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6: 파일럿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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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세균, 입주를 명받았습니다

“조항 1. 반경 1미터 접근 금지. 조항 2. 내 물건에 맨손 접촉 금지. 조항 3….”

도진 오빠가 내민 A4 용지에는 [갑: 차도진, 을: 이하루]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그가 수술용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볼펜을 밀었다.

탁자 위로 소독약 냄새가 훅 끼쳤다.

“잠깐만요. 입주 도우미 겸 약혼녀라면서 접근 금지면, 연기는 텔레파시로 해요?”

그가 무표정하게, 하지만 지독하게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존재 자체가 오염이니까, 숨만 쉬고 돈 받아 가라는 소리야.”

하. 내 인생이 망해서 오빠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됐는데, 하필 그 오빠 친구가 미친 결벽증 환자일 확률을 구하시오.

정답. 100퍼센트.

나는 떨리는 손으로 볼펜을 집어 들었다. 아직 빗물에 젖은 내 소매 끝에서 물방울 하나가 톡, 하고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진 오빠의 미간이 종이 구겨지듯 찌푸려졌다.
그가 즉시 스프레이를 들어 바닥을 향해 난사했다.

치익. 치익.

마치 바퀴벌레를 박멸하는 듯한 저 손놀림.
그래, 이건 계약이 아니다.
생존을 건 기생이다.


시간을 3시간 전으로 돌려보자.

내 인생은 아주 심플하게 망해 있었다.
작업실 보증금 3천만 원.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5년을 꼬박 모은 피 같은 돈이었다.

집주인이 야반도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하필이면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오늘 아침이었다.

“이하루, 너 갈 데 없으면 일단 도진이한테 가 있어.”

친오빠인 재영 오빠는 전화기 너머로 그렇게 말했다. 본인은 지금 지방 출장 중이라 당장 서울로 올 수가 없다고 했다.

“도진이 걔, 집 넓잖아. 방도 남아돌고. 내가 말해둘게.”

차도진.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땅이라는 청담동에 개원한 치과의사. 재영 오빠의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그리고 나한테는 그냥 ‘돈 많고 재수 없는 오빠 친구’였다.

선택권은 없었다.
캐리어 하나를 끌고 쫄딱 젖은 생쥐 꼴로 도진 오빠의 펜트하우스 초인종을 눌렀을 때, 나는 최소한의 동정심을 기대했다.

딩동.

인터폰 화면에 그의 얼굴이 떴다.
차가운 금속테 안경.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넘긴 포마드 헤어.

[누구세요.]

“오빠, 저 하루예요. 재영 오빠 동생….”

[알아. 근데.]

“네?”

[왜 그렇게 더러워.]

그게 10년 만에 본 동생 친구에게 할 소리인가.
문이 열리기도 전에 쫓겨날 뻔했지만, 다행히 재영 오빠의 전화가 타이밍 좋게 걸려온 덕분에 나는 현관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아니, 진입‘당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멈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도진 오빠가 나를 가로막았다.
그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집에서 왜 가운을 입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에는 라텍스 장갑, 얼굴에는 KF94 마스크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거기 타일 밟지 마. 외부 오염 물질 반입 금지야.”

“오빠, 나 오염 물질 아니고 사람인데….”

“비에 젖은 유기물은 세균 번식의 최적지야. 벗어.”

“네? 뭘요?”

“겉옷. 그리고 신발은 저기 비닐팩에 넣어. 캐리어 바퀴는… 하, 일단 들어오지 마.”

그는 마치 핵폐기물을 처리하듯 긴 집게를 가져와 내 젖은 카디건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현관 옆에 있는 스타일러—아니, 거의 멸균 소독기처럼 생긴 기계—에 처박았다.

치이익—
스팀 소리가 들렸다. 내 자존심이 증발하는 소리 같았다.

“샤워실은 저쪽. 수건은 일회용만 써. 욕조는 건드리지 말고 샤워부스만 이용해. 나오면서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퇴출이야.”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다. 그것도 중증.

“안 씻을 거야? 그럼 나가.”

그의 손가락이 현관문을 가리켰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었다. 갈 곳은 없다. 통장 잔고는 3만 원. 밖에는 폭우가 쏟아진다.

“……씻을게요. 아주 빡빡.”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거실 풍경이 가관이었다.
그사이 내 캐리어는 랩으로 칭칭 감겨 있었고, 내가 밟았던 현관 타일은 알코올로 닦았는지 광이 나다 못해 미끄러울 지경이었다.

이 집은 모델하우스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모든 물건이 각 맞춰 정렬되어 있었고, 공기 중에는 먼지 한 톨 떠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소독되는 기분이었다.

도진 오빠는 6인용 식탁 끝에 앉아 있었다.
나와의 거리는 대략 3미터.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는데, 컵받침의 각도조차 테이블 모서리와 평행을 이루고 있었다.

“앉아.”

그가 턱짓으로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재영이한테 얘기 들었어. 보증금 날렸다며.”

“……네.”

“얼마나 필요해?”

훅 들어오는 본론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3천만 원이요. 오빠, 제가 진짜 열심히 일해서 갚을게요. 이자도 쳐서….”

“일?”

그가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건조한 웃음이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 그림 그리는 거 말고.”

“청소도 잘하고요, 밥도 잘하고….”

“청소?”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차.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다. 이 결벽증 환자 앞에서 청소를 논하다니.

“내 기준에 맞는 청소를 하려면 넌 아마 30분 안에 기절할 거야. 지난주에 온 도우미 아주머니도 1시간 만에 도망갔거든.”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밥은 필요 없어. 배달시켜 먹거나 캡슐 먹으면 되니까. 내 주방 더러워지는 거 딱 질색이야.”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나는 여기서 뭘 해야 하지? 그냥 숨만 쉬는 식충이?
그때,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본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여사님]. 아마도 어머니인 듯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실험용 쥐를 관찰하는 연구원 같은 눈빛으로.

“이하루.”

“네.”

“너, 남자친구 없지?”

“……네? 갑자기 그건 왜….”

“재영이가 그러던데. 너 모태솔로라고.”

“아니, 썸은 탔거든요? 그리고 오빠가 무슨 상관인데요.”

욱해서 대꾸했지만 그는 내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재영이 동생. 신원 확실하고. 빚 있고. 갈 데 없고.”

그의 시선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성적인 뉘앙스는 0.1퍼센트도 없었다. 그저 견적을 내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혀 내 취향이 아니고.”

“저기요, 그쪽도 제 취향 아니거든요? 저도 씻는 거 귀찮아하는 남자는 싫지만, 이렇게 유난 떠는 남자는 더 싫….”

“3천 갚아줄게.”

내 입이 합 다물어졌다.
자본주의가 낳은 침묵이었다.

“여기서 지내게 해줄게. 숙식 제공. 빚 탕감. 대신 조건이 있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가운 자락이 펄럭였다. 그는 서재로 들어가더니 1분 만에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왔다.

“사인해.”

그것이 바로,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이 미친 계약서였다.

[약혼 계약서]

제목부터가 폰트 크기 24포인트로 굵게 박혀 있었다.

“……약혼이요?”

“가짜야. 어머니가 선 자리를 일주일에 다섯 개씩 잡아오셔. 내가 게이라는 소문까지 퍼뜨렸는데도 안 먹히더라고.”

그는 피로한 듯 안경을 벗어 닦았다.

“여자가 필요해. 내 공간에 들어와도 내가 토하지 않을 만큼 무해하고, 적당히 멍청해서 내 사생활 안 캐묻고, 돈이 필요해서 시키는 대로 할 여자.”

“그게 저라고요?”

“너보다 완벽한 조건은 없어. 너는 재영이 동생이니까, 내가 너한테 흑심 품을 리 없다고 생각하실 거야. 안전하지.”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다시 안경을 썼다. 차가운 렌즈 너머로 예리한 눈빛이 번뜩였다.

“기간은 3개월. 내 약혼녀 연기를 하면서 이 집에서 지내. 부모님 만날 때만 협조하면 돼. 나머지는 자유야.”

“진짜… 3천만 원 다 갚아주는 거예요?”

“원하면 현금으로 바로 쏴줄 수도 있어.”

그가 볼펜 끝으로 계약서 하단을 톡톡 쳤다.

“할 거야, 말 거야. 너 나가면 난 다른 사람 구해야 해. 물론 너만큼 ‘더러운’ 여자를 찾긴 힘들겠지만.”

저놈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지만, 내 통장은 텅 비어 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 눈 딱 감고 3개월이다. 어차피 오빠 친구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인데 내외할 게 뭐 있나.

나는 볼펜을 쥐었다.
서명란에 이름을 쓰려는 순간, 도진 오빠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아, 깜빡할 뻔했네. 맨 마지막 조항 읽어봐.”

나는 시선을 내렸다.
가장 작은 글씨로 적힌 특약 사항이 보였다.

[제15조. 을이 갑의 동의 없이 신체 접촉을 시도하거나, 갑의 위생 기준을 심각하게 위반하여 정신적 피해를 입힐 경우 계약은 즉시 파기되며, 을은 지원받은 금액의 3배를 위약금으로 배상한다.]

3배.
9천만 원.

“……미쳤어요? 실수를 할 수도 있지, 3배는 너무하잖아요!”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난 내 몸에 균 닿는 거, 죽기보다 싫어하니까.”

그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처음으로 보여준 웃음이었지만,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잘 생각해, 이하루. 이 집은 무균실이야. 들어오는 건 네 마음이지만, 살아남는 건 다른 문제니까.”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펜촉이 종이에 닿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1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25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오프닝 계약 - 과거 회상/입장 - 계약 제안)
  • 등장 캐릭터: 이하루(여주), 차도진(남주), 이재영(오빠/언급)
  • 공개된 설정: 도진의 극심한 결벽증, 하루의 파산 상태, 두 사람의 관계(오빠 친구), 가짜 약혼의 목적.
  • 심은 복선: 도진이 '재영이 동생이라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태도(나중에 감정적 동요로 깨질 복선), '신체 접촉 금지' 조항.
  • 클리프행어 유형: 선택의 기로 + 미해결 갈등 (불공정 계약에 서명 직전)
  • 다음 화 연결 방식: 시간 점프 (입주 후 벌어지는 난장판으로 직행)

Part 2: 2화 집필

2화: 오빠 몰래 식탁 아래서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 내 신분은 ‘채무자’에서 ‘입주 가정부 겸 가짜 약혼녀’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격리된 바이러스’에 가까웠다.

입주 3일 차.
나는 도진 오빠가 정해준 구역—게스트룸과 그에 딸린 화장실—반경 5미터를 벗어날 때마다 그야말로 눈치를 봐야 했다.

“이하루. 발뒤꿈치 들고 다녀. 쿵쿵거리는 진동이 거슬려.”

“……네.”

“그리고 숨 쉴 때 입으로 쉬지 마. 비말 튀니까 코로만 쉬어.”

“오빠, 그건 생물학적으로 좀 무리인데요.”

“노력해 봐.”

미친놈.
나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까치발을 들었다.
3천만 원짜리 숙식 제공이라 참는다.

이 집은 정말이지 숨 막히게 깨끗했다.
먼지 한 톨 없는 대리석 바닥은 거울처럼 내 초라한 몰골을 비췄고, 공기청정기는 24시간 풀가동되며 집 안의 산소 농도를 아마존 밀림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내 배꼽시계였다.
밤 11시.
저녁으로 샐러드—도진 오빠가 ‘냄새 안 나는 음식’만 허락했다—를 먹은 내 위장이 파업을 선언했다.

꼬르륵.

천둥 같은 소리가 게스트룸을 울렸다.
나는 방문을 살짝 열고 거실을 염탐했다.
적막강산.
도진 오빠는 안방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는 수면 루틴마저 칼같이 지키는 인간이니 지금쯤 꿈나라에서 세균 박멸하는 꿈이나 꾸고 있을 거다.

‘지금이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주방으로 잠입했다.
목표는 찬장 구석에 숨겨둔 컵라면.
원래는 냄비에 끓여 먹는 라면이 진리지만, 가스불을 켜는 순간 냄새가 환기구를 타고 안방으로 침투할 게 뻔했다.

전기포트 물이 끓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까 봐 나는 포트를 끌어안다시피 했다.
뜨거운 물을 붓고, 나무젓가락으로 뚜껑을 눌렀다.
3분.
이 3분이 내게는 영겁의 시간이었다.

‘제발 냄새야, 퍼지지 마라.’

나는 아일랜드 식탁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매콤하고 짭짤한 MSG의 향기.
아, 천국이 여기 있구나.

후루룩.
면발을 한 입 가득 넣는 순간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헙!”

나는 사레가 들려 기침을 터트릴 뻔한 걸 간신히 틀어막았다.
등 뒤에서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실크 파자마 차림의 도진 오빠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컵라면 용기에 고정되었다.
마치 시한폭탄을 발견한 폭발물 처리반의 눈빛이었다.

“내 주방에서, 감히, 인스턴트 라면을?”

“아, 오빠. 그게 아니라… 너무 배가 고파서….”

“냄새.”

그가 미간을 구기며 뒷걸음질 쳤다.

“이 지독한 화학 조미료 냄새. 환기 시스템 3단계로 돌려야겠군.”

그는 주방 벽면에 붙은 패널을 조작했다.
위잉—!
천장에 매립된 초대형 후드가 제트기 이륙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라면 냄새가 빨려 들어갔다.

“너, 계약 조항 4조 기억 안 나? 자극적인 냄새 유발 금지.”

“아니, 방문 다 닫고 먹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사람 사는데 어떻게 이슬만 먹고 살아요?”

“난 살아.”

“오빠는 광합성만 해도 사는 식물 인간이잖아요! 난 고기 먹어야 하는 짐승이라고요!”

내 반항에 그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띠로리, 띠로리, 띠로리.

현관 도어락이 경쾌하게 울렸다.
순간, 주방에 정적이 흘렀다.
도진 오빠와 내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 집에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딱 세 명이다.
도진 오빠. 나.
그리고.

“어? 도진아! 나 왔다!”

이재영.
내 친오빠이자, 도진 오빠의 10년 지기 절친.
그리고 내가 여기 입주한 걸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유일한 인물.

“미친.”

도진 오빠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영 오빠는 내가 여기 있는 줄 알지만, ‘가짜 약혼녀’ 계약 따위는 모른다. 그냥 며칠 신세 지는 줄로만 안다.
하지만 밤 11시에, 잠옷 바람으로, 둘이 같이 있는 걸 들킨다면?

“야! 차도진! 문 왜 안 열어줘?”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숨어.”

도진 오빠가 내 팔을 낚아챘다.
맨손이었다.
라텍스 장갑도 없이, 그가 내 팔뚝을 꽉 쥐었다. 결벽증이고 나발이고 그에게도 생존 본능이 발동한 거다.

“어디로요? 방까지 가려면 거실 지나야 하는데!”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복도는 일직선이다. 지금 뛰어가면 100퍼센트 마주친다.

“젠장.”

도진 오빠의 시선이 다급하게 주방을 훑었다.
냉장고? 꽉 찼다. 다용도실? 문 여는 소리 들린다.
남은 곳은 하나뿐이었다.

“식탁 밑.”

“네?”

“들어가, 빨리!”

그가 내 정수리를 꾹 눌렀다.
나는 억소리도 못 내고 6인용 아일랜드 식탁 아래로 구겨졌다.
다행히 식탁보가 길게 내려와 있어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후우….”

내가 자리를 잡자마자, 도진 오빠가 식탁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내 바로 코앞에 그의 다리가 위치했다.

“야, 차도진!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재영 오빠의 목소리가 주방 입구에서 들렸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숨을 멈췄다.

“……씻고 있었어.”

도진 오빠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아, 연기 진짜 못하네.

“씻어? 근데 왜 땀을 흘려? 에어컨 빵빵한데.”

“더워서 그래. 넌 왜 왔어? 지방 출장이라며.”

“일찍 끝났지. 내 친구 얼굴도 보고, 우리 동생 잘 있나 감시도 할 겸.”

재영 오빠가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식탁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났다.
맙소사.
오빠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으려 하고 있었다.

‘안 돼!’

거기 앉으면 발에 걸린다. 내 엉덩이가 오빠 발에 채일 거라고!

“거기 앉지 마!”

도진 오빠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엉? 왜?”

“거기… 아직 소독 안 했어.”

“아오, 이 결벽증 환자 진짜. 야, 니네 집 바닥이 내 얼굴보다 깨끗하겠다.”

재영 오빠가 투덜거리며 다른 의자를 뺐다. 다행히 식탁 대각선 방향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 멈칫했다.
내 컵라면.
아직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이 있다.

“어? 야, 너 라면 먹냐?”

망했다.

“……어.”

“네가? 인스턴트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냄새난다고 질색하던 놈이.”

“갑자기 당겨서. 스트레스받나 봐.”

“하긴. 우리 하루 데리고 있느라 고생이 많다. 걔가 좀 지저분하냐? 씻는 것도 귀찮아하고, 머리카락도 질질 흘리고 다니지?”

식탁 아래서 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재영, 너 집에 가면 두고 보자.

“아니.”

도진 오빠의 대답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깨끗해. 조용하고.”

어라?
의외의 변호에 나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식탁보 틈새로 도진 오빠의 실크 파자마 바지가 보였다.

“그래? 다행이네. 걔가 눈치는 좀 없어도 착해. 나 없는 동안 잘 좀 부탁한다. 이상한 놈 꼬이면 네가 커트 좀 해주고.”

“이상한 놈?”

“그래. 우리 하루가 은근히 남자 보는 눈이 꽝이거든. 사기꾼이나, 바람둥이나, 아니면 너처럼 성격 파탄자만 아니면 되는데.”

야, 이재영.
그 성격 파탄자가 지금 네 앞에 있고, 네 동생은 그 파탄자 다리 사이에 있거든?

“맥주나 마셔.”

도진 오빠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치익, 캔 따는 소리.
벌컥벌컥 목 넘기는 소리.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자세를 바꾸고 싶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도진 오빠의 다리에 닿을 거리였다.

“근데 너, 여자 숨겨놨냐?”

재영 오빠의 뜬금없는 질문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

“아까부터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 눈동자가 계속 아래로 향하는데.”

“……개소리 하지 마.”

“흐음. 수상한데. 식탁보가 왜 이렇게 길어? 원래 이런 거 안 쓰잖아.”

재영 오빠의 손이 식탁보 자락을 잡았다.
들춰보려는 거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끝이다.
3개월 계약이고 빚 탕감이고 나발이고, 오빠한테 머리끄덩이 잡혀 끌려나갈 일만 남았다.

그때였다.
툭.
무언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도진 오빠의 발이었다.
그가 내 쪽으로 다리를 뻗어 내 몸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를 품듯, 아니, 맹수가 먹이를 숨기듯.

“건드리지 마.”

도진 오빠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거 이탈리아 직수입 리넨이야. 네 손기름 묻으면 세탁비 청구할 거야.”

“아, 진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알았어, 안 만져!”

재영 오빠가 손을 뗐다.
휴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위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도진 오빠의 다리가 내 몸에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내 어깨와 팔에 닿아 있었다.
얇은 파자마 원단 너머로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뜨거워?’

결벽증 환자라 피도 눈물도 없이 차가울 줄 알았는데.
닿은 곳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들었다.

식탁 틈새로, 도진 오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영 오빠와 대화하느라 고개는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시선만은 아래로 깔려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경멸이나 혐오가 아니었다.
그건… 당혹감에 가까웠다.

그때, 내 코끝에 훅 끼쳐오는 냄새가 있었다.
라면 냄새가 아니었다.
소독약 냄새도 아니었다.
은은한 시더우드 향. 도진 오빠의 살 냄새였다.

‘미쳤나 봐. 냄새가 왜 좋아?’

나는 숨을 멈췄다.
좁은 공간.
오빠의 목소리는 배경음처럼 멀어지고, 내 귓가에는 도진 오빠의 거친 숨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그가 발끝으로 내 허벅지를 톡, 건드렸다.
[가만히 있어.]
무언의 신호였다.
하지만 그 터치가 묘하게 야릇해서, 나는 저절로 다리가 꼬였다.

이 미친 상황에서 심장이 뛰는 건,
들킬까 봐 겁나서일까.
아니면, 내 위에 있는 이 남자 때문일까.


2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0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주방 라면 먹방 - 오빠의 습격 - 식탁 아래 밀착)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차도진, 이재영(본격 등장)
  • 공개된 설정: 도진의 집 비밀번호를 아는 유일한 타인(재영), 도진이 하루를 '오염'으로 취급하지만 위기 상황에선 맨손으로 잡음.
  • 심은 복선: 재영의 대사 "너처럼 성격 파탄자만 아니면 돼" (아이러니), 도진의 체온이 높다는 묘사 (냉혈한 이미지와 대비).
  • 클리프행어 유형: 섹슈얼 텐션 + 위기 (들킬 위험 속에서의 신체 접촉)
  • 다음 화 연결 방식: 직접 연결 (재영이 떠난 직후의 어색한 기류)

Part 3: 3화 집필

3화: 그 여자의 이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도어락이 잠기는 전자음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갔어. 나와.”

도진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식탁보를 걷어내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산발이고, 다리는 저려서 감각이 없었다.

마치 우물에서 기어 나오는 사다코 같았을 거다.

“아이고, 다리야….”

나는 식탁 의자를 잡고 간신히 일어섰다.
도진 오빠는 말없이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 몸에 닿아 있던 그 단단한 허벅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색했다.
미치도록 어색했다.

“저기, 오빠.”

“…….”

“아까는 고마웠어요. 안 숨겨줬으면 저 진짜 머리 밀리고 쫓겨났을 텐데.”

그는 대답 대신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가 빈 캔을, 굳이, 티슈로 한 번 감싸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다리가 저려서 그랬어.”

“네?”

“아까. 다리가 저려서 움직인 거라고. 다른 의도는 없었어.”

누가 물어봤냐고.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굳이 변명하는 꼴이 더 수상했다.
그의 귀 끝이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알아요. 오빠 같은 결벽증 환자가 무슨 의도가 있겠어요. 그냥… 살 닿는 게 끔찍했겠죠.”

나는 일부러 툴툴거리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끔찍했어. 네 체온이 38도는 되는 줄 알았어. 인간 난로인 줄.”

“와, 사람한테 난로라니. 너무하네.”

“가서 씻고 자.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

“내일요? 왜요?”

“약혼녀 수업.”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건조하게 덧붙였다.

“어머니가 다음 주에 널 보자고 하셔. 그 젓가락질로는 3분 만에 퇴짜 맞을 테니까, 교정 좀 해야겠어.”


다음 날 아침.
나는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이 아니라, 도진 오빠네 식탁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씨름 중이었다.

“다시.”

“아, 또요?”

“나이프를 쥐는 각도가 틀렸어. 검지에 힘 빼.”

그는 내 뒤에 서서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내 앞에는 모형 스테이크(라고 쓰고 고무 덩어리라 읽는다)가 놓여 있었다.

“오빠, 요즘 누가 이렇게 밥을 먹어요? 그냥 썰어서 입에 넣으면 되지.”

“우리 어머니는 보셔. 며느리 될 사람의 품격은 식사 예절에서 나온다고 믿는 분이거든.”

피곤하다, 진짜.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나이프를 고쳐 잡았다.
하지만 내 손은 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5년 동안 태블릿 펜만 쥐고 살았던 손이다. 우아한 커틀러리 사용법 따위 알 리가 없다.

“힘 빼라니까.”

답답했는지 그가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움찔.
내 어깨가 굳었다.

그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다.
맨손이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내 손등을 덮고, 엄지가 내 손목 안쪽을 눌렀다.
서늘하면서도 단단한 감촉.
어제 식탁 아래서 느꼈던 그 열기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여기를… 이렇게 눌러서 당기는 거야.”

그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낮게 울렸다.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시더우드 향이 훅 끼쳤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도 멈췄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을 거다.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느라, 자신이 ‘오염 물질’인 나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게 분명했다.

1초. 2초. 3초.

정적이 흘렀다.
그의 손이 내 손등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혐오감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아.”

그가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황급히 손을 뗐다.
마치 불에 덴 사람처럼.

“……손 씻고 올게.”

그는 내 눈을 피하며 주방을 빠져나갔다.
발걸음이 빨랐다.
나는 멍하니 내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닿았던 자리가 간질거렸다.

‘뭐야. 왜 도망가?’

소독제를 뿌리며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냥 도망갔다.
그게 더 이상했다.

마치, 들키면 안 되는 걸 들킨 사람처럼.


그날 저녁.
도진 오빠는 퇴근 후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다.

[약혼녀 수업 2교시: 와인 매너]는 내일로 미뤄졌다.
아까 그 사건 이후로 그가 나를 피해 다녔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더러운가?’

괜히 서러워져서 팔 냄새를 킁킁 맡았다.
도진 오빠가 강제로 쓰게 한 유기농 바디워시 냄새만 났다. 향기로운데 왜 저러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였다.
안방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오빠?”

대답이 없었다.
샤워 물소리는 계속 들렸다.
혹시 나오다가 미끄러진 건 아니겠지? 드라마에서 보면 부잣집 남주들이 꼭 욕실에서 쓰러지던데.

나는 살금살금 안방 문을 열었다.
침실은 비어 있었다. 욕실 문은 닫혀 있었고, 물소리만 요란했다.

“오빠, 괜찮아요?”

여전히 대답 없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남자가 씻는데 벌컥 문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돌아나가려다 멈칫했다.

안방에 딸린 서재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평소라면 굳게 닫혀 있었을 문이다.
도진 오빠가 ‘절대 출입 금지’라고 못 박았던 그곳.

‘청소할 때도 들어가지 마. 내 물건 위치 1밀리미터라도 바뀌면 알아채니까.’

그렇게 엄포를 놓았던 곳이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 아닌가.
게다가 문이 열려 있다. 이건 들어오라는 초대장이나 다름없다.

나는 홀린 듯 서재로 들어갔다.

방 안은 서늘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의학 서적들. 먼지 한 톨 없는 유리 책상.
이 남자의 뇌 속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딱 하나만 빼고.

액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액자가 엎어져 있었다.
사진이 보이지 않게 바닥을 향해 놓여 있었다.

‘뭐지?’

보통 액자는 보라고 두는 거 아닌가?
왜 엎어놨을까?
보기 싫어서? 아니면, 너무 보고 싶어서?

호기심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 손을 뻗었다.

‘딱 한 번만 보고 원위치 해놓으면 몰라.’

손끝이 차가운 금속 프레임에 닿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액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사진 속에는 두 남녀가 있었다.
대학 졸업식인 듯 학사모를 쓴 도진 오빠. 지금보다 훨씬 앳되고, 무엇보다… 웃고 있었다.
저 인간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줄도 알다니.

하지만 내 시선은 도진 오빠에게 머물지 않았다.
그 옆에, 그의 팔짱을 끼고 꽃다발을 든 여자.
긴 생머리에 보조개가 예쁜 여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액자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연이?”

이서연.
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
내가 보증금 사기당했을 때 가장 먼저 전화해서 울어줬던, 지금은 뉴욕으로 유학 간 내 10년 지기 절친.

서연이가 왜 여기 있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퍼즐 조각들이 제멋대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서연이가 대학 때 사귀었다던 그 ‘의대생 오빠’.
결벽증이 좀 심하긴 한데 잘생겨서 봐준다고 했던 그 남자.
헤어질 때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며 저주를 퍼부었던 그 엑스(Ex).

그게 차도진이었다고?

“말도 안 돼….”

나는 뒷걸음질 쳤다.
이건 아니지.
아무리 막장 드라마 같은 내 인생이라지만, 이건 선 넘었지.

내가 지금 누구랑 엮인 거야?
내 절친의 전 남자친구?
그것도 그냥 스쳐 지나간 사이가 아니라, 이렇게 액자까지 남겨둘 정도로 애틋했던 사이?

‘망했다.’

3천만 원이고 뭐고, 당장 짐 싸서 나가야 한다.
친구의 전 남친과 한집에 살면서 썸을 탄다?
이건 도의적으로, 아니 인간적으로 할 짓이 아니다.

나는 액자를 내려놓으려 했다.
손이 떨려서 덜그럭 소리가 났다.

끼익.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발밑으로 뚝 떨어졌다.

“……거기서 뭐 해.”

낮게 깔린 목소리.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았다.

도진 오빠가 서 있었다.
샤워를 막 마친 듯,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헐렁하게 걸친 샤워 가운 사이로 드러난 쇄골이 젖어 있었다.

평소의 완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가장 무방비하고, 가장 위험해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시베리아 벌판처럼 차가웠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액자로 향했다.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내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소독약 냄새 대신, 짙은 바디워시 향기가 훅 끼쳐왔다.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내 등 뒤는 책상이었고, 앞은 그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거칠게 내 손에서 액자를 낚아챘다.
탁!
액자가 책상 위에 놓였다. 다시 엎어진 채로.

“오빠, 그게 아니라… 저 여자는….”

“나가.”

“아니, 저기 서연이는 제 친구….”

“나가라고!”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항상 냉소적이거나 무표정하던 그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상처를 후벼 파인 짐승의 울음 같았다.

나는 얼어붙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젖은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계약 위반이야.”

그가 으르렁거렸다.

“짐 싸. 위약금은 필요 없으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 남자는 아직 서연이를 못 잊었다.
사진을 버리지도 못하고, 엎어둔 채 간직할 만큼.

그리고 나는, 그런 남자의 가짜 약혼녀 노릇을 하며 설레고 있었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의 남자를 상대로.

“……알겠어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꾹 참았다.

“나갈게요.”

나는 그를 지나쳐 방문으로 향했다.
어깨가 스쳤다.
젖은 그의 옷자락이 내 팔에 닿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 집을 나가는 순간, 나는 다시는 이 무균실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이 남자와는 영원히 끝이라는 걸.

문고리를 잡는 내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3화 결제 유도 분석

1. 즉각적 궁금증 (Immediate Hook)

  • 상황: 도진이 격분하며 하루에게 "나가라"고 통보함. 하루는 빈털터리 상태로 폭우 속에 쫓겨날 위기.
  • 질문: 하루는 정말 쫓겨날까? 도진은 이대로 하루를 보낼까? 4화 시작하자마자 이 갈등이 어떻게 봉합될지 확인하고 싶음.

2. 중기적 궁금증 (Mid-term Mystery)

  • 상황: 도진이 서연(전여친)의 사진을 엎어두고 간직하고 있음.
  • 질문: 도진은 아직 서연을 사랑하나? 그들이 헤어진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하루는 절친과 도진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정 vs 사랑)

3. 장기적 궁금증 (Long-term Arc)

  • 상황: '오빠 친구' + '절친의 전 남친'이라는 이중 금기(Double Taboo) 완성.
  • 질문: 이 복잡하게 꼬인 관계를 풀고 두 사람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도진의 결벽증은 하루를 통해 치유될 수 있을까?

4. 독자 감정 상태

  • 충격: "헐, 전 여친이 절친이라고?" (로판/현로 독자들이 가장 자극적으로 반응하는 관계성)
  • 안타까움: 2화와 3화 초반의 설렘(손잡기)이 한순간에 파국으로 치달음.
  • 기대감: 젖은 머리의 도진(섹시함) + 분노하는 남주(집착의 전조) 조합에 대한 장르적 만족감.

5. 예상 결제 전환 동기

  • 단순히 싸우고 끝난 게 아니라, '절친'이라는 거대한 떡밥이 투척됨.
  • 남주의 '젖은 머리/가운' 비주얼이 주는 섹슈얼한 긴장감이 최고조인 상태에서 끊김.
  • "여기서 끊는 게 어디 있어!"라는 반발 심리가 "다음 화 결제" 버튼을 누르게 만듦.

3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5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4개 (식탁 밑 탈출 - 식사 예절 수업/스킨십 - 서재 잠입 - 사진 발견 및 발각)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차도진, 이서연(사진으로 등장)
  • 공개된 설정: 도진의 전 여자친구가 하루의 10년 지기 절친 '서연'임. 도진은 아직 사진을 버리지 못했음.
  • 심은 복선: 엎어진 액자 (미련이 아니라 보기 싫어서 엎어둔 것일 수 있음 - 8화 회수 예정), 도진이 맨손으로 하루를 잡고도 혐오감을 느끼지 않음.
  • 클리프행어 유형: S급 (폭로 + 위기)
  • 다음 화 연결 방식: 직접 연결 (쫓겨나려는 하루와 잡을지 말지 고민하는 도진의 대치)

파트별 산출물

ep1 (3,149 tokens)

1화: 세균, 입주를 명받았습니다

“조항 1. 반경 1미터 접근 금지. 조항 2. 내 물건에 맨손 접촉 금지. 조항 3….”

도진 오빠가 내민 A4 용지에는 [갑: 차도진, 을: 이하루]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그가 수술용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볼펜을 밀었다.

탁자 위로 소독약 냄새가 훅 끼쳤다.

“잠깐만요. 입주 도우미 겸 약혼녀라면서 접근 금지면, 연기는 텔레파시로 해요?”

그가 무표정하게, 하지만 지독하게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존재 자체가 오염이니까, 숨만 쉬고 돈 받아 가라는 소리야.”

하. 내 인생이 망해서 오빠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됐는데, 하필 그 오빠 친구가 미친 결벽증 환자일 확률을 구하시오.

정답. 100퍼센트.

나는 떨리는 손으로 볼펜을 집어 들었다. 아직 빗물에 젖은 내 소매 끝에서 물방울 하나가 톡, 하고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진 오빠의 미간이 종이 구겨지듯 찌푸려졌다.
그가 즉시 스프레이를 들어 바닥을 향해 난사했다.

치익. 치익.

마치 바퀴벌레를 박멸하는 듯한 저 손놀림.
그래, 이건 계약이 아니다.
생존을 건 기생이다.


시간을 3시간 전으로 돌려보자.

내 인생은 아주 심플하게 망해 있었다.
작업실 보증금 3천만 원.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서 5년을 꼬박 모은 피 같은 돈이었다.

집주인이 야반도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하필이면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던 오늘 아침이었다.

“이하루, 너 갈 데 없으면 일단 도진이한테 가 있어.”

친오빠인 재영 오빠는 전화기 너머로 그렇게 말했다. 본인은 지금 지방 출장 중이라 당장 서울로 올 수가 없다고 했다.

“도진이 걔, 집 넓잖아. 방도 남아돌고. 내가 말해둘게.”

차도진.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싼 땅이라는 청담동에 개원한 치과의사. 재영 오빠의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
그리고 나한테는 그냥 ‘돈 많고 재수 없는 오빠 친구’였다.

선택권은 없었다.
캐리어 하나를 끌고 쫄딱 젖은 생쥐 꼴로 도진 오빠의 펜트하우스 초인종을 눌렀을 때, 나는 최소한의 동정심을 기대했다.

딩동.

인터폰 화면에 그의 얼굴이 떴다.
차가운 금속테 안경.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넘긴 포마드 헤어.

[누구세요.]

“오빠, 저 하루예요. 재영 오빠 동생….”

[알아. 근데.]

“네?”

[왜 그렇게 더러워.]

그게 10년 만에 본 동생 친구에게 할 소리인가.
문이 열리기도 전에 쫓겨날 뻔했지만, 다행히 재영 오빠의 전화가 타이밍 좋게 걸려온 덕분에 나는 현관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아니, 진입‘당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멈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도진 오빠가 나를 가로막았다.
그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집에서 왜 가운을 입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에는 라텍스 장갑, 얼굴에는 KF94 마스크까지 착용한 상태였다.

“거기 타일 밟지 마. 외부 오염 물질 반입 금지야.”

“오빠, 나 오염 물질 아니고 사람인데….”

“비에 젖은 유기물은 세균 번식의 최적지야. 벗어.”

“네? 뭘요?”

“겉옷. 그리고 신발은 저기 비닐팩에 넣어. 캐리어 바퀴는… 하, 일단 들어오지 마.”

그는 마치 핵폐기물을 처리하듯 긴 집게를 가져와 내 젖은 카디건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현관 옆에 있는 스타일러—아니, 거의 멸균 소독기처럼 생긴 기계—에 처박았다.

치이익—
스팀 소리가 들렸다. 내 자존심이 증발하는 소리 같았다.

“샤워실은 저쪽. 수건은 일회용만 써. 욕조는 건드리지 말고 샤워부스만 이용해. 나오면서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퇴출이야.”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다. 그것도 중증.

“안 씻을 거야? 그럼 나가.”

그의 손가락이 현관문을 가리켰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었다. 갈 곳은 없다. 통장 잔고는 3만 원. 밖에는 폭우가 쏟아진다.

“……씻을게요. 아주 빡빡.”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거실 풍경이 가관이었다.
그사이 내 캐리어는 랩으로 칭칭 감겨 있었고, 내가 밟았던 현관 타일은 알코올로 닦았는지 광이 나다 못해 미끄러울 지경이었다.

이 집은 모델하우스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모든 물건이 각 맞춰 정렬되어 있었고, 공기 중에는 먼지 한 톨 떠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소독되는 기분이었다.

도진 오빠는 6인용 식탁 끝에 앉아 있었다.
나와의 거리는 대략 3미터.
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는데, 컵받침의 각도조차 테이블 모서리와 평행을 이루고 있었다.

“앉아.”

그가 턱짓으로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재영이한테 얘기 들었어. 보증금 날렸다며.”

“……네.”

“얼마나 필요해?”

훅 들어오는 본론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3천만 원이요. 오빠, 제가 진짜 열심히 일해서 갚을게요. 이자도 쳐서….”

“일?”

그가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건조한 웃음이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 그림 그리는 거 말고.”

“청소도 잘하고요, 밥도 잘하고….”

“청소?”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차.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다. 이 결벽증 환자 앞에서 청소를 논하다니.

“내 기준에 맞는 청소를 하려면 넌 아마 30분 안에 기절할 거야. 지난주에 온 도우미 아주머니도 1시간 만에 도망갔거든.”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밥은 필요 없어. 배달시켜 먹거나 캡슐 먹으면 되니까. 내 주방 더러워지는 거 딱 질색이야.”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나는 여기서 뭘 해야 하지? 그냥 숨만 쉬는 식충이?
그때,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본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여사님]. 아마도 어머니인 듯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고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실험용 쥐를 관찰하는 연구원 같은 눈빛으로.

“이하루.”

“네.”

“너, 남자친구 없지?”

“……네? 갑자기 그건 왜….”

“재영이가 그러던데. 너 모태솔로라고.”

“아니, 썸은 탔거든요? 그리고 오빠가 무슨 상관인데요.”

욱해서 대꾸했지만 그는 내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재영이 동생. 신원 확실하고. 빚 있고. 갈 데 없고.”

그의 시선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성적인 뉘앙스는 0.1퍼센트도 없었다. 그저 견적을 내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혀 내 취향이 아니고.”

“저기요, 그쪽도 제 취향 아니거든요? 저도 씻는 거 귀찮아하는 남자는 싫지만, 이렇게 유난 떠는 남자는 더 싫….”

“3천 갚아줄게.”

내 입이 합 다물어졌다.
자본주의가 낳은 침묵이었다.

“여기서 지내게 해줄게. 숙식 제공. 빚 탕감. 대신 조건이 있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가운 자락이 펄럭였다. 그는 서재로 들어가더니 1분 만에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왔다.

“사인해.”

그것이 바로,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이 미친 계약서였다.

[약혼 계약서]

제목부터가 폰트 크기 24포인트로 굵게 박혀 있었다.

“……약혼이요?”

“가짜야. 어머니가 선 자리를 일주일에 다섯 개씩 잡아오셔. 내가 게이라는 소문까지 퍼뜨렸는데도 안 먹히더라고.”

그는 피로한 듯 안경을 벗어 닦았다.

“여자가 필요해. 내 공간에 들어와도 내가 토하지 않을 만큼 무해하고, 적당히 멍청해서 내 사생활 안 캐묻고, 돈이 필요해서 시키는 대로 할 여자.”

“그게 저라고요?”

“너보다 완벽한 조건은 없어. 너는 재영이 동생이니까, 내가 너한테 흑심 품을 리 없다고 생각하실 거야. 안전하지.”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다시 안경을 썼다. 차가운 렌즈 너머로 예리한 눈빛이 번뜩였다.

“기간은 3개월. 내 약혼녀 연기를 하면서 이 집에서 지내. 부모님 만날 때만 협조하면 돼. 나머지는 자유야.”

“진짜… 3천만 원 다 갚아주는 거예요?”

“원하면 현금으로 바로 쏴줄 수도 있어.”

그가 볼펜 끝으로 계약서 하단을 톡톡 쳤다.

“할 거야, 말 거야. 너 나가면 난 다른 사람 구해야 해. 물론 너만큼 ‘더러운’ 여자를 찾긴 힘들겠지만.”

저놈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지만, 내 통장은 텅 비어 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 눈 딱 감고 3개월이다. 어차피 오빠 친구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인데 내외할 게 뭐 있나.

나는 볼펜을 쥐었다.
서명란에 이름을 쓰려는 순간, 도진 오빠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아, 깜빡할 뻔했네. 맨 마지막 조항 읽어봐.”

나는 시선을 내렸다.
가장 작은 글씨로 적힌 특약 사항이 보였다.

[제15조. 을이 갑의 동의 없이 신체 접촉을 시도하거나, 갑의 위생 기준을 심각하게 위반하여 정신적 피해를 입힐 경우 계약은 즉시 파기되며, 을은 지원받은 금액의 3배를 위약금으로 배상한다.]

3배.
9천만 원.

“……미쳤어요? 실수를 할 수도 있지, 3배는 너무하잖아요!”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난 내 몸에 균 닿는 거, 죽기보다 싫어하니까.”

그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처음으로 보여준 웃음이었지만, 그건 명백한 경고였다.

“잘 생각해, 이하루. 이 집은 무균실이야. 들어오는 건 네 마음이지만, 살아남는 건 다른 문제니까.”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펜촉이 종이에 닿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1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25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오프닝 계약 - 과거 회상/입장 - 계약 제안)
  • 등장 캐릭터: 이하루(여주), 차도진(남주), 이재영(오빠/언급)
  • 공개된 설정: 도진의 극심한 결벽증, 하루의 파산 상태, 두 사람의 관계(오빠 친구), 가짜 약혼의 목적.
  • 심은 복선: 도진이 '재영이 동생이라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태도(나중에 감정적 동요로 깨질 복선), '신체 접촉 금지' 조항.
  • 클리프행어 유형: 선택의 기로 + 미해결 갈등 (불공정 계약에 서명 직전)
  • 다음 화 연결 방식: 시간 점프 (입주 후 벌어지는 난장판으로 직행)
ep2 (3,473 tokens)

Part 2: 2화 집필

2화: 오빠 몰래 식탁 아래서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 내 신분은 ‘채무자’에서 ‘입주 가정부 겸 가짜 약혼녀’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격리된 바이러스’에 가까웠다.

입주 3일 차.
나는 도진 오빠가 정해준 구역—게스트룸과 그에 딸린 화장실—반경 5미터를 벗어날 때마다 그야말로 눈치를 봐야 했다.

“이하루. 발뒤꿈치 들고 다녀. 쿵쿵거리는 진동이 거슬려.”

“……네.”

“그리고 숨 쉴 때 입으로 쉬지 마. 비말 튀니까 코로만 쉬어.”

“오빠, 그건 생물학적으로 좀 무리인데요.”

“노력해 봐.”

미친놈.
나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까치발을 들었다.
3천만 원짜리 숙식 제공이라 참는다.

이 집은 정말이지 숨 막히게 깨끗했다.
먼지 한 톨 없는 대리석 바닥은 거울처럼 내 초라한 몰골을 비췄고, 공기청정기는 24시간 풀가동되며 집 안의 산소 농도를 아마존 밀림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내 배꼽시계였다.
밤 11시.
저녁으로 샐러드—도진 오빠가 ‘냄새 안 나는 음식’만 허락했다—를 먹은 내 위장이 파업을 선언했다.

꼬르륵.

천둥 같은 소리가 게스트룸을 울렸다.
나는 방문을 살짝 열고 거실을 염탐했다.
적막강산.
도진 오빠는 안방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그는 수면 루틴마저 칼같이 지키는 인간이니 지금쯤 꿈나라에서 세균 박멸하는 꿈이나 꾸고 있을 거다.

‘지금이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주방으로 잠입했다.
목표는 찬장 구석에 숨겨둔 컵라면.
원래는 냄비에 끓여 먹는 라면이 진리지만, 가스불을 켜는 순간 냄새가 환기구를 타고 안방으로 침투할 게 뻔했다.

전기포트 물이 끓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까 봐 나는 포트를 끌어안다시피 했다.
뜨거운 물을 붓고, 나무젓가락으로 뚜껑을 눌렀다.
3분.
이 3분이 내게는 영겁의 시간이었다.

‘제발 냄새야, 퍼지지 마라.’

나는 아일랜드 식탁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매콤하고 짭짤한 MSG의 향기.
아, 천국이 여기 있구나.

후루룩.
면발을 한 입 가득 넣는 순간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헙!”

나는 사레가 들려 기침을 터트릴 뻔한 걸 간신히 틀어막았다.
등 뒤에서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실크 파자마 차림의 도진 오빠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컵라면 용기에 고정되었다.
마치 시한폭탄을 발견한 폭발물 처리반의 눈빛이었다.

“내 주방에서, 감히, 인스턴트 라면을?”

“아, 오빠. 그게 아니라… 너무 배가 고파서….”

“냄새.”

그가 미간을 구기며 뒷걸음질 쳤다.

“이 지독한 화학 조미료 냄새. 환기 시스템 3단계로 돌려야겠군.”

그는 주방 벽면에 붙은 패널을 조작했다.
위잉—!
천장에 매립된 초대형 후드가 제트기 이륙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라면 냄새가 빨려 들어갔다.

“너, 계약 조항 4조 기억 안 나? 자극적인 냄새 유발 금지.”

“아니, 방문 다 닫고 먹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사람 사는데 어떻게 이슬만 먹고 살아요?”

“난 살아.”

“오빠는 광합성만 해도 사는 식물 인간이잖아요! 난 고기 먹어야 하는 짐승이라고요!”

내 반항에 그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띠로리, 띠로리, 띠로리.

현관 도어락이 경쾌하게 울렸다.
순간, 주방에 정적이 흘렀다.
도진 오빠와 내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 집에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딱 세 명이다.
도진 오빠. 나.
그리고.

“어? 도진아! 나 왔다!”

이재영.
내 친오빠이자, 도진 오빠의 10년 지기 절친.
그리고 내가 여기 입주한 걸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유일한 인물.

“미친.”

도진 오빠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재영 오빠는 내가 여기 있는 줄 알지만, ‘가짜 약혼녀’ 계약 따위는 모른다. 그냥 며칠 신세 지는 줄로만 안다.
하지만 밤 11시에, 잠옷 바람으로, 둘이 같이 있는 걸 들킨다면?

“야! 차도진! 문 왜 안 열어줘?”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숨어.”

도진 오빠가 내 팔을 낚아챘다.
맨손이었다.
라텍스 장갑도 없이, 그가 내 팔뚝을 꽉 쥐었다. 결벽증이고 나발이고 그에게도 생존 본능이 발동한 거다.

“어디로요? 방까지 가려면 거실 지나야 하는데!”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오는 복도는 일직선이다. 지금 뛰어가면 100퍼센트 마주친다.

“젠장.”

도진 오빠의 시선이 다급하게 주방을 훑었다.
냉장고? 꽉 찼다. 다용도실? 문 여는 소리 들린다.
남은 곳은 하나뿐이었다.

“식탁 밑.”

“네?”

“들어가, 빨리!”

그가 내 정수리를 꾹 눌렀다.
나는 억소리도 못 내고 6인용 아일랜드 식탁 아래로 구겨졌다.
다행히 식탁보가 길게 내려와 있어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후우….”

내가 자리를 잡자마자, 도진 오빠가 식탁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내 바로 코앞에 그의 다리가 위치했다.

“야, 차도진!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재영 오빠의 목소리가 주방 입구에서 들렸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숨을 멈췄다.

“……씻고 있었어.”

도진 오빠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았다.
아, 연기 진짜 못하네.

“씻어? 근데 왜 땀을 흘려? 에어컨 빵빵한데.”

“더워서 그래. 넌 왜 왔어? 지방 출장이라며.”

“일찍 끝났지. 내 친구 얼굴도 보고, 우리 동생 잘 있나 감시도 할 겸.”

재영 오빠가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식탁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났다.
맙소사.
오빠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으려 하고 있었다.

‘안 돼!’

거기 앉으면 발에 걸린다. 내 엉덩이가 오빠 발에 채일 거라고!

“거기 앉지 마!”

도진 오빠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엉? 왜?”

“거기… 아직 소독 안 했어.”

“아오, 이 결벽증 환자 진짜. 야, 니네 집 바닥이 내 얼굴보다 깨끗하겠다.”

재영 오빠가 투덜거리며 다른 의자를 뺐다. 다행히 식탁 대각선 방향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 멈칫했다.
내 컵라면.
아직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라면이 있다.

“어? 야, 너 라면 먹냐?”

망했다.

“……어.”

“네가? 인스턴트를?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냄새난다고 질색하던 놈이.”

“갑자기 당겨서. 스트레스받나 봐.”

“하긴. 우리 하루 데리고 있느라 고생이 많다. 걔가 좀 지저분하냐? 씻는 것도 귀찮아하고, 머리카락도 질질 흘리고 다니지?”

식탁 아래서 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재영, 너 집에 가면 두고 보자.

“아니.”

도진 오빠의 대답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깨끗해. 조용하고.”

어라?
의외의 변호에 나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식탁보 틈새로 도진 오빠의 실크 파자마 바지가 보였다.

“그래? 다행이네. 걔가 눈치는 좀 없어도 착해. 나 없는 동안 잘 좀 부탁한다. 이상한 놈 꼬이면 네가 커트 좀 해주고.”

“이상한 놈?”

“그래. 우리 하루가 은근히 남자 보는 눈이 꽝이거든. 사기꾼이나, 바람둥이나, 아니면 너처럼 성격 파탄자만 아니면 되는데.”

야, 이재영.
그 성격 파탄자가 지금 네 앞에 있고, 네 동생은 그 파탄자 다리 사이에 있거든?

“맥주나 마셔.”

도진 오빠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치익, 캔 따는 소리.
벌컥벌컥 목 넘기는 소리.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자세를 바꾸고 싶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도진 오빠의 다리에 닿을 거리였다.

“근데 너, 여자 숨겨놨냐?”

재영 오빠의 뜬금없는 질문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

“아까부터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해? 눈동자가 계속 아래로 향하는데.”

“……개소리 하지 마.”

“흐음. 수상한데. 식탁보가 왜 이렇게 길어? 원래 이런 거 안 쓰잖아.”

재영 오빠의 손이 식탁보 자락을 잡았다.
들춰보려는 거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끝이다.
3개월 계약이고 빚 탕감이고 나발이고, 오빠한테 머리끄덩이 잡혀 끌려나갈 일만 남았다.

그때였다.
툭.
무언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도진 오빠의 발이었다.
그가 내 쪽으로 다리를 뻗어 내 몸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를 품듯, 아니, 맹수가 먹이를 숨기듯.

“건드리지 마.”

도진 오빠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거 이탈리아 직수입 리넨이야. 네 손기름 묻으면 세탁비 청구할 거야.”

“아, 진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알았어, 안 만져!”

재영 오빠가 손을 뗐다.
휴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위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도진 오빠의 다리가 내 몸에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내 어깨와 팔에 닿아 있었다.
얇은 파자마 원단 너머로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뜨거워?’

결벽증 환자라 피도 눈물도 없이 차가울 줄 알았는데.
닿은 곳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들었다.

식탁 틈새로, 도진 오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영 오빠와 대화하느라 고개는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시선만은 아래로 깔려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경멸이나 혐오가 아니었다.
그건… 당혹감에 가까웠다.

그때, 내 코끝에 훅 끼쳐오는 냄새가 있었다.
라면 냄새가 아니었다.
소독약 냄새도 아니었다.
은은한 시더우드 향. 도진 오빠의 살 냄새였다.

‘미쳤나 봐. 냄새가 왜 좋아?’

나는 숨을 멈췄다.
좁은 공간.
오빠의 목소리는 배경음처럼 멀어지고, 내 귓가에는 도진 오빠의 거친 숨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그가 발끝으로 내 허벅지를 톡, 건드렸다.
[가만히 있어.]
무언의 신호였다.
하지만 그 터치가 묘하게 야릇해서, 나는 저절로 다리가 꼬였다.

이 미친 상황에서 심장이 뛰는 건,
들킬까 봐 겁나서일까.
아니면, 내 위에 있는 이 남자 때문일까.


2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0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3개 (주방 라면 먹방 - 오빠의 습격 - 식탁 아래 밀착)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차도진, 이재영(본격 등장)
  • 공개된 설정: 도진의 집 비밀번호를 아는 유일한 타인(재영), 도진이 하루를 '오염'으로 취급하지만 위기 상황에선 맨손으로 잡음.
  • 심은 복선: 재영의 대사 "너처럼 성격 파탄자만 아니면 돼" (아이러니), 도진의 체온이 높다는 묘사 (냉혈한 이미지와 대비).
  • 클리프행어 유형: 섹슈얼 텐션 + 위기 (들킬 위험 속에서의 신체 접촉)
  • 다음 화 연결 방식: 직접 연결 (재영이 떠난 직후의 어색한 기류)
ep3 (3,958 tokens)

Part 3: 3화 집필

3화: 그 여자의 이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도어락이 잠기는 전자음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갔어. 나와.”

도진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식탁보를 걷어내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산발이고, 다리는 저려서 감각이 없었다.

마치 우물에서 기어 나오는 사다코 같았을 거다.

“아이고, 다리야….”

나는 식탁 의자를 잡고 간신히 일어섰다.
도진 오빠는 말없이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 몸에 닿아 있던 그 단단한 허벅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색했다.
미치도록 어색했다.

“저기, 오빠.”

“…….”

“아까는 고마웠어요. 안 숨겨줬으면 저 진짜 머리 밀리고 쫓겨났을 텐데.”

그는 대답 대신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가 빈 캔을, 굳이, 티슈로 한 번 감싸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다리가 저려서 그랬어.”

“네?”

“아까. 다리가 저려서 움직인 거라고. 다른 의도는 없었어.”

누가 물어봤냐고.
제 발 저린 도둑처럼 굳이 변명하는 꼴이 더 수상했다.
그의 귀 끝이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알아요. 오빠 같은 결벽증 환자가 무슨 의도가 있겠어요. 그냥… 살 닿는 게 끔찍했겠죠.”

나는 일부러 툴툴거리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끔찍했어. 네 체온이 38도는 되는 줄 알았어. 인간 난로인 줄.”

“와, 사람한테 난로라니. 너무하네.”

“가서 씻고 자.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

“내일요? 왜요?”

“약혼녀 수업.”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건조하게 덧붙였다.

“어머니가 다음 주에 널 보자고 하셔. 그 젓가락질로는 3분 만에 퇴짜 맞을 테니까, 교정 좀 해야겠어.”


다음 날 아침.
나는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이 아니라, 도진 오빠네 식탁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씨름 중이었다.

“다시.”

“아, 또요?”

“나이프를 쥐는 각도가 틀렸어. 검지에 힘 빼.”

그는 내 뒤에 서서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내 앞에는 모형 스테이크(라고 쓰고 고무 덩어리라 읽는다)가 놓여 있었다.

“오빠, 요즘 누가 이렇게 밥을 먹어요? 그냥 썰어서 입에 넣으면 되지.”

“우리 어머니는 보셔. 며느리 될 사람의 품격은 식사 예절에서 나온다고 믿는 분이거든.”

피곤하다, 진짜.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나이프를 고쳐 잡았다.
하지만 내 손은 맘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5년 동안 태블릿 펜만 쥐고 살았던 손이다. 우아한 커틀러리 사용법 따위 알 리가 없다.

“힘 빼라니까.”

답답했는지 그가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움찔.
내 어깨가 굳었다.

그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다.
맨손이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내 손등을 덮고, 엄지가 내 손목 안쪽을 눌렀다.
서늘하면서도 단단한 감촉.
어제 식탁 아래서 느꼈던 그 열기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여기를… 이렇게 눌러서 당기는 거야.”

그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낮게 울렸다.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시더우드 향이 훅 끼쳤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도 멈췄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을 거다.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느라, 자신이 ‘오염 물질’인 나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게 분명했다.

1초. 2초. 3초.

정적이 흘렀다.
그의 손이 내 손등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혐오감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아.”

그가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황급히 손을 뗐다.
마치 불에 덴 사람처럼.

“……손 씻고 올게.”

그는 내 눈을 피하며 주방을 빠져나갔다.
발걸음이 빨랐다.
나는 멍하니 내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닿았던 자리가 간질거렸다.

‘뭐야. 왜 도망가?’

소독제를 뿌리며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냥 도망갔다.
그게 더 이상했다.

마치, 들키면 안 되는 걸 들킨 사람처럼.


그날 저녁.
도진 오빠는 퇴근 후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다.

[약혼녀 수업 2교시: 와인 매너]는 내일로 미뤄졌다.
아까 그 사건 이후로 그가 나를 피해 다녔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더러운가?’

괜히 서러워져서 팔 냄새를 킁킁 맡았다.
도진 오빠가 강제로 쓰게 한 유기농 바디워시 냄새만 났다. 향기로운데 왜 저러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였다.
안방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오빠?”

대답이 없었다.
샤워 물소리는 계속 들렸다.
혹시 나오다가 미끄러진 건 아니겠지? 드라마에서 보면 부잣집 남주들이 꼭 욕실에서 쓰러지던데.

나는 살금살금 안방 문을 열었다.
침실은 비어 있었다. 욕실 문은 닫혀 있었고, 물소리만 요란했다.

“오빠, 괜찮아요?”

여전히 대답 없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남자가 씻는데 벌컥 문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돌아나가려다 멈칫했다.

안방에 딸린 서재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평소라면 굳게 닫혀 있었을 문이다.
도진 오빠가 ‘절대 출입 금지’라고 못 박았던 그곳.

‘청소할 때도 들어가지 마. 내 물건 위치 1밀리미터라도 바뀌면 알아채니까.’

그렇게 엄포를 놓았던 곳이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 아닌가.
게다가 문이 열려 있다. 이건 들어오라는 초대장이나 다름없다.

나는 홀린 듯 서재로 들어갔다.

방 안은 서늘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의학 서적들. 먼지 한 톨 없는 유리 책상.
이 남자의 뇌 속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딱 하나만 빼고.

액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액자가 엎어져 있었다.
사진이 보이지 않게 바닥을 향해 놓여 있었다.

‘뭐지?’

보통 액자는 보라고 두는 거 아닌가?
왜 엎어놨을까?
보기 싫어서? 아니면, 너무 보고 싶어서?

호기심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 손을 뻗었다.

‘딱 한 번만 보고 원위치 해놓으면 몰라.’

손끝이 차가운 금속 프레임에 닿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액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사진 속에는 두 남녀가 있었다.
대학 졸업식인 듯 학사모를 쓴 도진 오빠. 지금보다 훨씬 앳되고, 무엇보다… 웃고 있었다.
저 인간이 저렇게 환하게 웃을 줄도 알다니.

하지만 내 시선은 도진 오빠에게 머물지 않았다.
그 옆에, 그의 팔짱을 끼고 꽃다발을 든 여자.
긴 생머리에 보조개가 예쁜 여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액자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연이?”

이서연.
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
내가 보증금 사기당했을 때 가장 먼저 전화해서 울어줬던, 지금은 뉴욕으로 유학 간 내 10년 지기 절친.

서연이가 왜 여기 있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퍼즐 조각들이 제멋대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서연이가 대학 때 사귀었다던 그 ‘의대생 오빠’.
결벽증이 좀 심하긴 한데 잘생겨서 봐준다고 했던 그 남자.
헤어질 때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며 저주를 퍼부었던 그 엑스(Ex).

그게 차도진이었다고?

“말도 안 돼….”

나는 뒷걸음질 쳤다.
이건 아니지.
아무리 막장 드라마 같은 내 인생이라지만, 이건 선 넘었지.

내가 지금 누구랑 엮인 거야?
내 절친의 전 남자친구?
그것도 그냥 스쳐 지나간 사이가 아니라, 이렇게 액자까지 남겨둘 정도로 애틋했던 사이?

‘망했다.’

3천만 원이고 뭐고, 당장 짐 싸서 나가야 한다.
친구의 전 남친과 한집에 살면서 썸을 탄다?
이건 도의적으로, 아니 인간적으로 할 짓이 아니다.

나는 액자를 내려놓으려 했다.
손이 떨려서 덜그럭 소리가 났다.

끼익.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발밑으로 뚝 떨어졌다.

“……거기서 뭐 해.”

낮게 깔린 목소리.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았다.

도진 오빠가 서 있었다.
샤워를 막 마친 듯,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헐렁하게 걸친 샤워 가운 사이로 드러난 쇄골이 젖어 있었다.

평소의 완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가장 무방비하고, 가장 위험해 보이는 모습.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시베리아 벌판처럼 차가웠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액자로 향했다.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내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소독약 냄새 대신, 짙은 바디워시 향기가 훅 끼쳐왔다.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내 등 뒤는 책상이었고, 앞은 그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거칠게 내 손에서 액자를 낚아챘다.
탁!
액자가 책상 위에 놓였다. 다시 엎어진 채로.

“오빠, 그게 아니라… 저 여자는….”

“나가.”

“아니, 저기 서연이는 제 친구….”

“나가라고!”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항상 냉소적이거나 무표정하던 그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상처를 후벼 파인 짐승의 울음 같았다.

나는 얼어붙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젖은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계약 위반이야.”

그가 으르렁거렸다.

“짐 싸. 위약금은 필요 없으니까,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 남자는 아직 서연이를 못 잊었다.
사진을 버리지도 못하고, 엎어둔 채 간직할 만큼.

그리고 나는, 그런 남자의 가짜 약혼녀 노릇을 하며 설레고 있었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의 남자를 상대로.

“……알겠어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꾹 참았다.

“나갈게요.”

나는 그를 지나쳐 방문으로 향했다.
어깨가 스쳤다.
젖은 그의 옷자락이 내 팔에 닿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 집을 나가는 순간, 나는 다시는 이 무균실에 들어올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이 남자와는 영원히 끝이라는 걸.

문고리를 잡는 내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3화 결제 유도 분석

1. 즉각적 궁금증 (Immediate Hook)

  • 상황: 도진이 격분하며 하루에게 "나가라"고 통보함. 하루는 빈털터리 상태로 폭우 속에 쫓겨날 위기.
  • 질문: 하루는 정말 쫓겨날까? 도진은 이대로 하루를 보낼까? 4화 시작하자마자 이 갈등이 어떻게 봉합될지 확인하고 싶음.

2. 중기적 궁금증 (Mid-term Mystery)

  • 상황: 도진이 서연(전여친)의 사진을 엎어두고 간직하고 있음.
  • 질문: 도진은 아직 서연을 사랑하나? 그들이 헤어진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하루는 절친과 도진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정 vs 사랑)

3. 장기적 궁금증 (Long-term Arc)

  • 상황: '오빠 친구' + '절친의 전 남친'이라는 이중 금기(Double Taboo) 완성.
  • 질문: 이 복잡하게 꼬인 관계를 풀고 두 사람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도진의 결벽증은 하루를 통해 치유될 수 있을까?

4. 독자 감정 상태

  • 충격: "헐, 전 여친이 절친이라고?" (로판/현로 독자들이 가장 자극적으로 반응하는 관계성)
  • 안타까움: 2화와 3화 초반의 설렘(손잡기)이 한순간에 파국으로 치달음.
  • 기대감: 젖은 머리의 도진(섹시함) + 분노하는 남주(집착의 전조) 조합에 대한 장르적 만족감.

5. 예상 결제 전환 동기

  • 단순히 싸우고 끝난 게 아니라, '절친'이라는 거대한 떡밥이 투척됨.
  • 남주의 '젖은 머리/가운' 비주얼이 주는 섹슈얼한 긴장감이 최고조인 상태에서 끊김.
  • "여기서 끊는 게 어디 있어!"라는 반발 심리가 "다음 화 결제" 버튼을 누르게 만듦.

3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850자 (공백 포함)
  • 장면 수: 4개 (식탁 밑 탈출 - 식사 예절 수업/스킨십 - 서재 잠입 - 사진 발견 및 발각)
  • 등장 캐릭터: 이하루, 차도진, 이서연(사진으로 등장)
  • 공개된 설정: 도진의 전 여자친구가 하루의 10년 지기 절친 '서연'임. 도진은 아직 사진을 버리지 못했음.
  • 심은 복선: 엎어진 액자 (미련이 아니라 보기 싫어서 엎어둔 것일 수 있음 - 8화 회수 예정), 도진이 맨손으로 하루를 잡고도 혐오감을 느끼지 않음.
  • 클리프행어 유형: S급 (폭로 + 위기)
  • 다음 화 연결 방식: 직접 연결 (쫓겨나려는 하루와 잡을지 말지 고민하는 도진의 대치)

스텝 재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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