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6: 파일럿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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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출물 (v1)
제1화. 처형은 이것으로 99번째
목이 떨어지는 건 찰나다.
아프지는 않다. 그저 지겨울 뿐.
“성녀 리리스를 처형한다.”
서늘한 선고가 내려졌다. 단두대 아래,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이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을 구한 대가치고는 참으로 요란하고 무례한 배웅이었다.
나는 멍하니 집행관을 내려다보았다.
카엘 드 루시페린.
제국 유일의 공작이자, 내 목을 98번이나 쳤던 남자.
그는 오늘도 검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옷깃, 감정 없는 푸른 눈동자. 그는 마치 더러운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처럼 건조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저 남자는 질리지도 않나.
나는 하품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생은 좀 길었다. 2년이나 더 버텼으니까. 하지만 결말은 같았다. 신전은 나를 이용했고, 황실은 나를 버렸고, 사람들은 나를 마녀라 불렀다.
그리고 이 남자가 나를 죽인다.
“집행.”
철컹.
무거운 칼날이 중력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이 저 남자의 무심한 얼굴이라니, 다음 생에는 기필코 저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리라 다짐하면서.
툭.
시야가 뒤집혔다.
피 냄새가 확 풍겼고, 환호성은 멀어졌다.
‘아, 쉬고 싶다.’
그게 99번째 삶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축축하다.
그리고 냄새가 난다.
오래된 곰팡이 냄새. 쥐 오줌 냄새. 그리고 말라붙은 핏물 냄새.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면 뭐가 보일지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회색 돌천장.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감옥. 쇠사슬에 묶인 내 팔목.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또다시 돌아왔다.
지옥으로.
눈을 뜨자 예상대로였다. 좁고 어두운 지하 감옥. 내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신성력을 억제하는 약을 먹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은 언제인가.
손목을 확인했다. 아직 손톱이 뽑히지 않았다.
허벅지를 만져보았다. 인두 자국이 없다.
‘아직 고문 받기 전이군.’
그렇다면 회귀 시점은 ‘그날’이다.
신탁이 내려오고, 내가 가짜 성녀로 몰려 지하 감옥에 갇힌 첫날 밤.
원래의 시나리오대로라면, 30분 뒤에 신관들이 들어온다.
그들은 내게서 ‘성녀의 힘’을 뽑아내기 위해 고문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다가, 결국 사흘 뒤에 흑화해서 감옥을 부수고 나
제2화. 실패한 시나리오
콰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세상이 무너졌다. 아니, 정확히는 지하 감옥의 두꺼운 돌벽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시나리오에 없던 일이다.
지난 98번의 삶 동안, 이 감옥의 문이 열리는 건 오직 나를 고문하러 오는 신관들뿐이었다. 벽이 뚫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욱한 먼지 구름 사이로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피와 흙먼지로 엉망이 된 검은 예복. 흐트러진 은발. 그리고 광기 어린 푸른 눈동자.
카엘 드 루시페린.
그가 거기에 있었다.
나를 죽였던 남자가, 나를 죽이는 칼을 든 채,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늦지 않았어.”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절박하게 들리던지, 나는 하마터면 그가 나를 구하러 온 기사라고 착각할 뻔했다.
‘미친 건가?’
공작이 드디어 돌았구나. 하긴, 99번이나 사람 목을 쳤으니 미칠 만도 하지.
나는 족쇄가 채워진 발을 까딱거렸다.
“죽이러 왔나요? 이번엔 좀 빠르네요. 아직 고문도 안 받았는데.”
내 빈
제3화. 공범 제안
쇳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챙―!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붉은 제복을 입은 신관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카엘 드 루시페린. 제국의 공작이자 신전이 가장 경계하는 무력의 소유자.
그가 강하다는 건 99번의 죽음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압도적이었고, 우아했으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나를 처형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크윽……!”
카엘이 비틀거렸다.
신관 하나가 던진 신성력 깃든 단검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라면 하품을 하면서도 피했을 공격이었다.
그런데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하지 않았다.
그가 피하면 그 단검이 내 쪽으로 날아올 궤적이었으니까.
“공작! 미쳤나! 이건 반역이다!”
“성녀를 내놔라! 그 여자는 마녀다!”
이단심문관들이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카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짐승처럼 그들을 베어 넘길 뿐이었다.
푸욱.
검이 육체를 뚫는 소름 끼치는 소리.
카엘의 검은 예복이 점점 더 짙은 색으로 젖어 들어갔다. 그것이 적의 피인지, 그의 피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고, 검을 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
‘왜?’
의문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전생의 기억 속 그는 저렇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냉혹한 집행자였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진흙탕을 구르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지금, 나를 위해 저러고 있는가.
나를 99번이나 죽였으면서.
“……끝났다.”
마지막 신관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정적.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카엘이 천천히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뜨겁고 절박한지, 나는 숨을 멈췄다.
“가자.”
그는 피 묻은 손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더니, 다시 고삐를 잡았다.
그의 입가에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도착한 곳은 공작의 화려한 저택이 아니었다.
숲속 깊은 곳에 숨겨진 낡은 사냥 오두막이었다.
“여기라면 며칠은 냄새를 맡지 못할 거다.”
카엘은 나를 오두막 안으로 밀어 넣듯 들여보내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안은 어두웠고, 곰팡이 냄새가 났다. 하지만 감옥의 냄새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죽음의 냄새는 아니었으니까.
“당신.”
나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았다.
왜 나를 구했는지. 왜 저번 생과 다르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그 상처는 괜찮은지.
하지만 카엘은 내 질문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비틀거며 벽난로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윽…….”
그가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거친 숨소리가 오두막 안을 채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성녀로서의 습관이었다. 아픈 사람을 보면 치료해야 한다는, 신전이 세뇌시킨 조건반사.
“비켜요. 치료해야…….”
“오지 마.”
카엘이 내 손을 거칠게 쳐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이 허공에 멈췄다.
나는 굳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헐떡이고 있었다. 얼굴은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식은땀으로 젖은 은발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공작.”
내 목소리가 차갑게 나갔다.
“당신이 걱정돼서 이러는 게 아니야. 당신이 죽으면 나도 여기서 잡힐 테니까, 그래서 치료하려는 것뿐이라고.”
“……상관없어.”
그가 피 섞인 웃음을 흘렸다.
“네 힘은…… 아껴 둬. 그런 하찮은 것에 쓰지 말고.”
“하찮은 거?”
“나 같은 놈 살리는 데 쓰지 말란 소리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 힘도 없는지 손이 미끄러졌다. 약병이 바닥에 굴렀다.
그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제국 최강의 검. 성녀의 목을 베던 사형집행인.
그 남자가 고작 약병 하나를 줍지 못해 바닥을 기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약병을 집어 들었다.
“입 벌려요.”
“필요 없…….”
“닥치고 벌려.”
나는 억지로 그의 턱을 잡고 입을 벌리게 한 뒤, 약을 쏟아부었다.
그는 쿨럭거리면서도 약을 삼켰다.
독한 진통제 냄새가 났다.
잠시 후, 그의 거친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는 그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몰려왔다.
“이제 말해 봐요.”
나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왜 그랬어?”
“…….”
“나를 죽였잖아. 99번이나. 내 목이 떨어지는 느낌, 당신 칼날의 온도, 난 전부 기억해.”
내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왜 이번엔 나를 구해? 또 무슨 꿍꿍이지? 이번엔 죽이는 걸로 모자라서, 더 끔찍한 꼴이라도 보여주려고?”
카엘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타닥, 타닥,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한참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지겨우니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깊은 푸른색 눈동자 속에, 내가 알던 냉혹함은 없었다. 대신 그곳에는 지독한 피로와,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고여 있었다.
“너를 죽이는 것도, 네가 죽는 걸 보는 것도. 이젠 지겨워.”
“뭐라고?”
“이번 생은…… 다르게 갈 거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지 않았다. 약기운이 돌았는지 눈빛이 선명해져 있었다.
그는 무릎으로 기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위압적인 체구. 피 냄새와 진통제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나는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등 뒤는 벽이었다.
카엘이 내 손목을 잡았다. 아프지 않게, 하지만 절대 뿌리칠 수 없는 악력으로.
“리리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처음이었다.
지난 99번의 삶 동안, 그는 나를 ‘성녀’ 혹은 ‘마녀’라고만 불렀다. 내 이름을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신전은 널 다시 찾으러 올 거다. 황실도 널 가만두지 않겠지. 네가 살아있는 한, 그들은 널 지옥 끝까지 쫓아와서 이용하려 들 거야.”
알고 있다.
그게 내 운명이었으니까. 도망치다 잡혀서 고문당하고, 흑화해서 세상을 부수다가, 결국 저 남자에게 죽는 운명.
“그래서?”
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내게? 아니면 여기서 편하게 죽여주려고?”
“아니.”
카엘이 내 손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이끌어,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쿵. 쿵. 쿵.
손바닥 너머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빠르고, 강렬하고, 불규칙한 박동.
그것은 냉혈한의 심장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요동치는, 겁에 질린 한 인간의 심장이었다.
나는
파트별 산출물
ep1 (720 tokens)
제1화. 처형은 이것으로 99번째
목이 떨어지는 건 찰나다.
아프지는 않다. 그저 지겨울 뿐.
“성녀 리리스를 처형한다.”
서늘한 선고가 내려졌다. 단두대 아래,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이 환호성을 질렀다.
세상을 구한 대가치고는 참으로 요란하고 무례한 배웅이었다.
나는 멍하니 집행관을 내려다보았다.
카엘 드 루시페린.
제국 유일의 공작이자, 내 목을 98번이나 쳤던 남자.
그는 오늘도 검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옷깃, 감정 없는 푸른 눈동자. 그는 마치 더러운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처럼 건조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저 남자는 질리지도 않나.
나는 하품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생은 좀 길었다. 2년이나 더 버텼으니까. 하지만 결말은 같았다. 신전은 나를 이용했고, 황실은 나를 버렸고, 사람들은 나를 마녀라 불렀다.
그리고 이 남자가 나를 죽인다.
“집행.”
철컹.
무거운 칼날이 중력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이 저 남자의 무심한 얼굴이라니, 다음 생에는 기필코 저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리라 다짐하면서.
툭.
시야가 뒤집혔다.
피 냄새가 확 풍겼고, 환호성은 멀어졌다.
‘아, 쉬고 싶다.’
그게 99번째 삶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축축하다.
그리고 냄새가 난다.
오래된 곰팡이 냄새. 쥐 오줌 냄새. 그리고 말라붙은 핏물 냄새.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면 뭐가 보일지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회색 돌천장.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감옥. 쇠사슬에 묶인 내 팔목.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또다시 돌아왔다.
지옥으로.
눈을 뜨자 예상대로였다. 좁고 어두운 지하 감옥. 내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신성력을 억제하는 약을 먹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은 언제인가.
손목을 확인했다. 아직 손톱이 뽑히지 않았다.
허벅지를 만져보았다. 인두 자국이 없다.
‘아직 고문 받기 전이군.’
그렇다면 회귀 시점은 ‘그날’이다.
신탁이 내려오고, 내가 가짜 성녀로 몰려 지하 감옥에 갇힌 첫날 밤.
원래의 시나리오대로라면, 30분 뒤에 신관들이 들어온다.
그들은 내게서 ‘성녀의 힘’을 뽑아내기 위해 고문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다가, 결국 사흘 뒤에 흑화해서 감옥을 부수고 나
ep2 (329 tokens)
제2화. 실패한 시나리오
콰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세상이 무너졌다. 아니, 정확히는 지하 감옥의 두꺼운 돌벽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시나리오에 없던 일이다.
지난 98번의 삶 동안, 이 감옥의 문이 열리는 건 오직 나를 고문하러 오는 신관들뿐이었다. 벽이 뚫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욱한 먼지 구름 사이로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피와 흙먼지로 엉망이 된 검은 예복. 흐트러진 은발. 그리고 광기 어린 푸른 눈동자.
카엘 드 루시페린.
그가 거기에 있었다.
나를 죽였던 남자가, 나를 죽이는 칼을 든 채,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늦지 않았어.”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절박하게 들리던지, 나는 하마터면 그가 나를 구하러 온 기사라고 착각할 뻔했다.
‘미친 건가?’
공작이 드디어 돌았구나. 하긴, 99번이나 사람 목을 쳤으니 미칠 만도 하지.
나는 족쇄가 채워진 발을 까딱거렸다.
“죽이러 왔나요? 이번엔 좀 빠르네요. 아직 고문도 안 받았는데.”
내 빈
ep3 (1,932 tokens)
제3화. 공범 제안
쇳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챙―!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붉은 제복을 입은 신관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카엘 드 루시페린. 제국의 공작이자 신전이 가장 경계하는 무력의 소유자.
그가 강하다는 건 99번의 죽음을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압도적이었고, 우아했으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나를 처형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크윽……!”
카엘이 비틀거렸다.
신관 하나가 던진 신성력 깃든 단검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라면 하품을 하면서도 피했을 공격이었다.
그런데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하지 않았다.
그가 피하면 그 단검이 내 쪽으로 날아올 궤적이었으니까.
“공작! 미쳤나! 이건 반역이다!”
“성녀를 내놔라! 그 여자는 마녀다!”
이단심문관들이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카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짐승처럼 그들을 베어 넘길 뿐이었다.
푸욱.
검이 육체를 뚫는 소름 끼치는 소리.
카엘의 검은 예복이 점점 더 짙은 색으로 젖어 들어갔다. 그것이 적의 피인지, 그의 피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고, 검을 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
‘왜?’
의문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전생의 기억 속 그는 저렇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냉혹한 집행자였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진흙탕을 구르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지금, 나를 위해 저러고 있는가.
나를 99번이나 죽였으면서.
“……끝났다.”
마지막 신관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정적.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카엘이 천천히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뜨겁고 절박한지, 나는 숨을 멈췄다.
“가자.”
그는 피 묻은 손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더니, 다시 고삐를 잡았다.
그의 입가에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도착한 곳은 공작의 화려한 저택이 아니었다.
숲속 깊은 곳에 숨겨진 낡은 사냥 오두막이었다.
“여기라면 며칠은 냄새를 맡지 못할 거다.”
카엘은 나를 오두막 안으로 밀어 넣듯 들여보내고는 문을 걸어 잠갔다.
안은 어두웠고, 곰팡이 냄새가 났다. 하지만 감옥의 냄새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죽음의 냄새는 아니었으니까.
“당신.”
나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았다.
왜 나를 구했는지. 왜 저번 생과 다르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그 상처는 괜찮은지.
하지만 카엘은 내 질문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비틀거며 벽난로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윽…….”
그가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거친 숨소리가 오두막 안을 채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성녀로서의 습관이었다. 아픈 사람을 보면 치료해야 한다는, 신전이 세뇌시킨 조건반사.
“비켜요. 치료해야…….”
“오지 마.”
카엘이 내 손을 거칠게 쳐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이 허공에 멈췄다.
나는 굳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헐떡이고 있었다. 얼굴은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식은땀으로 젖은 은발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공작.”
내 목소리가 차갑게 나갔다.
“당신이 걱정돼서 이러는 게 아니야. 당신이 죽으면 나도 여기서 잡힐 테니까, 그래서 치료하려는 것뿐이라고.”
“……상관없어.”
그가 피 섞인 웃음을 흘렸다.
“네 힘은…… 아껴 둬. 그런 하찮은 것에 쓰지 말고.”
“하찮은 거?”
“나 같은 놈 살리는 데 쓰지 말란 소리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 힘도 없는지 손이 미끄러졌다. 약병이 바닥에 굴렀다.
그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제국 최강의 검. 성녀의 목을 베던 사형집행인.
그 남자가 고작 약병 하나를 줍지 못해 바닥을 기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약병을 집어 들었다.
“입 벌려요.”
“필요 없…….”
“닥치고 벌려.”
나는 억지로 그의 턱을 잡고 입을 벌리게 한 뒤, 약을 쏟아부었다.
그는 쿨럭거리면서도 약을 삼켰다.
독한 진통제 냄새가 났다.
잠시 후, 그의 거친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는 그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몰려왔다.
“이제 말해 봐요.”
나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왜 그랬어?”
“…….”
“나를 죽였잖아. 99번이나. 내 목이 떨어지는 느낌, 당신 칼날의 온도, 난 전부 기억해.”
내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인지, 공포인지 모를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왜 이번엔 나를 구해? 또 무슨 꿍꿍이지? 이번엔 죽이는 걸로 모자라서, 더 끔찍한 꼴이라도 보여주려고?”
카엘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타닥, 타닥,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한참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지겨우니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깊은 푸른색 눈동자 속에, 내가 알던 냉혹함은 없었다. 대신 그곳에는 지독한 피로와,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고여 있었다.
“너를 죽이는 것도, 네가 죽는 걸 보는 것도. 이젠 지겨워.”
“뭐라고?”
“이번 생은…… 다르게 갈 거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지 않았다. 약기운이 돌았는지 눈빛이 선명해져 있었다.
그는 무릎으로 기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위압적인 체구. 피 냄새와 진통제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나는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등 뒤는 벽이었다.
카엘이 내 손목을 잡았다. 아프지 않게, 하지만 절대 뿌리칠 수 없는 악력으로.
“리리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처음이었다.
지난 99번의 삶 동안, 그는 나를 ‘성녀’ 혹은 ‘마녀’라고만 불렀다. 내 이름을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신전은 널 다시 찾으러 올 거다. 황실도 널 가만두지 않겠지. 네가 살아있는 한, 그들은 널 지옥 끝까지 쫓아와서 이용하려 들 거야.”
알고 있다.
그게 내 운명이었으니까. 도망치다 잡혀서 고문당하고, 흑화해서 세상을 부수다가, 결국 저 남자에게 죽는 운명.
“그래서?”
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내게? 아니면 여기서 편하게 죽여주려고?”
“아니.”
카엘이 내 손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내 손을 이끌어,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쿵. 쿵. 쿵.
손바닥 너머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빠르고, 강렬하고, 불규칙한 박동.
그것은 냉혈한의 심장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요동치는, 겁에 질린 한 인간의 심장이었다.
나는
스텝 재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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