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9: 에피소드 리비전

Critic+Writer · 버전 1 · 초안

산출물 (v1)

보통
kie · gemini-3-pro

제9화: 선전포고

빗줄기가 하수구 출구로 들이쳤다. 차가웠다. 아니, 시렸다.

다리 밑, 썩은 물이 흐르는 개천가. 쥐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이곳이 내 은신처였다.

"으드득..."

편의점에서 훔친 소주를 상처에 들이부었다. 타는 듯한 고통에 입술을 깨물었다. 달궈진 단검이 살을 찢고 들어갔다. 근육이 경련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땡그랑.

피 묻은 납덩어리가 바닥을 굴렀다.

[저주 '흑염'이 손상된 조직을 강제로 접합합니다.]

[고통 수치: 최상]

검은 불꽃이 실처럼 엉겨 붙어 찢어진 살을 꿰맸다. 살이 타는 냄새. 새 살이 돋는 역겨운 감각.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아... 하아..."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하늘은 온통 회색이었다. 빌어먹을 내 인생처럼.

[남은 시간: 25일 08시간]

시간은 충분하다. 문제는 내 몸뚱이다.

박태수의 총격, 헌터들의 추격, 그리고 흑염의 잠식. 지금 나는 폭발 직전의 불발탄이나 다름없었다. 건드리면 터진다. 누구든, 무엇이든.

징-.

주머니 속 대포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 최민석이다.

젖은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용건."

[목소리가 거치네. 많이 아픈가 봐?]

와인잔 부딪히는 소리. 놈은 지금 파티 중이다.

[재미있는 걸 보여줄게. 지금 뉴스 틀어봐.]

"볼 기분 아니다."

[안 보면 후회할 텐데. 네 어머니가 나오시거든.]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벌떡 일어나 다리 위로 기어 올라갔다. 전광판이 보이는 곳까지 미친 듯이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상가 건물 외벽의 대형 스크린.

[속보] 오로라 길드, 테러 용의자 강진혁의 모친 '보호' 조치.

화면에는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가 있었다. 창백한 얼굴. 링거를 꽂은 팔. 그리고 그 뒤에 서서 어깨를 감싸 쥐고 있는 최민석.

"......"

최민석이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강진혁 씨가 이 방송을 보고 있다면, 부디 자수하시길 바랍니다. 어머님은 저희 길드 병원에서 최고 수준의 '보호'를 받고 계십니다."

보호? 인질이다.

최민석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마치 내 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입꼬리가 미세하게 비틀렸다.

"하지만 어머님의 병세가 위중하셔서...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입모양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읽을 수 있었다.

'와서 죽어.'

화면이 광고로 바뀌었다.

나는 빗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웠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맺혔다.

"가족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콰아앙!

발밑의 아스팔트가 검게 폭발했다.

주차되어 있던 차들의 경보기가 일제히 울부짖었다. 가로등이 팡팡 터져 나갔다.

[살의가 임계점을 초과합니다.]

[저주 '흑염'이 폭주 모드에 진입합니다.]

[주변의 모든 행운을 소각합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재앙의 시작이었다.

나는 대포폰을 귀에 댔다.

"최민석."

[보고 있었구나.]

"기다려."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오히려 차가워진다는 걸, 머리가 맑아진다는 걸 처음 알았다.

"숨바꼭질은 끝났다."

품 안의 약병을 꺼냈다. 남은 절반의 억제제. 이걸 마시면 흑염을 누를 수 있다. 인간으로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와장창!

약병을 바닥에 던졌다. 푸른 액체가 빗물에 섞여 하수구로 흘러갔다.

[...미쳤군. 약을 버려?]

"약은 필요 없어."

눈동자가 완전히 검게 물들었다. 흰자위는 사라지고, 칠흑 같은 어둠만이 남았다.

"오늘 밤, 내가 네 약이 될 테니까."

전화를 끊었다.

목적지는 강남. 오로라 길드 본사.

더 이상 숨지 않는다. 피하지 않는다.

내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간판이 떨어지고, 신호등이 오작동하고, 맨홀이 역류했다.

도시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재앙이 걸어가고 있었다.


제10화: 지옥의 문을 열다

오로라 길드 본사 '오로라 타워'.

지상 60층. 대한민국 헌터 산업의 상징이자 난공불락의 요새. 로비에는 수십 명의 경비 헌터와 자동 방어 터렛이 개미떼처럼 깔려 있었다.

"경계 강화해! 놈이 올지도 모른다!"

보안 팀장의 고함.

그때, 회전문이 천천히 돌아갔다.

끼이익...

비에 젖은 검은 정장의 남자.

물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로비의 적막을 깼다.

"강진혁이다!"

"사격 개시!"

다다다당!

방어 터렛에서 마력탄이 쏟아졌다. 경비 헌터들이 일제히 영창을 시작했다.

나는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저주 '불행'이 광역으로 확산됩니다.]

피슉. 피슉.

터렛의 총구가 틱틱거리더니 엉뚱한 곳으로 돌아갔다.

"어? 야! 기계가 왜 이래!"

터렛이 아군인 경비원들을 향해 난사되기 시작했다.

"으악! 끄아악!"

마법사들의 지팡이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마, 마력 역류다! 영창이 꼬였어!"

펑! 퍼벙!

스스로의 마법에 휘말린 헌터들이 볼링핀처럼 나뒹굴었다. 아수라장.

나는 그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총알이 나를 피해 갔다. 파이어볼이 내 머리 위 전등을 맞췄다.

와장창!

거대한 샹들리에가 보안 팀장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으, 으아..."

깔린 팀장이 신음했다. 나는 그의 앞을 지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작동하지 않았다.

"아, 맞다."

내가 오면 기계가 고장 나지.

비상구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정예 헌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A급 헌터들로 구성된 '오로라 별동대'.

"여기까지다, 강진혁."

별동대장이 거대한 대검을 뽑아 들었다.

"우린 기계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순수한 무력으로 널..."

우지끈.

대장이 밟고 있던 대리석 바닥이 꺼졌다.

"어?"

지하 주차장 천장이 붕괴했다. 하필 지금. 하필 그가 서 있는 곳만.

"대장님!"

대장이 구멍으로 사라졌다. 남은 대원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저, 저 새끼 뭐야..."

"재수 옴 붙는다! 가까이 가지 마!"

그들은 무기를 들고도 뒷걸음질 쳤다. 공포. 가장 원초적인 공포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비켜."

작게 읊조렸지만, 로비 전체에 울렸다.

"죽기 싫으면."

홍해 갈라지듯 길이 열렸다.

A급 헌터들이, 몬스터를 때려잡던 영웅들이, F급 짐꾼 하나가 무서워 길을 터주고 있었다.

나는 뚜벅뚜벅 계단을 올랐다.

1층, 2층, 3층...

60층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몸은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 층을 오를 때마다 심장이 타는 듯이 아팠다. 억제제 없이 흑염을 쓴 대가였다.

[경고: 생명력이 빠르게 소진됩니다.]

[심장 박동 수: 180... 190...]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들이 갑니다.

로비의 소란이 아득해질 무렵, 20층 상황실 모니터 앞.

최민석은 와인을 흔들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하하! 대단해! 정말 대단해!"

박수를 쳤다.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저게 바로 내가 원하던 힘이야. 운명을 비틀고, 인과율을 무시하는 절대적인 재앙!"

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그림자 괴물이 그의 등 뒤에서 혀를 낼름거렸다.

[맛있겠다... 저 절망... 저 분노...]

"길드장님! 1층이 뚫렸습니다! 별동대도 무력화됐습니다!"

부관이 다급하게 보고했다.

"어머님을... 인질로 쓸까요?"

최민석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멍청한 놈."

퍼억!

최민석의 손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 촉수가 부관의 가슴을 꿰뚫었다.

"커헉..."

"인질은 여기까지 오게 만드는 미끼였을 뿐이야. 밥상이 차려졌는데 숟가락을 치우면 쓰나."

최민석은 부관의 시체를 쓰레기처럼 바닥에 던졌다.

"문을 열어둬라."

"네? 하, 하지만..."

"놈을 펜트하우스로 안내해. 내 식사 시간이니까."

최민석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어서 와라, 진혁아. 내가 너를 완성시켜 줄게."

같은 시각, 20층 비상구.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계단에는 쓰러진 헌터들이 즐비했다. 나를 막으려던 놈들은 모두 불행한 사고를 당했다. 계단에서 구르거나, 무기가 폭발하거나, 심장마비가 오거나.

시체 산을 밟고 올라갔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그때, 위쪽 계단참에서 누군가 걸어 내려왔다.

회색 코트. 박태수였다.

그는 총을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손에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다.

"......"

나는 멈춰 섰다.

"비켜. 당신이랑 싸울 시간 없어."

"알아."

박태수가 서류를 툭툭 쳤다.

"압수수색 영장이다. 10분 전에 발부됐지."

"......뭐?"

"최민석의 불법 실험, 횡령, 그리고 살인 교사 혐의."

박태수가 내게 길을 비켜주며 벽에 등을 기댔다.

"나는 법대로 한다. 지금부터 이 건물은 범죄 현장이고, 최민석은 현행범이야."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경찰이 도착하려면 30분은 걸려."

30분.

그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눈감아주겠다는 뜻이다. 공백의 시간.

"왜...?"

"네가 말했지. 법이 썩었다고."

박태수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가끔은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백정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야."

그는 라이터를 켰지만, 불이 붙지 않았다. 내 불행 때문이었다. 틱, 틱.

박태수는 헛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구겨버렸다.

"가라. 네 어머니는 50층 병동에 있다. 내 부하들이 그쪽으로 이동 중이야."

"......고맙다."

나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박태수의 등 뒤로 내 흑염의 잔재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는 적이 아니었으니까.

속도를 높였다.

이제 장애물은 없다.

오직 최민석, 그 새끼뿐이다.


제11화: 지옥도(地獄圖)

50층 병동.

"어머니!"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텅 비어 있었다. 링거대는 쓰러져 있고, 침대 시트는 차가웠다.

늦었다.

그때, 병실 TV가 지직거리며 켜졌다.

[여기로 와라, 진혁아. 60층이다.]

화면 속 최민석이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관객들이 기다리고 있어.]

카메라가 돌아가며 펜트하우스 내부를 비췄다. 수십 개의 배양조가 늘어서 있었다. 배양조 안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괴물들이 떠 있었다.

실패한 실험체들.

나처럼 납치되어 강제로 적합 수술을 받은 피해자들.

"으아아아!"

주먹을 휘둘러 TV를 박살 냈다. 파편이 튀었다.

60층.

비상구를 박차고 나갔다.

펜트하우스 앞. 육중한 강철 문이 흑염에 닿자마자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내가 발을 들여놓자마자, 역한 피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왔구나."

최민석은 거대한 옥좌 같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어머니가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가슴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어머니를 놔줘."

"물론이지. 네가 나한테 먹히면, 어머니는 살려줄게. 약속하마."

최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그림자가 벽을 타고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자, 보여줘 봐. 네가 가진 그 흑염의 맛을."

쿠구구궁!

최민석의 그림자에서 수백 개의 검은 촉수가 튀어나왔다.

"죽어!"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스킬: 흑염 폭발(D) 발동]

주먹에서 검은 불기둥이 뿜어져 나갔다.

하지만 최민석은 피하지 않았다. 촉수들이 내 불꽃을 감쌌다.

치이익... 꿀꺽.

"......!"

불꽃이 사라졌다. 아니, 먹혔다.

"맛있네. 매콤하고."

최민석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마법도, 저주도, 불행도. 나한테는 그저 칼로리일 뿐이야."

그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촉수 하나가 내 발목을 휘감았다.

"크윽!"

내동댕이쳐졌다. 대리석 바닥이 부서지며 몸이 굴렀다.

"안 통한다니까."

최민석이 천천히 걸어왔다.

"넌 그냥 밥이야. 아주 잘 차려진 밥상."

비틀거하며 일어났다. 흑염이 안 통한다. 불행도 안 통한다. 놈은 내 완벽한 상성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배양조 안에 있는 괴물들이 보였다.

실패작들. 고통 속에 죽어간 원혼들.

그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벽을 긁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도와줘...'

'죽여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이 아니었다. 흑염이 그들의 원한에 반응하고 있었다.

[공명: 죽은 자들의 원한]

[저주 '흑염'이 새로운 연료를 발견했습니다.]

가슴 속 불꽃이 미친 듯이 타올랐다. 내 생명력만이 아니었다. 이 공간에 가득 찬 죽음의 기운이 나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었다.

"최민석!"

다시 주먹을 쥐었다. 이번엔 붉은빛이 감도는 칠흑의 불꽃이었다.

"먹을 수 있으면 먹어봐라. 배가 터져 죽을 테니까!"

콰아아아!

내가 쏘아 보낸 불꽃이 펜트하우스를 집어삼킬 기세로 덮쳤다.

최민석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이... 이건 너무 많아!"

그가 촉수로 방어막을 쳤지만, 흑염은 촉수를 태우고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끄아아악!"

최민석의 왼팔에 불이 붙었다.

"이 자식이!"

최민석의 몸이 기괴하게 부풀어 올랐다.

쩌저적.

양복이 찢어지고, 피부가 벗겨졌다.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시커먼 점액질로 뒤덮인, 눈이 세 개 달린 괴물이었다.

"본모습을 드러냈구나."

피를 토하며 웃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네. 괴물 대 괴물로."

[시스템 경고: 생명력이 10% 미만입니다.]

[마물화 진행률: 85%]

시간이 없다.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태웠다. 오늘 여기서, 우리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아니, 둘 다 죽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죄송해요. 불효자는 먼저 갑니다.

나는 괴물을 향해 몸을 던졌다.


제12화: 거짓된 구원

"키에에에에엑!"

괴물이 된 최민석이 비명을 질렀다. 쇳소리와 짐승의 울음이 섞인 소음.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의 거대한 손이 나를 덮쳤다.

쾅!

바닥이 꺼지며 우리는 아래층으로 추락했다. 59층. 58층. 콘크리트 벽을 뚫고 계속 떨어졌다. 먼지와 파편이 시야를 가렸다.

"크헉..."

갈비뼈가 부러졌다. 내장이 파열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놈의 목덜미를 놓지 않았다.

"타라... 타버려라..."

내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흑염이 놈의 점액질 피부를 지졌다.

"꺼져! 떨어져!"

최민석이 촉수로 내 몸을 관통했다.

푸욱!

복부에 구멍이 뚫렸다.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즉사했을 상처.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흑염이 상처 부위를 강제로 메우며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었다. 좀비처럼.

"너... 너 뭐야! 왜 안 죽어!"

최민석이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놈은 포식자였지만, 동시에 겁쟁이였다. 자신보다 약한 자만 잡아먹어 온 놈은,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미친개를 당해낼 수 없었다.

"내 퇴직금... 받아야지."

나는 놈의 눈알 하나를 손가락으로 찔러 터트렸다.

"키에엑!"

놈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놈의 가슴팍에 손을 박어넣었다. 물컹한 감촉.

심장. 마력의 코어.

"잡았다."

[스킬: 흑염 폭주(S) 발동]

[대상을 내부에서부터 소각합니다.]

내 모든 마력을, 내 모든 생명을 쏟아부었다.

화르륵!

최민석의 몸 안에서 검은 불길이 폭발했다. 피부 아래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안 돼! 나는... 나는 왕이 될..."

놈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퍼앙!

검은 재가 되어 터져 나갔다.

정적.

무너진 55층 회의실.

나는 재가 되어버린 최민석의 잔해 위에 쓰러져 있었다.

이겼다. 복수는 끝났다.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마물화 진행률: 99%]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의식이 희미해졌다.

이대로 괴물이 되는 건가. 아니면 죽는 건가.

그때, 잿더미 속에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유리병이었다. 최민석의 몸속에 품고 있던, 단 하나의 '완성된 억제제'. 기적적으로 깨지지 않았다.

기어서 그것을 집었다. 뚜껑을 딸 힘도 없어서, 병 목을 깨물어 부셨다.

와작.

유리 조각과 함께 액체를 삼켰다.

꿀꺽.

차가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불타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경고: 강력한 마력 억제제가 투여되었습니다.]

[흑염이 강제 동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마물화 진행이 멈춥니다.]

"하아..."

숨이 쉬어졌다. 일그러졌던 피부가, 튀어나왔던 핏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살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유리창 너머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서울의 아침. 어젯밤의 지옥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평화로운 햇살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약은 치료제가 아니다.

[효과 지속 시간: 24시간]

[매일 복용하지 않으면 흑염이 다시 깨어납니다.]

쓴웃음이 나왔다.

자유는 없다. 나는 이제 약에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마약 중독자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 약을 만들 수 있는 건...

"오로라 길드 연구소뿐이지."

최민석은 죽었다. 하지만 연구소는 남아 있다. 협회도 남아 있다. 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벽 사이로 박태수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무장한 협회 요원들이 있었다.

박태수는 내 몰골을 보더니, 총을 거뒀다.

"끝났나?"

"......어."

"최민석은?"

바닥의 재를 가리켰다.

박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그는 요원들에게 손짓했다.

"시신 수습하고, 현장 통제해."

"팀장님, 저 자는요? 체포해야..."

"저 자는 피해자다. 인질로 잡혀 있다가 구조된 걸로 처리한다."

"네?"

"내 말 못 들었어? 시키는 대로 해!"

박태수가 소리쳤다. 요원들이 쭈뼛거리며 물러났다.

박태수는 내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가라. 어머니 모시고."

"......왜?"

"네가 청소를 다 했으니까. 일당은 줘야지."

박태수는 내 손에 무

제11화: 지옥도(地獄圖)

쾅!

경첩이 뜯겨나간 문짝이 복도 반대편 벽에 처박혔다. 501호. VIP 병동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내 발길질이었다.

"어머니!"

대답 대신 찢어진 커튼만 에어컨 바람에 흔들렸다.

병실 안은 난장판이었다. 링거대는 쓰러져 수액을 토해내고 있었고, 바닥에 흩어진 차트들이 밟혔다.

가장 중요한 침대 위. 텅 비어 있었다.

시트에 손을 댔다.

"……."

차가웠다. 온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박태수가 시간을 벌어주었지만, 최민석은 그보다 더 빠르고 교활했다. 놈은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거다.

입술을 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혀끝에 돌았다.

치직.

벽에 걸린 TV가 제멋대로 켜졌다. 노이즈가 걷히자 와인잔을 든 남자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늦었네, 강진혁.]

최민석이었다. 놈의 뒤로 펼쳐진 서울의 야경이 놈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었다. 60층. 놈의 왕국, 펜트하우스.

[관객들이 기다려. 주인공이 지각하면 쓰나.]

카메라 앵글이 돌아갔다. 화면 한구석, 휠체어에 힘없이 늘어진 여자가 보였다.

어머니였다.

"이 개새끼가……!"

[쉿. 욕은 삼가. 어머님 주무시잖아.]

최민석이 휠체어 손잡이를 툭툭 쳤다.

[걱정 마. 그냥 재운 거야. 깨어 있는 상태로 아들내미가 찢겨 죽는 걸 보면 충격받으실까 봐. 내 나름의 배려지. 안 그래?]

화면 속의 최민석이 킬킬거렸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펜트하우스의 안쪽, 어둠에 잠겨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은 전시장이었다.

거대한 원통형 유리관들이 수십 개 도열해 있었다. 초록색 형광 용액이 가득 찬 배양조 안에는 사람이, 아니, 한때 사람이었던 것들이 떠 있었다.

팔이 세 개 달린 기형적인 몸뚱이, 피부가 녹아내려 근육이 훤히 드러난 여자, 머리만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아이.

[익숙하지?]

최민석이 유리관을 손가락으로 딱, 튕겼다.

[다 너 같은 놈들이었어. '적합자' 판정을 받고 희망에 부풀어 내 발로 찾아온 그릇들.]

"……."

[근데 다들 너무 약해 빠졌어. 던전의 마력을 조금만 주입해도 금방 금이 가버리더군. 버티질 못하고 펑, 펑 터져 나갔지. 이 쓰레기들처럼.]

최민석의 눈이 카메라 렌즈를 뚫을 듯 번뜩였다.

[하지만 넌 달라. 넌 완벽해. 공허의 틈에서 그 엄청난 흑염을 받아들이고도 자아를 유지하고 있잖아. 내 컬렉션의 정점이 될 자격이 있어.]

"아가리 닥쳐."

[빨리 와. 밥 식겠다.]

뚝.

화면이 꺼졌다. 검은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일그러진 눈, 핏발 선 눈동자.

나는 TV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콰직!

액정이 박살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손등이 찢어져 피가 흘렀지만 통증 따위는 사치였다.

60층.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상구로 달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흑염이 혈관을 타고 끓어올랐다. 심장이 터질 듯 박동했다.

[경고: 살의가 육체의 한계를 초과하고 있습니다.]

[마물화 진행률: 72%]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안 돼. 이성을 놓으면 안 된다. 괴물이 되면 어머니를 알아볼 수 없다.

나는 허벅지 살을 손톱으로 꼬집어 뜯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피가 흐르고 고통이 뇌를 찔렀다. 그제야 흐릿해지던 시야가 조금씩 돌아왔다.

55층. 58층. 59층.

마침내 60층. 펜트하우스로 통하는 육중한 강철 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지문 인식기와 홍채 인식기, 그리고 폭약으로도 뚫기 힘들다는 특수 합금 도어.

하지만 내게 열쇠 따위는 필요 없다.

나는 강철 문에 양손을 짚었다.

"열려라."

치이이익!

검은 불꽃이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와 강철을 핥았다.

두께 20센티미터의 특수 합금이 버터처럼 녹아내렸다. 붉은 쇳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며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나는 반쯤 녹아내린 문짝을 어깨로 밀어버렸다.

쾅!

열기와 함께 펜트하우스 내부의 공기가 밀려왔다.

역한 피비린내. 그리고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지옥의 냄새였다.

"왔구나."

최민석은 방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어머니가 탄 휠체어가 있었다.

"어머니를 놔줘."

나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섰다. 카펫이 내 발밑에서 검게 타들어 갔다. 내 걸음마다 검은 발자국이 남았다.

"물론이지. 네가 나한테 얌전히 먹혀주면, 어머님은 살려줄게. 약속하마."

최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방 안의 조명이 파직거리며 어두워졌다. 전구들이 비명을 지르듯 깜빡거렸다.

그의 발밑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더니, 벽을 타고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물리 법칙을 무시한 어둠이었다.

"자, 보여줘 봐. 네가 가진 그 흑염의 맛을."

최민석이 양팔을 벌렸다. 환영 인사라도 하듯이.

그의 그림자에서 시커먼 촉수 수십 개가 뱀처럼 튀어나와 허공을 꿈틀거렸다.

"죽어!"

나는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스킬: 흑염 폭발(D) 발동]

오른주먹에 흑염을 한계까지 끌어모았다. 공기가 일그러질 정도의 고열. 눈앞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최민석의 안면을 향해

Batch 2: 제12화~제13화

제12화: 거짓된 구원

"키에에에에엑!"

고막이 찢어지는 파열음.

사람의 목구멍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 쇠를 쇠로 긁어내는 듯한 비명이 펜트하우스의 방탄유리를 진동시켰다.

최민석의 거대한 앞발이 시야를 덮었다.

피하지 않았다. 나는 핏빛 흑염이 엉겨 붙은 주먹을 놈의 관절을 향해 질렀다.

쾅―!

충돌.

공기가 터져 나갔다. 충격파가 60층 펜트하우스 내부를 휩쓸었다. 수십 개의 배양조가 동시에 박살 났다. 쏟아진 초록색 보존액이 바닥을 적셨고, 유리 파편이 산탄처럼 튀었다.

우지끈!

대리석 바닥이 비명을 질렀다. 하중을 견디지 못한 철골이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크윽!"

바닥이 꺼졌다.

우리는 뒤엉킨 채 허공으로 추락했다.

59층. 58층. 57층.

층간 슬래브를 뚫고 떨어지는 동안, 철근이 어깨를 찢고 콘크리트 덩어리가 정강이를 강타했다. 중력이 내장을 쥐어짜는 듯한 부유감. 입안에서 비릿한 핏물이 터졌다.

하지만 나는 놈의 멱살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타라... 타버려."

손아귀에 힘을 주자 흑염이 놈의 점액질 피부를 파고들었다. 치이익, 살 타는 냄새가 역하게 올라왔다.

"꺼져! 이거 놓으라고!"

최민석이 발악했다. 놈의 등에서 돋아난 촉수들이 채찍처럼 내 등과 옆구리를 후려쳤다. 살점이 뜯겨나가고 뼈가 드러났다.

고통?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내게 남은 감각은 오직 하나. 놈을 죽이겠다는 살의뿐이었다.

쿠와앙!

추락이 멈췄다. 55층 대회의실.

고급 마호가니 테이블 위로 처박혔다.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천장의 스프링클러 배관이 터지며 물줄기가 쏟아졌다.

"콜록, 쿨럭..."

나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시야가 온통 붉었다. 눈에 피가 들어간 건지, 흑염의 폭주로 시신경이 타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마물화 진행률: 92%]

[경고: 육체 붕괴가 임박했습니다.]

붉은 메시지 창이 시야를 가렸다.

시간이 없었다. 아니,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없다고 봐야 했다.

"이... 벌레 같은 새끼가."

먼지구름 속에서 최민석이 몸을 일으켰다.

놈의 꼴도 처참했다. 흑염에 지져진 왼쪽 어깨는 뼈가 하얗게 드러났고, 세 개의 눈 중 하나는 화상으로 눌어붙어 흉물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놈은 웃고 있었다.

"먹어주마. 씹어... 으득, 씹어줄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괴한 소리와 함께 최민석의 가슴팍이 세로로 쩍 갈라졌다.

갈비뼈가 이빨처럼 변형된 거대한 아가리. 그 안에서 붉은 촉수들이 혀처럼 낼름거렸다.

놈이 바닥을 박차고 쇄도했다.

피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오른팔에 남은 마력을 모조리 끌어모았다.

푸욱!

"......!"

내 주먹이 닿기 전이었다.

가슴 아가리에서 튀어나온 굵은 촉수가 내 복부를 꿰뚫었다.

등 뒤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척추를 스치고 지나간 촉수 끝이 내 등 뒤로 튀어나와 있었다.

"커헉..."

검붉은 핏덩이가 식도를 타고 넘어왔다.

치명상. S급 헌터라도 즉사를 피할 수 없는 위치였다.

"캬하하하! 끝났다!"

최민석이 승리의 포효를 질렀다. 놈의 눈이 희열로 번들거렸다.

"네놈의 그 알량한 복수심도, 저주도, 결국 내 영양분이 될 뿐이야! 이리 와라!"

놈이 촉수를 수축시켜 나를 자신의 가슴 아가리 쪽으로 끌어당겼다.

질질 끌려갔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저주 '흑염'이 파괴된 장기를 강제로 접합합니다.]

치이이익.

내 복부를 관통한 촉수 주변으로 검은 불꽃이 들러붙었다. 상처를 치료하는 게 아니었다. 흑염이 내 피와 살을 땔감 삼아 타오르며, 놈의 촉수를 내 몸에 융합시켜 버렸다.

용접된 쇠붙이처럼.

"어...?"

최민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왜 안 빠져! 이거 뭐야!"

놈이 촉수를 빼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내 몸은 놈의 촉수를 문 채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촉수를 잡고 놈에게로 걸어갔다.

뚜벅. 뚜벅.

바닥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너... 너, 오지 마!"

공포.

놈의 목소리가 떨렸다. 약자만 골라 먹던 포식자는, 제 내장을 내어주고 달려드는 미친개를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놈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내 퇴직금."

남은 왼손을 들어 놈의 멀쩡한 눈알 하나를 푹 찔러 넣었다.

"꺼내 놔."

"키에에에엑!"

최민석이 자지러졌다.

그 틈이었다. 나는 흑염을 한계까지 압축시킨 오른손을, 놈의 쩍 벌어진 가슴 아가리 속으로 쑤셔 박았다.

물컹.

내장의 축축한 감촉. 단단한 뼈를 부러뜨리고 더 깊이, 더 깊숙이.

손끝에 뜨거운 핵이 잡혔다.

놈의 마력 코어. 심장이었다.

"잡았다."

[스킬: 흑염 폭주(S) 발동]

[대상을 내부에서부터 소각합니다.]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화르르르륵!

최민석의 몸 안에서 불길이 폭발했다. 피부 아래로 붉은 빛이 비쳐 나왔다. 마치 용암을 삼킨 것처럼.

"안 돼! 나는... 나는 왕이...!"

놈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퍼아아아앙!

최민석의 육체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검은 재가 눈처럼 흩날렸다.

정적.

스프링클러가 쏴아아 물을 뿌려댔다. 빗소리 같았다.

"하아... 하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잿더미 위에 주저앉았다.

끝났다.

김철수, 이수진, 최민석. 나를 지옥 바닥에 처박았던 놈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런데.

기쁘지가 않았다.

손끝 감각이 사라졌다. 다리가 나무토막처럼 굳어오고 있었다.

[마물화 진행률: 99%]

[인간으로서의 의식이 소멸합니다.]

시야가 좁아졌다. 터널 속에 들어온 것처럼 주변이 어두워졌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임이 들렸다.

'다 죽여. 다 태워버려.'

흑염의 목소리.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괴물이 되어, 협회 놈들에게 사냥당하는 엔딩.

어머니는. 어머니는 누가 돌보지.

그때였다.

물에 젖은 잿더미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엄지손가락만 한 유리병.

최민석이 마지막까지 품에 안고 있던 것. 단 하나뿐인 '완성된 억제제'.

기적이었다. 깨지지 않았다.

나는 바닥을 기었다. 손톱이 빠질 것 같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 힘도 없었다. 병 주둥이를 입에 물고 어금니로 깨부수었다.

와작.

유리 조각이 입안을 찔렀지만, 흘러나온 액체가 더 중요했다. 푸른 액체를 단숨에 삼켰다.

꿀꺽.

차가웠다.

식도를 타고 내려간 냉기가 심장을 감쌌다. 용광로처럼 들끓던 혈관이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경고: 강력한 마력 억제제가 투여되었습니다.]

[저주 '흑염'이 강제 동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마물화 진행이 멈춥니다.]

"후우......"

막혔던 숨이 터져 나왔다.

거칠게 돋아났던 비늘이 사그라들고, 검게 물들었던 시야에 색채가 돌아왔다.

살았다.

대자로 뻗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서울의 아침.

어젯밤의 살육이 거짓말 같았다. 너무 평화로워서 구역질이 날 정도로.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건 치료제가 아니다.

[효과 지속 시간: 23시간 59분]

[매일 복용하지 않으면 흑염이 다시 깨어납니다.]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구원? 그런 건 없었다.

나는 이제 약 없이는 하루도 인간으로 살 수 없는 시한부 괴물이 되었다. 마약 중독자처럼, 매일 약을 찾아 헤매야 하는 신세.

그리고 이 약을 만드는 곳은 오로라 길드 연구소뿐이다.

최민석은 죽었지만, 시스템은 살아있다. 연구소도, 그 뒤를 봐주는 협회도, 정부의 썩은 윗선들도.

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저벅. 저벅.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차분한 발소리.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벽 사이로 회색 코트 자락이 보였다. 박태수였다.

그의 뒤로 무장한 협회 요원들이 진입하고 있었다.

박태수는 잿더미가 된 현장을 한 번, 피투성이가 된 나를 한 번 보았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마력탄 권총을 천천히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최민석은."

나는 턱짓으로 바닥의 검은 재를 가리켰다.

박태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그는 뒤따라온 요원들에게 손짓했다.

"현장 통제해. 외부인 출입 철저히 막고, 시신 수습한다."

"팀장님, 생존자가 있습니다! 저 자는 체포해야..."

신입 조사관이 나를 가리키며 다급하게 외쳤다. 수갑을 꺼내려는 기세였다.

박태수가 신입을 빤히 쳐다봤다.

"저 자는 피해자다."

"네?"

"오로라 길드에 납치 감금되어 있던 민간인이다. 우리가 진입해서 구조한 거야. 신원 강진혁. 병원으로 이송 준비해."

"하, 하지만... 현장 상황이..."

"보고서 내가 쓴다. 시키는 대로 해."

박태수의 목소리에 서릿발이 섰다. 신입이 쭈뼛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박태수가 내게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더니, 내게도 권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모시고 가라."

"......이유가 뭐지?"

"청소를 해줬으니까. 청소비는 줘야지."

박태수가

이 파트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어, **Critic 진단을 반영하여 새롭게 재구성한 제4화와 제5화의 핵심 구간(약 2,000자 분량)**을 출력합니다.

수정 포인트 적용:

  1. 제4화 오프닝: 배경 묘사 삭제 → 억제제를 마시는 고통과 액션으로 즉시 시작.
  2. 제4화 구출 씬: 감상적 독백("구하려고 했는데...") 삭제 → 행동 위주의 건조한 서술.
  3. 제4화 클리프행어: 휴대폰 파괴 후 박태수 등장 씬 교차 편집으로 긴장감 강화.
  4. 제5화 오프닝: 서울 야경 묘사 삭제 → 흑염의 부작용(침이 아스팔트를 녹임)으로 시작.
  5. 제5화 대사: 박태수의 설명조 대사 삭제 → 행동과 짧은 지시로 "Show" 원칙 적용.

[제4화: 짐승의 시간]

병을 비웠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액체가 불덩이 같았다.
"으윽…!"
위장이 뒤틀렸다. 억제제라더니, 이건 독극물에 가깝다. 손에서 빈 병이 미끄러져 바닥에 굴렀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좁은 모텔 방

제4화: 걸어 다니는 재앙

마개를 열었다.

역한 알코올 냄새와 비릿한 약품 향이 코를 찔렀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었다.

꿀꺽.

삼켰다. 식도가 타들어 갔다.

"......끄으윽!"

위장에 닿자마자 뇌를 찌르는 듯한 냉기가 퍼졌다. 동시에 심장을 쥐어짜고 있던 뜨거운 열기가 미친 듯이 반발했다.

몸 안에서 불과 얼음이 전쟁을 벌이는 감각. 핏줄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경고: 미확인 약물이 체내에 들어왔습니다.]

[저주 '흑염'이 약물과 충돌합니다.]

[일시적으로 살의가 억제됩니다.]

침대 시트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드득.

침대 헤드가 으스러졌다.

"하아, 하아..."

거칠던 숨이 점차 잦아들었다. 손등을 덮고 있던 검은 핏줄도 희미하게 사그라들었다.

효과가 있다.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은 덤이지만, 이 저주를 누를 수 있는 유일한 브레이크다.

나는 남은 약병을 다시 품에 넣었다.

김철수에게서 뺏은 미완성 치료제. 치사율 98%.

이건 아껴야 한다. 정말로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을 위해서.

똑똑.

"총각, 안에 있어?"

모텔 주인의 목소리였다. 칠순이 넘은 노인은 카운터에서 늘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아니, 보일러가 자꾸 말썽이라... 온수는 잘 나오나 해서."

"네. 잘 나옵니다."

"그래? 다행이네. 며칠 전부터 자꾸 가스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노인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가스 냄새.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뒷목의 솜털이 곤두섰다.

나는 헌터다.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다. 그런데 가스 냄새를 맡지 못했다고?

킁킁.

코를 벌렸다. 그제야 미약한 냄새가 느껴졌다.

아니, 맡지 못한 게 아니다. 내 코를 찌르던 피 냄새와 살 타는 냄새가 너무 독해서, 현실의 위험을 뇌가 지워버린 것이다.

[주변의 불행 수치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붉게 점멸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피해!"

소리치며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찰나였다.

콰앙-!

굉음과 함께 바닥이 솟구쳤다.

충격파가 낡은 모텔을 강타했다. 벽지가 발라진 벽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고,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 올려 몸을 보호했다.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고 화염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열기가 피부를 핥았다.

"콜록! 콜록!"

먼지와 연기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헌터의 육체는 멀쩡했다. F급이라 해도 일반인보다는 튼튼했고, 무엇보다 흑염이 화염을 집어삼킨 덕분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으으윽... 사, 살려..."

복도 쪽에서 신음이 들렸다.

주인 할아버지였다. 무너진 콘크리트 기둥에 하반신이 깔려 있었다.

"비키세요!"

나는 달려가 기둥을 잡았다.

묵직했다. 하지만 들 수 있다. 근육에 힘을 불어넣었다.

우드득.

기둥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서 나오세요! 빨리!"

노인이 고통을 참으며 기어가려던 찰나였다.

내 손끝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찌직.

내가 잡고 있던 기둥이 순식간에 검게 타들어 갔다. 흑염이었다.

"안 돼."

내가 의도하지 않았다. 그저 구하고 싶다는 강렬한 감정에 놈이 반응해 버린 것이다.

콘크리트가 부식되어 삭아내렸다. 기둥의 강도가 약해졌다.

툭.

"피해요!"

내가 소리쳤을 때는 이미 늦었다.

타버린 기둥이 반으로 뚝 부러지면서, 그대로 노인의 다리 위로 다시 떨어졌다.

"아아악!"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노인의 비명이 화재 경보기 소리보다 날카롭게 귓가에 박혔다.

나는 멍하니 내 손을 바라보았다.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결과는 확인사살이었다.

[저주 발동: 타인의 불행을 유발했습니다.]

[만족하십니까?]

시스템이 비아냥거렸다.

"닥쳐."

나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기둥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흑염을 억누르며, 순수한 악력만으로. 손톱이 깨지고 손바닥이 찢어졌지만 상관없었다.

노인을 둘러업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소방차와 구급차가 도착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불타는 모텔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스 폭발이라며?"

"주인 영감은? 죽었대?"

"아까 어떤 남자가 업고 나왔다던데..."

나는 골목길 그늘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들것에 실려가는 노인의 바지는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리는 아마 절단해야 할 것이다.

그가 잘못한 건 없었다. 낡은 보일러를 쓴 죄? 아니면 재수 없게 나를 손님으로 받은 죄?

확실한 건 하나다.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났다. 내가 기둥을 잡았기 때문에 다리가 부러졌다.

'......'

주머니 속의 2G폰을 꺼냈다.

저장된 번호는 딱 하나. '어머니'.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살아있다고, 아들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를 수 없었다.

전파를 타고 내 불행이 어머니에게까지 전염될까 봐.

뚝.

전화기를 반으로 접어 부러뜨렸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나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사라진 지 10분 후.

끼익-

검은색 세단 한 대가 폴리스라인 밖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낡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내렸다. 박태수였다.

그는 엉망이 된 화재 현장을 무심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먼저 도착해 있던 현장 감식반원이 달려왔다.

"단순 가스 폭발입니다. 낡은 건물이라 배관이 노후되어서..."

"비켜 봐."

박태수는 감식반원을 지나쳐 무너진 건물 잔해 쪽으로 걸어갔다.

매캐한 연기 냄새. 그 사이로 이질적인 악취가 섞여 있었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반쯤 녹아내린 콘크리트 기둥 조각. 화재로 그을린 것이 아니었다. 마치 강산성 용액을 들이부은 것처럼 표면이 흉측하게 부식되어 있었다.

박태수는 장갑 낀 손으로 검게 탄 가루를 문질러 보았다.

스르륵.

돌덩이가 재처럼 부서져 내렸다.

"일반적인 화염이 아니군."

"예?"

"가스 폭발로 콘크리트가 이렇게 녹지는 않아."

박태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코를 벌려 공기 중에 남은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피 냄새.

그리고 지독하게 차갑고 불길한, 죽음의 냄새.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찾았다. 쥐새끼."

제5화: 꼬리를 밟히다

"카악, 퉤."

검은 가래침이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졌다.

치이익.

역겨운 소리와 함께 보도블록이 녹아내렸다. 마치 염산이라도 부은 것처럼.

나는 호텔 건너편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내 침이 만든 구멍. 그 너머로 화려한 현수막이 보였다.

[오로라 길드 주최: 결식아동 및 던전 고아 돕기 자선의 밤]

그랜드 힐 호텔 정문에 걸린 현수막 한가운데에는 이수진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순백의 드레스. 품에 안긴 아이들. 성녀(聖女)다운 미소.

웃기고 있네.

바람이 불 때마다 현수막이 펄럭이며 이수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펴졌다 했다.

던전에서 내 다리가 몬스터에게 씹힐 때, 그녀는 힐을 주지 않았다. 마력이 아깝다며 뒷걸음질 쳤다.

내 비명소리가 시끄럽다며 귀를 막았던 여자가, 고아들을 안고 저렇게 웃고 있다니.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저주 '흑염'이 당신의 혐오감에 반응합니다.]

손끝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던졌다.

목적지는 정문이 아니다. VIP들이 드나드는 로비도 아니다.

호텔 뒷골목. 음식물 쓰레기 수거 차량이 드나드는 하역장이다.

쿵.

가볍게 착지했다.

경비원 두 명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야, 이번 파티에 헌터 협회장도 온다며?"

"말도 마라. 경호 팀 비상이다. 근데 이수진 그 여자는 왜 갑자기 이런 걸 연다냐? 김철수 헌터 실종된 마당에."

"이미지 세탁이지 뭐. 힐러들은 원래 이미지가 생명이잖아."

경비원들이 낄낄거렸다.

나는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갔다.

"누, 누구냐!"

경비원이 손전등을 비췄다.

하지만 빛이 내 얼굴에 닿기도 전에, 내 발밑에서 뻗어 나간 그림자가 먼저 그들의 발목을 덮쳤다.

스르륵.

검은 연기가 뱀처럼 휘감기자 두 사람의 눈이 뒤집혔다.

"억...!"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죽이지는 않았다. 굳이 살의를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경비원의 주머니를 뒤져 마스터 키를 꺼냈다.

[스킬: 그림자 은신(F) 발동]

[주변의 빛을 왜곡하여 형체를 숨깁니다.]

흑염의 응용 기술이다. 완벽한 투명화는 아니지만, 어둠 속에서는 누구도 나를 볼 수 없다.

단, 부작용이 있다.

파직!

내가 지나가자 복도의 전구들이 하나씩 터져 나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지만 먹통이었다. 회로가 타버린 모양이다.

"......계단으로 가야겠군."

나는 30층까지 이어진 비상구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센서등이 꺼지고, 비상벨이 오작동을 일으킬 것이다.

상관없다.

어차피 내가 가는 곳이 곧 재앙이니까.


같은 시각. 무너진 모텔 앞.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박태수 팀장은 반쯤 탄 모텔 간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팀장님, 감식 결과 나왔습니다."

신입 조사관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역시나 가스 폭발은 아닙니다. 발화점인 304호에서 검출된 성분, 김철수 사망 현장이랑 일치합니다."

"마력 반응 제로인 그을음?"

"네. 그리고..."

신입이 마른기침을 했다.

"생존자가 있습니다. 모텔 주인입니다."

박태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디 있어?"

"구급차에 실려 가기 전에 진술을 확보했습니다.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는데도, 정신은 멀쩡하더군요."

박태수는 녹음기를 재생했다.

치지직...

[아니야... 가스가 아니었어... 그 총각... 304호 총각이 날 구해줬어...]

[어떻게 생겼습니까?]

[모자를 푹 눌러썼는데... 봤어. 얼굴 반쪽에... 화상 흉터가 있었어. 그리고 눈이... 눈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어...]

박태수가 정지 버튼을 눌렀다.

"화상 흉터."

그의 머릿속에 강진혁의 헌터 등록증 사진이 떠올랐다.

사람 좋게 웃고 있는 평범한 청년의 얼굴.

하지만 공허의 틈에서 살아 돌아왔다면, 그 얼굴이 온전할 리 없다.

"놈이다."

박태수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강진혁이 여기 숨어 있었어."

"하지만 팀장님, 이해가 안 됩니다. 복수귀가 왜 사람을 구합니까? 그냥 도망쳐도 됐을 텐데요."

"......"

박태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김철수를 죽일 때의 그 잔혹함.

노인을 구할 때의 망설임.

박태수는 담배 필터를 잘근 씹었다.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인지, 아직 인간이고 싶은 괴물인지."

어느 쪽이든 위험하다.

"위치 추적은?"

"CCTV가 다 녹아서 동선 파악이 어렵습니다. 다만..."

신입이 지도를 띄웠다.

"여기서 발견된 타다 남은 전단지가 있습니다. 놈의 방 쓰레기통에서요."

증거물 봉투 안에 담긴 젖은 종이 조각.

[...랜드 힐 호텔... 자선 파티...]

박태수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랜드 힐 호텔."

"네?"

"오늘 밤 이수진이 거기서 파티를 연다."

박태수의 머릿속에 하나의 선이 그어졌다.

김철수 다음은 이수진이다.

배신자 파티의 홍일점. 대중의 사랑을 받는 성녀.

놈은 화려한 무대 위에서 그녀를 끌어내리려 하는 것이다.

"전원 출동한다."

박태수가 차에 올라탔다.

"사이렌은 꺼. 놈을 자극하면 안 된다. 호텔 전체가 인질이 될 수도 있어."


그랜드 힐 호텔, VIP 대기실.

이수진은 거울을 보며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메이크업이 이게 뭐야? 내가 좀 더 창백해 보여야 한다고 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벌벌 떨며 파우더를 덧발랐다.

"됐어, 나가."

이수진이 손을 휘저었다. 스태프들이 도망치듯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그녀는 핸드백에서 약통을 꺼냈다.

신경안정제.

손이 덜덜 떨렸다. 약통 뚜껑을 여는 것조차 버거웠다.

'김철수가 죽었어.'

뉴스에서는 실종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김철수의 생명 반응이 완전히 사라졌다. 힐러인 그녀는 동료의 죽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 죽음의 냄새가, 일주일 전 던전에서 맡았던 것과 똑같았다.

"강진혁..."

이수진은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와인을 들이켰다.

"아니야. 걘 죽었어. 뼈도 안 남았다고."

최민석 오빠가 말했다. 완벽한 계획이었다고.

강진혁은 '적합자'였고, 우리는 그를 제물로 바쳐서 더 큰 힘을 얻으려 했다.

물론 그 힘은 최민석이 독차지했지만.

"난 잘못 없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그녀는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난 성녀야. 사람들을 치료하고, 기부도 많이 했어. 그러니까... 난 괜찮아."

똑똑.

노크 소리에 이수진이 화들짝 놀랐다.

"누, 누구세요?"

"룸서비스입니다. 주문하신 샴페인 가져왔습니다."

"시킨 적 없는데?"

"매니저님이 서비스로 보내셨습니다."

이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웨이터 복장을 한 남자가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고개를 푹 숙인 남자였다.

"거기 두고 나가요."

이수진은 거울을 보며 입술을 다시 칠했다.

그런데 남자가 나가지 않았다.

"뭐 해요? 안 나가고?"

이수진이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샴페인 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 샴페인, 이름이 참 좋네요."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뭐라고요?"

"'La Grande Dame'. 위대한 여인."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모자챙 아래로, 끔찍하게 일그러진 화상 흉터가 드러났다.

검게 변한 눈동자가 이수진을 꿰뚫듯 응시했다.

"성녀님께 딱 어울리는 술이야. 안 그래, 수진아?"

쨍그랑!

이수진의 손에서 와인잔이 떨어졌다.

붉은 와인이 카펫을 적셨다. 마치 피처럼.

"가... 강..."

"쉿."

진혁이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소리지르면 안 돼. 밖에는 네 팬들이 잔뜩 있잖아?"

진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밟은 카펫이 검게 변색되며 썩어들어갔다.

"보여줘야지. 성녀님의 진짜 얼굴을."

"오, 오지 마! 경호원! 여기... 읍!"

진혁의 손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이수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했잖아. 조용히 하라고."

진혁은 공포에 질린 이수진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자비로웠다. 악마가 죄인을 맞이할 때 지을 법한, 아주 자비로운 미소.

"파티는 이제 시작이야."


호텔 로비.

회전문이 멈췄다.

자동문이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다.

로비의 샹들리에가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박태수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쥐었다.

"윽..."

"팀장님? 왜 그러십니까?"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박태수의 눈에는 보였다.

호텔 전체를 감싸고 있는 희미한 검은 안개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조명이 좀 이상하네, 오늘따라 머리가 아프네 하며 지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박태수에게는 명확했다.

이곳은 이미 사냥터였다.

"30층이다."

박태수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었다.

"30층 VIP 대기실. 이수진 헌터가 거기 있다."

"팀장님,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안 합니다!"

"젠장."

박태수는 비상구로 방향을 틀었다.

"지원팀은 건물 포위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나가게 막아. 나는 올라간다."

박태수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제6화: 성녀의 가면

"늦었어."

박태수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마력탄 권총이 불을 뿜었다.

탕! 탕!

정확히 미간과 심장을 노린 사격.

하지만 총알은 허공을 가르고 벽에 박혔다.

"......!"

VIP 대기실은 텅 비어 있었다.

깨진 와인잔. 바닥을 적신 붉은 와인.

그리고 활짝 열린 발코니 창문으로 밤바람이 거칠게 불어오고 있었다. 커튼이 유령처럼 펄럭였다.

박태수는 발코니로 달려갔다.

난간 아래는 까마득한 30층 높이의 허공이었다.

"팀장님! 이수진 헌터가 없습니다!"

뒤따라온 요원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박태수는 난간을 움켜쥐었다. 장갑에 검은 그을음이 묻어났다.

"아니. 멀리 못 갔어."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살 타는 냄새. 그리고 역한 유황 냄새.

냄새는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옥상이다."


호텔 옥상 헬리포트.

이수진은 난간 끝에 매달려 있었다.

"사, 살려줘! 제발!"

그녀의 발아래는 현기증 나는 서울의 야경이었다. 떨어지면 형체도 남지 않으리라.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건 강진혁이었다.

진혁은 한 손으로 그녀를 대롱대롱 매달아 둔 채, 다른 손으로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구겨진 담배 한 개비가 나왔다.

"수진아."

"흐윽, 흐으윽..."

"네가 그랬잖아. 힐러는 마력이 생명이라고. F급 짐꾼한테 쓸 마력은 없다고."

진혁이 라이터를 켰다. 바람이 심해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치이익.

두 번의 헛손질 끝에 담배 끝이 붉게 타들어 갔다.

"나도 그래. 흑염은 내 생명력을 태우거든. 너 같은 거 살려줄 여유가, 내가 좀 없다."

"도, 돈 줄게! 내 전 재산 다 줄게! 빌딩도 있고, 주식도 있어! 제발!"

이수진이 발버둥 쳤다. 하이힐 한 짝이 벗겨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진혁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매캐한 연기가 밤공기에 흩어졌다.

"돈은 필요 없고. 정보나 내놔."

"무, 무슨 정보?"

"최민석 금고에 있는 약. 그거 진짜 치료제 맞아?"

이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그거..."

"거짓말하면 손 놓는다. 셋 셀까?"

진혁이 손에 힘을 풀었다. 이수진의 몸이 덜컹거리며 아래로 쏠렸다.

"아악! 말할게! 말할게!"

이수진이 비명을 지르며 다급하게 외쳤다. 침이 튀었다.

"가짜야! 그건 치료제가 아니야!"

진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짜?"

"억제제야! 그냥... 그냥 뇌를 마비시켜서 흑염 폭주만 막는 거라고! 치료 같은 건 안 돼!"

억제제.

김철수가 준 실패작이 독약이라면, 최민석이 가진 완성본은 마약이라는 소리인가.

"그럼 완전히 인간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어! 애초에 그런 건 없다고! 넌... 넌 그냥 실패작이야! 폐기됐어야 할 쓰레기라고!"

이수진이 악을 썼다. 공포가 극에 달하자 밑바닥 본심이 튀어 나왔다.

"최민석 오빠가 그랬어. 너 같은 건... 그냥 배터리로 쓰다가 버리면 된다고!"

진혁은 헛웃음을 흘렸다.

배터리.

나를 그렇게 불렀구나.

가슴 명치끝에서 차가운 불길이 치솟았다.

"그래. 배터리."

진혁이 이수진을 끌어올렸다.

"다행이네. 넌 배터리도 못 되니까."

"어...? 사, 살려주는 거야?"

이수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혁은 그녀를 옥상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녀의 목을 밟았다.

"아니. 넌 그냥 땔감이야."

콰아앙!

진혁의 발바닥에서 검은 불기둥이 솟구쳤다.

"끄아아아아!"

성녀의 비명은 짧았다.

순백의 드레스가 검게 말려 들어갔다. 그녀의 자랑이었던 하얀 피부도, 거짓된 미소도, 흑염 앞에서는 평등하게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복수 대상 2/3 처치]

[저주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경고: 살인으로 인한 업보가 쌓입니다.]

진혁은 무표정하게 시스템 창을 휘저어 없앴다.

그때였다.

"손들어!"

옥상 문이 열리고 박태수가 뛰쳐나왔다. 수십 명의 무장 요원들이 부채꼴로 진혁을 포위했다.

"강진혁!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박태수의 총구가 진혁의 미간을 겨눴다.

진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연기에 휩싸인 채, 화상 입은 얼굴로 박태수를 바라보는 눈빛.

그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벼랑 끝에 몰린 짐승, 아니, 사냥을 끝마친 포식자의 눈이었다.

"팀장님."

진혁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쇠를 긁는 소리가 났다.

"내가 도망치는 걸로 보여요?"

"뭐?"

"난 사냥하는 중인데."

진혁이 발을 굴렀다.

콰지직!

옥상 바닥 콘크리트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단순한 발구르기가 아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헬리포트의 H자 마크 위. 그 아래에는 호텔의 메인 전력 케이블이 지나가고 있었다.

[저주 발동: 대규모 정전 유발]

[불행의 범위가 건물 전체로 확장됩니다.]

퍼버벅!

옥상의 조명탑 전구가 터져 나갔다. 유리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동시에 호텔 전체의 불이 꺼졌다. 거대한 빌딩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잠겼다.

"전력 차단! 비상 발전기 돌려!"

"시야 확보해!"

암흑천지.

요원들이 당황하여 야간 투시경을 더듬거리는 사이, 진혁은 난간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이 미친 새끼가!"

박태수가 달려가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호텔 로비는 아수라장이었다.

정전으로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들의 비명소리. 비상구 계단으로 쏟아져 나온 VIP들의 고함. 휴대폰 플래시 불빛들이 반딧불이처럼 어지럽게 춤췄다.

그 혼란 틈바구니에, 웨이터 복장을 한 남자가 섞여 있었다.

강진혁이었다.

그는 옥상에서 뛰어내리며 외벽의 배수관을 탔고, 10층 테라스로 착지해 미리 훔쳐둔 옷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배수관이 터져 호텔 외벽이 물바다가 됐지만, 내 알 바 아니다.

'억제제.'

진혁은 인파에 섞여 호텔을 빠져나가며 생각했다.

완전한 치료제는 없다.

하지만 억제제라도 있어야 한다.

방금 이수진을 죽일 때 느꼈다. 살의가 나를 지배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손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흥분 때문이었다.

이대로 가면 나는 정말로 괴물이 된다. 최민석을 죽이기도 전에.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해."

그는 밤거리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뒤에서는 여전히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제7화: S급 수배령

[속보] 그랜드 힐 호텔 테러 발생... '성녀' 이수진 헌터 사망 추정

[단독] 용의자는 죽은 줄 알았던 F급 헌터 강진혁... '악마의 귀환'인가?

서울역 대합실의 대형 TV 앞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화면에는 내가 찍혀 있었다.

흐릿한 CCTV 화면. 웨이터 복장을 하고 이수진의 대기실로 들어가는 내 모습.

그리고 옥상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뛰어내리는 장면.

"세상에, 미친놈 아냐?"

"이수진 헌터가 얼마나 착한 사람이었는데..."

"저런 괴물은 당장 사형시켜야 해!"

사람들의 비난이 화살처럼 꽂혔다.

나는 마스크를 고쳐 쓰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성녀라...'

죽기 직전 나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며 살려달라고 빌던 그 추한 얼굴을, 대중은 모른다.

알 필요도 없겠지. 그들에게 나는 그저 영웅을 죽인 빌런일 뿐이니까.

"지나가겠습니다."

나는 사람들 틈을 파고들었다.

툭.

"아, 죄송합니다."

지나가던 행인의 어깨를 살짝 스쳤다.

"괜찮습니다... 윽!"

행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왜 그러세요?"

"발목이... 갑자기 발목이 꺾였어!"

멀쩡한 평지였다. 돌부리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행인의 발목은 기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던 것 같다.

[저주 발동: 타인의 불행(골절)을 유발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기요! 사람을 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어? 저 사람, 옷차림이 뉴스에 나온..."

뒷목의 솜털이 곤두섰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제기랄.'

사람이 많은 곳은 안 된다. 스치기만 해도 사고가 터진다.

편의점에서 물을 사려고 해도 알바생이 커터 칼에 손을 베이고, 버스를 타면 타이어가 펑크 난다.

나는 사회에서 격리되었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야만,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나는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섰다.

갈 곳이 없다.

어머니가 계신 요양병원? 절대 안 된다. 내가 근처에 가는 순간 병원에 불이 나거나 의료 기기가 고장 날 것이다.

옛 친구? 나를 신고하거나, 내 저주에 휘말려 다칠 것이다.

"크으으..."

심장이 조여왔다. 흑염이 다시 꿈틀거렸다. 위장이 뒤틀리는 감각.

약이 필요하다.

김철수에게서 뺏은 미완성 치료제는 이제 반 병밖에 남지 않았다.

이걸 다 마시면, 그다음은?

그때, 골목길 전광판에서 최민석의 긴급 기자회견이 나오고 있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검은 정장을 입은 최민석은 수척해 보였다. 연기력이 남우주연상 감이다.

"제 동료를 둘이나 잃었습니다. 범인은... 한때 제 친구였던 강진혁입니다."

최민석이 눈물을 훔쳤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는 폼이 예술이다.

"그는 던전에서 저주받은 힘을 얻고 타락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플래시가 터졌다.

최민석의 눈빛이 돌변했다.

"오로라 길드는 현 시간부로 강진혁에 대한 현상금 100억 원을 겁니다."

100억.

"생포는 필요 없습니다. 사체라도 상관없습니다. 이 사회의 암적인 존재를 제거해 주십시오."

공식적인 살인 청부.

이제 헌터뿐만 아니라, 일반인, 조폭, 심지어 경찰까지 나를 노릴 것이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프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나는 전광판을 향해 중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나도 숨어다니는 건 질렸거든."


헌터 협회, 감사팀 사무실.

박태수는 책상을 내리쳤다.

"현상금 100억? 미친 거 아냐?"

"오로라 길드에서 정식으로 공문을 보냈습니다. 협회장님도 승인하셨고요."

신입 조사관이 떨면서 대답했다.

"이건 그냥 사냥 대회야! 도심 한복판에서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박태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100억이면 눈 뒤집힌 헌터들이 수천 명은 몰려들 것이다. 강진혁이 아무리 강해도 물량 공세에는 장사 없다.

게다가 놈의 능력은 광역 피해를 입힌다. 놈을 잡으려다 서울시가 불바다가 될 수도 있다.

"증거물 분석 결과는?"

박태수가 화제를 돌렸다.

"아, 네. 그랜드 힐 호텔 옥상에서 발견된 재... 거기서 특이한 성분이 검출됐습니다."

신입이 모니터에 화학 구조식을 띄웠다.

"마약성 진통제 베이스에, 고농축 마력이 섞여 있습니다. 근데 이거..."

"이거 뭐?"

"협회 금지 약물 리스트에 있는 '블루 블러드(Blue Blood)'랑 구조가 90% 일치합니다."

블루 블러드.

박태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10년 전, 헌터들의 폭주를 막겠다며 개발되다가 부작용이 심해 폐기된 약물. 공식적으로는 전량 폐기되었다.

그런데 이게 왜 이수진 사망 현장에 있지?

이수진이 가지고 있었거나, 강진혁이 가지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오로라 길드는 이 금지 약물과 연관되어 있다.

"최민석..."

박태수의 머릿속에 하나의 선이 그어졌다.

이 모든 판을 짠 설계자가 누구인지.

강진혁은 미친개가 아니다. 주인에게 물린 사냥개다. 그리고 지금 주인을 물어뜯으러 돌아온 것이다.

"팀장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다른 조사관이 외쳤다.

"강동구 폐하수처리장 근처에서 식당이 붕괴됐답니다! 목격자가 화상 입은 남자를 봤다고 합니다!"

"하수처리장?"

박태수가 일어났다.

"놈이 숨을 곳은 거기밖에 없어. 악

제8화: 악마와의 조우

"죽여! 머리만 가져가면 돼!"

용병 헌터들이 수로를 따라 몰려왔다.

전직 군인, 파면된 헌터, 빚에 쫓기는 조폭. 100억이라는 숫자에 이성이 마비된 인간 군상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사람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로또 복권으로 보일 것이다.

콰앙! 콰광!

마법이 난사되었다. 파이어볼이 오수를 증발시키며 역한 가스를 뿜어냈다. 열기가 뺨을 스쳤다.

"크윽..."

콘크리트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등 뒤에서 콘크리트 파편이 튀었다.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다. 숫자가 너무 많다. 게다가 내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에, 약물 부작용, 그리고 며칠간의 도주.

하지만 이곳은 하수구다.

빛보다 어둠이, 질서보다 혼돈이 익숙한 곳.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 규정 따위는 지켜지지 않는 폐기물의 무덤.

[조건 충족: 불행의 연쇄 작용]

[저주가 환경 요소를 장악합니다.]

시스템 창이 붉게 점멸했다.

나는 바닥에 고인 걸쭉한 오물에 손을 담갔다. 손끝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물살을 타고 퍼져나갔다.

"자, 넘어지시지."

선두에 있던 덩치 큰 헌터가 발을 내디뎠다. 하필이면 이끼가 가장 두껍게 낀 지점이었다.

미끌.

"어?"

그의 몸이 볼품없이 기울었다. 중심을 잃은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으악!"

그가 뒤로 넘어지며 뒤따라오던 동료의 팔을 쳤다. 하필이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던 팔을.

타앙!

오발 된 마력탄이 좁은 수로를 갈랐다. 총알은 정확히 천장에 매달린 낡은 가스 배관의 부식된 연결부를 때렸다.

쉬이익—!

"뭐야!"

"가스? 가스다! 불 꺼!"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늦었다. 찢어진 배관에서 고압의 가스가 분출되며 천장의 녹슨 철근들을 흔들었다.

끼이익— 쾅!

수 톤에 달하는 배관 덩어리가 헌터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아악! 내 다리!"

"야 이 미친놈아! 총을 어디다 쏘는 거야!"

비명과 욕설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리가 깔린 헌터가 절규했고, 그를 구하려던 동료는 2차 붕괴에 휘말려 넘어졌다.

완벽한 불행의 도미노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첨벙, 첨벙.

오물을 튀기며 달렸다. 폐에 곰팡이가 피는 것 같은 악취가 찼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저기 간다! 쏴! 쏘라고!"

잔해에 깔리지 않은 헌터 하나가 소리쳤다. 그는 반자동 소총을 내 등을 향해 겨눴다. 거리는 20미터. 빗나갈 수 없는 거리.

철컥.

하지만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어? 왜 이래? 잼(Jam)이 걸렸나?"

그가 당황하며 노리쇠를 후퇴 고정하는 순간.

쾅!

약실 내부의 과열된 탄약이 폭발했다.

"끄아아악! 내 손! 내 손가락!"

손가락이 잘려나간 헌터가 바닥을 뒹굴었다.

내 주변의 확률은 항상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타인에게는 최악의 형태로 작용한다. 그것이 '저주'라는 이름의 축복이었다.

비명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을 때, 걸음을 늦췄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벽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에 끈적한 이끼의 감촉이 닿았다.

"하아... 하아..."

심장이 갈비뼈를 때리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시야가 흐릿했다.

이대로 13구역 출구까지만 가면 된다. 거기는 미로처럼 복잡해서 놈들이 쉽게 추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등골이 서늘했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방금 전까지 들리던 헌터들의 고함소리도, 쥐새끼들이 찍찍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오직 물 떨어지는 소리만 똑, 똑, 똑,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저 앞, 어둠이 짙게 깔린 삼거리.

그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헌터들이 입는 요란한 방어구도, 총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낡은 트렌치코트에 구겨진 중절모.

그는 어둠 속에서 라이터를 켰다.

치익.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며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깊게 패인 주름, 무미건조한 눈동자.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독한 담배 냄새.

박태수였다.

"냄새가 나는군."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뱉으며 말했다.

"시궁창 냄새 말고. 겁에 질린 짐승 냄새 말이야."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온 거지? 입구는 헌터들이 막고 있었을 텐데. 다른 통로? 아니면 그들을 뚫고?

"놀란 눈치네."

박태수가 천천히 걸어왔다. 구두굽 소리가 하수구 벽을 타고 울렸다. 또각, 또각. 마치 카운트다운처럼.

"네가 뿌린 미끼들, 꽤 쓸만하더군. 오로라 길드가 100억을 쓴 이유를 알겠어. 넌 걸어 다니는 재앙이야."

"칭찬으로 듣지."

나는 뒷걸음질 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왜 혼자지? 100억이면 친구랑 나눠 먹기도 벅찰 텐데."

"돈?"

박태수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온기가 없었다.

"난 돈 때문에 움직이지 않아. 알잖아, 강진혁 씨. 내가 쫓는 건 범죄자지, 현상금이 아니야."

그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거리는 10미터.

[경고: 압도적인 무력 개체를 감지했습니다.]

[저주가 위협을 느낍니다.]

시스템이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렸다. 아까의 헌터들과는 격이 다르다. 이 남자는 '진짜'다.

"네가 훔친 대포폰, 편의점 CCTV. 너무 뻔하잖아. 일부러 흘린 거지?"

박태수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최민석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넌 다른 곳으로 빠지려고. 그런데 계산 착오가 있었네."

"......"

"내가 냄새를 너무 잘 맡는다는 거."

그가 손을 까딱였다.

"순순히 따라와. 수갑은 채우지 않으마. 내 손이 수갑보다 튼튼하거든."

협상? 아니, 통보였다.

나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천장에 매달린 배관, 바닥의 깨진 타일, 벽에 튀어나온 철근.

내 불행이 닿을 수 있는 변수들.

하지만 박태수는 빈틈이 없었다. 그는 정확히 안전한 지형지물만 밟고 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 S급 탐색꾼의 '직감'이었다.

"거절한다면?"

"그럼 아까 그 놈들처럼 되겠지. 손가락이 날아가거나, 다리가 으깨지거나."

박태수의 몸에서 푸른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선택해. 법대로 갈지, 힘대로 갈지."

상황은 최악이었다. 도주는 불가능하다. 싸움은 자살행위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하나뿐이다.

나는 주머니 속에 있던 작은 유리병을 꽉 쥐었다. 최민석이 주입했던 그 독약의 샘플.

이걸 쓴다면 내 몸은 망가질 것이다. 하지만 잡혀서 실험실의 쥐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

"박태수 경감님."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당신은 운을 믿나?"

"아니. 난 실력만 믿어."

"유감이군."

나는 유리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유리 파편과 함께 보라색 액체가 튀었다. 독가스가 아니라,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였다.

동시에 나는 내면의 흑염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저주 '흑염'이 폭주합니다!]

[주변의 모든 확률이 0으로 수렴합니다.]

콰아아아앙!

단순한 붕괴가 아니었다. 하수구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박태수의 발밑, 천장, 벽, 모든 것이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미친 놈이!"

박태수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드는 순간, 나는 무너지는 바닥 아래,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둠이 나를 삼켰다.

"다음에 보자고, 사냥개 양반."

그것이 내가 지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제8화: 악마와의 조우

"아악! 내 눈!"

"이거 놔! 내가 쏘려던 게 아니라고!"

하수구는 문자 그대로 지옥도였다.

내가 손을 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숨죽이고 있었을 뿐.

놈들은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고, 오발하고, 서로를 적인 줄 알고 쐈다. 욕망에 눈이 뒤집힌 자들이 빛 한 줌 없는 시궁창에 모였으니, 작은 불행 하나가 도미노처럼 거대한 재앙으로 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저주 '불행'이 연쇄 작용을 일으킵니다.]

[적들의 공포심이 당신의 마력을 회복시킵니다.]

어둠 속에 웅크린 채 그 아수라장을 지켜봤다.

'꼴 좋네.'

S급 헌터건, 특수 부대 출신 용병이건, 불운 앞에서는 그저 허우적거리는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나를 죽이러 온 놈들이 되려 내 마력 배터리가 되어주고 있었다.

첨벙. 첨벙.

소란을 틈타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옮겼다.

이곳 지리는 놈들보다 내가 더 잘 안다. 짐꾼 시절, 몬스터 부산물을 처리하러, 혹은 길드가 싸지른 더러운 뒤처리를 하러 수도 없이 기어들어 왔던 곳이니까. 코를 찌르는 썩은 내조차 내겐 익숙한 이정표였다.

"거기냐! 강진혁!"

독한 놈 하나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머리에 적외선 고글을 쓴 용병이었다.

"네놈 목만 가져가면 100억이야!"

마체테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폼이 제법 매서웠다.

피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튀어나온 녹슨 철근을 툭 찼다.

팅.

철근이 미세하게 휘어졌다.

용병이 그 위를 밟는 순간.

"어?"

철근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용병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끄아악!"

중심을 잃은 용병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필이면 그가 들고 있던 마체테의 날이, 그가 짚으려던 바닥 쪽에 세워져 있었다.

푸욱.

"커헉..."

자기 칼에 쇄골이 뚫린 용병이 핏거품을 물고 바닥을 긁었다.

나는 그 옆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100억이, 참 무겁지?"

이제 출구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였다.

뒷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살의가 아니다. 이건... 감시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적외선 고글 따위가 아니라, 훨씬 더 근원적이고 집요한 감각으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는 건 어둠뿐. 들리는 건 쓰러진 용병들의 신음 소리와 오물 흐르는 소리뿐이었다.

아니.

저 멀리, 어둠이 뭉쳐 있는 곳.

그곳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오물을 밟는데도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유령처럼, 혹은 그림자처럼.

"난장판이군."

건조한 목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울렸다.

박태수였다.

그는 쓰러진 용병들을 밟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피하며, 한 손에는 마력탄 권총을 들고 있었다. 표정은 야근에 찌든 회사원처럼 무미건조했다.

"팀장님! 지원 병력은..."

뒤따라온 신입 조사관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밀폐된 공간에 가득 찬 피비린내와 하수구 악취가 역한 탓이었다.

"필요 없다.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간다."

박태수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놈은 S급 헌터들도 죽인 괴물입니다!"

"괴물?"

박태수가 피식 웃었다.

그는 정확히 내가 숨어 있는 기둥 뒤를 응시했다. 절대 보일 리가 없는 각도였지만, 시선이 내 눈동자에 닿는 느낌이었다.

"아니. 놈은 지금 겁먹은 짐승이야."

호흡이 턱 막혔다.

박태수는 천천히 걸어왔다.

"나와라, 강진혁. 거기 있는 거 안다. 냄새가 진동을 하거든."

도망쳐야 한다.

본능이 사이렌을 울려댔다. 저 인간은 다르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김철수나 이수진은 힘만 센 껍데기였다. 하지만 박태수는 진짜다. 진짜 사냥꾼이다.

호흡을 멈추고 흑염을 끌어올렸다.

[스킬: 그림자 은신(F) 활성화]

내 몸이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윤곽선이 흐릿해지며 배경과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박태수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은신? 소용없어. 네 놈한테선 역겨운 유황 냄새가 나니까."

탕!

예고도 없이 박태수가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내 머리 바로 옆, 콘크리트 벽에 박혔다. 튀어 오른 파편이 뺨을 긁고 지나갔다. 따끔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엔 머리다."

박태수가 불과 10미터 거리까지 좁혀왔다.

"투항해라. 그러면 최소한 인간으로서 재판받게 해주지."

"재판?"

참았던 헛웃음이 터졌다.

나는 기둥 뒤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한테? 나를 실험체로 쓴 협회한테? 아니면 내 목에 100억을 건 최민석한테?"

"......협회는 공정하다."

"공정? 개소리하지 마. 당신도 봤잖아. 그 실험 보고서."

박태수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3화에서 내가 일부러 흘리고 간 보고서. 그가 그걸 읽었다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다.

"그래. 봤다."

박태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오로라 길드가 널 실험체로 썼다는 거. 그리고 협회 일부가 묵

제8화: 악마와의 조우 (후반부)

"나는 불꽃을 튕겼다."

박태수의 동공이 바늘구멍처럼 수축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려 했지만, 내 손가락이 더 빨랐다. 지포 라이터의 부싯돌이 마찰하며 튀어 오른 불똥. 그 작은 점 하나가 허공을 갈랐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메탄가스가 그 불씨를 덥석 물었다.

"엎드려!"

박태수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다. 그는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신입 조사관의 목덜미를 낚아채 바닥으로 구랐다. 베테랑다운 판단이었다. 하지만 불길은 그보다 빨랐다.

화르륵- 쾅!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붉은 혀가 터널을 집어삼켰다.

폭발의 충격파가 등을 후려쳤다. 낡은 하수구 천장에서 콘크리트 파편과 흙더미가 비 오듯 쏟아졌다. 시야가 온통 잿빛 먼지로 뒤덮였다.

나는 폭발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날렸다. 열기가 등 뒤를 바짝 쫓아왔다.

"팀장님!"
"콜록! 물러서! 추가 붕괴 위험이 있다!"

무너진 잔해 너머에서 박태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은 막혔다. 놈과 나 사이를 거대한 돌무더기가 가로막았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달렸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고통을 잠시 잊게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윽..."

왼쪽 어깨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쑤시는 듯했다. 총알이 쇄골을 스치고 박힌 모양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가 뚝뚝 떨어져 오물을 적셨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박태수는 시각으로 쫓는 놈이 아니다. 놈은 냄새를 맡는다. 마력의 파장과 피 냄새를 기가 막히게 구분해내는 사냥개다.

'냄새를 지워야 해.'

나는 하수구 벽으로 몸을 기댔다. 벽에는 끈적하고 역겨운 이끼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물들이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 오물들을 한 움큼 쥐었다. 그리고 찢어진 어깨 상처에 처박았다.

"끄으으윽!"

비명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이를 악물어 삼켰다.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 병균이 혈관을 타고 침투하는 감각이 소름 끼치게 선명했다.

[경고: 상처 부위가 심각하게 오염되었습니다.]
[바이러스 감염 위험. 체력이 급격히 저하됩니다.]

상태창이 붉게 점멸했다. 기다리던 반응이었다.

[저주 '흑염'이 침입한 오염 물질을 소각합니다.]

치이이익.

검은 불꽃이 상처 부위에서 피어올랐다. 그것은 오물과 함께 내 살점까지 태워버렸다.

소독이라기보다는 자해에 가까운 행위.

살 타는 냄새와 하수구의 악취가 뒤섞여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그 역겨운 냄새가 내 피 냄새를 덮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미로처럼 얽힌 지하 수로의 가장 깊은 곳, 폐쇄된 구역을 향해 몸을 끌고 들어갔다. 어둠이 나를 완전히 삼킬 때까지.


무너진 갱도 앞.

박태수는 흙투성이가 된 채 몸을 일으켰다. 방호복은 곳곳이 그을렸고, 방독면은 반쯤 깨져 있었다.

"괜찮나?"

"네, 네... 쿨럭! 팀장님은요?"

"찰과상이야."

박태수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무너진 돌무더기를 노려보았다. 천장이 완전히 내려앉아 길을 막고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뚫을 수 없다. 중장비를 동원해야 하지만, 그러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린다. 그 시간이면 강진혁은 이미 서울 반대편으로 빠져나가고도 남을 것이다.

"놓쳤습니다. 지원 병력을 반대편 출구로..."

신입이 무전기를 들려 하자 박태수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니."

"네? 하지만 놈이..."

"철수한다."

박태수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 안은 미로야. 놈은 쥐새끼처럼 구조를 꿰고 있어. 무작정 병력을 투입했다간 우리만 죽어. 놈이 파놓은 함정이 또 없으란 법 없잖아."

박태수는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강진혁이 도망치며 흘린, 피 묻은 붕대 조각이었다.

그는 붕대를 코끝에 가져다 댔다.

"......"

지독한 오물 냄새. 썩은 이끼 냄새. 그리고 그 밑바닥에 아주 희미하게 깔린, 살이 타버린 냄새.

박태수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신의 상처를 오물로 덮고, 그걸 다시 태웠어?'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감염을 자처했다는 뜻이다.

살기 위해서라면 고통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독기. 단순한 쾌락 살인마나 미치광이 테러리스트에게서는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이건, 사냥감의 냄새가 아니다.

벼랑 끝에 몰린 짐승.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놈의 냄새다.

박태수는 품 안에서 구겨진 서류 뭉치를 꺼냈다. 3화, 폐공장에서 강진혁이 떨어뜨리고 간 그 서류였다.

[실험체명: 강진혁 / 적합도: S급]
[오로라 길드장 최민석 승인]

박태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강진혁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정의로운 척하지 마. 당신도 똑같은 놈들이니까.'

박태수는 붕대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강진혁 말이 맞을지도 몰라."

"네? 무슨..."

"우리가 총구를 겨눠야 할 곳이, 이 더러운 하수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야."

박태수는 무전기를 켰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상황실. 지금 즉시 오로라 길드 최민석 길드장의 최근 1년간 약물 처방 기록, 그리고 길드 비공식 자금 내역 전부 확보해."

무전기 너머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팀장님, 그건 규정 위반입니다! 상대는 오로라 길드입니다. 영장 없이는...]

"영장은 내가 만들어. 시키는 대로 해."

"팀장님, 그러다 진짜 옷 벗으십니다."

신입이 걱정스레 끼어들었지만, 박태수는 콧방귀를 꼈다.

"이미 징계는 확정이야. 갈 때 가더라도 똥인지는 찍어 먹어봐야겠어."

박태수는 막힌 터널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사냥개는 냄새를 맡았다.

진짜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곳은 이 하수구가 아니다. 저 위,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된 빌딩 숲.

그곳에 진짜 괴물이 살고 있다.


서울 강남, 오로라 길드 본사 최상층 펜트하우스.

통유리창 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보석처럼 펼쳐져 있었다. 발아래 세상은 개미처럼 작았고, 불빛들은 아름다웠다.

최민석은 최고급 가죽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와인잔 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짧은 보고가 떠 있었다.

[작전 실패. 타겟 도주.]
[용병단 전멸. 생존자 없음.]
[박태수 팀장, 길드 관련 정보 조회 시도 중.]

"하..."

최민석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100억을 썼는데 쥐새끼 한 마리를 못 잡아? 요즘 헌터들 수준 참 처참하네."

그는 휴대폰을 소파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루하던 차에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F급 짐꾼이었던 강진혁.

착해 빠져서 시키는 대로 짐이나 나르던 녀석이, 이제는 대한민국 공권력과 길드를 동시에 엿먹이는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넌 최고의 '그릇'이야, 진혁아."

최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육중한 금고를 열자, 그 안에는 푸른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수십 개 나열되어 있었다.

이수진이 '억제제'라고 불렀던 그것.

하지만 최민석에게 그것은 '사료'였다.

그는 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땄다. 그리고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꿀꺽.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위장이 뜨겁게 요동쳤다.

"크으으..."

최민석의 몸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척추뼈가 툭툭 튀어나올 듯 꿈틀거렸고, 그림자가 멋대로 길어졌다.

그의 등 뒤에서 솟구친 그림자는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눈과 미끈거리는 촉수가 달린, 형용할 수 없는 괴물.

이것은 헌터들이 사용하는 '성스러운 힘'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던전 깊은 곳,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심연에서 계약한 이계의 존재.

강진혁의 흑염이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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