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9: 에피소드 리비전
Critic+Writer · 버전 1 · 초안
산출물 (v1)
1화: 사냥이 끝난 사냥개
“크억…!”
심장이 타는 듯한 통증.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가슴에 박힌 것은 내가 평생을 바쳐 충성했던 길드장, 최상철의 검이었다.
“도현아, 미안하게 됐다.”
최상철이 내 귓가에 입을 대고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죄책감도 없었다. 그저 다 쓴 건전지를 폐기하는 듯한 건조함뿐.
“이번 [용의 둥지] 레이드, 실패의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야. 네가 짐꾼 출신이라 그런지 맷집 하나는 좋잖아? 마지막까지 쓸모가 있어서 다행이야.”
“이… 개새….”
목구멍에서 피거품이 올라왔다.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20년.
F급 짐꾼으로 시작해, 내 목숨을 갈아넣으며 그를 S급 헌터로 만들었다.
그가 빛나는 동안 나는 그림자 속에서 몬스터의 내장을 뒤집어썼고, 그가 영웅 대접을 받는 동안 나는 더러운 뒷처리를 도맡았다.
그 대가가 고작 이건가.
“잘 가라. 네 몫까지 내가 잘 먹고 잘 살게.”
푸욱.
최상철이 검을 비틀어 뽑았다.
몸이 허공으로 무너졌다.
차가운 던전 바닥이 뺨에 닿았다.
멀어지는 최상철의 등 뒤로, 길드원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억울해.’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내 20년이, 내 피와 땀이 저런 쓰레기의 밑거름이 되어선 안 된다.
시야가 흐려졌다.
죽음이 발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감각.
그때였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히든 특성 '회귀자(The Regressor)'가 개방됩니다.]
허공에 떠오른 푸른색 메시지 창.
이게 뭐지? 죽기 전에 보는 환각인가?
[당신의 억울한 죽음이 시공간의 축을 비틀었습니다.]
[20년 전, 모든 것이 시작되던 그날로 되돌아갑니다.]
“뭐…?”
[회귀를 시작합니다.]
[3, 2, 1….]
눈앞이 화이트아웃 되었다.
강렬한 빛이 나를 집어삼켰다.
“헉!”
숨을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공기가 낯설도록 상쾌했다.
던전의 비릿한 피 냄새가 아니었다.
곰팡이 냄새, 그리고 눅눅한 벽지 냄새.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누렇게 뜬 벽지, 형광등 갓 안에 죽어 있는 날벌레들.
내 몸을 일으켰다.
낡은 스프링 매트리스가 끼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여긴….”
반지하 단칸방.
내가 20대 초반에 살았던, 보증금 300에 월세 25짜리 그 방이었다.
“꿈인가?”
나는 뺨을 세게 꼬집었다.
아팠다.
꿈이 아니다.
떨리는 손으로 머리맡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 화면에 찍힌 날짜.
[2026년 5월 12일]
“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2026년.
던전이 세상에 열린 지 고작 1년이 지난 시점.
그리고 내가 헌터 협회에 짐꾼으로 등록하고, 최상철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 해였다.
“진짜로… 돌아왔어.”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과 흉터로 엉망이었던 40대의 손이 아니었다.
아직은 깨끗하고, 하지만 힘이 넘치는 20대의 손.
나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나는 젊었다.
아니, 어렸다.
하지만 눈빛만은 20년의 지옥을 겪어낸 맹수의 그것이었다.
“상태창.”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허공에 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이름: 강도현]
[레벨: 1]
[직업: 짐꾼 (Porter)]
[칭호: 회귀자 (유일)]
[스탯]
- 근력: 12
- 민첩: 11
- 체력: 14
- 마력: 5
- 운: 88
[스킬]
- 짐 들기 (F): 무거운 물건을 조금 더 오래 들 수 있습니다.
- 도주 (F): 위험 상황 시 이동 속도가 5% 증가합니다.
- (New!) 마력 회로 지배 (Myth): 마력의 흐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합니다. (봉인됨)
- (New!) 진실의 눈 (S): 사물의 본질과 상대의 정보를 꿰뚫어 봅니다.
“이게 뭐야.”
내 입이 떡 벌어졌다.
짐꾼 스킬만 있던 쓰레기 상태창이 아니었다.
[마력 회로 지배]? [진실의 눈]?
전생에 최상철도, 그 어떤 S급 헌터도 가지지 못했던 신화(Myth) 등급 스킬이 박혀 있었다.
“하하… 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미친 듯이 웃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때까지 웃었다.
신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아니, 신도 최상철 그 새끼가 꼴보기 싫었던 게 분명하다.
“기다려라, 최상철.”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이 선명했다.
“이번 생은 내가 사냥꾼이다.”
“너는, 내가 씹어먹을 먹잇감이고.”
지잉.
스마트폰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발신: 최상철 팀장]
[야 강도현. 오늘 F급 던전 하나 잡혔다. 일당 7만원. 올 거냐? 선착순이다.]
전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이었다.
내가 최상철의 꼬임에 넘어가, 그의 ‘충실한 개’가 되기로 맹세했던 그날.
그리고 그 던전에서, 최상철이 ‘히든 피스’를 독식하고 승승장구하게 된 시작점.
나는 답장을 입력했다.
손가락이 춤을 췄다.
[갑니다.]
전송 버튼을 눌렀다.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가서, 네 밥그릇부터 걷어차 주지.”
1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350자
- 장면 수: 3개 (던전 사망 -> 반지하 방 회귀 -> 상태창 확인)
- 후킹: 죽음 직전의 복수심 + 회귀 후 압도적 스탯 확인.
- 클리프행어: 원수 최상철의 문자 도착과 복수의 서막 알림. (B급 - 기대형)
- 주요 설정: 히든 특성 '회귀자', 신화급 스킬 획득.
2화: 뱀의 혀
약속 장소는 서울 외곽의 폐공장이었다.
F급 게이트가 자주 생성되는 우범지대.
이미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싸구려 장비를 걸친 하급 헌터들.
그들 사이에서, 유독 번질번질한 가죽 갑옷을 입고 목소리를 높이는 남자가 보였다.
최상철.
20년 만에 보는 얼굴이다.
여전히 재수 없고, 여전히 뱀처럼 눈이 가늘었다.
“아, 오셨네 강도현 씨!”
최상철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전생에선 저 가식적인 미소에 속아 넘어가 형님, 형님 하며 따랐더랬지.
지금 보니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나는 짧게 고개를 까딱하고 대열의 뒤편에 섰다.
최상철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평소처럼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달려
Batch 4: 19~23화 (수정본)
19화: 엘릭서의 정수
콰아아아앙!
귀를 찢는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해일]의 압도적인 수압이 검은 로브의 사내를 덮쳤다.
응축된 물기둥이 경기장 천장을 뚫고 솟구쳐 올랐다. 사내를 감싸고 있던 검은 보호막이 유리창처럼 박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아아아악!"
물기둥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인간의 성대에서 날 수 없는 소리였다. 쇠를 긁는 듯한, 혹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기괴한 파열음.
나는 착지하자마자 [포식자의 송곳니]를 고쳐 쥐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놈의 기운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쏴아아아.
물보라가 걷히며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은 로브는 형체도 없이 찢겨 나갔고, 그 안의 흉측한 정체가 훤히 보였다.
역시, 인간이 아니었다.
창백하다 못해 시체처럼 회색빛이 도는 피부, 이마에 돋아난 검은 뿔.
전생에 던전 최심부에서나 마주쳤던 '마족'의 하급 단말이었다.
[네놈... 네놈은 대체 뭐냐! E급의 육신으로 이런 마력을...]
마족이 피투성이가 된 채 씩씩거렸다.
그의 한쪽 팔은 해일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뜯겨 나가 있었다. 절단면에서 검은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태웠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역한 노린내가 진동했다.
"말이 많네."
나는 바닥을 찼다.
거리는 10미터.
[마력 회로 지배]로 다리 근육에 마력을 한계까지 우겨넣었다. 근섬유가 비명을 질렀지만 무시했다.
0.5초.
순식간에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남은 한 손으로 급하게 마력 탄을 형성하려 했지만, 내 검이 더 빨랐다.
서걱!
[포식자의 송곳니]가 놈의 남은 팔을 매끄럽게 절단했다.
공중에 흩어지는 검은 피를 뚫고, 나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빈틈이 열린 놈의 명치가 눈에 들어왔다.
"잘 가라."
나는 건틀릿을 낀 왼주먹을 놈의 명치 깊숙이 꽂아 넣었다.
퍼억!
[특수 효과: 해일 발동]
"쿨럭!"
놈의 등 뒤로 물기둥이 터져 나갔다.
척추가 으스러지는 둔탁한 감촉이 주먹을 타고 전해졌다. 내장의 파열음과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마족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볼품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창이 시야를 가렸다.
로브의 사내가 쓰러지자, 공중에서 날뛰던 본 드래곤도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뼈다귀 무더기가 굉음을 내며 바닥을 굴렀다. 그를 따르던 언데드 몬스터들도 일제히 검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폐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전설급 장비의 연계 공격은 위력만큼이나 리스크가 컸다.
마력 소모가 극심해 단전이 텅 빈 것처럼 쓰라렸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억지로 버티고 섰다.
"강도현!"
뒤에서 서지윤이 달려왔다.
그녀의 어깨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대검을 쥐었던 양손은 경련하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본 드래곤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받아낸 후유증이다.
그녀는 바닥에 처박힌 마족의 시체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뭐야? 인간이 아니잖아."
"마족입니다. 하급이긴 하지만."
"마족...?"
서지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코어가 없는 던전에서 마족이 발견되었다는 건, 단순한 이변이 아니다. 국가 안보를 뒤흔들 대형 사건이다.
"설명은 나중에 하죠. 일단 보상부터 챙겨야 하니까."
나는 그녀의 질문을 자르고 마족의 시체로 다가갔다.
놈의 품을 뒤졌다. 가슴팍이 갈라진 틈 사이로, 영롱하게 빛나는 황금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보였다.
[엘릭서의 정수].
이 던전의 진짜 보상.
모든 상태 이상을 치유하고 마력 회로의 결함을 완벽히 수복하는 기적의 영약.
나는 손을 뻗어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유리 감촉 너머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엘릭서?"
서지윤이 알아보았다.
협회에서 공고했던 레이드 보상.
규정대로라면 공대장인 그녀에게 넘기고, 나중에 기여도에 따라 분배받아야 맞다. 하지만 이 엘릭서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이거, 제가 먹겠습니다."
"뭐? 안 돼! 그건 규정상 협회에 귀속되어야 할..."
"그럼 제가 죽인 이 마족 시체, 통째로 협회에 넘기죠. 이거면 특수조사팀 실적으로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서지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빠르게 계산하고 있었다. 마족의 시체는 전대미문의 증거물이다. 이것만 가져가도 그녀는 엄청난 공적을 세우게 된다. 반면 엘릭서를 뺏기 위해 나와 싸운다면?
그녀는 지금 지쳐 있고, 나는 방금 마족을 때려잡았다. 승산이 없다.
"그리고."
나는 유리병의 마개를 땄다. 달콤하면서도 비릿한 향이 코끝을 찔렀다.
"이미 늦었거든요."
꿀꺽.
황금색 액체를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가 뱃속으로 떨어졌다.
"강도현, 너 미쳤어?!"
서지윤이 기겁하며 다가왔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우웅-!
몸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마력 회로 지배] 스킬을 얻었을 때 겪었던 환골탈태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가 낡은 파이프를 강제로 뜯어고치는 고통이었다면, 지금은 그 파이프를 다이아몬드로 코팅하는 감각이었다.
전신에 퍼져 있던 미세한 노폐물이 모공 밖으로 배출되었다. 막혀 있던 혈이 뚫리고, E급 헌터의 고질적인 한계였던 마력 회로의 누수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크으윽..."
입안에서 검은 피가 울컥 넘어왔다. 뱉어내자 바닥이 치익 소리를 내며 녹았다. 몸 안에 쌓여 있던 독소였다.
[엘릭서의 정수를 복용했습니다.]
[신체의 모든 결함이 수복됩니다.]
[마력 수용량이 500% 증가합니다.]
[반응 속도가 S급 수준으로 보정됩니다.]
시야가 맑아졌다.
세상이 느리게 보였다. 떨어지는 물방울의 궤적, 먼지의 움직임까지 선명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가장 큰 족쇄였던 반응속도 0.5초의 페널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내 머리가 생각하는 속도 그대로, 아니 그보다 더 빠르게 몸이 움직인다.
"완벽하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끝에서 푸른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전생의 S급 시절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거대한 힘.
쿠구구궁!
그때, 신전 전체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의 거대한 돌덩이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바닥에 균열이 가며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던전이 무너지고 있어요!"
박태민이 방패로 낙석을 막아내며 소리쳤다.
보스인 마족이 죽으면서 던전을 유지하던 마력의 축이 붕괴한 것이다.
"전원 대피! 입구로 뛰어!"
서지윤이 공대장으로서 소리쳤다.
혼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던 헌터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나선형 계단을 향해 달렸다.
나도 배낭을 챙겨 매고 박태민의 뒤를 따랐다.
"강도현."
달리는 내 옆으로 서지윤이 바짝 붙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마족, 엘릭서, 그리고 나의 정체. 물어볼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눈이었다.
"나가서 얘기해. 도망칠 생각 마."
"도망 안 갑니다. 받을 돈이 얼만데."
나는 피식 웃으며 속도를 높였다.
무너지는 잔해를 피해, 우리는 빛이 쏟아지는 출구를 향해 몸을 던졌다.
20화: 적대적 공생
푸아아악!
송도 앞바다 수면 위로 헌터들이 튀어 올랐다.
나와 박태민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폐 속에 차 있던 짠물을 뱉어냈다.
뒤이어 거대한 소용돌이가 굉음을 내며 바다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게이트가 완전히 닫힌 것이다.
"살았다...!"
"던전이 닫혔어!"
생존한 헌터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개중에는 주저앉아 펑펑 우는 사람도 있었다.
해경 경비정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와 우리를 구조했다.
육지에 발을 딛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기자와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뜨렸다.
"서지윤 팀장님! 던전 클리어가 사실입니까!"
"천랑 길드가 실패한 곳을 어떻게 공략하신 거죠?"
"생존자는 몇 명입니까!"
질문 공세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서지윤은 피투성이가 된 전투복 차림으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의 표정은 냉철했다.
그녀의 시선이 취재진 너머, 구석에서 담요를 덮어쓰고 있는 나를 힐끔 향했다.
"협회 소속 헌터들의 헌신 덕분입니다. 상세한 브리핑은 추후 협회를 통해 발표하겠습니다."
그녀는 내 정체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마족의 시체는 그녀의 아공간 인벤토리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약속은 지킨 셈이다.
"대표님. 저희는 이제 어떡합니까?"
박태민이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그의 타워 쉴드는 여기저기 금이 가고 찌그러져 있었다. 끝까지 방어선을 지켜낸 영광의 상처다.
"수고했다. 넌 씻고 푹 쉬어. 보상금 정산되면 바로 꽂아줄 테니까."
"대표님은요?"
"난 밀린 숙제 좀 해야지."
나는 멀리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서지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박태민이 눈치를 채고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따라와요."
서지윤이 짧게 말하고는 협회 소속 검은색 밴 차량으로 향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차량 뒷좌석에 마주 앉았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의 격벽이 올라가며 완벽한 방음 공간이 만들어졌다. 차단된 공기 속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자, 이제 털어놓으시죠."
그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
Batch 5: 24~25화
24화: 흑룡의 역린
쾅-!
바닥을 박찬 내 몸이 포탄처럼 단상을 향해 쏘아졌다.
조명탄이라도 터진 듯 번쩍이는 마력의 궤적에, 단상 위에 서 있던 경매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나는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붉은 벨벳 천 위에 고이 모셔져 있던 [마신의 눈물]을 왼손으로 낚아챘다.
매끄러운 보석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마자 서늘한 마기가 피부를 타고 기어올랐다.
"뭐, 뭐야 저 새끼!"
"경비! 흑룡 길드 놈들 뭐 해! 당장 저 쥐새끼 안 죽이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경매장을 울렸다.
황금색 가면을 쓴 VVIP들이 패닉에 빠져 뒹굴었다. 누군가는 비싼 샴페인 잔을 엎질렀고, 누군가는 네발로 기어 출구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난장판 사이로, 단상을 향해 수십 명의 흑룡 길드 소속 경호원들이 무기를 빼 들고 달려들었다.
"진형 짜! 탱커 앞으로!"
경호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악을 썼다.
최소 C급, 대다수가 B급 이상인 정예 병력. 방패를 앞세운 거구들이 벽을 치고, 그 뒤로 마법사들이 캐스팅을 시작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내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이게 플랜 A야?"
내 등 뒤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난입한 서지윤이 쌍검을 뽑아 들고 서 있었다.
"잠입해서 조용히 빼낸다며, 이 미친놈아!"
"어. 근데 저 새끼들 면상 보니까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사실 잠입할 생각 따위 애초에 없었다. 흑룡 길드 놈들은 모조리 패죽이는 게 내 플랜 A다.)
서지윤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숨을 들이켰지만, 몸은 정직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검에서 뻗어 나온 푸른 검기가 선두에 있던 경호원 셋의 두꺼운 타워 실드를 단숨에 두 동강 냈다.
"협회 팀장 체면이 말이 아니네요, 조사관님."
"시끄러워! 훔쳤으면 빨리 튀기나 해! 뒷수습은 내가 할 테니까!"
서지윤이 툴툴거리면서도 내 사각지대를 완벽하게 커버했다.
하지만 나는 도망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공간 주머니에 [마신의 눈물]을 쑤셔 넣고, 양손에 [해신의 진노] 건틀릿을 소환했다.
푸른 수속성 마력이 묵직한 쇳덩어리를 감싸며 창고 안을 습하게 만들었다.
"튈 거면 혼자 튀어."
나는 몰려드는 경호원들을 향해 건틀릿을 낀 왼주먹을 거칠게 내질렀다.
[특수 효과: 해일 발동]
콰아아아앙-!
건틀릿에서 뿜어져 나온 압도적인 마력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단상 아래를 쓸어버렸다.
단순한 물벼락이 아니었다. 수백 톤의 질량을 가진 폭포수가 정면에서 들이받는 것과 같은 파괴력.
"크아아악!"
"방패가, 방패가 찌그러... 컥!"
십여 명의 경호원들이 물대포를 맞은 벌레처럼 벽과 천장에 처박혔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쇄적으로 울렸다.
단단했던 철제 방패들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미, 미친! E급이라며! 저게 무슨 E급이야!"
"아티팩트다! 저 새끼 장갑이 본체야! 원거리에서 장갑을 노려!"
놈들이 당황하면서도 포위망을 좁혀왔다.
서지윤과 내가 등을 맞댄 채 남은 놈들을 썰어버리려던 찰나였다.
짝, 짝, 짝.
아수라장이 된 경매장 2층.
VIP 룸의 통유리가 굉음을 내며 박살 났다.
그리고 쏟아지는 유리 파편 사이로, 누군가 여유롭게 박수를 치며 걸어 나왔다.
"어디서 굴러먹던 쥐새끼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짱 하나는 두둑하네."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내.
값비싼 이탈리아제 슈트에 올백으로 넘긴 머리.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길게 찢어진 눈매.
그 얼굴을 본 순간, 내 목덜미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핏줄이 터질 것처럼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10년 전, 아니 전생의 기억이 칼날처럼 뇌리를 후벼팠다.
내 팔다리를 톱으로 썰어내고, 날 하급 몬스터들의 번식장에 먹이로 던져주고는 비릿하게 웃던 그 면상.
'박진수.'
흑룡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이 불법 경매장의 진짜 주인.
놈이 2층 난간을 가볍게 밟고 뛰어내려 단상 위로 착지했다.
쿠웅-!
놈의 구두가 닿은 바닥이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졌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중압감. 최소 S급 턱밑까지 올라온 묵직한 마력 파장이었다.
"강도현."
서지윤이 내 등을 툭 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저놈, 평범한 각성자가 아니야. 마력 파장이... 아까 네가 말한 그 마족이랑 비슷해. 섞여 있어."
"알아."
나는 건조하게 대답하며 박진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금니를 너무 꽉 깨물어 턱관절이 아려왔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저 새끼의 목줄기를 물어뜯고 싶었지만,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오랜만이네, 개자식아."
내 도발에 박진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알아? E급 배지 단 거 보니까 어디서 어그로 끌려고 굴러들어온 관종 새끼 같은데."
놈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의 나는 놈에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루살이 하급 헌터 1일 뿐이니까.
"모르면."
나는 건틀릿을 낀 왼손으로 목을 우두둑 꺾었다.
"이제부터 몸으로 배우게 되겠지."
"하, 이 새끼 보소?"
박진수가 헛웃음을 쳤다.
"흑룡 길드가 요새 마족 똥구멍 핥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아까 그 장난감, 마족이랑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화기 맞지?"
내 노골적인 조롱에 박진수의 눈매가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마신의 눈물]의 진짜 용도를 알고 있는 자는 흑룡 길드 수뇌부뿐이다.
"어디서 무슨 헛소리를 주워듣고 예까지 기어들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박진수가 손을 치켜들었다.
"살아서 나가긴 글렀다. 죽여라. 고기 방패로 쓰게 뼈도 남기지 말고."
명령이 떨어지자, 대기하고 있던 A급 경호대장 두 명이 내 양옆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그들의 칼날이 내 목에 닿기 전, 서지윤의 대검이 놈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채앵-!
"네 상대는 나다. 강도현, 저놈은 네가 맡아!"
서지윤이 A급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며 소리쳤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바닥을 차고 박진수를 향해 도약했다.
"E급 주제에, 템빨 좀 믿고 깝치네."
박진수가 코웃음을 치며 주먹을 내질렀다.
놈의 주먹에 검은 흑염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휩싸였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해신의 진노]를 낀 왼주먹으로 놈의 흑염을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콰아아앙-!
푸른 물과 검은 불꽃이 충돌하며 거대한 수증기 폭발이 일어났다.
바닥의 암반이 푹 꺼지며 시야가 하얗게 가려졌다.
"큭!"
수증기를 뚫고 박진수가 뒤로 서너 걸음 밀려났다.
놈의 찢어진 눈에 처음으로 경악이 스쳤다.
"이게... E급의 힘이라고?"
"말했잖아. 이제부터 알게 될 거라고."
나는 놈이 균형을 잡을 틈도 주지 않고 연타를 날렸다.
품에서 단검 [포식자의 송곳니]를 꺼내 왼손으로 역수(逆手)로 쥐고 놈의 사각을 후벼 팠다.
박진수가 황급히 팔뚝으로 공격을 쳐냈지만, 최고급 마력 방어 슈트가 찢겨 나가며 시뻘건 피가 튀었다.
완벽한 나의 압도였다.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박진수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놈이 뒤로 훌쩍 물러서더니, 품에서 붉은색 액체가 출렁이는 주사기를 꺼냈다.
'마족의 피.'
전생에 놈이 최후의 순간에 숨기고 있던 진짜 힘.
박진수가 망설임 없이 그 굵은 바늘을 자신의 목덜미 정맥에 꽂아 넣었다.
"네놈 덕분에 아껴둔 걸 쓰게 생겼군."
우드득, 뚜둑-!
기괴한 파열음이 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박진수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슈트가 찢겨 나간 자리로 검붉은 파충류의 비늘이 돋아났고, 목덜미를 타고 시커먼 핏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손톱은 짐승의 발톱처럼 길어졌고, 척추를 뚫고 거대한 박쥐 날개가 찢어져 나왔다.
[크아아아아-!]
인간의 성대가 낼 수 없는 기괴한 포효.
반인반룡(半人半龍).
흑룡 길드라는 이름에 걸맞은, 끔찍한 마인(魔人)의 형상이었다.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와 썩은 피 냄새가 진동했다. S급을 아득히 초월하는 재앙급 마력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이게... 대체..."
경호원들을 썰어 넘기던 서지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의 [진실의 눈]조차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심연.
마룡으로 변한 박진수가 시뻘건 안광을 번뜩이며 가장 위협적인 서지윤부터 노려보았다.
[거슬리는 년부터 찢어주마.]
팟!
거대한 덩치가 무색할 만큼, 놈의 몸이 공간을 지우듯 사라졌다.
"피해!"
내가 소리쳤지만 늦었다.
서지윤이 황급히 쌍검을 교차해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마룡의 두꺼운 꼬리가 그녀의 검을 산산조각 내며 옆구리를 강타했다.
"커헉!"
서지윤의 몸이 종잇장처럼 날아가 두꺼운 콘크리트 벽에 처박혔다.
벽이 무너져 내리며 그녀의 위로 쏟아졌다. 피를 토한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다음은 네놈이다, 쥐새끼.]
마룡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굽어보았다.
쩍 벌어진 아가리 사이로 검은 브레스의 불씨가 타닥거리며 튀었다.
나는 잔해 속에 쓰러진 서지윤을 한 번, 그리고 눈앞의 괴물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일반적인 E급 헌터라면 오줌을 지렸을 상황.
아니, S급 헌터라도 등을 보이고 도망쳤을 절망적인 전력 차이.
하지만 내 입에서는.
"하하."
참을 수 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 템빨 진짜 더럽게 안 받쳐주네.)
나는 양손에 끼고 있던 [해신의 진노] 건틀릿을 천천히 벗었다.
그리고 바닥에 미련 없이 툭 던져버렸다.
이제, 이딴 거추장스러운 장난감은 필요 없다.
진짜 샌드백이 완성됐으니까.
24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20자
- 장면 수: 4개 (단상 강도짓 -> 경호원 전투 -> 박진수 조우 -> 마룡 변이 및 위기)
- 등장 캐릭터: 강도현, 서지윤, 박진수(원수/마룡)
- 메인 플롯 비트: 전생의 원수 박진수와의 재회. 박진수가 마족의 피를 이용해 변종 보스(마룡)로 각성함.
- 서브플롯 진행:
- 서브 A(미스터리): 서지윤이 마룡의 압도적인 힘에 리타이어 위기에 처함.
- 공개된 정보: 흑룡 길드의 진짜 힘(마족의 피).
- 심은 복선: 도현이 왼손을 주로 사용하는 전투 궤적, 장비를 벗어 던진 이유.
- 회수한 복선: 23화의 [마신의 눈물] 획득.
- 클리프행어: 위기/각성 직전 - 서지윤이 쓰러지고 마룡이 도현을 노리는 순간, 도현이 장비를 벗으며 진짜 힘의 개방을 암시함. (A+급)
- 템포: 고속
25화: 연극의 끝
[미친 건가? 공포에 뇌수라도 녹아내렸나 보군.]
마룡으로 변한 박진수가 비릿하게 웃었다.
파충류 특유의 긁는 듯한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내가 최고급 아티팩트인 [해신의 진노]를 바닥에 내팽개친 걸, 완전한 항복이나 자포자기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놈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 탓에 천장이 까맣게 그을렸다.
나는 대답 없이 셔츠의 윗단추를 툭, 툭 풀었다.
싸우기 전에 폼을 잡으려는 게 아니었다.
단전에서부터 미친 듯이 끓어오르는, 10년 동안 억눌러왔던 마력의 압력을 육체가 감당하기 버거웠기 때문이다.
"템빨 믿고 깝치는 버러지라."
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템빨, 네놈이 먼저 쓴 거 아닌가? 지 실력도 안 돼서 마족 피나 빨아먹는 기생충 새끼가."
[주둥이만 살았군. 짓밟아 터트려주마!]
도발에 넘어간 마룡이 짐승처럼 포효하며 거대한 앞발을 들어 올렸다.
집채만 한 발톱이 허공을 가르며 내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바람을 갈기갈기 찢는 파공음. 스치기만 해도 내장까지 터져나갈 압도적인 물리력이었다.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 간신히 의식을 차린 서지윤이 그 광경을 보았다.
"안 돼... 피... 피해, 이 미친놈아!"
그녀가 입가에 고인 피를 토해내며 절박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내 단전 깊숙한 곳에 겹겹이 쳐두었던 [마력 회로 지배]의 억제 밸브를 찾았다.
'해제.'
딸깍.
머릿속에서 무언가 묵직한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백색의 섬광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내 몸을 중심으로, 새하얀 빛의 기둥이 화산 폭발처럼 솟구쳤다.
지하 창고의 두꺼운 천장이 종잇장처럼 뜯겨 나가며 까만 밤하늘이 드러났다.
마룡의 거대한 앞발은 내 머리카락에 닿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빛의 장벽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크, 크아아악! 이, 이게 대체 무슨...!]
앞발의 뼈가 으스러진 박진수가 경악하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의 거대한 덩치가 내뿜던 흉흉한 마기(魔氣)가,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 마력에 짓눌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사그라들었다.
"연극은 여기까지다."
나는 흙먼지를 뚫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엘릭서로 완벽하게 수복된 마력 회로.
그 안에 담긴 SSS급의 순수한 마력이 대기를 미친 듯이 진동시켰다.
주변의 중력이 완전히 역전된 것처럼, 무너진 건물 파편과 부서진 무기들이 내 주위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네, 네놈... 정체가 뭐야! E급다위가 뿜어낼 마력이 아니야!]
"내가 E급이라고 내 입으로 말한 적은 없는데. 니들이 좆대로 믿고 싶었던 거지."
나는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공중에 떠 있던 수백 개의 콘크리트 파편과 철근들이 내 손짓 한 번에 일제히 날카로운 마력창으로 변환되었다.
마력의 형태 변환. 오직 신의 경지에 이른 자만이 감히 시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컨트롤이었다.
"자, 그럼."
내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10년 치 이자를 쳐서 받아볼까."
[웃기지 마라! 나는 마족의 힘을 얻었다! 감히 인간 따위가!]
공포에 질린 박진수가 악에 받쳐 아가리를 쩍 벌렸다.
놈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검붉은 흑염의 브레스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주변의 산소가 모조리 타들어 가는 듯한 끔찍한 고열.
놈이 고개를 꺾으며 나를 향해 브레스를 토해냈다.
콰아아아아-!
시야를 붉게 물들이는 지옥의 불길이 나를 덮쳤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을 앞으로 뻗어 날아오는 거대한 불기둥의 정중앙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찌지직! 콰가가각!
"뭐...?"
박진수의 노란 파충류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내가 맨손으로, 형태조차 없는 브레스를 물리적으로 '잡아 찢어버린' 것이다.
갈라진 검은 불길이 내 양옆으로 비껴가며 창고의 남은 벽면을 모조리 녹여버렸다.
내 왼손 끝에는 그을음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마족의 힘? 고작 이딴 쓰레기를 얻으려고 내 팔다리를 썰었냐."
나는 놈의 경악이 끝나기도 전에 공간을 박찼다.
공간 자체를 압축해 도약하는 축지(縮地).
순식간에 마룡의 콧등 위로 공간 이동하듯 내려앉았다.
[크, 큭! 떨어져라, 벌레 같은 놈아!]
놈이 미친 듯이 대가리를 흔들었지만, 내 두 발은 강철못을 박은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놈의 오른쪽 날개죽지를 맨손으로 깊숙이 움켜쥐었다.
"내 오른팔 톱으로 자를 때, 기분이 어땠지?"
[무, 무슨 미친 소리야! 끄아아아악!]
뿌드득! 찌아아아악-!
내 손아귀에 SSS급 마력을 집중해 그대로 잡아 뜯어버렸다.
질긴 가죽과 두꺼운 뼈가 버티지 못하고 거대한 박쥐 날개가 뿌리째 뽑혀 나갔다.
시커먼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내 얼굴을 적셨다.
"난 존나 통쾌한데."
나는 뽑아낸 날개를 바닥에 던지고, 도약해 놈의 왼쪽 앞발 관절을 짓밟았다.
콰직!
관절이 역방향으로 기괴하게 꺾이며 하얀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왔다.
"이건 내 왼다리 값."
[살려... 살려줘! 제발! 크아아악!]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했던 애원을, 놈이 똑같이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자비 따위는 개나 줬다.
나는 놈의 정수리를 짓밟아 바닥으로 처박았다.
쿠웅-!
거대한 덩치가 무너지며 지하 창고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나는 바닥에 처박힌 놈의 목덜미에 올라탔다.
그리고 왼손에 마력을 극한까지 응축시켜,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빛나는 빛의 검을 벼려냈다.
"지옥에 가면, 천랑 길드장 그 늙은이한테 안부나 전해라. 곧 따라갈 거라고."
서어어어억-!
빛의 검이 마룡의 두꺼운 목줄기를 버터 자르듯 매끄럽게 관통했다.
놈의 거대한 대가리가 툭, 하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시뻘겋게 타오르던 안광이 서서히 잿빛으로 꺼져갔다.
[보스 몬스터 '변종 마룡'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폭발적으로 상승합니다.]
[칭호: '드래곤 슬레이어'를 획득했습니다.]
시스템 알림이 시끄럽게 울려댔지만, 나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창을 꺼버렸다.
손에 쥐었던 빛의 검을 흩어내고, 뽀얗게 일어난 먼지구름 너머를 돌아보았다.
잔해 속.
서지윤이 피투성이가 된 채 무너진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경악, 공포,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향한 경외감.
굳게 닫힌 그녀의 입술 사이로 독백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저 힘은... 인간이 아니야. 대체 정체가 뭐지?)'
나는 천천히 걸어가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치자,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진실의 눈]으로 내 진짜 마력을 정면에서 목격했으니, 뇌가 과부하에 걸려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나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창백한 뺨에 튄 검은 피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봤지?"
내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서지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속삭였다.
"비밀로 해. 명줄 길게 이어가고 싶으면."
압도적인 힘의 격차.
그녀는 이제 나를 감시하는 성가신 조사관이 아니라, 내 절대적인 무력 앞에 목줄이 잡힌 공범이 되었다.
이 썩어빠진 세계의 진짜 포식자가 누구인지, 가장 확실하게 각인시킨 밤이었다.
[다음 화부터 유료 연재로 전환됩니다.]
25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610자
- 장면 수: 3개 (마룡의 브레스 -> SSS급 마력 해방 및 유린 -> 서지윤과의 대면)
- 등장 캐릭터: 강도현, 서지윤, 박진수(사망)
- 메인 플롯 비트: 1차 복수 대상(박진수) 처단. E급 위장을 벗고 진정한 SSS급 무력 폭발.
- 서브플롯 진행:
- 서브 A(미스터리): 서지윤이 도현의 진짜 힘을 목격하고 완벽하게 기선 제압을 당함.
- 공개된 정보: 마력 회로 지배의 100% 개방 위력, 마력의 형태 변환.
- 심은 복선: 도현의 압도적인 힘을 본 서지윤의 향후 행보, 도현의 왼손 무기 사용 숙련도.
- 회수한 복선: 1화부터 끌어온 '힘숨찐'의 완벽한 해소. 전생의 복수(팔다리 절단).
- 클리프행어: S급 (유료화 전환점) - 주인공의 진정한 무력이 폭발하며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여주인공을 협박하며 관계의 역전을 암시함. 독자의 결제 욕구 극대화.
- 템포: 고속
Batch 5 완료 요약
진행 상황 트래커 업데이트
- 메인 플롯 진행률: 25/220 (파트 1: 설계된 위장과 독점 완료)
- 활성 서브플롯:
- 서브 A(미스터리): 서지윤이 도현의 비밀을 목격. (1막 해결 및 2막 전환점)
- 서브 B(경제): 흑룡 길드의 붕괴로 인한 새로운 이권 개입 준비.
- 서브 C(동료): 밖에서 대기 중인 박태민과 길드원들.
- 미공개 정보: 흑룡 길드장 '무영'의 진짜 행방. 서지윤의 문신에 얽힌 비밀.
- 활성 복선: 마신의 눈물을 통한 마족과의 연결.
- 회수 완료 복선: 박진수 처단 및 1차 복수 완료.
- 다음 배치 예고(유료 구간): 유료화 이후 첫 에피소드(26화). 경매장 붕괴 후의 뒷수습과 흑룡 길드의 멸망. 서지윤이 도현에게 완전히 굴복(혹은 진정한 협력)하는 과정. 그리고 새로운 아크(나비효과와 세력 확장)의 시작.
일관성 검증
- 캐릭터 음성 일관성: 도현의 오만함과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100% 발휘됨.
- 세계관 일관성: SSS급 마력의 묘사를 과장되지 않게 물리적 현상(중력 역전, 형태 변환)으로 표현.
- 톤 일관성: 24화의 위기감에서 25화의 극단적인 사이다로 이어지는 감정 롤러코스터 설계. 비가 법칙(관계성 집중)을 원수와의 대화에 적용.
떡밥 상태 업데이트
| 떡밥 ID | 설치 화 | 내용 | 현재 상태 | 다음 힌트 예정 | 회수 예정 |
|---|---|---|---|---|---|
| F-001 | 5화 | 서지윤의 정체 | 도현의 진짜 힘 목격 | 27화 | 30화 |
| F-007 | 22화 | 무영의 잠적 | 부길드장 사망으로 개입 불가피 | 28화 | 40화 |
| F-009 | 24화 | 마족의 본격적인 개입 | 마신의 눈물 획득 | 35화 | 50화 |
Batch 6: 26~28화
26화: 목줄을 쥐다
매캐한 연기가 폐를 찔렀다.
천장이 뜯겨나간 지하 창고. 뻥 뚫린 구멍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밀려와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내 발밑에는 마룡으로 변했던 박진수의 거대한 대가리가 뒹굴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던 안광은 이미 잿빛으로 식어, 그저 거대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서지윤을 살폈다.
"비밀로 해. 살고 싶으면."
내 서늘한 경고에, 멍하니 풀려있던 서지윤의 동공이 초점을 찾았다.
그녀의 [진실의 눈].
방금 전 내가 뿜어낸 SSS급 마력의 심연을 정면으로 들여다본 대가였다.
아마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과부하를 겪었을 것이다.
그녀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네가."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인간이긴 해?"
"글쎄."
나는 피 묻은 손을 바지에 툭툭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적어도 저기 굴러다니는 파충류 새끼보단 인간답지."
서지윤이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무너진 벽에 기댔다.
그녀의 시선이 박진수의 시체와 나를 번갈아 향했다.
공포. 경외. 그리고 지독한 무력감.
대한민국 최고를 자부하던 특수조사팀 에이스의 자존심이,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왜… 숨긴 거지?"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E급인 척, 돈에 환장한 졸부인 척 연기한 거야?"
"말했잖아. 사냥꾼 코스프레보단 미끼 코스프레가 편하다고."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해신의 진노] 건틀릿을
Batch 7: 29~31화 (수정본)
29화: 마탄의 사수
[건방진 벌레 새끼.]
무영의 입술이 찢어지듯 벌어졌다.
그의 등 뒤로 뻗어 나온 칠흑 같은 날개가 창고의 탁한 공기를 갈랐다.
SS급. 아니, 마족과 동화하며 그 이상으로 팽창한 마력이 공간을 짓눌렀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팀장님, 뒤로 빠져요."
"너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
"당연하지. 내 전용 무기가 방금 배송 왔거든."
나는 허리춤에서 [마탄의 사수]를 뽑아 들었다.
묵직한 금속의 질감. 총신에 박힌 [마신의 눈물]이 붉게 점멸하며 주인의 마력을 요구했다. 마치 굶주린 짐승이 밥을 달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나는 단전의 마력을 끌어올려 방아쇠로 흘려보냈다.
철컥.
리볼버의 실린더가 회전하며 푸른빛이 총구에 맺혔다.
무영이 콧방귀를 꼈다.
[고작 총부림이냐. 내 비늘은 전차 포탄도 튕겨낸다!]
놈이 바닥을 박찼다.
음속을 돌파하는 파공음.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내 코앞까지 다가온 놈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공간이 다섯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궤적.
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총구를 놈의 미간에 맞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일반적인 총성이 아니었다.
대포가 터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내 마력이 응축된 탄환이 쏘아졌다.
무영이 비웃으며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S급 이상의 반사신경이라면 총알 따위 피하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어딜 도망가."
허공을 가르던 푸른 탄환이, 갑자기 90도로 궤도를 꺾었다.
[마탄의 사수] 특수 효과 1, 추적.
마신의 눈물이 마족의 기운을 완벽하게 록온(Lock-on)한 상태였다.
퍼어어억!
[크아아아아!]
탄환이 무영의 오른쪽 어깨에 정통으로 꽂혔다.
단순한 타격이 아니었다. 특수 효과 2, 파마(破魔)의 힘이 폭발하며 놈의 검은 비늘을 녹여버리고 살점을 찢어발겼다.
무영의 거대한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뒤로 튕겨 나갔다.
"명중률 99%라더니. 유진이 이 자식, 과장 광고는 안 하네."
나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입으로 훅 불었다.
벽에 처박힌 무영이 피를 토하며 일어났다.
그의 오른쪽 어깨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끔찍하게 파여 있었다.
[이, 이따위 무기가…! 에픽(Epic) 등급이라고?!]
"어. 갓 뽑은 신상."
[E급 벌레가 어떻게 그런 장비를 다루는 거냐! 마력 고갈로 말라 죽어도 시원찮을 텐데!]
"내가 E급이라고 한 적 없다니까. 귀가 먹었나."
나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탕! 탕!
연속으로 쏘아진 세 발의 탄환이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무영을 향해 날아갔다.
놈이 기겁하며 날개를 펼쳐 방어막을 쳤다.
콰앙! 콰아앙!
폭발음이 연달아 터졌다.
파마의 힘이 담긴 탄환은 마족의 방어막을 종잇장처럼 뚫어버렸다.
놈의 날개가 너덜너덜해졌다.
"강도현. 네 마력은 대체 바닥이 어디야?"
뒤에서 지켜보던 서지윤이 혀를 내둘렀다.
에픽 등급 무기는 한 번 쓸 때마다 막대한 마력을 퍼먹는다. 세 발을 연사했으니 일반적인 A급 헌터라면 이미 탈진해서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내 단전은 엘릭서로 확장된 상태. 이 정도 연사는 간지러운 수준이다.
"바닥?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나는 여유롭게 실린더를 다시 돌렸다.
먼지구름 속에서 무영이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놈의 붉은 눈동자가 독기로 번들거렸다.
[인정하마. 네놈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놈이 상처 부위를 부여잡았다.
그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흘러나오더니, 찢겨 나간 살점이 기괴하게 꿈틀거리며 재생되기 시작했다.
마족 특유의 초재생능력. 징그러울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나 역시 평범한 마족이 아니다!]
무영이 양손을 치켜들었다.
바닥에 고여 있던 수백 구의 피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거대한 혈창(血槍) 수십 개로 변환되었다.
코를 찌르는 비린내.
"팀장님, 저건 좀 아플 것 같은데."
"내가 막을게."
서지윤이 앞으로 나서며 대검을 고쳐 쥐었다.
그녀의 검신에 푸른 오라가 맺혔다.
그때였다.
혈창을 쏘아내려던 무영의 시선이, 내 옆에 선 서지윤에게 꽂혔다.
정확히는, 전투 준비를 하며 살짝 걷어 올려진 그녀의 소매 끝.
그곳에 새겨진 시계태엽 모양의 붉은 문신에.
[…어?]
무영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놈의 붉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저 문신… 네년, 설마…]
무영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공포? 아니, 경악에 가까웠다.
[닫힌 세계선의 파편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뭐?"
서지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역시 총을 겨눈 채 멈칫했다.
닫힌 세계선의 파편? 무슨 개소리야.
[하하, 하하하하!]
무영이 갑자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 제물로 바칠 인간의 피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저 여자를 심연에 바치면, 강림이 아니라 아예 차원의 문을 열 수 있어!]
놈의 살기가 나를 지나쳐 서지윤에게 집중되었다.
허공에 떠 있던 수십 개의 혈창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목표는 서지윤.
"비켜!"
나는 [축지]를 밟아 서지윤의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해신의 진노]를 낀 왼손을 뻗어 절대 방어를 전개했다.
콰다다다당!
피의 창들이 물의 장막에 융단폭격처럼 쏟아졌다.
장막이 깨질 듯이 흔들렸다.
[비켜라, 벌레야! 저 여자는 내 거다!]
무영이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돌진해 왔다.
놈의 눈에는 오직 서지윤만이 보이고 있었다.
히든 퀘스트의 진실이 저놈의 입안에 있다.
"네 거? 웃기고 있네."
나는 리볼버의 총구를 놈의 심장에 정조준했다.
"내 부길드장이야. 터치하지 마."
30화: 세계선의 오류
쾅!
무영의 거대한 주먹이 물의 장막을 강타했다.
[해신의 진노]가 자랑하는 절대 방어에 쩍 하고 금이 갔다.
SS급 마력에 마족의 광기까지 더해진 일격. 아무리 전설급 아티팩트라도 두 번은 버티기 힘들었다.
"강도현, 물러서!"
서지윤이 내 어깨를 잡고 뒤로 당겼다.
그녀의 대검이 장막을 뚫고 들어온 무영의 주먹을 비스듬히 쳐냈다.
불꽃이 튀며 서지윤의 몸이 뒤로 밀렸다.
마력의 격차가 너무 컸다.
[방해하지 마라!]
무영이 반대쪽 손으로 서지윤의 목을 향해 발톱을 휘둘렀다.
그녀가 미처 검을 회수하기도 전의 찰나.
파아앗-!
서지윤의 손목에 새겨진 시계태엽 문신에서 강렬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이 닿는 순간, 무영의 발톱이 허공에 멈췄다.
아니, 멈춘 게 아니었다.
놈의 팔 주변 공간이 마치 비디오테이프가 씹힌 것처럼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크, 으아아악! 내 팔이!]
무영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빛에 닿았던 놈의 오른팔이, 마치 시간이 거꾸로 감기듯 썩어문드러지며 재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재생조차 되지 않는 완벽한 소멸.
"이게... 무슨..."
서지윤 본인조차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문신의 빛은 금세 사그라들었지만, 그 짧은 순간이 남긴 파장은 엄청났다.
지잉.
내 눈앞에 붉은색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경고: 세계선 충돌이 감지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오류로 인해 대상 '마족 무영'의 존재가 일부 삭제되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변수의 정체를 파악하시오' 진행도: 80%]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존재의 삭제. 물리적인 타격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간섭하는 힘이다.
닫힌 세계선의 파편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그녀는 이전 회차, 혹은 멸망해버린 다른 세계선에서 넘어온 '오류' 그 자체인 것이다.
[네, 네년이 감히...!]
팔을 잃은 무영이 악에 받쳐 포효했다.
놈의 남은 마력이 폭주하며 창고 전체가 무너져 내릴 듯 흔들렸다.
바닥의 마법진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강도현! 저 마법진, 막아야 해!"
서지윤이 소리쳤다.
놈이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 강제로 차원문을 열려는 수작이었다.
"알아. 귀 아프니까 소리 지르지 마."
나는 [마탄의 사수]를 다시 고쳐 쥐었다.
무영이 서지윤에게 정신이 팔린 지금이 완벽한 기회다.
나는 마력 회로의 밸브를 한계치까지 개방했다.
단전에서 끌어올린 SSS급 마력이 총신으로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갔다.
우우웅-!
에픽 무기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마력이 응축되자, 총신이 붉게 달아오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 발에 다 턴다."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아아앙-!!!
총구를 떠난 탄환이 혜성처럼 빛의 꼬리를 남기며 날아갔다.
무영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이었다.
[뭐...]
콰아아아아앙!!!
탄환이 놈의 가슴팍에 명중하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 파마(破魔)의 기운이 놈의 마력 회로 자체를 찢어발기며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크아아아아아!]
무영의 몸이 걸레짝처럼 찢겨 나갔다.
마법진을 유지하던 힘이 끊기며, 붉은빛이 푸스스 꺼졌다.
놈의 거대한 몸집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쿠웅.
먼지가 가라앉았다.
창고의 절반이 날아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나는 연기가 나는 [마탄의 사수]를 어깨에 걸치고 천천히 걸어갔다.
무영은 하반신이 날아간
Batch 8: 32~36화
32화: 늙은 너구리와의 독대
엘리베이터가 1층 로비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쇠 맛이 나는 공기가 폐부로 훅 끼쳐 들어왔다.
로비 양옆으로 박태민과 섀도우 길드원들이 무기를 든 채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낡은 가죽 소파가 있었다.
거기에 백발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구겨진 트렌치코트. 손에 들린 건 편의점표 100원짜리 자판기 믹스 커피.
대한민국 헌터 협회장, 유태만.
탑골공원에서 바둑이나 둘 법한 행색이지만, 실상은 대한민국 헌터들의 목줄을 쥔 최고 권력자.
"오, 왔는가."
유태만이 나를 발견하고 사람 좋게 웃었다.
그의 뒤, 그림자처럼 서 있는 두 명의 비서실 헌터. 최소 S급이다. 뿜어내는 마력이 날카로웠다.
"새벽부터 남의 영업장에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며 소파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다리를 꼬고 턱을 치켜들었다.
서지윤은 내 뒤에 서서 유태만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젊은 친구가 성질이 급하구만. 코엑스 지하를 통째로 날려 먹고 샤워까지 마치고 오다니."
유태만이 믹스 커피를 후루룩 소리 내며 마셨다.
"덕분에 협회 청소부들이 야근을 하게 생겼어. 흑룡 길드 본사를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더군."
"청소 좀 한 겁니다. 쓰레기 냄새가 너무 심해서요."
내 뻔뻔한 대답에 유태만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하지만 그 눈웃음 뒤에 숨겨진 안광은 차가웠다.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의 그것이었다.
"무영이 마족과 내통했다는 증거는 서 팀장이 잘 수집해 놨더군. 덕분에 협회 입장에서도 큰 명분이 생겼어. 자네 길드의 '과잉 진압'을 덮어줄 명분 말이야."
"덮어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
"이보게, 강 대표."
유태만이 종이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달그락.
가벼운 소리였지만, 로비의 소음이 일순간 차단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S급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십 년간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자의 기세(氣勢).
"대한민국 1위와 2위 길드가 하루아침에 증발했어. 세상은 영웅을 원하지만, 통제 불가능한 괴물은 원하지 않지. 자네가 그 괴물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기둥이 될지는 내 판단에 달렸다는 뜻이야."
협박이다.
협회의 힘을 빌려 섀도우 길드를 공식적인 1위로 인정해 줄 테니, 목줄을 차라는 뜻.
나는 피식 웃으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협회장님. 제가 괴물인지 기둥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컵을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종이컵이 쓰러지며 남은 커피가 테이블보를 갈색으로 적셨다.
"중요한 건, 협회장님이 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거죠. 무영도 찢어 죽인 마당에, 제가 협회라고 못 부술 것 같습니까?"
"강도현!"
뒤에 서 있던 서지윤이 기겁하며 내 어깨를 잡았다.
비서실 헌터들의 손이 즉각 품 안의 무기로 향했다. 살기가 로비를 채웠다.
하지만 유태만은 가만히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허허허! 패기 하나는 마음에 드는구만."
유태만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자네 말대로 내가 자네를 통제할 순 없겠지. 그래서 거래를 하러 온 걸세."
"거래라."
"흑룡 길드의 공백. 섀도우 길드가 전부 흡수하게. 협회 차원에서 모든 법적,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자네들을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1위로 만들어 주지."
조건이 너무 좋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특히 저 늙은구렁이에게는.
"대가는요?"
"백두산."
유태만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내 미간이 좁아졌다.
"최근 백두산 천지 인근에서 이상 마력 파장이 감지되고 있네. 10년 전, 최초의 게이트가 열렸던 시기와 비슷한 파장이지."
"거긴 미탐사 구역 아닙니까. 협회에서 출입을 전면 통제한 곳일 텐데요."
"그래서 자네가 가줬으면 하네. 공식적인 협회 병력을 움직이기엔 리스크가 커서 말이야. 비공식적으로, 조용히 알아봐 주게."
단순한 조사가 아니다.
뭔가 구린 게 있다. 냄새가 난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뒤에 서 있던 서지윤이 나섰다.
"협회장님. 그 임무, 특수조사팀에서 맡겠습니다."
"아니. 서 팀장은 강 대표를 보좌하게."
유태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코트 자락을 털며 서지윤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서 팀장. 자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잃어버린 '시작점'. 그게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서지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태만은 내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비서들을 대동해 로비를 빠져나갔다.
"저 영감탱이."
나는 멀어지는 유태만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닫힌 세계선의 파편. 서지윤의 기억. 그리고 백두산.
모든 게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강도현."
서지윤이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가야 해. 저기, 무조건 가야 해."
"알아. 갈 거야."
나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대답했다.
"근데 그전에, 챙길 건 챙겨야지."
내 손안에서 흑룡의 문양이 새겨진 인장 반지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33화: 흑룡의 금고
협회장이 다녀간 지 세 시간 후.
동트기 전의 푸르스름한 새벽, 우리는 흑룡 길드 본사 지하 깊숙한 곳에 서 있었다.
경찰과 협회의 노란 통제선이 쳐져 있었지만, 서지윤의 특수조사팀 신분증 하나로 프리패스였다.
"여기야."
서지윤이 두꺼운 티타늄 합금 문 앞을 가리켰다.
물리적인 파괴는 불가능에 가까운, 흑룡 길드의 메인 금고.
나는 주머니에서 [흑룡의 인장]을 꺼내 문 중앙의 홈에 끼워 넣었다.
찰칵. 우웅-.
마력 회로가 일치한다는 신호음과 함께, 육중한 문이 좌우로 열렸다.
내부의 센서등이 순차적으로 켜지자, 박태민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 이게 다 뭡니까..."
금고 내부는 말 그대로 황금의 산이었다.
수만 개의 골드바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중앙의 진열장에는 S급 마나석과 희귀 아티팩트들이 박물관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1위 길드가 십 년간 긁어모은, 피와 고름이 섞인 재산.
"탐욕의 시선, 활성화."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가 붉게 달아올랐다.
시야에 수많은 숫자와 정보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적정가: 15억]
[적정가: 300억]
[적정가: 측정 불가]
"태민아."
"네, 대표님!"
"다 쓸어 담아. 먼지 한 톨 남기지 말고."
박태민이 침을 꿀꺽 삼키며 아공간 배낭을 열었다.
그가 금괴와 마나석을 쓸어 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나는 진열장 안쪽을 살폈다. 돈이 되는 것도 좋지만, 내가 찾는 건 무영이 마족과 동화하기 위해 참고했던 자료들이었다.
"이건가."
가장 안쪽, 방탄유리 안에 고이 모셔진 낡은 문서와 파편들.
나는 유리를 주먹으로 깨부수고 안의 물건들을 꺼냈다.
고대 마어(魔語)로 적힌 양피지들. 그리고 그 밑에 깔려 있던 손바닥만 한 검은 석판.
"어?"
석판을 본 서지윤이 무언가에 홀린 듯 다가왔다.
석판의 표면에는 정교한 시계태엽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 있는 붉은 문신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문양.
"만지지 마."
내가 경고하기도 전에, 서지윤의 손끝이 석판에 닿았다.
파아앗!
석판에서 강렬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서지윤의 손목에 있는 문신도 공명하듯 빛을 뿜어냈다.
두 개의 빛이 얽히며 금고 안의 마력이 거칠게 소용돌이쳤다.
"흐윽...!"
서지윤이 가슴을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압도적인 정보량이 뇌를 강타한 듯, 그녀의 눈동자가 뒤집히고 있었다.
"태엽이... 태엽이 멈춘다..."
기계음이 섞인, 평소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
"하늘이 무너지고, 심연이 입을 벌린다. 닫힌 세계선의 파편을... 원래의 자리로..."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휘어졌다.
나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손에서 석판을 쳐냈다.
챙그랑!
석판이 바닥에 떨어지며 빛이 꺼졌다.
"서지윤! 정신 차려!"
내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자, 팽팽하게 당겨졌던 그녀의 몸이 툭 하고 힘을 잃었다.
그녀가 내 품으로 쓰러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괜찮아?"
그녀가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봤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 덮인 거대한 산. 그리고 그 밑에 파묻힌 시계탑. 거기가... 내 시작점이야."
"백두산이군."
"어. 유태만 협회장 말이 맞았어. 난 거기로 가야 해."
서지윤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보다 강렬한 갈망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본능. 마치 연어처럼.
"대표님! 이거 다 담았습니다! 배낭 세 개가 꽉 찼습니다!"
박태민이 땀을 뻘뻘 흘리며 보고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석판을 주워 내 인벤토리에 넣었다.
"수고했다. 일단 철수하자."
우리는 흑룡 길드의 금고를 텅텅 비운 채 밖으로 나왔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자는데 왜 깨워요!
"잠이 오냐. 지금 당장 공방으로 내려가서 화덕 불 피워 놔. 엄청난 재료들 가져갈 테니까."
-재료요? 무슨 재료인데요?
"흑룡 길드가 십 년 동안 모은 엑기스."
전화기 너머로 유진이 숨을 헉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밤에 원정 나간다. 그 전까지 애들 장비 싹 다 에픽급으로 업그레이드해."
-미, 미쳤어요?! 하루 만에 에픽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찍어내요!
"할 수 있잖아. 천재 대장장이님."
-...수당 세 배 쳐주세요.
"콜."
전화를 끊고 창밖을 보았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도시가 깨어나는 시간.
흑룡의 자산을 흡수하며 섀도우 길드의 전력은 수직 상승할 것이다.
하지만 백두산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은, 천랑이나 흑룡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게 뻔했다.
"태민아."
"네, 대표님."
"내일 출정은 나랑 부길드장, 그리고 정예 5명만 간다. 넌 남아서 본진 지켜."
"예? 저도 가겠습니다! 제가 방패인데!"
"이번엔 방패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닐 거다. 넌 남아서 흑룡 잔당들이나 처리해."
내 단호한 말에 박태민이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옆자리에 지쳐 쓰러져 잠든 서지윤을 힐끔 쳐다보았다.
(태엽이 멈추면 하늘이 무너진다라.)
시스템의 오류. 닫힌 세계선.
전생에는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알 수 없는 변수야말로, 회귀의 진짜 재미니까.
34화: 새로운 사냥터
칼바람이 살을 에었다.
백두산 천지 인근. 해발 2,500미터의 고지대.
눈보라가 시야를 가려 10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연의 적의가 느껴지는 날씨였다.
"춥네."
나는 두꺼운 방한 코트의 깃을 세우며 중얼거렸다.
내 뒤로는 서지윤과 섀도우 길드의 정예 요원 5명이 묵묵히 눈길을 밟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유진이 하룻밤을 꼬박 새워 만들어준 에픽 등급의 방한 장비들 덕분에 동사는 면하고 있었지만, 이곳의 추위는 단순한 기온 문제가 아니었다.
"마력 섞인 눈보라야. 체온뿐만 아니라 마력까지 갉아먹고 있어."
서지윤이 나침반 역할을 하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문신은 유적이 가까워질수록 붉은빛을 강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어?"
"거의 다 왔어. 저 능선 너머."
우리는 눈 덮인 언덕을 기어올랐다.
능선 정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눈보라 사이로 거대한 분화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분화구 한가운데.
"저게... 뭐야."
정예 요원 중 하나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형이 아니었다.
분화구 바닥이 매끄러운 금속 타일로 덮여 있었고, 중앙에는 땅속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기계식 문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미탐사 유적.
아니, 고대의 벙커에 가까웠다.
"문이 열려 있네. 누군가 먼저 왔다는 뜻인데."
내 말에 서지윤이 대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협회 쪽 병력은 아니야. 공식적으로 여긴 출입 통제 구역이니까."
"그럼 불청객이겠지."
우리는 조심스럽게 분화구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유적 입구에 다다를수록 눈보라는 잦아들었지만, 대신 역겨운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입구 주변에는 수십 구의 몬스터 사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백두산 토착 몬스터인 설인(Yeti)들.
모두 단칼에 목이 날아가거나 심장이 꿰뚫린 상태였다.
"깔끔한 솜씨네. 검술의 궤적이 일정해."
내가 사체를 발로 툭 차며 말했다.
그때였다.
"멈춰라. 여기서부터는 성역이다."
유적의 거대한 금속 문 안쪽 어둠 속에서, 스르륵 그림자들이 걸어 나왔다.
검은 로브를 푹 눌러쓴 자들.
손에는 붉은 마력이 흐르는 십자형 검을 들고 있었다.
마족 추종자들. 이단 심문관이라 불리는 광신도 놈들.
"성역 좋아하네."
나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남의 나라 산꼭대기에 허락도 없이 기어들어 와서 성역 타령이야. 비자 보여줘 봐."
"불경한 자. 심연의 뜻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뿐이다."
로브를 쓴 자들이 일제히 검을 겨누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최소 A급 이상.
이런 고수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닌다는 건, 이 유적 안에 그만큼 중요한 게 있다는 뜻이다.
"팀장님. 얘네들 협회에 넘기면 포상금 줍니까?"
"살려두면 주겠지. 근데 가능해?"
서지윤이 묻자, 나는 허리춤에서 [마탄의 사수]를 뽑아 들었다.
리볼버의 묵직한 그립감이 손바닥에 감겼다.
"살려두는 건 내 전문이 아니라서."
철컥.
공이치기를 당겼다.
"배교자들에게 죽음을!"
이단 심문관들이 괴성을 지르며 눈밭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열 명이 넘는 A급 헌터들의 동시 돌진.
순간, 내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타앙!
첫 번째 총성이 백두산의 정적을 찢었다.
총구를 떠난 푸른 탄환이 선두에 있던 놈의 가슴팍에 명중했다.
퍼어어억!
[파마]의 효과가 깃든 탄환은 놈의 십자 검을 종잇장처럼 뚫고 심장을 터뜨렸다.
놈의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갔다.
"뭐, 뭣...!"
동료의 끔찍한 죽음에 남은 놈들이 멈칫했다.
그 찰나의 틈을 놓칠 내가 아니다.
타앙! 탕! 탕!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전진하며 방아쇠를 연속으로 당겼다.
[추적] 옵션이 발동된 탄환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궤도를 꺾으며 놈들의 미간과 심장에 정확히 꽂혔다.
피분수가 눈밭을 붉게 물들였다.
"악마! 악마 새끼다!"
"진형을 짜라! 방어막 전개!"
남은 다섯 명이 황급히 모여 붉은색 마력 방어막을 펼쳤다.
나는 장전된 탄환을 모두 소모한 리볼버를 집어넣고, 양손에 [해신의 진노]를 소환했다.
푸른 마력이 건틀릿을 감싸며 소용돌이쳤다.
"방어막?"
나는 놈들의 코앞까지 도약했다.
"그딴 건 내 방패막이가 하던 짓이고."
나는 건틀릿을 낀 오른주먹을 방어막의 정중앙에 꽂아 넣었다.
[특수 효과: 해일 최대 출력]
콰아아아아앙!!!
응축된 수속성 마력이 폭발하며 거대한 해일이 놈들을 덮쳤다.
붉은 방어막은 단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유리창처럼 박살 났다.
"크아아아악!"
이단 심문관들이 물기둥에 휩쓸려 유적의 금속 벽면에 쳐박혔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터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단 1분.
입구를 막고 있던 10여 명의 정예 병력이 전멸했다.
"청소 끝."
나는 주먹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훅 불어 날렸다.
뒤에서 대기하던 정예 요원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 대표님... 혼자 다 하시면 저희는..."
"너희는 짐이나 잘 챙겨. 안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나는 놈들의 시체를 타넘고 유적의 거대한 문 안으로 들어섰다.
서지윤이 내 옆에 바짝 붙었다.
"이단 심문관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는 건, 마족의 고위 간부가 이 안에 들어갔다는 뜻이야."
"알아. 무영을 꼬드긴 진짜 흑막이겠지."
유적 내부는 밖의 눈보라와 달리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하고 따뜻했다.
벽면을 따라 기하학적인 톱니바퀴들이 천천히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시계의 내부로 들어온 듯한 착각.
지잉- 지지직.
그때, 눈앞에 떠 있던 시스템 창이 노이즈를 일으키며 점멸하기 시작했다.
[경고: 시스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구역입니다.]
[상태창 및 인벤토리 사용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시스템 차단 구역이네."
내가 중얼거리자, 서지윤이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문신이 맥박 치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기야."
그녀가 어두운 통로 끝을 가리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황홀경에 빠진 듯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저 끝에... 내가 잃어버린 게 있어."
나는 허리춤의 리볼버를 고쳐 매며 피식 웃었다.
"가자. 남의 기억 찾으러."
사냥터의 문이 닫히고, 우리는 심연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35화: 태고의 유적
유적의 통로는 거대한 금속의 위장(胃腸) 같았다.
벽과 천장, 바닥까지 온통 톱니바퀴와 태엽 장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끼릭, 끼리릭.
기계 부품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다.
"조심해. 함정이 있을지도 몰라."
서지윤이 앞장서며 속삭였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평소의 냉철한 조사관이라기보다, 무언가에 홀린 몽유병 환자 같았다.
문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이 어두운 통로를 밝히는 유일한 조명이었다.
"시스템 창이 안 열리네."
내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겨보았지만, 평소처럼 떠오르던 푸른 홀로그램 창은 반응이 없었다.
인벤토리도 막혔다. 다행히 꺼내둔 무기들은 멀쩡했지만, 포션이나 여분의 장비를 꺼낼 수 없다는 건 치명적인 페널티다.
"대표님. 벽에... 그림이 있습니다."
뒤따르던 길드원 중 하나가 벽면을 랜턴으로 비추며 말했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벽을 향해 다가갔다.
거대한 금속판 위에 정교하게 새겨진 부조(浮彫) 벽화.
그림의 내용은 기괴했다.
하늘이 쪼개지고, 그 틈새로 쏟아져 내리는 검은 괴물들. 마족의 침공을 묘사한 듯했다.
그리고 그 아래, 거대한 시계탑 위에서 톱니바퀴를 양손으로 붙잡고 있는 한 여자의 뒷모습.
여자의 발밑으로 수많은 인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이거..."
서지윤이 떨리는 손으로 벽화를 더듬었다.
"나잖아."
벽화 속 여자의 얼굴은 묘사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목에 새겨진 문양은 서지윤의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시간을 멈추거나, 혹은 시간을 되돌리려는 듯한 처절한 몸짓.
"닫힌 세계선."
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전 회차, 혹은 평행 세계. 거기서 넌 멸망을 막기 위해 시간을 되돌린 존재일지도 모르겠네."
내 추측에 서지윤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조각난 기억들이 억지로 밀려 들어오는 기분이야."
그녀가 비틀거리자 내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지탱해 주었다.
"정신 차려. 회상 씬은 나중에 찍고, 일단 적부터 치워야지."
내 시선은 벽화가 아니라, 통로 끝의 거대한 공동(空洞)을 향해 있었다.
그곳에서 짙은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벽화를 지나쳐 공동 내부로 진입했다.
그곳은 거울처럼 매끄러운 바닥재로 이루어진 원형의 방이었다.
방의 중앙에는 벽화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이 생긴,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시계탑이 솟아 있었다.
다만, 시계의 바늘은 부러져 있었고 톱니바퀴는 멈춰 있었다.
그리고 시계탑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왔는가."
이단 심문관의 로브가 아니었다.
현대적인 전투복. 익숙한 체형.
그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내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뒤따르던 서지윤과 길드원들도 경악으로 숨을 들이켰다.
"대, 대표님? 저 사람..."
박태민 대신 따라온 부대장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자를 가리켰다.
시계탑 앞에 서 있는 남자.
나와 키, 체격, 심지어 얼굴까지 완벽하게 똑같았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착각.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그의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에는 끔찍한 흉터가 꿰매어진 자국이 선명했다.
전생에, 놈들에게 배신당해 잘려 나갔던 바로 그 부위.
[오랜만이네. 나.]
나와 똑같은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지독한 증오와 원망이었다.
"도현아... 저게 대체 뭐야? 도플갱어?"
"아니."
나는 건틀릿을 낀 주먹을 꽉 쥐었다.
저건 단순한 환영이나 도플갱어가 아니다.
저 흉터. 저 눈빛.
"과거의 망령이지."
내 대답에 환영이 비릿하게 웃었다.
[망령? 그래. 넌 나를 버리고 새 삶을 얻었지. 깨끗한 몸으로, 돈과 권력을 쥐고.]
환영이 허리춤에서 낡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전생에 내가 끝까지 쥐고 싸웠던 그 무기.
[하지만 넌 영원히 그 시궁창을 벗어날 수 없어. 내가 겪은 고통을, 네놈 혼자 잊고 살게 두진 않을 테니까.]
"웃기고 있네."
나는 [마탄의 사수]를 뽑아 들고 놈을 향해 겨누었다.
"과거에 묶여서 징징대는 건 네놈 하나로 족해. 난 앞으로 나갈 거니까."
[건방진 새끼.]
팟!
환영의 몸이 사라졌다.
[축지]. 내가 쓰는 것과 완벽히 똑같은 타이밍, 똑같은 보법.
놈이 내 사각지대인 오른쪽 뒤편으로 파고들었다.
전생의 내가 가장 선호하던 암살 루트.
카앙!
나는 보지도 않고 총신을 뒤로 휘둘러 놈의 단검을 막아냈다.
불꽃이 튀며 두 개의 시선이 교차했다.
붉은 눈동자와 검은 눈동자.
"길드원들은 물러서 있어! 팀장님, 저놈은 내가 맡아!"
내가 소리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영거리 사격.
하지만 환영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놈은 내가 방아쇠를 당길 타이밍을 0.1초 단위로 예측하고 피했다.
[느려. 템빨에 의존하더니 감이 죽었나?]
놈이 천장을 박차고 내려오며 단검을 내리꽂았다.
[스킬: 내부 파괴]
단검 끝에 응축된 붉은 마력이 내 정수리를 노렸다.
"내 기술로 나한테 훈수 두지 마."
나는 피하지 않고 [해신의 진노]를 낀 왼손을 위로 뻗었다.
절대 방어.
콰아아앙!
붉은 마력과 푸른 물의 장막이 격돌하며 원형의 방 전체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36화: 거울 속의 적
콰아아앙!
충격파가 원형의 방을 휩쓸었다.
거울 같던 바닥에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환영의 단검이 내 [절대 방어] 장막을 뚫지는 못했지만, 그 압력에 내 두 발이 바닥을 파고들었다.
[막기만 해서는 날 이길 수 없을 텐데?]
환영이 공중에서 몸을 뒤집으며 착지했다.
놈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S급 헌터로 10년을 구르며 뼈에 새겼던 생존 본능.
내가 아는 나의 가장 완벽한 전투 폼.
"입만 산 건 여전하네."
나는 장막을 거두고 [마탄의 사수]를 고쳐 쥐었다.
상대는 내 모든 습관, 페인트 모션, 콤보 연계를 알고 있다.
내가 오른쪽 어깨를 살짝 내리면 왼쪽으로 파고들 것이고, 내가 시선을 아래로 깔면 위로 뛰어오를 것이다.
정보의 완벽한 대칭. 아니, 놈은 내 과거를 알고 있으니 오히려 놈이 유리하다.
타앙! 탕!
내가 견제 사격을 날렸지만, 환영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탄환을 튕겨냈다.
[추적] 옵션이 발동해 탄환이 궤도를 꺾었지만, 놈은 이미 그것조차 예측하고 단검의 날로 정확히 탄두를 쳐냈다.
카앙! 챙!
[총이라는 무기는 직선적이지. 아무리 궤도를 꺾어도 결국 날아오는 타이밍은 정해져 있어.]
환영이 비웃으며 다시 거리를 좁혔다.
[넌 날 이길 수 없다. 난 네가 버리고 온 '독기' 그 자체니까!]
놈의 단검이 뱀처럼 내 명치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며 건틀릿으로 막아내려 했지만, 놈은 그걸 역이용해 내 팔을 타고 오르듯 회전하며 목덜미를 노렸다.
'위험해.'
서걱!
간발의 차로 고개를 숙였지만, 뺨에 얕은 상처가 났다.
피가 흘러내렸다.
이번 생에 들어와 처음으로 허용해 본 유효타였다.
"대표님!"
멀리서 지켜보던 길드원들이 무기를 빼 들고 달려오려 했다.
"오지 마! 다 죽어!"
내가 소리쳐 그들을 막았다.
이놈은 SSS급의 마력을 내 전생의 기술로 다루는 괴물이다. A급 헌터 백 명이 덤벼도 1분을 못 버틴다.
[여유 부릴 틈이 있나?]
환영의 연타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나는 수세에 몰려 뒷걸음질 쳤다.
놈의 말이 맞다. 놈은 나의 완벽한 카피다.
과거의 나를 상대로, 과거의 방식대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쏟아지는 단검의 궤적 속에서 눈을 감았다.
이성을 비우고, 철저하게 계산된 변칙을 준비했다.
'과거의 내가 절대 하지 않을 짓.'
놈의 단검이 내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순간.
나는 피하거나 막는 대신, [마탄의 사수]를 쥔 오른팔을 놈의 칼날 쪽으로 들이밀었다.
푸욱!
[…?!]
환영의 눈이 커졌다.
놈의 단검이 내 오른팔 하박을 관통했다.
생살이 찢기고 뼈가 갈리는 고통이 뇌리를 때렸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비명 대신 이를 악물고, 놈의 손목을 왼손 건틀릿으로 꽉 움켜쥐었다.
"잡았다, 이 새끼야."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전생의 나는 극단적인 생존주의자였다. 절대 자신의 몸을 미끼로 던지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놈은 이 타이밍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미친 놈이…!]
환영이 당황하며 마력을 폭발시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내 왼손의 [해신의 진노]가 놈의 마력 회로를 강제로 억눌렀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나는 내 팔을 관통한 놈의 단검을 그대로 둔 채, 오른손에 쥔 리볼버의 총구를 놈의 턱밑에 바짝 가져다 댔다.
"난 지금, 돈도 많고 템도 쩔거든."
[특수 효과: 해일]과 [마탄의 사수]의 동시 발동.
내 몸속의 SSS급 마력을 100%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다.
타아아아앙-!!!
콰아아아앙!!!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파마의 탄환과, 건틀릿에서 터져 나온 수속성 해일이 영거리에서 환영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크, 으아아아아아!]
환영의 비명소리가 빛의 폭발에 묻혀 사라졌다.
놈의 몸이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거대한 폭발의 여파로 나 역시 뒤로 튕겨 나갔다.
"쿨럭."
바닥을 구르다 멈춰 선 나는 피를 토했다.
오른팔의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과거의 망령. 내 트라우마의 현현을 내 손으로 부쉈다.
지잉.
시스템 차단 구역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붉은색 메시지 창이 강제로 떠올랐다.
[과거의 굴레를 끊어냈습니다.]
[히든 퀘스트 '변수의 정체를 파악하시오' 진행도: 100%]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 시스템 열람 권한 (Lv.1)이 지급됩니다.]
"끝났군."
내가 상처를 부여잡고 일어날 때였다.
환영이 부서지며 남긴 수천 개의 빛의 조각들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빛이 향하는 곳.
거대한 시계탑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서지윤이었다.
"서지윤...?"
빛의 조각들이 그녀의 손목에 있는 시계태엽 문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멈춰 있던 거대한 시계탑의 톱니바퀴들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긱- 쾅!
시계탑의 부러진 바늘이 역방향으로 회전했다.
서지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변해가며, 푸르던 눈동자가 신성한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아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러 명의 목소리가 겹친 듯한 성스러운 울림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초월자의 눈빛.
"기억났어. 내가... 누구인지."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시계 문자판의 형상이 후광처럼 펼쳐졌다.
시스템의 오류. 닫힌 세계선의 파편.
그 모든 수식어의 진짜 의미가 내 머릿속에 시스템 정보로 강제 주입되었다.
[대상 정보 열람]
- 이름: 서지윤 (본명: 아나스타샤)
- 직업: 제7 세계선의 관리자 (시스템 권한자)
- 상태: 기억 수복 완료. 기능 재부팅 중.
"관리자...?"
나는 피 묻은 팔을 늘어뜨린 채 헛웃음을 쳤다.
내가 회귀한 이 세계를 통제하는 시스템. 그 시스템의 운영자가 내 부길드장이었다고?
"강도현."
황금빛 눈동자의 그녀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내 뇌리를 직접 때렸다.
"네가 어떻게 시간을 역행해 이곳에 왔는지, 이제야 알겠어."
그녀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널 불렀구나."
세계의 진실을 마주한 순간.
시계탑의 종소리가 멸망의 전조처럼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Batch 4: 16~20화 (최종 배치)
16화: 폭주하는 바다
레이드 당일.
송도 8공구 해안가는 비릿한 바다 냄새보다 쇠 냄새가 더 진했다.
수백 명의 헌터들이 뿜어내는 긴장감, 군용 차량의 매연, 그리고 무기 손질하는 소음이 뒤섞여 있었다.
천랑 길드가 10억을 내고 전세 냈던 그 명당자리는, 이제 협회의 임시 상황실로 변해 있었다.
"자자, A조는 전방 방어선 구축! B조는 마법사 보호! 짐꾼들은 뒤에 바짝 붙어! 낙오되면 뼈도 못 추린다!"
현장 통제관의 고함이 확성기를 찢을 듯 울렸다.
나는 그 아수라장의 맨 뒤, 짐꾼 대열에 섞여 있었다.
등에는 50kg짜리 배낭 두 개. 안에는 포션과 비상식량, 마나석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리가 후들거려야 정상이겠지만.
(가볍다. 너무 가벼워서 연기하기 힘들 정도네.)
마력으로 코팅된 근육은 이 정도 무게를 솜털처럼 느꼈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힘겨운 척 연기에 집중했다.
"대표님."
옆구리를 쿡 찌르는 묵직한 인기척. 박태민이었다.
그는 B조 메인 탱커로 위장해 있었다.
내 지시대로 얼굴을 가리는 풀 페이스 헬멧을 쓰고, 사람 키만한 타워 쉴드를 든 모습이 제법 그럴싸했다.
"태민아. 튀지 마. 적당히 막는 시늉만 해."
"알겠습니다. 근데 대표님은 괜찮으십니까? 저 여자… 아까부터 대표님만 노려보는데요."
박태민의 시선이 향한 곳.
대열의 최선두.
서지윤이 있었다.
검은색 특수 전투복 위로 흐르는 윤기, 허리에 찬 두 자루의 마력 검.
그녀는 출정 준비를 지시하면서도, 잊을 만하면 고개를 돌려 내 위치를 확인했다.
마치 목줄 쥔 주인이 개가 잘 따라오나 감시하는 눈빛이다.
"신경 꺼. 넌 네 일이나 해."
내가 박태민을 툭 밀어 보내자, 서지윤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전원 주목. 이번 던전은 코어가 소실된 [비정상 게이트]입니다. 몬스터들의 지능과 흉포성이 데이터베이스보다 3배 이상 높습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장내가 조용해졌다.
3배. 그건 곧 사망률도 3배란 소리다.
"우리의 목적은 던전 최하층 '마력 제어 장치'의 복구. 살아서 돌아오고 싶다면, 내 지시에 절대복종하십시오. 진입합니다!"
우와아아!
헌터들의 함성과 함께, 거대한 붉은 소용돌이가 우리를 삼켰다.
나도 배낭 끈을 고쳐 매고 그 뒤를 따랐다.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
[해신의 무덤].
며칠 전 내가 털어먹었던 그곳이다.
하지만 공기의 질감이 달랐다.
끼기기기긱!
샤아아악!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고막을 긁는 소음이 쏟아졌다.
천장에는 해파리 몬스터들이 붉은 경광등처럼 번쩍이며 날아다녔고, 발목까지 차오른 물속에서는 사하긴들이 떼를 지어 튀어 올랐다.
"전방 적 출현! 방패병 앞으로!"
천랑 길드 소속 돌격대장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
전투 개시.
화염구가 터지고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나는 대열의 한가운데, 서지윤의 바로 등 뒤 1미터 지점에 있었다.
그녀가 지정한 '전담 짐꾼' 자리였다.
"강도현 씨. 포션."
서지윤이 앞을 보며 손만 뒤로 뻗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마나 포션을 꺼내 쥐여주었다.
그녀는 포션 병뚜껑을 엄지로 튕겨 날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내가 길을 뚫을 테니, 바짝 붙어요. 떨어지면 죽습니다."
팟!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튕겨 나갔다.
푸른 검기가 부채꼴로 퍼지며 앞을 막던 사하긴 열 마리를 동시에 썰어버렸다.
단면이 매끄러웠다.
S급의 무력.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깔끔한 '피의 길'이 열렸다.
'깔끔하네.'
전생의 내가 힘으로 찍어 누르는 스타일이었다면, 서지윤은 급소만 골라 베는 외과의사 같았다.
군더더기가 없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예상보다 나빴다.
사하긴들이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기어 나왔다.
바닥의 물이 완전히 핏빛으로 변했다.
"크아악! 내 다리!"
"진형 무너진다! 탱커들 뭐해!"
비명이 터졌다.
C급, B급 헌터들이 하나둘 찢겨 나갔다.
천랑 길드의 정예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철저하게 '겁먹은 짐꾼'을 연기했다.
비명을 지르며 엎드리고, 떨리는 손으로 포션을 던져주고.
절대 몬스터를 공격하지 않았다.
서지윤의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 있는 것 같았으니까.
"강도현 씨! 엎드려!"
서지윤이 소리치며 내 머리 위로 검을 휘둘렀다.
카앙!
천장에서 낙하하던 거미형 몬스터가 두 동강 나며 내 발치에 떨어졌다.
녹색 체액이 튀었다.
"허, 헉… 감사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요."
"네, 네…."
그녀가 다시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우리는 신전의 중층부, '갑각류 구역'으로 진입했다.
쿠웅, 쿠우웅.
바닥의 진동이 달랐다.
어둠 속에서 집채만 한 집게발이 불쑥 튀어나왔다.
[데스 크랩(Death Crab)].
A급 헌터 파티 하나를 통째로 씹어먹는다는 수문장.
"마법사! 화력 집중!"
화염과 뇌격이 쏟아졌지만, 데스 크랩의 갑각은 그을음만 생길 뿐이었다.
오히려 놈의 집게발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헌터들이 볼링핀처럼 날아갔다.
"비켜요!"
서지윤이 나섰다.
그녀의 쌍검이 푸른빛을 뿜으며 데스 크랩의 관절을 파고들었다.
챙! 채앵!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놈의 껍질이 너무 두꺼웠다. 서지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래선 안 돼.'
나는 뒤에서 짐을 고쳐 메며 혀를 찼다.
데스 크랩은 물리 방어 몰빵형이다.
관절 안쪽에 마력을 흘려넣어 내부에서 터뜨려야 한다.
하지만 서지윤은 정공법으로 깎아내려 하고 있었다.
'도와줘? 말아?'
내가 개입하면 3초면 끝난다.
하지만 마력을 쓰는 순간, 서지윤의 [진실의 눈]에 걸린다.
그때였다.
"샤아아악!"
데스 크랩에 집중하느라 무방비해진 서지윤의 등 뒤.
물속에서 일렁임이 느껴졌다.
은신형 사하긴 암살자.
놈이 물 밖으로 튀어 오르며 독 묻은 단검을 서지윤의 목덜미에 꽂으려 했다.
"팀장님! 뒤…!"
누군가의 외침은 늦었다.
서지윤이 반응하기엔 이미 단검이 깻잎 한 장 차이로 다가와 있었다.
0.1초.
내 머릿속 회로가 타닥, 불꽃을 튀겼다.
구한다 vs 모른 척한다.
구하면 들킨다.
모른 척하면 서지윤은 죽거나 리타이어.
(죽으면 곤란하다. 이 던전 클리어의 핵심 증인이니까.)
'젠장.'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배낭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마력 회로 지배] 개방.
손가락 끝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의 실을 뽑아냈다.
탁.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마력의 실이 허공을 날던 사하긴의 발목을 아주 살짝, 낚아챘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궤적만 비트는 초정밀 컨트롤.
"키엑?"
사하긴의 몸이 공중에서 미세하게 틀어졌다.
단검의 궤적이 1cm 어긋났다.
서걱!
단검이 서지윤의 경동맥 대신 어깨의 견갑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찰나의 틈.
서지윤은 놓치지 않았다.
"이 쥐새끼가!"
그녀가 몸을 회전시키며 쌍검을 엑스자로 교차했다.
사하긴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후우…."
서지윤이 거친 숨을 내쉬며 어깨를 감싸 쥐었다.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즉사는 면했다.
그녀가 데스 크랩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갔다.
"방금…."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진실의 눈].
그녀는 본 것이다.
사하긴의 발목을 낚아챈 그 투명하고 예리한 마력의 실을.
그리고 그 실의 끝이, 짐꾼인 내 손가락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강도현 씨."
그녀가 피 묻은 검을 든 채 뚜벅뚜벅 걸어왔다.
주변의 전투 소음이 진공 상태처럼 사라졌다.
"당신,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죠?"
나는 바닥에 떨어진 배낭을 주섬주섬 챙기며,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제가 뭘요? 전 놀라서 자빠진 건데…."
"거짓말하지 마!"
그녀가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눈빛이 형형했다.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확신에 찬 분노였다.
호랑이 등에 탄 줄 알았는데.
호랑이가 고개를 돌려 내 목덜미를 물어버렸다.
17화: 거짓말과 진실 사이
"당신, 방금 무슨 짓을 했냐고 물었어."
멱살을 잡은 서지윤의 손아귀 힘은 S급다웠다.
숨이 턱 막혔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색 마력 회로가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내 몸속의 마력 흐름을 역추적하려는 시도다.
'차단.'
나는 즉각 [그림자 장막] 팔찌의 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동시에 체내 마력 밸브를 꽉 잠갔다.
깡통.
그녀의 시선에는 내가 마력 하나 없는 깡통으로 보여야 했다.
"조, 조사관님? 숨 막혀요… 켁, 켁!"
나는 짐승처럼 헐떡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연기 집어치워. 사하긴의 궤적을 비튼 그 마력, 분명 당신 손끝에서 나왔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살려주세요!"
내가 끝까지 잡아떼자, 서지윤이 검 손잡이로 내 명치를 꾹 눌렀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E급 짐꾼이 S급 몬스터의 암살을 0.1초 만에 인지하고 간섭했다? 이건 특수조사팀 지하 고문실 감이야. 당장 불어. 정체가 뭐야."
살기가 찐득했다.
이 여자는 지금 몬스터보다 나를 더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콰아앙!
그때, 데스 크랩이 거대한 집게발로 땅을 내리쳤다.
지진 같은 진동에 서지윤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틈을 타 나는 뱀처럼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팀장님! 빨리 안 도와주시면 전멸입니다!"
전방에서 탱커들이 피를 토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박태민의 타워 쉴드도 찌그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서지윤은 이를 악물었다.
나를 당장 심문하고 싶겠지만, 공대장으로서 파티의 전멸을 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
"이 일 끝나고 봐. 도망치면 수배령 내릴 테니까."
서지윤이 살벌한 경고를 남기고 다시 데스 크랩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아."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위기는 넘겼지만, 꼬리가 길었다.
이 던전이 끝나면 그녀는 나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털어댈 것이다.
'어떻게 속이지?'
내 S급 마력 컨트롤을 E급의 우연으로 포장할 방법.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핑계가 없었다.
그때였다.
"큭!"
전방에서 싸우던 서지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녀가 데스 크랩의 공격을 피하다 말고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까 사하긴에게 당한 어깨 상처.
검은 핏줄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독이군.'
그냥 독이 아니라 신경 마비독이다.
서지윤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팀장님!"
헌터들이 기겁했지만,
37화: 관리자의 기억
시계탑의 종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서지윤. 아니, 제7 세계선의 관리자 아나스타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네가 날 불렀다고?"
나는 피 묻은 오른팔을 툭툭 털며 코웃음을 쳤다.
(불러올 거면 로또 번호라도 알려주고 부르든가.)
"사람을 과거로 부를 거면 사지 멀쩡할 때 부르지 그랬냐. 팔다리 다 잘리고 숨 넘어가기 직전에 부르는 건 무슨 악취미야."
"그때가 아니면 안 됐어."
그녀의 목소리가 뇌리를 직접 울렸다. 성스러운 어조였지만, 그 이면에는 짙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선, 가장 지독한 '독기'를 품은 영혼이 필요했거든. 평화로운 자는 심연을 죽일 수 없어. 오직 지옥을 겪어본 자만이 지옥을 부술 수 있지."
그녀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발끝이 거울 같은 바닥에 닿자, 황금빛 안광이 스르륵 잦아들며 원래의 푸른 눈동자로 돌아왔다.
은빛 머리카락도 다시 칠흑처럼 검게 변했다.
허공을 감돌던 초월적인 기운이 증발하고, 내가 아는 '서지윤'의 껍데기가 다시 씌워졌다.
"하아..."
그녀의 무릎이 꺾였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괜찮냐, 관리자님."
"놀리지 마. 머리통이 반으로 갈라질 것 같으니까."
서지윤이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구겼다.
"기억이 섞였어. 수천 년 동안 시스템을 관리하던 아나스타샤의 기억이랑, 20년 넘게 인간으로 살아온 서지윤의 기억이. 젠장, 내가 협회 팀장이라니."
"그럼 넌 이제 서지윤이냐, 아나스타샤냐."
"서지윤이지. 관리자 권한은 시스템에 묶여 있어. 난 그 권한의 아주 작은 파편만 들고 인간의 육신으로 내려온 거야. 널 돕기 위해서."
그녀가 가쁜 숨을 고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강도현. 전생의 세계는 마신(魔神)의 강림으로 완전히 멸망했어. 무영 같은 하급 마인 따위가 아니라, 진짜 심연의 주인이 넘어왔지. 난 남은 시스템의 에너지를 긁어모아 시간을 되돌렸고, 그 반동으로 기억을 잃은 채 이 시대에 떨어진 거야."
"그 마신이라는 놈이 이번 생에도 온다는 거군."
"어. 흑룡 길드는 그 전조일 뿐이야. 진짜 문을 열려는 자들은 따로 있어."
서지윤이 손목의 문신을 내려다보았다.
시계태엽 문양이 피부 아래에서 희미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을 열기 위해선, 시스템의 파편인 내가 제물로 필요해. 그래서 무영이 날 보고 눈이 뒤집혔던 거고."
퍼즐이 맞춰졌다.
내가 회귀한 이유. 시스템이 서지윤을 변수로 지정한 이유.
결국 이 모든 판의 끝에는 '마신'이라는 거대한 적이 도사리고 있었다.
"좋아. 목표가 명확해서 맘에 드네."
나는 [마탄의 사수]를 허리춤에 꽂았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과녁이 커졌을 뿐.)
"마신이든 뭐든, 내 앞길 막는 새끼들은 다 쏴 죽이면 되잖아."
"말은 쉽지. 근데 당장 눈앞의 적부터 걱정해야 할걸."
서지윤이 턱짓으로 시계탑 너머를 가리켰다.
우우웅-!
내가 아까 박살 냈던 과거의 환영. 그 잔해들이 마력의 폭풍을 일으키며 유적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시계탑의 톱니바퀴들이 미친 듯이 헛돌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기억의 성소가 무너지고 있어. 여기서 나가야 해!"
서지윤이 다급하게 외쳤다.
천장의 거대한 금속 파편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나는 쓰러져 있던 서지윤을 어깨에 훌쩍 들쳐 멨다.
"야! 나 뛸 수 있어!"
"입 다물어. 혀 깨물면 힐러도 없어."
나는 [마력 회로 지배]를 한계까지 끌어올려 다리에 집중했다.
쾅!
바닥을 차고 통로를 향해 튕겨 나갔다.
[축지]의 연속 발동.
무너지는 잔해들을 곡예하듯 피하며,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대표님!"
통로 중간쯤,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뛰어!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
내 고함에 길드원들도 파랗게 질린 얼굴로 출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유적이 통째로 가라앉는 굉음이 바짝 쫓아왔다.
지옥의 아가리가 닫히기 직전.
파아앗!
우리는 눈 덮인 분화구 밖으로 몸을 던졌다.
동시에 뒤편의 거대한 금속 문이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완전히 찌그러지며 땅속으로 꺼졌다.
"하아, 하아..."
"살았다..."
길드원들이 눈밭에 뒹굴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나도 서지윤을 내려놓고 뻐근한 어깨를 돌렸다.
"기억 찾으러 왔다가 목숨 두고 갈 뻔했네."
"그래도 찾았잖아. 네가 시스템의 버그라는 것도 알았고."
서지윤이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픽 웃었다.
이제 모든 게 명확해졌다. 돌아가서 섀도우 길드의 세력을 키우고, 다가올 멸망에 대비하면 된다.
짝, 짝, 짝.
그때였다.
눈보라를 뚫고 누군가 여유롭게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하나, 둘이 아니었다.
분화구를 둥글게 포위한 수십 명의 헌터들.
그들이 입고 있는 흰색 코트에는,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훌륭하군. 역시 자네를 보낸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포위망을 가르고 나타난 자.
낡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늙은 너구리. 유태만 협회장이었다.
그의 눈이 서지윤의 손목을 향했다.
"기억은, 무사히 되찾았는가? 관리자 나리."
내 눈이 가늘어졌다.
이 영감탱이,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
37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050자
- 장면 수: 3개 (관리자의 기억 수복 -> 유적 붕괴 및 탈출 -> 유태만의 등장)
- 등장 캐릭터: 강도현, 서지윤(아나스타샤), 섀도우 길드원들, 유태만
- 메인 플롯 비트: 회귀의 진짜 이유(마신 강림 저지) 확인. 유적 탈출. 유태만의 배신.
- 서브플롯 진행:
- 서브 A(미스터리): 서지윤이 인간의 자아와 관리자의 자아를 융합함.
- 공개된 정보: 전생의 멸망 원인(마신), 유태만이 관리자의 존재를 알고 있음.
- 심은 복선: 유태만이 서지윤을 노리는 이유.
- 회수한 복선: 32화의 유태만이 백두산으로 보낸 진짜 꿍꿍이.
- 클리프행어: 위기/반전 - 유적에서 탈출하자마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협회장 병력에게 포위됨. (A급)
- 템포: 중속 → 고속 → 긴장
38화: 늙은 너구리의 본색
바람이 살점을 베어낼 듯 매서웠다.
분화구를 에워싼 수십 명의 협회 정예 병력. 그들이 뿜어내는 마력의 파동이 백두산의 칼바람보다 더 지독하게 피부를 찔렀다.
최소 A급 이상. 십이지장(十二支將)이라 불리는 협회장 직속 부대도 섞여 있었다.
"협회장님. 이게 무슨 환영 인사입니까."
나는 피 묻은 오른팔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삐딱하게 섰다.
"비공식 임무라더니,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오셨네."
"비공식 맞지. 자네들이 여기서 '사고'로 전멸한다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유태만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나를 지나쳐 서지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서 팀장. 아니, 아나스타샤. 자네가 스스로 기억의 성소 문을 열어주길 십 년이나 기다렸네."
"당신... 어떻게 내 정체를..."
서지윤이 대검의 자루를 꽉 쥐며 물었다.
"내가 이 협회장 자리에 어떻게 올랐다고 생각하나? 마력이 강해서? 정치를 잘해서? 아니."
유태만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나 역시, 이 시스템의 '틈새'를 엿본 자이기 때문이지."
그의 눈자위가 까뒤집혔다. 이내 흰자위가 잉크를 푼 듯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족의 기운? 아니, 다르다.
저건 마족의 독기가 아니라, 시스템의 코드를 강제로 뜯어고친 '버그'의 파장이었다.
"마신이 강림하면 이 세계는 끝난다. 자네도 알지 않나?"
"그래서? 멸망을 막겠다고 날 죽이려는 거야?"
"죽이는 게 아니야. '흡수'하는 거지."
유태만이 입맛을 다셨다.
"네가 가진 관리자 권한. 그 파편만 내게 넘기면, 내가 이 세계의 신이 되어 마신을 막아주겠네. 완벽한 통제. 그것만이 인류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니까."
미친 늙은이.
마신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자기가 마신이 되려는 꼴이다.
전생에 흑룡 길드가 날뛸 때 협회가 미적지근하게 대응했던 이유가 이거였군. 뒤에서 시스템 권한을 탐내며 판을 짜고 있었던 거다.
"말이 너무 기네, 영감님."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남의 부길드장 뺏어가려는데, 길드장 허락은 맡아야지."
"강 대표. 자네는 빠지게. 자네의 그 SSS급 무력은 꽤 탐나지만, 시스템의 권한 앞에서는 일개 칼잡이에 불과해."
유태만이 손가락을 튕겼다.
"죽이지는 말고, 제압해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포위하고 있던 협회 병력들이 일제히 쇄도했다.
사방에서 마법의 화선이 그어지고, A급 전사들의 검기가 눈보라를 가르며 날아왔다.
"대표님!"
길드원들이 당황하며 무기를 빼 들었지만, 수적 열세가 너무 컸다.
"다들 엎드려!"
내 고함에 길드원들이 눈밭에 납작 엎드렸다.
나는 양손에 [해신의 진노] 건틀릿을 소환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마탄의 사수]를 뽑아 들었다.
왼손엔 전설급 건틀릿, 오른손엔 에픽급 리볼버.
"칼잡이인지 아닌지, 네 몸에 직접 새겨주지."
타아아앙-!
리볼버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파마]와 [추적]이 결합된 마력 탄환이, 선두로 달려오던 십이지장 한 명의 방어막을 종잇장처럼 뚫고 어깨를 날려버렸다.
"크아악!"
"뭐야! 저 무기는!"
적들이 당황한 틈을 타, 나는 [축지]를 밟고 적진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쓸어버려."
왼주먹을 눈 덮인 바닥에 내리꽂았다.
[특수 효과: 해일 발동]
콰아아아아앙!!!
백두산의 만년설이 수속성 마력과 섞이며 거대한 눈사태가 되어 폭발했다.
협회 정예 병력 수십 명이 속절없이 휩쓸려 공중으로 솟구쳤다.
비명소리가 눈보라에 묻혔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공중으로 떠오른 적들을 향해 리볼버를 연사했다.
탕! 탕! 탕!
정확히 급소를 빗겨간, 무력화만을 노린 사격. 죽이면 나중에 협회랑 정치질할 때 귀찮아지니까.
단 30초.
유태만을 호위하던 병력의 절반이 눈밭에 처박혀 신음하고 있었다.
"이... 이 괴물 새끼!"
남은 십이지장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유태만에게 겨누었다.
"어때. 칼잡이 솜씨 치고는 꽤 화려하지?"
하지만 유태만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대단하군. 엘릭서로 한계를 돌파한 육신에, 그런 사기적인 아티팩트라니. 하지만."
그가 천천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서지윤이 유적에서 발작을 일으켰을 때 보았던, 그 검은 석판의 조각이었다.
"시스템의 권한 앞에서는, 물리력은 무의미하다네."
유태만이 석판 조각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지이이잉-!
내 몸을 감싸고 있던 SSS급 마력이, 마치 전원이 끊긴 기계처럼 툭 하고 꺼져버렸다.
[해신의 진노]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사라지고, [마탄의 사수]의 붉은 코어도 빛을 잃었다.
"…뭐지?"
폐에 납덩이를 쑤셔 넣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마력 회로 자체가 시스템에 의해 강제로 '잠금(Lock)' 처리된 것이다.
(아씨, 와이파이 끊긴 기분이네.)
[경고: 상위 권한자에 의해 마력 사용이 제한됩니다.]
붉은 메시지 창이 시야를 가렸다.
"강도현!"
서지윤이 대검을 들고 내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문신이 빛을 발하며 유태만의 제어를 상쇄하려 했지만, 그녀의 권한은 아직 불완전했다.
"소용없어, 아나스타샤. 내 권한이 네 파편보다 조금 더 크거든."
유태만이 여유롭게 걸어왔다.
마력을 잃은 나는 그저 신체 능력이 조금 좋은 일반인에 불과했다.
"자, 이제 얌전히 권한을 넘기게."
유태만의 손이 서지윤의 목을 향해 뻗어오는 순간.
나는 피식 웃었다.
"영감님. 내가 템빨, 마력빨로만 여기까지 온 줄 아나 보네."
나는 마력이 꺼진 에픽 리볼버를 거꾸로 쥐었다.
총이 안 나가면?
몽둥이로 쓰면 되지.
퍼어어억!
마력 없이, 순수한 근력과 전생의 타격 기술만으로 휘두른 쇳덩어리가 유태만의 턱주가리를 강타했다.
"커헉...!"
권한을 맹신하고 방심했던 늙은 너구리의 몸이 눈밭을 뒹굴었다.
38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320자
- 장면 수: 3개 (유태만과의 대치 -> 도현의 학살 -> 유태만의 시스템 권한 발동 및 반격)
- 등장 캐릭터: 강도현, 서지윤, 유태만, 협회 병력
- 메인 플롯 비트: 유태만의 진짜 야욕(시스템 권한 탈취) 폭로. 마력이 봉인되는 위기.
- 서브플롯 진행:
- 서브 A(미스터리): 유태만이 시스템의 버그를 이용하는 자임이 밝혀짐.
- 공개된 정보: 유태만이 가진 석판 조각(권한 제어기).
- 심은 복선: 마력 없이 싸우는 도현의 깡다구.
- 회수한 복선: 32화의 유태만이 도현을 백두산으로 보낸 이유.
- 클리프행어: 사이다/반전 - 마력이 봉인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순수 피지컬로 적의 대가리를 후려치며 반격함. (A급)
- 템포: 고속 → 절망 → 폭발
39화: 깡다구와 시스템
"크윽...!"
유태만이 눈밭을 구르며 피를 토했다.
그의 턱주가리가 덜렁거렸다.
마력도 없는 순수 타격이었지만, 무거운 금속 총신으로 턱의 급소를 정확히 후려쳤으니 뇌진탕이 안 온 게 다행이었다.
"이, 이 미친 새끼가!"
쓰러진 유태만을 보고 십이지장들이 경악하며 달려들었다.
마력이 봉인된 나를 지키기 위해, 서지윤이 대검을 휘둘러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채앵! 카가각!
서지윤 혼자서 다수의 A급을 상대하려니 금세 한계가 보였다.
그녀의 어깨와 허벅지에 얕은 자상이 생겼다.
"강도현! 권한 제어는 내가 어떻게든 풀어볼 테니까, 넌 뒤로 빠져!"
서지윤이 소리쳤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쓰러진 유태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력 없으면 내가 호구인 줄 알지?"
전생에 내 마력 회로는 반쪽짜리였다.
마력이 뒤틀려 스킬을 쓰지 못할 때마다, 나는 순수한 육탄전과 살기로 몬스터들의 목을 땄다.
마력이 봉인된 지금의 감각은, 오히려 전생의 익숙했던 그 시궁창 같아서 편안했다.
(오히려 좋아. 템빨 소리 듣는 거 지겨웠거든.)
"죽여! 저 새끼 당장 죽여!"
턱이 빠진 유태만이 웅얼거리며 소리쳤다.
나를 향해 A급 검사 하나가 쇄도했다.
놈의 검에 푸른 오라가 맺혀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몸이 두 동강 날 위력.
(오른쪽 어깨가 들렸다. 초보자나 하는 실수.)
놈의 검이 내려쳐지는 순간.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반보 물러서며 궤적을 피했다.
그리고 놈의 뻗은 팔 안쪽으로 파고들어, 건틀릿을 낀 주먹으로 놈의 팔꿈치 관절을 올려쳤다.
우드득!
"아아악!"
관절이 역방향으로 꺾이며 놈의 검이 허공을 맴돌았다.
나는 떨어지는 검을 왼손으로 낚아챘다. 그대로 회전하며 놈의 무릎 뒤쪽을 걷어찬다.
놈의 무릎이 꺾이는 순간, 빼앗은 검의 손잡이가 놈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기절. 단 2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력만 믿고 깝치는 온실 속 화초 새끼들."
나는 빼앗은 A급 장검을 어깨에 걸치며 씩 웃었다.
주변의 십이지장들이 흠칫하며 물러섰다.
마력이 0인 상태에서 A급 헌터를 순수 체술로 털어버리는 광경은 그들의 얄팍한 상식을 파괴하고 있었다.
"뭐해! 마법으로 원거리에서 갈겨!"
유태만이 뒤로 기어가며 명령했다.
마법사들이 영창을 시작했다.
수십 개의 화염구와 얼음창이 허공에 맺혔다.
저건 체술로 피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그때였다.
"대표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눈보라를 뚫고, 거대한 쇳덩어리가 포탄처럼 날아와 내 앞을 막아섰다.
박태민이었다.
그의 손에는 유진이 새롭게 업그레이드해 준, 전신을 가리는 시커먼 에픽 등급 타워 쉴드가 들려 있었다.
콰다다다당!
수십 개의 마법이 박태민의 방패에 쏟아졌지만,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흩어졌다.
[절대 영역]의 완벽한 전개.
"태민아. 본진 지키라니까 왜 왔어."
"대표님이 연락도 안 되고, 서 부길드장님 위치 추적기도 끊겨서... 길드원들 다 끌고 왔습니다!"
박태민의 등 뒤로, 섀도우 길드의 정예 50명이 눈보라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모두 유진이 만든 흉악한 장비들로 무장한 채, 독기 어린 눈으로 협회 병력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말 안 듣는 부하들이지만, 이럴 땐 든든하네.
"형세가 역전됐네, 영감님."
내가 검을 겨누자, 유태만의 안색이 시체처럼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시스템 제어용 석판을 들고 발악하듯 외쳤다.
"네놈들! 협회를 상대로 반역을 일으킬 셈이냐! 너희 길드는 오늘부로 테러리스트다!"
"테러리스트? 좋지."
내가 코웃음을 쳤다.
"근데 그거 알아? 테러리스트는 협상 같은 거 안 해."
"밀어버려!"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섀도우 길드원들이 포효하며 협회 병력을 향해 덮쳤다.
전투의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협회 놈들은 마력이 높았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했고, 우리 길드원들은 밑바닥에서 구르며 뼈에 새긴 살기로 싸웠다.
게다가 장비의 질마저 우리가 압도했다.
"큭... 후퇴한다! 전원 철수!"
유태만이 이를 갈며 포탈 스크롤을 찢었다.
그의 몸이 푸른빛에 휩싸이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강도현. 그리고 아나스타샤. 서울에서 보자. 너희는 절대 협회의 포위망을 뚫지 못할 거다."
유태만과 살아남은 십이지장들이 포탈을 타고 도망쳤다.
눈밭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협회 병력들만 남았다.
"대표님, 쫓을까요?"
박태민이 씩씩거리며 물었다.
"아니. 놔둬. 어차피 서울로 가야 하니까."
지잉.
유태만이 사라지자, 그가 쥐고 있던 석판의 통제력이 끊어졌다.
내 몸을 옥죄고 있던 시스템의 잠금이 풀리며, 다시 SSS급 마력이 단전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탄의 사수]와 [해신의 진노]가 기분 좋은 진동을 냈다.
"살 것 같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서지윤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검을 지팡이 삼아 서 있었다.
"협회장이 우릴 테러리스트로 지명할 거야. 언론도 그쪽 편이고, 군대까지 동원할지도 몰라."
서지윤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알아. 그러니까 선수 쳐야지."
"어떻게?"
나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산꼭대기라 터지진 않지만, 서울에 도착하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전 국민한테 역으로 선전포고하는 거지. 늙은 너구리가 마신이랑 손잡고 세상 말아먹으려 한다고."
(팝콘이나 넉넉히 준비하라고 해.)
나는 길드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원 서울로 귀환한다! 가서 방송국부터 턴다!"
전면전.
이제 숨어서 하는 복수는 끝났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지는 법.
대한민국 전체를 그림자로 덮어버릴 시간이다.
39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450자
- 장면 수: 3개 (마력 봉인 상태의 전투 -> 박태민과 길드원들의 난입 -> 유태만의 도주 및 선전포고)
- 등장 캐릭터: 강도현, 서지윤, 유태만, 박태민, 섀도우 길드원들
- 메인 플롯 비트: 협회와의 전면전 시작. 섀도우 길드의 전력 과시.
- 서브플롯 진행:
- 서브 C(동료): 박태민이 도현의 지시를 어기고 구하러 옴으로써 진정한 충성심과 유대감을 증명.
- 공개된 정보: 마력이 없어도 압도적인 도현의 전투 센스.
- 심은 복선: 언론을 이용한 정보전(방송국 점거).
- 회수한 복선: 28화의 길드원 훈련 성과.
- 클리프행어: 기대형 - 테러리스트로 몰릴 위기에서 오히려 방송국을 털어 역선전포고를 하겠다는 미친 발상. (B급)
- 템포: 고속 → 중속
40화: 그림자의 선전포고
서울 여의도. 대한민국 최대 방송국 KBC 본사.
자정 무렵의 방송국은 고요해야 정상이지만, 지금 이곳은 전시 상황을 방불케 했다.
"손들어! 다들 움직이지 마!"
섀도우 길드원들이 로비와 주조정실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경비원들은 이미 바닥에 묶여 있었고, 야근 중이던 PD와 엔지니어들은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신 채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대표님, 세팅 끝났습니다."
박태민이 주조정실의 메인 콘솔을 가리키며 보고했다.
나는 피 묻은 코트를 벗어 던지고, 카메라 앵글이 잘 잡히는 앵커석에 앉았다.
옆에는 서지윤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진짜 할 거야? 이거 전파 타는 순간, 넌 빼도 박도 못하는 국가 반역자야."
"이미 테러리스트라며. 기왕 할 거 스케일 크게 가야지."
나는 모니터 앞의 덜덜 떠는 엔지니어에게 턱짓을 했다.
"송출해. 전국 모든 채널 동시 방송으로."
"그, 그런 건 비상사태 때만 가능한..."
"지금이 내 기분 비상사태니까, 당장 해."
내 손에 들린 [마탄의 사수]를 보자, 엔지니어가 울상을 지으며 마스터 스위치를 올렸다.
삐-!
전국의 TV, 스마트폰, 옥외 전광판의 화면이 일제히 전환되었다.
예능을 보던 사람들도, 뉴스를 보던 사람들도 모두 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화면 속의 나는, 헝클어진 머리에 뺨에는 핏자국이 남은 거친 모습이었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국민 여러분, 야밤에 죄송합니다. 섀도우 길드 대표 강도현입니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금쯤 헌터 협회장 유태만이 긴급 브리핑을 준비 중일 겁니다. 저희 길드를 흑룡 길드를 무너뜨린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군대를 동원해 토벌하겠다고 하겠죠."
나는 책상 위에 서류 뭉치를 툭 던졌다.
유적에서 챙겨온 마족의 흔적, 그리고 흑룡 길드 금고에서 빼낸 유태만과 무영의 뒷거래 내역서.
"하지만 진실은 이렇습니다. 유태만 협회장은 마족과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화면에 서류의 내용이 클로즈업되어 송출되었다.
"그는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고 시스템의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마족의 강림을 묵인했습니다. 흑룡 길드장 무영이 마족으로 변이한 것도, 송도 게이트가 폭주한 것도 모두 유태만의 작품입니다."
전국이 발칵 뒤집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조회수 달달하게 뽑히겠네.)
"저희 섀도우 길드는 이 썩어빠진 협회를 청소하기 위해 움직인 것뿐입니다. 지금부터 저희는 여의도 협회 본부로 진격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을 테면 막아보십시오. 유태만, 네놈 목은 오늘 밤 내가 딴다."
치직.
방송 송출을 끊었다.
단 3분의 짧은 방송. 하지만 그 파장은 핵폭탄급일 것이다.
여론은 둘로 갈라지겠지만, 최소한 정부와 군대가 무턱대고 협회 편을 들며 우리를 공격하지는 못하게 만들었다. 명분이 흔들렸으니까.
"가자."
나는 리볼버를 챙겨 들고 방송국을 나섰다.
여의도 헌터 협회 본부.
거대한 요새처럼 지어진 100층짜리 마천루.
건물 주변에는 수천 명의 협회 소속 헌터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백두산에서 도망쳤던 십이지장(十二支將) 중 7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끼이익!
우리가 탄 밴 수십 대가 협회 앞 광장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50명의 그림자들이 쏟아져 내렸다.
수천 대 오십.
압도적인 수적 열세.
(물론 저쪽이 열세다. 우리 애들 눈깔 돌아간 거 보니까.)
"강도현!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기어들어 오느냐!"
십이지장 중 제1석, 대검을 든 거한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테러리스트 놈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전원 발포!"
수천 명의 마법사와 궁수들이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밤하늘이 형형색색의 마법 빛으로 대낮처럼 밝아졌다.
"태민아."
"네!!"
박태민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에픽 타워 쉴드를 바닥에 쾅 꽂았다.
[절대 영역 - 과부하]
평소보다 3배는 거대한 반투명 방패가 전방을 가로막았다.
수천 발의 공격이 방패에 부딪혀 연쇄 폭발을 일으켰지만, 박태민은 피를 토하면서도 한 발짝도 밀리지 않았다.
"길 열어!"
박태민의 방어를 방패 삼아, 서지윤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녀의 쌍검이 거대한 대검으로 합쳐지며 푸른 섬광을 뿜어냈다.
"비켜라, 쓰레기들아!"
서지윤의 검기가 바리케이드를 향해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수십 명의 헌터들이 볼링핀처럼 우르르 쓸려나가며 방어선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 사이로 섀도우 길드원들이 굶주린 늑대 떼처럼 파고들어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팀장님, 폼 안 죽었네."
나는 여유롭게 걸어가며 [마탄의 사수]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내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파마의 탄환들이, 십이지장들의 방어막을 정확히 깨부수며 그들의 팔다리를 꿰뚫었다.
"이, 이 괴물 새끼들!"
제1석이 분노하며 내게 대검을 내리쳤다.
S급의 일격.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왼손의 [해신의 진노]를 들어 그 검을 맨손으로 잡아냈다.
카가각!
건틀릿과 대검이 끔찍한 마찰음을 내며 불꽃이 튀었다.
"힘이 좀 빠졌네. 늙은 너구리 똥구멍 핥느라 기력이 다했나?"
"닥쳐라!"
내가 건틀릿에 마력을 응축시켜 쥐어짜자, S급 대검의 칼날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부러져 나갔다.
제1석의 눈이 흔들리는 순간.
나는 놈의 턱에 앞차기를 꽂아 넣어 그대로 눕혀버렸다.
수천 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나와 서지윤이라는 두 명의 규격 외 괴물, 그리고 에픽 장비로 무장한 독기 품은 50명의 정예.
협회의 방어선은 단 10분 만에 돌파당했다.
"대표님! 1층 로비 확보했습니다!"
박태민이 피투성이가 된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널브러진 헌터들을 밟고 지나가며 협회 본부의 회전문 앞에 섰다.
"수고했다. 너희는 여기서 잔당들 막아. 위로는 나랑 부길드장만 올라간다."
나는 서지윤과 눈을 맞췄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관리자 아나스타샤의 몽롱한 빛을 띠고 있었다.
목표는 100층. 협회장실.
"가자. 시스템 권한 회수하러."
나는 굳게 닫힌 두꺼운 강화유리 문을 건틀릿으로 후려쳐 박살 내며, 협회 본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최종 보스전의 시작이었다.
40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380자
- 장면 수: 3개 (방송국 점거 및 폭로 -> 협회 본부 앞 대규모 전투 -> 1층 돌파)
- 등장 캐릭터: 강도현, 서지윤, 박태민, 십이지장 제1석
- 메인 플롯 비트: 대국민 폭로전을 통한 명분 획득. 협회 본부 전면전 돌입.
- 서브플롯 진행:
- 서브 C(동료): 섀도우 길드 50명이 수천 명의 협회 병력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전력을 보여줌.
- 공개된 정보: 유태만의 마족 내통 증거 만천하에 공개.
- 심은 복선: 서지윤의 눈빛 변화(관리자 모드 각성).
- 회수한 복선: 39화의 방송국 점거 예고.
- 클리프행어: 행동/진입 - 수천 명의 방어선을 뚫고 최종 보스가 있는 마천루 안으로 진입하며 카타르시스 제공. (B급)
- 템포: 고속
41화: 시스템의 주인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협회 측에서 메인 전력을 차단해버린 탓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따위는 필요 없었다.
"잡아."
내가 서지윤의 허리를 덥석 감싸 안았다.
그녀가 흠칫 놀라며 내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을 박찼다.
콰앙!
[축지]를 응용한 수직 도약.
엘릭서로 강화된 근력과 SSS급 마력이 폭발하며, 우리는 엘리베이터 통로를 타고 로켓처럼 솟구쳐 올랐다.
층수를 알리는 숫자가 무의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10층, 30층, 50층...
(엘리베이터 고친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수리비 청구하려나.)
"너 진짜 도라이야?!"
서지윤이 내 목을 꽉 끌어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피식 웃으며 통로 벽을 한 번 더 발로 찼다.
"안전벨트 맸으면 꽉 잡아."
쾅! 콰아앙!
수직 상승의 끝.
100층 꼭대기에 다다르자, 나는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주먹으로 날려버렸다.
우리는 매캐한 먼지구름과 함께 협회장실 앞 복도에 착지했다.
"하아, 하아... 너 진짜 명줄 짧게 살겠다."
서지윤이 비틀거리며 내 품에서 벗어났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볍게 털어내고 복도 끝에 있는 거대한 흑단목 문을 바라보았다.
문틈으로 기분 나쁜 마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족의 탁한 독기와 시스템의 푸른 데이터가 엉망으로 섞인, 구역질 나는 파장.
"들어가자."
내가 문을 걷어차려던 순간.
육중한 문이 저절로 스르륵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다, 불청객들."
협회장실 내부는 평범한 집무실이 아니었다.
벽과 천장이 모두 뜯겨 나가고, 거대한 붉은색 마력로가 방 중앙에 흉물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마력로 안에는 수많은 사람의 형태를 한 핏덩어리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백도훈이 저질렀던 불법 생체 실험의 결과물들. 그 마력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력로와 수십 개의 호스로 연결된 채, 공중에 떠 있는 자.
유태만이었다.
그의 낡은 트렌치코트는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육신은 반쯤 기계와 마족의 살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백두산에서 보았던 그 검은 석판이 흉측하게 콱 박혀 있었다.
"이게... 무슨 끔찍한..."
서지윤이 헛구역질을 참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놀랄 것 없다, 아나스타샤."
유태만의 목소리가 방 안을 웅웅 울렸다.
기계음과 늙은이의 탁한 목소리가 기분 나쁘게 겹쳐 들렸다.
"시스템의 권한을 인간의 몸으로 온전히 담아내려면, 이 정도의 '배터리'는 필요한 법이지. 백도훈 그 멍청한 놈이 아주 유용하게 쓰였어."
"미친 영감탱이. 결국 네가 마신을 부르려는 거였냐."
내가 [마탄의 사수]를 겨누며 쏘아붙였다.
유태만이 입가를 찢어질 듯 늘리며 웃었다.
"부르는 게 아니야. 내가 마신을 '통제'하는 거지. 이 압도적인 권한으로!"
유태만이 앙상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내 몸을 짓누르는 엄청난 중력장이 발생했다.
백두산에서 겪었던 마력 봉인과는 달랐다. 이번엔 공간 자체를 압축시켜 나를 찌그러뜨리려는 무식한 물리적 압력이었다.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아씨, 오늘 도수치료 예약해야겠네.)
하지만.
"통제 좋아하네."
나는 이를 으드득 악물고 허리를 폈다.
내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SSS급 마력이 중력장을 밀어내며 붉은 스파크를 흩뿌렸다.
"이 정도 압력으로 날 찌그러뜨리려면, 10년은 더 늙어서 와야지."
타아아앙-!
나는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파마의 탄환이 유태만의 미간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유태만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탄환은 그의 코앞 1미터 지점에서 허공에 멈춰 섰다. 마치 투명한 젤리에 갇힌 것처럼 미세하게 진동할 뿐이었다.
"시스템 권한 앞에서는 물리력도, 마력도 무의미하다고 했을 텐데."
유태만이 손을 가볍게 쥐자, 에픽 등급의 탄환이 모래성처럼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강도현. 넌 확실히 강하다. 하지만 넌 체스판 위의 말일 뿐이야. 체스판 자체를 뒤집어엎는 나를 이길 순 없어."
"그건 해봐야 알지."
나는 [마탄의 사수]를 버리고 [해신의 진노]를 양손에 꼈다.
그리고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축지]를 연속으로 밟으며 사각지대를 노렸지만, 유태만의 눈동자는 내 궤적을 소름 돋게 쫓고 있었다.
"소용없다."
유태만의 손짓 한 번에, 허공에서 수십 개의 공간의 칼날이 생성되어 나를 덮쳤다.
피할 수 없는 범위.
나는 양팔을 십자로 교차해 [절대 방어]를 펼쳤다.
콰가가각!
물의 장막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충격파에 밀려 나는 바닥으로 매정하게 곤두박질쳤다.
확실히, 놈은 지금 차원이 다른 힘을 다루고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그때, 내 옆으로 서지윤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동자가 완전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관리자 아나스타샤의 강림.
그녀의 손목에 있는 시계태엽 문신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오류는, 관리자가 수정한다."
서지윤이 손을 뻗자, 유태만을 감싸고 있던 절대적인 공간의 장벽이 파열음을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 네년이 기어코!"
유태만의 여유롭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이마에 박힌 석판과 서지윤의 문신이 서로의 권한을 빼앗기 위해 치열한 데이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방 안의 사물들이 중력을 잃고 둥둥 떠올랐다가, 허공에서 바스라지기를 반복했다.
"강도현! 지금이야!"
서지윤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가 유태만의 방어막에 바늘구멍 같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겨우 1초.
그 틈이면 충분했다.
나는 바닥을 걷어차고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모든 마력을 오른손 건틀릿에 한 점으로 집중시켰다.
"영감님, 체스판 뒤집어엎는 거 좋아하지?"
내 주먹이 유태만의 안면을 향해 무자비하게 꽂히는 순간.
"그럼 네 면상부터 뒤집어줄게."
[특수 효과: 해일 최대 출력]
콰아아아아아앙-!!!
응축된 마력이 유태만의 이마에 박힌 석판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석판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100층 집무실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41화 메타 정보
- 총 글자 수: 4,450자
- 장면 수: 3개 (엘리베이터 통로 수직 상승 -> 협회장실 진입 -> 유태만과의 최종 보스전 1페이즈)
- 등장 캐릭터: 강도현, 서지윤(아나스타샤), 유태만(마인+권한자)
- 메인 플롯 비트: 협회장 유태만과의 최종 결전 돌입. 서지윤의 관리자 권한과 도현의 무력이 시너지를 냄.
- 서브플롯 진행:
- 서브 A(미스터리): 서지윤이 아나스타샤로서의 힘을 개방해 유태만의 시스템 통제를 상쇄함.
- 공개된 정보: 유태만이 생체 실험의 마력을 이용해 시스템 권한을 억지로 다루고 있음.
- 심은 복선: 부서진 석판이 가져올 나비효과.
- 회수한 복선: 38화의 유태만 시스템 잠금 공격 파훼.
- 클리프행어: 절정/파괴 - 도현의 필살기가 유태만의 권한 제어기(석판)를 박살 내기 직전의 쾌감 폭발. (S급)
- 템포: 고속 → 폭발
Batch 9 완료 요약
진행 상황 트래커 업데이트
- 메인 플롯 진행률: 41/220 (아크 2: 결전 파트 돌입)
- 활성 서브플롯:
- 서브 A(미스터리): 서지윤의 정체 완전 공개 및 관리자 권한 발동. (해결 단계)
- 서브 B(경제): 방송국 점거를 통한 여론전 승리.
- 서브 C(동료): 섀도우 길드의 무력 시위 성공.
- 미공개 정보: 석판이 부서진 후 마신의 진짜 강림 여부.
- 활성 복선: 마신이 강림했을 때의 대처법.
- 회수 완료 복선: 회귀의 진짜 이유(37화), 협회장의 본색(38화).
- 다음 배치 예고: 유태만과의 결전 마무리. 석판 파괴로 인한 시스템의 일시적 붕괴. 마신(혹은 마신의 수하)의 본격적인 등장과 스케일의 우주적 확장.
일관성 검증
- 캐릭터 음성 일관성: 도현의 마이웨이식 전투 스타일과 언행 일치. 유태만의 흑막다운 오만함 표현.
- 세계관 일관성: 시스템 권한(버그)과 순수 무력(마력)의 충돌을 논리적으로 묘사.
- 시간 흐름: 3738화(백두산) -> 3940화(서울 귀환 및 방송) -> 41화(협회 본부 결전). 긴박한 타임라인 유지.
- 톤 일관성: 전투 씬에서 비가 법칙(개그와 긴장의 교차)을 적용하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도현의 건조한 유머로 사이다를 유지함.
떡밥 상태 업데이트
| 떡밥 ID | 설치 화 | 내용 | 현재 상태 | 다음 힌트 예정 | 회수 예정 |
|---|---|---|---|---|---|
| F-001 | 5화 | 서지윤의 정체 | 관리자 아나스타샤 각성 | 41화에서 회수 | - |
| F-011 | 31화 | 협회장의 목적 | 시스템 권한 탈취 확인 | 41화에서 회수 | - |
| F-012 | 37화 | 마신의 진짜 강림 | 유태만의 폭주로 문이 열릴 위기 | 42화 | 50화 |
42화: 붕괴하는 권력
쩌저적!
내 주먹에 담긴 [해일]의 파괴력이 유태만의 이마에 박힌 검은 석판을 정통으로 뚫고 들어갔다.
경쾌한 파열음이 고막을 때렸다. 강화 유리가 박살 나는 소리와 흡사했다.
석판의 표면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더니, 이내 비산하는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 으아아아아아!"
유태만의 입에서 인간의 성대로는 낼 수 없는 기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석판이 부서짐과 동시에, 그가 억지로 억누르고 있던 시스템의 권한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반인반마의 육신이 한계치를 넘은 풍선처럼 기형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근육 섬유가 끊어지는 소리가 툭툭 들려왔다.
"영감님. 체스판 뒤집어엎으니까 기분이 좀 어때?"
나는 놈의 안면에 꽂아 넣었던 주먹을 거두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태만의 눈자위에서 시커먼 피가 봇물 터지듯 흘러내렸다.
그가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렸다. 공간을 압축하던 그 절대적인 위압감은 온데간데없었다.
"내, 내 권한이! 위대한 심연의 힘이...!"
"네 힘이 아니지. 훔친 장물일 뿐."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마탄의 사수]를 발등으로 차올려 낚아챘다.
철컥.
실린더를 돌리는 손맛이 짜릿했다. 붉은 코어가 다시금 맹렬하게 빛을 뿜어냈다.
시스템의 강제 잠금이 완전히 해제된 것이다.
"강도현! 당장 끝내! 저 마력로가 폭발하려고 해!"
뒤에서 서지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녀는 방 중앙의 거대한 붉은 마력로를 향해 양손을 뻗고 있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핏발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백도훈이 생체 실험으로 갈아 넣은 수천 원혼들의 마력이, 통제자를 잃자마자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알아. 막타 칠게."
나는 유태만의 미간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놈은 이미 이성을 잃고 흉측하게 부풀어 오른 고깃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대한민국 헌터계의 정점. 그 끝은 너무나도 추악하고 볼품없었다.
"지옥에 자리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타아아앙-!
파마의 탄환이 놈의 머리통을 수박 깨뜨리듯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머리가 사라진 유태만의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으로 쿵, 하고 처박혔다.
그 충격으로 마력로와 연결되어 있던 수십 개의 튜브가 일제히 터져 나갔다.
[보스 몬스터 '타락한 권한자 유태만'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5 상승합니다.]
[타이틀 '협회의 어둠을 걷어낸 자'를 획득했습니다.]
"끝났... 젠장!"
내가 총을 내리기도 전에, 서지윤이 피를 한 됫박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마력로의 폭주를 억누르던 그녀의 방어막이 한계에 달해 깨져버린 것이다.
콰아아아앙-!
100층 집무실의 중앙에서, 응축되었던 핏빛 마력이 화산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건물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휘청거렸다.
천장이 종잇장처럼 뜯겨 날아가고, 서울의 밤하늘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즉시 [축지]를 밟아 서지윤을 낚아채고 창가 쪽으로 몸을 날렸다.
폭발의 여파가 우리가 방금 서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유태만의 시체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괜찮아?"
"콜록... 난 괜찮아. 근데, 저기 좀 봐."
서지윤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마력로가 폭발하며 쏘아 올린 거대한 붉은 광선이, 구름을 뚫고 대기권 밖으로 뻗어 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닿은 하늘의 끝자락.
찌지직, 쩌억.
허공에 시커먼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단순한 게이트가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찢어지며, 그 너머의 심연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서울 전역을 집어삼킬 듯 거대한 차원의 균열이었다.
[경고! 세계선 보호막이 붕괴되었습니다.]
[경고! 규격 외의 존재가 접근 중입니다.]
시스템 창이 미친 듯이 점멸하며 붉은 경고 메시지를 토해냈다.
차원의 틈새 너머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별빛 하나 없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거대한 적동색(赤銅色) 구체.
아니, 구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눈동자'였다.
"마신..."
서지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폐부의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물리적인 압력이 아니었다. 마치 심해 1만 미터 아래에 알몸으로 던져진 기분.
여의도 광장에서 전투를 벌이던 헌터들도, 길드원들도 모두 그 눈동자를 보고는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찾았다.]
머릿속이 아니라, 세상 전체의 대기를 울리는 거대한 목소리.
눈동자의 시선이 정확히 내가 안고 있는 서지윤을 향해 꽂혔다.
[나의 열쇠. 아나스타샤.]
"큭...!"
서지윤이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그녀의 손목에 새겨진 문신이 살을 파고들 듯 붉게 타올랐다.
마신이 그녀를 강제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영혼째로 뽑아갈 기세였다.
"어딜 넘봐."
나는 서지윤을 내 등 뒤로 거칠게 밀어 넣고, 눈동자를 향해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공포? 당연히 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하지만 전생에 팔다리가 잘린 채 산 채로 슬라임에게 파먹히던 고통에 비하면, 저딴 눈깔의 시선 따위는 간지러운 수준이다.
나는 [마탄의 사수]의 실린더를 찰칵 돌렸다.
"남의 부길드장한테 수작 부리지 마라, 애꾸눈아."
하늘을 찢고 나타난 재앙을 향해, 나는 망설임 없이 총구를 겨누었다.
43화: 하늘을 찢는 눈동자
[방자하군. 미천한 흙먼지 주제에.]
마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 단순한 움직임만으로도 여의도 일대의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100층 협회 본부 건물의 유리창이 일제히 박살 나며 파편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상에 있던 하급 헌터들은 이미 거품을 물고 기절한 지 오래였다.
"강도현... 피해."
내 등 뒤에서 서지윤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녀의 몸은 마신의 인력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치아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딱딱거렸다.
"내가 갈게. 내가 저 틈새로 들어가서, 내 권한을 자폭시키면... 차원문을 다시 닫을 수 있어."
"헛소리."
나는 시선을 하늘에 고정한 채 단호하게 잘랐다.
"기껏 기억 찾아줬더니 자폭 타령이야. 넌 뒤에서 응원이나 해."
"이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저건 신이라고!"
그녀가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눈물이 맺힌 황금빛 눈동자. 전생의 멸망을 홀로 짊어졌던 관리자의 처절한 책임감이 거기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신? 내 눈엔 그냥 존나 큰 과녁판으로 보이는데."
나는 양 다리에 마력을 집중했다.
건물 옥상의 콘크리트가 내 발밑에서 쩍쩍 갈라졌다.
[해신의 진노]와 [마탄의 사수].
두 전설과 에픽의 기운이 내 SSS급 마력과 융합하며 푸른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기다려. 저 눈깔, 터뜨려버리고 올 테니까."
쾅-!
나는 바닥을 걷어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음속을 돌파하는 충격파가 100층 옥상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나는 중력을 비웃듯, 하늘에 뚫린 거대한 균열을 향해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어리석은 것.]
마신의 눈동자에서 붉은 광선이 쏘아졌다.
수십 미터 두께의 파괴 광선. 닿는 순간 원자 단위로 분해될 절대적인 공격이었다.
"느려."
나는 허공에서 [축지]를 밟았다.
공간을 접어 이동하는 기술.
광선이 내 잔상을 뚫고 지나가 지상의 한강을 때렸다.
강물이 순식간에 증발하며 거대한 수증기 기둥이 버섯구름처럼 솟구쳤다.
나는 광선의 궤적을 타고 오르듯, 눈동자의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짓누르는 압박감이 내 뼈를 으스러뜨릴 듯했지만, 엘릭서로 코팅된 마력 회로가 그 압력을 모조리 튕겨냈다.
"안구 건조증엔 이게 직빵이지."
나는 왼손의 [해신의 진노]를 앞으로 뻗었다.
[특수 효과: 해일 최대 과부하]
단전의 마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았다.
내 왼주먹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수속성 폭포가 마신의 붉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강타했다.
[크으으으윽!]
마신의 텔레파시에 처음으로 고통이 섞였다.
절대적인 신의 안구에, 고작 인간의 마력이 타격을 입힌 것이다.
수증기가 폭발하며 눈동자의 시야가 가려진 찰나.
나는 오른손의 [마탄의 사수]를 눈동자의 동공 정중앙에 겨누었다.
"파마(破魔)."
타아아아아앙-!!!
여섯 발의 총알을 한 번에 쏘아냈다.
총신이 열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갔지만 상관없었다.
응축된 빛의 탄환들이 일직선으로 날아가 마신의 동공을 정확히 꿰뚫었다.
[크아아아아아아!]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
거대한 눈동자에서 시커먼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균열을 비집고 들어오려던 마신의 본체가, 타격의 반동으로 뒤
47화: 거울 속의 괴물
카아아앙!
마계의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붉은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거대한 낫과 단검이 허공에서 얽혔다.
무기의 체급 차이는 압도적이었지만, 튕겨 나간 건 흑기사 쪽이었다.
[호오. 힘이 제법이군.]
놈이 낫을 빙글 돌리며 착지했다.
투구 너머로 보이는 내 얼굴. 아니, 타락한 첫 번째 세계선의 강도현.
입가에 걸린 비릿한 미소마저 거울을 보는 듯 똑같았다.
"거울 보고 싸우는 기분이네. 기분 더럽게."
[나도 마찬가지다. 약해 빠진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역겨우니까.]
놈이 다시 땅을 박찼다.
[축지].
공간을 찢고 사각지대로 파고드는 움직임. 내가 가장 선호하는 패턴이었다.
'오른쪽 어깨.'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단검을 역수로 쥐어 등 뒤를 막았다.
챙!
정확한 타이밍. 낫 날이 단검에 막혀 불꽃을 튀겼다.
[막을 줄 알았다.]
놈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기도 전에, 왼쪽 무릎이 내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이것 역시, 내가 즐겨 쓰는 연계기.
퍽!
"큭!"
갈비뼈가 울렸다. 몸이 볼품없이 튕겨 나갔다.
바닥을 한 바퀴 구르고서야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백두산 유적의 환영과는 질이 달랐다.
저놈은 내 전투 센스에 마족의 피지컬, 마계라는 홈그라운드의 이점까지 독식하고 있었다.
[왜 그러지? 겨우 그 정도인가?]
흑기사가 낫을 고쳐 쥐며 다가왔다.
짙은 독기가 소용돌이치며 낫 끝에 맺혔다.
"강도현!"
서지윤이 대검을 뽑아 들고 놈의 측면을 노렸다.
하지만 그녀가 검을 휘두르기도 전, 홍해처럼 갈라져 있던 마수 군단이 괴성을 지르며 그녀를 덮쳤다.
[방해꾼은 빠져 있어라. 이건 나와 나 자신의 대화니까.]
흑기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수들이 파도처럼 서지윤을 고립시켰다.
"이 쓰레기들이!"
푸른 검기가 마수들을 썰어버리기 시작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도움을 기대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신경 쓰지 마! 내 밥그릇이야!"
나는 서지윤을 향해 외치고 다시 놈을 노려보았다.
입가에 고인 피를 뱉었다.
맞아보니까 확실했다. 저놈은 나보다 빠르고, 강하다.
하지만.
"템빨은 내가 더 좋거든."
나는 에픽 슈트 [심연의 잠수복]의 마력 회로를 최대로 열었다.
우우웅-!
슈트 표면의 바포메트 코어가 붉게 점멸했다.
마계의 짙은 독기와 마력이 진공청소기처럼 슈트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뭐지...?]
흑기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놈이 낫에 모아두었던 마력마저 흐트러지며 내게 흡수되고 있었다.
"적진 한가운데서 무한 동력. 이게 자본주의의 맛이다, 이 새끼야."
나는 놈의 마력까지 흡수해 터
Batch 12: 52~56화
52화: 멸망의 톱니바퀴
고치 뒤편의 어둠이 걷히며 드러난 존재.
그것은 마수도, 악마도 아니었다.
여섯 장의 날개를 펼친 거대한 천사의 형상.
하지만 그 성스러운 외형은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깃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녹슨 시계 톱니바퀴가 얽혀 삐걱거리는 소음을 냈고, 피부 대신 검은 핏줄이 기계 부품들을 억지로 옭아매고 있었다.
"저건... 타락한 시스템의 백업 데이터야."
서지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신이 시스템의 방벽을 뚫기 위해, 이전 세계선에서 파괴했던 관리자의 잔해를 언데드처럼 되살려낸 거야."
"재활용 쓰레기라는 소리네."
나는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기계 천사가 고개를 숙여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빈 모니터 화면만이 달려 있었고, 그 안에 붉은색 에러 코드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Error 404: 허가되지 않은 존재. 삭제를 시작합니다.]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동시에 천사의 여섯 날개에서 수백 개의 붉은 깃털이 칼날처럼 쏟아져 내렸다.
"태민이 방패가 그리워지네."
나는 서지윤을 밀쳐내며 [축지]를 밟았다.
콰다다다당!
우리가 서 있던 바닥이 붉은 깃털에 벌집처럼 뚫렸다. 파편이 튀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나는 깃털의 비를 뚫고 천사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고철 덩어리는 분리수거해야지."
단전의 마력을 끌어올려 단검에 주입했다.
[스킬: 내부 파괴]
천사의 무릎 관절, 그 삐걱거리는 틈새를 향해 단검을 쑤셔 박았다.
카앙!
경쾌한 금속음. 손목이 시큰거렸다.
단검은 관절을 뚫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단단해서가 아니었다. 칼날이 닿기 직전, 천사의 표면에 반투명한 폴리곤 픽셀이 생겨나며 물리 법칙 자체를 무시해버린 것이다.
[Damage: 0]
천사의 머리 위로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이건 또 무슨 개 같은 시스템이야."
내가 혀를 차는 순간, 천사의 거대한 주먹이 내 복부를 강타했다.
퍼억!
"커헉!"
에픽 슈트의 보호막이 켜졌음에도, 내장이 뒤틀리는 충격이 전해졌다.
몸이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등 뒤의 콘크리트가 바스러졌다.
"강도현!"
서지윤이 대검을 들고 천사의 등 뒤를 노렸다.
하지만 그녀의 검격 역시 폴리곤 장벽에 막혀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Damage: 0]
"물리 타격이 안 통하잖아!"
"시스템 에러를 방어막으로 두르고 있는 거야!"
서지윤이 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내가 관리자 권한으로 저 에러를 상쇄할게! 방어막이 풀리는 순간을 노려!"
그녀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손목의 시계태엽 문신이 회전하며, 그녀의 몸에서 푸른 데이터의 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입자들이 천사의 붉은 폴리곤 장벽에 들러붙어 치열한 해킹전을 시작했다.
지지직! 삐빅!
천사의 머리에 달린 모니터가 미친 듯이 점멸했다.
[Warning: 무단 간섭 감지. 방화벽 손상.]
"지금이야! 강도현!"
서지윤이 코피를 쏟으며 외쳤다.
그녀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바닥을 차고 튀어 나갔다.
방어막이 벗겨진 천사의 가슴 한가운데.
시계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동력로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방화벽 뚫렸으면, 바이러스 먹어야지."
나는 오른손을 뒤로 뺐다.
[마력 회로 지배]를 역으로 회전시켜, 내 마력을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압축했다.
그리고 천사의 동력로를 향해 맨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앙!
동력로의 톱니바퀴들이 박살 나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기계 부품과 검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기름 냄새와 비린내가 동시에 진동했다.
[System Error... Shut down...]
천사의 모니터가 꺼지며, 거대한 몸뚱이가 쿵 하고 쓰러졌다.
나는 피 묻은 주먹을 털어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아... 해킹 솜씨 좋네, 부길드장."
"칭찬 고마워. 근데 쉴 틈이 없을 것 같네."
서지윤이 창백한 얼굴로 앞을 가리켰다.
천사가 쓰러지자, 그 뒤에 있던 거대한 고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치를 감싸고 있던 보호막이 해제된 것이다.
두근. 두근.
고치의 박동이 미친 듯이 빨라지고 있었다.
지구의 홀로그램에 꽂힌 검은 촉수들이 더욱 굵어지며 마력을 빨아들였다.
"부화가 시작됐어. 알을 부숴야 해."
내가 단검을 쥐고 고치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서지윤이 내 팔을 다급하게 낚아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안 돼! 멈춰!"
"왜. 저거 깨러 온 거잖아."
"저 고치는 지금 지구의 코어랑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있어. 저 알을 물리적으로 부수면..."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충격이 지구 코어에 그대로 전달돼. 지구가 먼저 반으로 쪼개질 거야."
내 발걸음이 멈췄다.
알을 부수면 지구가 멸망하고, 알을 놔두면 마신이 부화해 지구가 멸망한다.
지독한 외통수.
"그럼 어떡하라고. 그냥 구경만 해?"
"내가..."
서지윤이 황금빛 눈동자로 고치를 노려보았다.
"내가 관리자 권한으로 저 연결망을 강제로 끊어낼게. 탯줄을 자르는 거야."
"그게 가능해? 넌 권한의 파편만 가지고 있다며."
"내 존재 자체를 데이터로 변환해서 밀어 넣으면 돼."
그녀의 말에 내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럼 넌 어떻게 되는데."
"운이 좋으면 기억만 날아가겠지. 운이 나쁘면... 소멸하고."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내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웃기지 마. 내가 희생 같은 거 안 한다고 했지."
"강도현. 고집부릴 시간 없어. 저게 부화하면 다 끝이야."
그녀가 내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나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쩌저적.
거대한 고치의 표면에 굵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와 서지윤의 시선이 동시에 고치로 향했다.
[아아... 달콤한 냄새가 나는구나.]
고치 안에서, 심연의 밑바닥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탯줄을 끊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마신의 본체가, 마침내 눈을 뜨고 있었다.
53화: 심연의 강림
쩌어어억!
고치가 두 갈래로 찢어지며 끈적한 양수액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구의 홀로그램에 꽂혀 있던 검은 촉수들이 일제히 말라비틀어지며 끊어졌다.
부화가 완료되었다는 뜻이다.
"크윽..."
쏟아지는 마력의 해일에 서지윤이 무릎을 꿇었다.
나 역시 에픽 슈트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찢어진 고치 사이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거대한 괴물의 형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완벽한 인간 남성의 비율을 가진, 매끄러운 흑요석 같은 피부의 존재.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없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우주의 은하가 담겨 있었다.
마신(魔神).
심연의 주인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군, 아나스타샤. 그리고... 버러지.]
얼굴 없는 마신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키는 게 아니라, 뇌수에 직접 꽂혀 들어왔다. 두통이 머리를 쪼갤 듯 울렸다.
"강도현... 도망쳐. 저건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야."
서지윤이 피를 토하며 내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공포로 일렁이고 있었다.
전생에 이 세계를 멸망시켰던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의 트라우마.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도망은 무슨. 문단속 하러 왔으면 끝을 봐야지."
나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마신이 그 모습을 보고 어깨를 들썩였다. 비웃음이었다.
[가소롭구나. 네놈의 그 얄팍한 마력으로 신의 털끝이라도 건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마신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저 그 작은 동작 하나.
하지만 내 눈앞의 공간 자체가 통째로 뜯겨 나가며 나를 덮쳤다.
"큭!"
인지하기도 전에 시야가 뒤집혔다.
콰아아앙!
내 몸이 대포알처럼 날아가 둥지의 거대한 벽면에 처박혔다.
벽이 무너져 내리며 나를 덮었다.
[System Warning: 에픽 슈트 내구도 10%. 파손 임박.]
슈트의 헬멧 안에서 붉은 경고음이 울렸다.
갈비뼈가 서너 개는 부러진 것 같았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미친... 딜량 보소."
나는 돌무더기를 밀어내며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마신은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서지윤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나의 열쇠. 네가 훔쳐 간 권한을 돌려받을 시간이다.]
"오지 마...!"
서지윤이 대검을 휘둘렀지만, 마신은 손을 뻗어 그 대검을 맨손으로 잡아버렸다.
파직!
S급 대검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마신이 서지윤의 목을 틀어쥐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컥, 커헉..."
그녀의 발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손목의 문신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려 했지만, 마신의 압도적인 독기에 짓눌려 사그라들었다.
'이대로면 끝난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물리 타격, 마력 방출, 그 어떤 것도 저놈에겐 통하지 않는다.
체급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렇다면, 내 체급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수밖에.
나는 시선을 내리깔아, 내가 입고 있는 [심연의 잠수복]을 보았다.
가슴팍에 박혀 있는 붉은 코어.
재앙급 마수 바포메트의 심장. 이 슈트의 동력원.
"슈트 벗으면 독기 때문에 죽는다 쳐도."
나는 단검을 거꾸로 쥐었다.
"이거라도 먹으면, 1분은 버티겠지."
푸욱!
나는 망설임 없이 단검으로 내 가슴팍의 슈트를 찢었다.
그리고 그 안에 박혀 있던 바포메트의 심장을 맨손으로 뜯어냈다.
[System Warning: 슈트 기능 정지. 독기 노출 위험!]
슈트의 보호막이 꺼지자마자, 마계의 지독한 독기가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뜯어낸 바포메트의 심장을, 내 단전 부근의 맨살에 그대로 쑤셔 박았다.
"크아아아아악!"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생살을 찢고 들어간 재앙급 마수의 코어가, 내 원래의 마력 회로와 강제로 융합하기 시작했다.
혈관이 검게 물들고, 전신에서 핏빛 스파크가 튀었다.
인간의 몸에 마수의 코어를 이식하는 미친 짓.
[...호오?]
서지윤의 목을 조르던 마신이 고개를 돌렸다.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파장이, 순간적으로 마신의 그것과 비등할 정도로 폭증하고 있었다.
"야, 얼굴 없는 새끼야."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입꼬리만큼은 기괴하게 찢어져 있었다.
"남의 부길드장 목에서 손 떼라."
쾅!
바닥이 움푹 파이며 내 몸이 사라졌다.
[축지]가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뛰어넘는 도약.
0.1초 만에 마신의 코앞에 도달한 나는, 검은 마력이 소용돌이치는 오른주먹을 놈의 안면에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아앙-!!!
우주가 담겨 있던 마신의 얼굴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절대적인 신의 몸이, 인간의 주먹에 맞아 처음으로 뒤로 밀려났다.
54화: 관리자의 선택
"쿨럭...!"
마신의 손에서 풀려난 서지윤이 바닥에 나뒹굴며 기침을 쏟아냈다.
나는 마신을 밀쳐낸 반동으로 뒤로 착지했다.
내 오른팔은 바포메트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력으로 뒤덮여, 마치 마수의 발톱처럼 기괴하게 변이되어 있었다.
[감히... 미천한 인간 따위가 내 옥체에 흠집을 내다니.]
마신이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놈의 우주 같은 얼굴에 일었던 파문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분노.
절대자의 분노가 둥지 전체의 중력을 짓눌렀다.
[네놈부터 재로 만들어주마.]
마신이 양팔을 벌렸다.
둥지의 거대한 벽면이 허물어지며, 수만 개의 검은 구체들이 허공에 생성되었다.
구체 하나하나가 서울 시내를 날려버릴 위력을 품고 있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강도현! 피해!"
서지윤이 절규했다.
피할 곳은 없었다.
나는 바포메트의 코어가 박힌 단전을 쥐어짜며, 검은 마력을 방패 형태로 뿜어냈다.
콰다다다당!!!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시야가 온통 섬광으로 뒤덮였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계가 이미 타버린 탓이다.
폭발이 잦아들었을 때,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왼팔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겨 나갔고,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하아... 하아..."
숨을 쉴 때마다 폐에서 피가 끓어올랐다.
코어 이식의 부작용. 인간의 육신이 재앙급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하고 있었다.
1분.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 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끈질긴 생명력이구나. 하지만 결국 벌레의 발악일 뿐.]
마신이 천천히 다가왔다.
놈의 손끝에 다시 한번 거대한 마력이 응축되었다.
이번엔 막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까지인가.'
전생의 시궁창을 벗어나, 꽤 높이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신이라는 놈의 발밑에서 끝나는 건가.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누구 맘대로."
따뜻한 온기가 내 등을 감쌌다.
서지윤이었다.
그녀가 피투성이가 된 나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며, 마신의 압도적인 살기를 밀어냈다.
"야... 도망치라니까..."
내가 쉰 목소리로 말하자, 서지윤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첫 번째 세계선에서, 난 널 버리고 도망쳤어. 멸망을 막는다는 핑계로."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근데 넌, 날 한 번도 안 버렸잖아."
"그거야... 네가 내 부길드장이니까..."
"그러니까, 이번엔 나도 안 버려. 같이 싸우는 거야."
서지윤이 내 목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목에 있는 시계태엽 문신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붉은 피를 흩뿌렸다.
동시에, 그녀의 육신이 반투명한 데이터 입자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 무슨 미친 짓을 하려는 거냐!]
마신이 당황하며 손을 뻗었지만, 서지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장벽을 뚫지 못했다.
"강도현."
서지윤의 목소리가 귓가가 아닌, 내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내 남은 관리자 권한 100%. 전부 네 시스템에 덮어씌울게."
"미친 소리 마! 그럼 넌 소멸하잖아!"
내가 발버둥 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데이터 입자들이 내 혈관을 타고, 바포메트의
4화: 포식자의 자격 (수정본)
키에에에엑!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비명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위에서 쇄도했다.
자이언트 맨이터(Giant Man-eater).
몸길이만 10미터, 수백 개의 다리를 가진 지네형 몬스터.
놈의 턱은 강철도 씹어먹고, 갑각은 소총탄도 도탄 시키는 괴물이다.
F급 던전의 히든 보스치고는 제법 위협적인 스펙.
일반적인 E급 헌터라면 마주치는 순간 바지를 적시며 도망쳤을 위용이었다.
하지만.
‘느려.’
내 눈에는 놈의 움직임이 0.5배속 영상처럼 프레임 단위로 끊겨 보였다.
상체를 들어 내려찍는 궤적.
대기의 흐름이 갈라지는 소리.
수백 개의 다리가 지면을 박차는 순서까지.
모든 정보가 [마력 회로 지배]를 통해 뇌로 전송되고 있었다.
문제는 내 몸뚱이다.
‘머리는 아는데 몸이 안 따라주는군.’
반응속도가 0.5초 느리다.
전생의 S급 신체였다면 하품하며 피했을 공격이, 지금은 간발의 차로 스치는 위협이 된다.
놈의 독니가 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쾅-!
놈의 머리가 내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바닥의 암반이 박살 나며 날카로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몸을 오른쪽으로 비틀어 충격파를 흘려보냈다.
볼에 파편이 스쳐 피가 맺혔지만, 신경 쓸 틈은 없었다.
“확실히, 튼튼하긴 하네.”
먼지를 털며 중얼거렸다.
내 손에 들린 건 최상철이 쓰던 C급 장검.
나쁘지 않은 물건이지만, 놈의 갑각을 정면으로 뚫기엔 무리다.
그냥 휘두르면 이빨도 안 박히고 부러질 게 뻔했다.
방법은 하나다.
베는 게 아니라, ‘터뜨려야’ 한다.
나는 들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고쳐 쥐었다.
놈의 갑각 결을 보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틀려 있다.
이 각도라면 정수(正手)보다는 역수(逆手)가, 오른손보다는 왼손이 놈의 급소를 찌르기에 최적이다.
익숙한 감각이 손바닥에 감겼다.
키릭! 끼리릭!
첫 공격이 빗나가자 놈이 당황한 듯 턱을 비벼댔다.
자신보다 훨씬 작고 약해 보이는 먹잇감이 살아서 움직이는 게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
놈이 다시 몸을 웅크렸다.
식도에서 꿀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독액을 뿜을 기세였다.
“기회는 한 번뿐인가.”
나는 왼손에 쥔 검을 역수로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리고 체내의 마력 밸브를 아주 조금, 더 열었다.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푸른 마력이 팔을 타고 검신으로 흘러들어갔다.
우웅, 우우웅-
검이 비명을 질렀다.
C급 강철이 감당하기엔 마력의 밀도가 너무 높았다.
검신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3초.’
이 검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안에 끝내야 한다.
푸확!
놈의 입에서 녹색 독액이 산탄처럼 뿜어져 나왔다.
나는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독액 사이사이, 깻잎 한 장 차이의 틈이 보였다.
곡예를 하듯 몸을 회전시키며 사각지대를 파고들었다.
치익.
옷자락 끝이 독액에 닿아 타들어 갔지만, 살에는 닿지 않았다.
어느새 놈의 턱밑까지 접근했다.
역겨운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도약했다.
놈의 갑각 틈새, 목덜미의 아주 미세한 이음새를 향해.
왼손에 들린, 마력이 과부하 된 검을 쑤셔 박았다.
카가각!
단단한 저항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막혔겠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검끝에 응축된 마력을 한순간에 폭발시켰다.
[스킬: 내부 파괴(Internal Blast) - 모방]
전생에 알던 어느 무식한 격투가 놈의 기술을 흉내 냈다.
외부의 갑각을 부수는 게 아니라, 마력을 침투시켜 내부에서 터뜨리는 기술.
퍼어엉-!
둔탁하고 습한 폭발음이 놈의 몸통 안에서 울렸다.
단단했던 갑각이 안쪽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더니, 쩍 하고 갈라졌다.
키에... 엑?
놈의 비명이 뚝 끊겼다.
목 부분의 갑각이 산산조각 나며 놈의 거대한 머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녹색 체액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챙그랑.
내 손에 들려 있던 C급 장검도 한계에 달해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나는 손에 남은 검 자루를 바닥에 던졌다.
“역시 싸구려는 손맛이 안 좋아.”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업적 달성: 'E급으로 히든 보스를 잡은 자']
[칭호: '자이언트 킬러'를 획득했습니다.]
눈앞에 메시지 창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F급 던전의 히든 보스.
경험치 양이 쏠쏠했다.
단숨에 레벨이 5나 올랐다.
전생의 기준으로 보면 먼지 같은 수치지만, 초기 성장 구간에서는 폭발적인 효율이다.
나는 놈의 시체로 다가갔다.
박살 난 머리통 사이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보라색 구슬이 보였다.
[맨이터의 정수].
맹독성 포션을 만들거나, 무기에 독 속성을 부여할 때 쓰는 비싼 재료다.
“돈 냄새.”
망설임 없이 챙겨 넣었다.
그 외에도 갑각 조각, 독샘 등 돈이 될 만한 건 모조리 가방에 쓸어 담았다.
부러진 다리 하나까지 챙기려다가, 가방이 꽉 차서 포기했다.
“아 씨, 인벤토리 스킬 언제 배우냐. 저 다리 하나만 갈아도 국밥이 50그릇인데.”
입맛을 다시며 정산을 끝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수라장이었다.
최상철의 목 없는 시체, 반쯤 녹아내린 부하들의 시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청소는 던전이 알아서 하겠지.’
던전은 살아있는 생태계다.
이 시체들도 곧 몬스터들의 먹이가 되거나, 던전의 양분으로 흡수될 것이다.
완전범죄.
증거는 남지 않는다.
그때였다.
무너진 벽 너머, 식인 식물 군락지 구석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바스락.
아주 미세한 소리였지만, 감각이 예민해진 내 귀를 속일 순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꽃봉오리 아래, 덩굴에 가려진 틈새.
그곳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었다.
짐꾼, 김민우였다.
그는 살아 있었다.
아니, 살아남았다.
문제는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의 눈은 공포로 허옇게 뒤집혀 있었다.
김민우가 보고 있는 것은 나를 덮쳤던 괴물이 아니었다.
괴물을 찢어죽이고, 동료들의 시체 옆에서 태연하게 아이템을 챙기던 나였다.
최상철이 죽도록 방치한 나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김민우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사... 살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포식자가 누구인지.
제5화: 정산은 확실하게
“사, 살려주세요….”
거대한 꽃봉오리 아래.
김민우가 끈적한 소화액에 뒤덮인 채 헐떡이고 있었다.
식인 식물의 덩굴이 그의 발목을 옥죄고 있었지만, 다행히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에 본체가 죽어버린 덕에 목숨은 부지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안경은 깨졌고, 한쪽 신발은 벗겨졌다.
공포에 질려 초점이 풀린 눈동자.
전형적인 ‘짐 덩어리’다.
전생의 나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살려줘 봤자 짐만 되고, 비밀이 새어 나갈 구멍만 늘어날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이 던전의 보상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자이언트 맨이터의 부산물만 해도 배낭 두 개는 족히 나온다.
거기에 최상철 일당이 남긴 장비들까지.
‘나 혼자 다 들고 갈 수가 없어.’
게다가 알리바이도 필요했다.
최상철 파티가 전멸하고 나 혼자 살아나간다면?
당연히 의심을 산다. 길드나 협회 조사관들이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하지만 생존자가 한 명 더 있다면, 그리고 그가 내 입맛대로 증언해 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봐.”
내가 툭 던지듯 불렀다.
김민우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은 복잡했다.
괴물을 도륙 낸 압도적인 강자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자신도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
“살고 싶어?”
그 질문에 김민우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바닥을 기었다.
“사, 살고 싶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시키는 건 다 할게요!”
“뭐든지?”
“네! 정말 뭐든지요!”
절박함.
좋은 재료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주머니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최상철의 시체에서 루팅한 F급 하급 포션이었다.
“좋아. 거래 성립.”
나는 덩굴을 단검으로 끊어내고, 그에게 포션을 던져주었다.
김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포션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소화액에 타들어 가던 피부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나중에 하고. 일어날 수 있지?”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최상철의 대형 배낭을 그의 앞에 툭 발로 찼다.
“담아.”
“네?”
“전리품. 하나도 빠짐없이 꽉꽉 채워서 담으라고. 무거워서 못 들겠다는 소리 하면, 그 자리에 버리고 갈 거야. 너랑 같이.”
내 서늘한 경고에 김민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네 발로 기어가 미친 듯이 전리품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괴물의 다리, 독샘, 갑각 조각들.
심지어 징그러운 내장 부위까지 망설임 없이 맨손으로 집어 넣었다.
‘쓸 만하네.’
군소리 없는 일꾼.
합격이다.
김민우가 짐을 챙기는 사이, 나는 무너진 벽 너머, 자이언트 맨이터가 튀어나왔던 구멍 안쪽으로 들어갔다.
진짜 보상은 그곳에 있으니까.
안쪽은 의외로 건조했다.
거대한 둥지 중앙에, 뼈 무더기로 만들어진 제단 같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작은 상자.
‘히든 보스의 레어(Lair).’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F급 던전이라 큰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히든’은 히든이다.
뭐가 나올지 모르는 랜덤 박스.
이 맛에 헌터질을 끊지 못하는 거다.
나는 상자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별도의 잠금장치는 없었다.
뚜껑을 열자, 영롱한 보라색 빛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템을 발견했습니다!]
[반지: 탐욕의 시선 (Unique)]
- 등급: Unique
- 제한: 레벨 10 이상
- 효과: 착용 시, 몬스터나 아이템의 '숨겨진 가치'를 확률적으로 꿰뚫어 봅니다.
- 특수 능력 [감정]: 24시간마다 1회, 대상의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설명: 어느 탐욕스러운 대상인의 눈알을 가공해 만든 반지. 돈이 되는 것은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유니크 등급.
F급 던전에서 유니크가 나올 확률은 로또 1등 당첨보다 낮다.
그런데 그게 떴다.
그것도 전투 장비가 아니라,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특수 장비’가.
‘탐욕의 시선이라.’
전생에 들어본 적 있는 아이템이다.
유럽의 거상, ‘골드 핑거’가 끼고 다니던 반지.
그는 이 반지 하나로 저평가된 아이템을 헐값에 사들여 수천 배의 차익을 남겼다.
그게 내 손에 들어오다니.
‘역시 [최초의 성유물] 덕분인가.’
마력 회로를 재설계하면서 운(Luck) 스탯에도 보정이 들어간 게 분명했다.
나는 반지를 검지에 끼웠다.
반지가 손가락 굵기에 맞춰 자동으로 조여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동시에 세상이 미세하게 달라 보였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위로 희미한 숫자가 떠오르는 듯했다.
‘가격표인가?’
아직은 흐릿하지만, 숙련도가 오르면 더 정확해질 것이다.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둥지를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김민우가 자기 몸집 만한 배낭 두 개를 짊어진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였지만, 그는 내 눈치를 보며 꿋꿋이 서 있었다.
“다, 다 챙겼습니다! 도현 씨 거는 제가 다 들겠습니다!”
“그래. 가자.”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식인 식물 군락지를 지나고, 고블린 시체들이 즐비한 통로를 지났다.
던전 입구에 다다를 때쯤, 김민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도현 씨.”
“왜.”
“나가면… 뭐라고 말해야 하죠?”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김민우가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단순하게 가자.”
“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최대한 건조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최상철은 욕심 부리다 뒤졌어. 식인 꽃 군락지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서.”
“아….”
“우린 짐꾼이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살았고. 입력해.”
김민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눈치였다.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다.
거짓말은 짧고 굵을수록 진실처럼 들리는 법이다.
“마, 맞습니다! 그 사람들… 욕심이 너무 과했죠. 우린 운이 좋았고요.”
김민우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체는 남지 않았다. 자이언트 맨이터가 깨끗하게 먹어 치웠고, 남은 흔적도 식인 꽃들이 처리했을 것이다.
증거는 없다. 증인은 우리 둘뿐.
“그리고.”
나는 한 발짝 더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김민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가 안경 너머로 본 거. 어디 가서 입 뻥끗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저, 절대 말 안 합니다!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그래. 똑똑하네.”
나는 빙긋 웃었다.
“나가서 보자고. 정산은 확실하게 해줄 테니까.”
던전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우리가 나오자, 입구를 지키던 협회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달려왔다.
“어? 생존자가 있어!”
“최상철 파티원들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은요?”
쏟아지는 질문 공세.
나는 미리 맞춘 각본대로 연기했다.
공포에 질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척,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척.
김민우도 눈치껏 내 연기를 거들었다.
그는 진짜로 겁에 질려 있었기에 연기가 더 리얼했다. 메소드 연기가 따로 없었다.
“다, 다 죽었어요… 으허헝! 꽃들이… 사람을….”
협회 직원들은 혀를 찼다.
이끼 낀 폐광에서 전멸 사고라니, 흔치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조사가 진행되겠지만,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시체를 찾을 수 없는 던전 조난 사고는 대부분 ‘행방불명’으로 종결된다.
우리는 간단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나는 김민우를 데리고 곧바로 ‘헌터 마켓’으로 향했다.
공식 거래소보다는, 신분 노출이 적은 뒷골목의 암시장을 택했다.
“이거… 다 파시는 겁니까?”
김민우가 짊어진 짐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뒷골목 전당포 주인인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건들을 감정했다.
가게 안에서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호오… 상태가 꽤 좋군. 랫맨의 이빨, 고블린의 귀… 이건 뭐야? 자이언트 맨이터의 독샘? 허허, F급 던전에서 이런 게 나왔단 말이야?”
노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훑어봤다.
E급 헌터증을 목에 건 풋내기가 가져올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운 좋게 놈들끼리 싸우다 죽은 걸 주워왔습니다. 시체 팔이 좀 했죠.”
“운이 억세게 좋구먼. 뭐, 출처는 안 묻는 게 이 바닥 룰이니.”
노인은 계산기를 두드렸다.
“다 합쳐서 2억 8천. 현금 박치기로 하면 3억 맞춰주지. 어때?”
3억.
전생의 내겐 껌값이었지만, 지금의 무일푼 E급 헌터에겐 거금이다.
하지만 내 손가락에 낀 [탐욕의 시선]이 반짝였다.
노인의 계산기 위로 붉은 숫자가 아른거렸다.
[적정가: 3억 5천만 원].
‘후려치시겠다?’
나는 피식 웃으며 독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영감님, 이 독샘 색깔 좀 보세요. 보라색이 이렇게 선명한데, A급 독약 재료인 거 아시면서. 3억은 무슨, 최소 3억 5천은 받아야죠.”
노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돋보기를 고쳐 쓰고 독샘을 다시 살폈다.
“...허, 젊은 친구가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네. 꾼이야, 꾼.”
노인은 혀를 내두르며 5천만 원을 더 얹어주었다.
3억 5천만 원.
내 통장에 첫 번째 ‘총알’이 장전되는 순간이었다.
가게를 나오자 밤공기가 시원했다.
김민우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왔다.
그는 방금 벌어진 흥정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하루아침에 3억이라니. 일반 직장인이 10년을 모아도 만지기 힘든 돈이다.
“계좌 불러.”
내가 말했다.
김민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짐꾼 몫은 줘야지. 3천만 원 보낸다.”
“사, 삼천이요? 그렇게나 많이요?”
그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목숨 구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돈까지 받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받아둬. 입막음 비용 포함이니까.”
“아….”
“그리고 앞으로도 내 연락 잘 받아라. 종종 부를 테니까.”
송금 버튼을 누르자, 김민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입금 알림을 확인한 그의 눈이 흔들렸다.
공포와 경외심, 그리고 ‘돈’이라는 확실한 보상.
이 세 가지가 섞이자, 그의 눈빛이 변했다.
단순한 생존 본능이 아니라, ‘충성심’이라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형님! 아니, 도현 씨! 앞으로 개처럼 일하겠습니다!”
“형님은 무슨. 그냥 도현 씨라고 해.”
나는 그를 돌려보냈다.
녀석은 아마 오늘 밤 잠을 못 잘 것이다.
죽다 살아난 공포와, 통장에 찍힌 거액의 숫자 사이에서.
그게 헌터의 삶이다.
빨리 적응하는 게 좋을 거다.
나처럼.
혼자가 된 나는 근처 PC방으로 들어갔다.
지하 특유의 눅눅한 공기와 컵라면 냄새가 훅 끼쳤다.
구석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키보드는 누가 콜라를 쏟았는지 'Enter' 키가 끈적했다.
‘이런 곳에서 300억짜리 베팅을 하게 될 줄이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식 거래 사이트와 부동산 포털을 동시에 띄웠다.
통장에 꽂힌 3억 2천만 원(기존 잔고 포함).
일반인이라면 평생을 모아 집 한 채 살까 말까 한 돈이지만, 헌터 판에서는 장비 하나 제대로 맞추기 힘든 푼돈이다.
이걸 불쏘시개 삼아 판을 키워야 한다.
‘배고프네. 라면이나 하나 시킬까.’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던전에서 구르느라 에너지를 너무 썼다.
나는 습관적으로 먹거리를 주문하려다 마우스를 멈췄다.
지금은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타이밍.
그게 돈보다 중요하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2024년 5월.
성수동 게이트가 열린 직후.
정부의 대응, 대기업의 움직임.
그리고 아직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다음 게이트’의 위치.
내 시선이 지도 앱의 한 곳에 멈췄다.
[인천 송도 8공구 미개발지]
지금은 허허벌판인 간척지다.
갈대숲만 무성하고, 밤이면 들개들이나 돌아다니는 버려진 땅.
유령 도시라는 오명을 쓰고 똥값이 된 곳이다.
부동산 커뮤니티에서는 ‘절대 사면 안 되는 땅’ 1위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정확히 일주일 뒤.
저곳 앞바다에서 S급 해저 게이트가 열린다.
그날이 오면, 이 버려진 땅은 대한민국 헌터들의 전초기지가 된다.
길드 본부, 훈련소, 장비 거래소, 위락 시설까지.
모든 인프라가 저 진흙탕 위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평당 가격이 100배? 아니, 부르는 게 값이 된다.
‘이건 못 참지.’
나는 매수 주문 창을 열었다.
손가락이 가볍게 떨렸다.
두려워서가 아니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너무 뻔히 보여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는 거다.
레버리지까지 최대한 당겼다.
이른바 ‘영끌’이었다.
“올인.”
클릭.
경쾌한 마우스 클릭 소리가 PC방의 소음 속에 묻혔다.
매수 체결 알림이 떴다.
3억 2천만 원이 순식간에 진흙탕 속의 땅 문서로 바뀌었다.
일주일 뒤면, 이 돈은 300억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기지개를 켰다.
우두둑.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피로가 몰려왔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힘, 돈, 그리고 충성스러운 부하까지.
회귀 하루 만에 이뤄낸 성과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이제 좀 쉬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PC방을 나서려는데, 뉴스 속보가 모니터 한쪽을 채웠다.
[속보] 성수동 게이트 현장, 미확인 마력 파장 감지… 협회 "S급 헌터 투입 고려 중"]
내 발걸음이 멈췄다.
미확인 마력 파장?
내가 낸 흔적은 이미 지웠을 텐데?
화면 속, 통제된 게이트 앞을 서성이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긴 생머리에 날카로운 분위기.
협회 재킷을 입고 있지만, 소속 마크가 없었다.
‘누구지?’
전생의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 눈빛.
마치 화면 너머의 나를 꿰뚫어 보는 듯 차갑고 집요했다.
순간,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본능적인 위기감이었다.
손가락에 낀 [탐욕의 시선] 반지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변수인가.”
내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예상대로, 모든 게 내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게임의 난이도가 조금 올라갔다.
하지만 상관없다.
변수조차 계산에 넣고 밟아버리는 게, 진짜 천재니까.
4화: 포식자의 자격
키에에엑!
고막을 찢는 비명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쇄도했다.
자이언트 맨이터.
몸길이 10미터, 수백 개의 다리를 가진 지네형 몬스터.
놈의 턱은 강철도 씹어먹을 만큼 강력하고, 갑각은 소총탄도 튕겨낸다.
F급 던전의 히든 보스치고는 제법 위협적인 스펙이다.
일반적인 E급 헌터라면, 마주치는 순간 오줌을 지리며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느려.’
내 눈에는 놈의 움직임이 프레임 단위로 끊겨 보였다.
놈이 상체를 들어 내려찍는 궤적.
대기의 흐름이 갈라지는 소리.
수백 개의 다리가 지면을 박차는 순서까지.
모든 정보가 [마력 회로 지배]를 통해 뇌로 전송되고 있었다.
문제는 내 몸뚱이다.
‘젠장, 머리는 아는데 몸이 안 따라주는군.’
반응속도가 0.5초 느리다.
전생의 S급 신체였다면 하품하며 피했을 공격이, 지금은 간발의 차로 스치는 위협이 된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아직 마력을 감당하기엔 혈관도, 근섬유도 너무나 연약했다.
쾅-!
놈의 머리가 내가 서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바닥의 암반이 박살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몸을 오른쪽으로 비틀어 충격파를 흘려보냈다.
돌조각 하나가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피가 맺혔다.
“확실히, 튼튼하긴 하네.”
먼지를 털며 중얼거렸다
9화: 이자는 비싸게 받는다
“커헉!”
사채업자 대장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울컥 쏟아졌다.
이미 양쪽 무릎은 기괴한 각도로 꺾여 박살 난 상태.
놈은 바닥을 기어서라도 도망치고 싶었겠지만, 압도적인 공포에 질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사장님.”
나는 피 묻은 쇠파이프 끝으로 놈의 어깨를 툭툭 쳤다.
“빌려줄 땐 좋았잖아. 5억. 그 돈 굴리면서 아주 재밌었지?”
“사, 살려… 끄륵….”
“어쩌냐. 내 이자 계산법은 너희랑 좀 다른데.”
파이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난 원금은 안 받아. 이자만 받지. 대신, 이율이 좀 많이 세다.”
빠악!
살 벌어지는 소리와 뼈 깨지는 소리가 동시에 골목을 울렸다.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눈을 까뒤집으며 경련할 뿐. 멀쩡하던 오른팔이 넝마처럼
9화: 이자는 비싸게 받는다
“커헉!”
사채업자 대장이 피 섞인 거품을 토해냈다.
이미 무릎은 인체의 가동 범위를 벗어나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는 건 고통이 너무 커서가 아니었다. 내가 뿜어내는 위압감이 놈의 성대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봐, 사장님.”
나는 쇠파이프 끝으로 놈의 어깨를 툭툭 쳤다. 리듬감
9화: 이자는 비싸게 받는다
“커헉!”
사채업자 대장이 피 섞인 거품을 물었다.
그의 무릎은 이미 반대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려 해도, 내 살기에 눌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봐, 사장님.”
나는 쇠파이프를 그의 어깨에 툭툭 쳤다.
“돈 빌려줄 땐 좋았지? 5억이나 되는 돈을 이자 놀이로 불리면서 희희낙락했을 거고.”
“사, 살려… 으극….”
“근데 어쩌냐. 내 방식은 네 방식보다 좀 더 악질이거든.”
나는 쇠파이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난 원금 회수 안 해. 이자만 받지. 대신 그 이자가 좀 세.”
퍼억!
둔탁한 타격음이 골목길에 울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대장의 오른쪽 팔이 기괴하게 비틀렸다.
옆에서 떨고 있던 부하 두 놈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눈에 나는 빚 갚아주러 온 천사가 아니라,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로 보일 것이다.
“도, 도망쳐!”
한 놈이 용기를 내어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어딜.”
내가 바닥에 있던 돌멩이를 툭 찼다.
[마력 회로 지배]를 통해 강화된 각력.
돌멩이는 총알처럼 날아가 도망치는 놈의 오금을 정확히 타격했다.
퍽!
“아악!”
놈이 고꾸라졌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나머지 한 놈의 멱살을 잡았다.
“전해라.”
놈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박태민은 이제 내 소유다. 다시는 그 더러운 주둥이에 이 이름을 올리지 마라. 그림자라도 밟는 날엔, 그땐 팔다리 부러지는 걸로 안 끝난다.”
“아, 알겠습니다! 저, 절대! 다시는 얼씬도 안 하겠습니다!”
놈은 바지가 축축해질 정도로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대장 놈의 주머니를 뒤져 차용증 원본과 박태민의 신분증을 꺼냈다.
그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활활.
종이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박태민을 옥죄던 5억의 족쇄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가자.”
나는 쇠파이프를 던져버리고 뒤를 돌았다.
박태민은 멍하니 불타는 차용증을 바라보다가, 허둥지둥 내 뒤를 따랐다.
그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공포와 힘에 대한 경외.
그것은 짐승이 우두머리를 따를 때 보이는 본능적인 복종이었다.
우리는 근처 여관으로 향했다.
피투성이가 된 박태민을 씻기고, 근처 시장에서 산 새 옷을 입혔다.
멀끔해진 그는 제법 헌터다운 풍채가 났다.
190cm가 넘는 거구에 바위 같은 근육.
전생에 ‘철의 요새’라 불렸던 S급 탱커의 자질이 보였다.
“도, 도현 씨. 아니, 형님.”
국밥집에 마주 앉은 박태민이 숟가락을 들지도 못한 채 물었다.
“정말 제가 필요해서 5억을 쓰신 겁니까? 전 각성도 못한 일반인인데….”
“각성은 시키면 돼.”
나는 깍두기를 씹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형님 소리 좀 하지 마. 징그러우니까.”
“그럼… 대표님?”
“그게 낫네.”
나는 가방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내 밀어주었다.
최상철 파티가 죽은 폐광 던전에서 챙겨온 전리품 중 하나였다.
[각성의 돌(하급)].
“먹어.”
“이게 뭡니까?”
“네 인생 바꿔줄 사탕.”
박태민은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독약을 줬어도 마셨을 눈치였다.
그가 돌을 삼키자, 곧바로 몸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우웅-!
식당 안의 집기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일반적인 각성 반응보다 훨씬 강렬했다.
역시 전생의 S급 탱커답다.
[박태민 님이 각성했습니다.]
[클래스: 쉴드 마스터(A)로 전직합니다.]
“어… 어어?”
박태민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당황했다.
몸 위로 투명한 막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가 사라졌다.
[절대 영역].
그의 고유 스킬이었다.
“축하해. 이제 넌 헌터다.”
“제가… 헌터요?”
“그래. 그것도 아주 튼튼한.”
나는 국물까지 싹 비우고 일어났다.
“동생한테 가봐. 병원비랑 생활비는 통장에 넣어뒀으니까 걱정 말고.”
“대, 대표님….”
“내일 아침 9시까지 청계천으로 와라. 장비 맞춰야 하니까.”
박태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이 은혜 평생 갚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손을 흔들며 식당을 나왔다.
이걸로 방패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창’이다.
다음 날.
청계천 [불꽃의 모루].
아니, 이제 간판이 바뀌어 있었다.
[유진 공방].
내가 태성 길드로부터 가게를 인수하자마자 간판부터 바꿔버렸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매캐한 열기와 함께 쇠망치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려왔다.
깡, 깡, 깡!
어제까지만 해도 주눅 들어 있던 꼬마 유진은 없었다.
작업대 앞에 선 유진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붉게 달궈진 강철이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펴졌다.
“왔어요?”
유진이 땀을 닦으며 나를 쳐다봤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졌다.
밤을 꼴딱 새운 모양이다.
“다 됐냐?”
“네. 아저씨가 가져온 재료들이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유진이 작업대 위에 놓인 검을 가리켰다.
검은색 가죽집에 싸인 단검.
하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집어 들었다.
묵직했다.
스르릉.
검을 뽑자, 검붉은 날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칼날 표면에 미세한 핏빛 무늬가 혈관처럼 얽혀 있었다.
[아이템: 포식자의 송곳니 (Unique)]
- 제작자: 유진
- 등급: Unique
- 공격력: 450
- 특수 효과 1 [흡혈]: 적에게 입힌 피해의 10%만큼 사용자의 마력을 회복합니다.
- 특수 효과 2 [맹독]: 자이언트 맨이터의 독이 칼날에 깃들어 있습니다. 스치면 마비됩니다.
- 설명: 천재 대장장이가 히든 보스의 부산물을 갈아 넣어 만든 첫 번째 걸작. 살아있는 것처럼 주인의 마력에 반응한다.
“미쳤군.”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유니크 등급.
그것도 그냥 유니크가 아니라, 옵션이 사기에 가깝다.
흡혈 옵션은 S급 아이템에서도 보기 힘든 기능이다.
이걸 고작 열 살짜리 꼬마가, 하루 만에 만들었다고?
‘역시 전생의 대장장이 신(神) 답다.’
유진이 내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지갑에서 5만 원짜리 지폐 뭉치를 꺼내 유진의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용돈이다.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어.”
“와! 감사합니다!”
유진이 아이처럼 웃었다.
그때였다.
가게 문이 열리며 박태민이 들어왔다.
어제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동생의 병원비 문제가 해결되니 안색부터 달랐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왔냐. 이거 받아.”
나는 진열장에 있던 대형 타워 쉴드(B급)를 그에게 던져주었다.
어제 가게를 인수하면서 태성 길드 놈들이 두고 간 재고였다.
“이, 이걸 저한테…?”
“네가 살아야 나도 사니까. 껴봐.”
박태민이 방패를 들자, 마치 원래 제 몸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든든했다.
유니크 단검에 A급 탱커.
이 정도면 기본적인 준비는 끝났다.
“가자.”
“어디로 가십니까?”
“돈 쓰러.”
300억.
아직 쓸 곳이 많았다.
경매장에 들러서 스킬북을 쓸어 담고, 길드 설립을 위한 부지를 알아봐야 했다.
우리는 가게를 나섰다.
하지만 골목을 빠져나오기도 전이었다.
[탐욕의 시선] 반지가 미친 듯이 진동했다.
징- 징- 징-!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손가락이 타들어 갈 듯한 경고.
살기(殺氣)였다.
“멈춰.”
내가 나직하게 말했다.
박태민이 즉각 반응해 방패를 들고 내 앞을 막아섰다.
“대표님?”
“조용히 해. 손님이 왔으니까.”
나는 골목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대낮인데도 유독 짙은 어둠이 깔린 곳.
그곳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검은 슈트에 중절모.
손에는 은색 007가방을 든 신사.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그의 슈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겨울 정도로 짙은 피비린내가.
“강도현 씨 되십니까?”
신사가 정중하게 물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누구시죠?”
“천랑 길드 박동훈 팀장의 심부름꾼입니다. 땅값 협상이 좀 아쉬우셨던 모양이라.”
그가 가방을 툭 떨어뜨렸다.
가방이 열리며, 그 안에서 시커먼 단검들이 쏟아져 나왔다.
“재협상을 하러 왔습니다. 당신 목숨값으로.”
놈이 웃었다.
전생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림자 칼날’ 김철수.
천랑 길드가 키우는 A급 암살자.
협상 결렬된 상대방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해결사.
‘10화 만에 A급이라.’
난이도 조절이 좀 빡세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침 새 무기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으니까.
“태민아.”
“네, 대표님!”
“막기만 해. 찌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나는 [포식자의 송곳니]를 역수로 쥐었다.
푸른 마력이 검신을 타고 흘렀다.
“협상은 끝났어. 이제부턴 전쟁이다.”
10화: 그림자 속의 칼날
팟!
신호도 없이 놈이 사라졌다.
아니,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은신(Stealth).
암살자 클래스의 기본이자 가장 까다로운 스킬.
“태민아, 3시 방향!”
내가 소리치자마자 박태민이 반사적으로 방패를 틀었다.
캉!
허공에서 튀어나온 단검이 방패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박태민의 덩치가 뒤로 밀릴 만큼 묵직한 일격이었다.
“크윽! 빠릅니다!”
“버텨. 놈은 한 방만 노린다.”
김철수.
전생의 랭킹 50위권 안에 들던 실력자다.
그림자 이동과 독 단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히트 앤 런 스타일.
아직 성장하지 못한 박태민에게는 버거운 상대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내가 있다.
‘보여.’
[마력 회로 지배]가 공간의 마력 파동을 읽어냈다.
그림자 속에 숨어 이동하는 놈의 궤적이, 물결치듯 선명하게 보였다.
놈은 다시 은신해 박태민의 등 뒤를 노리고 있었다.
“숙여!”
내 외침에 박태민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그 위로 내 단검이 빗발쳤다.
채앵!
허공에서 놈의 단검과 내 [포식자의 송곳니]가 맞부딪쳤다.
은신이 풀리며 김철수의 놀란 눈이 드러났다.
“호오? 감이 좋군. E급이라더니.”
“감 아니라 실력인데.”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칼날이 맞닿을 때마다 붉은 스파크가 튀었다.
힘에서는 내가 밀렸다.
놈은 A급, 나는 아직 스탯상으로는 E급 수준이다.
정면 승부라면 1분도 못 버티고 팔이 부러질 것이다.
하지만 내겐 놈이 모르는 무기가 있었다.
‘맹독.’
깡! 카앙!
검격이 오갈 때마다, 아주 미세한 독기운이 놈의 호흡기로 스며들고 있었다.
자이언트 맨이터의 독.
피부에 닿지 않아도,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신경을 마비시키는 맹독이다.
유진이 만든 이 검은, 그 독을 기체 형태로 뿜어내는 기능이 있었다.
“헉… 허억….”
김철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된 것이다.
“뭐, 뭐야… 몸이 왜….”
놈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독 내성 스킬을 가지고 있겠지만, 히든 보스의 독은 격이 다르다.
“이제야 눈치챘나?”
나는 검을 고쳐 잡았다.
이제 사냥꾼과 사냥감이 바뀔 차례다.
“태민아, 퇴로 막아.”
“알겠습니다!”
박태민이 쿵, 하고 방패를 내려찍으며 골목 입구를 차단했다.
[절대 영역] 발동.
보이지 않는 벽이 형성되어 놈을 가두었다.
“이… 쥐새끼들이!”
김철수가 악에 받쳐 가방을 던졌다.
가방이 폭발하며 연막이 피어올랐다.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놈이 벽을 타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스킬: 마력 역류]
내가 미리 깔아두었던 마력이, 놈의 그림자 속에서 폭발했다.
콰앙!
“크아악!”
벽을 타던 놈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리가 꺾인 채 놈이 꿈틀거렸다.
나는 천천히 연기 속을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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