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8: 본편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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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출물 (v1)

보통
kie · gemini-3-pro

Batch 1: 4화~8화


4화: 깨진 그릇

방을 빼라니.
이게 무슨, 자다가 벼락 맞을 소리인가.

거울 속의 여자는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었다. 내 얼굴이지만 내 것이 아닌 표정. 20년 전 죽었다던 귀족 영애, 이벨린의 미소였다.

"뭐가 그렇게 놀라?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해서 20년이나 살았으면, 주인 왔을 때 비켜주는 게 예의 아니야?"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명랑했지만, 동시에 머리통을 쪼개버릴 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마치 뇌 속에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쑤셔 넣고 휘젓는 것 같았다.

"크윽……."

나는 비틀거리며 거울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은 거울면이 차가웠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똑바로 서서,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 맞다. 너 내 목소리 처음 듣지? 그동안은 내가 너무 깊이 잠들어 있어서."

그녀가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일단 웃어. 근위대장이 미친년처럼 보이면 곤란하잖아?"

미친년은 너겠지.
반박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 쇳소리만 새어 나왔다.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연회장의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주변의 소음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웅웅거렸다.
귀족들의 수군거림, 바닥에 나뒹구는 자객들의 시체, 피 비린내.
모든 감각이 뒤섞여 멀미를 유발했다.

"괜찮나?"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뜨거운 열기. 아까 테라스에서 느꼈던 그 익숙하고 위험한 체온.
아샤드 르페르였다.

그가 닿는 순간, 머릿속을 울리던 이벨린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안 맞아서 지직거리던 소음이 일시에 음소거된 것처럼.

"……!"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샤드의 금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걱정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실험 대상을 관찰하는 학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방금, 누구였지?"

그가 물었다.

"네 안에서 떠들던 그 목소리 말이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들린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이벨린의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만 울렸다.
하지만 이 남자는 영혼의 냄새를 맡는 괴물이다. 내 영혼의 파장이 요동치는 걸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충격 때문에 잠시 현기증이 났을 뿐입니다."

나는 뻣뻣하게 대꾸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집요하게 내 얼굴에 꽂혀 있었다.

"거짓말."

그가 입매를 비틀었다.

"방금 네 눈빛,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 마치……."

"근위대장!"

그때, 황실 시종장이 헐레벌떡 달려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당장, 접견실로."

시종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자객이 침입했는데 근위대장이 마족과 노닥거리고 있으니 속이 터질 만도 하겠지.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미친 황제를 상대하는 게 낫다. 속을 알 수 없는 마족보다는.

"업무 복귀하죠."

나는 아샤드에게 짧게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도망치는 뒷모습도 꽤 볼만하군."

그의 낮은 중얼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시종장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기다려, 렌.'

다시 환청이 들렸다. 이번엔 목소리가 작았다.
아까처럼 또렷하지 않고, 멀리서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

'우린 아직 할 얘기가 많아.'

닥쳐. 제발 좀 닥쳐.


황제 전용 접견실은 서늘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통유리 너머로 제국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카이리스는 창가에 서서 밤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암살 위협을 겪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아니, 평온하다 못해 지루해 보였다.

"치우는 데 3분이나 걸리더군."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예전의 너였다면 1분 안에 끝냈을 텐데. 양지로 나오니 칼날이 무뎌졌나?"
"드레스가 불편해서요."

나는 핑계를 댔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은 암살자에게 최악의 구속구니까.

카이리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붉은 액체가 조명을 받아 검붉게 빛났다. 마치 피처럼.

"가까이 와."

명령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다가갔다. 그와의 거리가 다섯 걸음, 세 걸음, 한 걸음으로 좁혀졌다.
주박(呪縛)이 새겨진 심장이 반응했다. 주인의 곁에 있다는 긴장감과,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동시에 짓눌러왔다.

"무릎 꿇어."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내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얼굴이 엉망이네."

그가 혀를 찼다.

"식은땀에, 동공은 풀려 있고,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하고."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거짓말."

오늘따라 거짓말이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듣는다. 다들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깨어났지?"

카이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네?"
"네 안에 있는 그거 말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내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이벨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빙의자라는 것도,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이벨린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지금 깨어났다는 것까지.

"어떻게……."

"내가 깨웠으니까."

카이리스가 싱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천진난만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 봐, 렌. 내가 왜 20년이나 지난 시체를 보존해 뒀겠어? 단순히 네 영혼을 담을 그릇이 필요해서? 천만에. 널 담을 그릇이라면 튼튼한 죄수나 노예도 많아."

그가 와인잔을 기울여 바닥에 조금 쏟았다.
붉은 얼룩이 카펫 위로 번져나갔다.

"이벨린은 특별해. 그녀의 가문, 그녀의 피, 그리고 그녀가 가진 '원한'까지. 그 모든 게 내가 그리려는 그림의 재료야."
"……재료?"
"너는 칼이고, 이벨린은 칼집이야. 지금까지는 칼집이 잠들어 있어서 칼을 마음대로 휘둘렀지만, 이제 칼집이 깨어났으니 칼이 무뎌지겠지."

그는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말을 뱉었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쿵.
심장 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까 자객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노크 소리였다.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뇌를 강타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Batch 1: 4화~8화


4화: 깨진 그릇

(앞부분 요약: 자객 난입 후, 렌은 거울 속 이벨린의 환영을 보며 괴로워한다. 아샤드가 다가오자 이벨린의 목소리가 끊기지만, 황제의 호출로 렌은 자리를 뜬다. 접견실에서 황제 카이리스는 자신이 이벨린을 깨웠으며, 그녀는 '재료'라고 말한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쿵.
심장 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까


Batch 1: 4화~8화


4화: 깨진 그릇

[앞부분 요약: 거울 속에서 깨어난 이벨린의 영혼이 렌에게 "월세를 내라"며 말을 건다. 렌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한다.]

"아, 맞다. 너 내 목소리 처음 듣지?"

거울 속의 여자가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일단 웃어. 근위대장이 미친년처럼 보이면 곤란하잖아?"

미친년은 너겠지.
반박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 쇳소리만 새어 나왔다.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연회장의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명(耳鳴)이 삐 - 하고 고막을 찔렀다.

주변의 소음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웅웅거렸다.
귀족들의 비명, 바닥에 나뒹구는 자객들의 시체, 비릿한 피 냄새.
모든 감각이 뒤섞여 멀미를 유발했다.

"괜찮나?"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뜨거운 열기. 아까 테라스에서 느꼈던 그 익숙하고 위험한 체온.
아샤드 르페르였다.

그가 닿는 순간, 머릿속을 울리던 이벨린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안 맞아서 지직거리던 소음이 일시에 음소거된 것처럼.
대신 심장 깊은 곳에서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것도 내 감정이 아니었다.

"……!"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샤드의 금안(金眼)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걱정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실험 대상을 관찰하는 학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방금, 누구였지?"

그가 물었다.

"네 안에서 떠들던 그 목소리 말이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들린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이벨린의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만 울렸다.
하지만 이 남자는 영혼의 냄새를 맡는 괴물이다. 내 영혼의 파장이 요동치는 걸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충격 때문에 잠시 현기증이 났을 뿐입니다."

나는 뻣뻣하게 대꾸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집요하게 내 얼굴에 꽂혀 있었다.

"거짓말."

그가 입매를 비틀었다.

"방금 네 눈빛,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 마치……."

"근위대장!"

그때, 황실 시종장이 헐레벌떡 달려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당장, 접견실로."

시종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자객이 침입했는데 근위대장이 적국의 왕과 노닥거리고 있으니 속이 터질 만도 하겠지.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미친 황제를 상대하는 게 낫다. 속을 알 수 없는 마족보다는.

"업무 복귀하죠."

나는 아샤드에게 짧게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도망치는 뒷모습도 꽤 볼만하군."

그의 낮은 중얼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시종장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기다려, 렌.'

다시 환청이 들렸다. 이번엔 목소리가 작았다. 아까처럼 또렷하지 않고, 멀리서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 하지만 내용은 섬뜩했다.

'우린 아직 할 얘기가 많아.'

닥쳐. 제발 좀 닥쳐.


황제 전용 접견실은 서늘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통유리 너머로 제국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황제 카이리스는 창가에 서서 밤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암살 위협을 겪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아니, 평온하다 못해 지루해 보였다.

"치우는 데 3분이나 걸리더군."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예전의 너였다면 1분 안에 끝냈을 텐데. 양지로 나오니 칼날이 무뎌졌나?"
"드레스가 불편해서요."

나는 핑계를 댔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은 암살자에게 최악의 구속구니까.

카이리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붉은 액체가 조명을 받아 검붉게 빛났다. 마치 피처럼.

"가까이 와."

명령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다가갔다. 그와의 거리가 다섯 걸음, 세 걸음, 한 걸음으로 좁혀졌다.
주박(呪縛)이 새겨진 심장이 반응했다. 주인의 곁에 있다는 긴장감과,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동시에 짓눌러왔다.

"무릎 꿇어."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내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얼굴이 엉망이네."

그가 혀를 찼다.

"식은땀에, 동공은 풀려 있고,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하고."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거짓말."

오늘따라 거짓말이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듣는다. 다들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깨어났지?"

카이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네?"
"네 안에 있는 그거 말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내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이벨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빙의자라는 것도,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이벨린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지금 깨어났다는 것까지.

"어떻게……."

"내가 깨웠으니까."

카이리스가 싱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천진난만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 봐, 렌. 내가 왜 20년이나 지난 시체를 보존해 뒀겠어? 단순히 네 영혼을 담을 그릇이 필요해서? 천만에. 널 담을 그릇이라면 튼튼한 죄수나 노예도 많아."

그가 와인잔을 기울여 바닥에 조금 쏟았다.
붉은 얼룩이 카펫 위로 번져나갔다.

"이벨린은 특별해. 그녀의 가문, 그녀의 피, 그리고 그녀가 가진 '원한'까지. 그 모든 게 내가 그리려는 그림의 재료야."

"……재료?"

"너는 칼이고, 이벨린은 칼집이야. 지금까지는 칼집이 잠들어 있어서 칼을 마음대로 휘둘렀지만, 이제 칼집이 깨어났으니 칼이 무뎌지겠지."

그는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말을 뱉었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쿵.
심장 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까 자객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노크 소리였다.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뇌를 강타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크윽……!"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위장이 뒤틀리고,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액체가 넘어왔다.

"쿨럭!"

바닥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와인이 아니었다. 내 피였다. 아니, 이벨린의 피였다


Batch 1: 4화~8화


4화: 깨진 그릇

(앞부분 생략: 3화 엔딩 직후, 거울 속 이벨린의 "방 빼" 선언. 아샤드와의 조우 후 황제에게 불려간 렌.)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쿵.
심장 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까 자객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노크 소리였다.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뇌를 강타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파열음.

"크윽……!"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위장이 뒤틀리고,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액체가 넘어왔다.

"쿨럭!"

바닥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와인이 아니었다. 내 피였다. 아니, 이벨린의 피였다.
황제가 쏟았던 와인 자국 위에, 검붉은 핏방울이 겹쳐지며 기괴한 마블링을 만들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이건 주박(呪縛)의 고통이 아니었다. 몸이 영혼을 거부하는, 말 그대로 '존재의 부조화'였다.

"저런."

머리 위에서 카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당황? 아니.
그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벌써 망가지면 곤란한데.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그는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구두 끝으로 내 손끝을 툭툭 건드렸다. 마치 길가에 죽어가는 새를 확인하듯이.

"버텨 봐, 렌.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살아남는 거."

눈앞이 깜깜해졌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나는 보았다.
황제의 등 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또 하나의 그림자를.

"폐하. 물건을 너무 험하게 다루시는군요."

낮고 위험한 목소리.
아샤드 르페르였다.

"내 근위대장이야. 부수든 고치든 내 마음이지."
"글쎄요. 조약에 따르면, '양국 간의 우


Batch 1: 4화~8화


4화: 깨진 그릇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쿵.
심장 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까 자객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노크 소리였다.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뇌를 강타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파열음.

"크윽……!"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위장이 뒤틀리고,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액체가 넘어왔다.

"쿨럭!"

바닥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와인이 아니었다. 내 피였다. 아니, 이벨린의 피였다.
황제가 쏟았던 와인 자국 위에, 검붉은 핏방울이 겹쳐지며 기괴한 마블링을 만들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이건 주박(呪縛)의 고통이 아니었다. 몸이 영혼을 거부하는, 말 그대로 '존재의 부조화'였다.

"저런."

머리 위에서 카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당황? 아니.
그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벌써 망가지면 곤란한데.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그는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구두 끝으로 내 손끝을 툭툭 건드렸다. 마치 길가에 죽어가는 새를 확인하듯이.

"버텨 봐, 렌.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살아남는 거."

눈앞이 깜깜해졌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나는 보았다.
접견실 문이 열리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또 하나의 그림자를.

"폐하. 물건을 너무 험하게 다루시는군요."

낮고 위험한 목소리.
아샤드 르페르였다.

"내 근위대장이야. 부수든 고치든 내 마음이지."
"글쎄요. 조약에 따르면, '양국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사절단은 황실 구성원의 안위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되어 있던데."

아샤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황제를 지나쳐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바닥에 닿아 있던 내 몸이, 순식간에 그의 단단한 팔 안으로 들어올려졌다.

"이건 보호입니까, 약탈입니까?"
"응급처치지."

아샤드의 금안이 싸늘하게 황제를 쏘아보았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모순적인 열기가 전해졌다.

"숨 쉬어, 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순간, 끈질기게 울리던 이벨린의 비명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그가 내 영혼의 피난처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정신을 잃었다.


4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200자 (누적)
  • 장면 수: 2개 (아샤드와의 조우, 황제와의 대면 및 붕괴)
  • 메인 플롯: 황제의 계략(이벨린을 깨움) 확인, 신체 붕괴 시작.
  • 서브플롯: [서브 B] 황제의 잔혹성 부각, [서브 C] 아샤드의 개입.
  • 정보 공개: 황제가 이벨린을 깨운 흑막임. 아샤드의 마력은 이벨린의 폭주를 잠재우는 효과가 있음.
  • 클리프행어: 위기 - 황제 앞에서 쓰러진 렌을 아샤드가 구해냄.

5화: 구원, 혹은 발정

눈을 떴을 때는 낯선 천장이었다.
황제의 침실도, 내 관사도 아니었다.
방 전체에 은은한 향 냄새가 감돌았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그러나 어딘가 최음적인 향기.

"일어났나?"

창가에 아샤드가 앉아 있었다.
그는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푼 편안한 차림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달빛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지만, 내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여긴……."
"사절단 숙소. 내 방이야."

나는 벌떡 일어나려다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미친 거 아냐? 제국 근위대장이 적국 왕의 침실에서 눈을 떠? 이건 스캔들이 아니라 반역죄 감이다.

"진정해. 황제에겐 치료 중이라고 전해뒀으니."
"치료라뇨. 저는……."

말을 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아, 피를 토했었지.
그때 그가 침대로 다가왔다. 물잔을 내밀 줄 알았는데, 그가 내민 건 자신의 손목이었다.

"마셔."
"……예?"
"네 몸이 원하는 거야. 물이 아니라 마력."

그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탄탄한 팔뚝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이벨린의 몸은 20년 된 시체나 다름없어. 황제의 흑마법으로 억지로 붙여둔 거지. 그런데 영혼이 두 개나 들어가서 싸워대니 과부하가 걸린 거야."

그는 마치 기계를 진단하듯 건조하게 말했다.

"내 마력을 주입하면 당분간은 조용할 거야. 그 시끄러운 영혼도."

그의 말이 맞았다. 머릿속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이벨린의 목소리도, 깨질 듯한 두통도 사라졌다.
하지만 남의 피, 그것도 마족의 마력을 마신다는 건…….

"싫다면 억지로라도 먹일 생각이야. 입으로든, 다른 곳으로든."

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농담 같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의 손목을 잡았다. 망설임은 짧았다. 살기 위해서라면 흙탕물이라도 마셔온 인생이다.

나는 그의 손목에 입술을 대고, 송곳니로 살짝 피부를 긁었다.
비릿하고 달콤한, 묘한 맛이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으음……."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단순한 섭취가 아니었다. 쾌락이었다.
마력이 식도를 타고 흐를 때마다 전신의 신경이 곤두섰다. 죽어가던 세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깨어나는 기분.

하지만 문제는 내 의지가 아니었다.
이 몸, 이벨린의 육체가 반응하고 있었다.
내 손이 제멋대로 그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내 허벅지가 비비 꼬였다. 뜨거운 열기가 아랫배로 몰렸다.

'미친, 그만해. 떨어져.'

머리로는 명령하는데, 몸은 그에게 더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탐하듯이, 아니,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연인을 갈구하듯이.

"하아……."

아샤드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가 내 뒷목을 감싸 쥐었다. 거칠면서도 조심스러운 손길.

"역시."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이 몸은 나를 기억해."

소름이 돋았다.
이벨린은 그를 알고 있었나? 20년 전에?
그때는 전쟁 중이었을 텐데. 귀족 영애와 마족 왕이 어떻게?

나는 황급히 입술을 뗐다. 입가에 그의 푸른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엄지로 내 입술을 닦아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충분해. 더 마시면 취해."
"……감사합니다. 빚은 나중에 갚죠."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이불을 끌어올렸다.
수치심? 아니, 이건 공포다.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공포.

"빚이라."

아샤드가 피 묻은 자신의 손목을 혀로 핥았다. 그 모습이 지독하게 선정적이었다.

"그럼 지금 갚아. 질문 하나에 대답하는 걸로."

그가 침대 끝에 걸터앉으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10년 전, 라하트 전선. 기억나나?"

심장이 철렁했다.
라하트 전선. 내가 황제의 그림자로서 처음 투입되었던 전장.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죽이지 않고 살려보냈던 유일한 적군.

은발에 금안을 가진, 눈을 다쳐 앞을 못 보던 마족 장교.

"글쎄요. 워낙 많은 전장을 돌아다녀서."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래? 유감이군."

아샤드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매일 밤 그날을 기억하는데. 내 목에 칼을 겨누고도, 붕대를 감아주던 그 손길을."

그가 방문을 열며 뒤를 돌아보았다.

"쉬어. 내일은 더 재미있는 일이 있을 테니까."

문이 닫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을 확인했다.
소매 아래, 희미하게 남은 화상 자국.
10년 전, 그를 구하려다 입었던 상처.

그는 알고 있다.
내가 이벨린이 아니라, 그때 그 암살자라는 걸.


5화 메타 정보

  • 메인 플롯: 아샤드의 마력으로 신체 안정화.
  • 서브플롯: [서브 C] 10년 전 과거 떡밥(라하트 전선) 투척. 이벨린의 몸이 아샤드에게 반응함(근육 기억).
  • 정보 공개: 아샤드의 피(마력)가 치료제이자 최음제 역할을 함.
  • 클리프행어: 감정/과거 - 아샤드가 10년 전 은인을 기억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퇴장.

6화: 손목의 흉터

다음 날 아침, 나는 근위대장 집무실로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가 나를 반겼다. 대부분이 어젯밤 자객 침입 사건에 대한 경위서와 귀족들의 항의 서한이었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반쪽이 되셨습니다."

부관인 루카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내밀었다.
이 녀석은 내가 '그림자' 출신인 걸 모르는 몇 안 되는 순진한 기사다. 나를 그저 '낙하산 인사'로 온 귀족 영애쯤으로 알고 있다.

"괜찮아. 숙취야."
"숙취요? 아, 어제 마족 왕이랑…… 흠흠."

루카스가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소문 한번 빠르네.
나는 커피를 들이키며 서류를 훑었다.
자객들의 신원. '검은 달' 소속의 반마족 용병들.
배후는 불명. 하지만 뻔하다. 황제가 돈을 대줬거나, 아니면 황제의 정적들이 보냈거나. 어느 쪽이든 황제의 묵인 하에 벌어진 일이다.

'이벨린은 조용하네.'

어젯밤 아샤드의 피를 마신 덕분인지, 머릿속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하지만 불안했다.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다. 약효가 떨어지면 그녀는 또다시 월세를 독촉하러 올 것이다.

"사절단 대표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위병의 외침이 들렸다.
커피를 뿜을 뻔했다.
아샤드 르페르. 이 남자는 왜 또 온 거야?

문이 열리고, 제복을 갖춰 입은 아샤드가 들어왔다. 어젯밤의 흐트러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냉철한 외교관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공무 수행 중이신가 보군. 근위대장."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범인 인도 요청. 어제 잡힌 놈들 중에 우리 쪽 탈주병이 있어서."

그는 자연스럽게 내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루카스가 쩔쩔매며 차를 내왔다.
아샤드는 찻잔을 들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놓인 내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갑."

그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실내에서도 장갑을 끼나?"

나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책상 아래로 내렸다. 검은 가죽 장갑. 10년 동안 한 번도 남에게 맨손을 보인 적이 없다.

"화상 흉터가 있어서요. 보기 흉합니다."
"화상이라."

아샤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10년 전, 라하트 전선에서도 화재가 있었지. 보급 창고가 전소되는 바람에 많은 병사가 죽거나 다쳤어."

"그렇습니까? 전사는 들어봤어도 화재 얘기는 처음 듣는군요."

"그 화재 속에서 날 구해준 여자가 있었어. 얼굴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손목에 화상을 입었지. 내 옷에 붙은 불을 끄려다가."

그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벨린 영애는 10년 전에 요양 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던데. 요양지에서 화상을 입을 일이 있었나?"

취조다.
이 남자는 지금 외교 업무를 핑계로 나를 심문하고 있다.

"어릴 때 촛불 장난을 하다가 데었습니다. 흔한 일이죠."
"흔한 일이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책상을 넘어와 내 왼손을 낚아챘다.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군. 흔한 흉터인지, 내가 기억하는 그 흉터인지."
"이러지 마십시오!"

나는 거칠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는 마족이다. 완력으로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장갑 끝을 잡고 천천히 끌어내렸다.

스르륵.
검은 가죽이 벗겨지고, 창백한 피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화상 자국.
불꽃 모양처럼 일그러진, 결코 흔하지 않은 흉터.

아샤드의 동작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흉터에 못 박혔다. 그의 금안이 흔들렸다.

"……역시."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환희? 분노? 슬픔?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너였어."

그가 내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벨린이라는 껍데기 속에 숨어있는 너. 10년 전, 내 목숨을 쥐고도 놓아줬던 그 그림자."

부정해야 한다. 아니라고, 우연이라고 우겨야 한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번엔 주박 때문도, 이벨린 때문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 렌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찾았다."

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경건하게, 그리고 소유욕을 담아.

"이제 절대 안 놓쳐."


6화 메타 정보

  • 메인 플롯: 정체 발각의 위기.
  • 서브플롯: [서브 C] 10년 전 인연 확인. 아샤드가 렌의 정체(빙의자=과거 은인)를 확신함.
  • 클리프행어: 발견 - 아샤드가 흉터를 확인하고 "너였어"라고 선언. 로맨스 텐션 폭발.

7화: 불편한 만찬

"폐하께서 두 분을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던 찰나, 또다시 시종장이 문을 두드렸다.
황제는 정말이지 타이밍의 귀재다. 아니면 어디다 도청 장치라도 심어놨거나.

아샤드는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나중에 계속해.'


만찬장은 화려했다.
황제, 아샤드, 그리고 나. 기이한 삼자대면이었다.
황제는 상석에 앉아 고기를 썰고 있었고, 아샤드는 맞은편에서 와인을 흔들었다. 나는 그 사이, 호위라는 명목으로 서


Batch 1 (보완) & Batch 2: 7화~10화


7화: 불편한 만찬

"폐하께서 두 분을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던 찰나, 시종장이 문을 두드렸다.
황제는 정말이지 타이밍의 귀재다. 아니면 어디다 도청 장치라도 심어놨거나.
아샤드는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명확했다. '나중에 계속해.'


만찬장은 숨 막히게 화려했다.
긴 테이블의 상석에는 황제 카이리스가, 그 맞은편에는 마족왕 아샤드가 앉았다. 나는 그 사이, 호위라는 명목으로 카이리스의 오른편 뒤에 시립해 있었다.

기이한 삼자대면이었다.
제국의 황제, 적국의 왕,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낀 이중인격 암살자.
이보다 더 체할 것 같은 조합이 있을까.

"고기가 아주 연하군."

카이리스가 스테이크를 썰며 입을 열었다. 칼질할 때마다 붉은 육즙이 접시 위로 배어 나왔다.

"북부 전선에서 잡은 야생 짐승이라더군요. 마족들이 즐겨 먹는다


Batch 2: 9화~13화


10화: 약효가 떨어질 때

입안에서 비릿한 쇳물이 맴돌았다.
혀끝으로 입천장을 훑었다. 피맛은 아니었다. 그저 환각일 뿐이다. 마족 왕의 피를 삼켰던 그날 밤 이후로, 내 미각은 종종 이런 식의 오작동을 일으켰다.

"대장님. 폐하의 밀명입니다."

부관 루카스가 집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닫으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색 봉투에는 황실의 붉은 밀랍이 찍혀 있었다.
나는 창밖의 빗소리에서 시선을 거두고 봉투를 건네받았다.

"내용은."
"제8구역 빈민가입니다. 반마족 테러 단체인 '검은 달'의 임시 아지트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루카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제 연회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그놈들이다.

"명령은 간단합니다. 수괴는 생포, 나머지는 전원 사살."

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황제 카이리스. 이 미친 인간은 정말이지 나를 쉴 틈 없이 굴릴 작정인가 보다.
아니, 이건 단순한 임무가 아니다. '테스트'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한 자신의 장난감이, 아직 칼로서 쓸모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수작.

"혼자 간다."
"예? 대장님, 그래도 명색이 테러 단체인데 지원 병력을……."
"비 오는 날엔 발소리가 섞여서 귀찮아. 혼자 가는 게 깔끔해."

핑계였다.
진짜 이유는 내 몸 상태 때문이었다.
아샤드의 마력 덕분에 이벨린의 영혼은 며칠째 잠잠했지만, 오늘 아침부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약효가 떨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다.
부하들 앞에서 미친년처럼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지껄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대기해. 자정 전에는 돌아올 테니까."

나는 의자에 걸쳐둔 검은 가죽 코트를 집어 들었다.
허리춤의 단검 두 자루가 묵직하게 허벅지를 때렸다. 익숙한 무게감.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제8구역은 제국의 화려함이 닿지 않는 하수구 같은 곳이었다.
썩은 쓰레기 냄새와 녹슨 철 냄새가 비에 젖어 진동했다. 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진흙탕을 밟았다.

목표물은 버려진 방직 공장.
입구에 서 있는 보초 두 명의 목을 꺾는 데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빗소리 덕분에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완벽하게 묻혔다.

'오른쪽 세 명, 2층에 두 명. 안쪽에 수괴.'

공장 내부로 스며들며 빠르게 인원을 파악했다.
나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어둠 속으로 미끄러졌다.
기사들의 싸움이 합을 겨루는 스포츠라면, 나의 싸움은 벌레를 밟아 죽이는 청소에 가깝다.

서걱.

어둠 속에서 칼날이 번쩍일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지는 소리만이 공장을 채웠다.
네 명. 다섯 명. 여섯 명.

"누, 누구냐!"

2층 난간에서 망을 보던 놈이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석궁을 겨누었다.
나는 피 묻은 단검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단검은 정확히 놈의 미간에 박혔다.

완벽한 궤적. 완벽한 살상.
하지만 단검을 던지고 팔을 거두려는 순간이었다.

찌릿.

왼쪽 어깨부터 손목까지, 푸른 정전기가 튀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번졌다.

"크윽……."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피부 아래로 푸른 핏줄이 불규칙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샤드가 주입했던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며 요동치는 현상이었다.

[아우, 찌뿌둥해. 며칠이나 잔 거야?]

머릿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벨린이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지금.

"침입자다! 죽여라!"

소란을 듣고 안쪽 방에서 거구의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괴로 보이는, 얼굴 절반이 흉터로 덮인 반마족 사내가 거대한 도끼를 치켜들고 달려왔다.

피해야 한다.
뇌는 명확하게 명령을 내렸지만,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 여긴 또 어디야? 냄새 역겨워. 당장 안 나가?]

'닥쳐, 미친년아!'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도끼날이 내 어깨를 스치고 바닥에 처박혔다. 콘크리트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파편이 튀어 뺨을 그었다.

"황제의 개새끼가 겁도 없이 혼자 기어들어 와?"

수괴가 도끼를 다시 빼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나는 남은 단검 하나를 빼 들었지만, 시야가 두 개로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살기와 이벨린의 불쾌함이 한 몸 안에서 충돌하며 신경계를 교란하고 있었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싫어. 드레스에 피 튀는 거 질색이란 말이야. 네가 나가.]

오른팔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 짧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수괴가 발차기로 내 복부를 가격했다.

"컥!"

몸이 붕 떴다가 나무 궤짝 위로 처박혔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입안으로 다시 그 지긋지긋한 쇳물이 넘어왔다.

"대가리만 챙겨서 뜬다."

수괴가 성큼성큼 다가와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대로 죽나? 어이없게도?
황제의 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분노보다, 내 몸 하나 통제하지 못해 죽는다는 수치심이 더 컸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적어도 내 목을 치는 새끼의 얼굴은 똑똑히 기억해 두기 위해서.

콰아앙-!

그 순간, 공장의 철문이 종잇장처럼 뜯겨 나갔다.
빗바람이 몰아치며 어둠 속으로 은빛 섬광이 쏘아졌다.

챙!

수괴의 도끼가 무언가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도끼를 쥔 수괴의 거대한 팔마저 기괴한 각도로 꺾여버렸다.

"크아아악!"

짐승의 비명소리.
그리고 그 비명소리를 가르는, 지독하게 여유롭고 서늘한 목소리.

"제국 근위대는 야근 수당도 안 주나 보지?"

빗물에 젖은 은발.
어둠 속에서도 포식자처럼 빛나는 금안.
아샤드 르페르였다.

그가 검은 코트를 펄럭이며 내 앞을 막아섰다.
맨손으로 도끼를 박살 낸 그의 손등에는 긁힌 상처 하나 없었다.

"당신이…… 여긴 왜."
"산책."

그가 구두 굽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수괴의 머리를 짓밟으며 대꾸했다.

"길을 잃었는데, 익숙한 피 냄새가 나더라고."

거짓말. 제8구역은 사절단 숙소에서 마차로 한 시간 거리다. 애초에 나를 미행했다는 소리다.

"여긴 제국 영토입니다. 사절단 대표가 끼어들 문제가……."
"내 백성(반마족)이 얽힌 일이잖아."

아샤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부러진 갈비뼈를 부여잡고 헐떡이는 내 꼴이 꽤 비참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다치는 건 싫거든."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에 묻은 핏자국을 엄지로 훔쳐냈다.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미쳐 날뛰던 내 안의 신경들이 거짓말처럼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오. 이 남자 피 냄새 끝내준다.]

잠잠해지나 싶었던 이벨린의 목소리가 다시 튀어나왔다. 이번엔 불쾌함이 아니라, 노골적인 호기심과 탐욕이 섞인 목소리였다.

[저번에 마셨던 그 피지? 나 배고파, 렌. 한 입만 더 먹자.]

'미쳤어? 꺼져.'

나는 속으로 발악하며 아샤드의 손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내 의지는 거기까지였다.

툭.

쳐내려던 내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방향을 바꾸어, 내 뺨을 만지던 아샤드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내가 한 짓이 아니었다.

"……렌?"

아샤드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다분히 유혹적이고 끈적한 손길이었으니까.

내 손가락이 그의 소매 끝을 쓸어내리며 맨살을 더듬었다.
입술이 제멋대로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볼우물이 패일 정도로 환하고, 천진난만하고, 오만한 귀족 영애의 미소.

"안녕? 네가 그 마족 왕이구나."

내 성대를 울려 나오는 목소리였지만, 억양과 높낮이가 완전히 달랐다.
아샤드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금안에 당혹감이 스쳤다.

"저번에 준 피, 아주 달콤했어."

내 손이 아샤드의 손목을 끌어당겨 내 입술로 가져갔다.
나는 막지 못했다. 내 몸은 완벽하게 이벨린에게 통제권을 넘겨준 상태였다.

촉.
내 입술이 그의 손목 안쪽, 맥박이 뛰는 곳에 부드럽게 닿았다.

"한 입만 더 줄래? 멍멍아."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샤드는 숨조차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누구야."

빙의자라는 사실을 들킨 지 이틀 만에.
나는 진짜 몸의 주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도, 나를 향해 미친 듯이 직진해 오던 남자의 품 안에서.


10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5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집무실 밀명 → 빈민가 전투 → 아샤드 난입 및 이벨린 각성)
  • 등장 캐릭터: 렌, 루카스, 아샤드, 이벨린, 검은 달 수괴
  • 메인 플롯 비트: 황제의 시험(밀명) 수행 중, 마력 고갈로 인한 첫 번째 신체 통제력 상실 위기 발생.
  • 서브플롯 진행:
    • [서브 A] 이벨린이 완전히 주도권을 탈취하여 아샤드와 대면.
    • [서브 B] 황제가 렌을 무리한 임무에 투입하며 소모품으로 시험함.
  • 심은 복선: 이벨린이 아샤드의 피(마력)에 극도로 집착하는 현상 (이후 마력 흡수 체질 및 황제의 인체 병기 설정과 연결).
  • 클리프행어: [A급] 정체 혼란/관계 위기 - 이벨린이 렌의 몸을 차지하고 아샤드에게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며 종료.
  • 템포: 중속 → 고속 → 절정 (감정)

제11화 (완료)

Batch 2: 9화~13화


11화: 셋이서 하는 왈츠

"한 입만 더 줄래? 멍멍아."

침묵은 무거웠고, 공기는 차가웠다.
아샤드 르페르의 표정에서 감정이 지워졌다.
방금 전까지 나를 걱정하던 눈빛, 분노하던 눈빛, 그 모든 인간적인 파장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건, 절대적인 혐오였다.

"……역겹군."

그가 내 손목을 뿌리쳤다.
거칠게 내동댕이쳐진 손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나', 아니 이벨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너무하네. 20년 전에는 꼬리 치면서 따라다니더니. 그새 취향이 바뀌었나?]

이벨린이 내 입술을 빌려 뱉어내는 말들은 충격적이었다.
20년 전? 아샤드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나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무슨 개소리야. 닥치고 나와!'

하지만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마치 가위눌린 것처럼, 이벨린이 조종하는 대로 관절이 움직이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너 눈 다쳤었지? 이제 앞은 보이나 봐?]

이벨린이 비틀거리며 아샤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내 피 묻은 손으로 아샤드의 제복 깃을 잡으려 했다.

"손대지 마."

아샤드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주변으로 검푸른 마력이 폭풍처럼 일렁였다. 공장의 녹슨 철골들이 끽끽거리며 비틀릴 정도의 압력이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망령."

[망령이라니. 집주인한테 말이 심하네. 저년(렌)은 그냥 세입자라고.]

이벨린은 겁도 없이 아샤드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그 순간이었다.

쿠웅!

아샤드의 마력이 내 몸을, 정확히는 이벨린의 영혼을 짓눌렀다.
물리적인 타격이 아니었다. 영혼 자체를 옥죄는 압박감.

[꺄악!]

이벨린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뒷걸음질 쳤다.

"꺼져."

아샤드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 안에 있는 진짜를 내놔."

[진짜? 하! 저 살인기계가 진짜라고? 웃기고 있네!]

이벨린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저건 황제가 만든 인형이야! 내 몸을 뺏어서, 내 피로…… 윽!]

아샤드가 손을 뻗어 내 목을, 아니 이벨린이 차지한 내 목을 움켜쥐었다.
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경동맥을 타고 뇌로 직격했다.

강제 진압.
마치 날뛰는 짐승에게 마취총을 쏘듯, 그는 이벨린의 의식을 강제로 눌러버렸다.

[이…… 개자식이……!]

이벨린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몸의 통제권이 허공에 붕 뜬 느낌.
그 틈을 타서 내가 치고 올라갔다.

'비켜!'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수면 위로 솟구쳤다.
이벨린의 의식이 심연으로 밀려나고, 내 감각이 다시 연결되었다.
손끝, 발끝, 그리고 목을 잡고 있는 아샤드의 뜨거운 체온까지.

"……허억!"

나는 거친 숨을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아샤드가 내 목에서 손을 떼고 나를 받아안았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조심스럽고도 절박한 손길이었다.

"돌아왔나?"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어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그가 안도하며 내쉬는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젠장, 늦어서 미안해."

그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주변에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반마족 잔당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아까의 기괴한 상황—아군 수괴가 죽고, 적들이 내분(?)을 일으키는—에 얼어붙어 있었다.

"저, 저놈들을 죽여!"

누군가 뒤늦게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아샤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눈길 한 번 주었을 뿐이다.

파지직.

검은 그림자가 바닥에서 솟아올라 놈들의 발목을 낚아챘다.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아샤드는 듣기 싫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청소는 부하들이 할 거야. 넌 쉬어."

그는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지만, 그의 품은 뜨거웠다.
나는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중얼거렸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거절한다."

그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세입자든 집주인이든 상관없어. 지금 이 몸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물어볼 새도 없이,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인 한마디였다.

"그러니까 도망갈 생각 하지 마. 렌."


11화 메타 정보

  • 메인 플롯: 아샤드의 강제 개입으로 이벨린의 폭주 진압. 렌의 의식 복구.
  • 서브플롯:
    • [서브 A] 이벨린이 "황제가 나를 죽였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함.
    • [서브 C] 아샤드가 과거(20년 전) 이벨린과 구면이었음을 암시. 하지만 현재의 렌을 선택함.
  • 클리프행어: 아샤드가 렌을 데리고 사라짐. "도망갈 생각 마라"는 선언.

12화: 공존의 계약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향기가 났다.
아샤드의 침실이었다. 이쯤 되면 여기가 내 관사인지, 적국 대사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몸은 무거웠지만, 머리는 맑았다.
갈비뼈 부근이 욱신거렸지만 붕대가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살폈다.

아샤드는 없었다. 대신 협탁 위에 메모가 놓여 있었다.

[일어나면 마셔. 피 대신이니까.]

붉은색 물약병이었다. 최고급 포션.
돈지랄도 유난이다. 나는


12화: 공존의 계약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향기가 났다.
아샤드의 침실이었다. 이쯤 되면 여기가 내 관사인지, 적국 대사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몸은 무거웠지만, 머리는 맑았다.
갈비뼈 부근이 욱신거렸지만 붕대가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살폈다.

아샤드는 없었다. 대신 협탁 위에 메모가 놓여 있었다.

[일어나면 마셔. 피 대신이니까.]

붉은색 물약병이었다. 최고급 포션.
돈지랄도 유난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병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진한 마력의 향이 코를 찔렀다.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가 위장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거울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우, 쓰다. 다음엔 설탕 좀 타 달라고 해.]

나는 고개를 돌려 전신 거울을 보았다.
침대 위에 앉은 나는 무표정했지만, 거울 속의 이벨린은 혀를 내밀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나는 거울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20년 전에 죽었다며. 근데 왜 아직도 여기에 붙어 있어?"

[죽은 게 아니니까.]

이벨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장난기는 온데간데없고, 서늘한 살기만이 남았다.

[죽임을 당한 거지. 아주 믿었던 사람한테.]

"황제?"

[그래. 카이리스. 그 개자식이 날 제물로 바쳤어. 영생을 위한 재료라나 뭐라나.]

그녀가 거울 표면을 손톱으로 긁었다.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렌. 너도 느꼈지? 그 자식이 우릴 보는 눈빛. 우린 사람이 아니야. 그냥 실험실의 쥐새끼지.]

"그래서, 내 몸을 뺏어서 복수라도 하시겠다?"

**[아니. 거래


Batch 2: 9화~13화 (계속)


12화: 공존의 계약서

(앞부분에서 계속)

[아니. 거래를 하자는 거야.]

거울 속의 이벨린이 턱을 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너는 살고 싶지? 나도 그래. 억울해서 이대로는 성불 못 하거든.]

"그래서?"

[네 몸을 빌려줘. 가끔씩. 대신 내가 월세를 낼게.]

"월세?"

[정보. 황제가 꾸미는 '신 죽이기' 프로젝트의 전말.]

나는 헛웃


Batch 2 (보완) & Batch 3: 13화~17화


13화: 10년의 무게

[12화 요약: 깨어난 렌은 거울 속 이벨린과 대면한다. 이벨린은 황제가 자신을 '재료'로 썼다는 진실을 알려주며, 몸의 주도권을 가끔 넘겨주는 대가로 황제의 비밀을 공유하겠다는 '공존 계약'을 제안한다. 렌은 살기 위해 악마의 계약을 수락한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벨린은 다시 거울 속 심연으로 가라앉았고,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일어났군."

테라스 문이 열리며 아샤드가 들어왔다. 비에 젖은 코트를 벗어 던진 그의 몸에서 서늘한 냉기와 짙은 피 냄새가 났다. 반마족 잔당들을 처리하고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몸은?"
"덕분에. 당신의 피가


Batch 3: 13화~17화


13화: 10년의 무게

(앞부분에서 계속)

"덕분에. 당신의 피가 꽤 효과가 좋더군요. 이벨린도 조용하고."

나는 일부러 건조하게 대답하며 셔츠 단추를 잠갔다.
아샤드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물기를 머금은 빗방울이 그의 은발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효과가 좋다니 다행이군. 비싼 값을 치른 보람이 있어."

그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젖은 옷 냄새, 비 냄새, 그리고 그의 고유한 체향이 훅 끼쳐왔다.

"그래서, 이제 대답해 줄 텐가?"

"무엇을 말입니까."

"10년 전, 라하트."

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피할 수 없다. 이미 내 손목의 흉터까지 확인한 마당에 잡아떼는 건 의미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도 탈이군요. 폐하께선 잊으라고 명령하신 일인데."

"황제의 명령 따위 알 바 아니야."

아샤드가 내 앞의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시선이 내 눈높이와 맞춰졌다.

"그때 왜 날 살려줬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10년 전. 나는 고작 열다섯 살의 살수였고, 그는 적군의 젊은 장교였다.
눈을 다쳐 앞을 못 보는 적을 죽이는 건, 암살자의 긍지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연민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죽이기 아까웠습니다."

"아까웠다?"

"눈이 예뻤거든요. 다쳤는데도 금색으로 빛나서."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낭만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죽음만 보고 자란 아이였고, 살아있는 것의 아름다움을 처음 봤을 뿐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아샤드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허탈함과 안도가 뒤섞인 얼굴.

"나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10년을 찾아헤맸는데."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쌌다. 이번에는 거칠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이 내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이벨린이 아니야."

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찾던 건, 이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너였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주박이 새겨진 심장이 아니라, 내 영혼이 반응하고 있었다.
이벨린은 아샤드를 '멍멍이' 취급했지만, 아샤드는 이벨린이 아닌 나를 보고 있었다.
이 기묘한 삼각관계 아닌 삼각관계.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국 근위대장이고, 당신은 적국의 왕입니다."

나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손끝이 떨리지 않도록 힘을 주며.

"그때 살려준 걸 후회하게 만들지 마세요."

"후회?"

아샤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넌 절대 후회 못 해. 내가 그렇게 안 둘 거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해. 오늘은 황궁 무도회야. 춤 신청, 이번엔 거절하지 마."

그가 욕실로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내 손목의 흉터를 내려다보았다.
10년 전의 불길이, 아직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것 같았다.

[어우, 달달해서 이가 썩겠네.]

거울 속에서 이벨린이 혀를 찼다.

[근데 어쩌지? 저 남자, 곧 죽을 텐데.]

"뭐?"

[황제가 널 왜 그 남자 옆에 붙여뒀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이벨린이 싸늘하게 웃었다.

[너는 칼이고, 나는 칼집이라며. 칼집 안에 든 게 뭔지 보여줄 때가 됐어.]


13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200자 (누적)
  • 장면 수: 2개 (아샤드와의 대화, 이벨린의 경고)
  • 메인 플롯: 아샤드가 렌의 정체(과거의 은인)를 확신하고 직진함.
  • 서브플롯: [서브 C] 10년 전 서사 연결. [서브 B] 황제의 진짜 목적 암시.
  • 정보 공개: 렌이 아샤드를 살려준 이유는 단순한 변덕/연민이었음.
  • 클리프행어: [경고] 이벨린이 아샤드의 죽음을 예고함.

14화: 신 죽이기

황궁 대연회장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제국의 귀족들이 가면을 쓰고 서로를 탐색하는 곳.
나는 근위대장 정복을 입고 연회장 구석에 서 있었다. 그림자처럼, 그러나 모두가 의식하는 그림자로.

"오늘따라 안색이 좋군."

카이리스가 다가왔다. 황금색 가면을 쓴 그는 여전히 지루해 보였다.

"마족의 피가 꽤 입에 맞나 봐?"

"......감시가 철저하시군요."

"내 물건이 남의 손을 타는데 당연히 신경 써야지."

그가 샴페인 잔을 건넸다.

"따라와. 보여줄 게 있어."

나는 그를 따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도착한 곳은 황궁 지하,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마법 연구소였다.
비릿한 약품 냄새와 냉기가 감돌았다.

"이벨린이 죽은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었나?"

카이리스가 연구소 중앙의 거대한 수조 앞을 걸으며 물었다.
수조 안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마수(魔獸)의 사체들이 둥둥 떠 있었다.

"그녀는 내 실험의 첫 번째 성공작이었어."

"실험?"

"마력을 무한정 흡수해서, 임계점을 넘으면 폭발하는 그릇."

그가 멈춰 섰다.

"마족은 강해. 특히 아샤드 르페르는 신에 가까운 힘을 가졌지. 인간의 군대로는 이길 수 없어. 그래서 생각했지. 신을 죽이려면, 신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가면 너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벨린의 몸은 '마력 흡수체'야. 마족과 접촉하면 할수록, 그들의 마력을 빨아들여 축적하지. 그리고 일정량이 차면......"

그가 손으로 폭발하는 시늉을 했다.

"펑."

머릿속이 하얗게 셌다.
아샤드가 내게 마력을 주입할 때마다, 내가 그의 피를 마실 때마다... 나는 치유된 게 아니었다.
폭탄에 화약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네 몸 안에는 아샤드의 마력이 가득 차 있어. 아주 맛있게 익었지."

카이리스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늘 밤 무도회에서, 네가 그와 춤을 추는 순간. 내가 신호를 보내면 너는 터질 거야. 제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불꽃놀이가 되겠지."

"......미쳤어."

"칭찬으로 들을게."

그가 내 귀에 속삭였다.

"도망칠 생각은 마. 네 심장의 주박이 터지는 게 빠를지, 자폭 스위치가 켜지는 게 빠를지 시험


Batch 3: 14화~18화


14화: 신 죽이기

(앞부분에서 계속)

"도망칠 생각은 마. 네 심장의 주박이 터지는 게 빠


제14화 (완료)

Batch 3: 14화~18화


14화: 신 죽이기

(앞부분에서 계속)

"도망칠 생각은 마. 네 심장의 주박이 터지는 게 빠를지, 자폭 스위치가 켜지는 게 빠를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황제는 만족스러운 듯 내 어깨를 토닥였다.
가죽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손길이 뱀처럼 차가웠다.

"가 봐. 파트너가 기다리겠어."

그가 나를 연구소 밖으로 밀어냈다.
무거운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쿵, 하고 울렸다. 마치 관뚜껑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나는 복도에 홀로 남겨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역겨움 때문이었다.
내 몸안에서 펄떡이는 심장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전부 나를 죽이기 위한 카운트다운이었다니.

[이제 알겠어?]

이벨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조하고, 지독하게 냉소적인 목소리.

[내가 왜 미친년처럼 굴었는지. 이 몸은 시한폭탄이야. 마력이 찰수록 터질 시간은 가까워져.]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내가 그 실험의 첫 번째 모르모트였으니까.]

그녀가 킬킬거렸다.

[아샤드가 널 치료해 준다고? 웃기지 마. 그 남자는 지금 제 손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몸에 기름을 붓고 있는 거야. 불이 잘 붙으라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샤드는 10년 전의 나를 기억하고,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피와 마력을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그 모든 선의가, 황제가 짜놓은 판 위에서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그가 나를 사랑할수록, 나를 지키려 할수록... 우리는 더 빨리 파멸한다.

"......개자식."

나는 벽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화려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연회장 쪽을 노려보았다.
황제 카이리스. 신을 죽이기 위해 악마가 된 인간.

하지만 나는 칼이다.
칼은 주인이 휘두르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적어도 주박이 내 심장을 쥐고 있는 한.

나는 흐트러진 제복을 정리하고, 다시 그 지옥 같은 무도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안의 폭탄이 째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14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00자 (누적)
  • 장면 수: 2개 (지하 연구소 폭로, 복도에서의 독백)
  • 메인 플롯: 렌의 신체 비밀(마력 폭탄)이 밝혀짐. 황제는 이를 이용해 마족왕 아샤드를 암살하고 성전을 일으키려 함.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은 이미 자신의 운명(폭탄)을 알고 있었음. [서브 B] 황제의 악역 포지션 확립.
  • 정보 공개: 렌(이벨린)의 몸은 마력을 흡수하여 임계점에서 자폭하도록 설계됨. 아샤드의 마력 주입은 치료가 아니라 기폭제를 채우는 행위였음.
  • 클리프행어: [S급] 절망적 상황 - 아샤드의 사랑이 곧 죽음이라는 아이러니.

15화: 기폭제

연회장은 여전히 화려했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귀족들은 웃고 떠들며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아무도 모른다. 이 화려한 무도회장 지하에 썩어가는 마수의 시체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 사이에 걸어 다니는 폭탄이 있다는 것을.

"늦었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샤드 르페르.
그는 테라스 입구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예복이 그의 은발과 대비되어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평소라면 그 모습에 심장이 뛰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아름다워 보일수록 공포가 밀려왔다.

"어디 갔다 왔나 했더니, 황제와 밀회라도 즐긴 건가?"

그가 다가왔다. 질투 섞인 농담이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내 몸안의 마력이 반응했다. 피부 아래 심어둔 기폭장치가 그의 기운을 감지하고 윙윙거렸다.

"......오지 마십시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뭐?"

아샤드의 눈매가 굳어졌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오늘은... 기분이 별로니까."

"기분이 별로면 풀어주면 되지."

그는 내 거절을 튕기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성큼 다가와 내 손목을 낚아챘다.

"음악이 바뀌었어. 왈츠야."

"놓으세요!"

나는 비명 지르듯 소리치며 그를 뿌리쳤다.
주변의 시선이 우리에게


제15화 (완료)

Batch 3: 14화~18화 (계속)


15화: 기폭제

(앞부분에서 계속)

"놓으세요!"

나는 비명 지르듯 소리치며 그를 뿌리쳤다.
주변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음악 소리가 잦아들고,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제의 개가 감히 타국 왕의 춤 신청을 거절하고 소리를 질렀다. 외교적 결례를 넘어선 도발이었다.

"......거절의 이유치고는 꽤 격렬하군."

아샤드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처받은 것 같기도 했고, 분노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었다. '당신 곁에 있으면 내가 터져서 당신을 죽이게 된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나는 도망치듯 뒷걸음질 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샤드와 닿았던 손목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내 안의 기폭장치—황제가 심어놓은 마력 회로—가 윙윙거렸다.

[멍청아,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이벨린이 비웃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아샤드가 널 쫓아올 거야. 그리고 그 남자가 널 사랑할수록 너는 더 빨리 죽어.]

'닥쳐.'

나는 비틀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아샤드의 시선이 비수처럼 꽂히는 게 느껴졌다. 잡으러 올까? 아니, 자존심 강한 그라면 사람들 앞에서 거절당한 수모를 참고 쫓아오진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어딜 가."

테라스로 나오자마자 손목이 잡혔다.
아샤드였다. 그는 공간 이동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내 앞을 막아섰다.

"이봐, 렌. 내가 널 10년이나 찾아헤맸다고 했지."

그가 나를 난간 쪽으로 몰아붙였다.

"그 말은, 네가 어디로 숨든 찾아낼 자신이 있다는 뜻이야."

"제발......!"

나는 울고 싶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내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너무나 달콤하고, 너무나 치명적인 독.
몸 안의 마력 수치가 임계점을 향


Batch 3 (완료): 16화~18화


15화: 기폭제 (마무리)

(앞부분에서 계속)

내 몸 안의 마력 수치가 임계점을 향해 치솟았다.
피부 아래 심어둔 회로가 비명을 지르며 타올랐다.
심장이 쿵, 쿵, 쿵.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거 놔……!"

나는 쥐어짜듯 신음하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아샤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목을 쥔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왜 떨지?"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는 내 공포를 오해하고 있었다. 10년 전처럼 자신이 나를 해칠까 봐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안 잡아먹어. 적어도 지금은."

그가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단단한 근육이 맞닿았다. 그 접촉면을 통해 그의 방대한 마력이 댐이 무너진 것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찌리릿.

뇌가 하얗게 타버릴 것 같은 충격.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황제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펑.'

안 돼. 여기서 터지면…… 아샤드도 죽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소리쳤다.

"비켜! 터진다고!"

하지만 내 경고는 테라스 너머에서 들려오는 왈츠의 클라이맥스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스위치가 눌렸다.


15화 메타 정보

  • 클리프행어: [S급] 절체절명 - 아샤드와의 접촉으로 렌의 자폭 시퀀스가 가동됨.

16화: 오작동

세상이 느려졌다.
심장 부근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끓는 물을 혈관에 주입한 것 같은 고통이었다.

'아, 죽는구나.'

담담했다.
암살자로 살면서 수없이 상상해 온 죽음이었다.
하지만 억울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장난감으로 터져 죽는다는 게. 그리고 하필이면 내가 살리고 싶었던 유일한 사람을 길동무로 데려간다는 게.

[멍청아! 눈 뜨고 똑바로 봐!]

이벨린이 비명을 질렀다.

[아직 안 끝났어!]

눈을 떴다.
터지지 않았다.
아니, 터지기 직전에 멈춰 있었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검푸른 아우라.
아샤드의 마력이었다.
그의 마력이 내 몸 안에서 폭주하려던 기폭 에너지를 억지로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터지려는 폭탄을 맨손으로 감싸 쥐듯이.

"……크윽."

아샤드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 몸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그리고 그게 누구의 짓인지.

"이딴 걸…… 몸에 심어놨나."

그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심장이 아니라, 화약고였군."

"놓으세요. 당신까지 다칩니다."

"닥쳐."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몸에서 역류하는 폭발 에너지를 그가 대신 흡수하고 있었다.
내게 심어진 마력 회로는 '흡수'만 할 뿐 '방출' 기능이 없다. 그래서 터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샤드는 그 흐름을 강제로 역류시키고 있었다.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것과 같은,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우우웅—.

공기가 진동했다.
테라스의 유리창에 금이 갔다. 바닥의 대리석이 쩍 갈라졌다.
하지만 연회장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샤드가 쳐놓은 방음 결계 때문이었다.

"황제…… 그 개자식이."

아샤드의 금안이 살기로 번뜩였다.
그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는 지금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서 내 폭주를 막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적이다. 10년 전 잠깐의 인연 따위, 목숨을 걸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말했잖아."

그가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웃었다. 지독하게 오만하고, 눈물 나게 처절한 미소.

"내 허락 없이는 못 죽는다고."

쿠웅!

마지막 충격파가 그의 몸을 관통했다.
그의 등 뒤로 검은 날개 형상의 마력이 펼쳐졌다가 산산이 흩어졌다.
동시에 내 몸을 태우던 열기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성공했다.
폭탄이 해체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뇌관이 젖어버렸다. 그의 피로.

아샤드가 비틀거렸다.
천하의 마족왕이, 신에 가까운 힘을 가졌다는 그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그의 체온이 닿은 곳이 데일 듯 뜨거웠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10년 전, 불타는 창고에서 그를 구해줬을 때처럼.

"미쳤군요. 당신."

"너만 할까."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킬킬거렸다.

"살아있는 폭탄 주제에 춤을 추러 와? 간도 크지."

"거절했잖습니까."

"거절이 너무 약했어. 다음엔 뺨이라도 때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붉게 충혈된 눈.
그 어느 때보다 엉망진창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이제 설명해."

그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그 개자식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16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00자 (누적)
  • 장면 수: 1개 (테라스에서의 폭발 저지 및 감정 교류)
  • 메인 플롯: 아샤드가 렌의 자폭을 자신의 마력으로 막아냄. 렌의 비밀(인체 병기)을 공유하게 됨.
  • 서브플롯: [서브 C] 쌍방 구원 서사의 완성 (과거: 렌→아샤드 / 현재: 아샤드→렌).
  • 정보 공개: 아샤드는 마력의 흐름을 역류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함.
  • 클리프행어: [진실 요구] 아샤드가 모든 진실을 요구하며 렌을 추궁함.

17화: 공범자

"인체 병기."

내 설명을 다 들은 아샤드가 짧게 요약했다.
그는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력 역류의 후유증이었다.

"그러니까, 내 마력을 흡수해서 터지는 구조다?"

"정확히는 마족의 마력이죠. 당신이 가장 강하니까 제일 좋은 기폭제였을 뿐이고."

나는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수습하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오늘 밤 당신을 죽이고, 그 명분으로 성전(聖戰)을 일으킬 계획이었습니다."

"하."

아샤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창의적인 미친놈이군. 제 근위대장을 폭탄으로 써서 적국 왕을 암살한다라. 역사책에 남을 만해."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지? 다시 가서 '실패했습니다, 다시 충전해 주세요'라고 할 건가?"

"그럴 리가요."

나는 거울—테라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이벨린은 조용했다. 그녀도 아샤드의 무식한 힘에 질린 모양이었다.

"도망쳐야죠. 당신이 도와준다면."

"도와달라?"

"당신은 황제의 계획을 알았으니 대비할 수 있고, 나는 이 지긋지긋한 폭탄 신세에서 벗어나고. 윈윈(Win-Win) 아닙니까."

거래.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랑이나 연민에 기대기엔, 내 상황이 너무 절박했다.

아샤드가 담배를 비벼 껐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거래라


제18화 (완료)

Batch 3 (완료) & Batch 4: 18화~20화


17화: 공범자 (마무리)

(앞부분 요약: 아샤드는 렌의 자폭을 막아낸 후,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렌은 그에게 "도와준다면 황제의 계획을 알려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한다.)

"거래라."

아샤드가 담배를 비벼 껐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 방금 전의 폭발보다 더 위험한 불꽃이 일렁였다.

"내 목숨을 구해주고, 내 나라를 구할 정보를 주겠다? 아주 합리적이군."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죠."

"아니. 거절해."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가 뭡니까. 당신도 황제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복수는 할 거야. 하지만 거래는 아니지."

그의 엄지가 내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거래는 타인끼리 하는 거야. 주고받으면 끝이지. 하지만 난 너랑 끝낼 생각이 없거든."

"......그럼 뭘 원하시는데요."

"공범."

그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황제를 죽이는 공범이 되어줘. 네가 칼이 되고, 내가 칼자루가 되는 거지."

"그게 거래와 뭐가 다릅니까?"

"다르지. 공범은 운명을 공유하니까."

그가 내 허리를 끌어당겨 밀착시켰다.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이번엔 기폭장치가 아니었다.
그의 체온이, 땀 냄새가, 그리고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내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네가 터지면 나도 죽고,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관계.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미친놈.
제국의 그림자와 적국의 왕이 운명 공동체라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미친 제안'이 황제의 '합리적인 명령'보다 훨씬 더 안심이 되었다.

"좋습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


Batch 4: 18화~20화


17화: 공범자 (마무리)

(앞부분에서 계속)

"좋습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주박이 새겨진 심장이 거부 반응으로 욱신거렸지만, 이번엔 무시했다.
황제의 명령(주박)보다, 눈앞의 남자가 주는 공포(사랑)가 더 강렬했으니까.

"공범, 해보죠. 어차피 이판사판이니까."

"잘 생각했어."

아샤드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계약의 키스.
하지만 10년 전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그를 구원할 차례였다.
아니, 우리가 서로를 구원할 차례인가.

"그럼 첫 번째 임무를 주지."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일 아침, 황제에게 가서 보고해. '기폭 장치가 고장 났다'고."

"그가 믿을까요?"

"믿게 만들어야지.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연기."

그가 내 허리를 놓아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가 봐.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사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테라스를 나섰다.
등 뒤에서 밤바람이 불어왔다. 식은땀에 젖은 등이 서늘했지만, 마음만은 이상하게도 뜨거웠다.

[공범이라.]

거울(유리창)에 비친 이벨린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네. 혼자 죽는 것보단 둘이서 세상을 망가뜨리는 게 더 재밌잖아?]

그녀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래. 우리는 미친 공범자들이다.
황제, 너는 파트너를 잘못 골랐어.


17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00자 (누적)
  • 장면 수: 1개 (테라스에서의 거래 성사)
  • 메인 플롯: 렌과 아샤드가 '공범'으로서 황제에게 대항하기로 결탁함.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이 이 '파멸적인 동맹'에 찬성함.
  • 클리프행어: [결의] 황제를 속이기 위한 렌의 연기 예고.

18화: 거짓말의 무게

다음 날 아침, 황제의 집무실.
공기는 무거웠고, 황제 카이리스의 침묵은 그보다 더 무거웠다.

"고장?"

카이리스가 깃펜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그래서 더 소름 끼쳤다.

"네. 폐하께서 신호를 보내셨을 때, 가슴에 통증만 있었을 뿐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그러나 당혹스러운 척 보고했다.
무릎 꿇은 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카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이상하군. 연구소 데이터는 완벽했는데."

그가 내 명치, 정확히는 기폭 회로가 심어진 곳에 손을 댔다.
차가운 마력이 흘러들어와 내 몸안을 훑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샤드가 내 몸에 남긴 흔적(마력 역류의 잔재)을 들키면 끝이다.

하지만 아샤드는 철저했다.
그는 내 몸 안의 마력을 자신의 것이 아닌, 마치 회로가 과열되어 타버린 것처럼 위장해 두었다.

"흐음."

카이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회로가 탔어.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군."

"아샤드 르페르의 마력이... 예상보다 강했던 것 같습니다. 흡수하는 과정에서 회로가 견디지 못한 게 아닐지."

나는 준비해 둔 변명을 내놓았다.
카이리스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깝네. 어제 그 불꽃놀이를 기대했는데."

그는 내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뭐, 좋아. 기계는 고치면 되니까."

"......"

"대신, 벌은 받아야지? 임무 실패에 대한 대가."

그의 손가락이 딱, 하고 튕겨졌다.

"으윽!"

심장의 주박이 조여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
나는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소리 질러도 돼. 여기는 방음이 잘 되거든."

카이리스가 내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잔인한 호기심으로 번들거리는 눈.

"아파? 죽을 것 같아?"

"허억, 헉......"

"기억해 둬, 렌. 네 생명줄은 내가 쥐고 있어. 그 마족 놈이 아니라."

그는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나가 봐. 연구소장에게 연락해 둘 테니 수리받고."

나는 비틀거리며 집무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복도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개자식.'

[저걸 그냥 둬? 확 죽여버리지.]

이벨린이 머릿속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참아. 아직은 때가 아니야.'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고통은 끔찍했지만,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속았다. 황제는 내가 고장 난 인형이라고 믿었다.
이제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마주친 사람 때문이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군."

아샤드 르페르.
그가 복도 끝 창가에 기대어 나를 보고 있었다.
대놓고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적국 왕이라니.

"여긴 웬일입니까."

"병문안. 파트너가 고장 났다길래."

그가 다가와 내 턱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맞았나?"

"......넘어졌습니다."

"황제 앞에서는 잘만 넘어지는군."

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는 내 입가에 묻은 피를 엄지로 닦아내더니, 그대로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피 맛이 쓰다."

"더러우니까 하지 마십시오."

"약속했잖아. 넌 내 거라고."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마셔. 진통제야. 마력 성분은 뺐으니 황제도 눈치 못 챌 거다."

"이런 걸 주려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아니. 데이트 신청하러 왔지."

"......네?"

아샤드가 싱긋 웃었다.

"내일, 황실 사냥 대회. 너도 참가한다며?"

"저는 호위 임무입니다."

"그게 그거지. 숲속은 보는 눈도 적고, 밀회하기 딱 좋잖아."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준비해 둬. 사냥감은 멧돼지가 아니라 황제니까."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사냥 대회.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유희이자, 사고를 위장해 정적을 제거하기 가장 좋은 무대.
아샤드는 그곳을 우리의 무대로 만들 생각이었다.

"실수하면 죽습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아니요.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으니까요."

"냉정하긴."

그가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일이다.
내일 숲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18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500자
  • 장면 수: 2개 (황제와의 대면/고문, 아샤드와의 복도 밀회)
  • 메인 플롯: 황제를 속이는 데 성공했지만, 육체적/정신적 압박을 받음. 사냥 대회가 결전의 장소로 예고됨.
  • 서브플롯: [서브 B] 황제의 잔혹성과 통제광적인 면모 부각.
  • 정보 공개: 주박의 고통은 마력 회로와 별개로 작동함.
  • 클리프행어: [사건 예고] 내일 사냥 대회에서 황제를 노린다는 아샤드의 선전포고.

19화: 사냥터의 짐승들

제국 북쪽의 '검은 숲'.
황실 전용 사냥터인 이곳은 거대한 침엽수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아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곳.

"오늘의 우승자에게는 소원 하나를 들어주지."

출발선에서 카이리스가 선언했다.
귀족들은 환호했지만, 나는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살의를 읽었다.
그는 오늘 아샤드를 죽일 생각이다. '사냥 사고'를 가장해서.

"출발!"

나팔 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말이 숲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근위대장으로서 황제의 뒤를 따랐다. 내 임무는 황제 호위였지만, 내 진짜 목적은 그의 목을 노리는 것이었다.

숲은 깊고 어두웠다.
말발굽 소리가 젖은 흙바닥을 때렸다.

"조용하군."

앞서 달리던 카이리스가 말을 멈췄다.
주변에는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짐승들이 본능적으로 포식자의 기운을 감지하고 숨은 것이다.

"나와, 렌."

카이리스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나는 나무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아샤드는 어디 있지?"

"서쪽 구역으로 갔습니다. 멧돼지 흔적을 쫓아서."

"거짓말."

카이리스가 말에서 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장총을 들고 있었다. 총구는 짐승이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녀석, 냄새를 맡고 왔어. 네 피 냄새."

"......!"

"내가 너한테 수리만 해준 줄 알았어?"

카이리스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네 몸에 미끼를 심었지. 마족을 미치게 만드는 페로몬. 지금쯤 아샤드는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널 찾아 헤매고 있을 거야."

그랬다.
아침부터 몸이 뜨겁고 감각이 예민해진 이유가 있었다. 단순한 컨디션 난조가 아니라, 약물 때문이었다.

"그가 널 찾아오면, 이 총으로 쏴 죽일 거야. '폭주한 마족 왕이 근위대장을 덮치려 해서 사살했다'고 하면 완벽한 시나리오지."

"비겁하군요."

"전략이야."

바스락.

그때,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속도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살기. 그리고 익숙한 마력.

"왔군."

카이리스가 총을 겨눴다. 숲의 어둠 속을 향해.
그곳에서 튀어나온 것은 멧돼지가 아니었다.
은발의 짐승.
아샤드 르페르였다.

하지만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금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거품이 맺혀 있었다.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그는 오로지 나만을 보고 달려들었다.

"아샤드!"

내가 소리쳤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페로몬. 황제의 말대로 그는 본능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잘 가라, 마왕."

카이리스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이 숲을 울렸다.
탄환은 정확히 아샤드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갔다.
피할 수 없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는.

그 순간, 내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주박의 명령도, 내 이성도 아니었다.
이벨린이었다.

[안 돼!]

내 몸이 총알의 궤적으로 뛰어들었다.

푸욱.

타는 듯한 고통이 어깨를 관통했다.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렌?"

총성에 놀라 멈칫한 아샤드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나를 보고 얼어붙었다.
내 어깨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이런."

카이리스가 혀를 찼다.

"방패 노릇은 제대로 하네.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가 다시 장전했다.

"그럼 둘 다 죽어."

그가 두 번째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아샤드가 포효했다.

"카이리스!!!"

검은 마력이 폭발했다.
숲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나갔다. 카이리스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 날뛰며 그를 떨어뜨렸다.

아샤드는 황제를 공격하는 대신, 나에게로 달려왔다.
그가 나를 끌어안고 숲의 더 깊은 곳,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아샤드......!"

추락하는 와중에도 그는 나를 감싸 안았다.
등 뒤로 바람이 윙윙거렸다.
우리는 검은 숲의 심연으로 떨어졌다.


19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00자
  • 장면 수: 2개 (사냥 대회 시작, 숲속의 함정과 추락)
  • 메인 플롯: 황제의 함정(페로몬+저격)에 빠짐. 렌이 아샤드 대신 총을 맞음.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이 아샤드를 구하기 위해 렌의 몸을 움직임 (사랑의 증명).
  • 클리프행어: [추락] 절벽 아래로 떨어진 두 사람. 생사 불명.

20화: 심장의 무게

절벽 아래는 동굴이었다.
오래전 마수들이 살았던 둥지 같은 곳.
차가운 습기와 이끼 냄새가 났다.

"으윽......"

눈을 뜨자마자 고통이 밀려왔다. 총에 맞은 어깨가 불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건, 내 몸 안의 상태였다.

총알에 맞은 충격으로 마력 회로가 다시 불안정해졌다.
게다가 황제가 심어둔 페로몬 때문에, 내 몸은 아샤드의 마력에 미친 듯이 반응하고 있었다.

"정신이 드나?"

아샤드가 다가왔다. 그의 옷은 찢어지고 흙투성이였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는 내 어깨를 지혈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관통상이야. 뼈는 안 다쳤지만 출혈이 심해."

"당신은...... 괜찮습니까?"

"내 걱정 할 때야? 네 몸이 지금 시한폭탄인데."

그의 말이 맞았다.
내 몸은 지금 임계점을 넘어가고 있었다.
피부 아래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폭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렌. 도망쳐.]

이벨린이 힘없이 속삭였다.

[이번엔 진짜야. 못 막아.]

"아샤드. 가세요."

나는 그를 밀어냈다.

"터집니다. 이번엔 당신 마력으로도 못 막아요."

"안 가."

"제발! 같이 죽고 싶어요?"

"공범이라며."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같이 죽든가, 같이 살든가. 둘 중 하나야."

"이 바보 같은......!"

우우웅-.

공명이 시작됐다.
내 심장이 붉게 타올랐다. 고통에 눈앞이 하얘졌다.
이번엔 진짜다. 내 몸이 원자 단위로 분해되려는 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아샤드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이 하나 있어."

그가 자신의 셔츠를 찢었다.
탄탄한 가슴 근육 위, 심장이 뛰는 곳에 검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족의 생명. 마석(魔石).

"내 심장을 너한테 줄게."

"......뭐?"

"마석은 방대한 마력을 담는 그릇이야. 네 몸의 폭주하는 에너지를 내 마석으로 옮기면, 터지는 건 막을 수 있어."

"그럼 당신은요! 마석이 없으면 당신은......!"

마족에게 마석은 심장이나 다름없다. 그걸 꺼낸다는 건 죽음을 의미하거나, 평생 불구가 된다는 뜻이다.

"안 죽어. 난 마왕이니까."

그가 웃었다. 창백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오만한 미소.

"대신, 평생 날 책임져야 할 거야. 내가 힘없는 남자가 돼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나는 소리쳤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페로몬과 고통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샤드가 손톱을 세워 자신의 가슴을 갈랐다.

푸욱.

붉은 피가 솟구쳤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조차 삼키며, 가슴 속에서 붉게 빛나는 보석을 꺼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맥동하는 붉은 보석.
그의 생명 그 자체.

"받아, 렌."

그가 피 묻은 손으로 마석을 내 가슴 위에 올렸다.

"이제, 우린 진짜 하나야."

마석이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생명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내 몸의 폭주하던 에너지가 거짓말처럼 마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신, 아샤드는 힘없이 쓰러졌다.

"아샤드......!"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늘 뜨거웠던 그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자지 마요. 제발, 눈 좀 떠 봐요......!"

동굴 밖에서는 황제의 추격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개 짖는 소리, 말발굽 소리.
그리고 빗소리.

나는 아샤드를 품에 안고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린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남자를 살린다.
설령 내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 보여주자.]

이벨린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지독한 악녀인지.]

나는 바닥에 떨어진 아샤드의 검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칼자루가 손에 감겼다.
이제 도망은 없다.
사냥은 끝났다. 이제 전쟁이다.


20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5,200자 (누적 40,000자 돌파)
  • 장면 수: 1개 (동굴 안에서의 희생과 각성)
  • 메인 플롯: 아샤드가 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마석(심장)을 렌에게 이식함. 렌이 완전히 각성하여 황제와의 전면전을 결심.
  • 서브플롯: [서브 C] 쌍방 구원의 정점 (아샤드→렌). 로맨스 서사의 클라이맥스.
  • 정보 공개: 마석 이식은 가능하지만 제공자는 치명적인 상태가 됨. 렌은 이제 아샤드의 마력을 무한정 쓸 수 있는 상태가 됨.
  • 클리프행어: [S급] 각성 - 아샤드가 쓰러지고, 렌이 검을 들며 황제의 추격대와 맞서는 장면.

Batch 4 완료 요약

진행 상황 트래커 업데이트

  • 메인 플롯 진행률: 66% (2막 종료, 3막 진입)
  • 활성 서브플롯:
    • [서브 A] 이벨린과 렌의 완전한 동맹 결성.
    • [서브 B] 황제와의 전면전 시작.
    • [서브 C] 아샤드의 희생으로 인한 감정 폭발.
  • 미공개 정보: 10년 전 이벨린이 요양지에서 겪었던 일의 구체적 진실. 황제의 '신 죽이기' 다음 단계.
  • 다음 배치 예고: 21화부터는 3막(전결)입니다. 각성한 렌의 무력 시위, 아샤드를 살리기 위한 사투, 그리고 황제와의 최종 결전이 시작됩니다.

일관성 검증

  • 캐릭터 음성: 렌의 독백이 절망→분노로 자연스럽게 전환됨. 아샤드의 직진남 캐릭터 유지.
  • 세계관: 마석 설정과 인체 병기 설정이 충돌 없이 결합됨.
  • : 피폐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절정에 달함. (리디북스 스타일 적합)

Batch 5: 21화~25화


21화: 마녀의 탄생

동굴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질척한 진흙을 밟는 군화 소리.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
황제의 사냥개들이 냄새를 맡고 온 것이다.

"여기다! 핏자국이 있어!"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살아있을까?"
"시체라도 찾아야 해. 폐하의 엄명이다. 머리를 가져오는 자에게 작위를 내리신다고 했다!"

탐욕에 찬 목소리들이 동굴 입구에서 울렸다.
나는 쓰러진 아샤드를 내 코트—피와 흙으로 엉망이 된—로 덮어주었다.
그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가슴이 뜨거웠다.
아샤드가 내어준 마석(심장)이 내 흉곽 안에서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그의 생명이 내 혈관을 타고 흐른다.
그건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분노였고, 슬픔이었고, 살의였다.

[렌. 준비됐어?]

이벨린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

나는 바닥에 떨어진 아샤드의 검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마검(魔劍). 평소의 나라면 들기조차 버거웠을 무게였지만, 지금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저기 있다! 저기 숨어 있어!"

횃불을 든 기사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동굴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눈은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여자다! 마족 왕은 쓰러져 있어!"
"하하! 오늘 횡재했군. 여자는 생포하고 남자는 목을 베어라!"


Batch 5: 21화~23화


21화: 마녀의 탄생

(앞부분에서 계속)

"여자다! 마족 왕은 쓰러져 있어!"
"하하! 오늘 횡재했군. 여자는 생포하고 남자는 목을 베어라!"

그들의 탐욕스러운 외침이 동굴 벽을 타고 울렸다.
나는 쓰러진 아샤드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차가웠다. 시체처럼.
하지만 내 가슴속에 있는 그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기다려요. 금방 청소하고 올 테니까."

나는 검을 고쳐 쥐고 일어섰다.
검은 마력이 내 몸을 감


Batch 5: 21화~25화


21화: 마녀의 탄생 (계속)

"여자는 생포하고 남자는 목을 베어라!"

그들의 탐욕스러운 외침이 동굴 벽을 타고 울렸다.
나는 쓰러진 아샤드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차가웠다. 시체처럼.
하지만 내 가슴속에 있는 그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기다려요. 금방 청소하고 올 테니까."

나는 검을 고쳐 쥐고 일어섰다.
검은 마력이 내 몸을 감쌌다. 아샤드의 것이었다.
마치 그가 등 뒤에서 나를 안아주는 것처럼, 서늘하고 익숙한 기운이 전신을 보호했다.

"저깄다! 쏴라!"

선두에 선 기사가 석궁을 발사했다.
화살이 빗줄기를 뚫고 날아왔다.
피해야 했다. 예전의 나라면.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칭!

내가 검을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허공에 검은 장막이 펼쳐지며 화살을 튕겨냈다.
마법이다. 내가 마법을 썼다.
아니, 아샤드의 심장이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 것이다.

"뭐, 뭐야? 방금 그건!"
"마법사냐? 정보에는 그냥 검사라고 했는데!"

당황한 기사들이 주춤거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발을 구르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크윽!"

내 검이 선두의 기사를 베었다.
갑옷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뼈가 잘리는 묵직한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예리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내 얼굴을 적셨다.

[아하하! 더! 더 죽여!]

이벨린이 환호했다.
그녀의 광기가 내 살의와 공명했다.
마석이 붉게 빛날수록 내 안의 도덕적 브레이크가 파괴되는 기분이었다.

"괴, 괴물이다!"
"포위해! 다구리를 쳐서라도 잡으란 말이다!"

십여 명의 기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춤을 추듯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검을 휘두를 때


Batch 5: 21화~25화


21화: 마녀의 탄생 (계속)

"포위해! 다구리를 쳐서라도 잡으란 말이다!"

십여 명의 기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춤을 추듯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은 궤적이 허공에 남았다.
서걱. 퍽. 으악!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아하하! 더! 더 죽여!]

이벨린의 광기가 내 이성을 갉아먹었다.
마석이 펌프질할 때마다 전신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지치지 않았다. 다치지도 않았다.
적의 칼날이 내 몸에 닿기도 전에 마력의 장벽이 막아냈고, 나는 그저 손목을 까딱이는 것만으로 그들의 갑옷을 두부처럼 썰어버렸다.

"괴, 괴물이다......"
"도망쳐! 저건 인간이 아니야!"

살아남은 몇몇이 뒷걸음질 쳤다. 공포에 질린 눈빛.
그래, 너희 눈에는 내가 괴물로 보이겠지.
하지만 내 눈에는 너희가 시체로 보인다.

"어딜 가."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발로 차 올렸다.
단검은 총알처럼 날아가 도망치는 기사의 뒷덜미에 박혔다.

"내 남자 건드린 대가는 치러야지."

마지막 한 놈까지 쓰러뜨리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동굴 안은 피와 시체로 가득 찼다.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역겹지 않았다. 오히려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는 피 묻은 검을 털어내고 아샤드에게 돌아갔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가슴 위에 손을 대자, 내 심장박동과 공명하는 미세한 울림이 느껴졌다.

"살아있어."

안도감이 밀려오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았다. 마석의 힘이 빠져나가자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잘했어, 렌. 아주 훌륭한 청소였어.]

이벨린이 만족스러운 듯 속삭였다.

[이제 어쩔 거야? 여기서 살림이라도 차릴 거야?]

"아니. 더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

나는 아샤드를 업었다.
그의 몸은 무거웠지만, 마석의 힘 덕분에 견딜 만했다.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소리가 우리의 흔적을 지워줄 것이다.

"조금만 참아요. 당신이 그랬잖아. 내 허락 없인 못 죽는다고."

나는 빗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사냥개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우리는 사라져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처절한 도피가 시작되었다.


21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00자 (누적)
  • 장면 수: 1개 (동굴 전투 및 탈출)
  • 메인 플롯: 아샤드의 마석을 이식받은 렌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추격대를 섬멸. 아샤드를 데리고 도주 시작.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이 살육을 즐기며 렌의 잔혹성을 부추김.
  • 클리프행어: [도주] 의식 잃은 아샤드를 업고 빗속으로 사라지는 렌.

22화: 심장 소리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숲 깊은 곳에 있는 낡은 사냥꾼 오두막이었다.
지붕은 반쯤 무너져 있었지만, 비를 피하기엔 충분했다.
나는 아샤드를 낡은 침상 위에 눕히고 젖은 옷을 벗겼다.

그의 가슴 중앙, 마석을 꺼낸 자리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피는 멈춰 있었다. 마족 특유의 재생력 덕분인지, 아니면 내 안에 있는 마석이 그를 지키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추워......"

아샤드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석을 잃은 마족은 체온 유지가 안 되는 건가?
나는 벽난로에 불을 피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젠장."

나는 내 겉옷을 벗고 셔츠만 입은 채 침상 위로 올라갔다.
그의 옆에 누워 그를 껴안았다. 내 체온이라도 나눠줘야 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안에 있는 '그의 심장'의 온기를 돌려줘야 했다.

"아샤드, 들려요?"

나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내 가슴을 밀착시켰다.
쿵, 쿵, 쿵.
내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 소리가 그의 몸으로 전달되기를 바랐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내 몸안에 다른 남자의 심장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심장이 뛸 때마다, 그의 감정이 내게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를 향한 걱정, 분노, 그리고 지독한 사랑.

"......렌?"

한참이 지났을까.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금안이 희미하게 뜨였다. 초점은 흐렸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나를 찾았다.

"여기 있어요."

"살아...... 있군."

그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신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내 생사부터 확인하다니. 바보 같은 남자.

"당신 덕분에요. 그리고 당신 심장 덕분에."

"다행이야...... 안 터져서."

그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손이 내 가슴 위로 올라왔다. 심장이 뛰는 곳을 확인하듯.

"따뜻하군. 내 심장이...... 네 안에서 뛰는 게."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좀 자요. 마력도 없으면서."

"마력이 없으니까...... 춥군. 좀 더 안아줘."

그가 어린아이처럼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천하의 마왕이 내 품에서 떨고 있다.
이 남자가 나를 살리기 위해 포기한 것이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어머, 얘네 봐라


제26화

Batch 6 (Final): 26화~30화


26화: 왕의 수업

오두막의 밤은 길었다.
아샤드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생명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내가 그를 끌어안을 때마다 다시 밀물처럼 차오르는 기이한 순환이 반복되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의 열이 내렸다.
창밖으로 푸스름한 빛이 스며들 때, 아샤드가 눈을 떴다.
금안(金眼)의 빛이 예전보다 흐릿해져 있었다. 마석을 잃은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살아있네."
"당신 덕분에요."

나는 물을 적신 천으로 그의 입술을 축여주었다.
그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려다 신음하며 도로 누웠다. 천하의 마왕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꼴이라니.

"젠장. 힘이 안 들어가."
"당연하죠. 심장을 뽑아냈는데."
"그래도 입은 살았어."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악력이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가슴이 아렸다.

"렌. 시간이 없어."
"알아요. 황제가 추격대를 더 보낼 겁니다."
"아니. 황제는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절벽 아래는 마수들의 둥지니까."

아샤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놈은 지금쯤 승전보를 기다리며 축배를 들고 있겠지. 그때가 기회야."
"......지금 몸으로요? 걷지도 못하면서."
"나는 못 해. 네가 해야지."

그가 내 가슴, 정확히는 그의 심장이 뛰고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네 안에는 지금 마계 최강의 마석이 들어있어. 넌 걸어 다니는 핵무기야."
"쓰는 법을 모르는데요."
"가르쳐 줄게. 속성으로."

그날부터 기묘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스승은 침대에 누워 입으로만 지시하는 폐


제26화 (완료)

Batch 6 (Final): 26화~30화


26화: 왕의 수업

오두막의 밤은 길었다.
아샤드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생명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내가 그를 끌어안을 때마다 다시 밀물처럼 차오르는 기이한 순환이 반복되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의 열이 내렸다.
창밖으로 푸스름한 빛이 스며들 때, 아샤드가 눈을 떴다.
금안(金眼)의 빛이 예전보다 흐릿해져 있었다. 마석을 잃은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살아있네."
"당신 덕분에요."

나는 물을 적신 천으로 그의 입술을 축여주었다.
그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려다 신음하며 도로 누웠다. 천하의 마왕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꼴이라니.

"젠장. 힘이 안 들어가."
"당연하죠. 심장을 뽑아냈는데."
"그래도 입은 살았어."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악력이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가슴이 아렸다.

"렌. 시간이 없어."
"알아요. 황제가 추격대를 더 보낼 겁니다."
"아니. 황제는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절벽 아래는 마수들의 둥지니까."

아샤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놈은 지금쯤 승전보를 기다리며 축배를 들고 있겠지. 그때가 기회야."
"......지금 몸으로요? 걷지도 못하면서."
"나는 못 해. 네가 해야지."

그가 내 가슴, 정확히는 그의 심장이 뛰고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네 안에는 지금 마계 최강의 마석이 들어있어. 넌 걸어 다니는 핵무기야."
"쓰는 법을 모르는데요."
"가르쳐 줄게. 속성으로."

그날부터 기묘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스승은 침대에 누워 입으로만 지시하고, 제자는 숲속에서 나무를 베어 넘기는 살벌한 과외.

"집중해. 마력은 물이 아니야. 불이야."

아샤드의 목소리가 오두막 밖까지 울렸다.

"흐르게 하지 말고, 태워. 네 혈관이 도화선이라고 상상해."

"말이 쉽지!"

콰앙!

내가 손을 뻗자 검은 화염이 솟구쳤다. 아름드리나무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위력은 좋은데 조절이 안 된다. 이대로 가다간 숲을 다


제27화 (완료)

Batch 6 (Final): 27화~30화


27화: 마지막 월세

수업은 혹독했다.
아샤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대신, 내 감각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자신의 마석과 내 영혼이 공명하는 주파수를 찾아내,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숲을 태울 수 있도록 조율했다.

사흘째 되는 밤.
아샤드가 거친 숨을 내쉬며 침대에 쓰러졌다. 그의 안색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게... 한계야."
"충분해요. 이 정도면 황궁을 날려버릴 수 있어요."

나는 땀에 젖은 그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날려버리는 게 목적이 아니야. 살아남는 게 목적이지."

그가 잠들자, 나는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내일이면 우리는 제국으로 돌아간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

[렌.]

오랜만에 이벨린이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분했다. 늘 깔깔거리던 광기도, 독기도 빠진 건조한 목소리.

'왜. 또 배고파?'

[아니. 배불러. 네가 아샤드의 마력을 너무 많이 써서, 나까지 과식한 기분이야.]

그녀가 킥


제27화 (완료)

Batch 6 (Final): 27화~30화


27화: 마지막 월세

(앞부분에서 계속)

[아니. 배불러. 네가 아샤드의 마력을 너무 많이 써서, 나까지 과식한 기분이야.]

그녀가 킥킥거렸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평소처럼 쨍하지 않고, 안개처럼 흐릿했다.

[렌. 그거 알아? 이 몸은 이제 인간의 것이 아니야. 마족의 심장이 들어왔잖아. 인간의 영혼은 여기서 오래 못 버텨.]

'무슨 소리야?'

[방 빼야 할 시간이라고. 이번엔 내가.]

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

**[어차피 나는 20년 전에 죽은 망령이야.


제28화 (완료)

Batch 6 (Final): 27화~30화


27화: 마지막 월세 (마무리)

(앞부분에서 계속)

[어차피 나는 20년 전에 죽은 망령이야. 네가 들어와서 이 몸을 잘 썼잖아. 청소도 하고, 수리도 하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 등기 이전할 때가 됐어.

파트별 산출물

ep10 (3,001 tokens)

Batch 2: 9화~13화


10화: 약효가 떨어질 때

입안에서 비릿한 쇳물이 맴돌았다.
혀끝으로 입천장을 훑었다. 피맛은 아니었다. 그저 환각일 뿐이다. 마족 왕의 피를 삼켰던 그날 밤 이후로, 내 미각은 종종 이런 식의 오작동을 일으켰다.

"대장님. 폐하의 밀명입니다."

부관 루카스가 집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닫으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색 봉투에는 황실의 붉은 밀랍이 찍혀 있었다.
나는 창밖의 빗소리에서 시선을 거두고 봉투를 건네받았다.

"내용은."
"제8구역 빈민가입니다. 반마족 테러 단체인 '검은 달'의 임시 아지트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루카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제 연회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그놈들이다.

"명령은 간단합니다. 수괴는 생포, 나머지는 전원 사살."

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황제 카이리스. 이 미친 인간은 정말이지 나를 쉴 틈 없이 굴릴 작정인가 보다.
아니, 이건 단순한 임무가 아니다. '테스트'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한 자신의 장난감이, 아직 칼로서 쓸모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수작.

"혼자 간다."
"예? 대장님, 그래도 명색이 테러 단체인데 지원 병력을……."
"비 오는 날엔 발소리가 섞여서 귀찮아. 혼자 가는 게 깔끔해."

핑계였다.
진짜 이유는 내 몸 상태 때문이었다.
아샤드의 마력 덕분에 이벨린의 영혼은 며칠째 잠잠했지만, 오늘 아침부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약효가 떨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다.
부하들 앞에서 미친년처럼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지껄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대기해. 자정 전에는 돌아올 테니까."

나는 의자에 걸쳐둔 검은 가죽 코트를 집어 들었다.
허리춤의 단검 두 자루가 묵직하게 허벅지를 때렸다. 익숙한 무게감.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제8구역은 제국의 화려함이 닿지 않는 하수구 같은 곳이었다.
썩은 쓰레기 냄새와 녹슨 철 냄새가 비에 젖어 진동했다. 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진흙탕을 밟았다.

목표물은 버려진 방직 공장.
입구에 서 있는 보초 두 명의 목을 꺾는 데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빗소리 덕분에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완벽하게 묻혔다.

'오른쪽 세 명, 2층에 두 명. 안쪽에 수괴.'

공장 내부로 스며들며 빠르게 인원을 파악했다.
나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어둠 속으로 미끄러졌다.
기사들의 싸움이 합을 겨루는 스포츠라면, 나의 싸움은 벌레를 밟아 죽이는 청소에 가깝다.

서걱.

어둠 속에서 칼날이 번쩍일 때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지는 소리만이 공장을 채웠다.
네 명. 다섯 명. 여섯 명.

"누, 누구냐!"

2층 난간에서 망을 보던 놈이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 석궁을 겨누었다.
나는 피 묻은 단검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단검은 정확히 놈의 미간에 박혔다.

완벽한 궤적. 완벽한 살상.
하지만 단검을 던지고 팔을 거두려는 순간이었다.

찌릿.

왼쪽 어깨부터 손목까지, 푸른 정전기가 튀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번졌다.

"크윽……."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피부 아래로 푸른 핏줄이 불규칙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샤드가 주입했던 마력이 바닥을 드러내며 요동치는 현상이었다.

[아우, 찌뿌둥해. 며칠이나 잔 거야?]

머릿속에서 기지개를 켜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벨린이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지금.

"침입자다! 죽여라!"

소란을 듣고 안쪽 방에서 거구의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괴로 보이는, 얼굴 절반이 흉터로 덮인 반마족 사내가 거대한 도끼를 치켜들고 달려왔다.

피해야 한다.
뇌는 명확하게 명령을 내렸지만,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 여긴 또 어디야? 냄새 역겨워. 당장 안 나가?]

'닥쳐, 미친년아!'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도끼날이 내 어깨를 스치고 바닥에 처박혔다. 콘크리트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파편이 튀어 뺨을 그었다.

"황제의 개새끼가 겁도 없이 혼자 기어들어 와?"

수괴가 도끼를 다시 빼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나는 남은 단검 하나를 빼 들었지만, 시야가 두 개로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살기와 이벨린의 불쾌함이 한 몸 안에서 충돌하며 신경계를 교란하고 있었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싫어. 드레스에 피 튀는 거 질색이란 말이야. 네가 나가.]

오른팔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 짧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수괴가 발차기로 내 복부를 가격했다.

"컥!"

몸이 붕 떴다가 나무 궤짝 위로 처박혔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입안으로 다시 그 지긋지긋한 쇳물이 넘어왔다.

"대가리만 챙겨서 뜬다."

수괴가 성큼성큼 다가와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대로 죽나? 어이없게도?
황제의 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분노보다, 내 몸 하나 통제하지 못해 죽는다는 수치심이 더 컸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적어도 내 목을 치는 새끼의 얼굴은 똑똑히 기억해 두기 위해서.

콰아앙-!

그 순간, 공장의 철문이 종잇장처럼 뜯겨 나갔다.
빗바람이 몰아치며 어둠 속으로 은빛 섬광이 쏘아졌다.

챙!

수괴의 도끼가 무언가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도끼를 쥔 수괴의 거대한 팔마저 기괴한 각도로 꺾여버렸다.

"크아아악!"

짐승의 비명소리.
그리고 그 비명소리를 가르는, 지독하게 여유롭고 서늘한 목소리.

"제국 근위대는 야근 수당도 안 주나 보지?"

빗물에 젖은 은발.
어둠 속에서도 포식자처럼 빛나는 금안.
아샤드 르페르였다.

그가 검은 코트를 펄럭이며 내 앞을 막아섰다.
맨손으로 도끼를 박살 낸 그의 손등에는 긁힌 상처 하나 없었다.

"당신이…… 여긴 왜."
"산책."

그가 구두 굽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수괴의 머리를 짓밟으며 대꾸했다.

"길을 잃었는데, 익숙한 피 냄새가 나더라고."

거짓말. 제8구역은 사절단 숙소에서 마차로 한 시간 거리다. 애초에 나를 미행했다는 소리다.

"여긴 제국 영토입니다. 사절단 대표가 끼어들 문제가……."
"내 백성(반마족)이 얽힌 일이잖아."

아샤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부러진 갈비뼈를 부여잡고 헐떡이는 내 꼴이 꽤 비참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다치는 건 싫거든."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에 묻은 핏자국을 엄지로 훔쳐냈다.
그의 손끝이 닿자마자, 미쳐 날뛰던 내 안의 신경들이 거짓말처럼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오. 이 남자 피 냄새 끝내준다.]

잠잠해지나 싶었던 이벨린의 목소리가 다시 튀어나왔다. 이번엔 불쾌함이 아니라, 노골적인 호기심과 탐욕이 섞인 목소리였다.

[저번에 마셨던 그 피지? 나 배고파, 렌. 한 입만 더 먹자.]

'미쳤어? 꺼져.'

나는 속으로 발악하며 아샤드의 손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내 의지는 거기까지였다.

툭.

쳐내려던 내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방향을 바꾸어, 내 뺨을 만지던 아샤드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내가 한 짓이 아니었다.

"……렌?"

아샤드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다분히 유혹적이고 끈적한 손길이었으니까.

내 손가락이 그의 소매 끝을 쓸어내리며 맨살을 더듬었다.
입술이 제멋대로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볼우물이 패일 정도로 환하고, 천진난만하고, 오만한 귀족 영애의 미소.

"안녕? 네가 그 마족 왕이구나."

내 성대를 울려 나오는 목소리였지만, 억양과 높낮이가 완전히 달랐다.
아샤드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금안에 당혹감이 스쳤다.

"저번에 준 피, 아주 달콤했어."

내 손이 아샤드의 손목을 끌어당겨 내 입술로 가져갔다.
나는 막지 못했다. 내 몸은 완벽하게 이벨린에게 통제권을 넘겨준 상태였다.

촉.
내 입술이 그의 손목 안쪽, 맥박이 뛰는 곳에 부드럽게 닿았다.

"한 입만 더 줄래? 멍멍아."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샤드는 숨조차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누구야."

빙의자라는 사실을 들킨 지 이틀 만에.
나는 진짜 몸의 주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도, 나를 향해 미친 듯이 직진해 오던 남자의 품 안에서.


10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5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집무실 밀명 → 빈민가 전투 → 아샤드 난입 및 이벨린 각성)
  • 등장 캐릭터: 렌, 루카스, 아샤드, 이벨린, 검은 달 수괴
  • 메인 플롯 비트: 황제의 시험(밀명) 수행 중, 마력 고갈로 인한 첫 번째 신체 통제력 상실 위기 발생.
  • 서브플롯 진행:
    • [서브 A] 이벨린이 완전히 주도권을 탈취하여 아샤드와 대면.
    • [서브 B] 황제가 렌을 무리한 임무에 투입하며 소모품으로 시험함.
  • 심은 복선: 이벨린이 아샤드의 피(마력)에 극도로 집착하는 현상 (이후 마력 흡수 체질 및 황제의 인체 병기 설정과 연결).
  • 클리프행어: [A급] 정체 혼란/관계 위기 - 이벨린이 렌의 몸을 차지하고 아샤드에게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며 종료.
  • 템포: 중속 → 고속 → 절정 (감정)
ep11 (1,564 tokens)

제11화 (완료)

Batch 2: 9화~13화


11화: 셋이서 하는 왈츠

"한 입만 더 줄래? 멍멍아."

침묵은 무거웠고, 공기는 차가웠다.
아샤드 르페르의 표정에서 감정이 지워졌다.
방금 전까지 나를 걱정하던 눈빛, 분노하던 눈빛, 그 모든 인간적인 파장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건, 절대적인 혐오였다.

"……역겹군."

그가 내 손목을 뿌리쳤다.
거칠게 내동댕이쳐진 손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나', 아니 이벨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너무하네. 20년 전에는 꼬리 치면서 따라다니더니. 그새 취향이 바뀌었나?]

이벨린이 내 입술을 빌려 뱉어내는 말들은 충격적이었다.
20년 전? 아샤드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나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무슨 개소리야. 닥치고 나와!'

하지만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마치 가위눌린 것처럼, 이벨린이 조종하는 대로 관절이 움직이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너 눈 다쳤었지? 이제 앞은 보이나 봐?]

이벨린이 비틀거리며 아샤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내 피 묻은 손으로 아샤드의 제복 깃을 잡으려 했다.

"손대지 마."

아샤드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주변으로 검푸른 마력이 폭풍처럼 일렁였다. 공장의 녹슨 철골들이 끽끽거리며 비틀릴 정도의 압력이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망령."

[망령이라니. 집주인한테 말이 심하네. 저년(렌)은 그냥 세입자라고.]

이벨린은 겁도 없이 아샤드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그 순간이었다.

쿠웅!

아샤드의 마력이 내 몸을, 정확히는 이벨린의 영혼을 짓눌렀다.
물리적인 타격이 아니었다. 영혼 자체를 옥죄는 압박감.

[꺄악!]

이벨린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뒷걸음질 쳤다.

"꺼져."

아샤드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 안에 있는 진짜를 내놔."

[진짜? 하! 저 살인기계가 진짜라고? 웃기고 있네!]

이벨린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저건 황제가 만든 인형이야! 내 몸을 뺏어서, 내 피로…… 윽!]

아샤드가 손을 뻗어 내 목을, 아니 이벨린이 차지한 내 목을 움켜쥐었다.
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경동맥을 타고 뇌로 직격했다.

강제 진압.
마치 날뛰는 짐승에게 마취총을 쏘듯, 그는 이벨린의 의식을 강제로 눌러버렸다.

[이…… 개자식이……!]

이벨린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몸의 통제권이 허공에 붕 뜬 느낌.
그 틈을 타서 내가 치고 올라갔다.

'비켜!'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수면 위로 솟구쳤다.
이벨린의 의식이 심연으로 밀려나고, 내 감각이 다시 연결되었다.
손끝, 발끝, 그리고 목을 잡고 있는 아샤드의 뜨거운 체온까지.

"……허억!"

나는 거친 숨을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아샤드가 내 목에서 손을 떼고 나를 받아안았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조심스럽고도 절박한 손길이었다.

"돌아왔나?"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어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그가 안도하며 내쉬는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젠장, 늦어서 미안해."

그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주변에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반마족 잔당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아까의 기괴한 상황—아군 수괴가 죽고, 적들이 내분(?)을 일으키는—에 얼어붙어 있었다.

"저, 저놈들을 죽여!"

누군가 뒤늦게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아샤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눈길 한 번 주었을 뿐이다.

파지직.

검은 그림자가 바닥에서 솟아올라 놈들의 발목을 낚아챘다.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아샤드는 듣기 싫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청소는 부하들이 할 거야. 넌 쉬어."

그는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지만, 그의 품은 뜨거웠다.
나는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중얼거렸다.

"……놓으라고 했습니다."
"거절한다."

그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세입자든 집주인이든 상관없어. 지금 이 몸의 열쇠는 내가 쥐고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물어볼 새도 없이,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인 한마디였다.

"그러니까 도망갈 생각 하지 마. 렌."


11화 메타 정보

  • 메인 플롯: 아샤드의 강제 개입으로 이벨린의 폭주 진압. 렌의 의식 복구.
  • 서브플롯:
    • [서브 A] 이벨린이 "황제가 나를 죽였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함.
    • [서브 C] 아샤드가 과거(20년 전) 이벨린과 구면이었음을 암시. 하지만 현재의 렌을 선택함.
  • 클리프행어: 아샤드가 렌을 데리고 사라짐. "도망갈 생각 마라"는 선언.

12화: 공존의 계약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향기가 났다.
아샤드의 침실이었다. 이쯤 되면 여기가 내 관사인지, 적국 대사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몸은 무거웠지만, 머리는 맑았다.
갈비뼈 부근이 욱신거렸지만 붕대가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살폈다.

아샤드는 없었다. 대신 협탁 위에 메모가 놓여 있었다.

[일어나면 마셔. 피 대신이니까.]

붉은색 물약병이었다. 최고급 포션.
돈지랄도 유난이다. 나는

ep12 (496 tokens)

12화: 공존의 계약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향기가 났다.
아샤드의 침실이었다. 이쯤 되면 여기가 내 관사인지, 적국 대사관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몸은 무거웠지만, 머리는 맑았다.
갈비뼈 부근이 욱신거렸지만 붕대가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살폈다.

아샤드는 없었다. 대신 협탁 위에 메모가 놓여 있었다.

[일어나면 마셔. 피 대신이니까.]

붉은색 물약병이었다. 최고급 포션.
돈지랄도 유난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병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진한 마력의 향이 코를 찔렀다.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가 위장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거울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우, 쓰다. 다음엔 설탕 좀 타 달라고 해.]

나는 고개를 돌려 전신 거울을 보았다.
침대 위에 앉은 나는 무표정했지만, 거울 속의 이벨린은 혀를 내밀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나는 거울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20년 전에 죽었다며. 근데 왜 아직도 여기에 붙어 있어?"

[죽은 게 아니니까.]

이벨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장난기는 온데간데없고, 서늘한 살기만이 남았다.

[죽임을 당한 거지. 아주 믿었던 사람한테.]

"황제?"

[그래. 카이리스. 그 개자식이 날 제물로 바쳤어. 영생을 위한 재료라나 뭐라나.]

그녀가 거울 표면을 손톱으로 긁었다.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렌. 너도 느꼈지? 그 자식이 우릴 보는 눈빛. 우린 사람이 아니야. 그냥 실험실의 쥐새끼지.]

"그래서, 내 몸을 뺏어서 복수라도 하시겠다?"

**[아니. 거래

ep13 (164 tokens)

Batch 2: 9화~13화 (계속)


12화: 공존의 계약서

(앞부분에서 계속)

[아니. 거래를 하자는 거야.]

거울 속의 이벨린이 턱을 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너는 살고 싶지? 나도 그래. 억울해서 이대로는 성불 못 하거든.]

"그래서?"

[네 몸을 빌려줘. 가끔씩. 대신 내가 월세를 낼게.]

"월세?"

[정보. 황제가 꾸미는 '신 죽이기' 프로젝트의 전말.]

나는 헛웃

ep14 (230 tokens)

Batch 2 (보완) & Batch 3: 13화~17화


13화: 10년의 무게

[12화 요약: 깨어난 렌은 거울 속 이벨린과 대면한다. 이벨린은 황제가 자신을 '재료'로 썼다는 진실을 알려주며, 몸의 주도권을 가끔 넘겨주는 대가로 황제의 비밀을 공유하겠다는 '공존 계약'을 제안한다. 렌은 살기 위해 악마의 계약을 수락한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벨린은 다시 거울 속 심연으로 가라앉았고,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남았다.

"일어났군."

테라스 문이 열리며 아샤드가 들어왔다. 비에 젖은 코트를 벗어 던진 그의 몸에서 서늘한 냉기와 짙은 피 냄새가 났다. 반마족 잔당들을 처리하고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몸은?"
"덕분에. 당신의 피가

ep15 (1,734 tokens)

Batch 3: 13화~17화


13화: 10년의 무게

(앞부분에서 계속)

"덕분에. 당신의 피가 꽤 효과가 좋더군요. 이벨린도 조용하고."

나는 일부러 건조하게 대답하며 셔츠 단추를 잠갔다.
아샤드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물기를 머금은 빗방울이 그의 은발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효과가 좋다니 다행이군. 비싼 값을 치른 보람이 있어."

그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젖은 옷 냄새, 비 냄새, 그리고 그의 고유한 체향이 훅 끼쳐왔다.

"그래서, 이제 대답해 줄 텐가?"

"무엇을 말입니까."

"10년 전, 라하트."

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피할 수 없다. 이미 내 손목의 흉터까지 확인한 마당에 잡아떼는 건 의미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도 탈이군요. 폐하께선 잊으라고 명령하신 일인데."

"황제의 명령 따위 알 바 아니야."

아샤드가 내 앞의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시선이 내 눈높이와 맞춰졌다.

"그때 왜 날 살려줬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10년 전. 나는 고작 열다섯 살의 살수였고, 그는 적군의 젊은 장교였다.
눈을 다쳐 앞을 못 보는 적을 죽이는 건, 암살자의 긍지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연민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죽이기 아까웠습니다."

"아까웠다?"

"눈이 예뻤거든요. 다쳤는데도 금색으로 빛나서."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낭만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죽음만 보고 자란 아이였고, 살아있는 것의 아름다움을 처음 봤을 뿐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아샤드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허탈함과 안도가 뒤섞인 얼굴.

"나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10년을 찾아헤맸는데."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쌌다. 이번에는 거칠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이 내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이벨린이 아니야."

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찾던 건, 이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너였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주박이 새겨진 심장이 아니라, 내 영혼이 반응하고 있었다.
이벨린은 아샤드를 '멍멍이' 취급했지만, 아샤드는 이벨린이 아닌 나를 보고 있었다.
이 기묘한 삼각관계 아닌 삼각관계.

"착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국 근위대장이고, 당신은 적국의 왕입니다."

나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손끝이 떨리지 않도록 힘을 주며.

"그때 살려준 걸 후회하게 만들지 마세요."

"후회?"

아샤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넌 절대 후회 못 해. 내가 그렇게 안 둘 거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해. 오늘은 황궁 무도회야. 춤 신청, 이번엔 거절하지 마."

그가 욕실로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내 손목의 흉터를 내려다보았다.
10년 전의 불길이, 아직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것 같았다.

[어우, 달달해서 이가 썩겠네.]

거울 속에서 이벨린이 혀를 찼다.

[근데 어쩌지? 저 남자, 곧 죽을 텐데.]

"뭐?"

[황제가 널 왜 그 남자 옆에 붙여뒀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이벨린이 싸늘하게 웃었다.

[너는 칼이고, 나는 칼집이라며. 칼집 안에 든 게 뭔지 보여줄 때가 됐어.]


13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200자 (누적)
  • 장면 수: 2개 (아샤드와의 대화, 이벨린의 경고)
  • 메인 플롯: 아샤드가 렌의 정체(과거의 은인)를 확신하고 직진함.
  • 서브플롯: [서브 C] 10년 전 서사 연결. [서브 B] 황제의 진짜 목적 암시.
  • 정보 공개: 렌이 아샤드를 살려준 이유는 단순한 변덕/연민이었음.
  • 클리프행어: [경고] 이벨린이 아샤드의 죽음을 예고함.

14화: 신 죽이기

황궁 대연회장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제국의 귀족들이 가면을 쓰고 서로를 탐색하는 곳.
나는 근위대장 정복을 입고 연회장 구석에 서 있었다. 그림자처럼, 그러나 모두가 의식하는 그림자로.

"오늘따라 안색이 좋군."

카이리스가 다가왔다. 황금색 가면을 쓴 그는 여전히 지루해 보였다.

"마족의 피가 꽤 입에 맞나 봐?"

"......감시가 철저하시군요."

"내 물건이 남의 손을 타는데 당연히 신경 써야지."

그가 샴페인 잔을 건넸다.

"따라와. 보여줄 게 있어."

나는 그를 따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도착한 곳은 황궁 지하,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마법 연구소였다.
비릿한 약품 냄새와 냉기가 감돌았다.

"이벨린이 죽은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었나?"

카이리스가 연구소 중앙의 거대한 수조 앞을 걸으며 물었다.
수조 안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마수(魔獸)의 사체들이 둥둥 떠 있었다.

"그녀는 내 실험의 첫 번째 성공작이었어."

"실험?"

"마력을 무한정 흡수해서, 임계점을 넘으면 폭발하는 그릇."

그가 멈춰 섰다.

"마족은 강해. 특히 아샤드 르페르는 신에 가까운 힘을 가졌지. 인간의 군대로는 이길 수 없어. 그래서 생각했지. 신을 죽이려면, 신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고."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가면 너머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벨린의 몸은 '마력 흡수체'야. 마족과 접촉하면 할수록, 그들의 마력을 빨아들여 축적하지. 그리고 일정량이 차면......"

그가 손으로 폭발하는 시늉을 했다.

"펑."

머릿속이 하얗게 셌다.
아샤드가 내게 마력을 주입할 때마다, 내가 그의 피를 마실 때마다... 나는 치유된 게 아니었다.
폭탄에 화약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네 몸 안에는 아샤드의 마력이 가득 차 있어. 아주 맛있게 익었지."

카이리스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늘 밤 무도회에서, 네가 그와 춤을 추는 순간. 내가 신호를 보내면 너는 터질 거야. 제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불꽃놀이가 되겠지."

"......미쳤어."

"칭찬으로 들을게."

그가 내 귀에 속삭였다.

"도망칠 생각은 마. 네 심장의 주박이 터지는 게 빠를지, 자폭 스위치가 켜지는 게 빠를지 시험

ep16 (57 tokens)

Batch 3: 14화~18화


14화: 신 죽이기

(앞부분에서 계속)

"도망칠 생각은 마. 네 심장의 주박이 터지는 게 빠

ep17 (1,196 tokens)

제14화 (완료)

Batch 3: 14화~18화


14화: 신 죽이기

(앞부분에서 계속)

"도망칠 생각은 마. 네 심장의 주박이 터지는 게 빠를지, 자폭 스위치가 켜지는 게 빠를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황제는 만족스러운 듯 내 어깨를 토닥였다.
가죽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손길이 뱀처럼 차가웠다.

"가 봐. 파트너가 기다리겠어."

그가 나를 연구소 밖으로 밀어냈다.
무거운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쿵, 하고 울렸다. 마치 관뚜껑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나는 복도에 홀로 남겨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역겨움 때문이었다.
내 몸안에서 펄떡이는 심장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전부 나를 죽이기 위한 카운트다운이었다니.

[이제 알겠어?]

이벨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조하고, 지독하게 냉소적인 목소리.

[내가 왜 미친년처럼 굴었는지. 이 몸은 시한폭탄이야. 마력이 찰수록 터질 시간은 가까워져.]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내가 그 실험의 첫 번째 모르모트였으니까.]

그녀가 킬킬거렸다.

[아샤드가 널 치료해 준다고? 웃기지 마. 그 남자는 지금 제 손으로 사랑하는 여자의 몸에 기름을 붓고 있는 거야. 불이 잘 붙으라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샤드는 10년 전의 나를 기억하고,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피와 마력을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그 모든 선의가, 황제가 짜놓은 판 위에서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그가 나를 사랑할수록, 나를 지키려 할수록... 우리는 더 빨리 파멸한다.

"......개자식."

나는 벽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화려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연회장 쪽을 노려보았다.
황제 카이리스. 신을 죽이기 위해 악마가 된 인간.

하지만 나는 칼이다.
칼은 주인이 휘두르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적어도 주박이 내 심장을 쥐고 있는 한.

나는 흐트러진 제복을 정리하고, 다시 그 지옥 같은 무도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안의 폭탄이 째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14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00자 (누적)
  • 장면 수: 2개 (지하 연구소 폭로, 복도에서의 독백)
  • 메인 플롯: 렌의 신체 비밀(마력 폭탄)이 밝혀짐. 황제는 이를 이용해 마족왕 아샤드를 암살하고 성전을 일으키려 함.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은 이미 자신의 운명(폭탄)을 알고 있었음. [서브 B] 황제의 악역 포지션 확립.
  • 정보 공개: 렌(이벨린)의 몸은 마력을 흡수하여 임계점에서 자폭하도록 설계됨. 아샤드의 마력 주입은 치료가 아니라 기폭제를 채우는 행위였음.
  • 클리프행어: [S급] 절망적 상황 - 아샤드의 사랑이 곧 죽음이라는 아이러니.

15화: 기폭제

연회장은 여전히 화려했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귀족들은 웃고 떠들며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아무도 모른다. 이 화려한 무도회장 지하에 썩어가는 마수의 시체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 사이에 걸어 다니는 폭탄이 있다는 것을.

"늦었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샤드 르페르.
그는 테라스 입구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예복이 그의 은발과 대비되어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평소라면 그 모습에 심장이 뛰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아름다워 보일수록 공포가 밀려왔다.

"어디 갔다 왔나 했더니, 황제와 밀회라도 즐긴 건가?"

그가 다가왔다. 질투 섞인 농담이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내 몸안의 마력이 반응했다. 피부 아래 심어둔 기폭장치가 그의 기운을 감지하고 윙윙거렸다.

"......오지 마십시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뭐?"

아샤드의 눈매가 굳어졌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오늘은... 기분이 별로니까."

"기분이 별로면 풀어주면 되지."

그는 내 거절을 튕기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성큼 다가와 내 손목을 낚아챘다.

"음악이 바뀌었어. 왈츠야."

"놓으세요!"

나는 비명 지르듯 소리치며 그를 뿌리쳤다.
주변의 시선이 우리에게

ep18 (584 tokens)

제15화 (완료)

Batch 3: 14화~18화 (계속)


15화: 기폭제

(앞부분에서 계속)

"놓으세요!"

나는 비명 지르듯 소리치며 그를 뿌리쳤다.
주변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음악 소리가 잦아들고,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제의 개가 감히 타국 왕의 춤 신청을 거절하고 소리를 질렀다. 외교적 결례를 넘어선 도발이었다.

"......거절의 이유치고는 꽤 격렬하군."

아샤드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처받은 것 같기도 했고, 분노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었다. '당신 곁에 있으면 내가 터져서 당신을 죽이게 된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나는 도망치듯 뒷걸음질 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샤드와 닿았던 손목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내 안의 기폭장치—황제가 심어놓은 마력 회로—가 윙윙거렸다.

[멍청아,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이벨린이 비웃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아샤드가 널 쫓아올 거야. 그리고 그 남자가 널 사랑할수록 너는 더 빨리 죽어.]

'닥쳐.'

나는 비틀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아샤드의 시선이 비수처럼 꽂히는 게 느껴졌다. 잡으러 올까? 아니, 자존심 강한 그라면 사람들 앞에서 거절당한 수모를 참고 쫓아오진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어딜 가."

테라스로 나오자마자 손목이 잡혔다.
아샤드였다. 그는 공간 이동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내 앞을 막아섰다.

"이봐, 렌. 내가 널 10년이나 찾아헤맸다고 했지."

그가 나를 난간 쪽으로 몰아붙였다.

"그 말은, 네가 어디로 숨든 찾아낼 자신이 있다는 뜻이야."

"제발......!"

나는 울고 싶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내 피부를 타고 스며들었다. 너무나 달콤하고, 너무나 치명적인 독.
몸 안의 마력 수치가 임계점을 향

ep19 (2,033 tokens)

Batch 3 (완료): 16화~18화


15화: 기폭제 (마무리)

(앞부분에서 계속)

내 몸 안의 마력 수치가 임계점을 향해 치솟았다.
피부 아래 심어둔 회로가 비명을 지르며 타올랐다.
심장이 쿵, 쿵, 쿵.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거 놔……!"

나는 쥐어짜듯 신음하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아샤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목을 쥔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왜 떨지?"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는 내 공포를 오해하고 있었다. 10년 전처럼 자신이 나를 해칠까 봐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안 잡아먹어. 적어도 지금은."

그가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단단한 근육이 맞닿았다. 그 접촉면을 통해 그의 방대한 마력이 댐이 무너진 것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찌리릿.

뇌가 하얗게 타버릴 것 같은 충격.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황제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펑.'

안 돼. 여기서 터지면…… 아샤드도 죽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소리쳤다.

"비켜! 터진다고!"

하지만 내 경고는 테라스 너머에서 들려오는 왈츠의 클라이맥스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스위치가 눌렸다.


15화 메타 정보

  • 클리프행어: [S급] 절체절명 - 아샤드와의 접촉으로 렌의 자폭 시퀀스가 가동됨.

16화: 오작동

세상이 느려졌다.
심장 부근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끓는 물을 혈관에 주입한 것 같은 고통이었다.

'아, 죽는구나.'

담담했다.
암살자로 살면서 수없이 상상해 온 죽음이었다.
하지만 억울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장난감으로 터져 죽는다는 게. 그리고 하필이면 내가 살리고 싶었던 유일한 사람을 길동무로 데려간다는 게.

[멍청아! 눈 뜨고 똑바로 봐!]

이벨린이 비명을 질렀다.

[아직 안 끝났어!]

눈을 떴다.
터지지 않았다.
아니, 터지기 직전에 멈춰 있었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검푸른 아우라.
아샤드의 마력이었다.
그의 마력이 내 몸 안에서 폭주하려던 기폭 에너지를 억지로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터지려는 폭탄을 맨손으로 감싸 쥐듯이.

"……크윽."

아샤드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미간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 몸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그리고 그게 누구의 짓인지.

"이딴 걸…… 몸에 심어놨나."

그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심장이 아니라, 화약고였군."

"놓으세요. 당신까지 다칩니다."

"닥쳐."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몸에서 역류하는 폭발 에너지를 그가 대신 흡수하고 있었다.
내게 심어진 마력 회로는 '흡수'만 할 뿐 '방출' 기능이 없다. 그래서 터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샤드는 그 흐름을 강제로 역류시키고 있었다.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것과 같은,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우우웅—.

공기가 진동했다.
테라스의 유리창에 금이 갔다. 바닥의 대리석이 쩍 갈라졌다.
하지만 연회장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샤드가 쳐놓은 방음 결계 때문이었다.

"황제…… 그 개자식이."

아샤드의 금안이 살기로 번뜩였다.
그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는 지금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서 내 폭주를 막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적이다. 10년 전 잠깐의 인연 따위, 목숨을 걸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말했잖아."

그가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웃었다. 지독하게 오만하고, 눈물 나게 처절한 미소.

"내 허락 없이는 못 죽는다고."

쿠웅!

마지막 충격파가 그의 몸을 관통했다.
그의 등 뒤로 검은 날개 형상의 마력이 펼쳐졌다가 산산이 흩어졌다.
동시에 내 몸을 태우던 열기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성공했다.
폭탄이 해체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뇌관이 젖어버렸다. 그의 피로.

아샤드가 비틀거렸다.
천하의 마족왕이, 신에 가까운 힘을 가졌다는 그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그의 체온이 닿은 곳이 데일 듯 뜨거웠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10년 전, 불타는 창고에서 그를 구해줬을 때처럼.

"미쳤군요. 당신."

"너만 할까."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킬킬거렸다.

"살아있는 폭탄 주제에 춤을 추러 와? 간도 크지."

"거절했잖습니까."

"거절이 너무 약했어. 다음엔 뺨이라도 때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붉게 충혈된 눈.
그 어느 때보다 엉망진창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이제 설명해."

그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그 개자식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16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00자 (누적)
  • 장면 수: 1개 (테라스에서의 폭발 저지 및 감정 교류)
  • 메인 플롯: 아샤드가 렌의 자폭을 자신의 마력으로 막아냄. 렌의 비밀(인체 병기)을 공유하게 됨.
  • 서브플롯: [서브 C] 쌍방 구원 서사의 완성 (과거: 렌→아샤드 / 현재: 아샤드→렌).
  • 정보 공개: 아샤드는 마력의 흐름을 역류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함.
  • 클리프행어: [진실 요구] 아샤드가 모든 진실을 요구하며 렌을 추궁함.

17화: 공범자

"인체 병기."

내 설명을 다 들은 아샤드가 짧게 요약했다.
그는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력 역류의 후유증이었다.

"그러니까, 내 마력을 흡수해서 터지는 구조다?"

"정확히는 마족의 마력이죠. 당신이 가장 강하니까 제일 좋은 기폭제였을 뿐이고."

나는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수습하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오늘 밤 당신을 죽이고, 그 명분으로 성전(聖戰)을 일으킬 계획이었습니다."

"하."

아샤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창의적인 미친놈이군. 제 근위대장을 폭탄으로 써서 적국 왕을 암살한다라. 역사책에 남을 만해."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지? 다시 가서 '실패했습니다, 다시 충전해 주세요'라고 할 건가?"

"그럴 리가요."

나는 거울—테라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이벨린은 조용했다. 그녀도 아샤드의 무식한 힘에 질린 모양이었다.

"도망쳐야죠. 당신이 도와준다면."

"도와달라?"

"당신은 황제의 계획을 알았으니 대비할 수 있고, 나는 이 지긋지긋한 폭탄 신세에서 벗어나고. 윈윈(Win-Win) 아닙니까."

거래.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랑이나 연민에 기대기엔, 내 상황이 너무 절박했다.

아샤드가 담배를 비벼 껐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거래라

ep20 (528 tokens)

제18화 (완료)

Batch 3 (완료) & Batch 4: 18화~20화


17화: 공범자 (마무리)

(앞부분 요약: 아샤드는 렌의 자폭을 막아낸 후,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렌은 그에게 "도와준다면 황제의 계획을 알려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한다.)

"거래라."

아샤드가 담배를 비벼 껐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 방금 전의 폭발보다 더 위험한 불꽃이 일렁였다.

"내 목숨을 구해주고, 내 나라를 구할 정보를 주겠다? 아주 합리적이군."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죠."

"아니. 거절해."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가 뭡니까. 당신도 황제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복수는 할 거야. 하지만 거래는 아니지."

그의 엄지가 내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거래는 타인끼리 하는 거야. 주고받으면 끝이지. 하지만 난 너랑 끝낼 생각이 없거든."

"......그럼 뭘 원하시는데요."

"공범."

그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황제를 죽이는 공범이 되어줘. 네가 칼이 되고, 내가 칼자루가 되는 거지."

"그게 거래와 뭐가 다릅니까?"

"다르지. 공범은 운명을 공유하니까."

그가 내 허리를 끌어당겨 밀착시켰다.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이번엔 기폭장치가 아니었다.
그의 체온이, 땀 냄새가, 그리고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내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네가 터지면 나도 죽고,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관계.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미친놈.
제국의 그림자와 적국의 왕이 운명 공동체라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미친 제안'이 황제의 '합리적인 명령'보다 훨씬 더 안심이 되었다.

"좋습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

ep21 (4,892 tokens)

Batch 4: 18화~20화


17화: 공범자 (마무리)

(앞부분에서 계속)

"좋습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주박이 새겨진 심장이 거부 반응으로 욱신거렸지만, 이번엔 무시했다.
황제의 명령(주박)보다, 눈앞의 남자가 주는 공포(사랑)가 더 강렬했으니까.

"공범, 해보죠. 어차피 이판사판이니까."

"잘 생각했어."

아샤드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계약의 키스.
하지만 10년 전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그를 구원할 차례였다.
아니, 우리가 서로를 구원할 차례인가.

"그럼 첫 번째 임무를 주지."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일 아침, 황제에게 가서 보고해. '기폭 장치가 고장 났다'고."

"그가 믿을까요?"

"믿게 만들어야지.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연기."

그가 내 허리를 놓아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가 봐.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사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테라스를 나섰다.
등 뒤에서 밤바람이 불어왔다. 식은땀에 젖은 등이 서늘했지만, 마음만은 이상하게도 뜨거웠다.

[공범이라.]

거울(유리창)에 비친 이벨린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네. 혼자 죽는 것보단 둘이서 세상을 망가뜨리는 게 더 재밌잖아?]

그녀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래. 우리는 미친 공범자들이다.
황제, 너는 파트너를 잘못 골랐어.


17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00자 (누적)
  • 장면 수: 1개 (테라스에서의 거래 성사)
  • 메인 플롯: 렌과 아샤드가 '공범'으로서 황제에게 대항하기로 결탁함.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이 이 '파멸적인 동맹'에 찬성함.
  • 클리프행어: [결의] 황제를 속이기 위한 렌의 연기 예고.

18화: 거짓말의 무게

다음 날 아침, 황제의 집무실.
공기는 무거웠고, 황제 카이리스의 침묵은 그보다 더 무거웠다.

"고장?"

카이리스가 깃펜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그래서 더 소름 끼쳤다.

"네. 폐하께서 신호를 보내셨을 때, 가슴에 통증만 있었을 뿐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그러나 당혹스러운 척 보고했다.
무릎 꿇은 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카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이상하군. 연구소 데이터는 완벽했는데."

그가 내 명치, 정확히는 기폭 회로가 심어진 곳에 손을 댔다.
차가운 마력이 흘러들어와 내 몸안을 훑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샤드가 내 몸에 남긴 흔적(마력 역류의 잔재)을 들키면 끝이다.

하지만 아샤드는 철저했다.
그는 내 몸 안의 마력을 자신의 것이 아닌, 마치 회로가 과열되어 타버린 것처럼 위장해 두었다.

"흐음."

카이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회로가 탔어.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군."

"아샤드 르페르의 마력이... 예상보다 강했던 것 같습니다. 흡수하는 과정에서 회로가 견디지 못한 게 아닐지."

나는 준비해 둔 변명을 내놓았다.
카이리스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깝네. 어제 그 불꽃놀이를 기대했는데."

그는 내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뭐, 좋아. 기계는 고치면 되니까."

"......"

"대신, 벌은 받아야지? 임무 실패에 대한 대가."

그의 손가락이 딱, 하고 튕겨졌다.

"으윽!"

심장의 주박이 조여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
나는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소리 질러도 돼. 여기는 방음이 잘 되거든."

카이리스가 내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잔인한 호기심으로 번들거리는 눈.

"아파? 죽을 것 같아?"

"허억, 헉......"

"기억해 둬, 렌. 네 생명줄은 내가 쥐고 있어. 그 마족 놈이 아니라."

그는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나가 봐. 연구소장에게 연락해 둘 테니 수리받고."

나는 비틀거리며 집무실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복도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개자식.'

[저걸 그냥 둬? 확 죽여버리지.]

이벨린이 머릿속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참아. 아직은 때가 아니야.'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고통은 끔찍했지만,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속았다. 황제는 내가 고장 난 인형이라고 믿었다.
이제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마주친 사람 때문이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군."

아샤드 르페르.
그가 복도 끝 창가에 기대어 나를 보고 있었다.
대놓고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적국 왕이라니.

"여긴 웬일입니까."

"병문안. 파트너가 고장 났다길래."

그가 다가와 내 턱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맞았나?"

"......넘어졌습니다."

"황제 앞에서는 잘만 넘어지는군."

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는 내 입가에 묻은 피를 엄지로 닦아내더니, 그대로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피 맛이 쓰다."

"더러우니까 하지 마십시오."

"약속했잖아. 넌 내 거라고."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마셔. 진통제야. 마력 성분은 뺐으니 황제도 눈치 못 챌 거다."

"이런 걸 주려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아니. 데이트 신청하러 왔지."

"......네?"

아샤드가 싱긋 웃었다.

"내일, 황실 사냥 대회. 너도 참가한다며?"

"저는 호위 임무입니다."

"그게 그거지. 숲속은 보는 눈도 적고, 밀회하기 딱 좋잖아."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준비해 둬. 사냥감은 멧돼지가 아니라 황제니까."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사냥 대회.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유희이자, 사고를 위장해 정적을 제거하기 가장 좋은 무대.
아샤드는 그곳을 우리의 무대로 만들 생각이었다.

"실수하면 죽습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아니요.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으니까요."

"냉정하긴."

그가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일이다.
내일 숲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18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500자
  • 장면 수: 2개 (황제와의 대면/고문, 아샤드와의 복도 밀회)
  • 메인 플롯: 황제를 속이는 데 성공했지만, 육체적/정신적 압박을 받음. 사냥 대회가 결전의 장소로 예고됨.
  • 서브플롯: [서브 B] 황제의 잔혹성과 통제광적인 면모 부각.
  • 정보 공개: 주박의 고통은 마력 회로와 별개로 작동함.
  • 클리프행어: [사건 예고] 내일 사냥 대회에서 황제를 노린다는 아샤드의 선전포고.

19화: 사냥터의 짐승들

제국 북쪽의 '검은 숲'.
황실 전용 사냥터인 이곳은 거대한 침엽수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대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아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곳.

"오늘의 우승자에게는 소원 하나를 들어주지."

출발선에서 카이리스가 선언했다.
귀족들은 환호했지만, 나는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살의를 읽었다.
그는 오늘 아샤드를 죽일 생각이다. '사냥 사고'를 가장해서.

"출발!"

나팔 소리와 함께 수십 마리의 말이 숲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근위대장으로서 황제의 뒤를 따랐다. 내 임무는 황제 호위였지만, 내 진짜 목적은 그의 목을 노리는 것이었다.

숲은 깊고 어두웠다.
말발굽 소리가 젖은 흙바닥을 때렸다.

"조용하군."

앞서 달리던 카이리스가 말을 멈췄다.
주변에는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짐승들이 본능적으로 포식자의 기운을 감지하고 숨은 것이다.

"나와, 렌."

카이리스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나는 나무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아샤드는 어디 있지?"

"서쪽 구역으로 갔습니다. 멧돼지 흔적을 쫓아서."

"거짓말."

카이리스가 말에서 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장총을 들고 있었다. 총구는 짐승이 아니라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녀석, 냄새를 맡고 왔어. 네 피 냄새."

"......!"

"내가 너한테 수리만 해준 줄 알았어?"

카이리스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네 몸에 미끼를 심었지. 마족을 미치게 만드는 페로몬. 지금쯤 아샤드는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널 찾아 헤매고 있을 거야."

그랬다.
아침부터 몸이 뜨겁고 감각이 예민해진 이유가 있었다. 단순한 컨디션 난조가 아니라, 약물 때문이었다.

"그가 널 찾아오면, 이 총으로 쏴 죽일 거야. '폭주한 마족 왕이 근위대장을 덮치려 해서 사살했다'고 하면 완벽한 시나리오지."

"비겁하군요."

"전략이야."

바스락.

그때,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속도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살기. 그리고 익숙한 마력.

"왔군."

카이리스가 총을 겨눴다. 숲의 어둠 속을 향해.
그곳에서 튀어나온 것은 멧돼지가 아니었다.
은발의 짐승.
아샤드 르페르였다.

하지만 그의 상태가 이상했다.
금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거품이 맺혀 있었다.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그는 오로지 나만을 보고 달려들었다.

"아샤드!"

내가 소리쳤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페로몬. 황제의 말대로 그는 본능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잘 가라, 마왕."

카이리스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이 숲을 울렸다.
탄환은 정확히 아샤드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갔다.
피할 수 없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는.

그 순간, 내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주박의 명령도, 내 이성도 아니었다.
이벨린이었다.

[안 돼!]

내 몸이 총알의 궤적으로 뛰어들었다.

푸욱.

타는 듯한 고통이 어깨를 관통했다.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렌?"

총성에 놀라 멈칫한 아샤드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나를 보고 얼어붙었다.
내 어깨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이런."

카이리스가 혀를 찼다.

"방패 노릇은 제대로 하네.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가 다시 장전했다.

"그럼 둘 다 죽어."

그가 두 번째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아샤드가 포효했다.

"카이리스!!!"

검은 마력이 폭발했다.
숲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나갔다. 카이리스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 날뛰며 그를 떨어뜨렸다.

아샤드는 황제를 공격하는 대신, 나에게로 달려왔다.
그가 나를 끌어안고 숲의 더 깊은 곳,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아샤드......!"

추락하는 와중에도 그는 나를 감싸 안았다.
등 뒤로 바람이 윙윙거렸다.
우리는 검은 숲의 심연으로 떨어졌다.


19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00자
  • 장면 수: 2개 (사냥 대회 시작, 숲속의 함정과 추락)
  • 메인 플롯: 황제의 함정(페로몬+저격)에 빠짐. 렌이 아샤드 대신 총을 맞음.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이 아샤드를 구하기 위해 렌의 몸을 움직임 (사랑의 증명).
  • 클리프행어: [추락] 절벽 아래로 떨어진 두 사람. 생사 불명.

20화: 심장의 무게

절벽 아래는 동굴이었다.
오래전 마수들이 살았던 둥지 같은 곳.
차가운 습기와 이끼 냄새가 났다.

"으윽......"

눈을 뜨자마자 고통이 밀려왔다. 총에 맞은 어깨가 불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건, 내 몸 안의 상태였다.

총알에 맞은 충격으로 마력 회로가 다시 불안정해졌다.
게다가 황제가 심어둔 페로몬 때문에, 내 몸은 아샤드의 마력에 미친 듯이 반응하고 있었다.

"정신이 드나?"

아샤드가 다가왔다. 그의 옷은 찢어지고 흙투성이였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는 내 어깨를 지혈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관통상이야. 뼈는 안 다쳤지만 출혈이 심해."

"당신은...... 괜찮습니까?"

"내 걱정 할 때야? 네 몸이 지금 시한폭탄인데."

그의 말이 맞았다.
내 몸은 지금 임계점을 넘어가고 있었다.
피부 아래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폭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렌. 도망쳐.]

이벨린이 힘없이 속삭였다.

[이번엔 진짜야. 못 막아.]

"아샤드. 가세요."

나는 그를 밀어냈다.

"터집니다. 이번엔 당신 마력으로도 못 막아요."

"안 가."

"제발! 같이 죽고 싶어요?"

"공범이라며."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같이 죽든가, 같이 살든가. 둘 중 하나야."

"이 바보 같은......!"

우우웅-.

공명이 시작됐다.
내 심장이 붉게 타올랐다. 고통에 눈앞이 하얘졌다.
이번엔 진짜다. 내 몸이 원자 단위로 분해되려는 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아샤드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이 하나 있어."

그가 자신의 셔츠를 찢었다.
탄탄한 가슴 근육 위, 심장이 뛰는 곳에 검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족의 생명. 마석(魔石).

"내 심장을 너한테 줄게."

"......뭐?"

"마석은 방대한 마력을 담는 그릇이야. 네 몸의 폭주하는 에너지를 내 마석으로 옮기면, 터지는 건 막을 수 있어."

"그럼 당신은요! 마석이 없으면 당신은......!"

마족에게 마석은 심장이나 다름없다. 그걸 꺼낸다는 건 죽음을 의미하거나, 평생 불구가 된다는 뜻이다.

"안 죽어. 난 마왕이니까."

그가 웃었다. 창백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오만한 미소.

"대신, 평생 날 책임져야 할 거야. 내가 힘없는 남자가 돼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나는 소리쳤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페로몬과 고통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샤드가 손톱을 세워 자신의 가슴을 갈랐다.

푸욱.

붉은 피가 솟구쳤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조차 삼키며, 가슴 속에서 붉게 빛나는 보석을 꺼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맥동하는 붉은 보석.
그의 생명 그 자체.

"받아, 렌."

그가 피 묻은 손으로 마석을 내 가슴 위에 올렸다.

"이제, 우린 진짜 하나야."

마석이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생명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내 몸의 폭주하던 에너지가 거짓말처럼 마석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신, 아샤드는 힘없이 쓰러졌다.

"아샤드......!"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늘 뜨거웠던 그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자지 마요. 제발, 눈 좀 떠 봐요......!"

동굴 밖에서는 황제의 추격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개 짖는 소리, 말발굽 소리.
그리고 빗소리.

나는 아샤드를 품에 안고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린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남자를 살린다.
설령 내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 보여주자.]

이벨린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지독한 악녀인지.]

나는 바닥에 떨어진 아샤드의 검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칼자루가 손에 감겼다.
이제 도망은 없다.
사냥은 끝났다. 이제 전쟁이다.


20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5,200자 (누적 40,000자 돌파)
  • 장면 수: 1개 (동굴 안에서의 희생과 각성)
  • 메인 플롯: 아샤드가 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마석(심장)을 렌에게 이식함. 렌이 완전히 각성하여 황제와의 전면전을 결심.
  • 서브플롯: [서브 C] 쌍방 구원의 정점 (아샤드→렌). 로맨스 서사의 클라이맥스.
  • 정보 공개: 마석 이식은 가능하지만 제공자는 치명적인 상태가 됨. 렌은 이제 아샤드의 마력을 무한정 쓸 수 있는 상태가 됨.
  • 클리프행어: [S급] 각성 - 아샤드가 쓰러지고, 렌이 검을 들며 황제의 추격대와 맞서는 장면.

Batch 4 완료 요약

진행 상황 트래커 업데이트

  • 메인 플롯 진행률: 66% (2막 종료, 3막 진입)
  • 활성 서브플롯:
    • [서브 A] 이벨린과 렌의 완전한 동맹 결성.
    • [서브 B] 황제와의 전면전 시작.
    • [서브 C] 아샤드의 희생으로 인한 감정 폭발.
  • 미공개 정보: 10년 전 이벨린이 요양지에서 겪었던 일의 구체적 진실. 황제의 '신 죽이기' 다음 단계.
  • 다음 배치 예고: 21화부터는 3막(전결)입니다. 각성한 렌의 무력 시위, 아샤드를 살리기 위한 사투, 그리고 황제와의 최종 결전이 시작됩니다.

일관성 검증

  • 캐릭터 음성: 렌의 독백이 절망→분노로 자연스럽게 전환됨. 아샤드의 직진남 캐릭터 유지.
  • 세계관: 마석 설정과 인체 병기 설정이 충돌 없이 결합됨.
  • : 피폐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절정에 달함. (리디북스 스타일 적합)
ep22 (418 tokens)

Batch 5: 21화~25화


21화: 마녀의 탄생

동굴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질척한 진흙을 밟는 군화 소리.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
황제의 사냥개들이 냄새를 맡고 온 것이다.

"여기다! 핏자국이 있어!"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살아있을까?"
"시체라도 찾아야 해. 폐하의 엄명이다. 머리를 가져오는 자에게 작위를 내리신다고 했다!"

탐욕에 찬 목소리들이 동굴 입구에서 울렸다.
나는 쓰러진 아샤드를 내 코트—피와 흙으로 엉망이 된—로 덮어주었다.
그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가슴이 뜨거웠다.
아샤드가 내어준 마석(심장)이 내 흉곽 안에서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그의 생명이 내 혈관을 타고 흐른다.
그건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분노였고, 슬픔이었고, 살의였다.

[렌. 준비됐어?]

이벨린이 나직하게 물었다.

'그래.'

나는 바닥에 떨어진 아샤드의 검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마검(魔劍). 평소의 나라면 들기조차 버거웠을 무게였지만, 지금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저기 있다! 저기 숨어 있어!"

횃불을 든 기사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동굴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눈은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여자다! 마족 왕은 쓰러져 있어!"
"하하! 오늘 횡재했군. 여자는 생포하고 남자는 목을 베어라!"

ep23 (166 tokens)

Batch 5: 21화~23화


21화: 마녀의 탄생

(앞부분에서 계속)

"여자다! 마족 왕은 쓰러져 있어!"
"하하! 오늘 횡재했군. 여자는 생포하고 남자는 목을 베어라!"

그들의 탐욕스러운 외침이 동굴 벽을 타고 울렸다.
나는 쓰러진 아샤드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차가웠다. 시체처럼.
하지만 내 가슴속에 있는 그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기다려요. 금방 청소하고 올 테니까."

나는 검을 고쳐 쥐고 일어섰다.
검은 마력이 내 몸을 감

ep24 (529 tokens)

Batch 5: 21화~25화


21화: 마녀의 탄생 (계속)

"여자는 생포하고 남자는 목을 베어라!"

그들의 탐욕스러운 외침이 동굴 벽을 타고 울렸다.
나는 쓰러진 아샤드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차가웠다. 시체처럼.
하지만 내 가슴속에 있는 그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기다려요. 금방 청소하고 올 테니까."

나는 검을 고쳐 쥐고 일어섰다.
검은 마력이 내 몸을 감쌌다. 아샤드의 것이었다.
마치 그가 등 뒤에서 나를 안아주는 것처럼, 서늘하고 익숙한 기운이 전신을 보호했다.

"저깄다! 쏴라!"

선두에 선 기사가 석궁을 발사했다.
화살이 빗줄기를 뚫고 날아왔다.
피해야 했다. 예전의 나라면.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칭!

내가 검을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허공에 검은 장막이 펼쳐지며 화살을 튕겨냈다.
마법이다. 내가 마법을 썼다.
아니, 아샤드의 심장이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 것이다.

"뭐, 뭐야? 방금 그건!"
"마법사냐? 정보에는 그냥 검사라고 했는데!"

당황한 기사들이 주춤거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발을 구르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크윽!"

내 검이 선두의 기사를 베었다.
갑옷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뼈가 잘리는 묵직한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예리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내 얼굴을 적셨다.

[아하하! 더! 더 죽여!]

이벨린이 환호했다.
그녀의 광기가 내 살의와 공명했다.
마석이 붉게 빛날수록 내 안의 도덕적 브레이크가 파괴되는 기분이었다.

"괴, 괴물이다!"
"포위해! 다구리를 쳐서라도 잡으란 말이다!"

십여 명의 기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춤을 추듯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검을 휘두를 때

ep25 (1,444 tokens)

Batch 5: 21화~25화


21화: 마녀의 탄생 (계속)

"포위해! 다구리를 쳐서라도 잡으란 말이다!"

십여 명의 기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는 춤을 추듯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은 궤적이 허공에 남았다.
서걱. 퍽. 으악!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아하하! 더! 더 죽여!]

이벨린의 광기가 내 이성을 갉아먹었다.
마석이 펌프질할 때마다 전신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지치지 않았다. 다치지도 않았다.
적의 칼날이 내 몸에 닿기도 전에 마력의 장벽이 막아냈고, 나는 그저 손목을 까딱이는 것만으로 그들의 갑옷을 두부처럼 썰어버렸다.

"괴, 괴물이다......"
"도망쳐! 저건 인간이 아니야!"

살아남은 몇몇이 뒷걸음질 쳤다. 공포에 질린 눈빛.
그래, 너희 눈에는 내가 괴물로 보이겠지.
하지만 내 눈에는 너희가 시체로 보인다.

"어딜 가."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발로 차 올렸다.
단검은 총알처럼 날아가 도망치는 기사의 뒷덜미에 박혔다.

"내 남자 건드린 대가는 치러야지."

마지막 한 놈까지 쓰러뜨리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동굴 안은 피와 시체로 가득 찼다.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역겹지 않았다. 오히려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는 피 묻은 검을 털어내고 아샤드에게 돌아갔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가슴 위에 손을 대자, 내 심장박동과 공명하는 미세한 울림이 느껴졌다.

"살아있어."

안도감이 밀려오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았다. 마석의 힘이 빠져나가자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잘했어, 렌. 아주 훌륭한 청소였어.]

이벨린이 만족스러운 듯 속삭였다.

[이제 어쩔 거야? 여기서 살림이라도 차릴 거야?]

"아니. 더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

나는 아샤드를 업었다.
그의 몸은 무거웠지만, 마석의 힘 덕분에 견딜 만했다.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소리가 우리의 흔적을 지워줄 것이다.

"조금만 참아요. 당신이 그랬잖아. 내 허락 없인 못 죽는다고."

나는 빗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사냥개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우리는 사라져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처절한 도피가 시작되었다.


21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00자 (누적)
  • 장면 수: 1개 (동굴 전투 및 탈출)
  • 메인 플롯: 아샤드의 마석을 이식받은 렌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추격대를 섬멸. 아샤드를 데리고 도주 시작.
  • 서브플롯: [서브 A] 이벨린이 살육을 즐기며 렌의 잔혹성을 부추김.
  • 클리프행어: [도주] 의식 잃은 아샤드를 업고 빗속으로 사라지는 렌.

22화: 심장 소리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숲 깊은 곳에 있는 낡은 사냥꾼 오두막이었다.
지붕은 반쯤 무너져 있었지만, 비를 피하기엔 충분했다.
나는 아샤드를 낡은 침상 위에 눕히고 젖은 옷을 벗겼다.

그의 가슴 중앙, 마석을 꺼낸 자리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피는 멈춰 있었다. 마족 특유의 재생력 덕분인지, 아니면 내 안에 있는 마석이 그를 지키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추워......"

아샤드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석을 잃은 마족은 체온 유지가 안 되는 건가?
나는 벽난로에 불을 피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젠장."

나는 내 겉옷을 벗고 셔츠만 입은 채 침상 위로 올라갔다.
그의 옆에 누워 그를 껴안았다. 내 체온이라도 나눠줘야 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안에 있는 '그의 심장'의 온기를 돌려줘야 했다.

"아샤드, 들려요?"

나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내 가슴을 밀착시켰다.
쿵, 쿵, 쿵.
내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 소리가 그의 몸으로 전달되기를 바랐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내 몸안에 다른 남자의 심장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심장이 뛸 때마다, 그의 감정이 내게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를 향한 걱정, 분노, 그리고 지독한 사랑.

"......렌?"

한참이 지났을까.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금안이 희미하게 뜨였다. 초점은 흐렸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나를 찾았다.

"여기 있어요."

"살아...... 있군."

그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신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내 생사부터 확인하다니. 바보 같은 남자.

"당신 덕분에요. 그리고 당신 심장 덕분에."

"다행이야...... 안 터져서."

그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손이 내 가슴 위로 올라왔다. 심장이 뛰는 곳을 확인하듯.

"따뜻하군. 내 심장이...... 네 안에서 뛰는 게."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좀 자요. 마력도 없으면서."

"마력이 없으니까...... 춥군. 좀 더 안아줘."

그가 어린아이처럼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천하의 마왕이 내 품에서 떨고 있다.
이 남자가 나를 살리기 위해 포기한 것이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어머, 얘네 봐라

ep26 (489 tokens)

제26화

Batch 6 (Final): 26화~30화


26화: 왕의 수업

오두막의 밤은 길었다.
아샤드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생명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내가 그를 끌어안을 때마다 다시 밀물처럼 차오르는 기이한 순환이 반복되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의 열이 내렸다.
창밖으로 푸스름한 빛이 스며들 때, 아샤드가 눈을 떴다.
금안(金眼)의 빛이 예전보다 흐릿해져 있었다. 마석을 잃은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살아있네."
"당신 덕분에요."

나는 물을 적신 천으로 그의 입술을 축여주었다.
그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려다 신음하며 도로 누웠다. 천하의 마왕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꼴이라니.

"젠장. 힘이 안 들어가."
"당연하죠. 심장을 뽑아냈는데."
"그래도 입은 살았어."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악력이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가슴이 아렸다.

"렌. 시간이 없어."
"알아요. 황제가 추격대를 더 보낼 겁니다."
"아니. 황제는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절벽 아래는 마수들의 둥지니까."

아샤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놈은 지금쯤 승전보를 기다리며 축배를 들고 있겠지. 그때가 기회야."
"......지금 몸으로요? 걷지도 못하면서."
"나는 못 해. 네가 해야지."

그가 내 가슴, 정확히는 그의 심장이 뛰고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네 안에는 지금 마계 최강의 마석이 들어있어. 넌 걸어 다니는 핵무기야."
"쓰는 법을 모르는데요."
"가르쳐 줄게. 속성으로."

그날부터 기묘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스승은 침대에 누워 입으로만 지시하는 폐

ep27 (612 tokens)

제26화 (완료)

Batch 6 (Final): 26화~30화


26화: 왕의 수업

오두막의 밤은 길었다.
아샤드는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생명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내가 그를 끌어안을 때마다 다시 밀물처럼 차오르는 기이한 순환이 반복되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의 열이 내렸다.
창밖으로 푸스름한 빛이 스며들 때, 아샤드가 눈을 떴다.
금안(金眼)의 빛이 예전보다 흐릿해져 있었다. 마석을 잃은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살아있네."
"당신 덕분에요."

나는 물을 적신 천으로 그의 입술을 축여주었다.
그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려다 신음하며 도로 누웠다. 천하의 마왕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꼴이라니.

"젠장. 힘이 안 들어가."
"당연하죠. 심장을 뽑아냈는데."
"그래도 입은 살았어."

그가 피식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악력이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가슴이 아렸다.

"렌. 시간이 없어."
"알아요. 황제가 추격대를 더 보낼 겁니다."
"아니. 황제는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절벽 아래는 마수들의 둥지니까."

아샤드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놈은 지금쯤 승전보를 기다리며 축배를 들고 있겠지. 그때가 기회야."
"......지금 몸으로요? 걷지도 못하면서."
"나는 못 해. 네가 해야지."

그가 내 가슴, 정확히는 그의 심장이 뛰고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네 안에는 지금 마계 최강의 마석이 들어있어. 넌 걸어 다니는 핵무기야."
"쓰는 법을 모르는데요."
"가르쳐 줄게. 속성으로."

그날부터 기묘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스승은 침대에 누워 입으로만 지시하고, 제자는 숲속에서 나무를 베어 넘기는 살벌한 과외.

"집중해. 마력은 물이 아니야. 불이야."

아샤드의 목소리가 오두막 밖까지 울렸다.

"흐르게 하지 말고, 태워. 네 혈관이 도화선이라고 상상해."

"말이 쉽지!"

콰앙!

내가 손을 뻗자 검은 화염이 솟구쳤다. 아름드리나무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위력은 좋은데 조절이 안 된다. 이대로 가다간 숲을 다

ep28 (353 tokens)

제27화 (완료)

Batch 6 (Final): 27화~30화


27화: 마지막 월세

수업은 혹독했다.
아샤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대신, 내 감각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그는 자신의 마석과 내 영혼이 공명하는 주파수를 찾아내,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숲을 태울 수 있도록 조율했다.

사흘째 되는 밤.
아샤드가 거친 숨을 내쉬며 침대에 쓰러졌다. 그의 안색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게... 한계야."
"충분해요. 이 정도면 황궁을 날려버릴 수 있어요."

나는 땀에 젖은 그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날려버리는 게 목적이 아니야. 살아남는 게 목적이지."

그가 잠들자, 나는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내일이면 우리는 제국으로 돌아간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

[렌.]

오랜만에 이벨린이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분했다. 늘 깔깔거리던 광기도, 독기도 빠진 건조한 목소리.

'왜. 또 배고파?'

[아니. 배불러. 네가 아샤드의 마력을 너무 많이 써서, 나까지 과식한 기분이야.]

그녀가 킥

ep29 (202 tokens)

제27화 (완료)

Batch 6 (Final): 27화~30화


27화: 마지막 월세

(앞부분에서 계속)

[아니. 배불러. 네가 아샤드의 마력을 너무 많이 써서, 나까지 과식한 기분이야.]

그녀가 킥킥거렸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평소처럼 쨍하지 않고, 안개처럼 흐릿했다.

[렌. 그거 알아? 이 몸은 이제 인간의 것이 아니야. 마족의 심장이 들어왔잖아. 인간의 영혼은 여기서 오래 못 버텨.]

'무슨 소리야?'

[방 빼야 할 시간이라고. 이번엔 내가.]

그녀가 씁쓸하게 말했다.

**[어차피 나는 20년 전에 죽은 망령이야.

ep30 (121 tokens)

제28화 (완료)

Batch 6 (Final): 27화~30화


27화: 마지막 월세 (마무리)

(앞부분에서 계속)

[어차피 나는 20년 전에 죽은 망령이야. 네가 들어와서 이 몸을 잘 썼잖아. 청소도 하고, 수리도 하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 등기 이전할 때가 됐어.

ep4 (1,874 tokens)

Batch 1: 4화~8화


4화: 깨진 그릇

방을 빼라니.
이게 무슨, 자다가 벼락 맞을 소리인가.

거울 속의 여자는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었다. 내 얼굴이지만 내 것이 아닌 표정. 20년 전 죽었다던 귀족 영애, 이벨린의 미소였다.

"뭐가 그렇게 놀라?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해서 20년이나 살았으면, 주인 왔을 때 비켜주는 게 예의 아니야?"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명랑했지만, 동시에 머리통을 쪼개버릴 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마치 뇌 속에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쑤셔 넣고 휘젓는 것 같았다.

"크윽……."

나는 비틀거리며 거울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은 거울면이 차가웠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똑바로 서서,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 맞다. 너 내 목소리 처음 듣지? 그동안은 내가 너무 깊이 잠들어 있어서."

그녀가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일단 웃어. 근위대장이 미친년처럼 보이면 곤란하잖아?"

미친년은 너겠지.
반박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 쇳소리만 새어 나왔다.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연회장의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주변의 소음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웅웅거렸다.
귀족들의 수군거림, 바닥에 나뒹구는 자객들의 시체, 피 비린내.
모든 감각이 뒤섞여 멀미를 유발했다.

"괜찮나?"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뜨거운 열기. 아까 테라스에서 느꼈던 그 익숙하고 위험한 체온.
아샤드 르페르였다.

그가 닿는 순간, 머릿속을 울리던 이벨린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안 맞아서 지직거리던 소음이 일시에 음소거된 것처럼.

"……!"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샤드의 금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걱정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실험 대상을 관찰하는 학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방금, 누구였지?"

그가 물었다.

"네 안에서 떠들던 그 목소리 말이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들린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이벨린의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만 울렸다.
하지만 이 남자는 영혼의 냄새를 맡는 괴물이다. 내 영혼의 파장이 요동치는 걸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충격 때문에 잠시 현기증이 났을 뿐입니다."

나는 뻣뻣하게 대꾸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집요하게 내 얼굴에 꽂혀 있었다.

"거짓말."

그가 입매를 비틀었다.

"방금 네 눈빛,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 마치……."

"근위대장!"

그때, 황실 시종장이 헐레벌떡 달려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당장, 접견실로."

시종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자객이 침입했는데 근위대장이 마족과 노닥거리고 있으니 속이 터질 만도 하겠지.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미친 황제를 상대하는 게 낫다. 속을 알 수 없는 마족보다는.

"업무 복귀하죠."

나는 아샤드에게 짧게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도망치는 뒷모습도 꽤 볼만하군."

그의 낮은 중얼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시종장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기다려, 렌.'

다시 환청이 들렸다. 이번엔 목소리가 작았다.
아까처럼 또렷하지 않고, 멀리서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

'우린 아직 할 얘기가 많아.'

닥쳐. 제발 좀 닥쳐.


황제 전용 접견실은 서늘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통유리 너머로 제국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카이리스는 창가에 서서 밤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암살 위협을 겪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아니, 평온하다 못해 지루해 보였다.

"치우는 데 3분이나 걸리더군."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예전의 너였다면 1분 안에 끝냈을 텐데. 양지로 나오니 칼날이 무뎌졌나?"
"드레스가 불편해서요."

나는 핑계를 댔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은 암살자에게 최악의 구속구니까.

카이리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붉은 액체가 조명을 받아 검붉게 빛났다. 마치 피처럼.

"가까이 와."

명령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다가갔다. 그와의 거리가 다섯 걸음, 세 걸음, 한 걸음으로 좁혀졌다.
주박(呪縛)이 새겨진 심장이 반응했다. 주인의 곁에 있다는 긴장감과,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동시에 짓눌러왔다.

"무릎 꿇어."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내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얼굴이 엉망이네."

그가 혀를 찼다.

"식은땀에, 동공은 풀려 있고,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하고."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거짓말."

오늘따라 거짓말이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듣는다. 다들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깨어났지?"

카이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네?"
"네 안에 있는 그거 말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내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이벨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빙의자라는 것도,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이벨린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지금 깨어났다는 것까지.

"어떻게……."

"내가 깨웠으니까."

카이리스가 싱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천진난만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 봐, 렌. 내가 왜 20년이나 지난 시체를 보존해 뒀겠어? 단순히 네 영혼을 담을 그릇이 필요해서? 천만에. 널 담을 그릇이라면 튼튼한 죄수나 노예도 많아."

그가 와인잔을 기울여 바닥에 조금 쏟았다.
붉은 얼룩이 카펫 위로 번져나갔다.

"이벨린은 특별해. 그녀의 가문, 그녀의 피, 그리고 그녀가 가진 '원한'까지. 그 모든 게 내가 그리려는 그림의 재료야."
"……재료?"
"너는 칼이고, 이벨린은 칼집이야. 지금까지는 칼집이 잠들어 있어서 칼을 마음대로 휘둘렀지만, 이제 칼집이 깨어났으니 칼이 무뎌지겠지."

그는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말을 뱉었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쿵.
심장 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까 자객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노크 소리였다.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뇌를 강타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ep5 (142 tokens)

Batch 1: 4화~8화


4화: 깨진 그릇

(앞부분 요약: 자객 난입 후, 렌은 거울 속 이벨린의 환영을 보며 괴로워한다. 아샤드가 다가오자 이벨린의 목소리가 끊기지만, 황제의 호출로 렌은 자리를 뜬다. 접견실에서 황제 카이리스는 자신이 이벨린을 깨웠으며, 그녀는 '재료'라고 말한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쿵.
심장 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까

ep6 (1,840 tokens)

Batch 1: 4화~8화


4화: 깨진 그릇

[앞부분 요약: 거울 속에서 깨어난 이벨린의 영혼이 렌에게 "월세를 내라"며 말을 건다. 렌은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한다.]

"아, 맞다. 너 내 목소리 처음 듣지?"

거울 속의 여자가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일단 웃어. 근위대장이 미친년처럼 보이면 곤란하잖아?"

미친년은 너겠지.
반박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서 쇳소리만 새어 나왔다.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연회장의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명(耳鳴)이 삐 - 하고 고막을 찔렀다.

주변의 소음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웅웅거렸다.
귀족들의 비명, 바닥에 나뒹구는 자객들의 시체, 비릿한 피 냄새.
모든 감각이 뒤섞여 멀미를 유발했다.

"괜찮나?"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뜨거운 열기. 아까 테라스에서 느꼈던 그 익숙하고 위험한 체온.
아샤드 르페르였다.

그가 닿는 순간, 머릿속을 울리던 이벨린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안 맞아서 지직거리던 소음이 일시에 음소거된 것처럼.
대신 심장 깊은 곳에서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것도 내 감정이 아니었다.

"……!"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샤드의 금안(金眼)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걱정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실험 대상을 관찰하는 학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방금, 누구였지?"

그가 물었다.

"네 안에서 떠들던 그 목소리 말이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들린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이벨린의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만 울렸다.
하지만 이 남자는 영혼의 냄새를 맡는 괴물이다. 내 영혼의 파장이 요동치는 걸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충격 때문에 잠시 현기증이 났을 뿐입니다."

나는 뻣뻣하게 대꾸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집요하게 내 얼굴에 꽂혀 있었다.

"거짓말."

그가 입매를 비틀었다.

"방금 네 눈빛,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 마치……."

"근위대장!"

그때, 황실 시종장이 헐레벌떡 달려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당장, 접견실로."

시종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자객이 침입했는데 근위대장이 적국의 왕과 노닥거리고 있으니 속이 터질 만도 하겠지.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미친 황제를 상대하는 게 낫다. 속을 알 수 없는 마족보다는.

"업무 복귀하죠."

나는 아샤드에게 짧게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도망치는 뒷모습도 꽤 볼만하군."

그의 낮은 중얼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시종장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기다려, 렌.'

다시 환청이 들렸다. 이번엔 목소리가 작았다. 아까처럼 또렷하지 않고, 멀리서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 하지만 내용은 섬뜩했다.

'우린 아직 할 얘기가 많아.'

닥쳐. 제발 좀 닥쳐.


황제 전용 접견실은 서늘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통유리 너머로 제국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황제 카이리스는 창가에 서서 밤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암살 위협을 겪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아니, 평온하다 못해 지루해 보였다.

"치우는 데 3분이나 걸리더군."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예전의 너였다면 1분 안에 끝냈을 텐데. 양지로 나오니 칼날이 무뎌졌나?"
"드레스가 불편해서요."

나는 핑계를 댔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은 암살자에게 최악의 구속구니까.

카이리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붉은 액체가 조명을 받아 검붉게 빛났다. 마치 피처럼.

"가까이 와."

명령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다가갔다. 그와의 거리가 다섯 걸음, 세 걸음, 한 걸음으로 좁혀졌다.
주박(呪縛)이 새겨진 심장이 반응했다. 주인의 곁에 있다는 긴장감과,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동시에 짓눌러왔다.

"무릎 꿇어."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내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가락이었다.

"얼굴이 엉망이네."

그가 혀를 찼다.

"식은땀에, 동공은 풀려 있고,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하고."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거짓말."

오늘따라 거짓말이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듣는다. 다들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깨어났지?"

카이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네?"
"네 안에 있는 그거 말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내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이벨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빙의자라는 것도,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이벨린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녀가 지금 깨어났다는 것까지.

"어떻게……."

"내가 깨웠으니까."

카이리스가 싱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 천진난만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생각해 봐, 렌. 내가 왜 20년이나 지난 시체를 보존해 뒀겠어? 단순히 네 영혼을 담을 그릇이 필요해서? 천만에. 널 담을 그릇이라면 튼튼한 죄수나 노예도 많아."

그가 와인잔을 기울여 바닥에 조금 쏟았다.
붉은 얼룩이 카펫 위로 번져나갔다.

"이벨린은 특별해. 그녀의 가문, 그녀의 피, 그리고 그녀가 가진 '원한'까지. 그 모든 게 내가 그리려는 그림의 재료야."

"……재료?"

"너는 칼이고, 이벨린은 칼집이야. 지금까지는 칼집이 잠들어 있어서 칼을 마음대로 휘둘렀지만, 이제 칼집이 깨어났으니 칼이 무뎌지겠지."

그는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잔인한 말을 뱉었다.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쿵.
심장 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까 자객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노크 소리였다.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뇌를 강타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크윽……!"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위장이 뒤틀리고,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액체가 넘어왔다.

"쿨럭!"

바닥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와인이 아니었다. 내 피였다. 아니, 이벨린의 피였다

ep7 (544 tokens)

Batch 1: 4화~8화


4화: 깨진 그릇

(앞부분 생략: 3화 엔딩 직후, 거울 속 이벨린의 "방 빼" 선언. 아샤드와의 조우 후 황제에게 불려간 렌.)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쿵.
심장 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까 자객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노크 소리였다.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뇌를 강타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파열음.

"크윽……!"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위장이 뒤틀리고,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액체가 넘어왔다.

"쿨럭!"

바닥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와인이 아니었다. 내 피였다. 아니, 이벨린의 피였다.
황제가 쏟았던 와인 자국 위에, 검붉은 핏방울이 겹쳐지며 기괴한 마블링을 만들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이건 주박(呪縛)의 고통이 아니었다. 몸이 영혼을 거부하는, 말 그대로 '존재의 부조화'였다.

"저런."

머리 위에서 카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당황? 아니.
그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벌써 망가지면 곤란한데.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그는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구두 끝으로 내 손끝을 툭툭 건드렸다. 마치 길가에 죽어가는 새를 확인하듯이.

"버텨 봐, 렌.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살아남는 거."

눈앞이 깜깜해졌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나는 보았다.
황제의 등 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또 하나의 그림자를.

"폐하. 물건을 너무 험하게 다루시는군요."

낮고 위험한 목소리.
아샤드 르페르였다.

"내 근위대장이야. 부수든 고치든 내 마음이지."
"글쎄요. 조약에 따르면, '양국 간의 우

ep8 (3,749 tokens)

Batch 1: 4화~8화


4화: 깨진 그릇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렌."

쿵.
심장 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까 자객들과 싸울 때 들었던 그 노크 소리였다.

[들었지? 쟤가 범인이라니까.]

이벨린의 목소리가 뇌를 강타했다.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파열음.

"크윽……!"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위장이 뒤틀리고,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액체가 넘어왔다.

"쿨럭!"

바닥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와인이 아니었다. 내 피였다. 아니, 이벨린의 피였다.
황제가 쏟았던 와인 자국 위에, 검붉은 핏방울이 겹쳐지며 기괴한 마블링을 만들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이건 주박(呪縛)의 고통이 아니었다. 몸이 영혼을 거부하는, 말 그대로 '존재의 부조화'였다.

"저런."

머리 위에서 카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당황? 아니.
그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벌써 망가지면 곤란한데.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그는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구두 끝으로 내 손끝을 툭툭 건드렸다. 마치 길가에 죽어가는 새를 확인하듯이.

"버텨 봐, 렌. 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 살아남는 거."

눈앞이 깜깜해졌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나는 보았다.
접견실 문이 열리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또 하나의 그림자를.

"폐하. 물건을 너무 험하게 다루시는군요."

낮고 위험한 목소리.
아샤드 르페르였다.

"내 근위대장이야. 부수든 고치든 내 마음이지."
"글쎄요. 조약에 따르면, '양국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사절단은 황실 구성원의 안위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되어 있던데."

아샤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황제를 지나쳐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바닥에 닿아 있던 내 몸이, 순식간에 그의 단단한 팔 안으로 들어올려졌다.

"이건 보호입니까, 약탈입니까?"
"응급처치지."

아샤드의 금안이 싸늘하게 황제를 쏘아보았다.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모순적인 열기가 전해졌다.

"숨 쉬어, 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순간, 끈질기게 울리던 이벨린의 비명소리가 뚝 끊겼다.
마치 그가 내 영혼의 피난처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정신을 잃었다.


4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200자 (누적)
  • 장면 수: 2개 (아샤드와의 조우, 황제와의 대면 및 붕괴)
  • 메인 플롯: 황제의 계략(이벨린을 깨움) 확인, 신체 붕괴 시작.
  • 서브플롯: [서브 B] 황제의 잔혹성 부각, [서브 C] 아샤드의 개입.
  • 정보 공개: 황제가 이벨린을 깨운 흑막임. 아샤드의 마력은 이벨린의 폭주를 잠재우는 효과가 있음.
  • 클리프행어: 위기 - 황제 앞에서 쓰러진 렌을 아샤드가 구해냄.

5화: 구원, 혹은 발정

눈을 떴을 때는 낯선 천장이었다.
황제의 침실도, 내 관사도 아니었다.
방 전체에 은은한 향 냄새가 감돌았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그러나 어딘가 최음적인 향기.

"일어났나?"

창가에 아샤드가 앉아 있었다.
그는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푼 편안한 차림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달빛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지만, 내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여긴……."
"사절단 숙소. 내 방이야."

나는 벌떡 일어나려다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미친 거 아냐? 제국 근위대장이 적국 왕의 침실에서 눈을 떠? 이건 스캔들이 아니라 반역죄 감이다.

"진정해. 황제에겐 치료 중이라고 전해뒀으니."
"치료라뇨. 저는……."

말을 하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아, 피를 토했었지.
그때 그가 침대로 다가왔다. 물잔을 내밀 줄 알았는데, 그가 내민 건 자신의 손목이었다.

"마셔."
"……예?"
"네 몸이 원하는 거야. 물이 아니라 마력."

그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탄탄한 팔뚝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이벨린의 몸은 20년 된 시체나 다름없어. 황제의 흑마법으로 억지로 붙여둔 거지. 그런데 영혼이 두 개나 들어가서 싸워대니 과부하가 걸린 거야."

그는 마치 기계를 진단하듯 건조하게 말했다.

"내 마력을 주입하면 당분간은 조용할 거야. 그 시끄러운 영혼도."

그의 말이 맞았다. 머릿속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이벨린의 목소리도, 깨질 듯한 두통도 사라졌다.
하지만 남의 피, 그것도 마족의 마력을 마신다는 건…….

"싫다면 억지로라도 먹일 생각이야. 입으로든, 다른 곳으로든."

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농담 같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의 손목을 잡았다. 망설임은 짧았다. 살기 위해서라면 흙탕물이라도 마셔온 인생이다.

나는 그의 손목에 입술을 대고, 송곳니로 살짝 피부를 긁었다.
비릿하고 달콤한, 묘한 맛이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으음……."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단순한 섭취가 아니었다. 쾌락이었다.
마력이 식도를 타고 흐를 때마다 전신의 신경이 곤두섰다. 죽어가던 세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깨어나는 기분.

하지만 문제는 내 의지가 아니었다.
이 몸, 이벨린의 육체가 반응하고 있었다.
내 손이 제멋대로 그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내 허벅지가 비비 꼬였다. 뜨거운 열기가 아랫배로 몰렸다.

'미친, 그만해. 떨어져.'

머리로는 명령하는데, 몸은 그에게 더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탐하듯이, 아니,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연인을 갈구하듯이.

"하아……."

아샤드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가 내 뒷목을 감싸 쥐었다. 거칠면서도 조심스러운 손길.

"역시."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이 몸은 나를 기억해."

소름이 돋았다.
이벨린은 그를 알고 있었나? 20년 전에?
그때는 전쟁 중이었을 텐데. 귀족 영애와 마족 왕이 어떻게?

나는 황급히 입술을 뗐다. 입가에 그의 푸른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엄지로 내 입술을 닦아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충분해. 더 마시면 취해."
"……감사합니다. 빚은 나중에 갚죠."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이불을 끌어올렸다.
수치심? 아니, 이건 공포다.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공포.

"빚이라."

아샤드가 피 묻은 자신의 손목을 혀로 핥았다. 그 모습이 지독하게 선정적이었다.

"그럼 지금 갚아. 질문 하나에 대답하는 걸로."

그가 침대 끝에 걸터앉으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10년 전, 라하트 전선. 기억나나?"

심장이 철렁했다.
라하트 전선. 내가 황제의 그림자로서 처음 투입되었던 전장.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죽이지 않고 살려보냈던 유일한 적군.

은발에 금안을 가진, 눈을 다쳐 앞을 못 보던 마족 장교.

"글쎄요. 워낙 많은 전장을 돌아다녀서."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래? 유감이군."

아샤드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매일 밤 그날을 기억하는데. 내 목에 칼을 겨누고도, 붕대를 감아주던 그 손길을."

그가 방문을 열며 뒤를 돌아보았다.

"쉬어. 내일은 더 재미있는 일이 있을 테니까."

문이 닫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을 확인했다.
소매 아래, 희미하게 남은 화상 자국.
10년 전, 그를 구하려다 입었던 상처.

그는 알고 있다.
내가 이벨린이 아니라, 그때 그 암살자라는 걸.


5화 메타 정보

  • 메인 플롯: 아샤드의 마력으로 신체 안정화.
  • 서브플롯: [서브 C] 10년 전 과거 떡밥(라하트 전선) 투척. 이벨린의 몸이 아샤드에게 반응함(근육 기억).
  • 정보 공개: 아샤드의 피(마력)가 치료제이자 최음제 역할을 함.
  • 클리프행어: 감정/과거 - 아샤드가 10년 전 은인을 기억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퇴장.

6화: 손목의 흉터

다음 날 아침, 나는 근위대장 집무실로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가 나를 반겼다. 대부분이 어젯밤 자객 침입 사건에 대한 경위서와 귀족들의 항의 서한이었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반쪽이 되셨습니다."

부관인 루카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커피를 내밀었다.
이 녀석은 내가 '그림자' 출신인 걸 모르는 몇 안 되는 순진한 기사다. 나를 그저 '낙하산 인사'로 온 귀족 영애쯤으로 알고 있다.

"괜찮아. 숙취야."
"숙취요? 아, 어제 마족 왕이랑…… 흠흠."

루카스가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소문 한번 빠르네.
나는 커피를 들이키며 서류를 훑었다.
자객들의 신원. '검은 달' 소속의 반마족 용병들.
배후는 불명. 하지만 뻔하다. 황제가 돈을 대줬거나, 아니면 황제의 정적들이 보냈거나. 어느 쪽이든 황제의 묵인 하에 벌어진 일이다.

'이벨린은 조용하네.'

어젯밤 아샤드의 피를 마신 덕분인지, 머릿속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하지만 불안했다.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다. 약효가 떨어지면 그녀는 또다시 월세를 독촉하러 올 것이다.

"사절단 대표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위병의 외침이 들렸다.
커피를 뿜을 뻔했다.
아샤드 르페르. 이 남자는 왜 또 온 거야?

문이 열리고, 제복을 갖춰 입은 아샤드가 들어왔다. 어젯밤의 흐트러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냉철한 외교관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공무 수행 중이신가 보군. 근위대장."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범인 인도 요청. 어제 잡힌 놈들 중에 우리 쪽 탈주병이 있어서."

그는 자연스럽게 내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루카스가 쩔쩔매며 차를 내왔다.
아샤드는 찻잔을 들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놓인 내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갑."

그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실내에서도 장갑을 끼나?"

나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책상 아래로 내렸다. 검은 가죽 장갑. 10년 동안 한 번도 남에게 맨손을 보인 적이 없다.

"화상 흉터가 있어서요. 보기 흉합니다."
"화상이라."

아샤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10년 전, 라하트 전선에서도 화재가 있었지. 보급 창고가 전소되는 바람에 많은 병사가 죽거나 다쳤어."

"그렇습니까? 전사는 들어봤어도 화재 얘기는 처음 듣는군요."

"그 화재 속에서 날 구해준 여자가 있었어. 얼굴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손목에 화상을 입었지. 내 옷에 붙은 불을 끄려다가."

그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벨린 영애는 10년 전에 요양 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던데. 요양지에서 화상을 입을 일이 있었나?"

취조다.
이 남자는 지금 외교 업무를 핑계로 나를 심문하고 있다.

"어릴 때 촛불 장난을 하다가 데었습니다. 흔한 일이죠."
"흔한 일이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책상을 넘어와 내 왼손을 낚아챘다.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군. 흔한 흉터인지, 내가 기억하는 그 흉터인지."
"이러지 마십시오!"

나는 거칠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는 마족이다. 완력으로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의 손가락이 내 장갑 끝을 잡고 천천히 끌어내렸다.

스르륵.
검은 가죽이 벗겨지고, 창백한 피부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화상 자국.
불꽃 모양처럼 일그러진, 결코 흔하지 않은 흉터.

아샤드의 동작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흉터에 못 박혔다. 그의 금안이 흔들렸다.

"……역시."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환희? 분노? 슬픔?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너였어."

그가 내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벨린이라는 껍데기 속에 숨어있는 너. 10년 전, 내 목숨을 쥐고도 놓아줬던 그 그림자."

부정해야 한다. 아니라고, 우연이라고 우겨야 한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번엔 주박 때문도, 이벨린 때문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 렌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찾았다."

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경건하게, 그리고 소유욕을 담아.

"이제 절대 안 놓쳐."


6화 메타 정보

  • 메인 플롯: 정체 발각의 위기.
  • 서브플롯: [서브 C] 10년 전 인연 확인. 아샤드가 렌의 정체(빙의자=과거 은인)를 확신함.
  • 클리프행어: 발견 - 아샤드가 흉터를 확인하고 "너였어"라고 선언. 로맨스 텐션 폭발.

7화: 불편한 만찬

"폐하께서 두 분을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던 찰나, 또다시 시종장이 문을 두드렸다.
황제는 정말이지 타이밍의 귀재다. 아니면 어디다 도청 장치라도 심어놨거나.

아샤드는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나중에 계속해.'


만찬장은 화려했다.
황제, 아샤드, 그리고 나. 기이한 삼자대면이었다.
황제는 상석에 앉아 고기를 썰고 있었고, 아샤드는 맞은편에서 와인을 흔들었다. 나는 그 사이, 호위라는 명목으로 서

ep9 (302 tokens)

Batch 1 (보완) & Batch 2: 7화~10화


7화: 불편한 만찬

"폐하께서 두 분을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던 찰나, 시종장이 문을 두드렸다.
황제는 정말이지 타이밍의 귀재다. 아니면 어디다 도청 장치라도 심어놨거나.
아샤드는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명확했다. '나중에 계속해.'


만찬장은 숨 막히게 화려했다.
긴 테이블의 상석에는 황제 카이리스가, 그 맞은편에는 마족왕 아샤드가 앉았다. 나는 그 사이, 호위라는 명목으로 카이리스의 오른편 뒤에 시립해 있었다.

기이한 삼자대면이었다.
제국의 황제, 적국의 왕,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낀 이중인격 암살자.
이보다 더 체할 것 같은 조합이 있을까.

"고기가 아주 연하군."

카이리스가 스테이크를 썰며 입을 열었다. 칼질할 때마다 붉은 육즙이 접시 위로 배어 나왔다.

"북부 전선에서 잡은 야생 짐승이라더군요. 마족들이 즐겨 먹는다

스텝 재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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