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9: 에피소드 리비전

Critic+Writer · 버전 1 · 초안

산출물 (v1)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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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선을 넘는 남자

"수아야. 나 너 동생으로 본 적 없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는 게 이런 걸까. 마감 청소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던 카페의 소음이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먹먹해졌다. 내 앞치마 끈을 고쳐 매주는 재현 오빠의 손이 데인 듯 뜨거웠다.

10년 넘게 우리 오빠 친구, 그냥 '재현 오빠'였던 남자가 지금 선을 넘고 있었다.

"논문 핑계 대고 매일 여기 온 거, 커피 때문인 줄 알았어?"

그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심장이 빠르게 뛴 날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세상이 무너질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딱 6개월.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시간은 고작 그뿐이었다.


"아, 진짜. 교수님은 왜 하필 마감 3일 전에 목차를 뒤집으래?"

나는 신경질적으로 행주를 짜며 중얼거렸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대학원 석사 4학기. 졸업 논문 심사가 코앞인데, 지도 교수는 내 영혼을 갈아 넣은 초고를 휴지 조각 취급했다. 등록금에 생활비까지 버느라 주말 카페 알바를 병행하는 나에게, 이 상황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수아야, 3번 테이블 컵 좀 치워줄래? 나 주문 밀려서."

점장님의 다급한 외침에 나는 한숨을 삼키며 홀로 나갔다. 주말 오후의 카페는 지옥도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유일하게 고요한 섬처럼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다. 창가 구석 자리. 단정한 네이비색 니트에 뿔테 안경. 강재현. 우리 친오빠 강준호의 15년 지기 절친이자, 내 짝사랑의 역사 그 자체.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리필 나왔습니다."

내가 트레이를 내려놓자, 재현 오빠가 시선을 노트북에서 떼고 나를 올려다봤다.

"고마워. 바쁘지? 준호한테는 비밀."

재현 오빠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사소한 동작 하나에 심장이 또 제멋대로 튀어 올랐다.

"어이, 알바! 여기 테이블 안 닦아?"

그때, 4번 테이블에 앉은 중년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분위기가 와장창 깨졌다.

"죄송합니다. 금방 치워드릴게요."

"아니, 사람이 왔으면 척척 치워야지. 뭘 빤히 서 있어?"

남자는 괜한 트집을 잡으며 삿대질을 해댔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넓은 등. 익숙한 향수 냄새. 재현 오빠였다. 그는 나를 등 뒤로 감추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남자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그의 등 뒤로 잡은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 때문일까? 아니면 몸이 안 좋은 걸까?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뭐? 넌 뭐야?"

"영업 방해인 건 아시죠? 경찰 부를까요, 아니면 조용히 나가실래요?"

평소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서늘한 눈빛에 압도된 남자가 웅얼거리며 짐을 챙겨 나갔다. 재현 오빠가 뒤를 돌아 나를 봤다. 잔뜩 굳어있던 얼굴이 나를 보자마자 허물어지듯 풀어졌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괜찮아?"

그가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감쌌다. 괜찮지 않았다. 오빠가 너무 멋있어서, 그리고 이 다정함 뒤에 숨겨진 묘한 위태로움 때문에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밤 10시. 마감 시간. 셔터가 반쯤 내려간 카페 안은 묘한 정적이 흘렀다.

"오빠, 이제 가도 돼요."

"데려다줄게. 밤길 위험해."

나는 짐짐하게 농담을 던지며 앞치마를 벗으려 했다. 끈이 엉켰는지 잘 풀리지 않아 낑낑대는데, 불쑥 따뜻한 온기가 등 뒤로 다가왔다. 재현 오빠의 손이 내 허리 뒤로 들어왔다. 스르륵. 엉켰던 매듭이 허무하게 풀렸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수아야. 나 너 동생으로 본 적 없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가 내 턱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강준호 동생 강수아 말고. 그냥 여자 강수아로 본 지 꽤 됐어. 대답해 줘. 너한테 나는 그냥 오빠 친구야?"

그의 눈빛은 절박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라고. 나도 오빠를 좋아했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휘청.

재현 오빠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쏠렸다. 내 어깨를 잡은 그의 손에 억센 힘이 들어갔다. 그건 마치,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것 같은 악력이었다.

"오빠?"

그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이마에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초점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단순한 현기증이 아니었다.

"아..."

그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고통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빠!"

내가 소리치자,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냐... 잠깐 어지러워서 그래. 요즘 야근을 좀 했더니."

거짓말. 야근 좀 했다고 사람이 이렇게 서 있지도 못할 만큼 휘청거린다고? 하지만 재현 오빠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안경을 고쳐 썼다.

"놀랐지? 미안. 분위기 다 깼네."

그가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위태로워 보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잔처럼. 나는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의 몸이 보내는 비명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리는 경고음이었다는 것을.

2화: 그림자 연애

"빈혈이야."

재현 오빠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방금 전까지 휘청거리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태연한 목소리였다.

"요즘 프로젝트 때문에 며칠 밤을 새웠더니 이러네. 운동 부족인가 봐."

"진짜요?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됐어. 그보다... 대답, 아직 못 들었는데."

그의 눈동자가 오직 나만을 담고 있었다. 10년 동안 봐온 눈인데, 오늘따라 유독 깊고 진했다.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저도... 저도 오빠 좋아해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순간, 재현 오빠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가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 박동이 내 가슴에 전해졌다. 빠르고, 강했다. 그것이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의 현기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위험하고 달콤한 공범이 되었다.


비밀 연애 1일 차. 우리는 여전히 오빠 친구와 친구 동생이었지만, 테이블 밑에서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강수아! 너 내 전화 왜 안 받아?"

친오빠 준호였다. 나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컵을 놓칠 뻔했다. 준호는 창가 구석에 앉아 있는 재현 오빠를 발견했다.

"어? 강재현. 너 여기서 뭐 하냐? 둘이 나 빼고 여기서 정모하냐? 너네 요즘 수상하다?"

심장이 발밑으로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뭐, 뭐가 수상해! 재현 오빠는 그냥 일하러 온 거고, 나는 알바 하는 거잖아."

준호는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재현 오빠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그러다 재현 오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야, 근데 너 얼굴이 왜 이리 반쪽이냐? 어디 아프냐?"

"요즘 좀 피곤하네."

준호는 낄낄거리며 재현 오빠의 어깨를 툭 쳤다. 그때였다. 재현 오빠의 몸이 휘청, 하고 옆으로 밀렸다. 가벼운 터치였는데도 중심을 잃은 것이다.

"어? 야, 너 진짜 괜찮냐?"

"아, 미안. 다리에 쥐가 나서."

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든 사이, 나는 재현 오빠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약통을 꺼내 입안으로 털어 넣는 것을 보았다. 물도 없이, 급하게 삼키는 모습이었다. '약? 두통약인가?'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카페 마감 후. 나는 약속 장소인 건물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먼지 냄새와 차가운 콘크리트 냄새가 섞인 그곳에 그가 있었다.

"오빠."

"준호는 갔어?"

"네. 근데 무슨 약이에요? 아까 보니까 급하게 먹던데."

재현 오빠가 잠시 멈칫하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냥 비타민이야. 고함량이라 좀 세."

"거짓말."

그는 능숙하게 화제를 돌리며 내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수아야. 오늘 하루 종일 보고 싶었어."

훅 들어오는 고백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재현 오빠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뜨거운 숨결이 코끝을 스쳤다.

툭.

차가운 액체가 내 뺨에 떨어졌다.

"어...?"

눈을 떴다. 재현 오빠가 당황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이 코를 감싸 쥐었다.

"미, 미안. 코피가..."

투둑. 툭. 후두둑.

한두 방울이 아니었다. 붉은 피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콸콸 쏟아져 내렸다. 그의 하얀 와이셔츠 깃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비릿한 쇠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이건 단순한 코피가 아니었다. 명백한 출혈이었다.

"괜찮아, 고개 젖히면 멈춰. 수아야, 보지 마. 옷 버려."

재현 오빠는 나를 밀어내며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등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바닥 시멘트 위로 검붉은 웅덩이가 생겨나고 있었다. 재현 오빠가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그의 손이 하얀 벽에 붉은 손자국을 길게 남기며 미끄러졌다.

"재현 오빠!"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부축했다. 그의 몸이 힘없이 내 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3화: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비켜주세요! 응급 환자입니다!"

구급대원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자동문이 열렸다. 응급실의 차가운 공기, 소독약 냄새, 비릿한 피 냄새. 내 흰색 블라우스는 재현 오빠가 쏟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보호자분! 여기 접수부터 하세요!"

간호사의 외침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접수대로 달려갔다. 하지만 주민번호도, 관계도 떳떳하게 적을 수 없었다. '지인'. 고작 그 두 글자가 우리 사이를 정의했다. 준호 오빠에게 연락하려 핸드폰을 들었지만, 누군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부르지 마..."

이동식 침대에 누워 있던 재현 오빠가 힘겹게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절박한 눈빛이었다.

"준호... 부르지 마. 제발."

그의 간절함에 나는 결국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는 다시 눈을 감으며 처치실로 실려 들어갔다.

한 시간 뒤. 의사가 차트를 보며 나왔다.

"보호자 되십니까? 환자분이 들어오라고 하시네요. 설명은 같이 들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의사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처치실 안으로 들어갔다. 재현 오빠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뇌종양입니다. 교모세포종."

세상의 소리가 꺼졌다. 뇌종양?

"MRI 상으로 뇌간과 너무 인접해 있어서 수술이 불가능합니다. 영상 판독 결과가... 좀 특이하긴 한데, 어쨌든 좋지 않네요. 길어야 6개월입니다."

의사는 차트의 영상 사진을 뚫어지게 보며 무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지만, 이내 확신에 찬 어조로 선고를 내렸다. 6개월. 그 숫자가 내 고막을 찢고 들어와 뇌리에 박혔다. 나는 재현 오빠를 쳐다봤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알고... 있었어?"

"한 달 전."

배신감이 밀려왔다. 죽는다는 거 알면서 나한테 고백한 거야?

"말해 봐! 알면서 왜 그랬어? 나 가지고 장난친 거야?"

재현 오빠가 링거 줄을 뽑으려는 듯 거칠게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 차갑게 내뱉었다.

"착각하지 마. 널 사랑해서가 아니야. 그냥 죽기 전에 연애놀음이나 한번 해보고 싶었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고."

그의 목소리에는 온기라곤 없었다. 마치 10년의 세월을 칼로 도려낸 것처럼 낯설었다.

"근데 막상 해보니까... 지루하네. 헤어져. 없던 일로 해."

그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축객령이었다.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를 짐짝 취급하는 그 태도가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나가는 척하다가, 몸을 홱 돌려 침대로 달려들었다.

"억!"

재현 오빠가 당황해서 신음을 뱉었다. 콰앙! 침대 헤드가 울릴 정도로 거칠게 그를 밀어붙였다.

"야, 강재현. 누가 허락했어?"

내 손아귀에 잡힌 그의 환자복 깃이 비명처럼 구겨졌다. 내 눈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

"죽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내가 결정해. 6개월? 웃기지 마. 그 시간 동안 나한테 10년치 사랑 다 갚고 가. 억울해서 못 보내니까."

"수, 수아야..."

"도망갈 생각 하지 마. 오빠는 이제 내 거야. 내 허락 없이는 숨도 멈추지 마."

나는 으르렁거리며 선언했다. 이건 이별 통보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신이 내린 빌어먹을 운명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4화: 도망치지 않는 여자

"수, 수아야..."

재현 오빠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말해. 실수였다고? 연애 놀음해보고 싶었다고? 그럼 끝까지 해. 죽는 순간까지 나 데리고 놀아보라고. 왜, 그건 겁나?"

"너한테 상처 주기 싫어서 그래! 내가 어떻게..."

"상처? 지금 오빠가 하는 짓이 난도질이야. 차라리 나랑 놀다가 질려서 버려. 아파서, 죽을병 걸려서 헤어지는 거? 그딴 삼류 드라마 같은 핑계 대지 말고!"

내 고함에 재현 오빠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무서워... 널 사랑하게 될까 봐 무서워. 아니, 이미 사랑해서 미치겠는데... 널 두고 가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래."

나는 잡고 있던 멱살을 놓지 않은 채, 그대로 그를 당겼다. 우리의 입술이 거칠게 부딪쳤다. 로맨틱한 첫 키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로의 치아가 부딪쳐 딱, 소리가 났고, 입술이 터져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건 싸움에 가까웠다. 절망에 대한 시위였고, 죽음에 대한 저항이었다.

"약속해. 도망가지 않겠다고."

"...노력할게."

"노력 말고, 약속."

"약속할게. 네 허락 없이는 안 죽어."


재현 오빠가 잠들었다. 그때 내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지도교수님]. 오늘까지 수정된 논문 초안을 보내지 않으면 심사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교수의 엄포가 떠올랐다.

나는 병실 문밖으로 나갔다. 유리창 너머로 세상 모르게 잠든 재현 오빠가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시한폭탄. 지금 학교로 달려가면 논문은 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재현 오빠는? 나의 2년 vs 강재현의 6개월.

나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내 안의 갈등은 짧지만 치열했다. 그리고 결론은 명확했다. 학위는 내년에도 받을 수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의 강재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여보세요."

  • 강수아! 너 지금 어디야? 당장 튀어와!

"교수님. 죄송합니다. 못 갑니다."

  • 뭐? 너 지금 제정신이야?

"네. 포기하겠습니다. 이번 학기 논문 심사, 안 받겠습니다. 저한테는 논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요."

뚝. 전화를 끊고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화면이 까맣게 꺼졌다. 이제 세상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병실로 들어가 잠든 그에게 속삭였다.

"나 백수 됐다, 오빠. 그러니까 책임져."

그때, 재현 오빠가 눈을 떴다.

"오빠, 퇴원하자. 나랑 같이 있으면 되잖아. 오빠 집에서. 동거하자."


그날 밤, 재현 오빠의 오피스텔. 짐을 대충 풀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재현 오빠는 약 기운에 취해 먼저 잠들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준호 오빠에게는 "친구 집에서 논문 때문에 며칠 지낸다"고 거짓말을 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준호 오빠는 재현 오빠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

띠띠띠띠.

갑자기 도어락 키패드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이 멈췄다. 설마. 벌써?

띠리릭.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야, 강재현! 형이 치킨 사 왔다!"

5화: 버킷리스트

"......"

현관에 선 준호 오빠와 거실 한복판에 선 나. 정적이 흘렀다. 준호 오빠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리고 내 뒤에 놓인 핑크색 슬리퍼와 앞치마로 옮겨갔다.

"강... 수아? 네가 왜 여기 있어?"

"그, 그게..."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고 부스스한 모습의 재현 오빠가 나왔다. 상의를 탈의한 채였다.

"으음... 수아야, 누구 왔어?"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물 좀 줘..."

툭. 준호 오빠의 손에 들려 있던 치킨 박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미친 새끼들이."

준호 오빠의 목소리가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떨렸다.

"강재현. 너... 내 동생이랑... 지금..."

"준호야,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재현 오빠가 황급히 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준호 오빠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신발을 신은 채로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진정? 내가 너 믿고! 내 동생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입을 털었는데!"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재현 오빠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입가에서 피가 터졌다.

"재현 오빠!"

나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지만, 준호 오빠는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 재현 오빠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 새끼야. 네가 친구냐? 어? 네가 사람이냐고!"

"준호야... 미안하다..."

재현 오빠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맞을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아픈 사람인데. 뇌종양인데. 머리 맞으면 안 되는데!

"죽여버릴 거야.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준호 오빠가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안 돼. 이러다 진짜 죽어. 나는 본능적으로 준호 오빠의 팔을 매달려 막았다.

"오빠! 그만해! 제발 그만해!"

"이거 안 놔? 너도 똑같아, 기집애야! 오빠를 속여?"

"때리지 마! 재현 오빠 아프단 말이야!"

"아파? 마음이 아프겠지! 찔리니까 아프겠지!"

"아니야! 진짜 아프다고!"

나는 악을 썼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더는 숨길 수 없었다. 오빠의 주먹 한 방에 재현 오빠가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이성을 압도했다.

"재현 오빠 죽는다고! 뇌종양이라고! 6개월밖에 못 산다고!"

순간, 거실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준호 오빠의 주먹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재현 오빠를 내려다봤다. 재현 오빠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준호 오빠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오고 있었다.

4화: 도망치지 않는 여자

"수, 수아야..."

재현 오빠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내 손아귀에 잡힌 그의 환자복 깃이 구겨졌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물러서면, 이 남자는 정말로 내 인생에서 증발해버릴 테니까.
착한 오빠 친구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혼자 썩어문드러지다 죽어버릴 테니까.

"말해. 실수였다고? 연애 놀음해보고 싶었다고?"

나는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

"그럼 끝까지 해. 죽는 순간까지 나 데리고 놀아보라고. 왜, 그건 겁나?"

"너한테 상처 주기 싫어서 그래! 내가 어떻게..."

"상처? 지금 오빠가 하는 짓이 난도질이야. 차라리 나랑 놀다가 질려서 버려. 아파서, 죽을병 걸려서 헤어지는 거? 그딴 삼류 드라마 같은 핑계 대지 말고!"

내 고함에 재현 오빠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항상 어른스러운 척, 여유로운 척하던 남자가 내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무서워..."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너를... 사랑하게 될까 봐 무서워. 아니, 이미 사랑해서 미치겠는데... 널 두고 가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래."

그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툭. 투둑.
내 손등 위로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네가 내 옆에서 시들어가는 거 보기 싫어. 병수발들다가 네 청춘 다 날리는 거 싫다고. 준호 볼 면목도 없고..."

"준호 오빠가 문제야? 오빠가 죽는데 그게 대수냐고!"

나는 잡고 있던 멱살을 놓지 않은 채, 그대로 그를 당겼다.
아니, 내가 그에게 무너져 내렸다.

우리의 입술이 거칠게 부딪쳤다.
로맨틱한 첫 키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로의 치아가 부딪쳐 딱, 소리가 났고, 입술이 터져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건 싸움에 가까웠다.
절망에 대한 시위였고, 죽음에 대한 저항이었다.

"으음..."

재현 오빠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내 허리를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참아왔던 욕망과 슬픔이 댐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그는 내 입술을, 혀를, 숨결을 집어삼킬 듯이 탐했다.
링거 줄이 엉키고, 침대 시트가 구겨졌다.

우리는 서로의 눈물을 마시며 키스했다.
짜고, 비리고, 뜨거웠다.
그 순간만큼은 병실의 소독약 냄새도,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서로의 심장 소리만이 고막을 때렸다.

한참 뒤, 입술이 떨어졌다.
우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이마를 맞댔다.
재현 오빠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그의 엄지가 내 눈밑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후회할 거야."

그가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중에 나 원망할 거야, 수아야."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그리고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응. 원망할게. 그러니까 6개월 꽉 채워. 하루라도 모자라면 저승까지 쫓아가서 괴롭힐 거니까."

재현 오빠가 픽, 하고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너무 슬퍼서,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아주 부드럽게.

"약속해. 도망가지 않겠다고."

"...노력할게."

"노력 말고, 약속."

내가 채근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네 허락 없이는 안 죽어."

그제야 내 몸에 들어갔던 힘이 풀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그가 잡아주었다.
우리는 좁은 환자용 침대에 엉켜 앉아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현실은 변한 게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고, 남은 시간은 고작 180일 남짓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재현 오빠가 잠들었다.
진통제와 진정제 성분 때문인지, 격렬했던 감정 소모 탓인지 그는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창백한 얼굴.
감은 눈 밑으로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이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데.'

뇌종양이라니.
교모세포종이라니.
인터넷에 검색해 보려다 관뒀다.
희망적인 이야기는 없을 게 뻔하니까. 지금은 절망보다 그의 온기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내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화들짝 놀라 재현 오빠를 살폈다. 다행히 깨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현실이 찬물처럼 끼얹어졌다.

[지도교수님]

숨이 턱 막혔다.
지금 시각, 오후 4시.
오늘까지 수정된 논문 초안을 보내지 않으면 심사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교수의 엄포가 떠올랐다.

"여, 여보세요."

  • 강수아! 너 지금 어디야?

수화기 너머로 교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 내가 4시까지 연구실로 오라고 했어, 안 했어? 네가 지금 논문 통과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급한 사정이 생겨서..."

  • 사정? 무슨 사정? 집안에 초상이라도 났어? 내가 네 사정 봐주려고 주말에 학교 나온 줄 알아? 너 이번에 심사 못 받으면 수료야. 알지? 한 학기 더 등록금 낼 돈은 있고?

교수의 비아냥거림이 비수처럼 꽂혔다.
등록금.
그 돈을 마련하려고 뼈 빠지게 카페 알바를 했다.
논문 쓰면서 코피 쏟아가며 버텼다.
이것만 통과하면, 석사 학위만 받으면 취업해서 빚도 갚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지금 가면...'

택시를 타고 날아가면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
가서 무릎 꿇고 빌면, 밤새 수정해서 내일 아침까지 내겠다고 하면 기회는 줄지도 모른다.
나의 2년.
나의 땀과 눈물.
나의 미래.

나는 닫힌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잠든 재현 오빠가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언제 다시 고통스러워할지 모르는 남자.
내가 없으면 혼자서 그 공포를 견뎌야 할 남자.

'6개월.'

그에게 남은 시간.
내가 논문을 쓰고, 심사를 받고, 졸업을 준비하는 그 시간 동안 그는 죽어갈 것이다.
내가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동안, 그는 혼자 병실에서 시들어갈 것이다.

학위는 내년에도 받을 수 있다.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다.
하지만 강재현은?
지금 이 순간의 강재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 야, 강수아. 듣고 있어? 지금 당장 튀어와. 안 그러면 너...

"교수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또박또박 말을 끊었다.

  • 뭐?

"죄송합니다. 못 갑니다."

  • 뭐,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야? 너 이거 포기하면...

"네. 포기하겠습니다. 이번 학기 논문 심사, 안 받겠습니다."

  • 야! 너 진짜 후회 안 해? 내가 너 다시 받아줄 것 같아? 너 내 연구실 발도 못 붙이게 할 거야!

교수의 고함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지나가던 간호사들이 힐끔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죄송합니다. 저한테는 논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요."

  • 허, 기가 차서. 그래, 마음대로 해라! 너 같은 놈은 어차피 사회 나가도 안 돼!

뚝.
전화가 끊겼다.
나는 멍하니 꺼진 화면을 내려다봤다.
끝났다.
나의 대학원 생활도, 2년의 노력도, 이번 학기 등록금 500만 원도.
허무함에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나는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화면이 까맣게 꺼졌다.
이제 세상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병실 문을 열었다.
규칙적인 기계음과 재현 오빠의 숨소리만이 존재하는 공간.
나는 그의 침대 옆 보조 의자에 앉아,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나 백수 됐다, 오빠."

잠든 그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책임져. 나 먹여 살리고, 웃게 해주고, 사랑해 줘. 남은 시간 동안 1분 1초도 빼놓지 말고."

그의 손을 내 뺨에 비볐다.
따뜻했다.
이 온기면 충분했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내 미래로부터 도망친 게 아니라, 나의 현재를 향해 달려온 것이다.
지금 내 세상의 중심은 논문도, 성공도 아닌 바로 이 남자니까.

그때, 재현 오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이 몽롱한 눈이 나를 찾았다.

"수아...?"

"응. 나 여기 있어."

"어디... 안 갔어?"

"안 가. 아무 데도 안 가."

그가 안도한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꿈인 줄 알았어."

"꿈 아니야. 현실이야. 아주 지독하고 예쁜 현실."

나는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우리의 시한부 연애는 그렇게, 나의 모든 것을 건 희생 위에서 진짜 시작을 알렸다.

"오빠, 근데."

"응?"

"우리 오빠한테는 언제 말할 거야?"

내 질문에 재현 오빠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지진 난 듯 흔들렸다.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조금만 더 있다가. 내가 좀 더 멀쩡해지면."

"멀쩡해지면? 언제? 관에 들어가서?"

"야, 말이 심하다."

"농담 아니야. 준호 오빠 눈치 백단인 거 알지? 아까 카페에서도 오빠 약 먹는 거 의심했잖아. 오래 못 숨겨."

재현 오빠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알아. 아는데... 준호가 알면 나보다 더 아파할 놈이라서 그래. 그 새끼, 덩치만 컸지 속은 순두부잖아."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
그게 너무 애틋해서 또 화가 났다.
바보 같은 남자들.

"일단 퇴원부터 하자.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금방 들켜."

"의사 선생님이 며칠 경과 보자고 했는데?"

"통원 치료하겠다고 해. 나랑 같이 있으면 되잖아."

"너랑? 어디서?"

"어디긴. 오빠 집."

재현 오빠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 우리 집?"

"왜? 싫어? 나랑 같이 살기 싫어?"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너 부모님은? 준호는? 외박하면 난리 날 텐데?"

"핑계는 만들면 돼. 논문 때문에 밤샘한다고 하거나, 친구 자취방에서 지낸다고 하지 뭐. 어차피 나 휴학... 아니, 당분간 학교 안 가도 되니까."

휴학 사실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이 남자는 당장 링거 뽑고 나를 학교로 쫓아낼 테니까.

"수아야, 그건 너무 위험해. 준호가 우리 집 비밀번호도 아는데..."

"비밀번호 바꾸면 되지. 그리고 오빠 지금 혼자 있으면 안 돼. 또 쓰러지면 누가 119 불러줘? 내가 옆에 있어야 해."

나의 완강한 태도에 재현 오빠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싫지 않은 눈치였다.
아니, 오히려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래. 하자. 동거."

그 단어가 주는 울림에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동거.
시한부 동거.
우리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신혼 생활.

"대신 조건이 있어."

재현 오빠가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나 아픈 거, 너무 티 내지 않기. 환자 취급하지 않기. 그냥... 평범한 연인처럼 지내기. 할 수 있어?"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세상에서 제일 평범하고, 제일 행복하게 해줄게."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슬픈 약속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설레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몰랐다.
우리가 꿈꾸는 그 '평범한 행복'을 깨뜨릴 불청객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불청객의 주먹이 생각보다 훨씬 맵다는 것을.


5화: 버킷리스트

재현 오빠의 오피스텔은 지나칠 정도로 깔끔했다.
모델하우스 같았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생수병과 배달 음식 남은 것, 그리고 종류를 알 수 없는 약병들만 가득했다.

"오빠, 이러고 살았어?"

내가 냉장고를 열어보며 혀를 차자, 소파에 앉아 있던 재현 오빠가 머쓱하게 웃었다.

"혼자 사는데 뭐. 잠만 자고 나가는 곳이라."

"이제부턴 안 돼. 내가 사람 사는 집으로 만들어줄게."

나는 팔을 걷어붙였다.
마트에서 장을 봐온 식재료들을 정리하고, 칙칙한 회색 커튼을 걷어 햇빛을 들였다.
재현 오빠는 그런 나를 소파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신기한 풍경을 보는 것처럼.

"왜 그렇게 봐?"

"그냥. 좋아서."

그가 베시시 웃었다.
병색이 완연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 모습이 좋아서, 나는 일부러 더 부산을 떨었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계란말이를 했다.
도마 위에서 칼질하는 소리, 찌개 끓는 보글보글 소리가 적막했던 집안을 채웠다.

"와, 냄새 좋다."

재현 오빠가 식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었다.
특별할 것 없는 저녁 식사였지만, 재현 오빠는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맛있다. 진짜 맛있다, 수아야."

"많이 먹어. 살 좀 찌게. 뼈밖에 없잖아."

그는 내 숟가락 위에 계란말이를 올려주었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내일 죽을 사람 같지 않게.

식사 후, 우리는 거실 바닥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제목은 <6개월 버킷리스트>.

"자, 하고 싶은 거 다 말해봐. 내가 다 들어줄게."

내가 펜을 들고 비장하게 말했다.
재현 오빠가 턱을 괴고 고민에 잠겼다.

"음... 일단 너랑 여행 가기. 바다 보고 싶어."

"오케이. 동해? 제주도? 어디든 말만 해."

"그리고... 너랑 영화 보기, 놀이공원 가서 교복 데이트하기, 한강에서 라면 먹기..."

"뭐야. 다 너무 소박하잖아. 좀 더 거창한 거 없어? 세계 일주라든가, 스카이다이빙이라든가."

"거창한 건 필요 없어. 그냥 남들 다 하는 거. 그거 너랑 해보고 싶었어."

그의 말에 가슴이 릿해졌다.
남들 다 하는 거.
그 평범한 일상이 그에게는 가장 간절한 소원이었던 것이다.

"알았어. 다 적어. 하루에 하나씩 다 하자."

나는 꾹꾹 눌러 썼다.

  1. 바다 여행
  2. 심야 영화
  3. 놀이공원
    ...
  4. 수아랑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기

"야! 10번 뭐야!"

내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자, 재현 오빠가 짓궂게 웃으며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왜? 난 이게 제일 하고 싶은데."

"환자가 못 하는 말이 없어, 진짜."

"환자 아니야. 남자야."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간지러운 숨결에 몸이 나른해졌다.
우리는 소파에 엉켜 누웠다.
TV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체온에만 집중했다.

"수아야."

"응?"

"내 통장 비밀번호랑, 보험 증서 위치... 서재 두 번째 서랍에 있어."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식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를 내려다봤다.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혹시 몰라서. 나 갑자기 잘못되면... 네가 알아서 정리해 줘. 준호한테 맡기기엔 좀 그렇고, 부모님은 충격받으실 테니까."

"하지 마."

"수아야."

"재수 없게 무슨 유언을 남기고 그래? 안 죽는다며. 내 허락 없이 안 죽는다며!"

내가 울먹이자 재현 오빠가 당황해서 내 손을 잡았다.

"아니, 죽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대비해두자는 거지. 그리고 그거 다 너 주려고 모은 거야."

"뭐?"

"나 가면, 너 유학 가. 논문 다시 쓰고, 박사까지 해. 내가 지원해 줄게. 내 마지막 선물이야."

그는 이미 모든 걸 계획하고 있었다.
자신이 떠난 뒤의 내 삶까지.
그게 너무 고맙고, 또 너무 미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필요 없어. 그 돈으로 오빠 살려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내라고!"

"알았어, 알았어. 안 죽어. 그냥 해본 소리야."

그가 나를 다시 품에 안고 토닥였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도 무서운 것이다. 다가오는 끝이.

그날 밤, 우리는 서로를 부서져라 안았다.
마치 내일은 없을 것처럼.
그의 몸에 남은 흉터, 점 하나까지 눈에 새기려는 듯 나는 밤새 그를 어루만졌다.


다음 날 저녁.
재현 오빠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일찍 잠들었다.
나는 거실에서 노트북을 켜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논문은 포기했지만, 생활비는 벌어야 했다.
재현 오빠 돈을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띠띠띠띠.

갑자기 현관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현 오빠가 올 리가 없는데? 자고 있는데?

띠리릭.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온 사람은...

"어우, 날씨 덥다. 야, 강재현! 자냐? 형이 치킨 사 왔다!"

준호 오빠였다.
양손에 치킨 박스와 맥주를 들고, 제 집처럼 당당하게 들어오는 우리 친오빠.

"......"

"......"

현관에 선 준호 오빠와 거실 한복판에 선 나.
정적이 흘렀다.
준호 오빠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리고 내 뒤에 놓인, 남자 혼자 사는 집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핑크색 슬리퍼와 앞치마로 옮겨갔다.

"강... 수아?"

준호 오빠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 그게..."

머릿속이 하얘졌다.
논문 핑계? 친구 집?
아니, 이 시간에 앞치마를 두르고 남자 오피스텔에 있는 여동생을 설명할 수 있는 핑계가 뭐가 있지?

"너... 설마..."

준호 오빠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고 부스스한 모습의 재현 오빠가 나왔다.

"으음... 수아야, 누구 왔어?"

재현 오빠는 잠결이라 상황 파악이 안 된 상태였다.
그는 상의를 탈의한 채였다.
어젯밤의 흔적이 남은 몸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물 좀 줘..."

그 순간.
준호 오빠의 손에 들려 있던 치킨 박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

재현 오빠가 그제야 번쩍 눈을 떴다.
현관에 서 있는 준호를 발견하고는 굳어버렸다.

"주, 준호야?"

"이... 미친 새끼들이."

준호 오빠의 목소리가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떨렸다.

"강재현. 너... 내 동생이랑... 지금..."

"준호야,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재현 오빠가 황급히 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준호 오빠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신발을 신은 채로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진정? 진저엉? 내가 너 믿고! 내 동생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입을 털었는데!"

"오빠! 하지 마!"

내가 말릴 새도 없었다.
준호 오빠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재현 오빠의 얼굴에 꽂혔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재현 오빠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입가에서 피가 터졌다.

"재현 오빠!"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재현 오빠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준호 오빠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재현 오빠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 새끼야. 네가 친구냐? 어? 네가 사람이냐고!"

"준호야... 미안하다..."

재현 오빠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맞을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아픈 사람인데.
뇌종양인데.
머리 맞으면 안 되는데!

"죽여버릴 거야.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준호 오빠가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재현 오빠는 눈을 감았다.

안 돼.
이러다 진짜 죽어.

나는 본능적으로 준호 오빠의 팔을 매달려 막았다.

"오빠! 그만해! 제발 그만해!"

"이거 안 놔? 너도 똑같아, 기집애야! 오빠를 속여?"

"때리지 마! 재현 오빠 아프단 말이야!"

"아파? 마음이 아프겠지! 찔리니까 아프겠지!"

"아니야! 진짜 아프다고!"

나는 악을 썼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더는 숨길 수 없었다.
오빠의 주먹 한 방에 재현 오빠가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이성을 압도했다.

"재현 오빠 죽는다고! 뇌종양이라고! 6개월밖에 못 산다고!"

순간, 거실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준호 오빠의 주먹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재현 오빠를 내려다봤다.
재현 오빠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준호 오빠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오고 있었다.


6화: 오빠는 모르는 눈물

"거짓말이지?"

준호 오빠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재현 오빠가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준호 오빠는 뒷걸음질 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 강수아. 너 지금 불륜 드라마 찍냐? 뇌종양? 6개월?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장난 아니야..."

나는 재현 오빠를 부축하며 울먹였다.
재현 오빠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그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방금 맞은 충격 때문인지, 호흡이 거칠었다.

"재현아. 네가 말해 봐. 이거 뻥이지? 너네 사귀는 거 들켜서 수아가 헛소리하는 거지?"

준호 오빠가 재현 오빠에게 다가와 어깨를 흔들었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듯, 애원하는 눈빛이었다.
재현 오빠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부어오른 뺨, 터진 입술, 그리고 슬픈 눈.

"미안하다, 준호야."

"......"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그 한마디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준호 오빠의 다리가 풀렸다.
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185cm의 거구가 어린아이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 미친 새끼야..."

준호 오빠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야 이 나쁜 새끼야...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걱정할까 봐 그랬어. 너 알면 난리 칠 거 뻔하니까."

"당연히 난리를 치지! 친구가 죽는다는데! 15년 친구가 죽는다는데 춤이라도 추냐?"

준호 오빠가 소리쳤다.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배신감인지 모를 감정들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나 아까... 너 때렸는데. 아픈 놈을... 죽을 놈을 내가..."

그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며 오열했다.
방금 친구를 때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네가 때려줘서 오히려 속 시원하다."

재현 오빠가 억지로 웃으며 손을 뻗어 준호 오빠의 무릎을 쳤다.
그 모습에 준호 오빠는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거실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도 울고, 준호 오빠도 울고, 재현 오빠만 울지 못하고 씁쓸하게 우리를 달랬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준호 오빠는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캔맥주를 땄다. (재현 오빠는 물이었다.)

"그래서. 언제부터냐."

준호 오빠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아픈 거? 아니면 사귀는 거?"

"둘 다."

"아픈 건 한 달 전. 사귀는 건... 며칠 안 됐어."

"하... 기가 막힌다. 나만 바보 만들고 둘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네."

준호 오빠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나를 째려봤다.

"너는. 알면서도 만난 거야?"

"응."

"미친 기집애. 제정신이야? 얘 죽으면 어떡하려고? 과부는 안 되더라도, 상처는 어떡할 건데?"

"오빠가 상관할 바 아니야. 내가 좋아서 선택한 거야."

"이게 진짜..."

준호 오빠가 습관처럼 손을 올리려다, 재현 오빠의 눈치를 보고 슬그머니 내렸다.
그리고 한숨을 땅이 꺼져라 쉬었다.

"수술은? 안 된대?"

"응. 위치가 안 좋대."

"돌팔이 아니야? 다른 병원 가 봤어? 미국은? 내가 돈 대줄게. 아니, 대출이라도 받아서..."

"준호야. 고맙지만... 이미 다 알아봤어.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

재현 오빠의 담담한 말에 준호 오빠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받아들이긴 개뿔이... 야, 너 죽으면 나는? 수아는? 우리 두고 혼자 편하게 가겠다고?"

"그러니까 부탁 하나만 하자."

재현 오빠가 준호 오빠의 손을 잡았다.

"나 갈 때까지, 수아랑 연애하는 거... 눈감아 줘. 그리고 나 없으면, 네가 수아 잘 챙겨줘. 나 잊고 좋은 사람 만나게."

"야 이 개새끼야..."

준호 오빠가 다시 오열했다.
식탁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었다.
동네 창피할 정도로 큰 소리였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투박하고 진실한 우정의 소리였으니까.

"허락할게. 까짓거 해라. 대신..."

준호 오빠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수아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그땐 진짜 죽여버린다. 귀신 돼서 와도 또 죽일 거야."

"알았어. 약속할게."

재현 오빠가 웃었다.
비로소 진짜 안도감이 그의 얼굴에 번졌다.
가장 큰 산을 넘었다.
이제 우리에게 장애물은 없었다.
오직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적만 남았을 뿐.


그날 이후, 준호 오빠는 우리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감시자가 되었다.
그는 매일같이 몸에 좋다는 온갖 것들을 사 들고 왔다.
상황버섯, 홍삼, 심지어 살아있는 붕어까지(이건 내가 기겁해서 돌려보냈다).

"야, 이거 먹어봐. 옆집 할머니가 그러는데 이게 뇌에 직방이래."

"준호야, 나 배터져 죽겠다."

"잔말 말고 먹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잖아. 아, 취소. 죽는다는 말 취소."

준호 오빠는 '죽음'과 관련된 단어만 나오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때렸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펐다.

우리의 동거 생활은 평화로웠다.
재현 오빠는 회사를 휴직했다.
우리는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갔다.
심야 영화를 보고, 한강에서 라면을 먹고,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었다.

재현 오빠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처음엔 가벼운 두통이었지만, 점차 빈도가 잦아졌다.
어느 날은 젓가락질을 하다가 손에 힘이 빠져 떨어뜨리기도 했고,
어느 날은 내 이름을 부르려다 말이 꼬여 어눌하게 발음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젓가락을 다시 쥐여주었고, 그의 말을 천천히 들어주었다.
하지만 밤에 그가 잠들면, 화장실에 들어가 수건을 입에 물고 울었다.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빠르고, 잔인하게.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재현 오빠가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라면 내가 깨우기 전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을 시간인데.

"오빠? 일어나. 해 떴어."

나는 침대로 다가가 그를 흔들었다.
반응이 없었다.
몸이 불덩이 같았다.

"오빠?"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나는 그의 뺨을 두드렸다.

"재현 오빠! 눈 좀 떠봐! 오빠!"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살짝 떠졌다.
하지만 초점이 없었다.
흰자위만 보였다.

"수... 아..."

그가 쇳소리 나는 숨을 내뱉으며 내 손을 허공에서 더듬었다.
그리고 갑자기.

쿠웅.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침대 아래로 떨어질 듯 튀어 올랐다.
발작이었다.
의사가 경고했던, 종양이 뇌를 압박할 때 나타나는 증상.

"오빠! 안 돼! 정신 차려!"

나는 그를 껴안고 소리쳤다.
그의 몸이 활어처럼 펄떡거렸다.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준호 오빠! 119! 빨리 119 불러!"

거실에 있던 준호 오빠가 뛰어 들어왔다.
상황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어 핸드폰을 꺼냈다.
손이 너무 떨려 번호를 제대로 누르지도 못했다.

"재현아! 야 인마! 눈 떠!"

기계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내 세상이 다시 한번 무너지고 있었다.
6개월이라며.
아직 한 달도 안 지났는데.
벌써 가면 안 되잖아. 약속했잖아.

재현 오빠의 경련이 멈췄다.
동시에 그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툭 떨어졌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빠...?"

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그의 코 밑에 갖다 댔다.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돼... 안 돼... 강재현!!!"

나의 비명이 아침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7화: 마지막 편지

응급실 앞 복도는 지독하게 길고 차가웠다.
준호 오빠는 벽에 머리를 박고 서 있었고, 나는 수술실 문 위에 켜진 붉은 등만 멍하니 바라봤다.
'수술 중'.
수술이 불가능하다면서.
그냥 응급 처치만 하는 거라면서.
저 불이 꺼지면, 내 세상의 불도 같이 꺼지는 걸까.

"수아야. 뭐 좀 마실래?"

준호 오빠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목구멍이 꽉 막혀 침도 넘어가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마음의 준비 하라고 했어."

내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남의 말처럼 들렸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의사가 했던 말.
'뇌압이 너무 높습니다. 뇌간 압박이 심해서...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고비.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해. 저 새끼 안 죽어. 저렇게 끈질긴 놈이 널 두고 어떻게 죽어."

준호 오빠가 억지를 부리듯 소리쳤지만, 그의 눈도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기적은 드라마에나 있다는 것을.

나는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어제오늘, 재현 오빠가 잠들었을 때 몰래 썼던 편지였다.
혹시나 그가 갑자기 떠나버릴까 봐.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보낼까 봐.
전하지 못한 말들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흔해 빠진 말들이지만, 그에게만은 닿기를 바라며 쓴 유서 같은 연서.
이걸 그에게 직접 읽어줄 수 있을까.
아니면 차가운 그의 가슴 위에 올려두어야 할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붉은 등이 꺼졌다.
철문이 열리고,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나왔다.
마스크를 벗는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아니, 심각하다기보다는...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당혹감? 의문?

"보호자분."

나와 준호 오빠가 동시에 달려갔다.

"어떻게 됐습니까? 살았나요?"

준호 오빠가 의사의 팔을 잡고 물었다.
의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짧은 침묵이 내 숨통을 조였다.

"일단 고비는 넘겼습니다."

"하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준호 오빠가 나를 부축했다.

"뇌압을 낮추는 시술을 했고, 호흡도 돌아왔습니다. 중환자실로 옮길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살았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이별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

의사가 말을 흐렸다.
안도감에 젖어 있던 우리는 다시 긴장했다.

"뭔가 이상합니다."

"네? 뭐가요? 또 안 좋아졌나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영상 자료와 실제 환자 상태가 매칭이 안 됩니다."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차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MRI 상으로는 교모세포종이 뇌간을 침범해서 손쓸 수 없는 상태였는데... 이번에 뇌압 낮추면서 정밀 촬영을 다시 해보니, 종양의 경계가 너무... 깨끗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악성 종양은 보통 경계가 불분명하고 주변 조직을 파고드는데, 이건 마치 물주머니처럼 경계가 뚜렷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의사가 우리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종양 내부 밀도가 다릅니다. 이건 암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낭종(물혹)이나 기생충 감염일 가능성이 보입니다."

"네?"

나와 준호 오빠는 서로를 쳐다봤다.
낭종? 기생충?
그건 암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확실한 건 조직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만약 낭종이라면, 간단한 제거 수술로 완치될 수 있습니다."

쿵.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완치?
6개월 시한부가 아니라, 완치?

"그럼... 오진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준호 오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전 병원에서 영상 판독에 오류가 있었거나, 아주 드문 케이스의 양성 종양일 수 있습니다. 일단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시죠. 하루 이틀이면 나옵니다."

의사가 떠나고, 우리는 멍하니 복도에 남겨졌다.
기뻐해야 하는데.
날아갈 듯 기뻐해야 하는데.
현실감이 없었다.

"야... 강수아."

준호 오빠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들었냐? 물혹일 수도 있대. 물혹."

"어... 들었어."

"그럼 쟤 안 죽는 거야? 그냥 머리에 물찬 거야?"

"그렇... 겠지?"

준호 오빠가 갑자기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 보듯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하하! 미친! 머리에 물이 찼대! 야 이 돌대가리 새끼! 하하하!"

준호 오빠는 웃다가 다시 울었다.
나도 따라 웃다가 울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의 근육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안도감 뒤에 숨어 있던,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

'그럼... 내 휴학은? 내 논문은? 내 눈물은?'

지난 한 달간 지옥을 오갔던 내 감정 소모.
재현 오빠를 위해 포기했던 내 미래.
매일 밤 몰래 썼던 유서 같은 편지들.
이 모든 게... 해프닝이 되는 건가?

물론 재현 오빠가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하지만...

'쪽팔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죽는다고 멱살 잡고 키스하고, 오빠한테 대들고, 동거까지 감행했던 나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게 만약 진짜 오진이라면.
나는 무슨 얼굴로 재현 오빠를 봐야 하지?

"수아야, 가자. 재현이 보러 가자."

준호 오빠가 내 손을 끌었다.
나는 엉거주춤 따라갔다.
주머니 속의 편지가 손끝에 닿았다.
바스락.
이 편지, 절대 보여주면 안 되겠다.
평생 무덤까지 가져가야겠다.

중환자실 유리창 너머로 재현 오빠가 보였다.
각종 기계 장치에 둘러싸여 잠든 모습.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지만,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희망'의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제발 물혹이어라. 제발 단순한 물혹이어라.'

나는 유리창에 손을 대고 기도했다.
그리고 동시에 기도했다.
제발 이 쪽팔림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때였다.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다급하게 나왔다.

"보호자분! 환자분 깨어나셨어요. 찾으시네요."

우리는 서둘러 환복하고 들어갔다.
재현 오빠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힘겹게 눈을 뜨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사람처럼 비장했다.

"수... 아야..."

그가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나... 이제... 가는 거야?"

그가 슬프게 물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믿는 눈빛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오빠 못 가."

"어...?"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오빠 머리에 물 찼대."

"......?"

재현 오빠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그 멍청한 표정이 너무 사랑스럽고, 또 너무 얄미워서 나는 그의 손등을 꼬집어주고 싶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비극의 막이 내리고, 희극의 막이 오를 차례였다.
물론, 그 희극이 나에게는 또 다른 비극(쪽팔림)의 시작일지라도.


8화: 기적, 혹은 코미디

"뭐...라고?"

재현 오빠가 산소마스크 안에서 벙어리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의 표정은 마치 외계인을 본 사람 같았다.
슬픔, 비장함, 공포가 뒤섞여 있던 얼굴에 '황당함'이라는 새로운 색깔이 입혀졌다.

"물. 혹. 이라고. 낭종."

내가 또박또박 발음해주었다.
옆에 있던 준호 오빠가 킬킬거리며 거들었다.

"야, 강재현. 너 뇌종양 코스프레 그만해라. 의사 쌤이 너 그냥 머리에 물찬 거래. 수술하면 땡이라던데?"

"거... 거짓말..."

재현 오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손을 꽉 쥐었다.
손아귀 힘이 셌다.
그래, 죽어가는 사람 힘이 아니지.

"진짜야? 나... 안 죽어?"

"응. 안 죽어. 조직 검사 결과 나와야 확실하다지만, 거의 99%래."

그 순간, 재현 오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번엔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안도감.
삶에 대한 벅찬 기쁨.
그는 마스크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다행이다... 흐윽... 진짜 다행이다... 수아야... 나 산대..."

그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찡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매일 밤 잠들 때마다 내일이 오지 않을까 봐 얼마나 떨었을까.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같이 울었다.

"그래. 다행이야. 진짜 고생했어."

우리는 셋이서 끌어안고 한참을 울고 웃었다.
중환자실 간호사가 와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제지할 때까지.


이틀 뒤.
일반 병실로 옮긴 재현 오빠는 빠르게 회복했다.
조직 검사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거대 지주막 낭종'.
선천적으로 있던 물주머니가 커지면서 뇌를 압박해 뇌종양과 유사한 증상을 일으켰던 것이다.
간단한 배액술(물을 빼내는 수술)만 받으면 완치된다고 했다.

"와, 진짜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네. 차트 바뀐 거 아니냐고 따졌더니 전 병원 영상 화질이 구려서 오독한 거래. 고소할까?"

준호 오빠가 사과를 깎으며 투덜거렸다.

"됐어. 살았으면 됐지. 액땜했다 치자."

재현 오빠는 침대에 앉아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죽다 살아난 사람 특유의 해탈한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보며 꿀 떨어지는 눈빛을 보냈다.

"수아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오빠가 다 사줄게. 저기 병원 지하에 맛있는 거 많던데."

"됐어. 입맛 없어."

나는 창밖만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재현 오빠가 당황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잘못한 거 없지.
아픈 게 죄는 아니니까.
근데...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지난 이틀간, 기쁨이 가라앉고 나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첫째, 휴학.
이미 지도교수한테 "논문 포기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전화까지 끊어버렸다. 다시 돌아가면 교수가 나를 받아줄까? 아니, 학교 문턱이라도 밟게 해줄까?

둘째, 통장 잔고.
알바도 그만두고 병간호에 올인했다. 이번 달 월세는? 생활비는?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쪽팔림.
'죽어도 내 허락 받고 죽어', '10년치 사랑 다 갚아'라며 멱살 잡고 키스했던 그날의 기억.
재현 오빠를 위해 유서 같은 편지를 쓰고, 오빠 앞에서 대성통곡했던 기억.
이 모든 게 '물혹' 하나로 코미디가 되어버렸다.

"수아야, 혹시... 나 안 죽어서 실망한 거야?"

재현 오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멍청한 질문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오빠 바보야? 내가 왜 실망을 해!"

"그럼 왜 그래... 나 살아서 너무 좋은데, 네가 안 웃어주니까 불안하잖아."

그는 내 손을 잡고 강아지처럼 비 볐다.
죽을병 걸렸을 때의 그 치명적이고 비련미 넘치던 남주는 어디 가고, 그냥 눈치 없는 동네 오빠만 남아 있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 금방 와?"

"몰라. 찾지 마."

나는 가방을 챙겨 병실을 나왔다.
뒤에서 재현 오빠가 "수아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이 쪽팔림에서, 그리고 대책 없는 내 현실에서.

병원 로비에 앉아 핸드폰을 켰다.
며칠 만에 켠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 스팸이나 카드값 독촉 문자였다.
그리고 지도교수의 문자 하나.

[너 진짜 안 올 거야? 오늘까지 기회 준다.]

문자 온 날짜를 보니 이미 3일 전이었다.
기회는 날아갔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쳤지, 강수아. 사랑에 눈이 멀어서 인생을 말아먹었구나.'

물론 후회는 안 한다.
재현 오빠가 살았으니까. 그깟 논문, 백 번이라도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돌아오니 막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재현 오빠는 내 희생을 모른다.
그냥 내가 알바 좀 쉰 줄로만 안다.
말해봤자 부담만 줄 테고, 그렇다고 혼자 끙끙 앓자니 억울하고.

"하아..."

깊은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 내 앞에 섰다.
준호 오빠였다.

"야. 너 왜 여기 있냐?"

"그냥. 답답해서."

준호 오빠가 내 옆에 앉았다.
그는 깎다 만 사과 조각을 내밀었다.

"먹어. 당 떨어진다."

"안 먹어."

"야, 솔직히 말해봐. 너 학교 어떡할 거냐?"

준호 오빠의 돌직구에 심장이 철렁했다.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네 교수한테 전화 왔었어. 집으로. 너 연락 안 된다고 난리더라. 휴학한다며?"

"......"

"재현이 때문이지?"

준호 오빠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바보 같은 기집애. 그런 건 말을 했어야지. 내가 가서 빌든 돈을 쓰든 했을 텐데."

"됐어. 이미 끝난 일이야. 다음 학기에 복학하면 돼."

"재현이한테는 말했냐?"

"아니. 말하지 마. 절대. 알면 또 자기 탓이라고 자책할 거야. 막 살아난 사람 스트레스 주기 싫어."

"그럼 넌? 넌 괜찮고?"

"난... 괜찮아. 알바 다시 구하면 되고..."

말꼬리가 흐려졌다.
안 괜찮았다. 하나도 안 괜찮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오빠."

"어."

"나 당분간 잠수 탈래."

"뭐?"

"재현 오빠 얼굴 못 보겠어. 너무 좋고 다행인데... 내 꼬라지가 너무 비참해서 못 보겠어.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야, 너 도망가게? 재현이 이제 막 살았는데?"

"죽는 거 아니잖아. 물혹이라며. 수술받고 회복할 때까지만... 며칠만 안 볼래. 핑계는 오빠가 좀 대줘. 짐 가지러 집에 갔다고 하든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호 오빠가 잡으려다 말았다.
내 표정이 너무 단호해 보였나 보다.

"에휴. 알았다. 내가 알아서 둘러댈게. 대신 연락은 해라. 걱정하니까."

"고마워."

나는 병원을 나섰다.
햇살이 눈부셨다.
세상은 너무 평화로운데, 내 마음만 전쟁터였다.
나는 핸드폰을 다시 껐다.
그리고 무작정 걸었다.

이건 이별이 아니다.
재정비를 위한 작전상 후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병실에 두고 온 가방 속에, 재현 오빠에게 썼던 그 '마지막 편지'가 들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편지가, 우리 관계의 2막을 여는 열쇠가 될 줄은.


밤이 깊었다.
재현 오빠는 수아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 뻔했다.
준호가 "수아 집에 가서 좀 쉬다 온대. 며칠 걸릴 거야"라고 했지만, 영 찜찜했다.
수아의 표정이 어두웠다.
자신이 살아난 게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내가 뭘 잘못했나? 너무 눈치 없이 굴었나?'

그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수아의 가방을 보았다.
수아가 급하게 나가느라 두고 간 에코백이었다.
가져다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무심코 가방 끈 사이로 삐져나온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편지봉투였다.
겉면에 [재현 오빠에게]라고 적힌, 꼬깃꼬깃한 봉투.

"이게 뭐지?"

재현 오빠는 홀린 듯 봉투를 집어 들었다.
열어보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수아의 글씨체를 보는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오빠.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건, 오빠가 내 곁에 없다는 거겠지...]

첫 문장을 읽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유서였다.
자신이 죽을 것을 대비해 쓴, 수아의 마지막 인사.

[오빠를 보내고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지만 약속할게. 오빠 몫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논문도 포기하고, 학교도 그만두고 오빠 곁에 있었던 지난 시간들...
하나도 후회 안 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어.]

"......!"

재현 오빠의 눈이 커졌다.
논문 포기? 학교 그만둠?
그는 숨을 멈추고 다음 줄을 읽어 내려갔다.

[오빠가 내 논문 때문에 미안해할까 봐 말 안 했어.
사실 교수님이 오지 말라고 했을 때, 나 하나도 안 무서웠어.
오빠 없는 미래보다, 오빠 있는 현재가 나한텐 더 소중했으니까.
내 꿈은 박사가 되는 게 아니라, 강재현의 마지막 여자로 남는 거였으니까...]

종이 위로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수아가 울면서 썼을 글자들.
자신의 꿈을 송두리째 바쳐가며 지키려 했던 사랑.
그것도 모르고, 자기는 살았다고 희희낙락하며 "맛있는 거 사줄게" 따위의 소리나 했다니.

"아..."

재현 오빠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수아가 왜 도망쳤는지, 왜 웃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보 같은 놈... 강재현, 이 등신 같은 놈..."

그는 편지를 가슴에 품고 오열했다.
병실이 떠나가라 울었다.
살아남은 기쁨보다, 그녀에게 준 상처가 더 아파서.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이제는 평생 목숨 걸고 사랑해야겠다는 다짐 때문에.

그는 링거 바늘을 확 뽑아버렸다.
피가 튀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가야 했다.
가서 말해줘야 했다.
네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이제 내가 너의 꿈을 지켜주겠다고.

그는 환자복 바람으로 병실을 뛰쳐나갔다.

9화: 젖은 편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기습적인 소나기였다.
재현은 환자복 차림에 슬리퍼만 신은 채 병원 로비를 가로질러 회전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닥이 미끄러워 몇 번이나 휘청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환자분! 어디 가세요! 지금 나가시면 안 됩니다!"

뒤에서 간호사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지만, 빗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흩어졌다.
차가운 빗방울이 사정없이 온몸을 때렸다.
얇은 환자복은 순식간에 젖어 살가죽에 차갑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안도감이었고, 동시에 뼈저린 후회였다.

'강수아... 바보 같은 강수아.'

손에 꽉 쥐어진 편지가 빗물에 젖을까 봐, 그는 품속 깊이 그것을 감췄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오진이었다는 의사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웅웅거렸다.
뇌종양이 아니라, 뇌하수체에 생긴 단순 염증 물혹.
약물 치료와 간단한 시술이면 완치될 수 있다는 그 허무한 진단.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다는 기쁨보다, 그동안 수아가 흘렸던 눈물과 포기해버린 것들에 대한 죄책감이 더 크게 밀려왔다.

택시 승강장에는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미친 듯이 손을 흔들었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눈을 찔렀다.
누가 봐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지금 그에게 남들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택시! 제발!"

겨우 멈춰 선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그를 힐끔거렸다.
물 뚝뚝 떨어지는 병원복에 맨발에 가까운 슬리퍼 차림.
영락없는 탈출 환자였다.

"저기... 손님. 돈은 있으쇼? 상태가 좀 거시기한데."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제발 빨리만 가주세요. 성산동이요. 사람 목숨이 달렸어요."

사람 목숨.
그래, 이번엔 내 목숨이 아니라 네 목숨이다.
네가 나를 살리겠다고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그 찬란한 시간들, 그 꿈들.
그게 나한테는 내 목숨보다 무거운 짐이고, 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벅찬 사랑이었다.

택시가 빗길을 질주하는 동안, 재현은 젖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수아의 글씨가 꾹꾹 눌러 담긴 편지 내용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죽으면 따라 죽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
그리고 나를 위해 모든 걸 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그 바보 같은 고백.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다려, 강수아. 이번엔 내가 너 살리러 간다.'


나는 자취방 옥상 평상에 앉아 깡소주를 까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처량하게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좁은 방 안에 들어가면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편의점 파라솔 아래 쭈그리고 앉아,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소리를 안주 삼아 쓴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캬... 쓰다. 인생 참 더럽게 쓰네."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찌릿한 통증을 줬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뚫린 구멍은 채워지지 않았다.

논문 포기.
지도 교수의 저주에 가까운 폭언.
사실상 학교 자퇴.
통장 잔고 37만 2천 원.
그리고... 이 모든 걸 감수하고 얻어낸 결과가 '해피엔딩'이라서 느껴지는 묘한 쪽팔림.

재현 오빠가 살아서 너무 다행인데.
오진이라는 소식을 듣고 병원 복도에서 주저앉아 펑펑 울 만큼 기뻤는데.
막상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인생은 시궁창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고졸 백수나 다름없었다.

'이제 뭐 해 먹고살지?'

다시 카페 알바를 구해야 하나.
아니면 교수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빌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고향 내려가서 엄마랑 고추 농사나 지을까.
비참함이 빗물처럼 차올랐다.

그때였다.
옥상 철문이 콰앙! 하고 거칠게 열렸다.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강수아!"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거칠고, 절박하게 갈라진 목소리.
나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소주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그랑, 유리 조각이 빗물 웅덩이 위로 튀었다.

"재... 현 오빠?"

그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얇은 환자복은 비에 푹 젖어 속살이 다 비쳤고, 머리카락은 미역처럼 얼굴에 달라붙어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입술은 추위로 파랗게 질려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오빠! 미쳤어? 방금 시술 날짜 잡은 사람이 비를 맞으면 어떡해! 뇌에 물 차면 책임질 거야?"

나는 쓰고 있던 우산을 집어 던지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의 팔을 잡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 날씨에, 이 몸으로 여기까지 뛰어온 건가.

"빨리 들어가! 왜 이러고 왔어! 전화하지!"

"너 때문이잖아."

그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기도 했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그의 속눈썹에 맺혀 있었다.

"왜 말 안 했어."

"뭐, 뭘?"

"논문. 학교. 다 포기한 거. 교수한테 찍혀서 사실상 제적당한 거. 왜 말 안 했냐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준호 오빠가 말했나? 그 입 가벼운 인간이 기어이 불었구나.
나는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거... 별거 아니야. 어차피 교수님이랑 안 맞아서 그만두려던 참이었어. 나 원래 공부 체질 아니잖아."

"거짓말."

재현 오빠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닐봉지에 꽁꽁 싸여 있어 젖지 않은, 꼬깃꼬깃한 편지봉투였다.
내 눈이 커졌다.

"그거... 내가 버린 건데..."

"가방 정리하다가 나왔어. 네가 나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 쓴 유서."

"아, 아니야! 그거 그냥 감성 터져서 쓴 소설이야! 내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새벽 감성에 취해 썼다가 차마 주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아둔 편지였다.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나는 편지를 뺏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재현 오빠는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젖은 몸으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수아야."

비릿한 빗물 냄새.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그리고 그 아래 숨겨진 재현 오빠의 뜨거운 체온.
그의 심장이 내 가슴을 쿵쿵 때렸다.
그 박동이 너무나 선명해서, 그가 살아있다는 게 새삼 실감 났다.

"미안해. 나 살리겠다고 네 인생 망가진 거... 몰랐어. 나만 살면 다 되는 줄 알았어.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오빠..."

"근데 나 이제 안 미안해할 거야."

그가 나를 품에서 떼어내고, 내 어깨를 꽉 잡았다.
빗물에 젖은 그의 얼굴이 비장했다.

"나 돈 많아."

"...어?"

갑작스런 돈 자랑에 흐르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이 심각한 분위기에 돈 얘기가 왜 나와?
뇌에 물이 찬 건가?

"나 대기업 과장이야. 연봉도 세고, 주식 해둔 것도 있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오피스텔도 있어. 아까 말했지? 유산 정리해둔 거. 내 사망 보험금까지 싹 다 계산해 봤어."

"그니까 그게 왜..."

"그거 다 너 써."

"뭐?"

"내가 너 책임진다고. 네가 나 때문에 포기한 2년? 내가 20년으로 갚아줄게. 유학 가고 싶으면 가. 박사 하고 싶으면 해. 내가 학비, 생활비, 품위 유지비, 그리고 네가 마시는 커피값까지 싹 다 대줄게."

그는 마치 프러포즈하듯,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죽음을 준비하면서 모아둔 돈이야. 원래는 장례비랑 준호한테 남길 유산이었어. 근데 이제 안 죽으니까, 이 돈은 너를 위해 쓸 거야. 나를 이용해, 수아야. 내가 너의 장학재단이고, 네 물주야.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 쪽팔려 하지도 마. 네가 한 희생, 내가 평생 호강으로 갚을 거니까."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로맨틱한 건지, 현실적인 건지, 웃긴 건지 모를 고백.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기에.
죽음을 준비하며 정리했던 그 모든 무게를, 이제는 삶을 위해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바보야...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해?"

"응. 자랑이야. 나 능력 있는 남자야. 그러니까 나 믿고 다시 시작해."

재현 오빠가 젖은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투박한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빗속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논문 다시 써. 교수님이 안 받아주면 내가 가서 무릎이라도 꿇을게. 아니면 학교를 사버리든가. 이사회에 기부금이라도 낼게."

"푸흡."

결국 울음 끝에 웃음이 터졌다.
학교를 산다니. 과장 월급으로 택도 없는 소리지만, 그 허세가 너무 고마웠다.

"알았어. 안 도망갈게. 오빠 등골 다 빼먹을 거야. 각오해."

"그래. 다 빼먹어라. 뼛골까지 다 줄게."

그가 다시 나를 안았다.
이번엔 부드럽게, 그리고 깊게.
빗속에서의 키스는 차갑고도 뜨거웠다.
내 입술에 닿는 빗물이 짠지, 내 눈물이 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더 이상 비참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꽉 끌어안고 빗속에 서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불행을 씻어내려는 듯이.

"근데 오빠."

"응?"

"오빠 지금 환자복 입고 무단 외출한 거 알지? 병원에서 난리 났을 텐데."

"......아."

재현 오빠가 그제야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봤다.
비에 젖어 착 달라붙은 환자복 바지.
그리고 흙투성이가 된 맨발의 슬리퍼.
현실 자각 타임이 온 듯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준호한테 전화해. 차 가지고 오라고."

"준호 오빠가 알면 또 난리 칠 텐데. 환자 관리 안 하고 뭐 했냐고."

"몰라. 배째라지. 우린 이제 시한부도 아닌데 뭐. 욕 좀 먹으면 어때, 오래 살고 좋지."

우리는 빗속에서 낄낄거리며 웃었다.
비극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뻔뻔하고 즐거운, 로맨틱 코미디의 시작이었다.


[1년 후]

대학교 졸업식장.
겨울의 끝자락이라 아직 바람이 쌀쌀했지만, 캠퍼스는 학사모를 쓴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꽃다발을 든 인파 사이로 말끔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뛰어왔다.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와 환한 미소.
1년 전, 죽을상으로 빗속을 달렸던 그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 넘치는 강재현이었다.

"수아야! 여기!"

그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석사 가운을 입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축하해, 우리 수아! 드디어 해냈네!"

"내려줘! 사람들 다 봐!"

"보라지 뭐. 내 여자친구가 드디어 석사 학위 땄다는데! 내가 다 자랑스럽다!"

그는 나를 내려놓고 내 볼에 쪽 소리 나게 뽀뽀했다.
주변에서 환호성과 야유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 진짜. 공공장소에서 뭐 하는 짓들이냐. 눈 썩겠다, 눈 썩어."

뒤에서 투덜거리는 익숙한 목소리.
준호 오빠였다.
그는 자기 몸집만 한 커다란 꽃다발을 내밀며 툴툴거렸다.

"야, 강수아. 졸업 축하한다. 이제 오빠 등골 그만 빼먹고 돈 좀 벌어라. 나 언제까지 이 꼴 보고 살아야 되냐."

"고마워, 오빠. 근데 나 박사 할 건데?"

"뭐? 야! 강재현! 네가 얘 좀 말려봐! 공부 귀신 붙었냐? 석사도 징글징글한데 박사를 또 한다고?"

"왜? 하라고 해. 내가 대준다고 했잖아. 수아 하고 싶은 거 다 해."

재현 오빠가 내 어깨를 감싸며 으쓱했다.
준호 오빠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저 호구 새끼. 사랑에 눈이 멀어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네. 야, 너네 그냥 결혼이나 해라. 내가 축의금 대신 사회 봐줄 테니까."

"부러우면 너도 연애하든가."

"안 해! 너네 꼴 보니까 더 하기 싫다! 연애하면 다 바보 되는 줄 알아?"

우리는 졸업식장 잔디밭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준호 오빠가 투덜대면서도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나와 재현 오빠는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자, 찍는다! 하나, 둘, 셋!"

"김치!"

찰칵.
사진 속 우리는 빛나고 있었다.
1년 전, 오진 소동으로 울고불고했던 기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재현 오빠의 머릿속에 있던 물혹은 간단한 시술로 제거되었고, 그는 다시 건강해져 회사에 복직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교수님을 찾아가 사정사정하고(물론 재현 오빠가 양주를 사 들고 같이 가서 거들었다), 밤새 논문을 다시 쓰고, 결국 심사에 통과했다.

"수아야."

사진을 다 찍고 짐을 정리하는데, 재현 오빠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진지했다.

"응?"

"이거."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벨벳 소재의 짙은 남색 상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설마.

"졸업 선물이야."

그가 상자를 열었다.
심플하지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

주변의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직 재현 오빠의 목소리만 들렸다.

"6개월 시한부일 때도 나 사랑해 줬잖아. 도망갈 기회를 줬는데도 내 옆에 남았잖아. 이제 유효기간 없는 평생 계약으로 갱신하자."

그의 눈빛은 1년 전, 카페에서 처음 고백하던 그날처럼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건, 이제 그 눈빛 속에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직 확신과 우리가 함께할 미래만이 가득했다.

나는 슬쩍 준호 오빠를 쳐다봤다.
준호 오빠는 "어휴, 닭살 돋아. 빨리 받아라. 나 배고프다. 뷔페 예약 시간 다 됐다."라며 딴청을 피웠다.
이미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다 들어줄게. 별 따다 달라고 하면 우주선이라도 빌려올게."

"아프지 마. 내 허락 없이 아프면, 그땐 진짜 국물도 없어. 또 시한부니 뭐니 하면서 내 속 뒤집어놓으면, 그땐 진짜 도망갈 거야."

"약속할게. 네가 꼬부랑 할머니 될 때까지, 지팡이 짚고 다닐 때까지 건강하게 옆에 있을게."

그가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딱 맞았다.
마치 처음부터 내 자리였던 것처럼.

"사랑해, 수아야."

"나도 사랑해, 오빠."

우리는 캠퍼스의 벚꽃 나무 아래서 키스했다.
바람이 불어 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오빠는 모르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오빠도 다 아는 사랑으로, 그리고 이제는 세상 모두가 아는 사랑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사랑에는 이제 마감 기한도, 숨겨야 할 비밀도 없다.
그저 매일매일 더 깊어질 내일만 있을 뿐이다.

[완결]

4화: 도망치지 않는 여자

"수, 수아야..."

재현 오빠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내 손아귀에 잡힌 그의 환자복 깃이 구겨졌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물러서면, 이 남자는 정말로 내 인생에서 증발해버릴 테니까.
착한 오빠 친구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혼자 썩어문드러지다 죽어버릴 테니까.

"말해. 실수였다고? 연애 놀음해보고 싶었다고?"

나는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

"그럼 끝까지 해. 죽는 순간까지 나 데리고 놀아보라고. 왜, 그건 겁나?"

"너한테 상처 주기 싫어서 그래! 내가 어떻게..."

"상처? 지금 오빠가 하는 짓이 난도질이야. 차라리 나랑 놀다가 질려서 버려. 아파서, 죽을병 걸려서 헤어지는 거? 그딴 삼류 드라마 같은 핑계 대지 말고!"

내 고함에 재현 오빠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항상 어른스러운 척, 여유로운 척하던 남자가 내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무서워..."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너를... 사랑하게 될까 봐 무서워. 아니, 이미 사랑해서 미치겠는데... 널 두고 가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래."

그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툭. 투둑.
내 손등 위로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네가 내 옆에서 시들어가는 거 보기 싫어. 병수발들다가 네 청춘 다 날리는 거 싫다고. 준호 볼 면목도 없고..."

"준호 오빠가 문제야? 오빠가 죽는데 그게 대수냐고!"

나는 잡고 있던 멱살을 놓지 않은 채, 그대로 그를 당겼다.
아니, 내가 그에게 무너져 내렸다.

우리의 입술이 거칠게 부딪쳤다.
로맨틱한 첫 키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로의 치아가 부딪쳐 딱, 소리가 났고, 입술이 터져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건 싸움에 가까웠다.
절망에 대한 시위였고, 죽음에 대한 저항이었다.

"으음..."

재현 오빠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내 허리를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참아왔던 욕망과 슬픔이 댐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서로의 눈물을 마시며 키스했다.
짜고, 비리고, 뜨거웠다.
그 순간만큼은 병실의 소독약 냄새도,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서로의 심장 소리만이 고막을 때렸다.

한참 뒤, 입술이 떨어졌다.
우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이마를 맞댔다.

"후회할 거야."

그가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중에 나 원망할 거야, 수아야."

"응. 원망할게. 그러니까 6개월 꽉 채워. 하루라도 모자라면 저승까지 쫓아가서 괴롭힐 거니까."

재현 오빠가 픽, 하고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약속해. 도망가지 않겠다고."

"...노력할게."

"노력 말고, 약속."

내가 채근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네 허락 없이는 안 죽어."


재현 오빠가 잠들었다.
진통제와 진정제 성분 때문인지, 격렬했던 감정 소모 탓인지 그는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창백한 얼굴.
감은 눈 밑으로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이 보였다.

그때였다.
내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화들짝 놀라 재현 오빠를 살폈다. 다행히 깨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병실 밖으로 나갔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현실이 찬물처럼 끼얹어졌다.

[지도교수님]

숨이 턱 막혔다.
지금 시각, 오후 4시.
오늘까지 수정된 논문 초안을 보내지 않으면 심사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교수의 엄포가 떠올랐다.

"여, 여보세요."

  • 강수아! 너 지금 어디야?

수화기 너머로 교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 내가 4시까지 연구실로 오라고 했어, 안 했어? 네가 지금 논문 통과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급한 사정이 생겨서..."

  • 사정? 무슨 사정? 집안에 초상이라도 났어? 내가 네 사정 봐주려고 주말에 학교 나온 줄 알아? 너 이번에 심사 못 받으면 수료야. 알지?

교수의 비아냥거림이 비수처럼 꽂혔다.
등록금.
그 돈을 마련하려고 뼈 빠지게 카페 알바를 했다.
논문 쓰면서 코피 쏟아가며 버텼다.
이것만 통과하면, 석사 학위만 받으면 취업해서 빚도 갚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나는 병실 문에 난 작은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재현 오빠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언제 다시 발작을 일으킬지 모르는 시한폭탄.

'지금 가면...'

택시를 타고 날아가면 30분.
가서 무릎 꿇고 빌면 기회는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 재현 오빠는?
내가 도서관에 처박혀 논문을 쓰는 동안, 그는 혼자 병실에서 시들어갈 것이다.

나의 2년 vs 강재현의 6개월.
저울질할 필요도 없었다.
학위는 내년에도 받을 수 있다.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강재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 야, 강수아. 듣고 있어? 지금 당장 튀어와. 안 그러면 너...

나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교수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또박또박 말을 끊었다.

  • 뭐?

"죄송합니다. 못 갑니다."

  • 뭐,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야? 너 이거 포기하면...

"네. 포기하겠습니다. 이번 학기 논문 심사, 안 받겠습니다."

  • 야! 너 진짜 후회 안 해? 내가 너 다시 받아줄 것 같아?

"죄송합니다. 저한테는 논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요."

뚝.
전화가 끊겼다.
나는 멍하니 꺼진 화면을 내려다봤다.
끝났다. 나의 대학원 생활도, 2년의 노력도.
허무함에 다리가 풀릴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후련했다.
나는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화면이 까맣게 꺼졌다.
이제 세상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잠든 그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 백수 됐다, 오빠. 그러니까 책임져. 남은 시간 동안 1분 1초도 빼놓지 말고 나 사랑해 줘."

그때, 재현 오빠가 눈을 떴다.
초점이 몽롱한 눈이 나를 찾았다.

"수아...?"

"응. 나 여기 있어."

"어디... 안 갔어?"

"안 가. 아무 데도 안 가."

그가 안도한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꿈인 줄 알았어."

"꿈 아니야. 현실이야."

나는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오빠, 퇴원하자."

"뭐? 의사 선생님이..."

"통원 치료하겠다고 해. 나랑 같이 있으면 되잖아. 오빠 집에서."

"우리 집?"

"응. 오빠 혼자 두면 불안해서 안 되겠어. 내가 옆에 있을게. 동거하자."

재현 오빠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의 시한부 신혼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밤, 재현 오빠의 오피스텔.
짐을 대충 풀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재현 오빠는 약 기운에 취해 먼저 잠들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준호 오빠에게는 "친구 집에서 논문 때문에 며칠 지낸다"고 거짓말을 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준호 오빠는 재현 오빠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시한폭탄.

띠띠띠띠.

갑자기 도어락 키패드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심장이 멈췄다.
설마. 벌써?

띠리릭.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강재현! 형이 치킨 사 왔다!"

Batch 3 (Final): 7화~10화

7화: 마지막 편지

응급실 앞 복도는 지독하게 길고 차가웠다.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간간이 들리는 기계음이 신경을 긁었다.
준호 오빠는 벽에 머리를 박고 서 있었다. 그의 주먹 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때려서..."

준호 오빠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수술실 문 위에 켜진 붉은 등, '수술 중'이라는 글자만 멍하니 바라봤다.
목구멍이 꽉 막혀 침도 넘어가지 않았다.

'뇌압이 너무 높습니다. 뇌간 압박이 심해서...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의사의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고비.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해. 저 새끼 안 죽어. 저렇게 끈질긴 놈이 널 두고 어떻게 죽어."

준호 오빠가 억지를 부리듯 소리쳤지만, 그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기적은 드라마에나 있다는 것을. 현실은 잔혹하고, 예고 없이 소중한 것을 앗아간다는 것을.

나는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어제오늘, 재현 오빠가 잠들었을 때 몰래 썼던 편지였다.
혹시나 그가 갑자기 떠나버릴까 봐.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보낼까 봐.
전하지 못한 말들을 꾹꾹 눌러 담은, 유서 같은 연서.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흔해 빠진 말들이지만, 그에게만은 닿기를 바라며 쓴 글자들.
이걸 그에게 직접 읽어줄 수 있을까.
아니면 차가운 그의 가슴 위에 올려두어야 할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영겁 같은 침묵 속에서 붉은 등이 꺼졌다.
철문이 열리고,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가 나왔다.
마스크를 벗는 그의 표정이 묘했다. 심각하다기보다는... 무언가 당혹스러워 보였다.

"보호자분."

나와 준호 오빠가 동시에 달려갔다. 다리가 풀릴 뻔한 것을 억지로 버텼다.

"어떻게 됐습니까? 살았나요?"

준호 오빠가 의사의 팔을 잡을 듯이 다가섰다.
의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짧은 침묵이 내 숨통을 조였다.

"일단 고비는 넘겼습니다."

"하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준호 오빠가 급히 나를 부축했다.

"뇌압을 낮추는 배액술을 시행했고, 호흡도 안정적으로 돌아왔습니다. 중환자실로 옮길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살았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이별할 때가 아니다. 신이 우리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었다.

"그런데..."

의사가 말을 흐렸다. 안도감에 젖어 있던 우리는 다시 긴장했다. 의사의 미간이 좁혀졌다.

"뭔가 이상합니다."

"네? 뭐가요? 또 안 좋아졌나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영상 자료와 실제 환자 상태가 매칭이 안 됩니다."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차트와 태블릿 PC를 번갈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분명 이전 병원 MRI 소견으로는 교모세포종이 뇌간을 침범해서 수술 불가 판정이 났었는데... 이번에 뇌압을 낮추면서 정밀 촬영을 다시 해보니, 종양의 경계가 너무... 깨끗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악성 종양은 보통 경계가 불분명하고 주변 조직을 파고듭니다. 그런데 이건 마치 물주머니처럼 경계가 뚜렷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의사가 우리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종양 내부 밀도가 다릅니다. 이건 암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거대 지주막 낭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네?"

나와 준호 오빠는 서로를 쳐다봤다.
낭종? 물혹? 그건 암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확실한 건 조직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만약 낭종이라면, 간단한 제거 수술로 완치될 수 있습니다. 뇌압이 올라가서 일시적으로 쇼크가 온 것뿐이고요."

쿵.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완치? 6개월 시한부가 아니라, 완치?

"그럼... 오진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준호 오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전 병원에서 영상 판독에 오류가 있었거나, 아주 드문 케이스의 양성 종양일 수 있습니다. 일단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시죠. 하루 이틀이면 나옵니다."

의사가 떠나고, 우리는 멍하니 복도에 남겨졌다.
기뻐해야 하는데. 날아갈 듯 기뻐해야 하는데. 현실감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정보 처리가 되지 않았다.

"야... 강수아."

준호 오빠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들었냐? 물혹일 수도 있대. 물혹."

"어... 들었어."

"그럼 쟤 안 죽는 거야? 그냥 머리에 물찬 거야?"

"그렇... 겠지?"

준호 오빠가 갑자기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 보듯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하하! 미친! 머리에 물이 찼대! 야 이 돌대가리 새끼! 하하하!"

준호 오빠는 웃다가 다시 울었다. 벽을 치며 통곡하다가 다시 웃었다.
나도 따라 웃다가 울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의 근육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안도감 뒤에 숨어 있던, 아주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

'그럼... 내 휴학은? 내 논문은? 내 눈물은?'

지난 한 달간 지옥을 오갔던 내 감정 소모.
재현 오빠를 위해 포기했던 내 미래.
매일 밤 몰래 썼던 유서 같은 편지들.
죽어도 내 허락 받고 죽으라며 멱살 잡고 키스했던 그날.
동거하겠다고 짐 싸 들고 쳐들어갔던 어제.

이 모든 게... 해프닝이 되는 건가?

물론 재현 오빠가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하지만...

'쪽팔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귀까지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비련의 여주인공인 척, 세상 다 잃은 척 오열했던 나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게 만약 진짜 오진이라면.
나는 무슨 얼굴로 재현 오빠를 봐야 하지?

"수아야, 가자. 재현이 보러 가자."

준호 오빠가 내 손을 끌었다. 나는 엉거주춤 따라갔다.
주머니 속의 편지가 손끝에 닿았다.
바스락.
이 편지, 절대 보여주면 안 되겠다. 평생 무덤까지 가져가야겠다. 아니, 당장 불태워버려야겠다.

중환자실 유리창 너머로 재현 오빠가 보였다.
각종 기계 장치에 둘러싸여 잠든 모습.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지만,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희망'의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제발 물혹이어라. 제발 단순한 물혹이어라.'

나는 유리창에 손을 대고 기도했다.
그리고 동시에 기도했다. 제발 이 쪽팔림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때였다.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다급하게 나왔다.

"보호자분! 환자분 깨어나셨어요. 찾으시네요."

우리는 서둘러 환복하고 들어갔다.
재현 오빠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힘겹게 눈을 뜨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사람처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빛이었다.

"수... 아야..."

그가 떨리는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살아있는 온도였다.

"나... 이제... 가는 거야?"

그가 힘겹게 물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굳게 믿는 눈빛이었다.
그 비장함이 너무 진지해서,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아야 했다.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오빠 못 가."

"어...?"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오빠 머리에 물 찼대."

"......?"

재현 오빠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슬픔과 비장함이 깨진 자리에 황당함이 들어차는 그 멍청한 표정이 너무 사랑스럽고, 또 너무 얄미워서.
나는 그의 손등을 꼬집어주고 싶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비극의 막이 내리고, 희극의 막이 오를 차례였다.
물론, 그 희극이 나에게는 또 다른 비극(쪽팔림)의 시작일지라도.


8화: 기적, 혹은 코미디

"뭐...라고?"

재현 오빠가 산소마스크 안에서 벙어리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의 표정은 마치 외계인을 본 사람 같았다.
방금 전까지 삶의 끝자락에서 연인에게 작별을 고하던 비련의 남주인공은 온데간데없었다.

"물. 혹. 이라고. 낭종."

내가 또박또박 발음해주었다. 옆에 있던 준호 오빠가 킬킬거리며 거들었다.

"야, 강재현. 너 뇌종양 코스프레 그만해라. 쪽팔리게 뭐냐, 다 큰 남자가. 의사 쌤이 너 그냥 머리에 물찬 거래. 수술하면 땡이라던데?"

"거... 거짓말..."

재현 오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손을 꽉 쥐었다.
손아귀 힘이 셌다. 그래, 죽어가는 사람 힘이 아니지.

"진짜야? 나... 안 죽어?"

"응. 안 죽어. 조직 검사 결과 나와야 확실하다지만, 거의 99%래."

그 순간, 재현 오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번엔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안도감. 삶에 대한 벅찬 기쁨.
그는 마스크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다행이다... 흐윽... 진짜 다행이다... 수아야... 나 산대..."

그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찡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매일 밤 잠들 때마다 내일이 오지 않을까 봐 얼마나 떨었을까.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같이 울었다.

"그래. 다행이야. 진짜 고생했어."

우리는 셋이서 끌어안고 한참을 울고 웃었다.
중환자실 간호사가 와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른 환자분들 계세요"라고 제지할 때까지.


이틀 뒤.
일반 병실로 옮긴 재현 오빠는 빠르게 회복했다.
조직 검사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거대 지주막 낭종'.
선천적으로 있던 물주머니가 커지면서 뇌를 압박해 뇌종양과 유사한 증상을 일으켰던 것이다.
간단한 배액술만 받으면 완치된다고 했다.

"와, 진짜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네. 차트 바뀐 거 아니냐고 따졌더니 전 병원 영상 화질이 구려서 오독한 거래. 고소할까?"

준호 오빠가 사과를 깎으며 투덜거렸다.

"됐어. 살았으면 됐지. 액땜했다 치자. 나 원래 운 좋잖아."

재현 오빠는 침대에 앉아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죽다 살아난 사람 특유의 해탈한 표정이었다.
그는 나를 보며 꿀 떨어지는 눈빛을 보냈다.

"수아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오빠가 다 사줄게. 저기 병원 지하에 맛있는 거 많던데. 초밥 먹을래?"

"됐어. 입맛 없어."

나는 창밖만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재현 오빠가 당황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잘못한 거 없지. 아픈 게 죄는 아니니까.
근데...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지난 이틀간, 기쁨이 가라앉고 나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첫째, 휴학.
이미 지도교수한테 "논문 포기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전화까지 끊어버렸다. 다시 돌아가면 교수가 나를 받아줄까? 아니, 학교 문턱이라도 밟게 해줄까?

둘째, 통장 잔고.
알바도 그만두고 병간호에 올인했다. 이번 달 월세는? 생활비는?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쪽팔림.
'죽어도 내 허락 받고 죽어', '10년치 사랑 다 갚아'라며 멱살 잡고 키스했던 그날의 기억.
재현 오빠를 위해 유서 같은 편지를 쓰고, 오빠 앞에서 대성통곡했던 기억.
이 모든 게 '물혹' 하나로 코미디가 되어버렸다.

"수아야, 혹시... 나 안 죽어서 실망한 거야?"

재현 오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멍청한 질문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오빠 바보야? 내가 왜 실망을 해!"

"그럼 왜 그래... 나 살아서 너무 좋은데, 네가 안 웃어주니까 불안하잖아.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어?"

그는 내 손을 잡고 강아지처럼 비볐다.
죽을병 걸렸을 때의 그 치명적이고 비련미 넘치던 남주는 어디 가고, 그냥 눈치 없는 동네 오빠만 남아 있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 금방 와?"

"몰라. 찾지 마."

나는 가방을 챙겨 병실을 나왔다.
뒤에서 재현 오빠가 "수아야! 어디 가는데!"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이 쪽팔림에서, 그리고 대책 없는 내 현실에서.

병원 로비에 앉아 핸드폰을 켰다.
며칠 만에 켠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 스팸이나 카드값 독촉 문자였다.
그리고 지도교수의 문자 하나.

[너 진짜 안 올 거야? 오늘까지 기회 준다.]

문자 온 날짜를 보니 이미 3일 전이었다. 기회는 날아갔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쳤지, 강수아. 사랑에 눈이 멀어서 인생을 말아먹었구나.'

물론 후회는 안 한다. 재현 오빠가 살았으니까. 그깟 논문, 백 번이라도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돌아오니 막막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재현 오빠는 내 희생을 모른다. 그냥 내가 알바 좀 쉰 줄로만 안다.
말해봤자 부담만 줄 테고, 그렇다고 혼자 끙끙 앓자니 억울하고.

"하아..."

깊은 한숨을 쉬는데, 누군가 내 앞에 섰다. 준호 오빠였다.

"야. 너 왜 여기 있냐?"

"그냥. 답답해서."

준호 오빠가 내 옆에 앉았다. 그는 깎다 만 사과 조각을 내밀었다.

"먹어. 당 떨어진다."

"안 먹어."

"야, 솔직히 말해봐. 너 학교 어떡할 거냐?"

준호 오빠의 돌직구에 심장이 철렁했다.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네 교수한테 전화 왔었어. 집으로. 너 연락 안 된다고 난리더라. 휴학한다며?"

"......"

"재현이 때문이지?"

준호 오빠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바보 같은 기집애. 그런 건 말을 했어야지. 내가 가서 빌든 돈을 쓰든 했을 텐데."

"됐어. 이미 끝난 일이야. 다음 학기에 복학하면 돼."

"재현이한테는 말했냐?"

"아니. 말하지 마. 절대. 알면 또 자기 탓이라고 자책할 거야. 막 살아난 사람 스트레스 주기 싫어."

"그럼 넌? 넌 괜찮고?"

"난... 괜찮아. 알바 다시 구하면 되고..."

말꼬리가 흐려졌다. 안 괜찮았다. 하나도 안 괜찮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오빠."

"어."

"나 당분간 잠수 탈래."

"뭐?"

"재현 오빠 얼굴 못 보겠어. 너무 좋고 다행인데... 내 꼬라지가 너무 비참해서 못 보겠어.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야, 너 도망가게? 재현이 이제 막 살았는데?"

"죽는 거 아니잖아. 물혹이라며. 수술받고 회복할 때까지만... 며칠만 안 볼래. 핑계는 오빠가 좀 대줘. 짐 가지러 집에 갔다고 하든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호 오빠가 잡으려다 말았다. 내 표정이 너무 단호해 보였나 보다.

"에휴. 알았다. 내가 알아서 둘러댈게. 대신 연락은 해라. 걱정하니까."

"고마워."

나는 병원을 나섰다. 햇살이 눈부셨다.
세상은 너무 평화로운데, 내 마음만 전쟁터였다.
나는 핸드폰을 다시 껐다. 그리고 무작정 걸었다.

이건 이별이 아니다. 재정비를 위한 작전상 후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병실에 두고 온 가방 속에, 재현 오빠에게 썼던 그 '마지막 편지'가 들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편지가, 우리 관계의 2막을 여는 열쇠가 될 줄은.


밤이 깊었다.
재현 오빠는 수아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 뻔했다.
준호가 "수아 집에 가서 좀 쉬다 온대. 며칠 걸릴 거야"라고 했지만, 영 찜찜했다.
수아의 표정이 어두웠다. 자신이 살아난 게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내가 뭘 잘못했나? 너무 눈치 없이 굴었나?'

그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수아의 가방을 보았다.
수아가 급하게 나가느라 두고 간 에코백이었다.
가져다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무심코 가방 끈 사이로 삐져나온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편지봉투였다.
겉면에 [재현 오빠에게]라고 적힌, 꼬깃꼬깃한 봉투.

"이게 뭐지?"

재현 오빠는 홀린 듯 봉투를 집어 들었다.
열어보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수아의 글씨체를 보는 순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오빠.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건, 오빠가 내 곁에 없다는 거겠지...]

첫 문장을 읽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유서였다. 자신이 죽을 것을 대비해 쓴, 수아의 마지막 인사.

[오빠를 보내고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하지만 약속할게. 오빠 몫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논문도 포기하고, 학교도 그만두고 오빠 곁에 있었던 지난 시간들...
하나도 후회 안 해.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어.]

"......!"

재현 오빠의 눈이 커졌다.
논문 포기? 학교 그만둠?
그는 숨을 멈추고 다음 줄을 읽어 내려갔다.

[오빠가 내 논문 때문에 미안해할까 봐 말 안 했어.
사실 교수님이 오지 말라고 했을 때, 나 하나도 안 무서웠어.
오빠 없는 미래보다, 오빠 있는 현재가 나한텐 더 소중했으니까.
내 꿈은 박사가 되는 게 아니라, 강재현의 마지막 여자로 남는 거였으니까...]

종이 위로 눈물 자국이 번져 있었다. 수아가 울면서 썼을 글자들.
자신의 꿈을 송두리째 바쳐가며 지키려 했던 사랑.
그것도 모르고, 자기는 살았다고 희희낙락하며 "초밥 먹을래?" 따위의 소리나 했다니.

"아..."

재현 오빠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수아가 왜 도망쳤는지, 왜 웃지 못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보 같은 놈... 강재현, 이 등신 같은 놈..."

그는 편지를 가슴에 품고 오열했다. 병실이 떠나가라 울었다.
살아남은 기쁨보다, 그녀에게 준 상처가 더 아파서.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이제는 평생 목숨 걸고 사랑해야겠다는 다짐 때문에.

그는 링거 바늘을 확 뽑아버렸다.
피가 튀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가야 했다.
가서 말해줘야 했다.
네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이제 내가 너의 꿈을 지켜주겠다고.

그는 환자복 바람으로 병실을 뛰쳐나갔다.


9화: 젖은 편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소나기였다.
재현 오빠는 환자복 차림에 슬리퍼만 신은 채 병원 로비를 가로질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환자분! 어디 가세요! 나가시면 안 됩니다!"

간호사의 외침이 뒤따랐지만 들리지 않았다.
차가운 빗방울이 온몸을 때렸다. 금세 옷이 젖어 살에 달라붙었다.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강수아... 바보 같은 강수아.'

손에 꽉 쥐어진 편지가 빗물에 젖을까 봐, 그는 품속 깊이 그것을 감췄다.
택시 승강장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도로로 뛰어들어 손을 흔들었다.
미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상관없었다.

"아저씨! 성산동이요! 제발 빨리요!"

겨우 잡은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그를 힐끔거렸다.
병원복에 맨발에 가까운 슬리퍼 차림. 누가 봐도 병원에서 탈출한 정신 나간 환자였다.

"저기... 손님. 돈은 있으쇼?"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제발 빨리만 가주세요. 사람 목숨이 달렸어요."

사람 목숨.
그래, 이번엔 내 목숨이 아니라 네 목숨이다.
네가 포기해버린 그 시간들, 그 꿈들.
그게 나한테는 내 목숨보다 무거운 짐이고, 또 사랑이었다.


나는 자취방 옥상 평상에 앉아 깡소주를 까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 처량하게 뭐 하는 짓인가 싶지만, 방 안에 들어가면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편의점 파라솔 아래 쭈그리고 앉아 빗소리를 안주 삼아 쓴 소주를 넘겼다.

"캬... 쓰다. 인생 참 쓰다."

논문 포기. 학교 자퇴. 통장 잔고 37만 원.
그리고 쪽팔림.

재현 오빠가 살아서 너무 다행인데. 하늘을 날아갈 듯 기쁜데.
동시에 내 인생은 시궁창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이제 뭐 해 먹고살지?'

다시 알바를 구해야 하나. 교수님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 하나.
아니면 고향 내려가서 농사나 지을까.

그때였다. 옥상 철문이 쾅, 하고 열렸다.

"강수아!"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거칠고, 절박한 목소리.
나는 들고 있던 소주잔을 떨어뜨렸다.

"재... 현 오빠?"

그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얇은 환자복은 비에 젖어 속이 다 비쳤고, 머리카락은 미역처럼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입술은 추위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오빠! 미쳤어? 방금 수술한 사람이 비를 맞으면 어떡해!"

나는 우산을 집어 던지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의 팔을 잡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빨리 들어가! 왜 이러고 왔어!"

"너 때문이잖아."

그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의 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왜 말 안 했어."

"뭐, 뭘?"

"논문. 학교. 다 포기한 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준호 오빠가 말했나? 입 가벼운 인간.
나는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거... 별거 아니야. 어차피 교수님이랑 안 맞아서 그만두려던 참이었어."

"거짓말."

재현 오빠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닐봉지에 싸여 있어 젖지 않은, 꼬깃꼬깃한 편지봉투.
내 눈이 커졌다.

"그거... 내가 버린 건데..."

"가방에 있었어. 네가 나한테 쓴 유서."

"아, 아니야! 그거 그냥 감성 터져서 쓴 소설이야! 내놔!"

나는 편지를 뺏으려 손을 뻗었다.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재현 오빠는 내 손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수아야."

빗물 냄새. 소독약 냄새. 그리고 재현 오빠의 체온.
그의 심장이 내 가슴을 쿵쿵 때렸다.

"미안해. 나 살리겠다고 네 인생 망가진 거... 몰랐어. 나만 살면 다 되는 줄 알았어."

"오빠..."

"근데 나 이제 안 미안해할 거야."

그가 나를 품에서 떼어내고, 내 어깨를 꽉 잡았다.
빗물에 젖은 그의 얼굴이 진지했다.

"나 돈 많아."

"...어?"

갑작스런 돈 자랑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이 분위기에 돈 얘기가 왜 나와?

"나 대기업 과장이야. 연봉도 세고, 주식 해둔 것도 있고, 부모님이 물려주신 오피스텔도 있어. 아까 말했지? 유산 정리해둔 거."

"그니까 그게 왜..."

"그거 다 너 써."

"뭐?"

"내가 너 책임진다고. 네가 포기한 2년? 내가 20년으로 갚아줄게. 유학 가고 싶으면 가. 박사 하고 싶으면 해. 내가 학비, 생활비, 품위 유지비까지 싹 다 대줄게."

그는 마치 프러포즈하듯 비장하게 말했다.

"나를 이용해, 수아야. 내가 너의 장학재단이고, 네 물주야.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 쪽팔려 하지도 마. 네가 한 희생, 내가 평생 호강으로 갚을 거니까."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로맨틱한 건지, 현실적인 건지, 웃긴 건지 모를 고백.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기에.
죽음을 준비하며 정리했던 그 모든 것을, 이제는 삶을 위해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바보야...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해?"

"응. 자랑이야. 나 능력 있는 남자야. 그러니까 나 믿고 다시 시작해."

재현 오빠가 젖은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논문 다시 써. 교수님이 안 받아주면 내가 가서 무릎이라도 꿇을게. 아니면 학교를 사버리든가."

"푸흡."

결국 웃음이 터졌다.
학교를 산다니. 과장 월급으로 택도 없는 소리지만, 그 허세가 너무 고마웠다.

"알았어. 안 도망갈게. 오빠 등골 다 빼먹을 거야. 각오해."

"그래. 다 빼먹어라. 뼛골까지 다 줄게."

그가 다시 나를 안았다. 이번엔 부드럽게, 그리고 깊게.
빗속에서의 키스는 차갑고도 뜨거웠다.
내 입술에 닿는 빗물이 짠지, 내 눈물이 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더 이상 비참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근데 오빠."

"응?"

"오빠 지금 환자복 입고 무단 외출한 거 알지?"

"......아."

재현 오빠가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봤다.
비에 젖어 착 달라붙은 환자복 바지. 그리고 맨발의 슬리퍼.

"준호한테 전화해. 차 가지고 오라고."

"준호 오빠가 알면 또 난리 칠 텐데."

"몰라. 배째라지. 우린 이제 시한부도 아닌데 뭐."

우리는 빗속에서 낄낄거리며 웃었다.
비극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뻔뻔하고 즐거운, 로맨틱 코미디의 시작이었다.


10화: 오빠는 (이제 다) 아는 사랑

[1년 후]

대학교 졸업식장.
학사모를 쓴 사람들 사이로 꽃다발을 든 남자가 뛰어왔다.
말끔한 슈트 차림.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와 환한 미소.
강재현이었다.

"수아야! 여기!"

그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석사 가운을 입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한 바퀴 돌았다.

"축하해, 우리 수아! 드디어 해냈네!"

"내려줘! 사람들 봐!"

"보라지 뭐. 내 여자친구가 석사 학위 땄다는데!"

그는 나를 내려놓고 내 볼에 쪽 소리 나게 뽀뽀했다.
주변에서 환호성과 야유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아, 진짜. 공공장소에서 뭐 하는 짓들이냐."

뒤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 준호 오빠였다.
그는 커다란 꽃다발을 내밀며 툴툴거렸다.

"야, 강수아. 졸업 축하한다. 이제 오빠 등골 그만 빼먹고 돈 벌어라."

"고마워, 오빠. 근데 나 박사 할 건데?"

"뭐? 야! 강재현! 네가 얘 좀 말려봐! 공부 귀신 붙었냐?"

"왜? 하라고 해. 내가 대준다고 했잖아."

재현 오빠가 내 어깨를 감싸며 으쓱했다.
준호 오빠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휴, 저 호구 새끼. 사랑에 눈이 멀어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네."

"부러우면 너도 연애하든가."

"안 해! 너네 꼴 보니까 더 하기 싫다!"

우리는 졸업식장 잔디밭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준호 오빠가 카메라를 들고, 나와 재현 오빠가 포즈를 취했다.

"자, 찍는다! 하나, 둘, 셋!"

"김치!"

찰칵.
사진 속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환하게 웃고 있었다.
1년 전, 죽음의 문턱에서 울고불고했던 기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재현 오빠의 머릿속에 있던 물혹은 간단한 시술로 제거되었다.
그는 다시 건강해졌고, 회사에 복직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교수님을 찾아가 사정사정하고(물론 재현 오빠가 같이 가서 거들었다), 밤새 논문을 다시 쓰고, 결국 심사에 통과했다.

"수아야."

사진을 다 찍고 짐을 정리하는데, 재현 오빠가 나를 불렀다.

"응?"

"이거."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반지 상자였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졸업 선물이야."

그가 상자를 열었다.
심플하지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

"6개월 시한부일 때도 나 사랑해 줬잖아. 이제 유효기간 없는 평생 계약으로 갱신하자."

그의 눈빛은 1년 전, 카페에서 고백하던 그날처럼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건, 이제 그 눈빛 속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직 확신과 미래만이 가득했다.

나는 준호 오빠를 쳐다봤다.
준호 오빠는 "어휴, 닭살 돋아. 빨리 받아라. 나 배고프다."라며 딴청을 피웠다.
이미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다 들어줄게."

"아프지 마. 내 허락 없이 아프면, 그땐 진짜 국물도 없어."

"약속할게. 네가 꼬부랑 할머니 될 때까지 건강하게 옆에 있을게."

그가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딱 맞았다. 마치 처음부터 내 자리였던 것처럼.

우리는 캠퍼스의 벚꽃 나무 아래서 키스했다.
바람이 불어 꽃잎이 흩날렸다.
오빠는 모르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오빠도 다 아는 사랑으로, 그리고 이제는 세상 모두가 아는 사랑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사랑에는 이제 마감 기한도, 비밀도 없다.
그저 매일매일 더 깊어질 내일만 있을 뿐이다.

[완결]

6화: 우리들의 시한부

거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준호 오빠는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재현 오빠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방금 들은 말이 한국어가 맞는지 해석하려는 사람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뭐...라고?"

"뇌종양이라고. 길어야 6개월이래."

내가 다시 한번 확인 사살을 했다.
준호 오빠의 시선이 내 얼굴과 재현 오빠의 피 묻은 입가를 번갈아 오갔다.
분노로 시뻘게졌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해갔다.

"거짓말이지? 야, 강재현. 너 지금 내 동생이랑 짠 거지? 어? 나 속이려고 몰카 찍는 거지?"

준호 오빠가 억지로 웃음을 터뜨리며 재현 오빠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재현 오빠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침묵이 긍정이었다.

"야! 말 좀 해봐, 새끼야! 아니라고 하라고!"

"미안하다, 준호야."

재현 오빠의 낮은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너한테... 이런 모습 보이기 싫었어."

그 한마디에 준호 오빠의 억지 웃음이 깨져버렸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미친 새끼야... 뇌종양이 뭐냐, 뇌종양이... 우리가 술을 얼마나 처마셨는데... 넌 건강검진도 안 하냐?"

준호 오빠는 재현 오빠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동네방네 다 들릴 정도로 서럽게 울었다.
재현 오빠도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준호 오빠의 등을 토닥였다.
피 섞인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된, 세상에서 제일 못생기고 슬픈 브로맨스였다.

한참을 울던 준호 오빠가 코를 팽 풀고는 나를 노려봤다.
눈이 퉁퉁 부어 붕어 같았다.

"야, 강수아. 짐 싸."

"어?"

"짐 싸라고. 여기서 살 거야? 얘 수발들 거야?"

"어. 그럴 거야. 나 아니면 누가 해?"

내 단호한 대답에 준호 오빠가 입술을 깨물었다.
반대할 줄 알았다.
아픈 사람 곁에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까, 오빠로서 말리고 싶겠지.
하지만 준호 오빠는 내 예상과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나도 여기서 산다."

"뭐?"

"너 혼자 어떻게 감당해. 나도 있을 거야. 내 친구 가는 길, 내가 지킬 거야."

그렇게 기묘한 세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시한부 환자, 그의 여자친구, 그리고 눈치 없는 처남(진).


재현 오빠는 휴직계를 냈다.
우리는 남은 시간을 병원과 집을 오가며 보냈다.
항암 치료 대신 통증 완화 치료를 선택했다.
의미 없는 연명보다, 우리끼리의 추억을 쌓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어느 날 밤, 우리는 거실에 모여 앉아 치킨을 뜯고 있었다.
물론 재현 오빠는 닭가슴살 샐러드였지만.

"자, 써봐. 버킷리스트."

준호 오빠가 스케치북과 매직을 던져줬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거 다 적어. 형이 다 해준다. 돈은 재현이 네가 내고."

"그게 무슨 형이 해주는 거냐."

재현 오빠가 피식 웃으며 매직을 집어 들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쓱쓱 글씨를 써 내려갔다.

  1. 수아랑 놀이공원 가기 (교복 입고)
  2. 준호한테 비싼 술 얻어먹기
  3. 수아 논문 완성하는 거 보기

"야, 3번은 지워. 나 자퇴했어."

내가 핀잔을 주자 재현 오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중에라도 꼭 해. 네가 박사모 쓴 거 보고 싶었는데."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보고 싶었는데. 과거형도, 미래형도 아닌 그 애매한 말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재현 오빠가 마지막 줄에 무언가를 적었다.

  1. 수아랑 결혼사진 찍기.

순간 정적이 흘렀다.
준호 오빠가 헛기침하며 맥주캔을 땄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괜히 치킨 무만 집어먹었다.

"식은... 못 올리더라도, 사진은 남기고 싶어."

재현 오빠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의 손은 날이 갈수록 말라가고 있었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에 깍지를 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찍자. 제일 예쁘게. 영정사진 말고, 웨딩사진으로."

우리는 웃었다.
울면 지는 거니까.
우리는 매일 밤,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사랑하고, 또 웃었다.


7화: 마지막 여행

겨울 바다는 시리도록 푸르렀다.
강릉의 해변.
재현 오빠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겨울 바다 보기'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무리해서 여행을 떠났다.
준호 오빠는 "눈치껏 빠져준다"며 서울에 남았다.

"춥지 않아?"

재현 오빠가 내 목도리를 여며주었다.
두꺼운 패딩에 털모자까지 썼지만,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요즘 들어 그는 부쩍 잠이 많아졌다.
두통도 잦아졌고, 가끔은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다.
의사가 말했던 마비 증세가 시작된 걸까.

"오빠야말로. 들어가자. 감기 걸리면 큰일 나."

"조금만 더. 바다 냄새 좋다."

그는 내 어깨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봤다.
파도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철썩, 철썩.
마치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세는 초침 소리 같았다.

"수아야."

"응."

"나 만나서... 힘들지 않았어?"

"힘들었지. 오빠 성격 진짜 까칠하잖아. 일할 때 보면 완전 꼰대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재현 오빠가 픽 웃었다.

"다음 생에는... 내가 더 건강하게 태어날게. 그때는 내가 먼저 고백하고, 내가 먼저 꼬실게. 너 맘고생 안 시키고, 100년 동안 데리고 살게."

"약속했다? 딴 년이랑 눈맞으면 죽어."

"응. 약속할게."

그가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도 그의 입술은 따뜻했다.
하지만 그 온기가 금방이라도 식어버릴 것 같아서, 나는 그를 더 꽉 끌어안았다.
이 순간을 박제하고 싶었다.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
호텔로 돌아온 재현 오빠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으윽..."

씻고 나온 그가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오빠! 왜 그래! 약 줄까?"

나는 황급히 진통제를 찾았다.
하지만 재현 오빠는 약을 삼키지도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수, 수아야...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오빠, 정신 차려! 119 부를게!"

"아니야... 그냥 좀 쉬면..."

말을 잇지 못한 그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눈의 초점이 풀려 흰자위가 보였다.
경련이 일어났다.

"오빠! 재현 오빠!"

나는 비명을 지르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손이 너무 떨려서 비밀번호를 세 번이나 틀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오늘인가?
아직 아니잖아.
6개월 남았다며. 이제 겨우 한 달 지났는데.
결혼사진도 아직 못 찍었는데.

"안 돼... 가지 마... 제발..."

구급차가 오는 동안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울부짖었다.
그의 손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이별의 순간이, 예고도 없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고 있었다.


서울의 대학병원 응급실.
강릉에서부터 이송되어 오는 내내 나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제발 숨만 붙어 있게 해달라고.

재현 오빠는 바로 검사실로 들어갔다.
준호 오빠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신발 한 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어떻게 된 거야! 재현이 괜찮아?"

"몰라... 들어가서 아직 안 나와... 오빠, 어떡해... 재현 오빠 죽으면 어떡해..."

나는 준호 오빠의 품에 안겨 무너져 내렸다.
준호 오빠는 말없이 내 등을 토닥였지만, 그의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담당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차트를 손에 쥐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마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제를 만난 표정이었다.

우리는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재현 오빠는요? 마음의 준비... 해야 하나요?"

내가 울먹이며 묻자, 교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우리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묘했다.
슬픔보다는 당혹감에 가까웠다.

"보호자분. 잠깐 저 좀 보시죠."

"네...?"

"환자분 MRI 사진을 다시 찍어봤는데요. 이전 영상이랑 비교해 보니 뭔가 이상해서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더 나빠진 건가?
암세포가 전신으로 퍼지기라도 한 건가?
나는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준호 오빠가 내 어깨를 감싸 쥐었다.

교수가 모니터에 띄워진 뇌 사진을 가리켰다.
하얀 덩어리가 보였다.
우리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그 빌어먹을 종양.

"이게... 종양이 맞긴 한데요."

교수가 뜸을 들였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모양이나 위치가... 암이라기보다는 기생충 낭종, 그러니까 물혹에 가까워 보입니다."

"...네?"

나와 준호 오빠의 입에서 동시에 멍청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응급실의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교수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쉽게 말해서... 암이 아닐 확률이 99%라는 겁니다. 그냥 약 먹으면 없어지는 기생충 덩어리요."

순간, 나는 내가 너무 슬퍼서 미쳐버린 줄 알았다.
지금 이 의사가 뭐라고 하는 거지?
기생충?
그럼 내 눈물은? 우리의 시한부 로맨스는?
내 6개월은?

병실 안, 산소마스크를 쓴 채 비련의 주인공처럼 누워 있는 재현 오빠가 보였다.
갑자기 그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고, 동시에 세상에서 제일 쪽팔린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작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Step 01부터 Step 09까지의 긴 호흡을 통해 **<오빠는 모르는 사랑>**이라는 10화 분량의 단편 웹소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특히 이번 리비전(Revision) 과정을 통해 초반부의 감정선이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3화에서 의사의 모호한 소견을 추가하여 후반부 반전(오진)을 위한 개연성을 확보했고, 4화 엔딩을 오빠 준호의 난입 직전으로 수정하여 다음 화 결제율을 높이는 '절단신공(Cliffhanger)'을 완성했습니다. '시한부'라는 클래식한 소재를 비틀어 현대적인 로맨틱 코미디로 승화시킨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이제 모든 원고와 분석이 완료되었으므로, **플랫폼 업로드를 위한 [최종 투고 패키지]**를 정리해 드립니다. 이 내용은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페이지, 리디 등 주요 플랫폼의 작품 등록 페이지나 출판사 투고 메일에 즉시 활용할 수 있도록 최적화된 포맷입니다.


[최종 투고 패키지] 오빠는 모르는 사랑

1. 작품 기본 정보 (Metadata)

항목 내용
제목 오빠는 모르는 사랑
부제(안) 시한부인 줄 알았는데 오진이래요 / 180일의 시한부 연애
장르 현대 로맨스 / 로맨틱 코미디 / 감성 드라마
분량 총 10화 (완결) / 단행본 1권 분량 (약 4.5만 자)
연령가 15세 이용가 (감정적 묘사 및 키스신 포함)
키워드 #친구오빠 #비밀연애 #시한부(오해) #오진반전 #직진녀 #능력남 #쌍방구원 #해피엔딩 #사내연애
로그라인 "죽어도 내 허락 받고 죽어." 10년 짝사랑한 오빠 친구를 살리기 위해 인생을 걸었는데, 6개월 뒤 밝혀진 진실은 '오진'? 쪽팔림은 나의 몫, 책임은 너의 몫! 반전 로맨스.

2. 작품 소개글 (Synopsis for Platform)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 홈' 소개글입니다. 후킹 요소와 반전 매력을 강조했습니다.)

"길어야 6개월입니다."

10년을 짝사랑한 오빠 친구, 강재현.
그가 내 고백을 받아준 바로 다음 날, 청천벽력 같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헤어져. 동정하지 말고 꺼져."
그는 나를 위해 모진 말로 밀어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멱살을 잡고 병실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누가 허락했어? 죽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내가 결정해."

나는 선언했다. 남은 6개월, 너에게 내 모든 사랑을 쏟아붓겠다고.
그렇게 석사 학위 논문도 포기하고, 학교도 그만두고, 친오빠의 반대마저 무릅쓰며 그를 지켰다.
우리의 사랑은 눈물겹고, 처절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환자분, 축하드립니다. 종양이 아니라 그냥 물혹이네요."
"...네?"

죽을병이 아니라, 그냥 머리에 물이 찬 거라고?
재현 오빠가 살아난 건 기쁜데...
내 눈물, 내 휴학, 그리고 비련의 여주인공 코스프레는 어떡하지?
심지어 친오빠 준호는 우리 사이를 다 알아버렸는데?

"수아야, 도망가지 마. 네가 포기한 인생, 내가 20년으로 갚을게."

죽다 살아난 뻔뻔한 능력남과
쪽팔려서 지구 밖으로 도망치고 싶은 직진녀의
유효기간 없는 평생 계약 로맨스!

<오빠는 모르는 사랑>


3. 회차별 목차 및 핵심 사건 (Episode List)

(독자가 다음 화를 클릭할 수밖에 없도록 매력적인 소제목을 배치했습니다.)

  • 1화: 선을 넘는 남자 (feat. 우리 오빠 친구)
  • 2화: 그림자 연애와 붉은 셔츠
  • 3화: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Best Episode)
  • 4화: 도망치지 않는 여자
  • 5화: 들켜버린 시한부, 그리고 버킷리스트
  • 6화: 오빠는 모르는 눈물 (준호의 오열)
  • 7화: 마지막 편지 (이별 준비)
  • 8화: 기적, 혹은 코미디 (★Twist: 오진 판명)
  • 9화: 젖은 편지와 뻔뻔한 프러포즈
  • 10화: 오빠는 (이제 다) 아는 사랑 (완결)

4. 편집자/MD 전달 사항 (Selling Points)

  1. 확실한 타겟 독자 (Targeting)

    • 짧은 호흡으로 강렬한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2030 여성 독자를 겨냥했습니다. 퇴근길이나 자기 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스낵 컬처'에 최적화된 구성입니다.
  2. 클리셰의 영리한 비틀기 (Twist)

    • 초중반은 정통 '시한부 신파'의 문법을 따라가며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하지만, 8화에서 '오진'이라는 현실적이고도 코믹한 반전을 통해 분위기를 180도 전환합니다. 이는 고구마 없는 사이다 결말을 선호하는 웹소설 트렌드에 부합합니다.
  3. 주체적인 여주인공 (Character Agency)

    • 남주인공의 비극에 수동적으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도 내 허락 받고 죽어"라며 멱살을 잡는 능동적인 여주인공 '수아'의 캐릭터성이 독자들에게 통쾌함과 대리 만족을 선사합니다.
  4. 전략적인 절단신공 (Cliffhanger Strategy)

    • 3화(시한부 선고), 5화(비밀 발각), 8화(오진 판명) 등 주요 회차마다 강력한 클리프행어를 배치하여 무료 회차에서 유료 회차로의 전환율을 극대화했습니다.

5. 작가의 말 (Author's Note)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오빠는 모르는 사랑>은 "죽음 앞에서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무거운 질문으로 시작해, "살아있다면 쪽팔림도 사랑이다!"라는 유쾌한 결론으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수아의 무모한 용기와 재현의 헌신, 그리고 동생의 연애사에 휘말려 고통받는 오빠 준호의 눈물겨운 우정이 여러분의 일상에 작은 웃음과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오진'으로 밝혀졌지만, 그들이 서로를 위해 흘린 눈물과 사랑의 무게만큼은 '진짜'였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180일(사실은 1주일)의 소동극을 즐겁게 지켜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프로젝트 <오빠는 모르는 사랑>이 성공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작가님의 건승을 빕니다. 이 포맷을 그대로 복사하여 플랫폼에 등록하시거나, 출판사에 투고하시면 됩니다. 건필하십시오!

스텝 재실행

현재 v1 → v2으로 재생성합니다. 이전 버전은 이력에 보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