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6: 파일럿 에피소드

Writer · 버전 1 · 승인

산출물 (v1)

보통
gemini · gemini-3-pro-preview

1화: 세균, 무균실에 노크하다

"나가."

그게 차도진이 나를 보자마자 뱉은 첫마디였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찾아온 오빠 친구의 펜트하우스. 최고급 대리석 바닥 위로 내 운동화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도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마치 걸어 다니는 슈퍼 박테리아를 보는 듯한 눈빛.

그는 내 인사를 받기도 전에 소독제 스프레이부터 집어 들었다.

"이하루, 너한테서 세균 냄새나."
"아저씨, 저 보증금 사기당했어요. 재워주세요."

칙-.

그가 내 얼굴을 향해 가차 없이 소독제를 뿌렸다. 차가운 알코올 미스트가 속눈썹에 내려앉았다.

"거절한다. 내 무균실은 오염 불가야."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오늘 아침, 나는 전세 보증금 1억을 날렸다. 집주인이 갭투자를 하다 파산하고 야반도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멍하니 작업실 천장의 얼룩을 세고 있었다.

경찰서에 갔고, 울었고, 부동산 중개인을 멱살잡이했고, 다시 울었다.
그리고 갈 곳이 없어졌다.

본가에 들어가면 되지만, 그건 죽기보다 싫었다. 오빠 놈, 이혁에게 "내가 뭐랬냐, 집 구할 때 등기부등본 떼보랬지"라는 잔소리를 3박 4일 동안 들을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온 곳이 여기였다.
내 유일한 인맥이자, 오빠의 10년 지기 절친. 강남 한복판에 개원한 치과의사이자, 징그럽게 돈이 많은 차도진의 집.

"야, 아니, 오빠.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는 앞머리에 맺힌 물기를 털어냈다. 도진이 기겁하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하얀색 가운 대신, 집에서도 마치 수술복처럼 딱 떨어지는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단추는 목 끝까지 잠겨 있었다. 숨 막히지도 않나.

"호칭 똑바로 해. 누가 네 오빠야."
"혁이 오빠 친구면 오빠지. 그럼 아저씨라고 불러요?"
"원장님."
"지금 병원 아니잖아요."

도진은 대답 대신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현관 타일 위를 가리켰다. 내가 밟고 선 자리였다. 흙탕물이 번져 있었다.

"오염 구역이다. 더 들어오지 마."
"저기요, 원장님. 사람을 무슨 폐기물 취급하시는데요."
"지금 네 꼴을 봐. 습도 90%에 젖은 옷, 흙 묻은 신발. 곰팡이가 서식하기 딱 좋은 환경이군."

그는 진심이었다.
차도진. 34세. 치과의사.
외모는 대학 병원 로맨스 드라마 남주인공처럼 생겼지만, 성격은 메디컬 스릴러 사이코패스 의사에 가깝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한민국 상위 0.1%에 해당하는 중증 결벽증 환자다.

그는 내 캐리어 손잡이에도 소독제를 뿌리고 있었다.

"갈 곳이 없어. 진짜 딱 며칠만."
"호텔 가."
"카드 정지됐어요."
"이혁한테 전화해."
"죽어도 싫어요! 걔가 알면 나 평생 놀린단 말이야."

나는 젖은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타일 위에 섰다.
도진의 눈이 커졌다.

"너 지금 뭐 하는..."
"씻을게요! 씻으면 되잖아! 멸균 소독할게요. 락스물에 담갔다 빼라고 하면 그렇게라도 할게. 나 진짜 갈 데 없어서 그래요."

비굴했다.
하지만 1억이 날아간 마당에 자존심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당장 오늘 밤 잘 곳이 없는데. 서울의 밤은 춥고, 찜질방은 시끄럽고, 내 통장 잔고는 3만 4천 원이었다.

도진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 날카로운 콧날과 얇은 입술이 드러났다. 잘생기긴 진짜 더럽게 잘생겼다. 성격이 저모양만 아니었어도 여자가 줄을 섰을 텐데.

"이하루."
"네."
"너 양치 언제 했어?"

...미친놈.
이 상황에서 그게 궁금하냐.

"점심 먹고 했는데요."
"지금 저녁 9시야. 구강 내 세균 번식량이 폭발할 시간이지."
"아, 진짜!"

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그래요! 나 더러워요!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이 닦은 지 8시간 넘어서 입안에 뮤탄스균이 득실거려요! 됐냐고!"

악을 쓰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서러웠다.
비는 오고, 배는 고프고, 믿었던 전세금은 날아가고.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기분이었다.

도진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185cm의 키. 내려다보는 시선이 서늘했다.

그때였다.
그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꽤 길고 집요한 진동이었다.
도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액정을 확인하더니, 받지 않고 그대로 뒤집어버렸다.

"왜 안 받아요?"
내가 훌쩍거리며 물었다.

"스팸이야."
"거짓말. 액정에 '어머니'라고 뜨던데."

도진이 나를 째려봤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혁이 오빠에게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차도진의 어머니, 즉 병원 이사장 사모님은 올해 안에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걸.

지난주에도 선을 세 번이나 봤다고 했다. 물론 세 번 다 여자 쪽에서 차였다.
이유는 뻔했다.
‘스테이크를 썰기 전에 나이프를 알코올 솜으로 닦더군요.’
‘키스하려고 다가갔더니 구강청결제를 건넸어요.’

도진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진동은 멈췄다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메시지 알림음이 연달아 터졌다.

딩동.
딩동.
딩동.

그 소리가 마치 나를 쫓아내는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었다.

"갈게요."

더 비참해지기 싫었다.
젖은 운동화를 다시 구겨 신었다. 차가운 물기가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택시비라도 빌려주면 고맙겠는데. 그것도 세균 묻어서 싫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어락 버튼을 누르려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멈칫했다.
돌아보지 않았다. 기대했다가 실망하기 싫어서.

"이하루."
"왜요. 소독비 청구하게요?"
"너, 빚이 얼마라고?"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도진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의 경멸 어린 눈빛과는 달랐다. 무언가 계산하는 듯한, 진료 의자에 앉은 환자의 견적을 뽑는 듯한 눈.

"전세금 1억 날렸고... 대출이 5천 남았어요."
"직업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요. 지금은 백수나 다름없지만."
"이혁한테는 비밀이고?"
"알면 나 죽는다니까요."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조건이 있어."
"네?"
"재워주는 대신, 조건이 있다고."

귀가 번쩍 뜨였다. 조건? 청소? 빨래? 설거지?
뭐든 할 수 있었다. 이 으리으리한 펜트하우스 현관에서 노숙하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뭐든 해요! 청소 잘해요. 아, 물론 원장님 기준엔 못 미치겠지만... 빨래도 잘하고, 밥도..."
"아니."

도진이 말을 끊었다.
그가 주머니에서 다시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나를 보며 입꼬리를 아주 살짝, 비틀어 올렸다.

"가사 도우미는 필요 없어. 기계가 더 깨끗하니까."
"그럼요?"

도진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소독약 냄새와 함께, 묘하게 시원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가 내 젖은 머리카락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검지와 엄지로 내 옷자락 끝을 아주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들어와."
"...진짜요?"
"대신, 방패막이가 되어 줘."

방패막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눈만 깜빡였다.
도진은 대답 대신 신발장을 열어 손님용 슬리퍼를 꺼냈다. 비닐 포장이 뜯기지도 않은 새것이었다. 그걸 내 발 앞에 툭 던져주며 말했다.

"일단 씻어. 욕실은 복도 끝 왼쪽. 수건은 선반에 있는 것만 써. 다른 건 손대지 마."
"아, 네! 감사합니다!"

나는 넙죽 인사하고 슬리퍼를 신었다.
살았다. 오늘 밤은 길바닥 신세 면했다.
캐리어를 끌고 펜트하우스 거실로 들어섰다.

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모델하우스? 아니, SF 영화 세트장 같았다. 온통 하얀색이었다. 바닥도, 벽도, 소파도. 먼지 한 톨,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공기 중에는 은은한 피톤치드 향이 감돌았다.

내 꼬질꼬질한 캐리어가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짐은 현관에 둬. 바퀴 소독하기 전엔 반입 금지야."
"넵."

나는 얌전히 캐리어를 두고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나오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도진이 빌려준(아마도 버릴 예정인)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거실로 나왔다.

도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까의 셔츠 차림 그대로, 다리를 꼬고 서류 한 장을 검토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펜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저기... 씻게 해줘서 고마워요. 근데 아까 말한 조건이 뭐예요?"

내가 쭈뼛거리며 맞은편에 앉으려 하자, 도진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앉지 마."
"네?"
"소파 가죽, 어제 이태리에서 공수해 온 거야. 아직 네 위생 상태를 신뢰할 수 없어."

...치사한 놈.
나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조건은 여기 적혀 있어."

도진이 서류를 내밀었다.
임대차 계약서인가? 아니면 각서?
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계약서]

제목이 심플했다.
첫 줄을 읽어 내려갔다.

갑(차도진)과 을(이하루)은 상호 합의하에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여기까진 평범했다.
그런데 그 다음 줄.

제1조. 을은 갑의 '약혼녀'로서 성실히 의무를 이행한다.

"......?"

내 눈을 의심했다. 약혼녀?
잘못 읽었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분명 '약혼녀'였다.

"저기, 원장님? 이거 오타 난 것 같은데요. 입주 도우미가 아니라 약혼녀라고 적혀 있는데."
"오타 아냐."

도진이 펜을 집어 들고 딱, 딱, 소리를 내며 눌렀다.

"어머니가 올해 안에 결혼하라고 난리시거든. 선 자리 나가는 것도 지겹고, 맞선녀들한테 소독제 뿌리는 것도 이젠 귀찮아."
"그래서요?"
"네가 해."
"뭘요?"
"내 가짜 약혼녀."

하.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지금 드라마 찍으세요? 계약 연애? 요즘 웹소설에서도 잘 안 쓰는 클리셰거든요?"
"클리셰가 왜 클래식인지 알아? 효과가 좋으니까."

도진은 태연했다.

"조건은 간단해. 3개월. 그동안 내 집에서 지내면서, 부모님 앞에서 약혼녀 연기만 하면 돼. 빚 5천, 내가 갚아주지."

5천만 원.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니, 쿵쾅거렸다.
5천이면... 알바를 몇 년을 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인가.

하지만 상대는 차도진이다.
결벽증 말기, 인간 소독제, 오빠 친구.

"싫어요."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돈 때문에 친구 오빠랑 사기극을 벌이라고요? 저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니거든요."

"그래? 아쉽네."
도진은 미련 없이 서류를 뺏어가려 했다.

"그럼 나가. 지금 당장."

그가 현관을 가리켰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천둥까지 쳤다.
우르릉 쾅-

나는 현관을 봤다.
그리고 따뜻한 거실을 봤다.
그리고 다시 도진을 봤다.

"......"

"3초 준다. 3, 2..."

"할게요!"

나는 잽싸게 서류를 낚아챘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따뜻한 무균실이 밥 먹여주지.
나는 펜을 들고 사인란에 이름을 적으려 했다.

"잠깐."

도진이 내 손을 막았다. 아니, 정확히는 펜 끝을 다른 펜으로 막았다. 닿지 않으려고.

"사인은 나중에. 뒷장부터 읽어 봐."
"뒷장이요?"

서류를 넘겼다.
빼곡하게 적힌 특약 사항들이 보였다.

제2조. 생활 수칙.
1항. 을은 하루 3회 전신 샤워 및 소독을 실시한다.
2항. 공용 공간(거실, 주방) 사용 시 마스크 착용을 원칙으로 한다.
3항. 반경 1미터 접근 금지. 신체 접촉 시 계약은 즉시 파기되며 위약금 2배를 배상한다.

"......"

"할 수 있겠어?"

도진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마치 실험용 쥐를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물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소독제 스프레이가 들려 있었다.

"내 무균실에 입주하려면, 너부터 멸균되어야 하니까."


1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256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5개 (현관 대치 - 회상 - 거실 협상 - 계약 제안 - 특약 확인)
  • 등장 캐릭터: 차도진(남주), 이하루(여주), 이혁(언급), 도진 모(언급)
  • 공개된 설정: 하루의 보증금 사기, 도진의 심각한 결벽증, 도진의 결혼 압박, 10년 지기 관계
  • 심은 복선: 도진이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모친 압박), 혁이 알면 안 된다는 제약
  • 클리프행어 유형: 선택의 기로 (계약 제안 + 황당한 조건)
  • 다음 화 연결 방식: 직접 연결 (계약서 세부 조항 검토 후 반응)

2화: 라텍스 장갑과 컵라면

사각, 사각.

만년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서명란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을: 이 하 루.

이름 석 자를 적는 데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내 5천만 원짜리 빚과, 3개월의 자유가 교환되는 순간이었다.

"다 됐어요."

내가 계약서를 내밀자, 도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핀셋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종이 끝을 집어 자신의 파일철로 옮겼다.

"......"

진짜 가지가지 한다.
내가 무슨 탄저균 보균자라도 되나.

"계약 성립이야. 입금은 내일 아침에 될 거야."
"감사합니다, 갑 님."
"방은 2층 서재 옆이야. 침구류는 전부 멸균 처리된 새것이니 오염시키지 않도록 주의해."
"네네."

나는 쭈뼛거리며 일어났다. 젖은 옷이 에어컨 바람에 차갑게 식어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지만, 여기서 재채기라도 했다간 당장 계약 파기될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저기, 근데요."
"뭐."
"제 짐은요? 캐리어에 갈아입을 옷이랑 속옷이랑 다 있는데."

도진이 현관에 덩그러니 놓인 내 낡은 캐리어를 곁눈질했다. 바퀴에 묻은 흙탕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일 업체 불러서 소독할 거야. 그전까진 반입 금지다."
"그럼 저는요? 내일 뭐 입어요?"
"드레스룸에 있는 거 아무거나 입어. 태그 안 뗀 것들 많으니까."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자신의 방(아마도 메인 무균실)으로 사라졌다.
나는 덩그러니 남겨졌다.
하얀 거실. 하얀 소파. 하얀 테이블.

마치 정신병동 독방에 갇힌 기분이었다.
아니지. 5천만 원짜리 스위트룸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긍정 회로를 돌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배가 고파서 깼다.

꼬르륵.
뱃속에서 천둥이 쳤다. 어제 점심 이후로 물 한 모금 못 마셨으니 당연했다.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호텔 침구처럼 사각거리는 이불. 아, 맞다. 나 어제 계약 연애 팔려왔지.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였다.

백수에게는 이른 시간이지만, '약혼녀'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면 일어나야 했다.
나는 도진이 입으라고 던져준(사실은 멀리서 가리킨) 셔츠 하나만 걸친 채 1층으로 내려갔다.

집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도진은 출근했나?

"원장님? 계세요?"

대답이 없었다.
식탁 위에는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출근함. 냉장고에 있는 거 먹되, 흘리지 마. 부스러기 나오면 퇴거 조치.]

글씨체마저 각이 딱딱 져 있었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

물. 탄산수. 수입 생수. 비타민 음료.
그리고 락앤락 통에 담긴, 색깔별로 분류된 파프리카와 닭가슴살.

이게 사람 사는 집 냉장고냐, 편의점 진열대냐.
김치도, 반찬도, 하다못해 먹다 남은 피자 한 조각도 없었다.

"미친... 이걸 먹고 산다고?"

나는 파프리카 하나를 꺼내 들었다가 도로 넣었다. 생식을 씹어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뭔가 자극적인 게 필요했다. 나트륨. 캡사이신. MSG.

그때, 현관에 격리된 내 캐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도진이 '반입 금지'라고 못 박아둔 그 캐리어.
하지만 그 안에는 내 비상식량이 들어 있었다. 보증금 사기당하고 짐 쌀 때, 혹시 몰라 챙겨둔 컵라면 두 개.

나는 주변을 살폈다.
CCTV는 없겠지? 설마 집 안까지 감시하겠어.

살금살금 현관으로 기어갔다. 캐리어 지퍼를 조금만 열고, 손을 집어넣어 컵라면을 낚아챘다.
육개장 사발면.
이 붉은 글씨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미안해요, 원장님. 딱 3분만 범죄 저지를게요."

나는 주방 구석, 환풍기 바로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
포트를 끓이고 물을 부었다.
3분.
면이 익어가는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맵고 짠, 한국인의 영혼을 달래주는 냄새.

후루룩.
첫 입을 넣는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그래,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살지. 파프리카가 웬 말이냐.

국물까지 싹 비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냄새.

"헉."

나는 뒤늦게 코를 킁킁거렸다.
라면 냄새가 주방을 넘어 거실까지 퍼지고 있었다. 피톤치드 향으로 가득했던 무균실이 순식간에 분식집이 되어버렸다.

나는 당황해서 창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이 집, 시스템 창호라 여는 법을 모르겠다. 버튼을 눌러도, 레버를 돌려도 꿈쩍도 안 했다.

윙-
위잉-

갑자기 거실 구석에 있던 공기청정기가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초록색이던 램프가 주황색, 그리고 순식간에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마치 공습경보 사이렌 같았다.

띠띠띠띠-
철컥.

하필 그 타이밍에 현관 도어락이 열렸다.

"......"
"......"

현관에 들어선 차도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내 캐리어 소독을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역 장비(분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빈 컵라면 용기에 꽂혔다.
그리고 빨간색으로 미쳐 날뛰는 공기청정기로 옮겨갔다.

정적.
도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하루."
"어, 어서 오세요?"

"너 지금 내 집에서 화학 테러 했냐?"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화난 게 아니었다. 공포에 질린 목소리였다.

"아니, 배가 너무 고파서... 냉장고에 풀밖에 없길래..."
"환기. 당장 환기해."
"창문이 안 열려요!"
"시스템 제어 패널 눌러야지!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비켜!"

도진은 신발도 벗지 않고(아마 신발 바닥은 이미 소독했겠지만) 거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벽면 패널을 조작해 창문을 전면 개방했다.
강남의 빌딩 숲 바람이 들이닥쳤다.

"냄새 빠질 때까지 숨 쉬지 마."
"너무하네 진짜! 라면 좀 먹을 수도 있지!"
"내 집에서 국물 요리는 금지야. 국물 입자가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벽지에 스며든다고."

...진짜 미친놈이다.
나는 빈 용기를 등 뒤로 숨기며 뒷걸음질 쳤다.

"알았어요, 알았어. 다신 안 먹을게. 이거 갖다 버리고 올게요."

"멈춰."
도진이 손을 뻗었다.
"그거 들고 움직이지 마. 국물 떨어지면 바닥 다 뜯어내야 하니까."

그는 주머니에서 라텍스 장갑을 꺼내 끼더니, 내게 다가왔다.
마치 폭발물을 제거하는 EOD 요원처럼 비장한 표정이었다.

"이리 내."
"제가 버린다니까요."
"못 믿어. 넌 걸어 다니는 오염원이니까."

그가 내 손에서 컵라면 용기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러고는 비닐봉지에 이중 삼중으로 밀봉했다.

"앞으로 식사는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와. 정 배고프면 멸균 팩에 든 유동식만 허용한다."
"환자식 먹고 살라고요?"
"싫으면 나가든가. 위약금 1억 준비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더러워서 참는다. 5천만 원 갚을 때까지만 참는다.

그때, 도진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장갑을 낀 채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또 어머니?"
"아니. 네 오빠."

혁이 오빠?
나는 기겁해서 식탁 밑으로 숨으려 했다.

"받지 마요! 나 여기 있는 거 알면 죽어!"
"조용히 해."

도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왜? 나 들으라고?
이 악취미 같은 인간.

[야, 차도진.]
핸드폰 너머로 혁이 오빠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잔뜩 화가 난 목소리였다.

"어. 왜."
도진은 평온하게 대답했다.

[너 하루 못 봤냐? 이 기집애가 전화를 안 받아. 집주인이 날랐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갈 데도 없는 애가 연락 두절이니까 미치겠네.]

나는 입을 틀어막고 도진을 올려다봤다. 제발. 제발 모른다고 해.
도진이 나를 힐끔 내려다봤다. 그의 눈에 장난기가 스쳤다.

"글쎄. 못 봤는데."
[하, 진짜 어디 간 거야. 혹시 너한테 연락 오면 바로 나한테 넘겨. 알았지?]
"걱정 마라. 오면 바로 신고할 테니까."
[신고는 무슨. 아무튼 부탁한다. 끊어.]

전화가 끊겼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와... 심장 떨어질 뻔했네."
"봤지? 네 오빠 지금 눈에 불을 켰어."
"그러니까 더 잘 숨겨줘야죠. 우리는 운명 공동체잖아요."

"공동체는 무슨. 기생 관계지."

도진은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따라와. 드레스룸 정리해야 해. 네가 입을 옷 골라줄 테니까."
"오, 옷도 사줘요?"
"내 옆에 서려면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해야 하니까. 거지꼴로 다니면 내 평판 깎여."

말은 밉게 해도 옷은 준다니 따라갔다.
2층 드레스룸.
여기도 온통 하얀색이었다. 옷들이 색깔별로, 길이별로, 브랜드별로 오와 열을 맞춰 걸려 있었다. 강박증 환자의 천국이 있다면 여기일 거다.

"이거, 이거, 그리고 저거. 입어 봐."
도진이 옷걸이에서 원피스 몇 벌을 꺼내 내게 던졌다.
나는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근데 이거 다 여자 옷이네요? 원장님 여장 취미 있어요?"
"전 여친들 선물 주려다 못한 거야. 사이즈 맞을지 모르겠네."
"...재활용이었냐."

나는 투덜거리며 옷을 갈아입으러 구석으로 갔다.
도진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거기서 입어. 나가지 말고."
"여기서요? 원장님 있는데?"
"볼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 네 몸매, 의학적으로 전혀 흥미 없어."

자존심 상하네.
나는 등 돌리고 셔츠를 벗었다.
그때였다.

우웅-
바닥에 놓아둔 내 핸드폰이 진동했다.
혁이 오빠였다.
도진한테 없다는 소리 듣고 바로 나한테 거는 집요함.

나는 당황해서 핸드폰을 집으려다, 바닥에 놓인 쇼핑백 끈에 발이 걸렸다.

"악!"

몸이 기우뚱했다.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내 앞에는 전면 거울이 있었다. 이대로 부딪히면 거울 깨지고, 내 머리통도 깨지고, 빚은 5천에서 1억으로 늘어난다.

눈을 질끈 감았다.
충격이 와야 하는데, 오지 않았다.

대신 단단한 무언가가 내 팔을 낚아챘다.

"......!"

눈을 떴다.
도진이었다.
그가 내 오른팔을 꽉 잡고 있었다.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 쪽으로 당긴 자세였다.

거리는 10cm.
그의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비누 향. 그리고 옅은 소독약 냄새.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내 팔뚝에 닿은 감촉이었다.
따뜻했다.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사람의 체온.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도진의 손이 내 맨살을 잡고 있었다.
장갑도 없이.
티슈도 없이.
맨손으로.

"......"
"......"

도진도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결벽증 환자가, 세균 덩어리라고 질색하던 나를, 반사적으로 구했다.

"너..."
도진이 입을 뗐다.
그가 잡은 손을 놓으려는 찰나였다.

띠띠띠띠-
띠로리!

1층 현관에서 경쾌한 도어락 해제음이 울렸다.
아까와는 달랐다.
이번엔 도진이 누른 게 아니었다.

이 집에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딱 세 명이다.
집주인 차도진.
청소 업체 아주머니(오전 9시 방문).
그리고...

[야, 차도진! 너 집에 있지?]

1층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혁이었다.
우리 오빠.

도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나도 얼어붙었다.
지금 우리는 2층 드레스룸에 있다. 나는 셔츠 단추를 반쯤 푼 상태고, 도진은 내 팔을 잡고 끌어안다시피 서 있다.

누가 봐도 오해하기 딱 좋은 자세.
아니, 오해가 아니라 팩트 폭격이다.

[도진아? 나 들어간다?]

쿵, 쿵, 쿵.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진이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의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숨어."
그가 속삭였다.

"어디로요?"
"젠장, 아무 데나!"

혁이 오빠의 그림자가 복도 끝에 나타나기 직전이었다.


2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102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4개 (계약 체결 - 다음 날 아침/라면 사건 - 통화 - 드레스룸 위기)
  • 등장 캐릭터: 차도진, 이하루, 이혁(목소리/등장)
  • 공개된 설정: 도진의 결벽증 수준(냉장고 상태), 혁이 도진의 집 비번을 알고 있음, 도진이 반사적으로 하루를 구함
  • 심은 복선: 도진이 전 여친 선물용으로 샀던 옷들(서연과의 과거 암시), 혁의 집요함
  • 클리프행어 유형: 위기 + 역전 (맨손 스킨십 직후 오빠의 급습)
  • 다음 화 연결 방식: 직접 연결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은신 시도)

3화: 옷장 속의 바이러스

"숨어."

도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그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나를 밀어 넣었다.
바로 뒤에 있던 붙박이장 문이 열렸고, 내 몸이 어둠 속으로 구겨졌다.

"억!"

비명은 입술 안쪽에서 터졌다.
도진이 내 입을 막으며 함께 들어왔기 때문이다.

쿵.
문이 닫혔다.
빛이 사라졌다.

완벽한 어둠. 그리고 완벽한 밀실.
우리는 겨울 코트와 정장 재킷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었다.

"야, 차도진! 없는 척하지 말고 나와!"

1층이 아니었다.
발소리는 이미 2층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혁이 오빠다.
저 인간은 내 오빠이기 전에, 대한민국 육상부 출신에 강력계 형사 지망생이었다(지금은 헬스장 관장이지만). 청각과 후각이 개코보다 예민하다는 뜻이다.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드레스룸 입구에서 멈췄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참았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차도진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쪽은 상태가 더 심각했다.

어둠 속이라 보이진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내 입을 막고 있는 그의 손바닥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차가운 식은땀이 내 뺨에 닿았다.

'아, 맞다. 이 사람 결벽증이지.'

지금 이 상황은 도진에게 재난 영화나 다름없다.
좁고, 환기가 안 되고, 먼지(옷)가 가득한 공간.
게다가 '세균 덩어리'인 나와 몸이 빈틈없이 밀착되어 있다.

그의 허벅지가 내 다리 사이에 끼어 있고, 그의 가슴팍이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토하는 거 아냐?’

덜컥 겁이 났다.
여기서 그가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끝장이다. 혁이 오빠한테 들키는 건 둘째 치고, 계약금 5천만 원이 공중분해 된다.

[이상하네. 차도진 차는 주차장에 있는데.]

문밖에서 혁이 오빠의 혼잣말이 들렸다.

[어디 짱박혀서 자나?]

끼익-
드레스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빛 한 줄기가 옷장 틈새로 스며들었다.

도진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허억, 헉...’
과호흡이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 소리가 새어 나간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내 입을 막고 있던 도진의 손을 떼어내고, 반대로 내가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눈을 가렸다.

"......!"

도진이 움찔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댔다.
최대한 작게, 공기만 내보내듯 속삭였다.

"쉿. 진정해요."

미친 짓이었다.
결벽증 환자의 눈과 입을, 씻지도 않은 손으로 만지다니.
평소 같으면 내 손목을 부러뜨리고 소독제 한 통을 다 부었을 거다.

하지만 도진은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목을 꽉 쥐었다.
밀어내려는 게 아니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절박하게 매달리는 악력이었다.

[킁킁.]

밖에서 오빠가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냄새... 육개장 사발면?]

아. 망했다.
아까 먹고 환기 덜 시킨 냄새가 여기까지 올라온 모양이다.

[이 새끼가 라면을 먹을 리가 없는데. 냄새는 나고...]

오빠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드레스룸 안을 천천히 배회하고 있었다. 마치 범죄 현장을 수색하는 형사처럼.

[야, 차도진. 있으면 나와라. 좋은 말로 할 때.]

툭.
오빠가 옷장 문을 툭 쳤다.
바로 우리가 숨어 있는 그 문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제발 그냥 가라. 나 빚 갚아야 해. 여기서 들키면 나도 죽고 너도 죽고 우리 다 죽어.

도진의 심장 박동이 내 등 뒤로 전해졌다.
쿵, 쿵, 쿵, 쿵.
너무 빨랐다. 이러다 쇼크 오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
우리 집 강아지가 천둥 칠 때 무서워하면 해주던 방식이었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안 들켜요. 숨 쉬어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게 통했는지, 아니면 산소 부족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건지.
도진의 거친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의 머리가 내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무거웠다.
하지만 밀어낼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1분 같은 1초가 흘렀다.

[...없나?]

오빠가 중얼거렸다.

[에이씨, 똥 마려운데 화장실이나 쓰고 가야지.]

뚜벅, 뚜벅.
발소리가 멀어졌다.
드레스룸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달칵.

갔다.
나는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하아... 갔어요. 원장님."

나는 도진의 눈과 입에서 손을 뗐다.
이제 밀쳐지겠지?
'더러워! 만지지 마!' 하면서 소독제를 찾겠지?

각오하고 한 걸음 물러나려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진이 나를 놔주지 않았다.
내 손목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풀리지 않았다.

"저기요...?"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희미하게 그의 윤곽이 보였다.
도진은 고개를 숙인 채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이마가 내 쇄골 즈음에 닿아 있었다.

"원장님? 괜찮으세요? 토할 것 같으면 봉투..."

"가만히 있어 봐."

낮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명령조였지만, 평소의 날 선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애원하는 듯한 뉘앙스.

"네?"
"어지러워."
"그러니까 나가자고요. 여기 공기 안 좋아서 그래요."

내가 문고리를 잡으려 하자, 도진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
내 뇌세포가 일시 정지했다.
허리?
지금 차도진이 내 허리를 안은 거야?
맨손으로?
이 더러운(그의 기준에서) 티셔츠 위로?

"원장님, 저기, 이거 성추행으로 신고하면 위약금 까주나요?"
"시끄러워."

도진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름이 돋았다.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너무... 야릇해서였다.

좁은 옷장.
어둠.
그리고 남자 향수 냄새와 섞인 그의 체취.

그는 결벽증 환자답게 항상 무향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땀 냄새.
사람 냄새.
그리고 묘한 긴장감이 섞인 페로몬 같은 것들.

"이하루."
그가 웅얼거렸다.

"네, 네."
"너 오늘 뭐 썼어?"
"뭐, 뭘요?"
"향수. 아니면 바디워시."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아무것도 안 썼는데요. 그냥 원장님 욕실에 있는 비누 썼는데."

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평소의 그 차가운 눈빛이 아니었다.
몽롱하고, 풀려 있고,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눈.

그가 내 목덜미 근처로 코를 가져갔다.
킁.
숨을 들이켰다.

"힉."
나는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상하네."

도진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더 단단히 끌어당겼다.
이제 우리 사이엔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었다.

"원래는... 역겨워야 하는데."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척추 라인을 따라 천천히, 아주 느리게 쓸어 올렸다.
전기가 찌릿하게 올랐다.

"토할 것 같고, 숨도 못 쉬겠고, 닿은 자리를 칼로 도려내고 싶어야 정상인데."

그는 마치 자가 진단을 내리는 의사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행동은 전혀 의사답지 않았다.
그는 내 귓가에 입술을 스칠 듯이 가까이 댔다.

"너한테선... 소독약 냄새가 안 나도 괜찮아."

"......"

"오히려."

그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꿀꺽.

"더 맡고 싶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건 연기가 아니다. 계약서 조항에도 없는 내용이다.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텐션이었다.

도진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키스할 거리였다.
아니, 키스보다 더한 짓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눈을 감아야 할지, 그를 밀쳐야 할지, 아니면 위약금을 물어내야 할지 계산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도 홀린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기 직전.
1센티미터.
아니, 5밀리미터.

덜컥.

옷장 문고리가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그리고 익숙한, 아주 끔찍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찾았다."

나는 실눈을 떴다.
활짝 열린 옷장 문.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거대한 그림자.

이혁이었다.
우리 오빠가, 썩소를 지으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차도진. 내 동생이랑 거기서 뭐 하냐?"

도진의 입술이 내 입술 바로 앞에서 멈췄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은 채, 굳어버린 석고상처럼 오빠를 올려다봤다.

망했다.
이번엔 진짜, 빼도 박도 못하게 망했다.


3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45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옷장 은신 - 밀착과 텐션 - 오빠의 발각)
  • 등장 캐릭터: 차도진, 이하루, 이혁
  • 공개된 설정: 도진의 결벽증이 하루에게만 반응하지 않음(신체적 변화), 혁의 눈치빠름
  • 심은 복선: "소독약 냄새가 안 나도 괜찮아" (향후 로맨스의 핵심 키워드)
  • 클리프행어 유형: S급 복합 (감정 절정 + 위기 + 폭로)
  • 다음 화 연결 방식: 즉각적 위기 해결 (4화 오프닝에서 변명/도주)

3화 결제 유도 분석

  • 즉각적 궁금증: 문을 연 오빠에게 이 상황(옷장 속 포옹)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도진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결벽증으로 돌아갈까?
  • 중기적 궁금증: 도진은 왜 하루에게만 반응하지 않는가? 이것이 사랑인가, 아니면 특이 체질인가? 이 '예외성'이 앞으로의 동거 생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스킨십 진도에 대한 기대)
  • 장기적 궁금증: 오빠의 반대와 친구(전여친)의 존재를 넘어서 두 사람은 진짜 연인이 될 수 있을까?
  • 독자 감정 상태: 도파민 최고조. "키스 직전 끊기"에 대한 분노와 "다음 화를 당장 내놓으라"는 갈증이 혼재됨.
  • 예상 결제 전환 동기: 남주의 '입덕 부정기'가 깨지고 본능이 튀어나온 첫 순간을 목격함. 이 텐션이 유지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100원(또는 이용권)을 쓸 가치가 충분함.

파트별 산출물

ep1 (3,974 tokens)

1화: 세균, 무균실에 노크하다

"나가."

그게 차도진이 나를 보자마자 뱉은 첫마디였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찾아온 오빠 친구의 펜트하우스. 최고급 대리석 바닥 위로 내 운동화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도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마치 걸어 다니는 슈퍼 박테리아를 보는 듯한 눈빛.

그는 내 인사를 받기도 전에 소독제 스프레이부터 집어 들었다.

"이하루, 너한테서 세균 냄새나."
"아저씨, 저 보증금 사기당했어요. 재워주세요."

칙-.

그가 내 얼굴을 향해 가차 없이 소독제를 뿌렸다. 차가운 알코올 미스트가 속눈썹에 내려앉았다.

"거절한다. 내 무균실은 오염 불가야."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오늘 아침, 나는 전세 보증금 1억을 날렸다. 집주인이 갭투자를 하다 파산하고 야반도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멍하니 작업실 천장의 얼룩을 세고 있었다.

경찰서에 갔고, 울었고, 부동산 중개인을 멱살잡이했고, 다시 울었다.
그리고 갈 곳이 없어졌다.

본가에 들어가면 되지만, 그건 죽기보다 싫었다. 오빠 놈, 이혁에게 "내가 뭐랬냐, 집 구할 때 등기부등본 떼보랬지"라는 잔소리를 3박 4일 동안 들을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온 곳이 여기였다.
내 유일한 인맥이자, 오빠의 10년 지기 절친. 강남 한복판에 개원한 치과의사이자, 징그럽게 돈이 많은 차도진의 집.

"야, 아니, 오빠.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는 앞머리에 맺힌 물기를 털어냈다. 도진이 기겁하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하얀색 가운 대신, 집에서도 마치 수술복처럼 딱 떨어지는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단추는 목 끝까지 잠겨 있었다. 숨 막히지도 않나.

"호칭 똑바로 해. 누가 네 오빠야."
"혁이 오빠 친구면 오빠지. 그럼 아저씨라고 불러요?"
"원장님."
"지금 병원 아니잖아요."

도진은 대답 대신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현관 타일 위를 가리켰다. 내가 밟고 선 자리였다. 흙탕물이 번져 있었다.

"오염 구역이다. 더 들어오지 마."
"저기요, 원장님. 사람을 무슨 폐기물 취급하시는데요."
"지금 네 꼴을 봐. 습도 90%에 젖은 옷, 흙 묻은 신발. 곰팡이가 서식하기 딱 좋은 환경이군."

그는 진심이었다.
차도진. 34세. 치과의사.
외모는 대학 병원 로맨스 드라마 남주인공처럼 생겼지만, 성격은 메디컬 스릴러 사이코패스 의사에 가깝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한민국 상위 0.1%에 해당하는 중증 결벽증 환자다.

그는 내 캐리어 손잡이에도 소독제를 뿌리고 있었다.

"갈 곳이 없어. 진짜 딱 며칠만."
"호텔 가."
"카드 정지됐어요."
"이혁한테 전화해."
"죽어도 싫어요! 걔가 알면 나 평생 놀린단 말이야."

나는 젖은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타일 위에 섰다.
도진의 눈이 커졌다.

"너 지금 뭐 하는..."
"씻을게요! 씻으면 되잖아! 멸균 소독할게요. 락스물에 담갔다 빼라고 하면 그렇게라도 할게. 나 진짜 갈 데 없어서 그래요."

비굴했다.
하지만 1억이 날아간 마당에 자존심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당장 오늘 밤 잘 곳이 없는데. 서울의 밤은 춥고, 찜질방은 시끄럽고, 내 통장 잔고는 3만 4천 원이었다.

도진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 날카로운 콧날과 얇은 입술이 드러났다. 잘생기긴 진짜 더럽게 잘생겼다. 성격이 저모양만 아니었어도 여자가 줄을 섰을 텐데.

"이하루."
"네."
"너 양치 언제 했어?"

...미친놈.
이 상황에서 그게 궁금하냐.

"점심 먹고 했는데요."
"지금 저녁 9시야. 구강 내 세균 번식량이 폭발할 시간이지."
"아, 진짜!"

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그래요! 나 더러워요!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이 닦은 지 8시간 넘어서 입안에 뮤탄스균이 득실거려요! 됐냐고!"

악을 쓰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서러웠다.
비는 오고, 배는 고프고, 믿었던 전세금은 날아가고.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기분이었다.

도진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185cm의 키. 내려다보는 시선이 서늘했다.

그때였다.
그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꽤 길고 집요한 진동이었다.
도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액정을 확인하더니, 받지 않고 그대로 뒤집어버렸다.

"왜 안 받아요?"
내가 훌쩍거리며 물었다.

"스팸이야."
"거짓말. 액정에 '어머니'라고 뜨던데."

도진이 나를 째려봤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혁이 오빠에게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차도진의 어머니, 즉 병원 이사장 사모님은 올해 안에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걸.

지난주에도 선을 세 번이나 봤다고 했다. 물론 세 번 다 여자 쪽에서 차였다.
이유는 뻔했다.
‘스테이크를 썰기 전에 나이프를 알코올 솜으로 닦더군요.’
‘키스하려고 다가갔더니 구강청결제를 건넸어요.’

도진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진동은 멈췄다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메시지 알림음이 연달아 터졌다.

딩동.
딩동.
딩동.

그 소리가 마치 나를 쫓아내는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었다.

"갈게요."

더 비참해지기 싫었다.
젖은 운동화를 다시 구겨 신었다. 차가운 물기가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택시비라도 빌려주면 고맙겠는데. 그것도 세균 묻어서 싫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어락 버튼을 누르려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멈칫했다.
돌아보지 않았다. 기대했다가 실망하기 싫어서.

"이하루."
"왜요. 소독비 청구하게요?"
"너, 빚이 얼마라고?"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도진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의 경멸 어린 눈빛과는 달랐다. 무언가 계산하는 듯한, 진료 의자에 앉은 환자의 견적을 뽑는 듯한 눈.

"전세금 1억 날렸고... 대출이 5천 남았어요."
"직업은."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요. 지금은 백수나 다름없지만."
"이혁한테는 비밀이고?"
"알면 나 죽는다니까요."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조건이 있어."
"네?"
"재워주는 대신, 조건이 있다고."

귀가 번쩍 뜨였다. 조건? 청소? 빨래? 설거지?
뭐든 할 수 있었다. 이 으리으리한 펜트하우스 현관에서 노숙하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뭐든 해요! 청소 잘해요. 아, 물론 원장님 기준엔 못 미치겠지만... 빨래도 잘하고, 밥도..."
"아니."

도진이 말을 끊었다.
그가 주머니에서 다시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나를 보며 입꼬리를 아주 살짝, 비틀어 올렸다.

"가사 도우미는 필요 없어. 기계가 더 깨끗하니까."
"그럼요?"

도진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소독약 냄새와 함께, 묘하게 시원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가 내 젖은 머리카락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검지와 엄지로 내 옷자락 끝을 아주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들어와."
"...진짜요?"
"대신, 방패막이가 되어 줘."

방패막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눈만 깜빡였다.
도진은 대답 대신 신발장을 열어 손님용 슬리퍼를 꺼냈다. 비닐 포장이 뜯기지도 않은 새것이었다. 그걸 내 발 앞에 툭 던져주며 말했다.

"일단 씻어. 욕실은 복도 끝 왼쪽. 수건은 선반에 있는 것만 써. 다른 건 손대지 마."
"아, 네! 감사합니다!"

나는 넙죽 인사하고 슬리퍼를 신었다.
살았다. 오늘 밤은 길바닥 신세 면했다.
캐리어를 끌고 펜트하우스 거실로 들어섰다.

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모델하우스? 아니, SF 영화 세트장 같았다. 온통 하얀색이었다. 바닥도, 벽도, 소파도. 먼지 한 톨,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공기 중에는 은은한 피톤치드 향이 감돌았다.

내 꼬질꼬질한 캐리어가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짐은 현관에 둬. 바퀴 소독하기 전엔 반입 금지야."
"넵."

나는 얌전히 캐리어를 두고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나오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도진이 빌려준(아마도 버릴 예정인)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거실로 나왔다.

도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까의 셔츠 차림 그대로, 다리를 꼬고 서류 한 장을 검토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펜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저기... 씻게 해줘서 고마워요. 근데 아까 말한 조건이 뭐예요?"

내가 쭈뼛거리며 맞은편에 앉으려 하자, 도진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앉지 마."
"네?"
"소파 가죽, 어제 이태리에서 공수해 온 거야. 아직 네 위생 상태를 신뢰할 수 없어."

...치사한 놈.
나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조건은 여기 적혀 있어."

도진이 서류를 내밀었다.
임대차 계약서인가? 아니면 각서?
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계약서]

제목이 심플했다.
첫 줄을 읽어 내려갔다.

갑(차도진)과 을(이하루)은 상호 합의하에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여기까진 평범했다.
그런데 그 다음 줄.

제1조. 을은 갑의 '약혼녀'로서 성실히 의무를 이행한다.

"......?"

내 눈을 의심했다. 약혼녀?
잘못 읽었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분명 '약혼녀'였다.

"저기, 원장님? 이거 오타 난 것 같은데요. 입주 도우미가 아니라 약혼녀라고 적혀 있는데."
"오타 아냐."

도진이 펜을 집어 들고 딱, 딱, 소리를 내며 눌렀다.

"어머니가 올해 안에 결혼하라고 난리시거든. 선 자리 나가는 것도 지겹고, 맞선녀들한테 소독제 뿌리는 것도 이젠 귀찮아."
"그래서요?"
"네가 해."
"뭘요?"
"내 가짜 약혼녀."

하.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지금 드라마 찍으세요? 계약 연애? 요즘 웹소설에서도 잘 안 쓰는 클리셰거든요?"
"클리셰가 왜 클래식인지 알아? 효과가 좋으니까."

도진은 태연했다.

"조건은 간단해. 3개월. 그동안 내 집에서 지내면서, 부모님 앞에서 약혼녀 연기만 하면 돼. 빚 5천, 내가 갚아주지."

5천만 원.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니, 쿵쾅거렸다.
5천이면... 알바를 몇 년을 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인가.

하지만 상대는 차도진이다.
결벽증 말기, 인간 소독제, 오빠 친구.

"싫어요."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돈 때문에 친구 오빠랑 사기극을 벌이라고요? 저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니거든요."

"그래? 아쉽네."
도진은 미련 없이 서류를 뺏어가려 했다.

"그럼 나가. 지금 당장."

그가 현관을 가리켰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천둥까지 쳤다.
우르릉 쾅-

나는 현관을 봤다.
그리고 따뜻한 거실을 봤다.
그리고 다시 도진을 봤다.

"......"

"3초 준다. 3, 2..."

"할게요!"

나는 잽싸게 서류를 낚아챘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나. 따뜻한 무균실이 밥 먹여주지.
나는 펜을 들고 사인란에 이름을 적으려 했다.

"잠깐."

도진이 내 손을 막았다. 아니, 정확히는 펜 끝을 다른 펜으로 막았다. 닿지 않으려고.

"사인은 나중에. 뒷장부터 읽어 봐."
"뒷장이요?"

서류를 넘겼다.
빼곡하게 적힌 특약 사항들이 보였다.

제2조. 생활 수칙.
1항. 을은 하루 3회 전신 샤워 및 소독을 실시한다.
2항. 공용 공간(거실, 주방) 사용 시 마스크 착용을 원칙으로 한다.
3항. 반경 1미터 접근 금지. 신체 접촉 시 계약은 즉시 파기되며 위약금 2배를 배상한다.

"......"

"할 수 있겠어?"

도진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마치 실험용 쥐를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물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소독제 스프레이가 들려 있었다.

"내 무균실에 입주하려면, 너부터 멸균되어야 하니까."


1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256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5개 (현관 대치 - 회상 - 거실 협상 - 계약 제안 - 특약 확인)
  • 등장 캐릭터: 차도진(남주), 이하루(여주), 이혁(언급), 도진 모(언급)
  • 공개된 설정: 하루의 보증금 사기, 도진의 심각한 결벽증, 도진의 결혼 압박, 10년 지기 관계
  • 심은 복선: 도진이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모친 압박), 혁이 알면 안 된다는 제약
  • 클리프행어 유형: 선택의 기로 (계약 제안 + 황당한 조건)
  • 다음 화 연결 방식: 직접 연결 (계약서 세부 조항 검토 후 반응)
ep2 (3,991 tokens)

2화: 라텍스 장갑과 컵라면

사각, 사각.

만년필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서명란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을: 이 하 루.

이름 석 자를 적는 데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내 5천만 원짜리 빚과, 3개월의 자유가 교환되는 순간이었다.

"다 됐어요."

내가 계약서를 내밀자, 도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핀셋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종이 끝을 집어 자신의 파일철로 옮겼다.

"......"

진짜 가지가지 한다.
내가 무슨 탄저균 보균자라도 되나.

"계약 성립이야. 입금은 내일 아침에 될 거야."
"감사합니다, 갑 님."
"방은 2층 서재 옆이야. 침구류는 전부 멸균 처리된 새것이니 오염시키지 않도록 주의해."
"네네."

나는 쭈뼛거리며 일어났다. 젖은 옷이 에어컨 바람에 차갑게 식어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지만, 여기서 재채기라도 했다간 당장 계약 파기될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저기, 근데요."
"뭐."
"제 짐은요? 캐리어에 갈아입을 옷이랑 속옷이랑 다 있는데."

도진이 현관에 덩그러니 놓인 내 낡은 캐리어를 곁눈질했다. 바퀴에 묻은 흙탕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일 업체 불러서 소독할 거야. 그전까진 반입 금지다."
"그럼 저는요? 내일 뭐 입어요?"
"드레스룸에 있는 거 아무거나 입어. 태그 안 뗀 것들 많으니까."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자신의 방(아마도 메인 무균실)으로 사라졌다.
나는 덩그러니 남겨졌다.
하얀 거실. 하얀 소파. 하얀 테이블.

마치 정신병동 독방에 갇힌 기분이었다.
아니지. 5천만 원짜리 스위트룸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긍정 회로를 돌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배가 고파서 깼다.

꼬르륵.
뱃속에서 천둥이 쳤다. 어제 점심 이후로 물 한 모금 못 마셨으니 당연했다.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호텔 침구처럼 사각거리는 이불. 아, 맞다. 나 어제 계약 연애 팔려왔지.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였다.

백수에게는 이른 시간이지만, '약혼녀'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면 일어나야 했다.
나는 도진이 입으라고 던져준(사실은 멀리서 가리킨) 셔츠 하나만 걸친 채 1층으로 내려갔다.

집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도진은 출근했나?

"원장님? 계세요?"

대답이 없었다.
식탁 위에는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출근함. 냉장고에 있는 거 먹되, 흘리지 마. 부스러기 나오면 퇴거 조치.]

글씨체마저 각이 딱딱 져 있었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

물. 탄산수. 수입 생수. 비타민 음료.
그리고 락앤락 통에 담긴, 색깔별로 분류된 파프리카와 닭가슴살.

이게 사람 사는 집 냉장고냐, 편의점 진열대냐.
김치도, 반찬도, 하다못해 먹다 남은 피자 한 조각도 없었다.

"미친... 이걸 먹고 산다고?"

나는 파프리카 하나를 꺼내 들었다가 도로 넣었다. 생식을 씹어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뭔가 자극적인 게 필요했다. 나트륨. 캡사이신. MSG.

그때, 현관에 격리된 내 캐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도진이 '반입 금지'라고 못 박아둔 그 캐리어.
하지만 그 안에는 내 비상식량이 들어 있었다. 보증금 사기당하고 짐 쌀 때, 혹시 몰라 챙겨둔 컵라면 두 개.

나는 주변을 살폈다.
CCTV는 없겠지? 설마 집 안까지 감시하겠어.

살금살금 현관으로 기어갔다. 캐리어 지퍼를 조금만 열고, 손을 집어넣어 컵라면을 낚아챘다.
육개장 사발면.
이 붉은 글씨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미안해요, 원장님. 딱 3분만 범죄 저지를게요."

나는 주방 구석, 환풍기 바로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
포트를 끓이고 물을 부었다.
3분.
면이 익어가는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맵고 짠, 한국인의 영혼을 달래주는 냄새.

후루룩.
첫 입을 넣는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그래,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살지. 파프리카가 웬 말이냐.

국물까지 싹 비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냄새.

"헉."

나는 뒤늦게 코를 킁킁거렸다.
라면 냄새가 주방을 넘어 거실까지 퍼지고 있었다. 피톤치드 향으로 가득했던 무균실이 순식간에 분식집이 되어버렸다.

나는 당황해서 창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이 집, 시스템 창호라 여는 법을 모르겠다. 버튼을 눌러도, 레버를 돌려도 꿈쩍도 안 했다.

윙-
위잉-

갑자기 거실 구석에 있던 공기청정기가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초록색이던 램프가 주황색, 그리고 순식간에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마치 공습경보 사이렌 같았다.

띠띠띠띠-
철컥.

하필 그 타이밍에 현관 도어락이 열렸다.

"......"
"......"

현관에 들어선 차도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 손에 서류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내 캐리어 소독을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역 장비(분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빈 컵라면 용기에 꽂혔다.
그리고 빨간색으로 미쳐 날뛰는 공기청정기로 옮겨갔다.

정적.
도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하루."
"어, 어서 오세요?"

"너 지금 내 집에서 화학 테러 했냐?"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화난 게 아니었다. 공포에 질린 목소리였다.

"아니, 배가 너무 고파서... 냉장고에 풀밖에 없길래..."
"환기. 당장 환기해."
"창문이 안 열려요!"
"시스템 제어 패널 눌러야지!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비켜!"

도진은 신발도 벗지 않고(아마 신발 바닥은 이미 소독했겠지만) 거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벽면 패널을 조작해 창문을 전면 개방했다.
강남의 빌딩 숲 바람이 들이닥쳤다.

"냄새 빠질 때까지 숨 쉬지 마."
"너무하네 진짜! 라면 좀 먹을 수도 있지!"
"내 집에서 국물 요리는 금지야. 국물 입자가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벽지에 스며든다고."

...진짜 미친놈이다.
나는 빈 용기를 등 뒤로 숨기며 뒷걸음질 쳤다.

"알았어요, 알았어. 다신 안 먹을게. 이거 갖다 버리고 올게요."

"멈춰."
도진이 손을 뻗었다.
"그거 들고 움직이지 마. 국물 떨어지면 바닥 다 뜯어내야 하니까."

그는 주머니에서 라텍스 장갑을 꺼내 끼더니, 내게 다가왔다.
마치 폭발물을 제거하는 EOD 요원처럼 비장한 표정이었다.

"이리 내."
"제가 버린다니까요."
"못 믿어. 넌 걸어 다니는 오염원이니까."

그가 내 손에서 컵라면 용기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러고는 비닐봉지에 이중 삼중으로 밀봉했다.

"앞으로 식사는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와. 정 배고프면 멸균 팩에 든 유동식만 허용한다."
"환자식 먹고 살라고요?"
"싫으면 나가든가. 위약금 1억 준비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더러워서 참는다. 5천만 원 갚을 때까지만 참는다.

그때, 도진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장갑을 낀 채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또 어머니?"
"아니. 네 오빠."

혁이 오빠?
나는 기겁해서 식탁 밑으로 숨으려 했다.

"받지 마요! 나 여기 있는 거 알면 죽어!"
"조용히 해."

도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왜? 나 들으라고?
이 악취미 같은 인간.

[야, 차도진.]
핸드폰 너머로 혁이 오빠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잔뜩 화가 난 목소리였다.

"어. 왜."
도진은 평온하게 대답했다.

[너 하루 못 봤냐? 이 기집애가 전화를 안 받아. 집주인이 날랐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갈 데도 없는 애가 연락 두절이니까 미치겠네.]

나는 입을 틀어막고 도진을 올려다봤다. 제발. 제발 모른다고 해.
도진이 나를 힐끔 내려다봤다. 그의 눈에 장난기가 스쳤다.

"글쎄. 못 봤는데."
[하, 진짜 어디 간 거야. 혹시 너한테 연락 오면 바로 나한테 넘겨. 알았지?]
"걱정 마라. 오면 바로 신고할 테니까."
[신고는 무슨. 아무튼 부탁한다. 끊어.]

전화가 끊겼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와... 심장 떨어질 뻔했네."
"봤지? 네 오빠 지금 눈에 불을 켰어."
"그러니까 더 잘 숨겨줘야죠. 우리는 운명 공동체잖아요."

"공동체는 무슨. 기생 관계지."

도진은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따라와. 드레스룸 정리해야 해. 네가 입을 옷 골라줄 테니까."
"오, 옷도 사줘요?"
"내 옆에 서려면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해야 하니까. 거지꼴로 다니면 내 평판 깎여."

말은 밉게 해도 옷은 준다니 따라갔다.
2층 드레스룸.
여기도 온통 하얀색이었다. 옷들이 색깔별로, 길이별로, 브랜드별로 오와 열을 맞춰 걸려 있었다. 강박증 환자의 천국이 있다면 여기일 거다.

"이거, 이거, 그리고 저거. 입어 봐."
도진이 옷걸이에서 원피스 몇 벌을 꺼내 내게 던졌다.
나는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근데 이거 다 여자 옷이네요? 원장님 여장 취미 있어요?"
"전 여친들 선물 주려다 못한 거야. 사이즈 맞을지 모르겠네."
"...재활용이었냐."

나는 투덜거리며 옷을 갈아입으러 구석으로 갔다.
도진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거기서 입어. 나가지 말고."
"여기서요? 원장님 있는데?"
"볼 생각 없으니까 걱정 마. 네 몸매, 의학적으로 전혀 흥미 없어."

자존심 상하네.
나는 등 돌리고 셔츠를 벗었다.
그때였다.

우웅-
바닥에 놓아둔 내 핸드폰이 진동했다.
혁이 오빠였다.
도진한테 없다는 소리 듣고 바로 나한테 거는 집요함.

나는 당황해서 핸드폰을 집으려다, 바닥에 놓인 쇼핑백 끈에 발이 걸렸다.

"악!"

몸이 기우뚱했다.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내 앞에는 전면 거울이 있었다. 이대로 부딪히면 거울 깨지고, 내 머리통도 깨지고, 빚은 5천에서 1억으로 늘어난다.

눈을 질끈 감았다.
충격이 와야 하는데, 오지 않았다.

대신 단단한 무언가가 내 팔을 낚아챘다.

"......!"

눈을 떴다.
도진이었다.
그가 내 오른팔을 꽉 잡고 있었다.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 쪽으로 당긴 자세였다.

거리는 10cm.
그의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비누 향. 그리고 옅은 소독약 냄새.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내 팔뚝에 닿은 감촉이었다.
따뜻했다.
거칠지 않고 부드러운, 사람의 체온.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도진의 손이 내 맨살을 잡고 있었다.
장갑도 없이.
티슈도 없이.
맨손으로.

"......"
"......"

도진도 놀란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깨달은 사람처럼,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결벽증 환자가, 세균 덩어리라고 질색하던 나를, 반사적으로 구했다.

"너..."
도진이 입을 뗐다.
그가 잡은 손을 놓으려는 찰나였다.

띠띠띠띠-
띠로리!

1층 현관에서 경쾌한 도어락 해제음이 울렸다.
아까와는 달랐다.
이번엔 도진이 누른 게 아니었다.

이 집에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딱 세 명이다.
집주인 차도진.
청소 업체 아주머니(오전 9시 방문).
그리고...

[야, 차도진! 너 집에 있지?]

1층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혁이었다.
우리 오빠.

도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나도 얼어붙었다.
지금 우리는 2층 드레스룸에 있다. 나는 셔츠 단추를 반쯤 푼 상태고, 도진은 내 팔을 잡고 끌어안다시피 서 있다.

누가 봐도 오해하기 딱 좋은 자세.
아니, 오해가 아니라 팩트 폭격이다.

[도진아? 나 들어간다?]

쿵, 쿵, 쿵.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진이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의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숨어."
그가 속삭였다.

"어디로요?"
"젠장, 아무 데나!"

혁이 오빠의 그림자가 복도 끝에 나타나기 직전이었다.


2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102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4개 (계약 체결 - 다음 날 아침/라면 사건 - 통화 - 드레스룸 위기)
  • 등장 캐릭터: 차도진, 이하루, 이혁(목소리/등장)
  • 공개된 설정: 도진의 결벽증 수준(냉장고 상태), 혁이 도진의 집 비번을 알고 있음, 도진이 반사적으로 하루를 구함
  • 심은 복선: 도진이 전 여친 선물용으로 샀던 옷들(서연과의 과거 암시), 혁의 집요함
  • 클리프행어 유형: 위기 + 역전 (맨손 스킨십 직후 오빠의 급습)
  • 다음 화 연결 방식: 직접 연결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은신 시도)
ep3 (3,196 tokens)

3화: 옷장 속의 바이러스

"숨어."

도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그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나를 밀어 넣었다.
바로 뒤에 있던 붙박이장 문이 열렸고, 내 몸이 어둠 속으로 구겨졌다.

"억!"

비명은 입술 안쪽에서 터졌다.
도진이 내 입을 막으며 함께 들어왔기 때문이다.

쿵.
문이 닫혔다.
빛이 사라졌다.

완벽한 어둠. 그리고 완벽한 밀실.
우리는 겨울 코트와 정장 재킷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었다.

"야, 차도진! 없는 척하지 말고 나와!"

1층이 아니었다.
발소리는 이미 2층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혁이 오빠다.
저 인간은 내 오빠이기 전에, 대한민국 육상부 출신에 강력계 형사 지망생이었다(지금은 헬스장 관장이지만). 청각과 후각이 개코보다 예민하다는 뜻이다.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드레스룸 입구에서 멈췄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참았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차도진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쪽은 상태가 더 심각했다.

어둠 속이라 보이진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내 입을 막고 있는 그의 손바닥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차가운 식은땀이 내 뺨에 닿았다.

'아, 맞다. 이 사람 결벽증이지.'

지금 이 상황은 도진에게 재난 영화나 다름없다.
좁고, 환기가 안 되고, 먼지(옷)가 가득한 공간.
게다가 '세균 덩어리'인 나와 몸이 빈틈없이 밀착되어 있다.

그의 허벅지가 내 다리 사이에 끼어 있고, 그의 가슴팍이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토하는 거 아냐?’

덜컥 겁이 났다.
여기서 그가 발작이라도 일으키면 끝장이다. 혁이 오빠한테 들키는 건 둘째 치고, 계약금 5천만 원이 공중분해 된다.

[이상하네. 차도진 차는 주차장에 있는데.]

문밖에서 혁이 오빠의 혼잣말이 들렸다.

[어디 짱박혀서 자나?]

끼익-
드레스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빛 한 줄기가 옷장 틈새로 스며들었다.

도진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허억, 헉...’
과호흡이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된다. 소리가 새어 나간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내 입을 막고 있던 도진의 손을 떼어내고, 반대로 내가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눈을 가렸다.

"......!"

도진이 움찔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댔다.
최대한 작게, 공기만 내보내듯 속삭였다.

"쉿. 진정해요."

미친 짓이었다.
결벽증 환자의 눈과 입을, 씻지도 않은 손으로 만지다니.
평소 같으면 내 손목을 부러뜨리고 소독제 한 통을 다 부었을 거다.

하지만 도진은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목을 꽉 쥐었다.
밀어내려는 게 아니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절박하게 매달리는 악력이었다.

[킁킁.]

밖에서 오빠가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냄새... 육개장 사발면?]

아. 망했다.
아까 먹고 환기 덜 시킨 냄새가 여기까지 올라온 모양이다.

[이 새끼가 라면을 먹을 리가 없는데. 냄새는 나고...]

오빠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드레스룸 안을 천천히 배회하고 있었다. 마치 범죄 현장을 수색하는 형사처럼.

[야, 차도진. 있으면 나와라. 좋은 말로 할 때.]

툭.
오빠가 옷장 문을 툭 쳤다.
바로 우리가 숨어 있는 그 문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제발 그냥 가라. 나 빚 갚아야 해. 여기서 들키면 나도 죽고 너도 죽고 우리 다 죽어.

도진의 심장 박동이 내 등 뒤로 전해졌다.
쿵, 쿵, 쿵, 쿵.
너무 빨랐다. 이러다 쇼크 오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
우리 집 강아지가 천둥 칠 때 무서워하면 해주던 방식이었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안 들켜요. 숨 쉬어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게 통했는지, 아니면 산소 부족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건지.
도진의 거친 호흡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의 머리가 내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무거웠다.
하지만 밀어낼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1분 같은 1초가 흘렀다.

[...없나?]

오빠가 중얼거렸다.

[에이씨, 똥 마려운데 화장실이나 쓰고 가야지.]

뚜벅, 뚜벅.
발소리가 멀어졌다.
드레스룸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달칵.

갔다.
나는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하아... 갔어요. 원장님."

나는 도진의 눈과 입에서 손을 뗐다.
이제 밀쳐지겠지?
'더러워! 만지지 마!' 하면서 소독제를 찾겠지?

각오하고 한 걸음 물러나려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도진이 나를 놔주지 않았다.
내 손목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풀리지 않았다.

"저기요...?"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희미하게 그의 윤곽이 보였다.
도진은 고개를 숙인 채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이마가 내 쇄골 즈음에 닿아 있었다.

"원장님? 괜찮으세요? 토할 것 같으면 봉투..."

"가만히 있어 봐."

낮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명령조였지만, 평소의 날 선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애원하는 듯한 뉘앙스.

"네?"
"어지러워."
"그러니까 나가자고요. 여기 공기 안 좋아서 그래요."

내가 문고리를 잡으려 하자, 도진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
내 뇌세포가 일시 정지했다.
허리?
지금 차도진이 내 허리를 안은 거야?
맨손으로?
이 더러운(그의 기준에서) 티셔츠 위로?

"원장님, 저기, 이거 성추행으로 신고하면 위약금 까주나요?"
"시끄러워."

도진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름이 돋았다.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너무... 야릇해서였다.

좁은 옷장.
어둠.
그리고 남자 향수 냄새와 섞인 그의 체취.

그는 결벽증 환자답게 항상 무향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땀 냄새.
사람 냄새.
그리고 묘한 긴장감이 섞인 페로몬 같은 것들.

"이하루."
그가 웅얼거렸다.

"네, 네."
"너 오늘 뭐 썼어?"
"뭐, 뭘요?"
"향수. 아니면 바디워시."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아무것도 안 썼는데요. 그냥 원장님 욕실에 있는 비누 썼는데."

도진이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평소의 그 차가운 눈빛이 아니었다.
몽롱하고, 풀려 있고, 어딘가 위험해 보이는 눈.

그가 내 목덜미 근처로 코를 가져갔다.
킁.
숨을 들이켰다.

"힉."
나는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상하네."

도진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더 단단히 끌어당겼다.
이제 우리 사이엔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었다.

"원래는... 역겨워야 하는데."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척추 라인을 따라 천천히, 아주 느리게 쓸어 올렸다.
전기가 찌릿하게 올랐다.

"토할 것 같고, 숨도 못 쉬겠고, 닿은 자리를 칼로 도려내고 싶어야 정상인데."

그는 마치 자가 진단을 내리는 의사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행동은 전혀 의사답지 않았다.
그는 내 귓가에 입술을 스칠 듯이 가까이 댔다.

"너한테선... 소독약 냄새가 안 나도 괜찮아."

"......"

"오히려."

그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꿀꺽.

"더 맡고 싶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건 연기가 아니다. 계약서 조항에도 없는 내용이다.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텐션이었다.

도진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키스할 거리였다.
아니, 키스보다 더한 짓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눈을 감아야 할지, 그를 밀쳐야 할지, 아니면 위약금을 물어내야 할지 계산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도 홀린 것 같았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기 직전.
1센티미터.
아니, 5밀리미터.

덜컥.

옷장 문고리가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그리고 익숙한, 아주 끔찍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찾았다."

나는 실눈을 떴다.
활짝 열린 옷장 문.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거대한 그림자.

이혁이었다.
우리 오빠가, 썩소를 지으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차도진. 내 동생이랑 거기서 뭐 하냐?"

도진의 입술이 내 입술 바로 앞에서 멈췄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은 채, 굳어버린 석고상처럼 오빠를 올려다봤다.

망했다.
이번엔 진짜, 빼도 박도 못하게 망했다.


3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45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옷장 은신 - 밀착과 텐션 - 오빠의 발각)
  • 등장 캐릭터: 차도진, 이하루, 이혁
  • 공개된 설정: 도진의 결벽증이 하루에게만 반응하지 않음(신체적 변화), 혁의 눈치빠름
  • 심은 복선: "소독약 냄새가 안 나도 괜찮아" (향후 로맨스의 핵심 키워드)
  • 클리프행어 유형: S급 복합 (감정 절정 + 위기 + 폭로)
  • 다음 화 연결 방식: 즉각적 위기 해결 (4화 오프닝에서 변명/도주)

3화 결제 유도 분석

  • 즉각적 궁금증: 문을 연 오빠에게 이 상황(옷장 속 포옹)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도진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결벽증으로 돌아갈까?
  • 중기적 궁금증: 도진은 왜 하루에게만 반응하지 않는가? 이것이 사랑인가, 아니면 특이 체질인가? 이 '예외성'이 앞으로의 동거 생활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스킨십 진도에 대한 기대)
  • 장기적 궁금증: 오빠의 반대와 친구(전여친)의 존재를 넘어서 두 사람은 진짜 연인이 될 수 있을까?
  • 독자 감정 상태: 도파민 최고조. "키스 직전 끊기"에 대한 분노와 "다음 화를 당장 내놓으라"는 갈증이 혼재됨.
  • 예상 결제 전환 동기: 남주의 '입덕 부정기'가 깨지고 본능이 튀어나온 첫 순간을 목격함. 이 텐션이 유지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100원(또는 이용권)을 쓸 가치가 충분함.

스텝 재실행

현재 v1 → v2으로 재생성합니다. 이전 버전은 이력에 보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