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9: 에피소드 리비전

Critic+Writer · 버전 1 · 초안

산출물 (v1)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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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최악의 타이밍

강남대로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폭우가 쏟아졌다.
택시 뒷좌석 구석, 나는 젖은 쥐꼴을 하고 웅크려 있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빗물이 시트를 적셨다. 룸미러로 힐끔거리는 기사님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실연당하고 비 맞은 광녀쯤으로 보일 거다.

‘틀린 말은 아니지. 실연당한 거.’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 세 글자. [차도진].
나는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다.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무너질 게 뻔했다.
"좋아해."
낮게 깔리던 그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그 달콤하고 잔인한 거짓말이.

서연이가 온다.
내 10년 지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친구.
그런데 내가 걔 전 남친이랑 잤다고? (물론 키스 직전까지였지만, 마음은 이미 선을 넘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이건 쓰레기나 할 짓이다.

“손님, 다 왔습니다.”

택시가 카페 앞에 멈췄다.
축축하게 젖은 몸을 이끌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에어컨 바람이 훅 끼쳐왔다. 뼛속까지 시린 냉기에 몸이 절로 떨렸다.

“하루야! 여기!”

창가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서연.
1년 만에 보는 내 친구는 여전히 빛이 났다. 뉴욕 물을 먹어서 그런지 더 세련되고 당당해 보였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다가갔다.

“어머, 너 꼴이 왜 이래? 밖에 비 많이 와?”

서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급히 냅킨을 건넸다.

“……어. 좀 맞았어.”

“우산도 없이? 얼른 닦아. 감기 걸리겠다.”

서연이는 내 손을 잡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따뜻한 온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너는 이렇게 다정한데. 나는 널 배신했어.

“서연아.”

“응? 왜 그래, 표정이 심각해.”

“나… 할 말 있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서연이가 소개한다는 그 '전 남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내가 먼저 자백해야 했다. 그래야 벼룩만큼의 양심이라도 지키는 거니까.

“나… 만나는 남자 있어.”

“정말? 대박! 누구? 잘생겼어? 뭐 하는 사람이야?”

서연이의 눈이 반짝였다.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통증으로 정신을 붙들었다.

“서연아. 나 진짜 나쁜 년이야. 네가 욕해도 할 말 없어. 뺨 때려도 맞을게.”

“……뭐?”

“나, 도진 오빠랑 만나. 차도진.”

정적.
카페의 소음이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간 듯 사라졌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테이블 무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네가 사귀었던 남자인 거 알아. 알면서도… 내가 꼬셨어. 아니, 내가 좋아했어.”

목이 메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가 오빠 못 잊어서 한국까지 왔다고 해도, 나 그 사람 포기 못 해. 미안해. 진짜 미안한데… 나 그 사람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내 고백은 이기적이고 추했다.
하지만 그게 내 날것의 진심이었다. 우정보다 사랑을 선택한 대가는 달게 받을 각오였다.

“……누구?”

서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황당함 그 자체였다.

“차도진? 청담동 개원한 그 차도진?”

“……어.”

“잠깐만. 하루야, 고개 좀 들어봐.”

서연이가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서연이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배를 잡고 끅끅거리며.

“푸하하하! 야, 너 미쳤어? 걔랑 사귄다고? 그 결벽증 환자랑?”

“……어?”

“와, 대박이다. 이하루 비위도 좋다. 야, 걔랑 키스는 어떻게 했어? 하기 전에 구강청결제 3번 하라고 안 해? 손잡을 때 소독티슈로 안 닦아?”

“……안 하던데.”

“뭐? 안 해?”

서연이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 새끼가 그냥 했다고? 맨입으로?”

“……응.”

“와… 배신감 느끼네. 나랑 할 때는 키스하기 전에 스케일링부터 하라고 난리 치더니.”

서연이는 혀를 찼다. 분노나 질투가 아니었다. 순수한 어이없음이었다.

“서연아, 너… 도진 오빠 안 좋아해?”

“좋아하긴 개뿔. 엄마 친구 아들이라 억지로 몇 번 만난 거야. 얼굴은 내 취향이라 좀 참아보려고 했는데, 3일 만에 학을 뗐다. 영화관 팝콘도 더럽다고 못 먹게 하는 놈을 어떻게 만나?”

“그럼… 아까 전화로 말한 전 남친은 뭔데? 널 못 잊었다는 그 사람.”

“아, 걔? 마이클.”

“……마이클?”

“뉴욕에서 만난 애. 한국까지 쫓아왔어, 스토커처럼. 그래서 너한테 좀 도와달라고 하려 했지. 남친인 척 좀 해달라고.”

맥이 탁 풀렸다.
마이클. 마이클이라니.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 아래로 흘러내릴 뻔했다.

“그럼… 사진은? 오빠 서재에 네 사진 있던데.”

“아, 그 졸업식 사진? 그거 내가 버려달라고 했는데 아직도 안 버렸어? 귀찮아서 놔뒀나 보네. 걔 원래 자기 물건 위치 바뀌는 거 싫어해서 쓰레기도 제자리에 두잖아.”

모든 게 오해였다.
도진 오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서연이를 잊은 지 오래였고(아니, 애초에 별 감정도 없었고), 사진은 그냥 방치된 거였다.
그리고 그는, 나한테는 그 지독한 결벽증을 참아가며 진심을 보여줬다.

‘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가 빗속에서 나를 잡으려던 표정이 떠올랐다.
상처받은 눈빛.
나는 그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것도 최악의 방식으로.

“야, 근데 너 진짜 차도진이랑 사귀어? 걔가 여자를 만나? 그것도 내 친구를?”

서연이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어. 나 걔 좋아해. 진짜 많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연아, 미안. 나 가봐야겠어.”

“어딜? 야,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도진 오빠한테! 나 지금 가서 빌어야 돼!”

나는 카페를 뛰쳐나갔다.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 전화 15통. [차도진].

나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받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집요한 사람이다. 내가 받을 때까지 백 번이고 걸었을 사람이다. 그런데 왜 안 받지?

‘설마.’

나는 택시를 잡으려 도로로 뛰어들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도진 오빠였다.

“여보세요! 오빠!”

[……여보세요? 이 핸드폰 주인분 지인이신가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누구세요? 도진 오빠 핸드폰 아니에요?”

[아, 네. 여기 응급실입니다. 환자분이 쓰러지셔서 실려 오셨는데, 최근 통화 목록에 이 번호가 제일 많아서요.]

“……네?”

[차도진 님 보호자 되십니까? 지금 바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상태가 좀 안 좋습니다.]

현기증이 일었다.
쓰러졌다고? 그 천하무적 차도진이?

“지금 갈게요! 어디예요!”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졌다.
오빠, 미안해요. 제발 무사해줘요. 내가 잘못했어요.


8화: 무균실 폐쇄 조치

응급실 복도는 소독약 냄새로 진동했다.
평소라면 도진 오빠가 좋아했을 냄새지만, 지금은 역하게만 느껴졌다.

“차도진 환자 어디 있어요!”

내가 간호스테이션에 달려가 소리쳤다.

“저쪽 VIP 병실로 옮기셨어요. 근데 보호자분, 지금 꼴이….”

내 몰골은 처참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에, 화장은 다 번져서 팬더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VIP 병실로 달렸다.
문이 열리고,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가 보였다.
창백한 얼굴. 링거줄이 주렁주렁 매달린 팔.
그는 잠들어 있었다.

“오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의사가 다가왔다.

“과로에 급성 스트레스성 쇼크입니다. 비를 많이 맞아서 저체온증도 왔고요. 다행히 생명엔 지장 없습니다만, 안정이 필요합니다.”

의사가 나가고, 나는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을 잡았다.
항상 뜨거웠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내가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그 빗속에서 나를 찾으러 다니지 않았을 텐데.
나는 그의 손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끄러워.”

갈라진 목소리.
고개를 들자, 도진 오빠가 눈을 뜨고 있었다.
초점이 흐릿했지만,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오빠! 정신이 들어요?”

“……왜 울고 있어. 못생기게.”

그가 힘겹게 손을 들어 내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링거줄 때문에 팔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가지 마.”

그가 내 손목을 꽉 잡았다. 환자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다시는…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마.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으니까.”

“안 가요. 아무 데도 안 가요.”

나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서연이 만났어요. 다 오해였어요. 오빠가 서연이 안 좋아하는 거, 사진도 그냥 둔 거라는 거… 다 들었어요.”

“……바보.”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너밖에 없다고.”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워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안정 취하랬단 말이에요.”

“답답해. 이거 빼.”

그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확 뽑아버렸다.

“악! 오빠 미쳤어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얀 환자복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결벽증 환자가 자기 피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빠, 피! 피 나잖아요!”

“상관없어.”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에 젖은 내 옷 냄새, 땀 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뒤섞였다.
완벽한 오염이었다.

“이제 나한테 무균실 같은 건 없어. 네가 있는 곳이 내가 숨 쉴 곳이야.”

그의 고백에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나도 그를 꽉 끌어안았다.
더러워져도 좋았다. 엉망진창이 되어도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깊게 입 맞췄다.

병실 안이 뜨거운 숨결로 가득 찼다.
그때였다.

드르륵.

“도진아! 너 쓰러졌다며! 괜찮… 으악!”

문이 활짝 열리고, 누군가 들이닥쳤다.
익숙한 목소리.
이재영 오빠였다.

그리고 그 뒤로, 서연이가 따라 들어왔다.

“어머.”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나와 도진 오빠는 입술이 닿은 채로 굳어버렸다.
재영 오빠는 입을 떡 벌린 채, 뒷목을 잡고 있었다.

“야… 너네… 지금….”

재영 오빠의 손가락이 우리를 번갈아 가리키며 떨렸다.

“뭐 하냐?”

망했다.
제대로 들켰다.

도진 오빠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단단히 감싸 안으며 재영 오빠를 노려봤다.

“보면 모르냐. 연애하잖아.”

“뭐, 뭐? 연애? 누구랑? 내 동생이랑?”

재영 오빠가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네가 내 동생을 왜 만나! 너 결벽증이라며! 여자 손도 못 잡는다며!”

“고쳤어.”

도진 오빠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네 동생 한정으로 완치다. 그러니까 썩 나가. 분위기 깨지 말고.”

“와… 진짜 돌겠네.”

재영 오빠가 휘청거리자, 뒤에 있던 서연이가 그를 부축했다.

“오빠, 진정해요. 둘이 좋다잖아요.”

“너는 알고 있었어? 이서연 너도 한패야?”

“아니 뭐… 방금 알았죠. 근데 잘 어울리잖아요. 결벽증 환자랑 털털녀. 천생연분이네.”

서연이가 윙크를 날렸다.
재영 오빠는 "아이고 두야"를 연발하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도진 오빠는 피 묻은 손으로 내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리고 재영 오빠에게 선전포고했다.

“허락은 필요 없어. 통보다.”

“뭐?”

“나 하루랑 결혼할 거야. 가짜 말고, 진짜로.”

숨이 턱 막혔다.
결혼? 지금 결혼이라고 했어?

도진 오빠가 나를 보며 웃었다.
처음 보는,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준비해, 이하루. 위약금 3배 물어내기 싫으면, 평생 내 옆에서 갚아.”

나는 웃으며 그의 가슴을 팍 쳤다.

“콜. 갚을게요. 평생.”


9화: 계약 위반의 밤

퇴원 수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의사는 하루만 더 입원하라고 권했지만, 도진 오빠는 "내 집이 병원보다 깨끗해"라며 고집을 피웠다. (그건 사실이었다.)

재영 오빠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서연이가 "오빠, 술이나 한잔하러 가요. 내가 쏠게"라며 끌고 나간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둘만 남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비는 그쳐 있었다.
서울의 야경이 젖은 도로 위로 반짝거렸다.

도진 오빠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신호 대기 중일 때마다 그는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유리 인형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오빠, 운전에 집중해요.”

“손 놓으면 사라질까 봐 그래.”

“안 사라져요. 보증금도 없는데 어딜 가요.”

“보증금, 안 갚아도 돼. 그냥 내 집에 눌러살아.”

“그건 싫어요. 저도 자존심이 있죠. 갚을 거예요.”

“어떻게? 몸으로?”

그가 능글맞게 웃었다.
이 남자, 결벽증 봉인 해제되더니 숨겨왔던 능글미가 폭발했다.

집에 도착했다.
익숙한 현관. 소독약 냄새 대신 은은한 디퓨저 향기가 났다.
도진 오빠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악! 오빠, 아직 환자잖아요!”

“멀쩡해. 너 하나 들 힘은 있어.”

그는 나를 안은 채 거실을 가로질러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계약서.
[약혼 계약서]라고 적힌 그 종이를, 그가 집어 들었다.

“이거, 이제 필요 없지?”

찌이익.
그가 망설임 없이 계약서를 반으로 찢었다.
한 번 더, 또 한 번.
종이 조각들이 눈송이처럼 바닥으로 흩날렸다.

“조항 15조. 신체 접촉 금지.”

그가 나를 내려놓지 않은 채 침실로 걸어갔다.

“오늘 밤, 그 조항을 아주 철저하게 위반해 볼 생각인데.”

그가 침대에 나를 눕혔다.
하얀 침대 시트 위로 내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그가 내 위로 올라왔다.
안경을 벗어 협탁에 올려두는 손길이 느릿하고 섹시했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
습관처럼 침대 시트의 주름을 펴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평소라면 절대 용납하지 못했을 미세한 구김이었다.
하지만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거뒀다.
지금 중요한 건 시트의 주름이 아니라, 내 입술이라는 듯이.

“을은 갑의 위생 기준을 위반할 권리가 있어.”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이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나를 더럽혀도 돼, 하루야. 마음껏.”

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뜨거운 숨결. 거친 손길.
더 이상 라텍스 장갑도, 소독제도, 경계선도 없었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등 근육이 단단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가 내 귓볼을 깨물며 낮게 속삭였다.

"이제부턴 무균실 아니야. 오염 구역이지."

"......상관없어."

"후회 안 해?"

"안 해."

그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내 입술을 삼켰다.
창밖에는 다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방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우리의 밤은 길었고, 완벽하게 오염되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눈부신 햇살이 커튼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디 갔지?’

설마 꿈은 아니었겠지?
나는 부스스한 머리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진 오빠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토스트와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커피가 차려져 있었다.
물론, 접시와 포크는 자로 잰 듯 완벽한 각도로 놓여 있었다.
결벽증은 완치되지 않았다. 그냥 나한테만 관대해진 거다.

“일어났어?”

그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그의 미소가 눈부셨다.

“오빠가 요리를 다 했어요?”

“배달 음식은 몸에 안 좋잖아. 내 여자는 좋은 것만 먹어야지.”

그가 다가와 내 이마에 굿모닝 키스를 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근데 오빠.”

“응?”

“바닥에 이거 뭐예요?”

내가 발밑을 가리켰다.
어젯밤 찢어버린 계약서 조각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위약금 3배]라고 적힌 부분이었다.

도진 오빠가 그걸 줍더니 씩 웃었다.

“이건 남겨두자.”

“왜요?”

“네가 도망가려고 하면 협박용으로 쓰게.”

“치사해, 진짜.”

우리는 마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균실 같았던 이 집이, 처음으로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졌다.
따뜻하고, 적당히 소란스럽고, 사랑으로 가득 찬.

“밥 먹자. 식겠다.”

그가 의자를 빼주었다.
나는 식탁에 앉으며 생각했다.
보증금 3천만 원 날리고 인생 망한 줄 알았는데, 로또를 맞았다고.
그것도 아주 잘생기고, 돈 많고, 나밖에 모르는 결벽증 로또를.


10화: 완벽한 오염 (에필로그)

1개월 후.
우리는 내 본가, 그러니까 부모님이 계신 오래된 주택을 방문했다.
도진 오빠에게는 ‘최종 보스전’이나 다름없는 날이었다.

“오빠, 괜찮겠어? 우리 집 좀 낡았는데.”

“상관없어.”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넥타이를 고쳐 맸다.
하지만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그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당에 묶인 강아지가 흙발로 달려들고, 현관에는 흙 묻은 장화가 굴러다녔다.

“아이고, 우리 사위 왔는가!”

아빠가 텃밭에서 일하다 말고 달려오셨다.
흙투성이 장갑을 낀 채로.

“아빠! 손!”

내가 소리치기도 전에, 아빠가 도진 오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악수.
그것도 흙과 비료가 섞인 장갑으로.

나는 숨을 멈췄다. 도진 오빠가 기절하거나, 손 소독제를 꺼내 뿌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차도진입니다.”

그는 웃었다.
눈꼬리가 살짝 떨리긴 했지만, 그는 아빠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허허, 손이 참 곱네. 의사 선생이라 그런가.”

“과찬이십니다.”

식사 시간은 더 가관이었다.
엄마는 “손맛이 최고”라며 김치를 손으로 찢어서 도진 오빠 밥그릇에 올려주셨다.
위생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엄마, 제발!’

나는 식탁 밑으로 오빠의 다리를 툭 쳤다.
‘안 먹어도 돼. 내가 먹을게.’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 김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그가 김치를 삼켰다.

“……맛있네요, 어머님.”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나는 울 뻔했다.
저 남자가, 내 부모님을 위해서 자기 평생의 강박을 누르고 있었다.
사랑이었다. 저건 명백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다시, 1년 후.

“이하루! 과자 부스러기 흘리지 말랬지!”

도진 오빠의 잔소리가 청담동 거실을 울렸다.
나는 소파에 누워 감자칩을 먹다가 움찔했다.

“아, 미안. 주울게.”

“됐어. 내가 해.”

그가 로봇청소기보다 빠르게 다가와 물티슈로 바닥을 훔쳤다.
여전하다, 여전해.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더니, 차도진의 결벽증은 불치병이 확실하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 흘린 거 아깝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감자칩 조각을 집어 들더니, 툭 털어서 자기 입으로 쏙 넣었다.

“……오빠, 지금 뭐 했어?”

내가 경악하며 물었다.

“뭐가. 3초 안에 주우면 괜찮아.”

“와… 차도진 많이 컸네.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 먹고.”

“네가 흘린 거잖아. 네 균은 면역 생겨서 괜찮아.”

그가 내 옆에 털썩 앉더니, 내 손에 들린 감자칩을 뺏어 먹었다.
손가락에 묻은 양념까지 쪽쪽 빨면서.
저 남자가 1년 전만 해도 내 존재 자체가 오염이라며 소독제를 난사하던 그 남자가 맞나 싶다.

우리는 결혼했다.
정확히는 6개월 전에.
재영 오빠는 결혼식 날까지 “내 친구가 내 매제라니, 이건 악몽이야”라며 울부짖었지만, 축의금은 제일 많이 냈다.
서연이는 부케를 받았다. (그 마이클이라는 스토커는 정리하고, 지금은 연하남이랑 썸 타는 중이다.)

“오늘 날씨 좋다. 나갈까?”

도진 오빠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이었다.

“어디로? 사람 많을 텐데.”

“상관없어. 너랑 가는 거면 어디든.”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커플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여의도 윤중로에는 벚꽃 반, 사람 반이었다.
예전의 도진 오빠라면 기겁을 하고 도망쳤을 인파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내 손을 꽉 잡고 인파 속을 걷고 있었다.
누군가 어깨를 부딪쳐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보호해 주었다.

“오빠, 괜찮아? 땀 나는데.”

“조금 힘든데… 참을 만해.”

그가 씩 웃었다.

“네가 있잖아. 내 백신.”

바람이 불어 벚꽃잎이 눈처럼 쏟아졌다.
그의 머리카락 위에, 어깨 위에 분홍색 꽃잎이 내려앉았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었다.

“사랑해, 차도진.”

“나도 사랑해, 이하루.”

그가 사람들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내 인생의 무균실은 사라졌다.
대신, 세상 온갖 먼지와 소음과 세균이 침투해도 끄떡없는, 단단하고 따뜻한 사랑이 그 자리를 채웠다.

우리는 완벽하게 오염되었다.
그리고 그 오염 속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완결]

4화: 라텍스 장갑을 벗고

“……알겠어요. 나갈게요.”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변명은 구차했다. 남의 서재에 함부로 들어간 것도, 엎어둔 액자를 훔쳐본 것도 명백한 내 잘못이었다.

무엇보다, 이 남자가 내 절친의 전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안 이상, 더는 이 집에 머물 명분이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렸다.
방문 손잡이를 잡는 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잠깐.”

등 뒤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려고.”

“나가라면서요. 짐 싸서 나가야죠. 위약금은… 몸으로 때우든 콩팥을 팔든 알아서 할게요.”

“밖을 봐.”

그의 턱짓에 나는 창가를 바라봤다.
유리창이 깨질 듯이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천둥 번개가 번쩍이며 청담동의 야경을 하얗게 지웠다.

“이 날씨에 어딜 간다는 거야. 갈 데는 있고?”

“찜질방이라도 가야죠.”

“내 집에서 쫓겨난 여자가 찜질방에서 자게 둘 순 없어. 재영이가 알면 날 죽이려 들 테니까.”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그리고 계약서 잊었나 본데, 갑의 동의 없는 퇴거도 위약금 대상이야.”

“아니, 오빠가 나가라고 했잖아요!”

“취소해.”

그가 딱 잘라 말했다.

“지금 나가면 너나 나나 개고생이야. 넌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될 거고, 난 내 친구한테 해명하느라 진을 빼겠지. 비효율적이야.”

그는 다시 평소의 차도진으로 돌아와 있었다.
건조하고, 계산적이고, 재수 없는 의사 선생님으로.

하지만 나는 봤다.
그가 액자를 낚아챌 때 스치듯 보였던 그 눈빛.
들키고 싶지 않은 상처를 들킨 짐승의 눈빛을.

“오늘은 늦었어. 내일 얘기해.”

그는 나를 지나쳐 침실로 들어갔다.
쾅.
문이 닫혔다.

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연아.
나 어떡하냐.
네 전 남친이 나를 안 보내준다는데, 이거 그린라이트냐, 아니면 그냥 호구 잡힌 거냐.

물론, 답은 후자겠지만.


그날 이후,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이름하여 ‘투명 방역막’.

나는 철저하게 그를 피했다.
아침에 그가 일어날 시간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했고, 그가 퇴근할 시간이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서연이가 1년 동안 사귀었다던 그 남자.
헤어지고 나서 펑펑 울며 “다시는 한국 남자 안 만나”라고 선언하게 만든 장본인.

그런 남자와 한집에 살면서, 손 한 번 잡았다고 설렜던 내가 쓰레기 같았다.

‘거리두기 4단계가 필요해.’

나는 스스로를 격리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뚱어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흐으….”

입주 5일 차 아침.
나는 턱을 부여잡고 침대에서 굴렀다.
오른쪽 어금니가 욱신거렸다.
스트레스성 치통인 줄 알았는데, 거울을 보니 잇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망했다.’

치과에 가야 한다.
하지만 내 통장 잔고는 3만 원.
강남 치과들의 살인적인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이하루. 아직 자?”

도진 오빠였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자요.”

“자는 사람이 대답은 잘하네. 나와. 밥 먹어.”

“안 먹어요.”

“굶어 죽어서 시체 치우게 하지 마. 나와서 샐러드라도 먹어.”

“이빨 아파서 못 먹는다고요!”

아차.
말실수했다.
문밖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빨?”

“아니, 치아요. 치아.”

“나와 봐.”

“싫어요.”

“3초 준다. 하나. 둘.”

철컥.
문이 열렸다.
도진 오빠가 팔짱을 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출근 준비를 마친 완벽한 수트 차림이었다.

“입 벌려 봐.”

“싫다니까요. 동네 치과 갈 거예요.”

“내 눈앞에 치과 전문의를 두고 돌팔이한테 가겠다고? 돈 많아?”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뒷걸음질 쳤지만, 침대 헤드에 막혀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가 내 턱을 잡으려다 멈칫했다.
맨손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턱을 감쌌다.

“아….”

살짝 눌렀는데도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부었네. 사랑니야.”

“사랑니요? 저 다 뺐는데요?”

“매복이었나 보지. 옷 입어. 병원으로 와.”

“싫어요. 오빠네 병원 비싸잖아요.”

“직원 할인 해줄게.”

“저 직원 아닌데요.”

“약혼녀 할인. 100퍼센트.”

그가 시계를 확인하며 돌아섰다.

“11시까지 와. 늦으면 예약 취소다.”


청담동 한복판에 우뚝 솟은 [차도진 치과의원].
건물 외관부터가 ‘나 비싸요’를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대기실은 갤러리처럼 꾸며져 있었고,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하지만 내 귀에는 저 안쪽 진료실에서 들려오는 ‘위잉—’ 소리만 크게 들렸다.
지옥의 드릴 소리.

“이하루 님? 들어오세요.”

간호사 언니의 안내를 받아 진료실로 들어갔다.
유니트 체어에 앉자마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치과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누우세요.”

마스크와 페이스 쉴드로 무장한 도진 오빠가 나타났다.
병원에서의 그는 집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차갑고, 권위적이고, 무엇보다… 섹시했다.

‘미쳤어, 이하루. 아파 죽겠는데 섹시가 눈에 들어오냐?’

나는 입을 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검진만 할 거야. 긴장 풀고.”

차가운 기구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놀림은 기계처럼 정확했다.

“역시 매복이네. 염증이 생겼어. 당장 발치해야겠는데.”

“지, 지금요?”

“어. 놔두면 더 부어.”

그가 간호사에게 마취 주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공포에 질려 의자 팔걸이를 꽉 쥐었다.

“오빠, 저 마취 주사 진짜 싫어하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따끔해.”

그가 주사기를 들고 다가왔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이 내 입가를 벌렸다.
소독약 냄새가 훅 끼쳤다.
그 냄새가 묘하게 서연이를 떠올리게 했다.

서연이도 이 냄새를 맡았겠지.
이 의자에서, 그에게 치료를 받았겠지.
그때도 그는 이렇게 차갑고 완벽했을까?

“……윽!”

바늘이 잇몸을 찔렀다.
아픔보다 서러움이 먼저 밀려왔다.
나는 왜 여기서, 친구의 전 남친에게 입을 벌리고 있는가.

마취가 퍼지는 동안 그는 차트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입안이 얼얼해지는 느낌을 참으며 그를 훔쳐봤다.

“오빠.”

“말하지 마. 마취 덜 됐어.”

“서연이… 많이 좋아했어요?”

정적.
진료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그가 차트를 내려놓았다.
페이스 쉴드 너머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진료 중에 사담 금지야.”

“궁금해서요. 사진까지 간직할 정도면, 아직 못 잊은 거 아니에요?”

나는 일부러 긁어댔다.
차라리 그가 화를 냈으면 좋겠어서.
그래야 내가 마음 편히 그를 미워하고, 이 빌어먹을 썸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잊은 지 오래야.”

그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럼 사진은 왜 갖고 있어요?”

“버리는 걸 깜빡했어. 그게 다야.”

거짓말.
결벽증 환자가 자기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깜빡해?
먼지 한 톨도 용납 못 하는 사람이, 전 여친 사진을 방치한다고?

“거짓말하지 마요. 오빠 아직 서연이한테 미련 남았잖아. 그래서 나한테 잘해주는 거잖아요. 친구니까.”

“이하루.”

“나 치료 안 받을래요. 다른 병원 갈래.”

나는 냅킨을 뜯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였다.

탁.
그가 내 어깨를 눌러 다시 의자에 앉혔다.

“앉아.”

“싫어요! 이거 놔요!”

“움직이지 마. 다쳐.”

“다치든 말든! 오빠가 무슨 상관인데!”

내가 버둥거리자, 그가 내 양 손목을 잡아 의자 위로 고정시켰다.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나는 꼼짝없이 제압당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너, 며칠 동안 나 피해 다닌 이유가 그거였어?”

“…….”

“내가 네 친구를 못 잊어서, 너를 대용품으로 쓴다고 생각한 거야?”

“아니면 뭔데요! 갑자기 빚 갚아주고, 집 내주고, 약혼녀 해달라 하고… 이게 다 서연이 때문이 아니면 뭐냐고!”

내 외침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거친 숨소리가 마스크 너머로 들려왔다.

그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리고.

짝.
그가 끼고 있던 라텍스 장갑을 벗어 던졌다.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장갑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 오빠?”

나는 당황해서 그를 불렀다.
그는 결벽증이다. 진료 중에, 그것도 환자의 타액이 튈 수 있는 상황에서 맨손을 드러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반대쪽 장갑도 벗어 던졌다.
창백한 피부 아래 푸른 혈관이 비치는, 서늘하고도 단단해 보이는 손이었다.

그가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맨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흡….”

차가운 진료실 공기와 달리, 그의 손바닥은 뜨거웠다.
엄지손가락이 내 입술가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소독약 냄새가 사라지고, 그의 살냄새가 훅 끼쳐왔다.

“잘 봐.”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금 내 손에 장갑 있어?”

“……없어요.”

“내가 네 친구 때문에 이러는 거면, 굳이 내 원칙까지 깨가면서 널 만질까?”

그의 엄지가 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입술이 벌어졌다.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고정되었다가, 다시 내 눈으로 올라왔다.

“서연이는 내 손 잡는 것도 싫어했어. 소독약 냄새난다고.”

“…….”

“근데 넌 아니잖아.”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너무 가까워서, 속눈썹 개수까지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독은 끝났어.”

그의 손이 내 뒷목을 감싸 안았다.
피할 수 없었다. 아니, 피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치료야.”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기 직전, 뜨거운 숨결이 서로 엉켰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의료 행위가 아니다.
명백한 계약 위반이다.

5화: 가짜 데이트, 진짜 질투

입술이 닿기 0.1초 전.
드르륵.

“원장님, 다음 예약 환자분이… 헉!”

진료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 언니가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얼음이 되었다.

도진 오빠와 나는 감전된 사람처럼 떨어졌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고, 나는 의자 깊숙이 파고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터질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노크를 했는데 안 들리시는 것 같아서…!”

간호사 언니는 빛의 속도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진료실에 다시 적막이 흘렀다.
아까의 그 숨 막히던 텐션은 산산조각이 났다.

도진 오빠가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그의 귀 끝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발치부터 하자.”

그가 새 장갑을 꺼내 끼며 말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 그건… 마취 잘 됐는지 확인한 거야. 오해하지 마.”

“누가 뭐래요? 저도 알거든요. 촉진(觸診)인 거.”

거짓말.
촉진을 그렇게 야하게 하는 의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
하지만 나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목덜미가 화끈거려 마취가 풀릴 것만 같았다.

사랑니를 뽑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는 역시 명의였다. 아플 새도 없이 “끝났어”라고 말하며 거즈를 물려주었다.

“2시간 동안 뱉지 말고 삼켜. 빨대 쓰지 말고. 술 마시지 말고.”

그는 기계적인 주의사항을 읊으며 처방전을 건넸다.
하지만 내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집에 가 있어. 저녁에… 데리러 갈게.”

“네? 왜요?”

나는 웅얼거리며 물었다.

“오늘 본가 가서 저녁 먹기로 했잖아. 약혼녀 수업 실전.”

아. 맞다.
오늘이 그날이었지.
호랑이 굴, 아니 시월드 체험판 입장하는 날.


도진 오빠의 본가는 성북동의 으리으리한 단독주택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경비원이 거수경례를 했다.
먼지 한 톨 없는 대리석 바닥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잘 관리된 모델하우스 같았다.

“긴장하지 마. 그냥 밥만 먹고 나오면 돼.”

운전석의 도진 오빠가 말했다.
그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이번엔 장갑 없이, 맨손으로.
아까 병원에서의 일이 생각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오빠나 긴장 풀어요. 손에 땀나요.”

“……너 때문이야.”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못 들은 척했지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도진 오빠의 부모님이 우리를 맞이했다.
아버님은 근엄한 회장님 포스였고, 어머님은 우아한 사모님 그 자체였다.
다행히 두 분 다 나를 반겨주셨다. 재영 오빠의 동생이라는 프리미엄이 확실히 컸다.

“어머, 하루가 이렇게 컸니? 어릴 때 콧물 흘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머님이 내 손을 잡으려다 멈칫하셨다. 손수건을 꺼내시려는 걸 도진 오빠가 막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배운 대로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화기애애했다.
도진 오빠가 미리 언질을 줬는지, 부모님은 내 직업이나 재산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으셨다.
대신,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셨다.

“그래, 도진이가 먼저 고백했다고?”

어머님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도진 오빠를 힐끔 쳐다봤다. 시나리오대로 가야 한다.

“네. 오빠가… 병원으로 저를 부르더니, 갑자기 장갑을 벗고 제 손을 잡으면서….”

“크흠!”

도진 오빠가 사레들린 듯 기침을 했다.
물론, 이건 시나리오에 없던 내용이다.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을 각색한 거다.
그가 식탁 아래서 내 발을 툭 찼다. 하지 말라는 신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복수 타임이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니?”

“너는 나한테 세균이 아니라 백신이다… 뭐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더라고요.”

“어머, 세상에! 우리 도진이가 그런 말을?”

어머님은 감격해서 손수건으로 입가를 찍으셨다. 아버님도 허허 웃으셨다.
도진 오빠의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봤다.
‘두고 보자’는 눈빛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정원을 산책했다.
어머님은 안으로 들어가시고 둘만 남았다.

“이하루. 너 연기 대상감이다?”

“왜요? 백신 드립, 감동적이지 않았어요?”

“죽는다, 진짜.”

그가 내 볼을 꼬집었다. 아픈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정원수 사이로 달빛이 쏟아졌다. 분위기가 묘했다.

“……고마워.”

그가 불쑥 말했다.

“오늘 잘해줘서. 부모님이 저렇게 웃으시는 거 오랜만에 봐.”

“돈 받았으니까요. 밥값은 해야죠.”

“그냥 밥값만은 아니었어. 너… 생각보다 뻔뻔하게 잘하더라.”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사실, 서연이 얘기… 부모님은 모르셔.”

“……네?”

“내가 연애했던 거. 그냥 공부하느라 바쁜 줄 아셔.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어.”

그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들렸다.
아. 그래서 사진을 엎어뒀던 건가? 부모님이 서재에 들어오실까 봐?
아니면, 정말 보기 싫어서?

“오빠.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서연이랑은… 왜 헤어졌어요?”

그가 걸음을 멈췄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깊었다.

“안 맞았어.”

“뭐가요? 성격이?”

“아니. 온도.”

“온도요?”

“걔는 너무 뜨거웠고, 나는 너무 차가웠어. 걔는 내 결벽증을 고치려고 했고, 나는 걔를 내 방식대로 맞추려고 했지. 서로 지친 거야.”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미련이라기보다는, 실패한 과거에 대한 회한 같았다.

“근데 넌….”

그가 내게 다가왔다.

“적당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그냥… 편해.”

그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적당하다니. 편하다니.
나는 그에게 여자로서 매력이 없다는 뜻인가?

“칭찬 참 고맙네요. 미지근해서 좋다는 거잖아요.”

내가 툴툴거리자 그가 피식 웃었다.

“아니. 미지근한 게 아니라….”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려던 찰나였다.

지잉— 지잉—

내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 [이재영 오빠].

“……오빠다.”

“받지 마.”

“안 받으면 의심해요. 지금 집에 있을 시간인데.”

나는 눈치를 보며 전화를 받았다.

“어, 오빠. 왜?”

[야, 이하루! 너 어디야? 집이라며!]

재영 오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어? 어, 집이지. 화장실이라서 좀 울려.”

[거짓말하지 마. 나 지금 도진이네 집 앞인데 초인종 눌러도 아무도 없잖아!]

망했다.
이 인간은 왜 예고도 없이 찾아오고 난리야.

“아, 그게… 잠깐 편의점 나왔어. 금방 들어갈게.”

[빨리 와. 도진이 놈도 연락 안 되고, 너라도 있어야 문을 따지.]

전화를 끊자마자 도진 오빠가 내 손목을 잡았다.

“가자. 재영이 기다리겠다.”

“어떡해요? 둘이 같이 들어가면 들키잖아요.”

“따로 내리면 돼. 넌 편의점 다녀온 척하고, 난 퇴근하는 척하고.”

우리는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며 차에 탔다.
도진 오빠가 엑셀을 밟았다.


집 근처 골목.
도진 오빠는 나를 편의점 앞에 내려주었다.

“먼저 가 있어. 난 주차하고 5분 뒤에 올라갈게.”

“알았어요.”

나는 차에서 내려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빈손으로 가면 의심받을 테니 맥주라도 사야 했다.
맥주 4캔을 사서 나오는데,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 아가씨. 혼자 왔어?”

술 취한 취객들이었다.
무시하고 지나가려는데, 한 남자가 내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가? 오빠랑 한잔하고 가.”

“비키세요.”

“까칠하네. 얼굴 좀 보자.”

남자가 내 팔을 잡았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불쾌함에 소름이 돋았다.

“이거 놓으세요! 신고할 거예요!”

내가 팔을 비틀어 빼내려 했지만, 남자의 악력이 셌다.

“신고? 해 봐, 해 봐. 그냥 술 한잔하자는데 무슨 신고야?”

남자가 킬킬거리며 내 어깨를 감싸려 했다.
그때였다.

끼이익—!

검은색 세단이 굉음을 내며 편의점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도진 오빠가 내렸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누구야.”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을 막아섰다.
취객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뭐야, 넌? 이 아가씨 일행이야?”

“어. 일행이다. 그러니까 그 더러운 손 치워.”

도진 오빠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시선이 남자의 손이 닿았던 내 팔에 고정되었다.
마치 그 부위를 도려내고 싶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뭐? 더러운 손? 이 새끼가 말 다 했어?”

남자가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도진 오빠는 피하지 않았다.

탁.
그가 남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맨손이었다.
술과 토사물이 묻어있을지도 모르는 그 더러운 소매를, 결벽증 환자인 차도진이 망설임 없이 움켜쥐었다.
그의 미간이 혐오감으로 구겨졌다.

“억…!”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도진 오빠의 악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경고하는데.”

도진 오빠가 남자를 더러운 쓰레기 버리듯 밀쳐내며 낮게 읊조렸다.

“내 사람한테 균 옮기지 말고 꺼져. 역겨우니까.”

내 사람.
그 단어가 뇌리에 박혔다.

남자는 기세에 눌려 욕설을 중얼거리며 도망쳤다.
도진 오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봤다.

“괜찮아?”

그가 내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더러운 것에 닿았다는 혐오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오빠… 손….”

나는 그의 손을 가리켰다.

“상관없어.”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네가 다치는 것보단 나아.”

그가 나를 이끌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호흡을 삼킬 때마다 폐가 찌릿했다.

이 남자, 지금 진심이다.
계약이고 뭐고, 지금 이 질투와 분노는 연기가 아니다.

차에 타자마자 그가 물티슈를 꺼내 내 팔을 벅벅 닦았다.
아까 그 남자가 만졌던 부위였다.

“아, 아파요….”

“가만히 있어. 소독해야 돼.”

그의 눈빛이 집요했다.
마치 내 몸에 묻은 다른 남자의 흔적을 지워버리겠다는 듯이.

“오빠, 질투해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손이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어.”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질투해. 그러니까 다른 놈이랑 말 섞지 마.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6화: 바이러스 침투 경보

“질투해.”

그 한마디의 파괴력은 핵폭탄급이었다.
나는 입을 벙긋거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진 오빠는 다시 핸들을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귀 끝이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아파트로 돌아왔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층에서 문이 열리고, 재영 오빠가 씩씩거리며 탔다.

“야! 너네 왜 같이 와?”

재영 오빠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 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어.”

내가 황급히 둘러댔다.
재영 오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진 오빠를 훑었다.

“너 왜 이렇게 땀을 흘려? 어디 싸우고 왔냐?”

도진 오빠의 셔츠가 흐트러져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아까 취객과 실랑이한 흔적이었다.

“운동하고 왔어.”

도진 오빠가 짧게 대답했다.

“운동? 이 시간에? 하여간 별나다, 별나.”

재영 오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행히 넘어갔다.
우리는 펜트하우스로 들어왔다.

재영 오빠는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시더니, 10분 만에 소파에서 곯아떨어졌다.
거실에는 코 고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도진 오빠와 나는 주방 아일랜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손… 씻고 올게.”

도진 오빠가 먼저 일어났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아까 취객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씻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나 끔찍했을까.’

결벽증인 그가 더러운 취객을 맨손으로 잡았다. 나를 위해서.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했다.

30분 뒤, 그가 나왔다.
손이 벌겋게 부르터 있었다. 얼마나 박박 씻었는지 껍질이 벗겨질 정도였다.

“오빠, 손이 그게 뭐예요….”

내가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가 흠칫하며 손을 뒤로 뺐다.

“만지지 마. 아직… 더러워.”

“뭐가 더러워요. 껍질 벗겨지겠네.”

나는 억지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구급상자에서 연고를 꺼내 발라주었다.
그는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됐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다치는 것보다, 내가 좀 더러워지는 게 나아.”

그 말이 훅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어두웠다.

“이하루.”

“네.”

“나 너한테… 백신 드립 칠 때, 진심이었어.”

“…….”

“너는 나한테 세균이 아니야. 오히려….”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였다.

쿠르릉— 쾅!

거대한 천둥소리와 함께 집 안의 모든 불이 꺼졌다.
정전이었다.

“악!”

나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암흑천지였다. 창밖의 번개만이 간헐적으로 거실을 비췄다.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마.”

도진 오빠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그가 내 팔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안도감을 주었다.

“비상등… 비상등이 어디 있더라.”

그가 더듬거리며 일어섰다.
하지만 발이 꼬였는지, 그가 휘청거리며 내 쪽으로 쓰러졌다.

“어?”

우당탕.
우리는 엉겨 붙은 채 소파 위로 넘어졌다.
내가 밑에 깔리고, 그가 내 위로 덮쳐진 자세였다.

번쩍.
번개가 쳤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안경이 벗겨져 있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내 이마에 닿아 있었다.

“……괜찮아?”

그의 숨결이 내 입술 바로 위에서 느껴졌다.
너무 가까웠다.
맥박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오, 오빠. 무거워요….”

“미안.”

그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팔을 뻗어 나를 소파 등받이에 가두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만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하루.”

“……네.”

“나 지금 제정신 아니야.”

“…….”

“아까부터 너한테 키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직구였다.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직구.

“너… 서연이 친구인 거 알아.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것도 알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근데, 신경 안 쓸래. 내 무균실은 이미 너 때문에 엉망진창이 됐으니까.”

그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이번엔 망설임이 없었다.

“피하지 마.”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그다음엔 집어삼킬 듯이.

그의 키스는 건조하지 않았다.
뜨겁고, 축축하고, 절박했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죄책감도, 오빠도, 계약서도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는 우리 둘뿐인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탐하듯 엉겨 붙었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고, 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맨살에 닿자 전율이 일었다.

“하아….”

숨이 찼다.
그가 입술을 떼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해, 하루야. 가짜 말고, 진짜로.”

그 고백이 내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
나도 좋아해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지잉— 지잉— 지잉—

정적을 깨고 벨소리가 울렸다.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내 핸드폰이었다.

우리는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도진 오빠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이 환하게 켜지며 발신자 이름이 떴다.
[이서연].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까지의 뜨거웠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누구야?”

도진 오빠가 물었다.
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핸드폰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받아야 하나?
받으면… 이 꿈같은 시간이 깨질 텐데.
하지만 안 받을 수도 없었다. 서연이는 내 절친이니까.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하루야! 나야, 서연이!]

서연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국제전화가 아니었다. 깨끗한 음질.

[나 지금 공항이야. 방금 도착했어!]

“……어?”

[서프라이즈! 나 귀국했어.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네.]

서연이가 웃었다.
그 해맑은 웃음소리가 내 가슴을 난도질했다.

[야, 근데 너 지금 어디야? 내가 선물 사 왔는데 당장 만나자. 그리고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무슨… 말?”

[나 소개할 남자 있어. 내 전 남친인데… 걔가 아직 나 못 잊었대.]

순간, 전신의 피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전 남친? 도진 오빠 말하는 거야?
도진 오빠가 서연이를 못 잊었다고? 방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도진 오빠를 쳐다봤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튼 빨리 나와! 나 지금 너네 집 앞 카페로 갈게!]

뚝.
전화가 끊겼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 불빛만이 내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도진 오빠가 내 손을 잡으려 했다.

“하루야, 왜 그래? 무슨 전화야?”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마치 벌레에 닿은 것처럼.

“……오빠.”

“어?”

“우리… 그만해요.”

“뭐?”

“이거 다 실수예요. 분위기에 휩쓸린 거라고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망쳐야 했다.
서연이가 오고 있다. 내 친구가, 자기 전 남친을 소개하겠다고 오고 있다.
내가 그 전 남친이랑 키스하고 있었다는 걸 알면… 서연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소리야, 실수라니. 난 진심이라고 했잖아.”

도진 오빠가 따라 일어나 내 팔을 잡았다.

“이거 놔요!”

“이유를 말해. 갑자기 왜 이러는데!”

“서연이가 왔대요.”

내 입에서 나온 이름에 그가 굳어버렸다.

“귀국했대요. 지금… 나 만나러 온대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역시, 그도 서연이 이름 앞에서는 작아지는구나.

“갈래요. 계약이고 뭐고, 다 끝내요.”

나는 짐을 챙길 새도 없이 현관으로 달렸다.
이 집은 무균실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바이러스였다.
이제 백신이 왔으니, 바이러스는 사라져야 한다.

나는 도어락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등 뒤에서 도진 오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폭우가 내리는 거리로, 나는 다시 쫓겨나듯 달렸다.
이번엔 내 발로 걸어 나온 거지만, 마음은 쫓겨난 것보다 더 아팠다.

Batch 2: 7~10화 (완결)

7화: 최악의 타이밍

폭우가 쏟아지는 강남대로.
택시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떨었다.
옷은 흠뻑 젖어 축축했고, 머리카락 끝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져 시트를 적셨다. 기사님이 룸미러로 나를 힐끔거렸다. 아마 실연당한 광녀쯤으로 보일 거다.

‘맞아. 실연당한 거.’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차도진] 이름이 액정에 떴다.
나는 전원을 꺼버렸다.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좋아해."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달콤한 거짓말이.

서연이가 온다.
내 10년 지기 친구.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친구.
그런데 내가 걔 전 남친이랑 잤다고? (물론 키스만 했지만, 마음은 이미 잔 거나 다름없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손님, 다 왔습니다.”

택시가 카페 앞에 멈췄다.
나는 젖은 몸을 이끌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에어컨 바람이 훅 끼쳐왔다. 추웠다. 뼛속까지 시렸다.

“하루야! 여기!”

창가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서연.
1년 만에 보는 내 친구는 여전히 빛이 났다. 뉴욕 물을 먹어서 그런지 더 세련돼 보였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가갔다.

“어머, 너 꼴이 왜 이래? 밖에 비 많이 와?”

서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냅킨을 건넸다.

“……어. 좀 맞았어.”

“우산도 없이? 얼른 닦아. 감기 걸리겠다.”

서연이는 내 손을 잡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따뜻한 손길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너는 이렇게 착한데. 나는 쓰레기야.

“서연아.”

“응? 왜 그래, 표정이 심각해.”

“나… 할 말 있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나… 만나는 남자 있어.”

“정말? 대박! 누구? 잘생겼어? 뭐 하는 사람이야?”

서연이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치과의사야. 이름은 차도진이고.”

정적.
카페의 소음이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서연이가 뺨을 때려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을 끼얹어도 가만히 맞을 생각이었다.

“……누구?”

서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차도진? 청담동 개원한 그 차도진?”

“……어. 미안해. 진짜 미안해. 네 전 남친인 거 알았는데… 내가 미쳤었나 봐.”

나는 횡설수설하며 빌었다.

“잠깐만. 하루야, 고개 좀 들어봐.”

서연이가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쭈뼛거하며 고개를 들었다.
서연이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배를 잡고.

“푸하하하! 야, 너 미쳤어? 걔랑 사귄다고? 그 결벽증 환자랑?”

“……어?”

“와, 대박이다. 이하루 비위도 좋다. 야, 걔랑 키스는 어떻게 했어? 하기 전에 구강청결제 3번 하라고 안 해? 손잡을 때 소독티슈로 안 닦아?”

“……안 하던데.”

“뭐? 안 해?”

서연이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 새끼가 그냥 했다고? 맨입으로?”

“……응.”

“와… 배신감 느끼네. 나랑 할 때는 키스하기 전에 스케일링부터 하라고 난리 치더니.”

서연이는 혀를 찼다. 분노나 질투가 아니었다. 그냥 어이없음이었다.

“서연아, 너… 도진 오빠 안 좋아해?”

“좋아하긴 개뿔. 엄마 친구 아들이라 억지로 몇 번 만난 거야. 얼굴은 내 취향이라 좀 참아보려고 했는데, 3일 만에 학을 뗐다. 영화관 팝콘도 더럽다고 못 먹게 하는 놈을 어떻게 만나?”

“그럼… 아까 전화로 말한 전 남친은 뭔데? 널 못 잊었다는 그 사람.”

“아, 걔? 마이클.”

“……마이클?”

“뉴욕에서 만난 애. 한국까지 쫓아왔어, 스토커처럼. 그래서 너한테 좀 도와달라고 하려 했지. 남친인 척 좀 해달라고.”

맥이 탁 풀렸다.
마이클. 마이클이라니.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그럼… 사진은? 오빠 서재에 네 사진 있던데.”

“아, 그 졸업식 사진? 그거 내가 버려달라고 했는데 아직도 안 버렸어? 귀찮아서 놔뒀나 보네. 걔 원래 자기 물건 위치 바뀌는 거 싫어해서 쓰레기도 제자리에 두잖아.”

모든 게 오해였다.
도진 오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서연이를 잊은 지 오래였고(아니, 애초에 별 감정도 없었고), 사진은 그냥 방치된 거였다.
그리고 그는, 나한테는 결벽증을 참아가며 진심을 보여줬다.

‘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가 빗속에서 나를 잡으려던 표정이 떠올랐다.
상처받은 눈빛.
나는 그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것도 최악의 방식으로.

“야, 근데 너 진짜 차도진이랑 사귀어? 걔가 여자를 만나? 그것도 내 친구를?”

서연이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어. 나 걔 좋아해. 진짜 많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연아, 미안. 나 가봐야겠어.”

“어딜? 야,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도진 오빠한테! 나 지금 가서 빌어야 돼!”

나는 카페를 뛰쳐나갔다.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 전화 15통. [차도진].

나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받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집요한 사람이다. 내가 받을 때까지 걸었을 사람이다. 그런데 왜 안 받지?

‘설마.’

나는 택시를 잡으려 도로로 뛰어들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도진 오빠였다.

“여보세요! 오빠!”

[……여보세요? 이 핸드폰 주인분 지인이신가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누구세요? 도진 오빠 핸드폰 아니에요?”

[아, 네. 여기 응급실입니다. 환자분이 쓰러지셔서 실려 오셨는데, 최근 통화 목록에 이 번호가 제일 많아서요.]

“……네?”

[차도진 님 보호자 되십니까? 지금 바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상태가 좀 안 좋습니다.]

시야가 휘청거렸다.
쓰러졌다고? 그 천하무적 차도진이?

“지금 갈게요! 어디예요!”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빠, 미안해요. 제발 무사해줘요. 내가 잘못했어요.


7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10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택시 안 - 카페 서연과의 대화 - 응급실 전화)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이서연, 응급실 직원(전화)
  • 메인 플롯 비트: 서연과의 오해 해소(마이클) → 도진의 진심 재확인 → 도진의 응급실행으로 인한 위기 고조.
  • 서브플롯 진행:
    • B (전여친): 서연은 도진에게 미련이 없으며, 도진의 결벽증을 증언해줌으로써 도진이 하루에게 보여준 행동이 얼마나 특별한지 역설적으로 증명함.
  • 공개된 정보: 서연의 '전 남친'은 마이클이었음. 도진의 사진 방치는 단순한 귀차니즘.
  • 클리프행어: A급 (위기) - 도진의 실신 소식.
  • 템포: 고속 (오해 해소와 새로운 위기의 연속)

8화: 무균실 폐쇄 조치

응급실 복도는 소독약 냄새로 진동했다.
평소라면 도진 오빠가 좋아했을 냄새지만, 지금은 역하게만 느껴졌다.

“차도진 환자 어디 있어요!”

내가 간호스테이션에 달려가 소리쳤다.

“저쪽 VIP 병실로 옮기셨어요. 근데 보호자분, 지금 꼴이….”

내 몰골은 처참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에, 화장은 다 번져서 팬더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VIP 병실로 달렸다.
문이 열리고,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가 보였다.
창백한 얼굴. 링거줄이 주렁주렁 매달린 팔.
그는 잠들어 있었다.

“오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의사가 다가왔다.

“과로에 급성 스트레스성 쇼크입니다. 비를 많이 맞아서 저체온증도 왔고요. 다행히 생명엔 지장 없습니다만, 안정이 필요합니다.”

의사가 나가고, 나는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을 잡았다.
항상 뜨거웠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내가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그 빗속에서 나를 찾으러 다니지 않았을 텐데.
나는 그의 손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끄러워.”

갈라진 목소리.
고개를 들자, 도진 오빠가 눈을 뜨고 있었다.
초점이 흐릿했지만,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오빠! 정신이 들어요?”

“……왜 울고 있어. 못생기게.”

그가 힘겹게 손을 들어 내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링거줄 때문에 팔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가지 마.”

그가 내 손목을 꽉 잡았다. 환자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다시는…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마.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으니까.”

“안 가요. 아무 데도 안 가요.”

나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서연이 만났어요. 다 오해였어요. 오빠가 서연이 안 좋아하는 거, 사진도 그냥 둔 거라는 거… 다 들었어요.”

“……바보.”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너밖에 없다고.”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워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안정 취하랬단 말이에요.”

“답답해. 이거 빼.”

그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확 뽑아버렸다.

“악! 오빠 미쳤어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얀 환자복 위로 선명한 붉은색이 번져나갔다.
결벽증 환자가 자기 피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빠, 피! 피 나잖아요!”

“상관없어.”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에 젖은 내 옷 냄새, 땀 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뒤섞였다.
완벽한 오염이었다.

“이제 나한테 무균실 같은 건 없어. 네가 있는 곳이 내가 숨 쉴 곳이야.”

그의 고백에 심장 소리가 고막을 때릴 듯 크게 울렸다.
나도 그를 꽉 끌어안았다.
더러워져도 좋았다. 엉망진창이 되어도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깊게 입 맞췄다.

병실 안이 뜨거운 숨결로 가득 찼다.
그때였다.

드르륵.

“도진아! 너 쓰러졌다며! 괜찮… 으악!”

문이 활짝 열리고, 누군가 들이닥쳤다.
익숙한 목소리.
이재영 오빠였다.

그리고 그 뒤로, 서연이가 따라 들어왔다.

“어머.”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나와 도진 오빠는 입술이 닿은 채로 굳어버렸다.
재영 오빠는 입을 떡 벌린 채, 뒷목을 잡고 있었다.

“야… 너네… 지금….”

재영 오빠의 손가락이 우리를 번갈아 가리키며 떨렸다.

“뭐 하냐?”

망했다.
제대로 들켰다.

도진 오빠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단단히 감싸 안으며 재영 오빠를 노려봤다.

“보면 모르냐. 연애하잖아.”

“뭐, 뭐? 연애? 누구랑? 내 동생이랑?”

재영 오빠가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네가 내 동생을 왜 만나! 너 결벽증이라며! 여자 손도 못 잡는다며!”

“고쳤어.”

도진 오빠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네 동생 한정으로 완치다. 그러니까 썩 나가. 분위기 깨지 말고.”

“와… 진짜 돌겠네.”

재영 오빠가 휘청거리자, 뒤에 있던 서연이가 그를 부축했다.

“오빠, 진정해요. 둘이 좋다잖아요.”

“너는 알고 있었어? 이서연 너도 한패야?”

“아니 뭐… 방금 알았죠. 근데 잘 어울리잖아요. 결벽증 환자랑 털털녀. 천생연분이네.”

서연이가 윙크를 날렸다.
재영 오빠는 "아이고 두야"를 연발하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도진 오빠는 피 묻은 손으로 내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리고 재영 오빠에게 선전포고했다.

“허락은 필요 없어. 통보다.”

“뭐?”

“나 하루랑 결혼할 거야. 가짜 말고, 진짜로.”

숨이 턱 막혔다.
결혼? 지금 결혼이라고 했어?

도진 오빠가 나를 보며 웃었다.
처음 보는,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준비해, 이하루. 위약금 3배 물어내기 싫으면, 평생 내 옆에서 갚아.”

나는 웃으며 그의 가슴을 팍 쳤다.

“콜. 갚을게요. 평생.”


8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0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응급실 도착 - 도진의 각성 및 재회 - 재영에게 발각 및 선언)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차도진, 이재영, 이서연, 의사(단역)
  • 메인 플롯 비트: 도진의 링거 투혼(결벽증 완전 극복 상징) → 재영에게 관계 발각 → 결혼 선언으로 관계 확정.
  • 서브플롯 진행:
    • A (오빠): 현장 검거. 반대할 명분도 없이 도진의 기세에 눌림. 서연의 중재로 갈등 조기 진화.
    • C (결벽증): 피 묻은 손으로 포옹하며 '무균실 폐쇄'를 시각적으로 완성.
  • 공개된 정보: 도진의 결벽증은 하루 한정으로 완치됨.
  • 회수된 복선: F-002 (액자) - 7화에서 서연의 대사로 완전 회수.
  • 클리프행어: B급 (해피엔딩 암시) - 결혼 선언과 하루의 수락.
  • 템포: 고속 → 중속 (갈등의 해소와 안정)

9화: 계약 위반의 밤

퇴원 수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의사는 하루만 더 입원하라고 권했지만, 도진 오빠는 "내 집이 병원보다 깨끗해"라며 고집을 피웠다. (그건 사실이었다.)

재영 오빠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서연이가 "오빠, 술이나 한잔하러 가요. 내가 쏠게"라며 끌고 나간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둘만 남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비는 그쳐 있었다.
서울의 야경이 젖은 도로 위로 반짝거렸다.

도진 오빠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신호 대기 중일 때마다 그는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치 잃어버렸던 보물을 되찾은 사람처럼.

“오빠, 운전에 집중해요.”

“손 놓으면 사라질까 봐 그래.”

“안 사라져요. 보증금도 없는데 어딜 가요.”

“보증금, 안 갚아도 돼. 그냥 내 집에 눌러살아.”

“그건 싫어요. 저도 자존심이 있죠. 갚을 거예요.”

“어떻게? 몸으로?”

그가 능글맞게 웃었다.
이 남자, 결벽증 봉인 해제되더니 숨겨왔던 능글미가 폭발했다.

집에 도착했다.
익숙한 현관. 소독약 냄새 대신 은은한 디퓨저 향기가 났다.
도진 오빠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악! 오빠, 아직 환자잖아요!”

“멀쩡해. 너 하나 들 힘은 있어.”

그는 나를 안은 채 거실을 가로질러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계약서.
[약혼 계약서]라고 적힌 그 종이를, 그가 집어 들었다.

“이거, 이제 필요 없지?”

찌이익.
그가 망설임 없이 계약서를 반으로 찢었다.
한 번 더, 또 한 번.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텅 빈 서재를 채웠다. 조각들이 눈송이처럼 바닥으로 흩날렸다.

“조항 15조. 신체 접촉 금지.”

그가 나를 내려놓지 않은 채 침실로 걸어갔다.

“오늘 밤, 그 조항을 아주 철저하게 위반해 볼 생각인데.”

그가 침대에 나를 눕혔다.
하얀 침대 시트 위로 내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그가 내 위로 올라왔다.
안경을 벗어 협탁에 올려두는 손길이 느릿하고 섹시했다.

“을은 갑의 위생 기준을 위반할 권리가 있어.”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이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나를 더럽혀도 돼, 하루야. 마음껏.”

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뜨거운 숨결이 살갗에 닿자 전율이 일었다.
더 이상 라텍스 장갑도, 소독제도, 경계선도 없었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등 근육이 단단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사랑해, 도진아.”

처음으로 오빠가 아닌 이름을 불렀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평소의 냉철함은 온데간데없고, 흔들리는 눈동자만이 나를 담고 있었다.

“……한 번 더 말해줘.”

“사랑해.”

그가 내 입술을 삼켰다.
창밖에는 다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방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우리의 밤은 길었고, 완벽하게 오염되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눈부신 햇살이 커튼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디 갔지?’

설마 꿈은 아니었겠지?
나는 부스스한 머리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진 오빠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토스트와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커피가 차려져 있었다.
물론, 접시와 포크는 자로 잰 듯 완벽한 각도로 놓여 있었다.
결벽증은 완치되지 않았다. 그냥 나한테만 관대해진 거다.

“일어났어?”

그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그의 미소가 눈부셨다.

“오빠가 요리를 다 했어요?”

“배달 음식은 몸에 안 좋잖아. 내 여자는 좋은 것만 먹어야지.”

그가 다가와 내 이마에 굿모닝 키스를 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근데 오빠.”

“응?”

“바닥에 이거 뭐예요?”

내가 발밑을 가리켰다.
어젯밤 찢어버린 계약서 조각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위약금 3배]라고 적힌 부분이었다.

도진 오빠가 그걸 줍더니 씩 웃었다.

“이건 남겨두자.”

“왜요?”

“네가 도망가려고 하면 협박용으로 쓰게.”

“치사해, 진짜.”

우리는 마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균실 같았던 이 집이, 처음으로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졌다.
따뜻하고, 적당히 소란스럽고, 사랑으로 가득 찬.

“밥 먹자. 식겠다.”

그가 의자를 빼주었다.
나는 식탁에 앉으며 생각했다.
보증금 3천만 원 날리고 인생 망한 줄 알았는데, 로또를 맞았다고.
그것도 아주 잘생기고, 돈 많고, 나밖에 모르는 결벽증 로또를.


9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3,80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2개 (귀가 및 베드신 - 다음 날 아침의 일상)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차도진
  • 메인 플롯 비트: 계약 파기 및 육체적/정서적 결합 완성.
  • 서브플롯 진행: 모든 서브플롯 종료. 오직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
  • 공개된 정보: 없음 (완결을 위한 정리).
  • 클리프행어: 없음 (해피엔딩으로 자연스럽게 연결).
  • 템포: 중속 (달달함과 여운)

10화: 완벽한 오염 (에필로그)

1년 후.

“이하루! 과자 부스러기 흘리지 말랬지!”

도진 오빠의 잔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나는 소파에 누워 감자칩을 먹다가 움찔했다.

“아, 미안. 주울게.”

“됐어. 내가 해.”

그가 로봇청소기보다 빠르게 다가와 물티슈로 바닥을 훔쳤다.
여전하다, 여전해.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더니, 차도진의 결벽증은 불치병이 확실하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 흘린 거 아깝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감자칩 조각을 집어 들더니, 툭 털어서 자기 입으로 쏙 넣었다.

“……오빠, 지금 뭐 했어?”

내가 경악하며 물었다.

“뭐가. 3초 안에 주우면 괜찮아.”

“와… 차도진 많이 컸네.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 먹고.”

“네가 흘린 거잖아. 네 균은 면역 생겨서 괜찮아.”

그가 내 옆에 털썩 앉더니, 내 손에 들린 감자칩을 뺏어 먹었다.
손가락에 묻은 양념까지 쪽쪽 빨면서.
저 남자가 1년 전만 해도 내 존재 자체가 오염이라며 소독제를 난사하던 그 남자가 맞나 싶다.

우리는 결혼했다.
정확히는 6개월 전에.
재영 오빠는 결혼식 날까지 “내 친구가 내 매제라니, 이건 악몽이야”라며 울부짖었지만, 축의금은 제일 많이 냈다.
서연이는 부케를 받았다. (그 마이클이라는 스토커는 정리하고, 지금은 연하남이랑 썸 타는 중이다.)

“오늘 날씨 좋다. 나갈까?”

도진 오빠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이었다.

“어디로? 사람 많을 텐데.”

“상관없어. 너랑 가는 거면 어디든.”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커플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여의도 윤중로에는 벚꽃 반, 사람 반이었다.
예전의 도진 오빠라면 기겁을 하고 도망쳤을 인파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내 손을 꽉 잡고 인파 속을 걷고 있었다.
누군가 어깨를 부딪쳐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보호해 주었다.

“오빠, 괜찮아? 땀 나는데.”

“조금 힘든데… 참을 만해.”

그가 씩 웃었다.

“네가 있잖아. 내 백신.”

바람이 불어 벚꽃잎이 눈처럼 쏟아졌다.
그의 머리카락 위에, 어깨 위에 분홍색 꽃잎이 내려앉았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었다.

“사랑해, 차도진.”

“나도 사랑해, 이하루.”

그가 사람들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내 인생의 무균실은 사라졌다.
대신, 세상 온갖 먼지와 소음과 세균이 침투해도 끄떡없는, 단단하고 따뜻한 사랑이 그 자리를 채웠다.

우리는 완벽하게 오염되었다.
그리고 그 오염 속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완결]


10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2,80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2개 (거실 일상 - 벚꽃 데이트)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차도진
  • 메인 플롯 비트: 결벽증을 극복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
  • 서브플롯 진행: 재영과 서연의 근황 언급으로 모든 주변 인물 정리.
  • 주제 의식: "사랑은 서로의 세계를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면역을 만드는 것이다."
  • 템포: 저속 (완벽한 마무리)

Batch 2 완료 요약

프로젝트 완료 보고

  • 총 회차: 10화 (완결)
  • 플롯 달성률: 100%
  • 결말: 해피엔딩 (결혼 및 결벽증 극복)
  • 주요 성과:
    • 10화라는 짧은 분량 안에 기승전결과 3개의 서브플롯을 모두 소화함.
    • '절친의 전 남친'이라는 리스크 요소를 7화에서 빠르게 해소하여 독자 이탈 방지.
    • 남주의 캐릭터 붕괴 없이 '사랑으로 인한 변화'를 설득력 있게 묘사함.

작가 후기 (가상)

"짧은 호흡의 글이라 매 화 클리프행어를 배치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도진이의 결벽증이 하루를 만나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 쾌감을 독자님들이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균실에 입주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제7화. 오해의 유통기한

"나쁜 년이라고 욕해도 좋아."

하루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서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빨대를 씹고 있었다.

하루는 며칠간 찜질방을 전전하느라 꼬질꼬질해진 소매를 꽉 쥐었다. 도진의 집, 그 완벽한 무균실에서 도망쳐 나온 지 3일째였다.

"근데 나, 그 사람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목구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절친의 전 남친을 사랑하게 된 쓰레기. 그게 지금 자신의 이름표였다. 하지만 도진의 집을 나오던 순간, 현관 센서등이 꺼지며 세상이 암전되던 그 찰나에 하루는 깨달았다.

그의 결벽증 섞인 잔소리가 없는 세상이 더는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네가 평생 안 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나, 지금 오빠한테 갈 거야. 가서 무릎 꿇고 빌더라도 다시 그 집에 들어갈 거야."

하루의 선언에 서연의 눈이 동그라미가 되었다. 정적이 흘렀다. 카페의 소음이 물러가고, 서연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야, 이하루."
"어, 욕해. 다 들을게."
"너 지금 무슨 막장 드라마 찍냐? 내 전 남친이 누군데?"
"도진 오빠잖아! 네가 그랬잖아. 치대 다닐 때 만났던 그 개자식!"

하루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그러자 서연이 팍, 하고 테이블을 내려쳤다.

"마이클이라고! 이 멍청아!"

하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
"마이클! 교환학생 때 만난 양키! 내가 치대생 만났다고 했지, 언제 차도진이라고 했어? 도진 오빠는 그냥 우리 오빠 친구고!"

서연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하루의 뇌 회로가 일시 정지했다. 마이클? 차도진이 아니라?

"그럼... 그 액자는?"
"액자? 아, 오빠가 나 졸업식 때 찍어준 거? 그거 그냥 오빠가 사진 더럽게 못 찍어서 내가 꼴 보기 싫다고 엎어놓으라고 한 건데?"

멍하니 입을 벌린 하루를 보며 서연이 혀를 찼다.

"너 진짜... 도진 오빠 좋아하냐? 그 결벽증 환자를?"
"......"
"가. 얼른 가라고! 그 인간 지금 3일째 병원도 안 나오고 집에서 시체처럼 있다니까!"

서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보, 천치, 멍청이.'

하루는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 위를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오해 때문에 도망친 시간이 아까워서 미칠 것 같았다.

택시 뒷좌석에 몸을 던지며 하루가 외쳤다.

"한남동이요! 제일 빨리 가주세요!"


제8화. 무균실이 오염되는 순간

엘리베이터 숫자가 올라가는 속도가 영겁처럼 느껴졌다.

하루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떨리지 않도록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꽉 쥐었다. 삑, 삑, 삑, 삐리릭. 경쾌한 해제음과 함께 육중한 문이 열렸다.

"오빠!"

하루가 현관을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평소라면 은은한 디퓨저 향기와 함께 반짝거려야 할 거실이 엉망이었다. 깨진 화분, 엎어진 공기청정기.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리고 거실 한복판, 소파에 차도진이 앉아 있었다.

"......"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하얀 셔츠 소매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닥에는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대리석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오빠!"

하루가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도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퀭한 눈동자가 하루를 담았다. 초점이 흐릿하던 눈동자에 서서히 생기가, 아니 당혹감이 차올랐다.

"오지 마."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더러워. 피 묻었어."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하루에게 피가 묻을까 봐 몸을 뒤로 물렸다. 그 미련한 모습에 하루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상황은 뻔했다. 며칠 전부터 병원 주위를 맴돌던 그 스토커 환자가 기어이 집까지 찾아온 모양이었다. 현관 앞의 소란스러운 흔적이 그걸 증명했다.

"그게 지금 중요해요?"

하루는 도진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하루, 멈춰. 지금 내 꼴이..."
"시끄러워요!"

하루는 망설임 없이 피 묻은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을 박았다.

입술이 부딪치며 쇠 비린내가 났다. 도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가, 이내 무너지듯 하루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하루의 등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피가 묻든 말든, 세균이 옮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한 절박한 손길이었다.

도진의 입술이 열리고 뜨거운 숨결이 섞였다. 그의 혀가 하루의 입안을 휩쓸었다. 그것은 키스라기보다 생존 확인에 가까웠다.

"하아... 하..."

입술이 떨어지자 거친 숨소리만 거실을 채웠다. 도진이 젖은 눈으로 하루를 내려다보았다.

"도망간 거 아니었나."
"도망갔다가, 잡히러 왔어요."

하루가 그의 뺨에 묻은 핏자국을 엄지로 닦아냈다. 하얀 얼굴에 붉은 번짐이 생겼다. 완벽했던 무균실이, 결벽증 환자의 성역이 하루라는 바이러스와 핏빛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런데 그게, 미치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다시는 안 가요. 오빠가 소독약 뿌려서 내쫓아도 안 나갈 거야."
"......"
"나 오빠 좋아해요. 오빠가 내 친구 전 남친이어도 상관없고, 세상 제일가는 또라이여도 상관없어."

도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피 묻은 손으로 하루의 턱을 감싸 쥐었다.

"후회 안 하지."
"절대."
"그럼 감당해. 이제부턴 멸균 따위 안 해."

도진이 다시 한번 하루를 집어삼킬 듯 고개를 숙이던 그때였다.

띠리릭-.

현관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야! 차도진! 너 괜찮냐? 경비실에서 연락 왔는데 어떤 미친년이 난동을..."

이재영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거실 한복판, 피칠갑을 한 채 엉겨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적.

도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재영을 보았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살기 어린 눈빛이었다. 하루는 도진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재영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와... 진짜 미친놈들이네, 이거."

무균실의 입주 신고식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한 피날레였다.

Batch 2: 7~10화 (완결)

7화: 최악의 타이밍

폭우가 쏟아지는 강남대로.
나는 택시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었다.
옷은 흠뻑 젖었고, 머리카락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져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기사님이 룸미러로 나를 힐끔거렸다. 아마 실연당한 광녀쯤으로 보일 거다.

‘맞아. 실연당한 거.’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차도진] 이름이 액정에 떴다.
나는 전원을 꺼버렸다.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좋아해."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 달콤한 거짓말이.

서연이가 온다.
내 10년 지기 친구.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친구.
그런데 내가 걔 전 남친이랑 잤다고? (물론 키스만 했지만, 마음은 이미 잔 거나 다름없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손님, 다 왔습니다.”

택시가 카페 앞에 멈췄다.
나는 젖은 몸을 이끌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에어컨 바람이 훅 끼쳐왔다. 추웠다. 뼛속까지 시렸다.

“하루야! 여기!”

창가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서연.
1년 만에 보는 내 친구는 여전히 빛이 났다. 뉴욕 물을 먹어서 그런지 더 세련돼 보였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가갔다.

“어머, 너 꼴이 왜 이래? 밖에 비 많이 와?”

서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냅킨을 건넸다.

“……어. 좀 맞았어.”

“우산도 없이? 얼른 닦아. 감기 걸리겠다.”

서연이는 내 손을 잡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따뜻한 손길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너는 이렇게 착한데. 나는 쓰레기야.

“서연아.”

“응? 왜 그래, 표정이 심각해.”

“나… 할 말 있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나… 만나는 남자 있어.”

“정말? 대박! 누구? 잘생겼어? 뭐 하는 사람이야?”

서연이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치과의사야. 이름은 차도진이고.”

정적.
카페의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서연이가 뺨을 때려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을 끼얹어도 가만히 맞을 생각이었다.

“……누구?”

서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차도진? 청담동 개원한 그 차도진?”

“……어. 미안해. 진짜 미안해. 네 전 남친인 거 알았는데… 내가 미쳤었나 봐.”

나는 횡설수설하며 빌었다.

“잠깐만. 하루야, 고개 좀 들어봐.”

서연이가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쭈뼛거하며 고개를 들었다.
서연이는… 웃고 있었다. 그것도 배를 잡고.

“푸하하하! 야, 너 미쳤어? 걔랑 사귄다고? 그 결벽증 환자랑?”

“……어?”

“와, 대박이다. 이하루 비위도 좋다. 야, 걔랑 키스는 어떻게 했어? 하기 전에 구강청결제 3번 하라고 안 해? 손잡을 때 소독티슈로 안 닦아?”

“……안 하던데.”

“뭐? 안 해?”

서연이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 새끼가 그냥 했다고? 맨입으로?”

“……응.”

“와… 배신감 느끼네. 나랑 할 때는 키스하기 전에 스케일링부터 하라고 난리 치더니.”

서연이는 혀를 찼다. 분노나 질투가 아니었다. 그냥 어이없음이었다.

“서연아, 너… 도진 오빠 안 좋아해?”

“좋아하긴 개뿔. 엄마 친구 아들이라 억지로 몇 번 만난 거야. 얼굴은 내 취향이라 좀 참아보려고 했는데, 3일 만에 학을 뗐다. 영화관 팝콘도 더럽다고 못 먹게 하는 놈을 어떻게 만나?”

“그럼… 아까 전화로 말한 전 남친은 뭔데? 널 못 잊었다는 그 사람.”

“아, 걔? 마이클.”

“……마이클?”

“뉴욕에서 만난 애. 한국까지 쫓아왔어, 스토커처럼. 그래서 너한테 좀 도와달라고 하려 했지. 남친인 척 좀 해달라고.”

맥이 탁 풀렸다.
마이클. 마이클이라니.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럼… 사진은? 오빠 서재에 네 사진 있던데.”

“아, 그 졸업식 사진? 그거 내가 버려달라고 했는데 아직도 안 버렸어? 귀찮아서 놔뒀나 보네. 걔 원래 자기 물건 위치 바뀌는 거 싫어해서 쓰레기도 제자리에 두잖아.”

모든 게 오해였다.
도진 오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서연이를 잊은 지 오래였고(아니, 애초에 별 감정도 없었고), 사진은 그냥 방치된 거였다.
그리고 그는, 나한테는 결벽증을 참아가며 진심을 보여줬다.

‘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가 빗속에서 나를 잡으려던 표정이 떠올랐다.
상처받은 눈빛.
나는 그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것도 최악의 방식으로.

“야, 근데 너 진짜 차도진이랑 사귀어? 걔가 여자를 만나? 그것도 내 친구를?”

서연이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어. 나 걔 좋아해. 진짜 많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연아, 미안. 나 가봐야겠어.”

“어딜? 야,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도진 오빠한테! 나 지금 가서 빌어야 돼!”

나는 카페를 뛰쳐나갔다.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켰다.
부재중 전화 15통. [차도진].

나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받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집요한 사람이다. 내가 받을 때까지 걸었을 사람이다. 그런데 왜 안 받지?

‘설마.’

나는 택시를 잡으려 도로로 뛰어들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도진 오빠였다.

“여보세요! 오빠!”

[……여보세요? 이 핸드폰 주인분 지인이신가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한기가 흘러내렸다.

“누구세요? 도진 오빠 핸드폰 아니에요?”

[아, 네. 여기 응급실입니다. 환자분이 쓰러지셔서 실려 오셨는데, 최근 통화 목록에 이 번호가 제일 많아서요.]

“……네?”

[차도진 님 보호자 되십니까? 지금 바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상태가 좀 안 좋습니다.]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쓰러졌다고? 그 천하무적 차도진이?

“지금 갈게요! 어디예요!”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졌다.
오빠, 미안해요. 제발 무사해줘요. 내가 잘못했어요.


7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10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택시 안 - 카페 서연과의 대화 - 응급실 전화)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이서연, 응급실 직원(전화)
  • 메인 플롯 비트: 서연과의 오해 해소(마이클) → 도진의 진심 재확인 → 도진의 응급실행으로 인한 위기 고조.
  • 서브플롯 진행:
    • B (전여친): 서연은 도진에게 미련이 없으며, 도진의 결벽증을 증언해줌으로써 도진이 하루에게 보여준 행동이 얼마나 특별한지 역설적으로 증명함.
  • 공개된 정보: 서연의 '전 남친'은 마이클이었음. 도진의 사진 방치는 단순한 귀차니즘.
  • 클리프행어: A급 (위기) - 도진의 실신 소식.
  • 템포: 고속 (오해 해소와 새로운 위기의 연속)

8화: 무균실 폐쇄 조치

응급실 복도는 소독약 냄새로 진동했다.
평소라면 도진 오빠가 좋아했을 냄새지만, 지금은 역하게만 느껴졌다. 알코올 냄새 사이로 비릿한 쇠 냄새가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차도진 환자 어디 있어요!”

내가 간호스테이션에 달려가 소리쳤다.

“저쪽 VIP 병실로 옮기셨어요. 근데 보호자분, 지금 꼴이….”

내 몰골은 처참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에, 화장은 다 번져서 팬더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VIP 병실로 달렸다.
문이 열리고,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가 보였다.
창백한 얼굴. 링거줄이 주렁주렁 매달린 팔.
그는 잠들어 있었다.

“오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의사가 다가왔다.

“과로에 급성 스트레스성 쇼크입니다. 비를 많이 맞아서 저체온증도 왔고요. 다행히 생명엔 지장 없습니다만, 안정이 필요합니다.”

의사가 나가고, 나는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을 잡았다.
항상 뜨거웠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내가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그 빗속에서 나를 찾으러 다니지 않았을 텐데.
나는 그의 손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끄러워.”

갈라진 목소리.
고개를 들자, 도진 오빠가 눈을 뜨고 있었다.
초점이 흐릿했지만,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오빠! 정신이 들어요?”

“……왜 울고 있어. 못생기게.”

그가 힘겹게 손을 들어 내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링거줄 때문에 팔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가지 마.”

그가 내 손목을 꽉 잡았다. 환자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다시는…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마.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으니까.”

“안 가요. 아무 데도 안 가요.”

나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서연이 만났어요. 다 오해였어요. 오빠가 서연이 안 좋아하는 거, 사진도 그냥 둔 거라는 거… 다 들었어요.”

“……바보.”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말했잖아. 너밖에 없다고.”

그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누워 있어요! 의사 선생님이 안정 취하랬단 말이에요.”

“답답해. 이거 빼.”

그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을 확 뽑아버렸다.

“악! 오빠 미쳤어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얀 환자복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결벽증 환자가 자기 피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빠, 피! 피 나잖아요!”

“상관없어.”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에 젖은 내 옷 냄새, 땀 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뒤섞였다.
완벽한 오염이었다.

“이제 나한테 무균실 같은 건 없어. 네가 있는 곳이 내가 숨 쉴 곳이야.”

그의 고백에 가슴 안쪽이 뜨겁게 옥죄어 왔다.
나도 그를 꽉 끌어안았다.
더러워져도 좋았다. 엉망진창이 되어도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깊게 입 맞췄다.

병실 안이 뜨거운 숨결로 가득 찼다.
그때였다.

드르륵.

“도진아! 너 쓰러졌다며! 괜찮… 으악!”

문이 활짝 열리고, 누군가 들이닥쳤다.
익숙한 목소리.
이재영 오빠였다.

그리고 그 뒤로, 서연이가 따라 들어왔다.

“어머.”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나와 도진 오빠는 입술이 닿은 채로 굳어버렸다.
재영 오빠는 입을 떡 벌린 채, 뒷목을 잡고 있었다.

“야… 너네… 지금….”

재영 오빠의 손가락이 우리를 번갈아 가리키며 떨렸다.

“뭐 하냐?”

망했다.
제대로 들켰다.

도진 오빠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단단히 감싸 안으며 재영 오빠를 노려봤다.

“보면 모르냐. 연애하잖아.”

“뭐, 뭐? 연애? 누구랑? 내 동생이랑?”

재영 오빠가 기가 차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켰다.

“야 이 미친놈아! 네가 내 동생을 왜 만나! 너 결벽증이라며! 여자 손도 못 잡는다며!”

“고쳤어.”

도진 오빠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네 동생 한정으로 완치다. 그러니까 썩 나가. 분위기 깨지 말고.”

“와… 진짜 돌겠네.”

재영 오빠가 휘청거리자, 뒤에 있던 서연이가 그를 부축했다.

“오빠, 진정해요. 둘이 좋다잖아요.”

“너는 알고 있었어? 이서연 너도 한패야?”

“아니 뭐… 방금 알았죠. 근데 잘 어울리잖아요. 결벽증 환자랑 털털녀. 천생연분이네.”

서연이가 윙크를 날렸다.
재영 오빠는 "아이고 두야"를 연발하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도진 오빠는 피 묻은 손으로 내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리고 재영 오빠에게 선전포고했다.

“허락은 필요 없어. 통보다.”

“뭐?”

“나 하루랑 결혼할 거야. 가짜 말고, 진짜로.”

사고 회로가 딱 멈췄다.
결혼? 지금 결혼이라고 했어?

도진 오빠가 나를 보며 웃었다.
처음 보는,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였다.

“준비해, 이하루. 위약금 3배 물어내기 싫으면, 평생 내 옆에서 갚아.”

나는 웃으며 그의 가슴을 팍 쳤다.

“콜. 갚을게요. 평생.”


8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0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응급실 도착 - 도진의 각성 및 재회 - 재영에게 발각 및 선언)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차도진, 이재영, 이서연, 의사(단역)
  • 메인 플롯 비트: 도진의 링거 투혼(결벽증 완전 극복 상징) → 재영에게 관계 발각 → 결혼 선언으로 관계 확정.
  • 서브플롯 진행:
    • A (오빠): 현장 검거. 반대할 명분도 없이 도진의 기세에 눌림. 서연의 중재로 갈등 조기 진화.
    • C (결벽증): 피 묻은 손으로 포옹하며 '무균실 폐쇄'를 시각적으로 완성.
  • 공개된 정보: 도진의 결벽증은 하루 한정으로 완치됨.
  • 회수된 복선: F-002 (액자) - 7화에서 서연의 대사로 완전 회수.
  • 클리프행어: B급 (해피엔딩 암시) - 결혼 선언과 하루의 수락.
  • 템포: 고속 → 중속 (갈등의 해소와 안정)

9화: 계약 위반의 밤

퇴원 수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의사는 하루만 더 입원하라고 권했지만, 도진 오빠는 "내 집이 병원보다 깨끗해"라며 고집을 피웠다. (그건 사실이었다.)

재영 오빠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서연이가 "오빠, 술이나 한잔하러 가요. 내가 쏠게"라며 끌고 나간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둘만 남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비는 그쳐 있었다.
서울의 야경이 젖은 도로 위로 반짝거렸다.

도진 오빠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신호 대기 중일 때마다 그는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치 잃어버렸던 보물을 되찾은 사람처럼.

“오빠, 운전에 집중해요.”

“손 놓으면 사라질까 봐 그래.”

“안 사라져요. 보증금도 없는데 어딜 가요.”

“보증금, 안 갚아도 돼. 그냥 내 집에 눌러살아.”

“그건 싫어요. 저도 자존심이 있죠. 갚을 거예요.”

“어떻게? 몸으로?”

그가 능글맞게 웃었다.
이 남자, 결벽증 봉인 해제되더니 숨겨왔던 능글미가 폭발했다.

집에 도착했다.
익숙한 현관. 소독약 냄새 대신 은은한 디퓨저 향기가 났다.
도진 오빠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악! 오빠, 아직 환자잖아요!”

“멀쩡해. 너 하나 들 힘은 있어.”

그는 나를 안은 채 거실을 가로질러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계약서.
[약혼 계약서]라고 적힌 그 종이를, 그가 집어 들었다.

“이거, 이제 필요 없지?”

찌이익.
그가 망설임이 없었다.
계약서를 반으로 찢었다.
한 번 더, 또 한 번.
종이 조각들이 눈송이처럼 바닥으로 흩날렸다.

“조항 15조. 신체 접촉 금지.”

그가 나를 내려놓지 않은 채 침실로 걸어갔다.

“오늘 밤, 그 조항을 아주 철저하게 위반해 볼 생각인데.”

그가 침대에 나를 눕혔다.
하얀 침대 시트 위로 내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그가 내 위로 올라왔다.
안경을 벗어 협탁에 올려두는 손길이 느릿하고 섹시했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
습관처럼 침대 시트의 주름을 펴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손을 거뒀다.
지금 중요한 건 시트의 주름이 아니라, 내 입술이라는 듯이.

“을은 갑의 위생 기준을 위반할 권리가 있어.”

그가 내 귓가에 속삭이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나를 더럽혀도 돼, 하루야. 마음껏.”

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뜨거운 숨결. 거친 손길.
더 이상 라텍스 장갑도, 소독제도, 경계선도 없었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등 근육이 단단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사랑해, 도진아.”

처음으로 오빠가 아닌 이름을 불렀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한 번 더 말해줘.”

“사랑해.”

그가 내 입술을 삼켰다.
창밖에는 다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방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우리의 밤은 길었고, 완벽하게 오염되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눈부신 햇살이 커튼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어디 갔지?’

설마 꿈은 아니었겠지?
나는 부스스한 머리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나가니,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진 오빠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토스트와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커피가 차려져 있었다.
물론, 접시와 포크는 자로 잰 듯 완벽한 각도로 놓여 있었다.
결벽증은 완치되지 않았다. 그냥 나한테만 관대해진 거다.

“일어났어?”

그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그의 미소가 눈부셨다.

“오빠가 요리를 다 했어요?”

“배달 음식은 몸에 안 좋잖아. 내 여자는 좋은 것만 먹어야지.”

그가 다가와 내 이마에 굿모닝 키스를 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근데 오빠.”

“응?”

“바닥에 이거 뭐예요?”

내가 발밑을 가리켰다.
어젯밤 찢어버린 계약서 조각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위약금 3배]라고 적힌 부분이었다.

도진 오빠가 그걸 줍더니 씩 웃었다.

“이건 남겨두자.”

“왜요?”

“네가 도망가려고 하면 협박용으로 쓰게.”

“치사해, 진짜.”

우리는 마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균실 같았던 이 집이, 처음으로 사람 사는 집처럼 느껴졌다.
따뜻하고, 적당히 소란스럽고, 사랑으로 가득 찬.

“밥 먹자. 식겠다.”

그가 의자를 빼주었다.
나는 식탁에 앉으며 생각했다.
보증금 3천만 원 날리고 인생 망한 줄 알았는데, 로또를 맞았다고.
그것도 아주 잘생기고, 돈 많고, 나밖에 모르는 결벽증 로또를.


9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3,80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2개 (귀가 및 베드신 - 다음 날 아침의 일상)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차도진
  • 메인 플롯 비트: 계약 파기 및 육체적/정서적 결합 완성.
  • 서브플롯 진행: 모든 서브플롯 종료. 오직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
  • 공개된 정보: 없음 (완결을 위한 정리).
  • 클리프행어: 없음 (해피엔딩으로 자연스럽게 연결).
  • 템포: 중속 (달달함과 여운)

10화: 완벽한 오염 (에필로그)

1년 후.

“이하루! 과자 부스러기 흘리지 말랬지!”

도진 오빠의 잔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나는 소파에 누워 감자칩을 먹다가 움찔했다.

“아, 미안. 주울게.”

“됐어. 내가 해.”

그가 로봇청소기보다 빠르게 다가와 물티슈로 바닥을 훔쳤다.
여전하다, 여전해.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더니, 차도진의 결벽증은 불치병이 확실하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 흘린 거 아깝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감자칩 조각을 집어 들더니, 툭 털어서 자기 입으로 쏙 넣었다.

“……오빠, 지금 뭐 했어?”

내가 경악하며 물었다.

“뭐가. 3초 안에 주우면 괜찮아.”

“와… 차도진 많이 컸네.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 먹고.”

“네가 흘린 거잖아. 네 균은 면역 생겨서 괜찮아.”

그가 내 옆에 털썩 앉더니, 내 손에 들린 감자칩을 뺏어 먹었다.
손가락에 묻은 양념까지 쪽쪽 빨면서.
저 남자가 1년 전만 해도 내 존재 자체가 오염이라며 소독제를 난사하던 그 남자가 맞나 싶다.

우리는 결혼했다.
정확히는 6개월 전에.
재영 오빠는 결혼식 날까지 “내 친구가 내 매제라니, 이건 악몽이야”라며 울부짖었지만, 축의금은 제일 많이 냈다.
서연이는 부케를 받았다. (그 마이클이라는 스토커는 정리하고, 지금은 연하남이랑 썸 타는 중이다.)

“오늘 날씨 좋다. 나갈까?”

도진 오빠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이었다.

“어디로? 사람 많을 텐데.”

“상관없어. 너랑 가는 거면 어디든.”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커플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여의도 윤중로에는 벚꽃 반, 사람 반이었다.
예전의 도진 오빠라면 기겁을 하고 도망쳤을 인파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내 손을 꽉 잡고 인파 속을 걷고 있었다.
누군가 어깨를 부딪쳐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보호해 주었다.

“오빠, 괜찮아? 땀 나는데.”

“조금 힘든데… 참을 만해.”

그가 씩 웃었다.

“네가 있잖아. 내 백신.”

바람이 불어 벚꽃잎이 눈처럼 쏟아졌다.
그의 머리카락 위에, 어깨 위에 분홍색 꽃잎이 내려앉았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머리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었다.

“사랑해, 차도진.”

“나도 사랑해, 이하루.”

그가 사람들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내 인생의 무균실은 사라졌다.
대신, 세상 온갖 먼지와 소음과 세균이 침투해도 끄떡없는, 단단하고 따뜻한 사랑이 그 자리를 채웠다.

우리는 완벽하게 오염되었다.
그리고 그 오염 속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완결]


10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2,80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2개 (거실 일상 - 벚꽃 데이트)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차도진
  • 메인 플롯 비트: 결벽증을 극복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
  • 서브플롯 진행: 재영과 서연의 근황 언급으로 모든 주변 인물 정리.
  • 주제 의식: "사랑은 서로의 세계를 오염시키는 것이 아니라, 면역을 만드는 것이다."
  • 템포: 저속 (완벽한 마무리)

6화. 오염 구역과 청정 구역의 경계

도진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직후, 진료실 안에는 기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내 숨소리인지, 아니면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하던 차도진의 것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내 입술을 엄지로 훔쳤다. 평소라면 닿자마자 물티슈를 찾았을 그 손길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하루."
"네, 네?"
"균이 옮은 건 나인 것 같군."

그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나를 옭아맸다. 그 시선이 너무 뜨거워서,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잊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시야 구석, 책상 위에 놓인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엎어져 있는 액자.
서연이가 말했던 '잊지 못하는 구 여친'.
그리고 그 주인공이 내 가장 친한 친구인 서연이라는 사실.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황급히 도진을 밀쳐냈다.

"저, 저,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이하루, 잠깐."
"치료 감사합니다! 내일 뵐게요!"

도망쳤다. 비겁한 줄 알지만, 그 순간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도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나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뛰었다. 입술에는 아직도 그의 체온이, 소독약 냄새와 섞인 그 특유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펜트하우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서연이었다.

[야, 이하루! 너 우리 오빠 병원 갔었다며? 치료는 잘 받았어?]

화면 위로 뜬 메시지를 보는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죄인이었다. 친구의 전 남친, 그것도 아직 친구가 미련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남자와 키스를 했다. 아니, 키스 직전까지 갔다.

'나쁜 년.'

스스로를 욕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더 끔찍한 건, 도진의 그 눈빛을 떠올릴 때마다 죄책감보다 설렘이 먼저 고개를 든다는 사실이었다.

다음 날 아침,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무거웠다. 도진은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하게 다림질된 셔츠를 입고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어제는."
"죄송해요."

나는 식탁에 앉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제가... 주제를 넘었어요. 입주 도우미 주제에, 집주인한테."
"주제를 넘었다?"

도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들고 있던 에스프레소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짙은 갈색 액체가 흰 테이블보 위로 몇 방울 튀었다. 결벽증 환자인 그가, 그걸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게 어제 도망친 이유입니까?"
"......"
"이하루 씨. 나는 내 감정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게 실수였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실수가 아니라..."

말문이 막혔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네가 내 친구의 전 남친이라서 안 된다'고 말하는 순간, 서연이와의 관계도, 이 계약도 모두 끝장날 테니까.

"그냥... 없던 일로 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나는 도망치듯 현관으로 향했다. 도진이 나를 잡지 않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시선이 비수처럼 박혔다.

7화. 바이러스의 잠복기는 끝났다

오후 내내 멍하니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문을 두 번이나 실수했고, 사장님에게 핀잔을 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차도진 생각뿐이었다.

'균이 옮은 건 나인 것 같군.'

그 말이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이하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서연이었다. 그녀는 화려한 선글라스를 끼고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서연아..."

서연이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자, 꾹꾹 눌러담았던 감정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서연이의 손을 잡고 카페 구석 자리로 끌고 갔다.

"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도진 오빠가 또 꼽줬어? 내가 가서 한바탕 해줘?"
"아니, 그게 아니라..."

목이 메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서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 말을 하면, 우리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내 마음을 속일 수가 없었다.

"나, 나쁜 년 맞아. 네가 욕해도 할 말 없어."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도진 오빠 좋아해."

서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뜨며 말을 이었다.

"알아. 도진 오빠가 네 전 남친인 거. 네가 아직 그 사람한테 마음 있는 것도 알고, 그 액자... 네 사진인 것도 봤어."
"......"
"근데, 서연아. 나 정말 쓰레기 같은데... 나 그 사람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정말 미안한데... 욕은 나중에 들을게. 나 지금 그 사람한테 가야 돼. 가서 말해야 돼."

눈물이 핑 돌았다. 우정보다 사랑을 선택하겠다는 이기적인 선언. 뺨이라도 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푸하하하하!"

갑자기 서연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카페 안의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큰 웃음소리였다. 나는 멍하니 서연을 바라보았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실성한 건가?

"야, 이하루.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도진 오빠가 내 전 남친?"
"어? 아, 아니야?"
"미쳤냐? 내가 그 인간 소독제 냄새를 왜 맡고 살아? 내 전 남친은 마이클이잖아! 뉴욕에서 만난!"

머릿속의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마이클?

"그, 그럼 그 액자는 뭔데? 네가 그랬잖아. 잊지 못하는 구 여친이라고..."
"아, 그거?"

서연이 눈물을 닦으며 킬킬거렸다.

"그거 우리 집 강아지 '뽀삐' 사진이잖아. 오빠가 개털 알레르기 있어서 근처에도 못 오게 하니까, 내가 홧김에 액자 엎어놓고 온 건데? 꼴도 보기 싫다고?"

"......"

"그리고 내가 미쳤다고 차도진을 만나? 걔랑 키스하려면 전신 소독하고 멸균실 들어가야 할걸? 난 줘도 안 가져!"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모든 게 오해였다. 엎어진 액자도, 서연이의 미련도, 나의 죄책감도.

"그럼...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완전 삽질했네, 이하루. 야, 얼른 가 봐. 너 아까 그 사람한테 가야 된다며."

서연이 내 등을 팡 쳤다. 얼얼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돌아왔다.

"가라고, 이 답답아! 가서 그 결벽증 환자 구제해 주라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마워, 서연아! 나중에 맛있는 거 살게!"
"비싼 거로 사라! 아주 비싼 거로!"

카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산을 펼 시간조차 아까웠다.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지만, 차가움보다는 뜨거움이 앞섰다.

택시를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폐가 찢어질 것 같았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도진의 펜트하우스.
그 무균실 같은 공간에, 내가 없으면 안 된다.
그가 나에게 균을 옮긴 게 아니라, 내가 그에게 사랑이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퍼뜨린 거니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미끄러워 두 번이나 틀렸다.
[띠리릭-]
마침내 문이 열리고, 나는 젖은 몸으로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거실에는 도진이 서 있었다. 창밖의 비를 보고 있었는지, 창가에 기대선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그는 내 인기척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나를 보고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하루? 꼴이 그게 뭡니까. 비를 다 맞고..."
"좋아해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내뱉었다. 도진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했습니까, 방금?"
"좋아한다고요. 오빠가... 아니, 차도진 씨가 좋아요."

나는 젖은 운동화를 신은 채로, 대리석 바닥을 밟고 그에게 걸어갔다. 빗물이 뚝뚝 떨어져 그의 완벽한 무균실을 더럽히고 있었다. 하지만 도진은 바닥을 보지 않았다. 오직 나만을 보고 있었다.

"균 옮아도 상관없어요. 아니, 이미 옮은 것 같아요."
"......"
"그러니까 책임지세요. 나 치료해 줄 수 있는 의사, 당신밖에 없으니까."

도진의 입가에 피식, 실소가 번졌다. 그 웃음은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위험했다.

"진료 거부권은 없는 건가?"
"네, 없어요. 악덕 집주인이니까."

그가 성큼 다가왔다. 젖은 내 머리카락을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이 감쌌다.

"경고하는데."

그의 입술이 내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낮은 목소리가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번엔 도망 못 가. 내 무균실은 이제 오염됐으니까."

그리고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빗물 맛인지, 눈물 맛인지 모를 짭짤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뒤로 밀려오는 것은 현기증이 날 만큼 달콤한 열기였다.

더 이상 소독약 냄새는 나지 않았다.
비로소, 진짜 입주가 시작되었다.

4화: 라텍스 장갑을 벗고

“……알겠어요. 나갈게요.”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변명은 구차했다. 남의 서재에 함부로 들어간 것도, 엎어둔 액자를 훔쳐본 것도 명백한 내 잘못이었다.

무엇보다, 이 남자가 내 절친의 전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안 이상, 더는 이 집에 머물 명분이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렸다.
방문 손잡이를 잡는 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잠깐.”

등 뒤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려고.”

“나가라면서요. 짐 싸서 나가야죠. 위약금은… 몸으로 때우든 콩팥을 팔든 알아서 할게요.”

“밖을 봐.”

그의 턱짓에 나는 창가를 바라봤다.
유리창이 깨질 듯이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천둥 번개가 번쩍이며 청담동의 야경을 하얗게 지웠다.

“이 날씨에 어딜 간다는 거야. 갈 데는 있고?”

“찜질방이라도 가야죠.”

“내 집에서 쫓겨난 여자가 찜질방에서 자게 둘 순 없어. 재영이가 알면 날 죽이려 들 테니까.”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그리고 계약서 잊었나 본데, 갑의 동의 없는 퇴거도 위약금 대상이야.”

“아니, 오빠가 나가라고 했잖아요!”

“취소해.”

그가 딱 잘라 말했다.

“지금 나가면 너나 나나 개고생이야. 넌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될 거고, 난 내 친구한테 해명하느라 진을 빼겠지. 비효율적이야.”

그는 다시 평소의 차도진으로 돌아와 있었다.
건조하고, 계산적이고, 재수 없는 의사 선생님으로.

하지만 나는 봤다.
그가 액자를 낚아챌 때 스치듯 보였던 그 눈빛.
들키고 싶지 않은 상처를 들킨 짐승의 눈빛을.

“오늘은 늦었어. 내일 얘기해.”

그는 나를 지나쳐 침실로 들어갔다.
쾅.
문이 닫혔다.

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연아.
나 어떡하냐.
네 전 남친이 나를 안 보내준다는데, 이거 그린라이트냐, 아니면 그냥 호구 잡힌 거냐.

물론, 답은 후자겠지만.


그날 이후,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이름하여 ‘투명 방역막’.

나는 철저하게 그를 피했다.
아침에 그가 일어날 시간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했고, 그가 퇴근할 시간이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서연이가 1년 동안 사귀었다던 그 남자.
헤어지고 나서 펑펑 울며 “다시는 한국 남자 안 만나”라고 선언하게 만든 장본인.

그런 남자와 한집에 살면서, 손 한 번 잡았다고 설렜던 내가 쓰레기 같았다.

‘거리두기 4단계가 필요해.’

나는 스스로를 격리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뚱어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흐으….”

입주 5일 차 아침.
나는 턱을 부여잡고 침대에서 굴렀다.
오른쪽 어금니가 욱신거렸다.
스트레스성 치통인 줄 알았는데, 거울을 보니 잇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망했다.’

치과에 가야 한다.
하지만 내 통장 잔고는 3만 원.
강남 치과들의 살인적인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이하루. 아직 자?”

도진 오빠였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자요.”

“자는 사람이 대답은 잘하네. 나와. 밥 먹어.”

“안 먹어요.”

“굶어 죽어서 시체 치우게 하지 마. 나와서 샐러드라도 먹어.”

“이빨 아파서 못 먹는다고요!”

아차.
말실수했다.
문밖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빨?”

“아니, 치아요. 치아.”

“나와 봐.”

“싫어요.”

“3초 준다. 하나. 둘.”

철컥.
문이 열렸다.
도진 오빠가 팔짱을 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출근 준비를 마친 완벽한 수트 차림이었다.

“입 벌려 봐.”

“싫다니까요. 동네 치과 갈 거예요.”

“내 눈앞에 치과 전문의를 두고 돌팔이한테 가겠다고? 돈 많아?”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뒷걸음질 쳤지만, 침대 헤드에 막혀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가 내 턱을 잡으려다 멈칫했다.
맨손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턱을 감쌌다.

“아….”

살짝 눌렀는데도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부었네. 사랑니야.”

“사랑니요? 저 다 뺐는데요?”

“매복이었나 보지. 옷 입어. 병원으로 와.”

“싫어요. 오빠네 병원 비싸잖아요.”

“직원 할인 해줄게.”

“저 직원 아닌데요.”

“약혼녀 할인. 100퍼센트.”

그가 시계를 확인하며 돌아섰다.

“11시까지 와. 늦으면 예약 취소다.”


청담동 한복판에 우뚝 솟은 [차도진 치과의원].
건물 외관부터가 ‘나 비싸요’를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대기실은 갤러리처럼 꾸며져 있었고,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하지만 내 귀에는 저 안쪽 진료실에서 들려오는 ‘위잉—’ 소리만 크게 들렸다.
지옥의 드릴 소리.

“이하루 님? 들어오세요.”

간호사 언니의 안내를 받아 진료실로 들어갔다.
유니트 체어에 앉자마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치과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누우세요.”

마스크와 페이스 쉴드로 무장한 도진 오빠가 나타났다.
병원에서의 그는 집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차갑고, 권위적이고, 무엇보다… 섹시했다.

‘미쳤어, 이하루. 아파 죽겠는데 섹시가 눈에 들어오냐?’

나는 입을 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검진만 할 거야. 긴장 풀고.”

차가운 기구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놀림은 기계처럼 정확했다.

“역시 매복이네. 염증이 생겼어. 당장 발치해야겠는데.”

“지, 지금요?”

“어. 놔두면 더 부어.”

그가 간호사에게 마취 주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공포에 질려 의자 팔걸이를 꽉 쥐었다.

“오빠, 저 마취 주사 진짜 싫어하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따끔해.”

그가 주사기를 들고 다가왔다.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이 내 입가를 벌렸다.
소독약 냄새가 훅 끼쳤다.
그 냄새가 묘하게 서연이를 떠올리게 했다.

서연이도 이 냄새를 맡았겠지.
이 의자에서, 그에게 치료를 받았겠지.
그때도 그는 이렇게 차갑고 완벽했을까?

“……윽!”

바늘이 잇몸을 찔렀다.
아픔보다 서러움이 먼저 밀려왔다.
나는 왜 여기서, 친구의 전 남친에게 입을 벌리고 있는가.

마취가 퍼지는 동안 그는 차트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입안이 얼얼해지는 느낌을 참으며 그를 훔쳐봤다.

“오빠.”

“말하지 마. 마취 덜 됐어.”

“서연이… 많이 좋아했어요?”

정적.
진료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그가 차트를 내려놓았다.
페이스 쉴드 너머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진료 중에 사담 금지야.”

“궁금해서요. 사진까지 간직할 정도면, 아직 못 잊은 거 아니에요?”

나는 일부러 긁어댔다.
차라리 그가 화를 냈으면 좋겠어서.
그래야 내가 마음 편히 그를 미워하고, 이 빌어먹을 썸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잊은 지 오래야.”

그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럼 사진은 왜 갖고 있어요?”

“버리는 걸 깜빡했어. 그게 다야.”

거짓말.
결벽증 환자가 자기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깜빡해?
먼지 한 톨도 용납 못 하는 사람이, 전 여친 사진을 방치한다고?

“거짓말하지 마요. 오빠 아직 서연이한테 미련 남았잖아. 그래서 나한테 잘해주는 거잖아요. 친구니까.”

“이하루.”

“나 치료 안 받을래요. 다른 병원 갈래.”

나는 냅킨을 뜯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였다.

탁.
그가 내 어깨를 눌러 다시 의자에 앉혔다.

“앉아.”

“싫어요! 이거 놔요!”

“움직이지 마. 다쳐.”

“다치든 말든! 오빠가 무슨 상관인데!”

내가 버둥거리자, 그가 내 양 손목을 잡아 의자 위로 고정시켰다.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나는 꼼짝없이 제압당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너, 며칠 동안 나 피해 다닌 이유가 그거였어?”

“…….”

“내가 네 친구를 못 잊어서, 너를 대용품으로 쓴다고 생각한 거야?”

“아니면 뭔데요! 갑자기 빚 갚아주고, 집 내주고, 약혼녀 해달라 하고… 이게 다 서연이 때문이 아니면 뭐냐고!”

내 외침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거친 숨소리가 마스크 너머로 들려왔다.

그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리고.

짝.
그가 끼고 있던 라텍스 장갑을 벗어 던졌다.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장갑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 오빠?”

나는 당황해서 그를 불렀다.
그는 결벽증이다. 진료 중에, 그것도 환자의 타액이 튀고 피가 튈 수 있는 상황에서 맨손을 드러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반대쪽 장갑도 벗어 던졌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소독약 냄새에 가려져 있던, 날 것 그대로의 남자의 손이었다.

그가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맨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흡….”

차가운 진료실 공기와 달리, 그의 손바닥은 뜨거웠다.
엄지손가락이 내 입술가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소독약 냄새가 사라지고, 그의 살냄새가 훅 끼쳐왔다.

“잘 봐.”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금 내 손에 장갑 있어?”

“……없어요.”

“내가 네 친구 때문에 이러는 거면, 굳이 내 원칙까지 깨가면서 널 만질까?”

그의 엄지가 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입술이 벌어졌다.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고정되었다가, 다시 내 눈으로 올라왔다.

“서연이는 내 손 잡는 것도 싫어했어. 소독약 냄새난다고.”

“…….”

“근데 넌 아니잖아.”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너무 가까워서, 속눈썹 개수까지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독은 끝났어.”

그의 손이 내 뒷목을 감싸 안았다.
피할 수 없었다. 아니, 피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치료야.”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기 직전, 뜨거운 숨결이 서로 엉켰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의료 행위가 아니다.
명백한 계약 위반이다.

5화: 가짜 데이트, 진짜 질투

입술이 닿기 0.1초 전.
드르륵.

“원장님, 다음 예약 환자분이… 헉!”

진료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 언니가 들어왔다.
그리고 곧바로 얼음이 되었다.

도진 오빠와 나는 감전된 사람처럼 떨어졌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고, 나는 의자 깊숙이 파고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터질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노크를 했는데 안 들리시는 것 같아서…!”

간호사 언니는 빛의 속도로 문을 닫고 사라졌다.
진료실에 다시 적막이 흘렀다.
아까의 그 숨 막히던 텐션은 산산조각이 났다.

도진 오빠가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그의 귀 끝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발치부터 하자.”

그가 새 장갑을 꺼내 끼며 말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 그건… 마취 잘 됐는지 확인한 거야. 오해하지 마.”

“누가 뭐래요? 저도 알거든요. 촉진(觸診)인 거.”

거짓말.
촉진을 그렇게 야하게 하는 의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
하지만 나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마취가 풀릴 것만 같았다.

사랑니를 뽑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는 역시 명의였다. 아플 새도 없이 “끝났어”라고 말하며 거즈를 물려주었다.

“2시간 동안 뱉지 말고 삼켜. 빨대 쓰지 말고. 술 마시지 말고.”

그는 기계적인 주의사항을 읊으며 처방전을 건넸다.
하지만 내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집에 가 있어. 저녁에… 데리러 갈게.”

“네? 왜요?”

나는 웅얼거리며 물었다.

“오늘 본가 가서 저녁 먹기로 했잖아. 약혼녀 수업 실전.”

아. 맞다.
오늘이 그날이었지.
호랑이 굴, 아니 시월드 체험판 입장하는 날.


도진 오빠의 본가는 성북동 언덕 위에 요새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잘 가꿔진 조경수들이 도열해 있었고, 거수경례를 하는 경비원의 모습은 마치 재벌가를 다룬 드라마의 한 장면을 오려 붙인 것 같았다.

“긴장하지 마. 그냥 밥만 먹고 나오면 돼.”

운전석의 도진 오빠가 말했다.
그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이번엔 장갑 없이, 맨손으로.
아까 병원에서의 일이 생각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오빠나 긴장 풀어요. 손에 땀나요.”

“……너 때문이야.”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못 들은 척했지만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도진 오빠의 부모님이 우리를 맞이했다.
아버님은 근엄한 회장님 포스였고, 어머님은 우아한 사모님 그 자체였다.
다행히 두 분 다 나를 반겨주셨다. 재영 오빠의 동생이라는 프리미엄이 확실히 컸다.

“어머, 하루가 이렇게 컸니? 어릴 때 콧물 흘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머님이 내 손을 잡으려 하자, 나는 얼른 두 손으로 공손히 맞잡았다.
대리석 바닥이 거울처럼 빛나고, 천장에는 호텔 로비에서나 볼 법한 샹들리에가 위압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화기애애했다.
도진 오빠가 미리 언질을 줬는지, 부모님은 내 직업이나 재산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으셨다.
대신,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셨다.

“그래, 도진이가 먼저 고백했다고?”

어머님의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도진 오빠를 힐끔 쳐다봤다. 시나리오대로 가야 한다.

“네. 오빠가… 병원으로 저를 부르더니, 갑자기 장갑을 벗고 제 손을 잡으면서….”

“크흠!”

도진 오빠가 사레들린 듯 기침을 했다.
물론, 이건 시나리오에 없던 내용이다.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을 각색한 거다.
그가 식탁 아래서 내 발을 툭 찼다. 하지 말라는 신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복수 타임이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니?”

“너는 나한테 세균이 아니라 백신이다… 뭐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더라고요.”

“어머, 세상에! 우리 도진이가 그런 말을?”

어머님은 감격해서 손수건으로 입가를 찍으셨다. 아버님도 허허 웃으셨다.
도진 오빠의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봤다.
‘두고 보자’는 눈빛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정원을 산책했다.
어머님은 안으로 들어가시고 둘만 남았다.

“이하루. 너 연기 대상감이다?”

“왜요? 백신 드립, 감동적이지 않았어요?”

“죽는다, 진짜.”

그가 내 볼을 꼬집었다. 아픈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정원수 사이로 달빛이 쏟아졌다. 분위기가 묘했다.

“……고마워.”

그가 불쑥 말했다.

“오늘 잘해줘서. 부모님이 저렇게 웃으시는 거 오랜만에 봐.”

“돈 받았으니까요. 밥값은 해야죠.”

“그냥 밥값만은 아니었어. 너… 생각보다 뻔뻔하게 잘하더라.”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사실, 서연이 얘기… 부모님은 모르셔.”

“……네?”

“내가 연애했던 거. 그냥 공부하느라 바쁜 줄 아셔.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어.”

그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들렸다.
아. 그래서 사진을 엎어뒀던 건가? 부모님이 서재에 들어오실까 봐?
아니면, 정말 보기 싫어서?

“오빠.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서연이랑은… 왜 헤어졌어요?”

그가 걸음을 멈췄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깊었다.

“안 맞았어.”

“뭐가요? 성격이?”

“아니. 온도.”

“온도요?”

“걔는 너무 뜨거웠고, 나는 너무 차가웠어. 걔는 내 결벽증을 고치려고 했고, 나는 걔를 내 방식대로 맞추려고 했지. 서로 지친 거야.”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미련이라기보다는, 실패한 과거에 대한 회한 같았다.

“근데 넌….”

그가 내게 다가왔다.

“적당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그냥… 편해.”

그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적당하다니. 편하다니.
나는 그에게 여자로서 매력이 없다는 뜻인가?

“칭찬 참 고맙네요. 미지근해서 좋다는 거잖아요.”

내가 툴툴거리자 그가 피식 웃었다.

“아니. 미지근한 게 아니라….”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려던 찰나였다.

지잉— 지잉—

내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 [이재영 오빠].

“……오빠다.”

“받지 마.”

“안 받으면 의심해요. 지금 집에 있을 시간인데.”

나는 눈치를 보며 전화를 받았다.

“어, 오빠. 왜?”

[야, 이하루! 너 어디야? 집이라며!]

재영 오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어? 어, 집이지. 화장실이라서 좀 울려.”

[거짓말하지 마. 나 지금 도진이네 집 앞인데 초인종 눌러도 아무도 없잖아!]

망했다.
이 인간은 왜 예고도 없이 찾아오고 난리야.

“아, 그게… 잠깐 편의점 나왔어. 금방 들어갈게.”

[빨리 와. 도진이 놈도 연락 안 되고, 너라도 있어야 문을 따지.]

전화를 끊자마자 도진 오빠가 내 손목을 잡았다.

“가자. 재영이 기다리겠다.”

“어떡해요? 둘이 같이 들어가면 들키잖아요.”

“따로 내리면 돼. 넌 편의점 다녀온 척하고, 난 퇴근하는 척하고.”

우리는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며 차에 탔다.
도진 오빠가 엑셀을 밟았다.


집 근처 골목.
도진 오빠는 나를 편의점 앞에 내려주었다.

“먼저 가 있어. 난 주차하고 5분 뒤에 올라갈게.”

“알았어요.”

나는 차에서 내려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빈손으로 가면 의심받을 테니 맥주라도 사야 했다.
맥주 4캔을 사서 나오는데,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아, 씨. 눈을 어디다 달고 다녀?”

내가 지나가려던 찰나, 비틀거리며 일어난 취객과 어깨가 부딪쳤다.
남자가 들고 있던 종이컵의 커피가 그의 셔츠에 튀었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죄송하면 다야? 이거 명품인데 어쩔 거야!”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내 앞을 막아섰다.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훅 끼쳐왔다.

“세탁비 물어내. 아니면 술이라도 한잔 사든가.”

“비키세요. 세탁비는 계좌 주시면 보낼게요.”

“이 아가씨가 사람 말을 뭘로 듣고….”

남자가 내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불쾌함에 소름이 돋았다.

“이거 놓으세요! 신고할 거예요!”

“신고? 해 봐, 해 봐. 옷 버려놓고 적반하장이야?”

남자가 킬킬거리며 내 어깨를 감싸려 했다.
그때였다.

끼이익—!

검은색 세단이 굉음을 내며 편의점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도진 오빠가 내렸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누구야.”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을 막아섰다.
취객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뭐야, 넌? 이 아가씨 일행이야?”

“비켜. 더러운 거 묻잖아.”

도진 오빠가 으르렁거렸다.
그의 시선은 남자의 얼굴이 아니라, 내 팔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오물을 보는 듯한 경멸 어린 눈빛이었다.

“뭐? 더러운 거? 이 새끼가 말 다 했어?”

남자가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도진 오빠는 피하지 않았다.

탁.
그가 남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맨손이었다.
담배 냄새와 알코올에 절어있는 그 손목을, 결벽증 환자인 차도진이 망설임 없이 움켜쥐었다.

“억…!”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도진 오빠의 악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경고하는데.”

도진 오빠가 남자의 팔을 비틀어 떼어내며 낮게 읊조렸다.

“내 여자한테 균 옮기지 말고 꺼져. 역겨우니까.”

내 여자.
그 단어가 뇌리에 박혔다.

남자는 기세에 눌려 욕설을 중얼거리며 도망쳤다.
도진 오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봤다.

“괜찮아?”

그가 내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혐오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오빠… 손….”

나는 그의 손을 가리켰다.

“상관없어.”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네가 다치는 것보단 나아.”

그가 나를 이끌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온몸의 신경이 그에게 쏠리는 것 같았다.

이 남자, 지금 진심이다.
계약이고 뭐고, 지금 이 질투와 분노는 연기가 아니다.

차에 타자마자 그가 물티슈를 꺼내 내 팔을 벅벅 닦았다.
아까 그 남자가 만졌던 부위였다.

“아, 아파요….”

“가만히 있어. 소독해야 돼.”

그의 눈빛이 집요했다.
마치 내 몸에 묻은 다른 남자의 흔적을 지워버리겠다는 듯이.

“오빠, 질투해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손이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어.”

그가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질투해. 그러니까 다른 놈이랑 말 섞지 마.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6화: 바이러스 침투 경보

“질투해.”

그 한마디의 파괴력은 핵폭탄급이었다.
나는 입을 벙긋거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진 오빠는 다시 핸들을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귀 끝이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아파트로 돌아왔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층에서 문이 열리고, 재영 오빠가 씩씩거리며 탔다.

“야! 너네 왜 같이 와?”

재영 오빠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 아,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어.”

내가 황급히 둘러댔다.
재영 오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진 오빠를 훑었다.

“너 왜 이렇게 땀을 흘려? 어디 싸우고 왔냐?”

도진 오빠의 셔츠가 흐트러져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아까 취객과 실랑이한 흔적이었다.

“운동하고 왔어.”

도진 오빠가 짧게 대답했다.

“운동? 이 시간에? 하여간 별나다, 별나.”

재영 오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행히 넘어갔다.
우리는 펜트하우스로 들어왔다.

재영 오빠는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시더니, 10분 만에 소파에서 곯아떨어졌다.
거실에는 코 고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도진 오빠와 나는 주방 아일랜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손… 씻고 올게.”

도진 오빠가 먼저 일어났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물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아까 취객의 손목을 잡았던 손을 씻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나 끔찍했을까.’

결벽증인 그가 더러운 취객을 맨손으로 잡았다. 나를 위해서.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했다.

30분 뒤, 그가 나왔다.
손이 벌겋게 부르터 있었다. 얼마나 박박 씻었는지 껍질이 벗겨질 정도였다.

“오빠, 손이 그게 뭐예요….”

내가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가 흠칫하며 손을 뒤로 뺐다.

“만지지 마. 아직… 더러워.”

“뭐가 더러워요. 껍질 벗겨지겠네.”

나는 억지로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구급상자에서 연고를 꺼내 발라주었다.
그는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됐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다치는 것보다, 내가 좀 더러워지는 게 나아.”

그 말이 훅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어두웠다.

“이하루.”

“네.”

“나 너한테… 백신 드립 칠 때, 진심이었어.”

“…….”

“너는 나한테 세균이 아니야. 오히려….”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였다.

쿠르릉— 쾅!

거대한 천둥소리와 함께 집 안의 모든 불이 꺼졌다.
정전이었다.

“악!”

나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암흑천지였다. 창밖의 번개만이 간헐적으로 거실을 비췄다.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마.”

도진 오빠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그가 내 팔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안도감을 주었다.

“비상등… 비상등이 어디 있더라.”

그가 더듬거리며 일어섰다.
하지만 발이 꼬였는지, 그가 휘청거리며 내 쪽으로 쓰러졌다.

“어?”

우당탕.
우리는 엉겨 붙은 채 소파 위로 넘어졌다.
내가 밑에 깔리고, 그가 내 위로 덮쳐진 자세였다.

번쩍.
번개가 쳤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안경이 벗겨져 있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내 이마에 닿아 있었다.

“……괜찮아?”

그의 숨결이 내 입술 바로 위에서 느껴졌다.
너무 가까웠다.
호흡이 가빠지고, 귓가에는 제멋대로 뛰는 맥박 소리만 가득했다.

“오, 오빠. 무거워요….”

“미안.”

그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팔을 뻗어 나를 소파 등받이에 가두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만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하루.”

“……네.”

“나 지금 제정신 아니야.”

“…….”

“아까부터 너한테 키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직구였다.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직구.

“너… 서연이 친구인 거 알아.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것도 알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근데, 신경 안 쓸래. 내 무균실은 이미 너 때문에 엉망진창이 됐으니까.”

그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이번엔 망설임이 없었다.

“피하지 마.”

그가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그다음엔 집어삼킬 듯이.

그의 키스는 건조하지 않았다.
뜨겁고, 축축하고, 절박했다.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죄책감도, 오빠도, 계약서도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는 우리 둘뿐인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탐하듯 엉겨 붙었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고, 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맨살에 닿자 전율이 일었다.

“하아….”

숨이 찼다.
그가 입술을 떼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해, 하루야. 가짜 말고, 진짜로.”

그 고백이 내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
나도 좋아해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지잉— 지잉— 지잉—

정적을 깨고 벨소리가 울렸다.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내 핸드폰이었다.

우리는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도진 오빠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이 환하게 켜지며 발신자 이름이 떴다.
[이서연].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까지의 뜨거웠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누구야?”

도진 오빠가 물었다.
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핸드폰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받아야 하나?
받으면… 이 꿈같은 시간이 깨질 텐데.
하지만 안 받을 수도 없었다. 서연이는 내 절친이니까.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하루야! 나야, 서연이!]

서연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국제전화가 아니었다. 깨끗한 음질.

[나 지금 공항이야. 방금 도착했어!]

“……어?”

[서프라이즈! 나 귀국했어.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네.]

서연이가 웃었다.
그 해맑은 웃음소리가 내 가슴을 난도질했다.

[야, 근데 너 지금 어디야? 내가 선물 사 왔는데 당장 만나자. 그리고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무슨… 말?”

[나 소개할 남자 있어. 내 전 남친인데… 걔가 아직 나 못 잊었대.]

순간, 발밑이 꺼지는 듯한 현기증이 일었다.
전 남친? 도진 오빠 말하는 거야?
도진 오빠가 서연이를 못 잊었다고? 방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도진 오빠를 쳐다봤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튼 빨리 나와! 나 지금 너네 집 앞 카페로 갈게!]

뚝.
전화가 끊겼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 불빛만이 내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도진 오빠가 내 손을 잡으려 했다.

“하루야, 왜 그래? 무슨 전화야?”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마치 벌레에 닿은 것처럼.

“……오빠.”

“어?”

“우리… 그만해요.”

“뭐?”

“이거 다 실수예요. 분위기에 휩쓸린 거라고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망쳐야 했다.
서연이가 오고 있다. 내 친구가, 자기 전 남친을 소개하겠다고 오고 있다.
내가 그 전 남친이랑 키스하고 있었다는 걸 알면… 서연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소리야, 실수라니. 난 진심이라고 했잖아.”

도진 오빠가 따라 일어나 내 팔을 잡았다.

“이거 놔요!”

“이유를 말해. 갑자기 왜 이러는데!”

“서연이가 왔대요.”

내 입에서 나온 이름에 그가 굳어버렸다.

“귀국했대요. 지금… 나 만나러 온대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역시, 그도 서연이 이름 앞에서는 작아지는구나.

“갈래요. 계약이고 뭐고, 다 끝내요.”

나는 짐을 챙길 새도 없이 현관으로 달렸다.
이 집은 무균실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바이러스였다.
이제 백신이 왔으니, 바이러스는 사라져야 한다.

나는 도어락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등 뒤에서 도진 오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폭우가 내리는 거리로, 나는 다시 쫓겨나듯 달렸다.
이번엔 내 발로 걸어 나온 거지만, 마음은 쫓겨난 것보다 더 아팠다.

스텝 재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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