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10: TTS 대본
Writer · 버전 1 · 초안
산출물 (v1)
삐, 삐, 삐.
기계적인 시계 초침 소리만 제 방을 채웁니다.
고독사를 기다리는, 일흔여덟 노인의 방이죠.
둥, 둥, 둥.
갑자기 거친 전쟁북 소리가 귓가를 때립니다.
눈을 뜨니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어젯밤엔 병사를 걱정했는데, 오늘 아침엔 전사를 걱정하게 생겼습니다.
코를 찌르던 파스 냄새 대신, 비릿한 쇠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어옵니다.
바닥에 고인 빗물에 얼굴을 비춰봤습니다.
쭈글쭈글한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웬 건장한 육십 대 사내가 저를 노려보고 있더군요.
하지만 오른쪽 무릎을 문지르는 그 버릇만큼은, 영락없는 저 김영수였습니다.
기억이 났습니다.
병원비 아껴가며 읽던 소설책.
그 속에 나오던 단역 촌장, 한스가 바로 접니다.
문제는 시점입니다.
책대로라면, 이 평화로운 마을은 정확히 세 시간 뒤 지도에서 지워집니다.
마물들의 기습.
모두 죽는 결말이죠.
현실에선 고독사, 꿈속에선 전사라니.
운명 참 고약합니다.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꿈인데, 아플 필요는 없으니까요.
덥석.
누군가 제 바짓가랑이를 잡았습니다.
코를 훌쩍이는 다섯 살배기 꼬마였습니다.
촌장님, 우리 다 죽는규?
그 눈망울을 보자, 발이 떨어지질 않더군요.
현실의 김영수는 아무도 찾지 않는 뒷방 늙은이였지만, 이곳의 촌장은, 이 아이들의 유일한 보호자였으니까요.
저는 지팡이를 들어 단상을 내리쳤습니다.
쿵, 쿵.
광장이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제 입술에 꽂혔습니다.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습니다.
책을 읽어서 아는데, 도망가야 해.
이런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래서, 첫 번째 거짓말을 했습니다.
들으시오. 어젯밤, 신께서 내게 계시를 내리셨슈.
사람들이 술렁거렸습니다.
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놈들은 북쪽 계곡으로 온다. 그짝에 구덩이를 파야 우리가 사는겨.
네, 소설에 나온 내용 그대로였습니다.
마을이 바빠졌습니다.
저는 지팡이 대신 삽을 들었습니다.
평생 공사판을 전전하며 반장 소리 듣던 실력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 벽돌 그렇게 쌓으면 무너져. 엇갈려서 쌓으란 말이여.
김 씨. 아니, 자네. 그쪽 땅은 물러서 안 돼. 더 깊게 파야지.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소설에서는 분명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제 머리 위로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습니다.
후두둑.
빗방울까지 떨어지더군요.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날씨 정도야 틀릴 수 있지, 하고요.
약속된 시간이 되었습니다.
땅이 울리고, 숲에서 붉은 눈들이 튀어나왔습니다.
괴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놈들은 우리가 파놓은 구덩이로 정확히 굴러떨어졌습니다.
지금이여. 쏴라.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습니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전장을 갈랐습니다.
왕국에서 파견된 기사단, 그리고 그 선두에 선 남자.
소설의 진짜 주인공, 기사단장 카엘이었습니다.
금발을 휘날리며 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은, 말 그대로 그림이더군요.
전투가 끝났습니다.
우리의 승리였습니다.
카엘이 제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습니다.
촌장님의 혜안 덕분에 피해를 줄였습니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땀 냄새가 훅 끼쳐왔습니다.
젊음의 냄새였습니다.
꼿꼿한 허리, 상처 하나 없는 피부, 그리고 저 자신감.
제가 오십 년 전에 잃어버린 모든 것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질투가 나더군요.
동시에, 대견했습니다.
마을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선지자라 부르며 헹가래를 쳤습니다.
술잔이 돌고,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었습니다.
완벽했습니다.
책에 나온 비극을, 제 손으로 막아낸 겁니다.
이제 됐다. 이대로 꿈에서 깨도 여한이 없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카엘에게 슬쩍 물어봤습니다.
원작의 여주인공, 엘라라의 안부를요.
둘은 소설 끝에서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으니까요.
그런데 카엘의 표정이 묘했습니다.
엘라라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만.
싸늘한 바람이 스칩니다.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처음 듣는다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순간, 아까 봤던 먹구름이 떠올랐습니다.
책과 다른 날씨.
그리고 책에는 없던, 저의 개입.
제가 끼어드는 바람에 인연이 꼬인 건 아닐까요?
제 생존이, 누군가의 존재를 지워버린 거라면요?
쨍그랑.
죄책감이 가슴을 찌르는 순간, 누군가의 손에서 술잔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땅이 울렸습니다.
쿠구구구.
멀리서 들리는 진동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발밑, 광장 바닥이 비명처럼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습니다.
지진이라니요.
갈라진 틈새로 시커먼 것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집채만한 크기, 온몸이 바위처럼 단단한 갑피로 뒤덮인 놈.
두더지를 닮은 변종 괴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축제를 찢어놓았습니다.
누군가 제 옷자락을 잡고 소리쳤습니다.
촌장님. 신의 계시는요? 이건 말씀 안 하셨잖아요.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죠. 책에 안 적혀 있었으니까요.
준비했던 두 번째 거짓말은, 목구멍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제 예언의 유통기한은, 여기까지였습니다.
팅.
카엘의 검이 튕겨 나갔습니다.
괴물의 가죽은 바위보다 단단했습니다.
철푸덕.
왕국의 영웅이라던 그 젊은이가, 흙바닥에 처박혔습니다.
피해. 다들 도망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습니다.
저는 주저앉았습니다.
무릎이 덜덜 떨려 일어날 수가 없더군요.
책에는 없는 괴물.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다시 현실의 낡은 방구석 노인네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그래, 나 같은 게 무슨 영웅이라고.
그때였습니다.
번쩍.
괴물이 몸을 비틀 때, 놈의 배 쪽 갑피 사이로 희미한 틈이 보였습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합니다.
순간, 제 머릿속에서 삼십 년 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하 터널 공사 현장.
다이너마이트도 안 먹히던 그 지독한 암반의 결.
아.
저건 생물이 아닙니다.
그냥, 잘못 시공된 구조물일 뿐입니다.
칼 버려. 기사 양반, 거기 쇠지렛대 가져와.
제 목소리가 광장을 찢어놓았습니다.
카엘이 멍한 눈으로 저를 쳐다봤습니다.
뭐 하시오. 놈의 배꼽 아래, 저 틈새를 쑤셔 박으란 말이여.
저는 더 이상 점잖은 촌장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거친 현장에서 굴러먹던, 반장 김영수였습니다.
카엘이 쇠지렛대를 들고 달려들었습니다.
지금이야. 눌러.
지렛대의 원리.
힘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틈새를 벌려 중심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우지끈.
괴물의 비명이 터졌습니다.
단단하던 갑피가 쩍 하고 갈라졌습니다.
밀어. 다 같이 밀어.
마을 청년들이 달려와 밧줄을 당겼습니다.
쿵.
산 같은 덩치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졌습니다.
끝났습니다.
흙투성이가 된 채,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카엘이 비틀거리며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신의 계시였습니까? 쇠지렛대를 쓰라는 것도요?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제는 말해야 했습니다.
마지막 거짓말 대신, 진실을요.
아니오. 신탁은 없었소. 다 내 경험이었소. 그냥, 당신들을 살리고 싶었던 늙은이의 잔머리였소.
거짓말쟁이라고 욕해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고개를 숙였습니다.
덥석.
따뜻하고 거친 손이 제 손을 잡았습니다.
카엘이었습니다.
신이든 잔머리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우릴 구했다는 게 중요하죠.
그가 흙 묻은 제 손을 이마에 갖다 댔습니다.
나의 스승님.
목구멍이 뜨거워졌습니다.
거짓이 아닌, 제 진짜 모습으로 인정받은 건 난생처음이었으니까요.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스르르.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습니다.
다시 빗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짹짹.
참새 소리가 들리더군요.
눈을 떴습니다.
익숙한 천장. 누렇게 뜬 벽지.
서울 변두리의 제 낡은 방이었습니다.
비는 그쳤고, 창틈으로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허무하더군요.
그 생생한 전투가, 그 뜨거운 악수가, 다 꿈이었다니.
다시 혼자라니.
그런데, 손안에 묵직한 이물감이 느껴졌습니다.
이불을 들췄습니다.
째각, 째각, 째각.
제 심장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촌장의 조끼 주머니에 있던, 그 회중시계였습니다.
현실의 고장 난 시계가 아니었습니다.
유리알에 금이 가고, 진흙이 잔뜩 묻은 채 힘차게 돌아가고 있는 시계였습니다.
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촌장 김영수였고, 영웅이었습니다.
드르륵.
창문을 열었습니다.
들어오는 아침 공기가 어찌나 달던지요.
옆집 박 씨 영감이 문을 두드립니다.
어이 김 씨, 살아있어?
저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살아있지. 아주 팔팔하게.
늙음은 낡아빠진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였습니다.
평생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제 굳은살이, 누군가를 구하는 무기가 된 겁니다.
오늘 밤, 저는 다시 그 세계로 갈 겁니다.
이제는 책을 읽으러 가는 게 아니라, 다음 이야기를 쓰러 가는 겁니다.
때로는 가장 평범한 사람의 기억이, 가장 강력한 마법이 됩니다.
여러분의 서랍 속에도, 먼지 쌓인 회중시계가 하나쯤 있지 않으신가요?
다시 태엽을 감아보세요. 아직 우리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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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에는, 이 촌장이 왕국을 뒤흔들게 된 사연을 들고 오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텝 재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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