을 뻗었다. 서늘한 엄지가 내 뺨에 묻은 핏자국을 느릿하게 훔쳐냈다.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미쳐 날뛰던 내 안의 신경들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혈관을 타고 시원한 마력이 흘러들어왔다.

[오. 이 남자 피 냄새 끝내준다.]

잠잠해지나 싶었던 이벨린의 목소리가 뇌간을 때렸다. 이번엔 불쾌함이 아니었다. 노골적인 호기심과 탐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저번에 마셨던 그 피지? 나 배고파, 렌. 한 입만 더 먹자.]

'미쳤어? 꺼져.'

나는 속으로 발악하며 아샤드의 손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내 의지는 딱 거기까지였다.

툭.

쳐내려던 내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근육의 통제권이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손끝이 방향을 바꾸더니, 내 뺨을 만지던 아샤드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내가 한 짓이 아니었다.

"……렌?"

아샤드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다분히 유혹적이고 끈적한 손길이었으니까.

내 손가락이 그의 소매 끝을 쓸어내리며 맥박이 뛰는 맨살을 더듬었다. 입술이 제멋대로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볼우물이 패일 정도로 환하고, 천진난만하고, 오만한 귀족 영애의 미소.

"안녕? 네가 그 마족 왕이구나."

내 성대를 울려 나오는 목소리였지만, 억양과 높낮이가 완전히 달랐다.
아샤드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늘 여유롭던 그의 금안이 처음으로 잘게 흔들렸다.

"저번에 준 피, 아주 달콤했어."

내 손이 아샤드의 손목을 끌어당겨 입술로 가져갔다. 나는 막지 못했다. 내 몸은 완벽하게 이벨린이라는 기생충에게 통제권을 넘겨준 상태였다.

촉.

내 입술이 그의 손목 안쪽, 핏줄이 도드라진 곳에 부드럽게 닿았다.

"한 입만 더 줄래? 멍멍아."

무거운 침묵이 빗소리를 덮었다.
아샤드는 호흡마저 멈춘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짐승의 경계심이 그의 눈동자에서 번뜩였다.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누구야."

빙의자라는 사실을 들킨 지 이틀 만에.
나는 진짜 몸의 주인에게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도, 나를 향해 미친 듯이 직진해 오던 남자의 품 안에서.

11화: 셋이서 하는 왈츠

"한 입만 더 줄래? 멍멍아."

침묵은 무거웠고, 공기는 차가웠다.
아샤드 르페르의 표정에서 순식간에 감정이 지워졌다. 방금 전까지 나를 걱정하며 살피던 눈빛, 반마족들을 향해 분노로 이글거리던 눈빛. 그 모든 인간적인 파장이 거짓말처럼 증발해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건, 절대적인 혐오였다. 마치 길가의 썩은 오물 구덩이를 내려다보는 듯한 서늘하고 잔혹한 시선.

"……역겹군."

그가 내 손목을 거칠게 뿌리쳤다.
내동댕이쳐진 손이 허공을 가르며 바닥에 부딪혔다. 뼈마디가 부서질 듯한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나', 아니 이벨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맑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폐공장을 울렸다.

[어머, 너무하네. 20년 전에는 꼬리 치면서 따라다니더니. 그새 취향이 바뀌었나?]

이벨린이 내 입술을 빌려 뱉어내는 말들은 충격적이었다.
20년 전? 아샤드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황태자 시절의 아샤드가 이벨린을 알고 있었다는 뜻인가? 대체 무슨 사이였길래 저런 말을 지껄이는 거지?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나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무슨 개소리야. 닥치고 나와!'

하지만 몸은 물먹은 솜뭉치나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신경망이 모조리 끊어진 기분이었다. 가위눌린 것처럼, 이벨린이 조종하는 대로 관절이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너 눈 다쳤었지? 이제 앞은 보이나 봐?]

이벨린이 비틀거리며 아샤드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고인 핏물이 구두 굽에 밟혀 질척거렸다. 그녀는 내 피 묻은 손을 뻗어 아샤드의 반듯한 제복 깃을 잡으려 했다.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그의 검은 제복 위로 번졌다.

"손대지 마."

아샤드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그의 주변으로 검푸른 마력이 폭풍처럼 일렁였다. 폐공장의 녹슨 철골들이 끽끽거리며 비틀릴 정도의 엄청난 압력이었다. 뚫린 천장에서 떨어지던 빗방울조차 그의 반경 1미터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고 허공에서 치익 소리를 내며 증발해 버렸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망령."

[망령이라니. 집주인한테 말이 심하네. 저년은 그냥 세입자라고. 내 몸에 무단으로 들어온 불법 점거자.]

이벨린은 겁도 없이 아샤드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조롱기가 가득한, 다분히 의도적인 손길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쿠웅!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과 함께, 아샤드의 마력이 내 몸을 덮쳤다. 아니, 정확히는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이벨린의 영혼을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물리적인 타격이 아니었다. 뇌간을 직접 쥐어짜는 듯한 끔찍한 압박감. 두개골 안쪽에서 수천 개의 바늘이 동시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폭발했다.

[꺄악!]

이벨린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뒷걸음질 쳤다. 통제권을 잃은 다리가 휘청였고, 결국 무릎이 흙바닥에 처박혔다. 진흙과 핏물이 섞인 웅덩이가 튀어 올랐다.

"꺼져."

아샤드가 한 걸음 다가왔다.
군화 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울렸다.

"그 안에 있는 진짜를 내놔."

[진짜? 하! 저 살인기계가 진짜라고? 웃기고 있네!]

이벨린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고개가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아샤드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원한이 내 성대를 찢을 듯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터져 나왔다.

[저건 황제가 만든 인형이야! 내 몸을 뺏어서, 내 피로…… 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샤드가 손을 뻗었다.
그의 커다란 손아귀가 내 목을, 아니 이벨린이 차지한 내 목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새카만 마력이 경동맥을 타고 뇌로 직격했다. 핏속에 끓는 물을 들이부은 것 같은 작열감이 전신으로 번졌다.

강제 진압.
마치 날뛰는 짐승의 숨통에 마취총을 쏘아 억누르듯, 그는 이벨린의 의식을 강제로 짓눌러버렸다.

[이…… 개자식이……!]

이벨린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몸의 통제권이 허공에 붕 뜬 느낌.
그 틈을 타서 내가 치고 올라갔다.

'비켜!'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수면 위로 솟구쳤다.
이벨린의 의식이 칠흑 같은 심연으로 속절없이 밀려나고, 끊어졌던 감각이 다시 연결되었다.
질척이는 바닥의 감촉, 매캐한 피 냄새, 그리고 목을 단단히 잡고 있는 아샤드의 뜨거운 체온까지.

"……허억!"

막혔던 기도가 열리며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아샤드가 내 목에서 손을 떼고 나를 받아안았다. 바닥으로 고꾸라지려던 몸이 그의 단단한 팔에 걸렸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조심스럽고도 절박한 손길이었다.

"돌아왔나?"

그가 낮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어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눈앞이 흐릿했다. 그가 안도하며 내쉬는 더운 숨결이 젖은 이마에 닿았다.

"젠장. 늦어서 미안해."

그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시야가 흔들리며 주변 풍경이 들어왔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반마족 잔당들이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들은 아까의 기괴한 상황—아군 수괴가 죽고, 적들이 내분(?)을 일으키는—에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무기를 쥔 손들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저, 저놈들을 죽여! 어서!"

누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아샤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쓰레기를 보듯 눈길 한 번 주었을 뿐이다.

파지직.

검은 그림자가 바닥에서 뱀처럼 솟아올라 놈들의 발목을 낚아챘다.
"크아아악!"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아샤드는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찢기는 소리가 났지만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피바람이 부는 도살장 한가운데서도 그의 걸음은 귀족의 산책처럼 평온했다.

"청소는 부하들이 할 거야. 넌 쉬어."

그는 무너진 공장 외벽을 넘어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차가운 빗방울이 뺨을 때렸지만, 그의 품은 비정상적으로 뜨거웠다. 체온이 아니라 마력의 열기였다.
나는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거절한다."

그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빗소리를 뚫고 들어오는 목소리에는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

"세입자든 집주인이든 상관없어. 지금 이 몸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물어볼 새도 없었다. 긴장이 풀리자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인 서늘한 한마디였다.

"그러니까 도망갈 생각 하지 마. 렌."


11화 메타 정보

  • 메인 플롯: 아샤드의 강제 개입으로 이벨린의 폭주 진압. 렌의 의식 복구.
  • 서브플롯:
    • [서브 A] 이벨린이 "황제가 나를 죽였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함.
    • [서브 C] 아샤드가 과거(20년 전) 이벨린과 구면이었음을 암시. 하지만 현재의 렌을 선택함.
  • 클리프행어: 아샤드가 렌을 데리고 사라짐. "도망갈 생각 마라"는 선언.

12화: 공존의 계약서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소독약 냄새. 그리고 그 아래에 옅게 깔린 독한 시가 향.
숨을 들이마시자 폐부가 찢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 날카로운 감각이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어두운 목재 천장이었다. 익숙한 기하학적 문양. 아샤드의 침실이었다.
이쯤 되면 여기가 내 관사인지, 적국 대사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몸은 납을 매단 것처럼 무거웠지만, 머리는 기분 나쁠 정도로 맑았다.
갈비뼈 부근이 욱신거려 시선을 내리니, 두꺼운 붕대가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호흡할 때마다 붕대가 조여들며 통증을 덜어주었다. 아주 능숙한 전문가의 솜씨였다.
어깨와 팔뚝의 자잘한 상처들도 말끔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나는 신음을 삼키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굳어있던 관절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주변을 살폈지만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샤드는 없었다. 대신 침대 옆 협탁 위에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일어나면 마셔. 피 대신이니까.]

글씨체 한번 더럽게 거칠다.
메모지 옆에는 붉은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마개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마력의 파동. 최고급 포션이었다. 황실 기사단에서도 단장급이나 되어야 구경할 수 있는 귀한 물건.

돈지랄도 유난이다.
나는 건조한 입술을 축이며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마개를 열자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확 퍼졌다.
망설임 없이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액체가 위장에 닿자마자 뜨거운 열기로 변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욱신거리던 갈비뼈의 통증이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빈 병을 탁자에 내려놓고,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샤드 르페르. 황태자 시절의 그가 이벨린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20년 전부터.
이벨린은 황제가 자신을 죽였다고 했다. 내 몸을 뺏어서 인형으로 만들었다고.

'황제가 나를 거둬들인 건 10년 전인데.'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20년 전이라면 나는 고작해야 뒷골목을 기어 다니던 꼬맹이 시절이다.
이벨린의 존재, 아샤드의 과거, 그리고 황제의 진짜 목적.
모든 것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다.

(아, 머리 아파. 생각하는 건 질색인데.)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이 몸의 진짜 주인이 이벨린이든 아니든, 나는 이 몸을 넘겨줄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

"방 빼야 할 건 내가 아니지."

나는 허공을 향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 목소리였지만, 이벨린에게 보내는 명백한 경고였다.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일어났군."

아샤드였다.
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들어왔다. 방금 샤워를 마친 듯, 얇은 셔츠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비쳤다.
그는 내 빈 포션 병을 힐끗 보더니, 침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할 얘기가 많을 텐데."

그가 다리를 꼬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맹수의 살기 대신, 냉철한 협상가의 이성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네 머릿속에 들어앉은 그 망령 이야기부터 할까?"

나는 대답 대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원하시는 대로. 어차피 숨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요."
"좋아. 그럼 첫 번째 질문."

그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너, 진짜 렌 맞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아니면 어쩌시려고요. 다시 목이라도 조르실 겁니까?"

내 도발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픽 실소를 터뜨렸다.
"다행이군. 성질머리 보니까 진짜 맞네."

그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럼 두 번째 질문. 그 망령이 내뱉은 말, 어디까지가 사실이지?"

폐부를 찌르는 독한 침엽수 향. 피부에 닿는 서늘한 실크의 감촉.
눈을 뜨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아샤드의 침실. 이쯤 되면 여기가 내 관사인지, 적국 대사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몸은 쇳덩이처럼 무거웠지만, 머릿속은 소름 돋게 맑았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가 욱신거렸지만 단단하게 감긴 붕대가 만져졌다.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방 안은 고요했다. 아샤드는 없었다.
대신 협탁 위에 휘갈겨 쓴 메모가 놓여 있었다.

[일어나면 마셔. 피 대신이니까.]

그 옆의 붉은색 물약병. 척 봐도 최고급 포션이었다.
(돈지랄도 유난이지.)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진한 마력의 향이 코를 찔렀다.
숨을 참고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를 긁어내며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가 위장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등 뒤에서 이질적인 기척이 일렁였다.

[아우, 쓰다. 다음엔 설탕 좀 타 달라고 해.]

머릿속을 직접 긁는 목소리.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전신 거울을 보았다.
침대 위에 앉은 나는 무표정했지만, 거울 속의 이벨린은 혀를 내밀며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나는 거울을 향해 턱을 까딱이며 으르렁거렸다.

"20년 전에 죽었다며. 근데 왜 아직도 남의 몸에 붙어 있어."

[죽은 게 아니니까.]

순간, 이벨린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명랑한 장난기는 온데간데없고, 서늘한 살기만이 묻어났다.

[죽임을 당한 거지. 아주 믿었던 사람한테.]

"황제?"

내 물음에 그녀가 거울 표면을 손톱으로 천천히 긁어내렸다.
끼기기긱.
환청인 줄 알면서도 뇌간을 때리는 마찰음이 났다.

[그래. 카이리스. 그 개자식이 날 제물로 바쳤어. 영생을 위한 재료라나 뭐라나.]

거울 속 이벨린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렌. 너도 느꼈지? 그 자식이 널 보는 눈빛. 우린 사람이 아니야. 그냥 실험실의 쥐새끼지.]

나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내 몸을 뺏어서 복수라도 하시겠다?"

내 비아냥에 이벨린이 빙긋 웃었다.

[아니. 거래를 하자는 거지.]

Batch 2: 9화~13화 (계속)


12화: 공존의 계약서

(앞부분에서 계속)

[아니. 거래를 하자는 거야.]

거울 속의 이벨린이 턱을 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너는 살고 싶지? 나도 그래. 억울해서 이대로는 성불 못 하거든.]

"그래서?"

[네 몸을 빌려줘. 가끔씩. 대신 내가 월세를 낼게.]

"월세?"

[정보. 황제가 꾸미는 '신 죽이기' 프로젝트의 전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세면대를 짚은 손끝이 차가웠다. 미친 유령과의 동거라니.

Batch 2 (보완) & Batch 3: 13화~17화


13화: 10년의 무게

[12화 요약: 깨어난 렌은 거울 속 이벨린과 대면한다. 이벨린은 황제가 자신을 '재료'로 썼다는 진실을 알려주며, 몸의 주도권을 가끔 넘겨주는 대가로 황제의 비밀을 공유하겠다는 '공존 계약'을 제안한다. 렌은 살기 위해 악마의 계약을 수락한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벨린은 다시 거울 속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렌은 이불깃을 쥔 손끝을 까득, 말아 쥐었다.

"일어났군."

테라스 문이 열리며 아샤드가 들어왔다. 젖은 코트를 툭 벗어 던진 그의 몸에서 서늘한 한기와 짙은 핏비린내가 훅 끼쳤다. 반마족 잔당들을 썰어버리고 오는 길인 듯했다.

"몸은?"
"덕분에. 당신의 피가

13화: 10년의 무게

(앞부분에서 계속)

"덕분에. 당신의 피가 꽤 효과가 좋더군요. 이벨린도 조용하고."

나는 일부러 건조하게 대답하며 셔츠 단추를 잠갔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겉으로는 완벽하게 통제된 동작이었다. 차가운 리넨 천이 열이 오르는 피부에 닿는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방금 전까지 내 목덜미를 파고들던 그의 송곳니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샤드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빗방울이 그의 은발 끝에서 뚝뚝 떨어져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타닥, 타닥. 고요한 방 안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불규칙하게 울렸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효과가 좋다니 다행이군. 비싼 값을 치른 보람이 있어."

그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거리는 불과 반 보. 젖은 옷 냄새, 비릿한 비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그만의 짙고 서늘한 체향이 훅 끼쳐왔다. 압도적인 포식자의 기운. 나는 숨을 얕게 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래서, 이제 대답해 줄 텐가?"

"무엇을 말입니까."

"10년 전, 라하트."

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목소리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피할 수 없다. 이미 내 손목의 흉터까지 확인한 마당에 어설프게 잡아떼는 건 의미가 없었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뒤에 놓인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의 뼈마디가 쑤셔왔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도 탈이군요. 폐하께선 잊으라고 명령하신 일인데."

"황제의 명령 따위 알 바 아니야."

아샤드가 내 앞의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큰 키가 접히며 시선이 내 눈높이와 정확히 맞춰졌다. 젖은 은발 사이로 드러난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그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몰아넣은 맹수처럼 집요하고 맹렬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 왜 날 살려줬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농담 따위는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의문과 갈증.
10년 전. 나는 고작 열다섯 살의 살수였고, 그는 적군의 젊은 장교였다. 무너진 신전 잔해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그. 눈을 다쳐 앞을 못 보는 적을 죽이는 건, 암살자의 긍지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연민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니, 연민이라는 단어조차 사치스러웠다. 나는 그저 내 손에 쥐어진 단검을 거두었을 뿐이다.

"그냥... 죽이기 아까웠습니다."

"아까웠다?"

"눈이 예뻤거든요. 다쳤는데도 금색으로 빛나서."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낭만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죽음과 피비린내만 보고 자란 아이였고, 살아있는 것의 아름다움을 처음 봤을 뿐이다. 먼지와 피로 얼룩진 전장 한가운데서, 짐승처럼 헐떡이면서도 살고자 번뜩이던 그 황금빛 안광. 그것이 기묘하게도 내 발목을 잡았었다. 내 손으로 그 지독한 생명력을 끄고 싶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아샤드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허탈함과 안도, 그리고 알 수 없는 갈망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그가 헛숨을 들이켰다.

"나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10년을 찾아헤맸는데."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쌌다. 이번에는 거칠지 않았다. 투박한 굳은살이 박인 엄지손가락이 내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체온이 닿은 곳부터 데인 듯 뜨거워졌다.

"이벨린이 아니야."

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찾던 건, 이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너였어."

호흡이 턱 끝에서 엉켰다. 뒷목을 타고 서늘한 소름이 쫙 뻗어나갔다. 주박이 새겨진 심장이 아니라, 내 영혼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무언가가 발작하듯 반응하고 있었다.
이벨린은 아샤드를 '멍멍이' 취급했지만, 아샤드는 이벨린이 아닌 나를 보고 있었다. 이 기묘한 삼각관계 아닌 삼각관계. 머리가 지끈거렸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국 근위대장이고, 당신은 적국의 왕입니다."

나는 그의 손을 쳐내듯 떼어냈다. 손끝이 떨리지 않도록 억지로 힘을 주며.

"그때 살려준 걸 후회하게 만들지 마세요."

"후회?"

아샤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포식자의 미소였다.

"아니. 넌 절대 후회 못 해. 내가 그렇게 안 둘 거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겨진 옷자락이 길게 늘어졌다.

"준비해. 오늘은 황궁 무도회야. 춤 신청, 이번엔 거절하지 마."

그가 욕실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멍하니 내 손목의 흉터를 내려다보았다. 희끗하게 남은 화상 자국. 10년 전의 불길이, 아직도 꺼지지 않고 피부 아래에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어우, 달달해서 이가 썩겠네.]

귓가를 때리는 날카로운 이명. 거울 속에서 이벨린이 혀를 찼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근데 어쩌지? 저 남자, 곧 죽을 텐데.]

"뭐?"

[황제가 널 왜 그 남자 옆에 붙여뒀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이벨린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비틀렸다.

[너는 칼이고, 나는 칼집이라며. 칼집 안에 든 게 뭔지 보여줄 때가 됐어.]


13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200자 (누적)
  • 장면 수: 2개 (아샤드와의 대화, 이벨린의 경고)
  • 메인 플롯: 아샤드가 렌의 정체(과거의 은인)를 확신하고 직진함.
  • 서브플롯: [서브 C] 10년 전 서사 연결. [서브 B] 황제의 진짜 목적 암시.
  • 정보 공개: 렌이 아샤드를 살려준 이유는 단순한 변덕/연민이었음.
  • 클리프행어: [경고] 이벨린이 아샤드의 죽음을 예고함.

14화: 신 죽이기

황궁 대연회장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천장을 수놓은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이 시릴 정도로 찬란한 빛을 쏟아냈고, 발코니 쪽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실크 커튼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연미복을 차려입은 제국의 귀족들이 정교한 가면을 쓰고 서로를 탐색하는 곳. 한쪽에서는 현악 4중주가 경쾌한 왈츠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그 평화로운 음악 아래로는 시기와 질투, 음모가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짙은 향수 냄새와 달콤한 샴페인 향, 그리고 구운 고기의 기름진 냄새가 뒤섞여 오히려 구역질을 유발했다.

나는 몸에 딱 붙는 검은색 근위대장 정복을 입고 연회장 구석의 그림자 속에 꼿꼿이 서 있었다. 허리춤에 찬 장검의 무게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이 넓은 홀 안의 모두가 내 존재를 의식하고 힐끔거렸다. 황제의 미친 사냥개. 카이리스의 충견. 그것이 이 연회장에서 내게 부여된 역할이었다. 숨 막히는 가식의 공간에서 나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오늘따라 안색이 좋군."

익숙하고 나른한 목소리. 카이리스가 다가왔다. 정교하게 세공된 황금색 가면을 쓴 그는 이 화려한 연회장조차 지루하다는 듯 턱을 괸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면 너머로 번뜩이는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마족의 피가 꽤 입에 맞나 봐?"

"......감시가 철저하시군요."

"내 물건이 남의 손을 타는데 당연히 신경 써야지. 안 그래?"

그가 길고 창백한 손가락으로 샴페인 잔을 건넸다.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그의 손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잔을 받지 않고 그를 빤히 응시했다. 카이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스스로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따라와. 보여줄 게 있어."

나는 묵묵히 그를 따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대리석 복도를 걷는 동안 왈츠의 선율은 점차 멀어졌고, 화려했던 조명도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카이리스의 구두 굽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차갑게 울렸다.
우리는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다. 공기는 층을 내려갈수록 습해졌고, 벽면에 꽂힌 횃불이 우리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도착한 곳은 황궁 지하,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황실 직속 마법 연구소였다. 두꺼운 강철 문을 열자마자 비릿한 약품 냄새와 부패한 피 냄새, 그리고 뼈를 파고드는 냉기가 훅 끼쳐왔다.

"이벨린이 죽은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었나?"

카이리스가 연구소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유리 수조 앞을 걸으며 물었다. 그의 구두 굽 소리가 텅 빈 연구소 안을 기괴하게 울렸다.
수조 안에는 초록색 보존액 속에 기괴하게 뒤틀린 마수(魔獸)의 사체들이 둥둥 떠 있었다. 살점이 터져나가고 뼈가 기형적으로 자라난 끔찍한 몰골이었다. 어떤 것은 내장이 밖으로 쏟아져 있었고, 어떤 것은 머리가 두 개로 갈라져 있었다. 한때 생명이었던 것들의 참혹한 말로. 속이 매스꺼워졌다.

"그녀는 내 실험의 첫 번째 성공작이었어."

"실험?"

"마력을 무한정 흡수해서, 임계점을 넘으면 폭발하는 그릇."

그가 멈춰 섰다. 수조의 유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마족은 강해. 특히 아샤드 르페르는 신에 가까운 힘을 가졌지. 인간의 군대로는 이길 수 없어. 그래서 생각했지. 신을 죽이려면, 신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가면 너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순수한 악의 그 자체였다.

"이벨린의 몸은 '마력 흡수체'야. 마족과 접촉하면 할수록, 그들의 마력을 빨아들여 축적하지. 스펀지처럼 말이야. 그리고 일정량이 차면......"

그가 양손을 펼치며 폭발하는 시늉을 했다.

"펑."

혈관 속에 얼음물이 쏟아진 것 같았다. 폐부가 쪼그라들며 숨이 턱 막혔다. 이명이 뇌간을 때렸다.
아샤드가 내게 마력을 주입할 때마다, 내가 그의 피를 마실 때마다... 나는 치유된 게 아니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 모든 순간이, 사실은 내 몸이라는 폭탄에 화약을 꾹꾹 눌러 담는 과정이었다.
그동안 내 몸이 아샤드의 마력에 그토록 빠르고 완벽하게 반응했던 이유. 이벨린의 육체가 마족의 기운을 갈구했던 이유. 모든 퍼즐 조각이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나는 카이리스가 정교하게 설계한 시한폭탄 그 자체였다.

"지금 네 몸 안에는 아샤드의 마력이 가득 차 있어. 한 방울도 더 들어갈 틈 없이, 아주 맛있게 익었지.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처럼."

카이리스가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뱀처럼 차가운 체온이 정복 너머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쳐내고 싶었지만, 온몸의 근육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밤 무도회에서, 네가 그와 춤을 추는 순간. 내가 신호를 보내면 너는 터질 거야. 제국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끔찍한 불꽃놀이가 되겠지. 신의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광경이라니,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아?"

"......미쳤어."

갈라진 목소리가 간신히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잇새로 피 맛이 났다.

"칭찬으로 들을게."

그가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른한 목소리에 짙은 살의와 환희가 묻어났다.

"도망칠 생각은 마. 네 심장의 주박이 터지는 게 빠를지, 자폭 스위치가 켜지는 게 빠를지 시험해 보고 싶지 않다면."

Batch 3: 14화~18화


14화: 신 죽이기

(앞부분에서 계속)

"도망칠 생각은 마. 네 심장의 주박이 터지는 게 더 빠를 테니까."

제14화 (완료)

Batch 3: 14화~18화


14화: 신 죽이기

(앞부분에서 계속)

"도망칠 생각은 마. 네 심장의 주박이 터지는 게 빠를지, 자폭 스위치가 켜지는 게 빠를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황제는 만족스러운 듯 내 어깨를 두 번 툭툭 토닥였다.
가죽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손길이 뱀의 비늘처럼 차갑고 끈적거렸다.

"가 봐. 파트너가 애타게 기다리겠어."

그가 나를 연구소 밖으로 밀어냈다.
무거운 철문이 닫혔다. 등 뒤로 육중한 쇳덩이가 맞물리는 파열음이 뇌간을 때렸다. 흡사 거대한 관뚜껑이 닫히며 못이 박히는 소리 같았다.

나는 어두컴컴한 복도에 홀로 남겨졌다.
벽을 짚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공포? 아니. 지독한 구역질이었다. 뱃속에 산 채로 벌레를 집어넣은 것 같은 끔찍한 감각.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이 따뜻한 마력이,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이 망할 심장이, 전부 나를 찢어발기기 위해 설정된 카운트다운이었다니.

[이제 알겠어?]

머릿속에서 이벨린이 킬킬거렸다. 건조하고, 지독하게 냉소적인 웃음.

[내가 왜 그토록 미친년처럼 굴었는지. 이 몸뚱이는 시한폭탄이야. 마력이 차오를수록 터질 시간은 앞당겨지지. 넌 그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던 거고.]

'...알고 있었어?'

입술을 짓씹으며 속으로 물었다. 혀끝에서 비릿한 쇠맛이 났다.

[당연하지. 내가 그 끔찍한 실험의 첫 번째 모르모트였으니까. 황제 그 미친 새끼가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녀의 목소리에 서린 증오가 내 신경을 긁어내렸다.

[아샤드가 널 치료해 준다고? 착각하지 마. 그 남자는 지금 제 손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몸에 기름을 들이붓고 있는 거야. 아주 활활 잘 타오르라고. 그 멍청한 순애보가 결국 우리를 잿더미로 만들 거라고!]

위액이 역류할 것 같았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삼켰다.
아샤드 르페르. 그 오만하고 집착적인 마족왕.
그는 10년 전의 나를 기억했고, 부서져 가는 나를 살리겠다며 자신의 피와 마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 모든 맹목적인 선의가, 황제가 정교하게 짜놓은 체스판 위에서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가 내게 다가올수록. 나를 지키려 자신의 힘을 나누어줄수록.
우리는 더 빠르고 완벽하게 파멸한다. 웃기지도 않는 삼류 비극이었다.

"......개자식."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가운 석조 벽의 온기가 달아오른 뺨을 조금이나마 식혀주었다.
흐트러진 제복의 깃을 반듯하게 세우고, 가죽 장갑을 팽팽하게 고쳐 꼈다. 멀리서 현악기의 선율이 끈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연회장. 저 화려한 무덤. 황제 카이리스. 신을 죽이겠다며 기꺼이 악마의 탈을 쓴 통제광.

하지만 나는 칼이다. 주인이 쥐여준 대로 적의 목을 쳐야 하는 도구.
적어도 이 빌어먹을 주박이 내 심장 근육을 틀어쥐고 있는 한, 내게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군화 굽이 대리석 바닥을 때렸다. 또각. 또각.
내 안의 폭탄이 째깍거리는 소리와 완벽한 박자로 맞아떨어졌다. 나는 다시 그 빛나는 지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14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00자 (누적)
  • 장면 수: 2개 (지하 연구소 폭로, 복도에서의 독백)
  • 메인 플롯: 렌의 신체 비밀(마력 폭탄)이 밝혀짐. 황제는 이를 이용해 마족왕 아샤드를 암살하고 성전을 일으키려 함.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은 이미 자신의 운명(폭탄)을 알고 있었음. [서브 B] 황제의 악역 포지션 확립.
  • 정보 공개: 렌(이벨린)의 몸은 마력을 흡수하여 임계점에서 자폭하도록 설계됨. 아샤드의 마력 주입은 치료가 아니라 기폭제를 채우는 행위였음.
  • 클리프행어: [S급] 절망적 상황 - 아샤드의 사랑이 곧 죽음이라는 아이러니.

15화: 기폭제

연회장의 문을 열자, 달콤하고 역겨운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샹들리에는 수만 개의 크리스털을 매달고 오만하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아래서 귀족들은 실크 드레스와 벨벳 연미복을 펄럭이며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쨍그랑. 경쾌한 유리 마찰음이 터졌다.

아무도 모른다. 이 눈부신 무도회장 바로 밑, 축축한 지하 연구소에서 마수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이 검은 제복의 호위기사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걸어 다니는 폭탄이라는 것을.

"늦었군."

나른한 음성이 귓가를 긁었다.
아샤드 르페르.
그는 반쯤 열린 테라스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칠흑 같은 검은 예복이 그의 서늘한 은발과 대비되어, 폭력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한 손에는 반쯤 비운 와인잔을 든 채, 붉은 눈동자로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저 포식자 같은 시선에 호흡이 엉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치명적으로 아름다워 보일수록, 핏속에 얼음물이 쏟아진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디서 뭘 하나 했더니."

그가 잔을 천천히 흔들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황제와 은밀한 밀회라도 즐기고 온 건가? 제복에서 그 미친놈의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그가 테라스에서 걸어 나왔다. 농담을 가장한 짙은 소유욕이 배어 있었다. 평소라면 적당히 비꼬며 받아쳤겠지만, 지금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걸음. 그가 거리를 좁힐 때마다 내 몸 안의 마력이 들끓었다.
마치 자석의 양극이 만난 것처럼. 피부 아래 심어진 보이지 않는 기폭장치가 그의 압도적인 기운을 감지하고 징그럽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혈관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오지 마십시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뭐?"

아샤드의 걸음이 멈췄다. 느슨하던 그의 눈매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억지로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기분이 좆같으니까."

"기분이 좆같으면."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풀어주면 되지. 언제는 혼자 감당했나?"

그는 내 경고를 한낱 투정으로 치부했다. 사냥감을 덮치는 맹수처럼 성큼 다가온 그가, 도망칠 틈도 없이 내 손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찌릿. 살갗이 닿은 곳을 통해 그의 막대한 마력이 훅 밀려들어 왔다. 기폭제가 미친 듯이 회전하는 감각.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음악이 바뀌었어. 왈츠야. 춤이나 한 곡 추지."

그가 나를 제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히자, 억눌러둔 마력이 폭주할 듯이 요동쳤다.

"놓으라고!"

나는 비명 지르듯 소리치며 그의 가슴을 팍 밀쳐냈다. 아니,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완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음악 소리 속에서도 몇몇 귀족들이 흥미로운 듯 이쪽을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렌."

아샤드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붉은 눈동자 속에 서늘한 분노와 당혹감이 교차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그의 손아귀에 잡힌 손목이 부서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 물리적인 통증보다, 내 혈관을 타고 미친 듯이 역류하는 마력의 폭주가 더 끔찍했다.

(이러다 터져. 진짜로 터진다고.)

"제발."

나는 창백하게 질린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건드리지 마. 나한테서 떨어져."

그 순간, 아샤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내뱉은 날 선 적의가, 그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의 상처로 가닿았을 테니까.

"놓으세요!"

나는 비명 지르듯 소리치며 그를 뿌리쳤다.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쏠렸다. 화려하게 홀을 채우던 왈츠의 선율이 뚝 끊기고, 귀족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황제의 사냥개가 감히 타국 왕의 춤 신청을 거절하고 소리를 질렀다. 단순한 외교적 결례를 넘어선, 명백한 도발이자 미친 짓이었다.

"......거절의 이유치고는 꽤 격렬하군."

허공에 머문 아샤드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평소의 그 여유롭던 미간이 좁혀졌고, 푸른 눈동자에는 차가운 서릿발이 맺혔다. 상처받은 짐승 같기도 했고, 분노를 억누르는 포식자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었다. '당신 곁에 있으면 내가 터져서 당신을 죽이게 된다'는 미친 소리를 어떻게 입에 담는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나는 도망치듯 뒷걸음질 쳤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끓는 기름처럼 요동쳤다. 아샤드와 맞닿았던 손목의 감각이 화상을 입은 듯 징그럽게 생생했다.
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내 안의 기폭장치—황제가 심어놓은 마력 회로—가 날카로운 경고음을 울리며 윙윙거렸다.

[멍청아,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이벨린이 귓가에서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네가 세상 어디에 숨든, 아샤드가 널 쫓아올 거야. 그리고 그 남자가 널 사랑할수록 너는 더 빨리 터져 죽겠지.]

이명이 뇌간을 때렸다.
나는 아랫입술이 터지도록 짓이기며 비틀거리듯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아샤드의 시선이 목덜미에 비수처럼 꽂히는 게 느껴졌다. 잡으러 올까? 아니,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그 남자다. 수백 명 앞에서 거절당한 수모를 참고 쫓아오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딜 가."

테라스의 찬 공기를 채 들이마시기도 전에 손목이 거칠게 낚여 채였다.
아샤드였다. 공간 이동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그가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봐, 렌. 내가 널 10년이나 찾아 헤맸다고 했지."

그가 나를 대리석 난간 쪽으로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 말은, 네가 세상 끝에 숨어도 기어코 찾아낼 자신이 있다는 뜻이야."

"제발......!"

숨이 턱 막혔다. 시야가 붉게 점멸하며 멀미를 유발했다.
그의 굳은살 박인 손아귀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내 피부를 타고 뱀처럼 스며들었다. 너무나 달콤하고, 너무나 치명적인 독.
몸 안의 마력 수치가 임계점을 향

15화: 기폭제 (마무리)

(앞부분에서 계속)

내 몸 안의 마력 수치가 임계점을 향해 치솟았다.
피부 아래 심어둔 금속 회로가 비명을 지르며 타올랐다.
흉곽 안쪽에서 불규칙한 파열음이 울렸다. 쇳덩이가 긁히는 듯한 감각. 째깍, 째깍. 내장부터 타들어 가는 타이머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이거, 놔……!"

호흡이 엉켰다. 나는 쥐어짜듯 신음하며 그의 단단한 흉부를 밀어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아샤드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목을 쥔 손아귀에 우악스러운 힘을 더했다.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왜 떨지."

그의 목소리가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낮게 깔렸다.
그는 내 공포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10년 전, 그 지옥 같던 창고에서처럼 자신이 나를 찢어 죽일까 봐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안 잡아먹어. 적어도 지금은."

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더운 숨결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가 빈틈없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얇은 드레스 천 너머로 그의 단단한 근육이 맞닿았다. 그 좁은 접촉면을 통해, 그의 방대한 마력이 댐이 무너진 것처럼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찌리릿.

뇌간을 후벼파는 끔찍한 이명.
시야의 가장자리가 피딱지처럼 붉게 들러붙었다. 환청. 그래, 환청이었다. 옥좌에 앉아 있던 카이리스의 나른한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펑. 예쁘게 터지길 바라, 렌.'

안 돼. 멈춰. 여기서 터지면…….
나만 죽는 게 아니다. 눈앞의 이 오만한 마족왕도 잿더미가 된다.
나는 혀를 깨물어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았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 마지막 남은 이성을 쥐어짜 소리쳤다.

"비켜! 터진다고, 미친놈아!"

하지만 찢어질 듯한 내 경고는 테라스 너머, 연회장에서 들려오는 화려한 왈츠의 클라이맥스에 허무하게 묻혀버렸다.
그리고.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기어이 스위치가 눌렸다.


15화 메타 정보

  • 클리프행어: [S급] 절체절명 - 아샤드와의 접촉으로 렌의 자폭 시퀀스가 가동됨.

16화: 오작동

공기의 흐름이 끈적하게 엉겨 붙었다. 테라스로 새어 들어오던 샹들리에의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흉곽 안쪽에서 시작된 끔찍한 열기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뻗어나갔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건 피가 아니라 용암이었다. 피부 아래로 꿈틀거리는 마력 회로의 궤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 끝이네.'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
어차피 암살자로 살면서 수백 번도 넘게 시뮬레이션해 온 죽음이었다. 내 목이 날아가거나, 심장이 뚫리거나.
하지만.
이건 억울했다. 내 의지로 검을 쥐다 죽는 게 아니라, 그 미친 황제의 조잡한 장난감으로 터져 죽는다는 게. 그리고 하필이면. 10년 전 내가 목숨을 걸고 살려냈던 유일한 사람을,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발기며 길동무로 데려간다는 게.

[멍청아! 눈 뜨고 똑바로 봐!]

머릿속에서 이벨린이 악을 썼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날카로운 비명.

[아직 안 끝났어! 저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보라고!]

짓눌려 있던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안 터졌다.
아니. 정확히는 터지기 직전, 그 찰나의 폭발 지점에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짙은 검푸른 아우라였다.
아샤드의 마력. 그 압도적이고 폭력적인 기운이, 내 몸 안에서 팽창하려던 붉은 기폭 에너지를 무식할 정도로 억지로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오직 악력 하나만으로 꽉 쥐어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크, 윽."

아샤드의 입술 사이로 피 끓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나 여유롭고 오만하던 그의 미간이 고통으로 무참히 일그러져 있었다. 턱관절에 핏대가 섰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내 몸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그리고 내 몸에 이따위 끔찍한 짓을 해놓은 주인이 누구인지.

"이딴 걸……."

그가 짐승처럼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시퍼렇게 타올랐다.

"몸뚱이에 심어놨나. 심장이 아니라, 엿 같은 화약고였군."

"놓으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당신까지…… 휩쓸립니다."

"닥쳐."

그는 내 경고를 가볍게 씹어 삼키고는, 나를 부서져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닿아있는 그의 몸이 미세하게, 하지만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 몸에서 방출구를 찾지 못해 역류하는 폭발 에너지를, 그가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대신 흡수해 내고 있었다.

미친 짓이었다.
내게 심어진 황제의 마력 회로는 오직 '흡수'만 할 뿐 '방출' 기능이 설계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과부하가 걸리면 그대로 터져버리는 1회용 소모품.
그런데 아샤드는 지금, 그 일방통행의 흐름을 강제로 뜯어고쳐 역류시키고 있었다. 폭포수를 거꾸로 솟구치게 만드는 것과 같은, 명백히 물리 법칙과 마나의 순리를 거스르는 오만한 행위였다.

우우웅—.

고막을 찢을 듯 공기가 진동했다.
테라스의 두꺼운 유리창에 거미줄처럼 금이 쩍쩍 갔다. 우리가 딛고 선 바닥의 최고급 대리석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하지만 불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연회장의 귀족들은 아무도 이 참상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샤드가 무의식중에 쳐놓은 절대적인 방음 결계 때문이었다.

"황제…… 카이리스, 그 개자식이."

아샤드의 금안이 섬뜩한 살기로 번뜩였다.
그의 목줄기를 타고 검은 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는 지금 단순히 마력을 쓰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력을 장작 삼아 태워가며, 내 안의 시한폭탄을 강제로 멈춰 세우고 있었다.

"왜……."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멍하니, 초점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적이다. 제국의 암살자와 마족의 왕. 10년 전 창고에서의 그 알량한 하룻밤 인연 따위가, 한 나라의 왕이 제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가 될 리 없었다.
그런데 대체 왜.

"말했, 잖아."

그가 쿨럭, 기침을 하며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어냈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지독하게 오만하고, 그래서 눈물 나게 처절한 미소였다.

"내 허락 없이는…… 못 죽는다고."

쿠웅!

마지막, 거대한 충격파가 그의 몸을 무자비하게 관통했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은 날개 형상의 마력이 폭발하듯 펼쳐졌다가,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검은 깃털 같은 마력의 잔재가 눈처럼 흩날렸다.
동시에. 내 내장을 태워버릴 듯 날뛰던 열기도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성공했다.
폭탄이 해체되었다. 아니, 해체라는 얌전한 단어로는 부족했다. 폭탄의 뇌관 자체가 완전히 짓이겨져 젖어버렸다. 그가 흘린 검붉은 피로.

우뚝 서 있던 아샤드의 커다란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천하의 마족왕. 신에 가장 가까운 무력을 가졌다는 그 오만한 포식자가, 무너지는 성벽처럼 내 어깨에 툭 이마를 기대왔다.

"하아, 하아……."

그의 입술 사이로 짐승의 헐떡임 같은 거친 숨이 쏟아졌다.
내 맨살에 닿은 그의 체온이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나는 허공에서 길을 잃었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손끝이 형편없이 떨렸다. 조심스럽게, 그의 넓고 상처투성이인 등을 감싸 안았다.
마치 10년 전. 모든 것이 타들어가던 그 낡은 창고에서, 피투성이였던 소년을 끌어안았을 때처럼.

"미쳤군요. 당신은, 진짜……."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갈라졌다.

"너만 할까."

그가 내 쇄골 부근에 얼굴을 묻은 채, 바람 빠진 소리로 킬킬거렸다. 그의 거친 머리카락이 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살아있는 폭탄 주제에, 적국 왕이랑 왈츠를 추러 기어들어 와? 간도 크지."

"……분명히 춤은 거절했잖습니까."

"거절이 너무 약했어. 다음엔 정강이를 까거나, 뺨이라도 갈겼어야지."

헐떡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된 금안. 입가에 말라붙은 핏자국.
그 어느 때보다 엉망진창인 꼴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이제 설명해."

장난기가 싹 가신 그의 눈빛이 포식자의 그것처럼 매섭게 가라앉았다.

"황제, 그 미친 개자식이 네 몸에 무슨 짓을 해놨는지. 토씨 하나 빠짐없이."


16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00자 (누적)
  • 장면 수: 1개 (테라스에서의 폭발 저지 및 감정 교류)
  • 메인 플롯: 아샤드가 렌의 자폭을 자신의 마력으로 막아냄. 렌의 비밀(인체 병기)을 공유하게 됨.
  • 서브플롯: [서브 C] 쌍방 구원 서사의 완성 (과거: 렌→아샤드 / 현재: 아샤드→렌).
  • 정보 공개: 아샤드는 마력의 흐름을 역류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함.
  • 클리프행어: [진실 요구] 아샤드가 모든 진실을 요구하며 렌을 추궁함.

17화: 공범자

"인체 병기."

건조한 내 설명을 끝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아샤드가, 씹어 뱉듯 짧게 요약했다.
그는 테라스의 부서진 대리석 난간에 삐딱하게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하지만 눈에 띄게 경련하고 있었다. 방금 전 억지로 마력을 역류시킨 지독한 후유증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 마력을 쭉 빨아먹고 과부하가 걸려서, 펑 터지는 엿 같은 구조다?"

"정확히는 '마족'의 마력이죠. 당신이 이 연회장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강하니까, 제일 확실하고 효율적인 기폭제였을 뿐이고."

나는 밑단이 형편없이 찢겨나간 실크 드레스 자락을 대충 수습하며, 남의 일 말하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카이리스는 오늘 밤 여기서 당신을 폭사시키고, 마족의 테러라 우기며 그 명분으로 성전(聖戰)을 일으킬 계획이었습니다."

"하."

아샤드가 어이없다는 듯 짧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창의적인 미친놈이군. 제 아끼는 그림자 무사를 1회용 폭탄으로 써먹어서, 적국의 왕을 암살한다라. 아주 훌륭해. 대륙의 역사책에 길이길이 미친놈으로 남을 만해."

그가 필터만 남은 담배를 바닥에 던져 구둣발로 짓이겼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지?"

그가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응시했다.

"다시 쪼르르 개처럼 기어 들어가서, '폐하, 터지는 데 실패했습니다. 마력 좀 다시 충전해 주십시오'라고 꼬리라도 흔들 건가?"

"그럴 리가요."

나는 금이 간 테라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화장은 번져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릿속의 이벨린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시끄럽게 떠들었을 그녀조차, 방금 전 아샤드가 보여준 무식하고 압도적인 힘에 완전히 질려버린 모양이었다.

"도망쳐야죠. 제국을 뜰 겁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당신이 도와준다면요."

"도와달라?"

아샤드의 한쪽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치켜올라갔다.

"당신은 황제의 더러운 계획을 알았으니 전면전을 대비할 수 있고. 나는 이 지긋지긋한 걸어 다니는 폭탄 신세에서 벗어나고. 완벽한 윈윈(Win-Win) 아닙니까."

거래.
철저한 이해타산. 이것이 지금 벼랑 끝에 몰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인 카드였다. 10년 전의 얄팍한 인연이나, 방금 전 나를 살려주었다는 알량한 연민 따위에 기대기엔 내 목숨줄이 너무도 절박했다.

아샤드가 난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굳은살 박인 거친 손가락으로 내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거래라

(앞부분 요약: 아샤드는 렌의 자폭을 막아낸 후,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렌은 그에게 "도와준다면 황제의 계획을 알려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한다.)

"거래라."

아샤드가 난간에 비벼 끈 담배꽁초가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졌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거칠고 뜨거운 손가락이 내 턱을 잡아 올렸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 방금 전의 폭발보다 더 위험한 불꽃이 일렁였다.

"내 목숨을 구해주고, 내 나라를 구할 정보를 주겠다? 아주 합리적이군."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죠."

"아니. 거절해."

예상 밖의 대답.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가 뭡니까. 당신도 황제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복수는 할 거야. 하지만 거래는 아니지."

그의 엄지가 내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피부가 억세게 쓸리는 감각이 생생했다.

"거래는 타인끼리 하는 거야. 주고받으면 끝이지. 하지만 난 너랑 끝낼 생각이 없거든."

"......그럼 뭘 원하시는데요."

"공범."

그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황제를 죽이는 공범이 되어줘. 네가 칼이 되고, 내가 칼자루가 되는 거지."

"그게 거래와 뭐가 다릅니까?"

"다르지. 공범은 운명을 공유하니까."

그가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겨 밀착시켰다.
목덜미를 타고 찌릿한 소름이 뻗어나갔다. 호흡이 찰나의 순간 엉켰다. 가슴팍을 때리는 건 기폭장치의 진동이 아니었다.
훅 끼쳐오는 짙은 체향. 미약하게 섞인 피 냄새와 매캐한 담배 향. 그 압도적인 질량이 내 이성을 짓누르고 있었다.

"네가 터지면 나도 죽고,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관계.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미친놈.
제국의 그림자와 적국의 왕이 운명 공동체라니.
(진짜 제정신이 아니군.)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미친 제안'이 황제의 '합리적인 명령'보다 훨씬 더 숨통이 트였다.

"좋습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Batch 4: 18화~20화


17화: 공범자 (마무리)

(앞부분에서 계속)

"좋습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끝에 닿은 그의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주박이 새겨진 심장이 거부 반응으로 욱신거렸다.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려 할 때마다 찾아오는 익숙한 통증. 하지만 이번엔 무시했다. 눈앞의 남자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그 알량한 통증을 덮어버렸으니까.

"공범, 해보죠. 어차피 이판사판이니까."

"잘 생각했어."

아샤드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는 내 어깨에 올려진 손을 잡아끌더니, 그대로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은 자리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계약의 키스. 하지만 10년 전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그를 구원할 차례였다. 아니, 우리가 서로를 구원할 차례인가.

"그럼 첫 번째 임무를 주지."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일 아침, 황제에게 가서 보고해. '기폭 장치가 고장 났다'고."

"그가 믿을까요?"

"믿게 만들어야지.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연기."

그가 내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고 한 걸음 물러섰다. 아쉬움 따위는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가 봐.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사니까."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테라스를 나섰다. 등 뒤에서 밤바람이 불어왔다. 식은땀에 젖은 등이 서늘했다. 손등에 남은 온기만이 유일하게 현실감을 쥐여주고 있었다.

[공범이라.]

유리창에 비친 이벨린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나쁘지 않네. 혼자 죽는 것보단 둘이서 세상을 망가뜨리는 게 더 재밌잖아?]

그녀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래. 우리는 미친 공범자들이다.
황제, 너는 파트너를 잘못 골랐어.


17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00자 (누적)
  • 장면 수: 1개 (테라스에서의 거래 성사)
  • 메인 플롯: 렌과 아샤드가 '공범'으로서 황제에게 대항하기로 결탁함.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이 이 '파멸적인 동맹'에 찬성함.
  • 클리프행어: [결의] 황제를 속이기 위한 렌의 연기 예고.

18화: 거짓말의 무게

다음 날 아침, 황제의 집무실.
공기는 무거웠고, 황제 카이리스의 침묵은 그보다 더 무거웠다. 넓은 집무실 안에는 오직 서류 넘기는 소리만 건조하게 울렸다.

"고장?"

카이리스가 깃펜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그래서 더 소름 끼쳤다.

"네. 폐하께서 신호를 보내셨을 때, 가슴에 통증만 있었을 뿐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최대한 덤덤하게, 그러나 당혹스러운 척.
무릎 꿇은 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구두 굽 소리가 카펫 위를 짓이기며 다가왔다.

"이상하군. 연구소 데이터는 완벽했는데."

그가 허리를 숙여 내 명치, 정확히는 기폭 회로가 심어진 곳에 손을 댔다. 가죽 장갑 너머로 차가운 마력이 흘러들어와 내 몸안을 훑었다.
호흡이 엉켰다. 아샤드가 내 몸에 남긴 마력 역류의 잔재를 들키면 끝이다.

하지만 아샤드는 철저했다. 그는 내 몸 안의 마력을 자신의 것이 아닌, 마치 회로가 과열되어 타버린 것처럼 정교하게 위장해 두었다.

"흐음."

카이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손끝으로 내 명치를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회로가 탔어.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군."

"아샤드 르페르의 마력이... 예상보다 강했던 것 같습니다. 흡수하는 과정에서 회로가 견디지 못한 게 아닐지."

나는 준비해 둔 변명을 내놓았다. 카이리스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깝네. 어제 그 불꽃놀이를 기대했는데."

그는 별안간 내 멱살을 잡고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뭐, 좋아. 기계는 고치면 되니까."

"......"

"대신, 벌은 받아야지? 임무 실패에 대한 대가."

그의 손가락이 딱, 하고 튕겨졌다.

"으윽!"

주박이 작동했다. 폐부가 쪼그라들었다. 보이지 않는 강철 집게가 심장을 쥐어뜯는 감각.
나는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입술을 짓씹었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막으려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소리 질러도 돼. 여기는 방음이 잘 되거든."

카이리스가 구두코로 내 어깨를 툭 찼다. 그러고는 내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잔인한 호기심으로 번들거리는 뱀의 눈.

"아파? 죽을 것 같아?"

"허억, 헉......"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만 간신히 새어 나왔다.

"기억해 둬, 렌. 네 생명줄은 내가 쥐고 있어. 그 마족 놈이 아니라."

그는 나를 쓰레기 버리듯 바닥에 내팽개치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 봐. 연구소장에게 연락해 둘 테니 수리받고."

나는 비틀거리며 집무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복도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개자식.'

[저걸 그냥 둬? 확 죽여버리지.]

이벨린이 머릿속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참아. 아직은 때가 아니야.'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고통의 여파로 손끝이 파르르 떨렸지만, 동시에 지독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속았다. 황제는 내가 고장 난 인형이라고 믿었다. 이제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몸을 추스르고 복도를 걷다 마주친 사람 때문이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군."

아샤드 르페르.
그가 복도 끝 창가에 기대어 나를 보고 있었다. 대놓고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적국 왕. 그 오만함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여긴 웬일입니까."

"병문안. 파트너가 고장 났다길래."

그가 다가와 내 턱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뺨을 스쳤다.

"맞았나?"

"......넘어졌습니다."

"황제 앞에서는 잘만 넘어지는군."

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는 내 입가에 묻은 피를 엄지로 닦아내더니, 그대로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혀끝으로 핏자국을 핥는 동작이 기묘하게 관능적이었다.

"피 맛이 쓰다."

"더러우니까 하지 마십시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을 피했다.

"약속했잖아. 넌 내 거라고."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차가운 유리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마셔. 진통제야. 마력 성분은 뺐으니 황제도 눈치 못 챌 거다."

"이런 걸 주려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아니. 데이트 신청하러 왔지."

"......네?"

아샤드가 싱긋 웃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그의 은발을 부서지듯 비췄다.

"내일, 황실 사냥 대회. 너도 참가한다며?"

"저는 호위 임무입니다."

"그게 그거지. 숲속은 보는 눈도 적고, 밀회하기 딱 좋잖아."

그가 몸을 숙여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준비해 둬. 사냥감은 멧돼지가 아니라 황제니까."

뒷목이 뻣뻣해졌다. 사냥 대회.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유희이자, 사고를 위장해 정적을 제거하기 가장 좋은 무대. 아샤드는 그곳을 우리의 무대로 만들 생각이었다.

"실수하면 죽습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아니요.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으니까요."

"냉정하긴."

그가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리고 돌아섰다. 망토 자락이 허공을 갈랐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손에 쥔 진통제 병을 꽉 쥐었다.
내일이다. 내일 숲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18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500자
  • 장면 수: 2개 (황제와의 대면/고문, 아샤드와의 복도 밀회)
  • 메인 플롯: 황제를 속이는 데 성공했지만, 육체적/정신적 압박을 받음. 사냥 대회가 결전의 장소로 예고됨.
  • 서브플롯: [서브 B] 황제의 잔혹성과 통제광적인 면모 부각.
  • 정보 공개: 주박의 고통은 마력 회로와 별개로 작동함.
  • 클리프행어: [사건 예고] 내일 사냥 대회에서 황제를 노린다는 아샤드의 선전포고.

19화: 사냥터의 짐승들

제국 북쪽의 '검은 숲'.
황실 전용 사냥터인 이곳은 거대한 침엽수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낮에도 빽빽한 나뭇가지에 가려 햇빛이 들지 않아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곳. 흙바닥에서는 썩은 잎사귀 냄새가 진동했다.

"오늘의 우승자에게는 소원 하나를 들어주지."

출발선에서 카이리스가 선언했다. 그는 화려한 사냥복 차림으로 흑마 위에 앉아 있었다.
귀족들은 환호했지만, 나는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살의를 읽었다. 그는 오늘 아샤드를 죽일 생각이다. 아주 우연한 '사냥 사고'를 가장해서.

"출발!"

나팔 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말이 숲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근위대장으로서 황제의 뒤를 바짝 따랐다. 내 임무는 겉으로는 황제 호위였지만, 진짜 목적은 그의 목을 노리는 것이었다.

숲은 깊고 어두웠다. 말발굽 소리가 젖은 흙바닥을 짓이기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조용하군."

앞서 달리던 카이리스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주변에는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짐승들이 본능적으로 포식자의 기운을 감지하고 쥐죽은 듯 숨은 것이다.

"나와, 렌."

카이리스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였다.
나는 나무 그늘에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아샤드는 어디 있지?"

"서쪽 구역으로 갔습니다. 멧돼지 흔적을 쫓아서."

"거짓말."

카이리스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마력석이 장전된 장총이 들려 있었다. 총구는 짐승이 아니라 내 가슴팍을 향하고 있었다.

"그 녀석, 냄새를 맡고 왔어. 네 피 냄새."

"......!"

"내가 너한테 수리만 해준 줄 알았어?"

카이리스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찰칵, 하는 쇳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네 몸에 미끼를 심었지. 마족을 미치게 만드는 페로몬. 지금쯤 아샤드는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널 찾아 헤매고 있을 거야."

그랬다. 아침부터 몸이 비정상적으로 뜨겁고 감각이 예민해진 이유가 있었다. 단순한 컨디션 난조가 아니라, 그가 주입한 약물 때문이었다.

"그가 널 찾아오면, 이 총으로 쏴 죽일 거야. '폭주한 마족 왕이 근위대장을 덮치려 해서 사살했다'고 하면 완벽한 시나리오지. 제국과 마족 간의 전쟁 명분으로도 아주 훌륭하고."

"비겁하군요."

"전략이야."

바스락.

그때, 숲속 깊은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엄청난 속도로 무언가가 덤불을 헤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살기.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마력.

"왔군."

카이리스가 총을 겨눴다. 숲의 짙은 어둠 속을 향해.
그곳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멧돼지가 아니었다. 짐승처럼 사족보행으로 튀어나온 은발의 남자. 아샤드 르페르였다.

하지만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평소의 여유로운 금안은 핏발이 서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짐승처럼 거품이 맺혀 있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맹수. 그는 오로지 나만을 뚫어지게 보며 달려들었다.

"아샤드!"

내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페로몬. 황제의 말대로 그는 지독한 본능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잘 가라, 마왕."

카이리스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고막을 찢는 총성이 숲을 울렸다. 탄환은 정확히 아샤드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갔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궤적.

그 순간, 내 몸이 멋대로 튀어 나갔다.
주박의 명령도, 내 이성의 판단도 아니었다.
이벨린이었다.

[안 돼!]

내 몸이 총알의 궤적으로 뛰어들었다.

푸욱.

어깨가 뜯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덮쳤다. 살이 뚫리고 뼈가 갈리는 소리가 두개골을 울렸다. 충격에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젖은 흙바닥에 처박히며 시야가 핑 돌았다.

"......렌?"

총성에 놀라 멈칫한 아샤드의 눈에 순간적으로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나를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내 어깨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이런."

카이리스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방패 노릇은 제대로 하네.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가 철컥, 소리를 내며 다시 장전했다.

"그럼 둘 다 죽어."

그가 두 번째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아샤드가 포효했다.

"카이리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포효와 함께 검은 마력이 폭발했다. 반경 수십 미터 안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나갔다. 카이리스가 타고 있던 흑마가 기겁하며 날뛰었고, 황제는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아샤드는 쓰러진 황제를 공격하는 대신, 나에게로 달려왔다.
그가 피투성이가 된 나를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숲의 더 깊은 곳,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아샤드......!"

추락하는 와중에도 그는 내 머리를 감싸 안고 등을 돌려 충격을 대비했다.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윙윙거렸다.
우리는 검은 숲의 아득한 심연으로 떨어졌다.


19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00자
  • 장면 수: 2개 (사냥 대회 시작, 숲속의 함정과 추락)
  • 메인 플롯: 황제의 함정(페로몬+저격)에 빠짐. 렌이 아샤드 대신 총을 맞음.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이 아샤드를 구하기 위해 렌의 몸을 움직임 (사랑의 증명).
  • 클리프행어: [추락] 절벽 아래로 떨어진 두 사람. 생사 불명.

20화: 심장의 무게

절벽 아래는 거대한 동굴이었다.
오래전 마수들이 살았던 둥지 같은 곳. 차가운 습기와 짙은 이끼 냄새, 그리고 짐승의 뼈 썩는 냄새가 섞여 났다.

"으윽......"

눈을 뜨자마자 지독한 고통이 밀려왔다. 총에 맞은 어깨 부근이 불에 타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건, 내 몸 안의 상태였다.

총알에 맞은 충격으로 아샤드가 억눌러 놓았던 마력 회로가 다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황제가 심어둔 페로몬 때문에, 내 몸은 눈앞에 있는 아샤드의 마력에 반응해 들끓고 있었다.

"정신이 드나?"

아샤드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그의 화려했던 옷은 갈가리 찢어지고 흙투성이였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망토를 찢어 내 어깨를 지혈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관통상이야. 뼈는 안 다쳤지만 출혈이 심해."

"당신은...... 괜찮습니까?"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걱정 할 때야? 네 몸이 지금 시한폭탄인데."

그의 말이 맞았다. 내 몸은 지금 임계점을 넘어가고 있었다. 피부 아래서 불길한 붉은빛이 혈관을 타고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폭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렌. 도망쳐.]

이벨린이 힘없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조차 희미하게 끊어지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야. 못 막아.]

"아샤드. 가세요."

나는 피 묻은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밀어냈다기보다 옷깃을 스친 것에 불과했지만.

"터집니다. 이번엔 당신 마력으로도 못 막아요."

"안 가."

"제발! 같이 죽고 싶어요?"

"공범이라며."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바닥이 화로처럼 뜨거웠다.

"같이 죽든가, 같이 살든가. 둘 중 하나야."

"이 바보 같은......!"

우우웅-.

불길한 공명이 시작됐다. 내 심장 부근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시야가 점멸했다. 귓가에는 수천 마리의 벌떼가 우는 듯한 이명이 울렸다.
이번엔 진짜다. 내 몸이 원자 단위로 쪼개져 흩어지려는 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아샤드가 결심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방법이 하나 있어."

그가 남은 셔츠 자락을 거칠게 찢어냈다. 탄탄한 가슴 근육 위, 심장이 뛰는 곳에 기하학적인 검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족의 생명. 마석(魔石).

"내 심장을 너한테 줄게."

"......뭐?"

"마석은 방대한 마력을 담는 그릇이야. 네 몸의 폭주하는 에너지를 내 마석으로 옮기면, 터지는 건 막을 수 있어."

"그럼 당신은요! 마석이 없으면 당신은......!"

마족에게 마석은 심장이나 다름없다. 그걸 꺼낸다는 건 죽음을 의미하거나, 운이 좋아 살아남아도 평생 마력을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된다는 뜻이다.

"안 죽어. 난 마왕이니까."

그가 웃었다.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오만한 미소였다.

"대신, 평생 날 책임져야 할 거야. 내가 힘없는 남자가 돼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나는 악을 썼지만,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페로몬과 극한의 고통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샤드가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자신의 가슴을 푹 갈랐다.

푸욱.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조차 잇새로 삼키며, 찢어진 가슴 속에서 붉게 빛나는 보석을 끄집어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맥동하는 붉은 보석. 그의 생명 그 자체였다.

"받아, 렌."

그가 피로 범벅이 된 손으로 마석을 내 가슴 위에 올렸다.

마석이 닿자마자 늪에 빠지듯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생명이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내 몸을 찢어발기려던 폭주 에너지가 거짓말처럼 마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신, 아샤드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아샤드......!"

나는 굳었던 몸을 간신히 움직여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급속도로 차가워지고 있었다. 늘 델 것처럼 뜨거웠던 체온이, 싸늘한 얼음장처럼 식어가고 있었다.

"자지 마요. 제발, 눈 좀 떠 봐요......!"

동굴 밖에서는 황제의 추격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냥개 짖는 소리, 말발굽 소리. 그리고 축축한 빗소리.

나는 축 늘어진 아샤드를 품에 안고 이를 악물었다. 피와 섞인 눈물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살린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남자를 살린다. 설령 내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 보여주자.]

이벨린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지독한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지독한 악녀인지.]

나는 바닥에 떨어진 아샤드의 대검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칼자루가 손바닥에 쩍 달라붙었다.
이제 도망은 없다. 사냥은 끝났다.
이제 전쟁이다.


20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5,200자 (누적 40,000자 돌파)
  • 장면 수: 1개 (동굴 안에서의 희생과 각성)
  • 메인 플롯: 아샤드가 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마석(심장)을 렌에게 이식함. 렌이 완전히 각성하여 황제와의 전면전을 결심.
  • 서브플롯: [서브 C] 쌍방 구원의 정점 (아샤드→렌). 로맨스 서사의 클라이맥스.
  • 정보 공개: 마석 이식은 가능하지만 제공자는 치명적인 상태가 됨. 렌은 이제 아샤드의 마력을 무한정 쓸 수 있는 상태가 됨.
  • 클리프행어: [S급] 각성 - 아샤드가 쓰러지고, 렌이 검을 들며 황제의 추격대와 맞서는 장면.

Batch 4 완료 요약

진행 상황 트래커 업데이트

  • 메인 플롯 진행률: 66% (2막 종료, 3막 진입)
  • 활성 서브플롯:
    • [서브 A] 이벨린과 렌의 완전한 동맹 결성.
    • [서브 B] 황제와의 전면전 시작.
    • [서브 C] 아샤드의 희생으로 인한 감정 폭발.
  • 미공개 정보: 10년 전 이벨린이 요양지에서 겪었던 일의 구체적 진실. 황제의 '신 죽이기' 다음 단계.
  • 다음 배치 예고: 21화부터는 3막(전결)입니다. 각성한 렌의 무력 시위, 아샤드를 살리기 위한 사투, 그리고 황제와의 최종 결전이 시작됩니다.

일관성 검증

  • 캐릭터 음성: 렌의 독백이 절망→분노로 자연스럽게 전환됨. 아샤드의 직진남 캐릭터 유지.
  • 세계관: 마석 설정과 인체 병기 설정이 충돌 없이 결합됨.
  • : 피폐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절정에 달함. (리디북스 스타일 적합)

Batch 5: 21화~25화


21화: 마녀의 탄생

동굴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질척한 진흙을 밟는 군화 소리.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
황제의 사냥개들이 기어코 냄새를 맡고 온 것이다.

"여기다! 핏자국이 있어!"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살아있을까?"
"시체라도 찾아야 해. 폐하의 엄명이다. 머리를 가져오는 자에게 작위를 내리신다고 했다!"

탐욕에 전 목소리들이 동굴 입구에서 웅웅거렸다.
나는 쓰러진 아샤드를 내 코트—피와 진흙으로 떡이 된—로 덮어주었다.
그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창백한 뺨 위로 식은땀만 흘러내렸다.
이 미친놈아. 누굴 맘대로 살리래.

흉곽 안쪽이 끓는 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들끓었다.
아샤드가 쑤셔 넣은 마석이 이물질처럼 갈비뼈 아래서 덜컥거렸다.
그의 생명이 내 혈관을 타고 역류하듯 흘렀다.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끈적한 살의. 눈앞의 모든 걸 찢어 죽이고 싶다는 불쾌한 충동.

[렌. 준비됐어?]

이벨린이 머릿속에서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

나는 바닥에 처박힌 아샤드의 검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마검(魔劍). 평소의 나라면 두 손으로도 들기 버거웠을 쇳덩어리였지만, 지금은 나뭇가지처럼 가벼웠다.
진짜 미친 몸뚱이다.

"저기 있다! 저기 숨어 있어!"

횃불을 든 기사가 나를 발견하고 악을 썼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좁은 동굴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눈은 썩은 고기를 발견한 들개처럼 번들거렸다.

"여자다! 마족 왕은 쓰러져 있어!"
"하하! 오늘 횡재했군. 여자는 생포하고 남자는 목을 베어라!"

"여자다! 마족 왕은 쓰러져 있어!"
"하하! 오늘 횡재했군. 여자는 생포하고 남자는 목을 베어라!"

탐욕스러운 외침이 눅눅한 동굴 벽을 타고 징그럽게 울렸다.
나는 쓰러진 아샤드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입술 끝에 닿은 피부가 소름 돋도록 차가웠다. 시체처럼.
하지만 내 흉곽 안쪽에 자리 잡은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기다려요. 금방 청소하고 올 테니까."

질척이는 핏물을 밟으며, 나는 검을 고쳐 쥐고 천천히 일어섰다.
끈적한 검은 마력이 내 몸을 감싸며 사납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자는 생포하고 남자는 목을 베어라!"

그들의 탐욕스러운 외침이 동굴 벽을 타고 웅웅거렸다.
나는 쓰러진 아샤드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입술 끝에 닿은 피부가 차가웠다. 시체처럼.
하지만 내 가슴 한가운데, 낯선 자리에서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은 화상이라도 입을 듯 뜨거웠다.

"기다려요."

바닥에 떨어진 검을 고쳐 쥐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금방 청소하고 올 테니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검은 아지랑이가 발밑에서 피어오르더니 내 몸을 감쌌다. 아샤드의 마력이었다.
마치 그가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것 같았다. 서늘하고, 지독하게 익숙한 기운.

"저깄다! 쏴라!"

선두에 선 기사가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다.
파공음을 내며 화살이 날아왔다.
피해야 했다. 예전의 렌이었다면 당연히 몸을 굴렸을 궤적.
하지만 발은 바닥에 들러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까앙-!

검을 가볍게 쳐냈을 뿐이다. 허공에 일그러진 검은 장막이 솟구치며 쇳덩이를 튕겨냈다.
마법. 내가 마법을 썼다.
아니, 내 의지가 아니었다. 아샤드의 심장이 제멋대로 방어 기제를 끌어올린 거다.

"뭐, 뭐야? 방금 그건!"
"마법사냐? 정보에는 그냥 검사라고 했는데!"

당황한 기사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 짧은 틈.
발을 굴렀다.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몸이 튕겨 나갔다.
거리를 좁히는 데는 단 한 걸음이면 충분했다.

"크윽!"

내 검이 선두에 선 기사의 목줄기를 그었다.
강철 흉갑을 뚫고 들어갔는데도 손끝에 걸리는 저항이 없었다. 뼈가 잘렸는지, 살이 찢겼는지 모를 정도로 허무한 감각.
뜨거운 핏물이 왈칵 쏟아져 뺨을 적셨다. 비릿한 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하하! 더! 더 죽여!]

머릿속에서 이벨린이 비명을 지르며 환호했다.
그녀의 들끓는 광기가 내 손끝으로 고스란히 흘러들었다.
가슴에 박힌 마석이 붉게 맥동할 때마다, 사람을 죽였다는 최소한의 죄책감마저 증발해 버렸다. 그저 눈앞의 고기 덩어리들을 전부 치워버리고 싶다는 충동뿐.

"괴, 괴물이다!"
"포위해! 다구리를 쳐서라도 잡으란 말이다!"

이성을 잃은 십여 명의 기사가 동시에 무기를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아샤드의 마력이 검신을 타고 시커멓게 타올랐다.
춤을 추듯, 그들의 엉성한 포위망 사이로 파고들었다.
검을 휘두를 때

Batch 5: 21화~25화


21화: 마녀의 탄생 (계속)

"포위해! 다구리를 쳐서라도 잡으란 말이다!"

십여 명의 기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동굴 벽을 때렸다.
나는 검을 고쳐 쥐었다. 아니, 쥐어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손끝부터 팔뚝을 타고 올라온 검붉은 마력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근육을 통제했다.
가장 먼저 달려든 기사의 목줄기를 노렸다.
검날이 뼈를 가르고 지나가는 감각이 손아귀에 선명하게 남았다. 피가 튀었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비명이 터지기도 전에 다음 목표로 몸을 틀었다.
무거웠던 검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아하하! 더! 더 죽여!]

뇌간을 긁어대는 이벨린의 웃음소리.
그녀의 광기가 내 이성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혈관을 타고 끓어오르는 낯선 열기. 내 것이 아닌 마력이 전신을 팽창시켰다.
숨이 차지 않았다. 다치지도 않았다.
적의 칼날이 닿기 직전, 검붉은 장벽이 튀어나와 궤적을 비틀어버렸다.
나는 그저 손목을 까딱이는 것만으로 그들의 단단한 흉갑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괴, 괴물이다......"
"도망쳐! 저건 인간이 아니야!"

살아남은 몇몇이 뒷걸음질 쳤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들.
그래, 너희 눈에는 내가 괴물로 보이겠지.
가슴 한가운데 타인의 마석을 박아넣고 피를 뒤집어쓴 꼴이니.
하지만 내 눈에는 너희가, 그저 치워야 할 쓰레기로 보일 뿐이다.

"어딜 가."

나는 바닥에 뒹굴던 단검을 발로 걷어찼다.
단검은 쐐기처럼 날아가 도망치던 기사의 오금에 박혔다.
그가 고꾸라지자마자 다가가 목을 밟았다. 체중을 실어 꺾었다. 둔탁한 파열음.

마지막 한 놈의 숨통을 끊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동굴 안은 찢어진 살점과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역겨워야 정상인데, 코끝을 맴도는 그 비릿함이 묘하게 달콤했다.
미쳤군. 진짜로.

나는 피 묻은 검을 대충 털어내고 아샤드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미동도 없었다.
무릎을 꿇고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로, 내 갈비뼈 안쪽에서 요동치는 박동과 미세하게 공명하는 울림이 느껴졌다.

"살아있어."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줄이 툭 끊어졌다.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석이 뿜어내던 강제적인 활력이 사그라들자, 뼛속까지 시린 피로가 덮쳐왔다.

[잘했어, 렌. 아주 훌륭한 청소였어.]

이벨린이 나른하게 속삭였다. 혀를 내둘러 입술을 핥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제 어쩔 거야? 여기서 살림이라도 차릴 거야?]

"닥쳐. 시끄러우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샤드의 팔을 목에 두르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성인 남자의 체중이 고스란히 짓눌러왔지만, 버틸 만했다.
동굴 밖으로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진흙탕이 된 바닥. 빗소리가 우리의 발자국과 피 냄새를 지워줄 터였다.

"조금만 참아. 내 허락 없인 못 죽는다고 했잖아."

나는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차가운 빗물이 뺨을 때렸다. 황제의 추격대가 다시 냄새를 맡기 전에,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진흙투성이고, 가장 처절한 도피였다.


21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00자 (누적)
  • 장면 수: 1개 (동굴 전투 및 탈출)
  • 메인 플롯: 아샤드의 마석을 이식받은 렌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추격대를 섬멸. 아샤드를 데리고 도주 시작.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이 살육을 즐기며 렌의 잔혹성을 부추김.
  • 클리프행어: [도주] 의식 잃은 아샤드를 업고 빗속으로 사라지는 렌.

22화: 심장 소리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숲의 경계를 한참 벗어난 곳에 버려진 사냥꾼 오두막이었다.
썩은 나무 냄새와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지붕은 반쯤 날아가 있었지만, 쏟아지는 폭우를 피하기엔 구석 자리 하나면 충분했다.

나는 아샤드를 삐걱거리는 낡은 침상 위에 눕혔다.
피와 진흙으로 엉망이 된 겉옷을 벗겨냈다.
그의 가슴 중앙, 마석을 강제로 뜯어낸 자리에는 흉측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피는 멎어 있었다. 마족의 빌어먹을 재생력 덕분인지, 아니면 내 가슴 안에서 뛰고 있는 그의 마석이 어떻게든 연결을 유지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추, 워......"

아샤드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숨소리가 샜다.
그의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했고, 얼음장처럼 찼다.
마석, 즉 심장을 잃은 마족은 스스로 체온조절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서둘러 부서진 의자 다리를 모아 벽난로에 불을 피웠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불길의 온기만으로는 그의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젠장."

짧게 욕을 씹어삼켰다.
나는 물기를 머금은 내 겉옷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얇은 셔츠 차림으로 침상 위로 기어올라갔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의 옆에 바짝 붙어 누워, 차갑게 굳어가는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 체온이라도 욱여넣어야 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갈비뼈 안쪽에 이식된 '그의 심장'이 뿜어내는 열기를 돌려줘야 했다.

"아샤드. 내 목소리 들려?"

나는 그의 흉터 위에 귀를 대고, 내 가슴을 완전히 밀착시켰다.
내 안에서 묵직하고 거친 박동이 울렸다.
분명 내 것이 아닌 리듬. 그 이질적인 진동이 내 피부를 뚫고 그의 몸으로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바랐다.

기묘하고 끔찍한 감각이었다.
내 몸안에, 나를 집어삼키려던 포식자의 심장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심장이 한 번씩 피를 뿜어낼 때마다, 낯선 감정의 찌꺼기들이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분노. 그리고 징그러울 정도로 지독한 집착.

"......렌."

얼마나 지났을까.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탁해진 금안이 아주 느리게 호선을 그렸다.
초점은 엇나가 있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내 체취를 찾았다.

"여기 있어. 안 갔으니까 눈 똑바로 떠."

"살아...... 있네."

그가 모래가 낀 듯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슴팍에 구멍이 뚫려 죽어가는 와중에도, 내 생사부터 확인하는 꼴이라니.
미친 새끼. 지가 지금 누구 걱정을 해.

"당신 덕분에. 그리고 이 빌어먹을 심장 덕분에."

"다행이야...... 안 터져서."

그가 힘겹게,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핏기 없는 그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여 내 가슴 위로 올라왔다.
셔츠 너머로 요동치는 박동을 확인하려는 듯, 긴 손가락이 둥글게 말려들었다.

"따뜻하군. 내 심장이...... 네 안에서, 뛰는 게."

"헛소리 할 힘 있으면 잠이나 자. 마력도 다 털린 주제에."

"마력이, 없으니까...... 춥네. 좀 더...... 안아."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내 목덜미 쪽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대륙을 피로 물들이던 오만한 포식자가, 지금 내 품에 매달려 체온을 구걸하고 있다.
이 남자가 나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도려낸 것의 무게가, 서늘하게 피부에 와닿았다.

**[어머, 얘네 봐라

26화: 왕의 수업

오두막의 밤은 길었다.
아샤드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생명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내가 그를 끌어안을 때마다 다시 밀물처럼 차오르는 기이한 순환이 반복되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의 끓는 듯한 열이 내렸다.
창밖으로 푸스름한 빛이 스며들 때, 아샤드가 눈을 떴다.
금안(金眼)의 빛이 예전보다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석을 잃은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살아있네."
"당신 덕분에요."

나는 물을 적신 천으로 그의 갈라진 입술을 축여주었다.
그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려다 밭은 숨을 뱉으며 도로 누웠다. 천하의 마왕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꼴이라니.

"젠장. 힘이 안 들어가."
"당연하죠. 심장을 뽑아냈는데."
"그래도 입은 살았어."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의 악력이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목구멍 안쪽이 까끌거려 나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렌. 시간이 없어."
"알아요. 황제가 추격대를 더 보낼 겁니다."
"아니. 황제는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절벽 아래는 마수들의 둥지니까."

아샤드의 흐릿했던 눈빛이 일순 매섭게 번뜩였다.

"놈은 지금쯤 승전보를 기다리며 축배를 들고 있겠지. 그때가 기회야."
"......지금 몸으로요? 걷지도 못하면서."
"나는 못 해. 네가 해야지."

그가 내 가슴, 정확히는 그의 심장이 뛰고 있는 곳을 앙상한 손가락으로 찔렀다. 툭, 닿은 곳에서 이질적인 박동이 울렸다.

"네 안에는 지금 마계 최강의 마석이 들어있어. 넌 걸어 다니는 재앙이야."
"쓰는 법을 모르는데요."
"가르쳐 줄게. 아주 속성으로."

그날부터 기묘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스승은 침대에 누워 입으로만 지시하는 폐인 꼴이었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지식은 잔혹할 만큼 실전적이었다.

26화: 왕의 수업

오두막의 밤은 길었다.
장작 타는 냄새와 피비린내가 좁은 공간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샤드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내 손을 꽉 쥔 채 놓지 않았다.
그의 생명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내가 그를 끌어안을 때마다 다시 밀물처럼 차오르는 기이한 순환이 밤새도록 반복되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끓어오르던 그의 열이 간신히 내렸다.
창밖으로 푸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들 때, 아샤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언제나 오만하게 빛나던 금안(金眼)의 빛이 예전보다 한참이나 흐릿해져 있었다. 마석을 잃은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혹독했다.

"살아있네."
"당신 덕분에요."

나는 물을 흠뻑 적신 천으로 갈라진 그의 입술을 조심스레 축여주었다.
그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려다, 짧은 신음을 흘리며 도로 침상에 누웠다.
천하의 마왕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꼴이라니.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젠장.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당연하죠. 가슴에서 심장을 통째로 뽑아냈는데."
"그래도 입은 살았어."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악력이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목구멍 안쪽이 뻑뻑해졌다.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젖은 천을 대야에 던져 넣었다.

"렌. 시간이 없어."
"알아요. 황제가 추격대를 더 보낼 겁니다. 당장 이동해야……."
"아니. 황제는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절벽 아래는 마수들의 둥지니까."

아샤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흐릿했던 금안에 다시 서늘한 광채가 돌았다.

"놈은 지금쯤 승전보를 기다리며 축배를 들고 있겠지. 그때가 기회야."
"……지금 이 몸으로요? 혼자 힘으로 걷지도 못하면서."
"나는 못 해. 네가 해야지."

그가 앙상해진 손가락을 들어 내 가슴, 정확히는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곳을 꾹 찔렀다.

"네 안에는 지금 마계 최강의 마석이 들어있어. 넌 걸어 다니는 핵무기야."
"쓰는 법을 전혀 모르는데요."
"가르쳐 줄게. 속성으로."

그날부터 기묘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스승은 침대에 누워 입으로만 지시하고, 제자는 숲속에서 나무를 베어 넘기는 살벌한 과외.

"집중해. 마력은 물이 아니야. 불이야."

아샤드의 쉰 목소리가 열린 창문을 넘어 오두막 밖까지 울렸다.

"흐르게 하지 말고, 태워. 네 혈관이 도화선이라고 상상해."

"말이 쉽지!"

콰앙!

내가 손을 뻗자 검은 화염이 폭포수처럼 솟구쳤다.
시야를 가리던 아름드리나무가 단말마도 없이 순식간에 검은 재가 되어버렸다.
위력은 좋은데 조절이 전혀 안 된다. 이대로 가다간 숲을 다 태워 먹을 판이었다.

27화: 마지막 월세

수업은 혹독했다.
아샤드는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내 감각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자신의 마석과 내 영혼이 맞물리는 주파수를 기어코 찾아냈다. 손가락 끝만 까딱해도 숲 절반을 재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정밀하고 지독한 조율이었다.

사흘째 되는 밤.
아샤드가 쇳소리가 섞인 숨을 뱉으며 침대로 무너졌다. 핏기가 가신 그의 뺨은 밀랍처럼 굳어 있었다.

"이게... 한계야."
"충분해요. 이 정도면 황궁 기둥뿌리쯤은 날려버릴 수 있어요."

나는 물수건을 쥐고 땀에 절은 그의 이마를 닦아냈다. 피부에 닿는 온도가 서늘했다.
그는 갈라진 입술로 희미하게 웃으며 내 손목을 쥐었다.

"날려버리는 게 목적이 아니야. 살아남는 게 목적이지."

그의 호흡이 고르게 변한 것을 확인하고, 나는 오두막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폐부를 찌르는 밤공기가 매웠다. 내일이면 우리는 제국으로 돌아간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

[렌.]

오랜만에 이벨린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늘 귓바퀴를 긁어대던 광기도, 독기도 완전히 빠져나간 건조한 울림.

'왜. 또 배고파?'

[아니. 배불러. 네가 아샤드의 마력을 하도 들이부어서, 나까지 과식한 기분이야.]

그녀가 킥

[아니. 배불러. 네가 아샤드의 마력을 너무 많이 써서, 나까지 과식한 기분이야.]

이벨린이 킥킥거렸다. 평소처럼 고막을 찌르는 쨍한 소리가 아니었다. 물먹은 솜처럼, 아니, 흩어지는 안개처럼 끝이 바스라지는 웃음.

[렌. 그거 알아? 이 몸은 이제 온전한 인간의 것이 아니야. 마족의 심장이 들어왔잖아. 나약한 인간의 영혼은 여기서 오래 못 버텨.]

'무슨 소리야. 갑자기.'

불길한 한기가 혈관을 타고 올랐다.

[방 빼야 할 시간이라고. 이번엔 내가.]

머릿속을 울리던 목소리에 지독한 피로감이 묻어났다. 늘 제멋대로 굴던 이벨린의 것이라기엔 낯선 온도였다.

**[어차피 나는 20년 전에 죽은 망령이야.

(앞부분에서 계속)

[어차피 나는 20년 전에 죽은 망령이야. 네가 들어와서 이 몸을 꽤 잘 썼잖아. 더러운 곳은 청소하고, 망가진 곳은 수리하고.]

머릿속을 울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라디오 주파수가 끊기듯, 지지직거리는 이명이 빈자리를 채웠다.

[이제 온전히 네 거야. 등기 이전할 때가 됐어.

방을 빼라니.
이게 무슨, 자다가 벼락 맞을 소리인가.

거울 속의 여자는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었다.
내 얼굴. 하지만 내 것이 아닌 표정.
입꼬리의 호선부터 눈매의 휘어짐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내가 평소에 짓는 냉소적인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티 없이 맑고 오만한 귀족 영애의 얼굴.
20년 전 죽었다던 귀족 영애, 이벨린의 미소였다.

"뭐가 그렇게 놀라?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해서 20년이나 살았으면, 주인 왔을 때 비켜주는 게 예의 아니야?"

귓가에 꽂히는 목소리는 명랑했다.
마치 오랜 친구에게 농담을 건네는 듯한 가벼운 어조.
하지만 그 직후, 뇌간을 찌르는 날카로운 이명이 덮쳐왔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머릿속에 쑤셔 넣고 마구 휘젓는 듯한 끔찍한 감각.

"크윽……."

비틀거리며 세면대를 짚었다. 손바닥에 닿은 대리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관절이 덜덜 떨렸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꼿꼿하게 서서, 헉헉대며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흥미롭다는 듯 구경하고 있었다.
마치 유리창 너머의 벌레를 관찰하듯이.

"아, 맞다. 너 내 목소리 처음 듣지? 그동안은 내가 너무 깊이 잠들어 있어서."

거울 속의 여자가 가볍게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댔다.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쉿.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일단 웃어. 제국 최고의 살수이자 근위대장이 미친년처럼 보이면 곤란하잖아?"

미친년은 너겠지.
당장이라도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목구멍에 울컥 피비린내가 고였다.
갈라진 쇳소리만 샜다.

눈앞이 붉게 점멸했다.
연회장의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기괴한 형상으로 일그러졌다.
주변의 소음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웅웅거렸다.
귀족들의 비명, 바닥에 나뒹구는 자객들의 시체, 대리석 바닥을 끈적하게 적신 피 냄새.
이 모든 것이 뒤섞여 뇌를 짓눌렀다.

"괜찮나?"

그때였다.
어깨에 닿는 뜨거운 열기.
단순한 체온이 아니었다. 테라스에서 느꼈던, 그 불쾌할 정도로 압도적이고 위험한 기운. 짙은 밤안개 속에 숨어든 맹수 같은 기척.
아샤드 르페르였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머릿속을 긁어대던 이벨린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끊어진 라디오 주파수처럼, 잔혹한 정적이 찾아왔다.

"……!"

거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아샤드의 서늘한 금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걱정 따위는 한 줌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변이를 일으킨 실험 대상을 관찰하는 포식자의 눈빛에 가까웠다.

"방금, 누구였지?"

그가 물었다. 느릿하고 나른한 어조였다.

"네 안에서 떠들던 그 목소리 말이야."

호흡이 엉켰다.
들린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이벨린의 환청은 오직 내 머릿속에서만 울렸다.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마족이다. 영혼의 냄새를 맡고, 파장을 읽어내는 괴물.
내 영혼의 파장이 요동치는 걸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충격 때문에 잠시 현기증이 났을 뿐입니다."

나는 뻣뻣하게 대꾸하며 그의 손을 쳐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순순히 손을 거뒀다. 하지만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그의 금안은 내 턱끝에서부터 이마까지, 집요하고 끈적하게 핥아올리고 있었다.

"거짓말."

아샤드의 입매가 비틀렸다.

"방금 네 눈빛,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 마치……."
"근위대장!"

황실 시종장이 헐레벌떡 달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객의 피를 밟고 미끄러질 뻔한 그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당장, 접견실로."

시종장의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자객이 침입해 연회장이 쑥대밭이 되었는데, 근위대장이라는 자가 마족과 노닥거리고 있으니 제 목이 달아날까 두려운 거겠지.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다행이다. 차라리 미친 황제를 상대하는 게 낫다. 속을 알 수 없는 마족보다는.

"업무 복귀하죠."

나는 아샤드에게 짧게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칼날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도망치는 뒷모습도 꽤 볼만하군."

낮은 중얼거림.
무시했다. 무시해야만 했다.
시종장을 따라 걷는 내내,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누군가 뇌를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
걸음을 뗄 때마다 시야가 흔들렸다. 삐이이- 하는 이명이 귓가를 맴돌았다.


황제 전용 접견실. 서늘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통유리 너머로, 화려한 제국의 야경이 발아래 깔려 있었다.
카이리스는 창가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밤거리를 구경하는 뒷모습. 제국의 수도는 여전히 화려한 불빛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암살 위협을 겪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아니, 평온하다 못해 지루해 보였다.

"치우는 데 3분이나 걸리더군."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툭 던졌다.

"예전의 너였다면 1분 안에 끝냈을 텐데. 양지로 나오니 칼날이 무뎌졌나?"
"드레스가 불편해서요."

나는 무미건조하게 핑계를 댔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치렁치렁한 치맛자락과 코르셋은 암살자에게 최악의 구속구니까.

카이리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 들린 크리스털 와인잔.
그 안의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샹들리에 조명을 받아 검붉게 빛났다.
마치 방금 전 연회장 바닥에 흩뿌려졌던 피처럼.

"가까이 와."

명령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다가갔다.
그와의 거리가 다섯 걸음, 세 걸음, 한 걸음으로 좁혀졌다.
주박(呪縛)이 새겨진 심장이 조여왔다.
주인의 곁에 있다는 긴장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마법적 압박감이 숨통을 틀어쥐었다.

"무릎 꿇어."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가와 내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얼굴이 엉망이네."

그가 혀를 찼다.

"식은땀에, 동공은 풀려 있고,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하고."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거짓말."

오늘따라 거짓말이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듣는다. 다들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깨어났지?"

카이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의 단어였다.

"……네?"
"네 안에 있는 그거 말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내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감각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이벨린."

폐부가 쪼그라들었다.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빙의자라는 것.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이벨린이라는 것.
그리고, 그녀가 지금 내 안에서 깨어났다는 것까지.

"어떻게……."
"내가 깨웠으니까."

카이리스가 싱긋 웃었다.
너무나 천진난만한 미소. 그래서 더 끔찍하게 소름이 돋았다.

"생각해 봐, 렌. 내가 왜 20년이나 지난 시체를 보존해 뒀겠어? 단순히 네 영혼을 담을 그릇이 필요해서?"

그가 코웃음을 쳤다.

"천만에. 널 담을 그릇이라면 튼튼한 죄수나 노예도 얼마든지 널려 있어."

그가 와인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붉은 액체가 최고급 카펫 위로 툭, 떨어졌다.
피 같은 얼룩이 서서히 번져나갔다.

"이벨린은 특별해. 그녀의 가문, 그녀의 피, 그리고 그녀가 가진 '원한'까지. 그 모든 게 내가 그리려는 그림의 완벽한 재료야."
"……재료?"
"너는 칼이고, 이벨린은 칼집이야. 지금까지는 칼집이 잠들어 있어서 칼을 마음대로 휘둘렀지만, 이제 칼집이 깨어났으니 칼이 무뎌지겠지."

그는 마치 내일의 날씨를 얘기하듯,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선고를 뱉어냈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이명이 뇌간을 때렸다.
아까 자객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불길한 노크 소리.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뇌를 강타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4화: 깨진 그릇

(앞부분 요약: 자객 난입 후, 렌은 거울 속 이벨린의 환영을 보며 괴로워한다. 아샤드가 다가오자 이벨린의 목소리가 끊기지만, 황제의 호출로 렌은 자리를 뜬다. 접견실에서 황제 카이리스는 자신이 이벨린을 깨웠으며, 그녀는 '재료'라고 말한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이명이 뇌간을 때렸다.
호흡이 엉켰다. 아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까

"아, 맞다. 너 내 목소리 처음 듣지?"

거울 속의 여자가 검지를 들어 제 붉은 입술에 갖다 댔다. 화려하게 세팅된 금발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뱀처럼 찰랑거렸다.

"쉿.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일단 웃어. 제국의 위대한 근위대장이 미친년처럼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는 걸 들키면 곤란하잖아?"

미친년은 너겠지.
혀끝까지 차오른 비아냥을 간신히 삼켰다. 목구멍이 사포로 문지른 듯 찢어질 듯 건조했다.
삐-. 고막 안쪽을 날카롭게 후벼 파는 이명.
주변의 소음이 순식간에 물먹은 솜처럼 먹먹하게 가라앉았다. 귀족들이 내지르는 비명, 대리석 바닥에 나뒹구는 자객들의 시체,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
감각이 엉켰다. 뇌가 쏟아지는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고 과부하를 일으켰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흉곽이 비정상적으로 조여들었다.

"괜찮나?"

누군가 내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은 뜨거운 열기. 아까 테라스에서 닿았던 그 익숙하고도 위험한 체온.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아샤드 르페르였다.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이 닿는 순간, 머릿속을 헤집던 이벨린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현이 끊어진 것처럼 기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신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묘한 안도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니다. 내 안에 웅크린 '진짜 주인'이 아샤드의 체온에 반응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본능적인 끌림이었다.

"……!"

나는 거칠게 헐떡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샤드의 짐승 같은 금안(金眼)이 나를 흥미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걱정 따위는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진귀한 장난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서늘한 눈빛이었다.

"방금, 누구였지?"

그가 나직하게 물었다.

"네 안에서 떠들던 그 목소리 말이야."

호흡이 엉켰다.
들렸나. 아니, 그럴 리가. 이벨린의 목소리는 오직 내 머릿속에서만 울렸다.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영혼의 파장을 읽어내는 괴물이다. 내 영혼의 표면에 일어난 미세한 균열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감지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나는 뻣뻣하게 대꾸하며 내 어깨를 쥔 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시선만은 집요하게 내 흔들리는 동공을 파고들고 있었다.

"거짓말."

그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방금 네 눈빛,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 마치……."

"근위대장!"

그때, 연회장 입구 쪽에서 황실 시종장이 헐레벌떡 달려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찬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땀범벅이었다. 자객이 침입해 난장판이 된 와중에, 근위대장이라는 작자가 적국의 왕과 묘한 기류를 풍기며 서 있으니 속이 타들어 갈 만도 했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당장, 접견실로 오시랍니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차라리 속이 뻔히 보이는 미친 황제를 상대하는 게 낫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마족의 눈앞에 무방비하게 서 있는 것보다는.

"업무에 복귀하죠."

나는 아샤드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짧게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점액질처럼 끈적하게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도망치는 뒷모습도 꽤 볼만하군."

그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시종장의 뒤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뇌수가 흔들리는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이 울렸다.

[기다려, 렌.]

다시 환청이 들렸다. 이번엔 목소리가 작았다. 아까처럼 또렷하지 않고, 짙은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하지만 내용은 충분히 섬뜩했다.

[우린 아직 할 얘기가 많아.]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시야가 일그러졌다.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비릿한 쇳물이 입안에 번졌다.


황제 전용 접견실의 공기는 무겁고 서늘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통유리 너머로 붉게 물든 제국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황제 카이리스는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밤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제 목숨을 노린 암살 위협을 겪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아니, 평온하다 못해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치우는 데 3분이나 걸리더군."

그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직하게 말했다.

"예전의 너였다면 1분 안에 끝냈을 텐데. 양지로 나오니 칼날이 무뎌졌나?"

"드레스가 불편해서요."

나는 건조하게 핑계를 댔다. 사실 전혀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발목을 휘감는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은 암살자에게 최악의 구속구니까.

카이리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크리스털 와인잔이 들려 있었다. 찰랑이는 붉은 액체가 희미한 간접 조명을 받아 검붉게 빛났다. 마치 금방 사람의 몸에서 뽑아낸 핏물처럼.

"가까이 와."

나긋나긋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지독한 명령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와의 거리가 다섯 걸음, 세 걸음, 한 걸음으로 좁혀졌다.
심장에 깊게 새겨진 절대적인 주박(呪縛)이 펄떡이며 반응했다. 주인의 곁에 있다는 원초적인 긴장감과,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목을 졸라왔다.

"무릎 꿇어."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빈손을 뻗어 내 턱을 우악스럽게 들어 올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얼굴이 엉망이네."

그가 혀를 쯧 차며 내 뺨을 툭툭 쳤다.

"식은땀에, 동공은 풀려 있고, 안색은 며칠 묵은 시체처럼 창백하고."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거짓말."

오늘따라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듣는다. 다들 독심술이라도 속성으로 배웠나.

"깨어났지?"

카이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네?"

"네 안에 있는 그거 말이야."

그의 차가운 검지가 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이벨린."

폐부가 쪼그라들었다. 서늘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뱀처럼 기어올랐다.
알고 있었다. 이 미친 황제는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다. 내가 이 몸의 껍데기만 차지한 이방인이라는 것도, 원래 주인의 영혼이 아직 이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는 것까지도.

"어떻게……."

"내가 깨웠으니까."

카이리스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천진난만해서, 오히려 뱃속이 뒤틀릴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 봐, 렌. 내가 왜 20년이나 지난 시체를 썩지도 않게 보존해 뒀겠어? 단순히 네 더러운 영혼을 담을 튼튼한 그릇이 필요해서? 천만에. 널 담을 그릇이라면 지하 감옥에 널린 죄수나 노예로도 충분해."

그가 손목을 까딱여 와인잔을 기울였다.
검붉은 액체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핏빛 얼룩이 고급 카펫 위로 섬뜩하게 번져나갔다.

"이벨린은 특별해. 그녀의 망가진 가문, 그녀의 핏줄, 그리고 그녀가 품고 죽은 '원한'까지. 그 모든 게 내가 그리려는 거대한 그림의 완벽한 재료야. 넌 그저 그 재료가 썩지 않게 유지하는 방부제 역할이었을 뿐이고."

"……재료?"

"너는 칼이고, 이벨린은 칼집이야. 지금까지는 칼집이 얌전히 잠들어 있어서 네가 칼을 마음대로 휘둘렀지만, 이제 칼집이 깨어났으니 칼이 무뎌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겠지. 두 영혼이 하나의 육체를 두고 싸우기 시작하면 육체는 버티지 못해."

그는 마치 내일 날씨를 얘기하듯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진실을 뱉어냈다. 빈 와인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이명이 뇌간을 강하게 때렸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똑, 똑, 똑.
아까 연회장에서 들었던 그 기괴한 노크 소리가 다시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뇌벽을 긁어내는 듯한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이어졌다.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뇌수를 직격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고막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야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크윽……!"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고꾸라졌다.
위장이 젖은 걸레를 짜듯 기괴하게 뒤틀리고, 식도가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폐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입안에서 왈칵, 비릿하고 뜨거운 액체가 솟구쳤다.

"쿨럭!"

바닥에 검붉은 핏물이 흩뿌려졌다.
카이리스가 쏟아버린 와인이 아니었다. 내 피였다.
아니, 이벨린의 피였다.

(앞부분 생략: 3화 엔딩 직후, 거울 속 이벨린의 "방 빼" 선언. 아샤드와의 조우 후 황제에게 불려간 렌.)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이명이 뇌간을 때렸다.
아까 자객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노크 소리였다.
아니, 노크가 아니었다. 안에서 밖으로, 살갗을 찢고 나오려는 발버둥.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고막이 아닌 뇌수를 직접 긁어댔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날카로운 비명.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어대는 듯한 소름 끼치는 파열음.

"크윽……!"

가슴을 움켜쥐었다. 무릎이 꺾이며 대리석 바닥에 처박혔다.
위장이 뒤틀렸다.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불길.
숨. 숨이 안 쉬어진다.
입안으로 왈칵, 비릿한 액체가 쏟아졌다.

"쿨럭!"

바닥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와인이 아니었다. 내 피였다. 아니, 이벨린의 피였다.
황제가 쏟아두었던 와인 자국 위로 검붉은 핏방울이 겹쳐졌다. 기괴한 마블링이 바닥을 적셨다.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들이마시는 공기마다 폐부를 갈기갈기 찢는 듯했다.
이건 주박(呪縛)이 주는 고통 따위가 아니었다.
몸이 영혼을 거부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존재의 부조화.

"저런."

머리 위에서 카이리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걱정? 당황?
아니. 놈은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벌써 망가지면 곤란한데.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그는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대신, 번쩍이는 구두 끝으로 핏물에 젖은 내 손가락을 툭툭 건드렸다. 길가에서 파닥거리는 벌레의 생사를 확인하듯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호흡이 엉켰다.

"버텨 봐, 렌.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살아남는 거."

혈관 속에 얼음물이 쏟아진 것처럼 전신이 식어갔다.
바닥의 냉기가 뺨을 때렸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흐릿한 시야 끝으로 무언가가 잡혔다.
황제의 등 뒤.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또 하나의 그림자.

"폐하. 물건을 너무 험하게 다루시는군요."

낮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아샤드 르페르였다.

"내 근위대장이야. 부수든 고치든 내 마음이지."
"글쎄요. 조약에 따르면, '양국 간의 우

4화: 깨진 그릇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이명이 뇌간을 때렸다. 둔탁하고 불쾌한 진동.
아까 자객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노크 소리였다.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고막 안쪽을 후벼 팠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날카로운 비명.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두개골을 울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질적인 두 개의 자아가 한 그릇 안에서 충돌하며 빚어내는 파괴적인 공명이었다. 뼈마디가 비틀리는 듯한 고통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크윽……!"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최고급 벨벳 카펫의 부드러운 섬유가 뺨에 닿았지만, 내게는 쇳조각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댔다.
위장이 뒤틀리고,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폐부가 쪼그라들며 호흡이 엉켰다. 입안에서 비릿한 액체가 왈칵 넘어왔다.

"쿨럭!"

바닥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와인이 아니었다. 내 피였다. 아니, 이벨린의 피였다.
황제가 쏟았던 와인 자국 위에, 검붉은 핏방울이 겹쳐지며 기괴한 마블링을 만들었다. 숨을 헐떡일 때마다 핏방울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이건 주박(呪縛)의 고통이 아니었다. 몸이 영혼을 거부하는, 말 그대로 '존재의 부조화'였다.

"저런."

머리 위에서 카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당황? 아니.
그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구두 굽 소리. 일정한 박자로 다가오는 그 소리는 사냥감을 몰아넣는 포식자의 발걸음이었다.

"벌써 망가지면 곤란한데.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그는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구두 끝으로 내 손끝을 툭툭 건드렸다. 마치 길가에 죽어가는 새를 확인하듯이. 그의 그림자가 내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버텨 봐, 렌.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살아남는 거."

조롱 섞인 속삭임. 시야가 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나는 보았다.
접견실 문이 열리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또 하나의 그림자를.

"폐하. 물건을 너무 험하게 다루시는군요."

낮고 위험한 목소리.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서늘한 파장.
아샤드 르페르였다.

"내 근위대장이야. 부수든 고치든 내 마음이지."
황제가 턱을 치켜들며 웃었다.

"글쎄요. 조약에 따르면, '양국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사절단은 황실 구성원의 안위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되어 있던데."

아샤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마다 서늘한 마력이 바닥을 타고 흘렀다.
그가 황제를 지나쳐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바닥에 닿아 있던 내 몸이, 순식간에 그의 단단한 팔 안으로 들어올려졌다. 가죽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체온이 이질적이었다.

"이건 보호입니까, 약탈입니까?"
"응급처치지."

아샤드의 금안이 싸늘하게 황제를 쏘아보았다. 허공에서 두 시선이 부딪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모순적인 열기가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숨 쉬어, 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순간, 끈질기게 울리던 이벨린의 비명소리가 뚝 끊겼다. 발작처럼 떨리던 호흡이 기적처럼 잦아들었다.
마치 그가 내 영혼의 피난처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까무러쳤다.


4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200자 (누적)
  • 장면 수: 2개 (아샤드와의 조우, 황제와의 대면 및 붕괴)
  • 메인 플롯: 황제의 계략(이벨린을 깨움) 확인, 신체 붕괴 시작.
  • 서브플롯: [서브 B] 황제의 잔혹성 부각, [서브 C] 아샤드의 개입.
  • 정보 공개: 황제가 이벨린을 깨운 흑막임. 아샤드의 마력은 이벨린의 폭주를 잠재우는 효과가 있음.
  • 클리프행어: 위기 - 황제 앞에서 쓰러진 렌을 아샤드가 구해냄.

5화: 구원, 혹은 발정

코끝을 찌르는 묵직한 백단향. 그리고 뒷목을 옥죄는 서늘한 통각.
시야가 흐릿하게 번지다 간신히 초점을 잡았다. 낯선 문양의 캐노피가 보였다.
황제의 침실도, 내 관사도 아니었다.
방 전체에 은은한 향 냄새가 감돌았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그러나 어딘가 최음적인 짙은 향기.

"일어났나?"

창가에 아샤드가 앉아 있었다.
그는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푼 편안한 차림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달빛이 그의 어깨 위로 비스듬히 내려앉아 있었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지만, 내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여긴……."
"사절단 숙소. 내 방이야."

책장을 넘기던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려다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미친 거 아냐? 제국 근위대장이 적국 왕의 침실에서 눈을 떠? 이건 스캔들이 아니라 반역죄 감이다.

"진정해. 황제에겐 치료 중이라고 전해뒀으니."
그가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료라뇨. 저는……."

말을 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모래를 삼킨 것처럼 껄끄러웠다.
아, 피를 토했었지.
그때 그가 침대로 다가왔다. 물잔을 내밀 줄 알았는데, 그가 내민 건 자신의 손목이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그의 팔뚝이 내 눈앞에 불쑥 내밀어졌다.

"마셔."
"……예?"
"네 몸이 원하는 거야. 물이 아니라 마력."

탄탄한 팔뚝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의 피부 표면에서 미세한 마력의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이벨린의 몸은 20년 된 시체나 다름없어. 황제의 흑마법으로 억지로 붙여둔 거지. 그런데 영혼이 두 개나 들어가서 싸워대니 과부하가 걸린 거야."

그는 마치 고장 난 기계를 진단하듯 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내 창백한 입술에 머물렀다.

"내 마력을 주입하면 당분간은 조용할 거야. 그 시끄러운 영혼도."

그의 말이 맞았다. 머릿속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이벨린의 목소리도, 두개골을 쪼갤 듯한 두통도 사라졌다.
하지만 남의 피, 그것도 마족의 마력을 마신다는 건…….

"싫다면 억지로라도 먹일 생각이야. 입으로든, 다른 곳으로든."

그의 금안이 위험하게 빛났다. 농담 같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내 턱끝을 가볍게 쥐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의 손목을 두 손으로 잡았다. 망설임은 짧았다. 살기 위해서라면 시궁창 구루마 밑이라도 기어갔던 인생이다.

나는 떨리는 양손으로 그의 굵은 손목을 붙잡고 입술을 댔다. 그의 맥박이 내 입술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생명력이 넘치는, 강인하고 오만한 박동.
송곳니로 살짝 피부를 긁어내자, 툭 하고 푸른 피가 배어 나왔다.
비릿한 쇳내와 함께 꿀처럼 달콤한 맛이 혀끝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인간의 피와는 완전히 다른, 농밀하고 압도적인 마력의 정수였다.

"으음……."

나도 모르게 농염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단순한 섭취가 아니었다. 폭발적인 쾌락이었다.
마력이 식도를 타고 흐를 때마다 전신의 신경이 비명을 질렀다. 죽어가던 세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들끓는 기분. 척추를 타고 짜릿한 전율이 솟구쳤다.

하지만 문제는 내 의지가 아니었다.
이 몸, 이벨린의 육체가 반응하고 있었다.
내 손이 제멋대로 그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내 허벅지가 이불보를 비틀며 꼬였다. 뜨거운 열기가 아랫배로 뭉근하게 몰렸다.

'미친, 그만해. 떨어져.'

머리로는 명령하는데, 몸은 그에게 더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탐하듯이, 아니,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연인을 갈구하듯이. 내 입술이 그의 피부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하아……."

아샤드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뒷목을 감싸 쥐었다. 거칠면서도 묘하게 조심스러운 손길. 엄지손가락이 내 맥박을 문질렀다.

"역시."

그가 내 귓가에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뜨거운 숨결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이 몸은 나를 기억해."

소름이 돋았다.
이벨린은 그를 알고 있었나? 20년 전에?
그때는 전쟁 중이었을 텐데. 귀족 영애와 마족 왕이 어떻게?

나는 황급히 입술을 뗐다. 턱을 타고 그의 푸른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는 엄지로 내 입술가를 닦아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만족감과 갈증이 뒤섞인 포식자의 얼굴.

"충분해. 더 마시면 취해."
"……감사합니다. 빚은 나중에 갚죠."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이불을 목끝까지 끌어올렸다.
수치심? 아니, 이건 공포다.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짐승 같은 공포.

"빚이라."

아샤드가 피 묻은 자신의 손목을 혀로 핥았다. 붉은 혀끝이 푸른 핏자국을 훔치는 모습이 지독하게 선정적이었다.

"그럼 지금 갚아. 질문 하나에 대답하는 걸로."

그가 침대 끝에 걸터앉으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시선이 얽혀들었다.

"10년 전, 라하트 전선. 기억나나?"

혈관 속에 얼음물이 쏟아진 것 같았다.
라하트 전선. 내가 황제의 그림자로서 처음 투입되었던 전장.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죽이지 않고 살려보냈던 유일한 적군.

은발에 금안을 가진, 눈을 다쳐 앞을 못 보던 마족 장교.

"글쎄요. 워낙 많은 전장을 돌아다녀서."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호흡은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그래? 유감이군."

아샤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구겨진 셔츠 자락을 털어내는 손길이 여유로웠다.

"나는 매일 밤 그날을 기억하는데. 내 목에 칼을 겨누고도, 붕대를 감아주던 그 손길을."

그가 방문을 열며 뒤를 돌아보았다. 문틈으로 스며든 복도의 불빛이 그의 금안을 서늘하게 비췄다.

"쉬어. 내일은 더 재미있는 일이 있을 테니까."

문이 닫혔다. 찰칵, 하고 자물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을 확인했다.
소매 아래, 희미하게 남은 화상 자국.
10년 전, 그를 구하려다 입었던 상처.

그는 알고 있다.
내가 이벨린이 아니라, 그때 그 암살자라는 걸.


5화 메타 정보

  • 메인 플롯: 아샤드의 마력으로 신체 안정화.
  • 서브플롯: [서브 C] 10년 전 과거 떡밥(라하트 전선) 투척. 이벨린의 몸이 아샤드에게 반응함(근육 기억).
  • 정보 공개: 아샤드의 피(마력)가 치료제이자 최음제 역할을 함.
  • 클리프행어: 감정/과거 - 아샤드가 10년 전 은인을 기억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퇴장.

6화: 손목의 흉터

다음 날 아침, 나는 근위대장 집무실로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가 나를 반겼다. 대부분이 어젯밤 자객 침입 사건에 대한 경위서와 귀족들의 항의 서한이었다.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반쪽이 되셨습니다."

부관인 루카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내밀었다.
이 녀석은 내가 '그림자' 출신인 걸 모르는 몇 안 되는 순진한 기사다. 나를 그저 '낙하산 인사'로 온 귀족 영애쯤으로 알고 있다.

"괜찮아. 숙취야."
"숙취요? 아, 어제 마족 왕이랑…… 흠흠."

루카스가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며 시선을 피했다. 소문 한번 더럽게 빠르네.
나는 혀를 차며 커피를 들이켰다. 쓴맛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서류를 훑는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자객들의 신원. '검은 달' 소속의 반마족 용병들.
배후는 불명. 하지만 뻔하다. 황제가 돈을 대줬거나, 아니면 황제의 정적들이 보냈거나. 어느 쪽이든 황제의 묵인 하에 벌어진 일이다.

'이벨린은 조용하네.'

어젯밤 아샤드의 피를 마신 덕분인지, 머릿속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하지만 불안했다.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다. 약효가 떨어지면 그녀는 또다시 월세를 독촉하러 올 것이다.

"사절단 대표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위병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렸다.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아샤드 르페르. 이 남자는 왜 또 온 거야?

육중한 참나무 문이 열리고, 제복을 각 잡혀 입은 아샤드가 들어왔다. 어젯밤의 흐트러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냉철한 외교관의 가면을 완벽하게 쓰고 있었다. 은발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공무 수행 중이신가 보군. 근위대장."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범인 인도 요청. 어제 잡힌 놈들 중에 우리 쪽 탈주병이 있어서."

그는 자연스럽게 내 책상 앞 의자를 빼고 앉았다. 다리를 꼬는 동작 하나하나가 귀족적이고 오만했다. 루카스가 쩔쩔매며 김이 나는 홍차를 내왔다.
아샤드는 찻잔을 들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놓인 내 왼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피부를 뚫을 듯이 집요했다.

"장갑."

그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실내에서도 장갑을 끼나?"

나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책상 아래로 내렸다. 검은 가죽 장갑. 10년 동안 한 번도 남에게 맨손을 보인 적이 없다.

"화상 흉터가 있어서요. 보기 흉합니다."
"화상이라."

아샤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10년 전, 라하트 전선에서도 화재가 있었지. 보급 창고가 전소되는 바람에 많은 병사가 죽거나 다쳤어."

"그렇습니까? 전사는 들어봤어도 화재 얘기는 처음 듣는군요."

나는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펜촉이 종이 위를 긁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그 화재 속에서 날 구해준 여자가 있었어. 얼굴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손목에 화상을 입었지. 내 옷에 붙은 불을 끄려다가."

그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벨린 영애는 10년 전에 요양 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던데. 요양지에서 화상을 입을 일이 있었나?"

취조다.
이 남자는 지금 외교 업무를 핑계로 나를 심문하고 있다.

"어릴 때 촛불 장난을 하다가 데었습니다. 흔한 일이죠."
"흔한 일이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책상을 넘어와 내 왼손을 낚아챘다.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군. 흔한 흉터인지, 내가 기억하는 그 흉터인지."
"이러지 마십시오!"

나는 거칠게 손을 빼내려 저항했다. 하지만 그는 마족이다. 완력으로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의 악력은 쇠사슬처럼 단단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내 가죽 장갑의 끝자락을 파고들었다. 손목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아주 느리고 집요하게 장갑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마치 내 비밀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듯이.

스르륵.
가죽이 마찰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검은 가죽이 벗겨지고, 창백한 피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화상 자국.
10년 전,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뜨겁게 달궈진 철골을 맨손으로 막아내다 생긴 상흔. 불꽃 모양처럼 일그러진, 결코 흔하지 않은 훈장이자 낙인이었다.

아샤드의 동작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흉터에 못 박혔다. 평정을 유지하던 그의 금안이 거세게 흔들렸다. 턱관절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역시."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환희? 분노? 슬픔?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짐승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짝을 발견한 듯한 맹렬한 광기마저 서려 있었다.

"너였어."

그가 내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

"이벨린이라는 껍데기 속에 숨어있는 너. 10년 전, 내 목숨을 쥐고도 놓아줬던 그 그림자."

부정해야 한다. 아니라고, 우연이라고 우겨야 한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호흡이 엉켰다. 흉곽 안쪽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이번엔 주박 때문도, 이벨린 때문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 렌의 심장이 위기감으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찾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경건하게, 그리고 짙은 소유욕을 담아. 입술의 뜨거운 감촉이 화상 흉터 위로 찍혔다.

"이제 절대 안 놓쳐."


6화 메타 정보

  • 메인 플롯: 정체 발각의 위기.
  • 서브플롯: [서브 C] 10년 전 인연 확인. 아샤드가 렌의 정체(빙의자=과거 은인)를 확신함.
  • 클리프행어: 발견 - 아샤드가 흉터를 확인하고 "너였어"라고 선언. 로맨스 텐션 폭발.

7화: 불편한 만찬

"폐하께서 두 분을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던 찰나, 문밖에서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정말이지 타이밍의 귀재다. 아니면 어디다 도청 장치라도 심어놨거나.

아샤드는 아쉬운 듯 혀를 차며 쥐고 있던 내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손목에 그의 체온이 화상처럼 눌어붙은 기분이었다.
그가 장갑을 다시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금안은 여전히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나중에 계속해.'

말하지 않아도 그 집요한 시선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세 시간이 지났다. 집무실의 창밖으로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제국의 하늘이 검붉게 물들고 나서야 만찬이 시작되었다. 귀족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비밀스러운 식사 자리였다.

만찬장은 화려했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가 눈이 시릴 정도로 빛을 뿜어냈다.
황제, 아샤드, 그리고 나. 기이한 삼자대면이었다.
황제는 상석에 앉아 느긋하게 고기를 썰고 있었고, 아샤드는 맞은편에서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붉은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만이 넓은 홀을 채웠다.
나는 그 사이, 호위라는 명목으로 서

"폐하께서 두 분을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던 찰나, 시종장이 문을 두드렸다.
황제는 정말이지 타이밍의 귀재다. 아니면 어디다 도청 장치라도 심어놨거나.
아샤드는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명확했다. '나중에 계속해.'

불과 한 시간 뒤. 안내받은 만찬장은 헛웃음이 나올 만큼 화려했다.
긴 테이블의 상석에는 황제 카이리스가, 그 맞은편에는 마족왕 아샤드가 앉았다. 나는 그 사이, 호위라는 명목으로 카이리스의 오른편 뒤에 시립해 있었다.

기이한 삼자대면이었다.
제국의 황제, 적국의 왕,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낀 이중인격 암살자.
물도 안 마셨는데 벌써부터 명치가 꽉 막히는 조합이다.

"고기가 아주 연하군."

카이리스가 스테이크를 썰며 입을 열었다. 은나이프가 살점을 짓누를 때마다 핏물 같은 붉은 육즙이 접시 위로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북부 전선에서 잡은 야생 짐승이라더군요. 마족들이 즐겨 먹는다

스텝 재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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